북벌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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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北伐論
조선시대 효종 연간과 숙종 초년의 청나라를 치기 위한 일련의 논의.
2. 등장 배경[편집]
중화사상과 소중화에 입각하여 문화수준이 낮은 만주족 오랑캐(청나라)에게 당한 병자호란, 삼전도의 굴욕 등의 수치를 씻고, 임진왜란 당시의 조선을 도와준 명나라에 대한 의리를 지키고 중화사상 정통 후계자인 조선이 명나라를 대신하여 복수하자는 주장이다.
배경은 임진왜란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럭저럭 선조는 세간의 인식과 달리 동인과 서인의 사이를 조율하며 일본의 전쟁 준비를 하긴 했으나(이는 실록에서도 꽤 보인다.) 수천에서 2만명이 될 것이라며 왜구 수준으로 오판을 하는 바람에 예상을 훨씬 뛰어넘은 규모와 상층부만 알고 있던 조총을 2할 정도 장착한 일본군에게 개전 초 일방적으로 몰린 조선은 몽진을 통해 평양을 거쳐 의주까지 피난오면서 명나라에게 다급히 SOS를 쳤다. 이에 명나라는 '전쟁 벌어진거 우리 영토가 아니라 조선의 영토에서 치르는게 더 이득이다.'며 원군을 보냈고 명나라 군대의 지원을 업고 평양성을 탈환한 이후 반격의 실마리를 만들었다. 전쟁 기간에 명나라는 연인원 20만 이상을 병력으로, 은화 900만 냥 이상을 군사비로 지출하여 조선을 지원하였는데, 당연히 임진왜란 이후 명나라가 조선에 끼치는 정치적 입김은 더욱 강해졌고 조선에서는 명나라의 재조지은(再造之恩)[1] 을 강조했다. 선조의 뒤를 이은 광해군은 외교적으로는 명나라와 신흥강국인 누르하치의 후금 사이에서 비교적 유연한 정책으로 또 다른 전쟁을 피하는 데 애써왔지만 서인들의 눈에는 명나라의 은혜를 저버리는 행위로 인식하며 좋게 보지 않았다.
서인 세력은 폐모살제의 죄와 칭제 문제를 명분으로 삼아 인조반정을 일으켜 집권 세력으로 거듭났다. 이들도 정권을 잡자마자 집권을 단단히 만들기 전에 싸움을 벌여봤자 이득이 없어서 기미책을 통해 후금과 현상을 유지하는 정책을 취하였으나, 1636년 후금이 영토를 점차 확장하며 명나라를 압도하는 대국이 되자 칭제건원하고 조선에 대해 명나라와의 국교 단절과 신속을 요구하자 이를 거부하고 결국은 병자호란을 맞게 되었다. 국왕이 후금의 칸에게 항복의 예를 행하고, 삼전도 굴욕 이전에는 절대로 함락되지 않으리라 여기던 강화도도 함락되어 소현세자, 봉림대군 등이 볼모로 끌려간 상황은 조선 조야에 충격과 파문을 몰고 왔다.
북벌은 이러한 배경에서 인조의 뒤를 이어 즉위한 봉림대군(효종)에 의해 계획되었다. 그는 장차의 복수설치(復讐雪恥)를 위한 군비 강화를 추진하여 훈련도감의 군액을 증대시키고 어영군과 금군을 정비 개편하였으며, 호란으로 피해를 입었던 성들을 증축해 요새화와 동시에 기마병의 확보에 주력하였다. 지방군으로 전체 병력의 다수를 차지하는 속오군 역시 증강되고 훈련이 강화되었다. 군비 강화에 필요한 재원을 확보하기 위해 양반에게도 군포를 거두려 하였고, 노비 추쇄를 엄격히 하였다. 또 친청파인 김자점 등을 제거하고 송시열, 송준길, 김집, 이완 등을 등용하여 북벌의 이념적 지주로 삼았다.
참고로 이 과정에서 김자점은 역관과 내통해 북벌 준비에 관한 일, 인조의 묘비에 명나라 연호를 사용한 일 등을 청나라에 모조리 일러바친다. 영의정 이경석의 활약 덕분에 위기 모면.[2] 효종은 지금 전쟁은 무리니까 북벌 준비는 일본의 침입에 대비한 것이라고 변명했다. 청나라가 어지간히 무섭긴 무서웠던지 성을 수리하고 군사를 훈련하게 허락해 달라고 보낸 주문을 보면,
이제 준동하는 왜인의 동태가 정말 우려스러운데, 혹시 위급한 일을 당하면 어찌할 계책이 없으니 오직 대국에 호소하여 구원해 주기를 바라는 길뿐입니다. 다만 생각건대 동래와 서울과의 거리는 10일도 채 안 걸리는 길이고, 서울에서 황경(皇京)과의 거리는 까마득히 머니, 소방에서 사신을 선발하여 보내 호소하고 대국에서 군대를 조발하는 동안에, 어떤 성지와 어떤 군대로 구원병이 올 때까지 기다리겠습니까.
왜란을 연달아 겪은 조선 입장에선 아주 근거 없는 부탁은 아니었고 과거 명나라가 왜란에 막대한 지원을 해주다가 멸망의 요인 중 하나가 된 것을 알고있던 청나라는 조선이 알아서 막아주겠다고 하니 동태를 살피며 묵인하였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북벌론을 통해 양성된 군대 어영청이 청나라의 요청으로 나선정벌에 참여[3] 했는데, 당시 조선에서 양성한 조총 부대에 의해 청은 러시아를 격퇴하는 데 큰 도움을 얻었다(...)고 한다.[4]
3. 논의 및 분석[편집]
3.1. 북벌 허구론[편집]
효종이 과연 실제로 청나라를 치기 위해 북벌론을 계획한 것인가 하는 부분은 오늘날 별로 지지를 얻지 못하며, 현대에 와서는 북벌론은 조카[5] 에게 돌아갔어야 할 왕위를 차지한 정통성이 부족한 효종이 내부 지지를 얻고, 인조대에 청의 통제를 받아 제대로 정비되지 못한 조선의 군사체계를 다시 재정비하며 자국 방위체계를 구축하는 것이 주된 목적으로 언급된다.
임진왜란, 병자호란 등을 연달아 겪은 조선은 국력에 심각한 타격을 받아 군사력이 약화되었고, 병자호란 이후 청은 각지의 성곽 복구 및 강화에 간섭하면서 조선의 방위력 재건을 통제하였다. 효종은 이런 상황 속에서 북벌을 명분으로 삼아 대동법 등과 같이 내부 제도를 개혁 및 친청파들을 숙청하며 군대를 정비하였으며, 다수의 성곽과 포대를 구축하고[6][7] 부족한 정통성을 북벌론을 통해 강화하여 지방 산림층의 지지를 받고자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송시열, 송준길로 대표되는 지방 산림층에서도 이에 호응하여 조정에 입사하였다. 병자호란 이후 지방 산림층에서는 인조 정권을 '오랑캐에 굴복한 조정'으로 여기고 입사하지 않으려 하는 풍조가 있었고, 이 때문에 인조는 인재난에 시달리기도 하였다. 그러나 청이 입관에 성공하면서 이런 풍조가 시대에 뒤떨어진 것이라는 사실이 입증되었고, 인조 말년쯤 되면 이들은 조정에 나올 만한 명분이 있으면 나올 수 있다는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효종이 내세운 북벌론은 이런 명분을 제공했다. 이후로 조정에서는 종종 북벌에 대한 논의가 나오게 된다. 다만 이런 북벌론을 이용한 군사력 증강은 산림의 지지는 얻었을 지언정 실무 관료층 및 현실정치에 이미 오랫동안 있었던 대신들의 지지는 얻지 못한 듯하다. 특히 이들의 중심 인물인 김육은 대표적인 북벌반대론자로, 이 점에서 효종과 종종 충돌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육은 죽을 때까지 계속 효종에게 신임받고 중용되었는데, 이는 효종의 북벌론이 실질적인 북벌 계획과는 거리가 있음을 나타내는 한 증거로 꼽힌다.
기축봉사를 예로 들어 '서인들은 말만 앞섰고 효종은 약간이라도 군비를 증강시켰다!'는 주장을 그대로 정설로 하기엔 힘든 것이, 송시열이 오히려 이 북벌의 명분 때문에 효종에게 끌려다녔다는 해석도 있다. 현실적으로 청나라와의 국력 격차는 엄연한 사실이고 북벌의 가능성이 높지 않음을 송시열도 알고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직접적으로 북벌을 반대하는 것은, 그 명분을 중시함으로서 정치적 기반을 구축한 송시열로선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 때 효종이 그 명분을 앞세워서 북벌론을 주장하며 송시열 등 서인 세력을 압박하자, 위에 언급한 정신을 갈고 닦으며 군비를 증강해야 한다는 등의 신중론을 주장하는 수준으로 물러서며 효종의 국정 운영을 지지하게 되었다는 해석이다.
세월이 흘러 숙종 초에도 윤휴, 허적 등 남인을 중심으로 북벌론이 다시 제기되었다. 북벌을 담당할 기구로서 도체찰사부를 두고, 산성을 축조하고 무과 합격자를 늘리고 전차를 제조하는 등 군비를 강화하였다. 이는 1674년 청에서 오삼계의 난, 일명 삼번의 난이 일어나 내부혼란이 발생한 것을 이용하려 한 것이다. 그러나 청나라가 곧 안정을 되찾고 윤휴 일파가 1680년 실각하면서 실행에 옮기지 못하였다.
당시 청나라는 위세로 보면 현재의 미국 수준의 천조국으로 동아시아를 넘어서 세계적인 초강대국이었으므로[8] 성리학자들도 현실적으로 북벌이 가능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1676년 삼번의 난이 시작되었을 때 호응해서 동녕 왕국까지 연합해 북벌을 감행했다고 해도 삼번은 의외로 쉽게 제압당했고[9] 당시의 사림층은 무리한 외정보다는 내치를 우선시했기 때문에 말로는 북벌을 외쳤지만 끝내 실행에 옮기지 않았다.
사실 숙종 연간의 청나라 공격은 가능성이 높았을 수도 있겠으나 당시 황제가 청나라 최고의 명군 강희제 시기라 청나라의 국력은 압도적이였고 그 외 조선의 여러 내부 문제까지 겹쳐서 사실 북벌을 감행했다가는 중원을 재진압하고, 준가르와 티베트, 몽골까지 정복한 청나라에게 병자호란은 저리 가라 할 만큼 처참한 보복을 받고 조선 왕조는 멸망하고, 심지어 한반도 전체가 중국에게 병탄되어서 중화민국이나 중화인민공화국 조선성이 되고 중국과 별개의 국가였지만 결국 중국에 편입된 신장과 티베트, 내몽골, 운남성처럼 한민족 전체가 중국의 소수민족이 될 가능성이 있었다.
어떤 의미로는 짜고 치는 고스톱이 아닌가 하는 의혹을 받기 충분하고, 실제로 조선 후기에 이미 북벌론은 허생전 등에서 볼 수 있듯 명분에 불과하다는 비판을 받았다.
3.1.1. 사례[편집]
3.1.1.1. 운부의 난[편집]
날이 저문 뒤에 이절(李梲)·유선기(兪選基) 등이 상변(上變) 하기를,
"어느 날 이영창(李榮昌)이 이절의 집에 와서 자면서 갑자기 묻기를, ‘그대가 장지(葬地)를 얻으려고 한다면 우리 스승을 가서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고 하였습니다. 스승이란 중은 바로 운부(雲浮)로서, 당시 나이 70세로 송조(宋朝)의 명신(名臣)이었던 왕조(汪藻)의 후손인데, 명나라가 망한 뒤 중국에서 표류하여 우리 나라에 도착하였으며, 머리를 깎고 금강산(金剛山)에 들어갔는데, 그 사람은 위로는 천문(天文)을 통달하고 아래로는 지리(地理)를 통찰하고 중간으로는 인사(人事)를 관찰하여 재주가 옛날의 공명(孔明)과 유기(劉基)에 밑돌지 않는다는 자였습니다. 그가 불경(佛經)을 승도(僧徒)들에게 가르쳤는데, 그 중에서 뛰어난 자로는 옥여(玉如)·일여(一如)·묘정(卯定)·대성(大聖)·법주(法主) 등 1백여 인을 얻어 그 술업(術業)을 전수(傳受)시키면서 팔도(八道)의 중들과 체결(締結)하였습니다. 그리고 또 장길산(張吉山)의 무리들과 결탁하고, 또 이른바 진인(眞人) 정(鄭)·최(崔) 두 사람을 얻어 먼저 우리 나라를 평정하여 정성(鄭姓)을 왕으로 세운 뒤에 중국을 공격하여 최성(崔姓)을 왕으로 세우겠다고 하였습니다."
(중략)
임금이 또 국청(鞫廳)에 하교(下敎)하기를,
"극적(劇賊)[10]
장길산(張吉山)은 날래고 사납기가 견줄 데가 없다. 여러 도(道)로 왕래(往來)하여 그 무리들이 번성한데, 벌써 10년이 지났으나, 아직 잡지 못하고 있다. 지난번 양덕(陽德)에서 군사를 징발하여 체포하려고 포위하였지만 끝내 잡지 못하였으니, 역시 그 음흉(陰凶)함을 알 만하다. 지금 이영창(李榮昌)의 초사(招辭)를 관찰하니, 더욱 통탄스럽다. 여러 도(道)에 은밀히 신칙(申飭)하여 있는 곳을 상세하게 정탐하게 하고, 별도로 군사를 징발해서 체포하여 뒷날의 근심을 없애는 것도 의논하여 아뢰도록 하라."
숙종실록 31권, 숙종 23년 1월 10일 임술 3번째기사 / 반역 모의에 관련된 이절·유선기 등은 복주되고 이익화·장영우 등은 귀양 보내다 중
1697년에 운부를 비롯한 1백여 명의 승려들이 집단으로 반란을 일으키려다 실패한 일을 들 수 있다. 당시 운부는 나이 70세의 승려였는데, 자신이 하늘과 땅의 이치를 깨우치고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다 알고 있어서 그 재주가 옛날 제갈공명이나 유기(주원장을 도와 명나라를 세운 공신)와 같다고 선전하였다. 그리고 운부 자신이 가르친 옥여, 일여, 묘정, 대성, 법주 등 1백여 명의 승려들을 제자로 가르치고 그들을 통해 조선 전국의 승려들과 결탁을 했다.
운부와 1백여 명의 승려들은 도적 장길산의 무리들과 결탁하고, 또 이른바 진인인 정씨와 최씨 두 사람을 얻어 먼저 우리나라를 평정하여 정씨 성을 가진 사람을 왕으로 세운 뒤에 중국 청나라를 공격하여 최씨 성을 가진 사람을 왕으로 세우겠다는 계획까지 세웠다. 비록 이 사건은 실패했지만, 조선 민간의 반란 세력들이 북벌을 명분으로 내세워 사람들을 끌어모으려 했음을 보여주는 사례였다.
3.1.1.2. 열하일기의 내용[편집]
조선 후기의 학자인 박지원(朴趾源 1737~1805년)은 자신이 직접 청나라를 방문하여 보고 들은 일을 적은 기행문인 열하일기를 썼는데, 이 열하일기를 보면 초반에 많은 조선 사신단이 모이는 자리에서 어느 선비가 "도대체 중국에 볼 만한 것이 뭐가 있느냐? 천자로부터 노비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오랑캐의 변발을 했지 않았느냐? 만약 나한테 10만 대군이 있다면 산해관을 넘어 중국으로 쳐들어가 오랑캐가 남긴 더러운 유산을 모두 없애버릴 것이다."라고 열변을 토하며 북벌론을 외치자, 모든 사람들이 그 말을 옳다고 여겼다는 내용이 언급된다.
3.1.1.3. 해도병마(海島兵馬)의 계획[편집]
1801년에는 김건순이라는 천주교 신도가 청나라 신부 주문모와 만난 자리에서 “서양의 큰 배에다가 총과 대포를 가진 군사들을 태워서, 청나라로 쳐들어가 병자호란 때 우리 조선이 당한 치욕을 씻겠다.”고 말한 사건이 있었다. 거기에 이희영, 강이천과 함께 바다의 한 외딴 섬으로 들어가 군사를 기르려는 계획을 세워놓고 있었다. 그러나 이 소위 해도병마(海島兵馬)의 계획은 1797년 탄로가 나서 김건순은 체포되었다가 석방되었고 강이천은 유배형을 받게 되었던 것이다.
김건순은 조선 후기에 왕실을 능가하는 최고 권력을 휘둘렀던 명문가인 안동 김씨의 일원인데, 그런 상류층의 귀공자마저 북벌을 계획했던 것이다.
3.1.1.4. 이필제의 난[편집]
자세한 내용은 이필제의 난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심지어 1869년부터 1871년까지 조선 사회는 북벌론을 명분으로 내세운 이필제(李弼濟 1825~1871년)가 일으킨 이른바 '이필제의 난'에 휘말려 큰 소동을 겪었다. 이필제는 먼저 조선을 장악한 다음, 그 여세를 몰아 청나라로 쳐들어가는 북벌을 하겠다고 공개적으로 외쳤는데, 이러한 이필제의 주장에 수많은 사람이 동조하여 2년 동안 5번이나 반란이 일어날 정도였다.
3.2. 기타 조선시대 북벌 관련 발언들[편집]
“오늘 말하고자 하는 것은 오늘날의 대사를 말하자는 것이오. 저 오랑캐는 반드시 망하게 될 형편에 처해 있소. 예전의 칸[한 청 나라 군주를 낮게 칭하는 말]은 그 형제들이 매우 번성했었는데 지금은 점점 줄어들었으며, 예전의 칸은 인재가 매우 많았는데 지금은 모두 용렬하며, 예전의 칸은 오로지 무예와 전쟁만을 숭상했었는데 지금은 점점 무사(무사)를 폐하고 자못 중국의 일을 본받고 있소. 이것이 바로 경이 지난번 주자(주자)의 말씀을 들어 말한바 ‘오랑캐가 중원(중원)의 인재를 얻어 중국의 제도를 배우면 점점 쇠약해진다.’는 것일 것이오. 지금의 칸이 비록 영웅이라고는 하나, 주색(주색)에 깊이 빠져 있어 그 형세가 오래 가지 못할 것이오. 오랑캐의 일은 내 익히 알고 있소. 신하들은 모두 내가 병사(병사)를 다스리지 않기를 바라고 있으나, 나는 그들의 말을 듣지 않고 있소. 그 이유는 천시(천시)와 인사(인사)의 좋은 기회가 언제 닥쳐올지 모르기 때문이오. 그러므로 정예화된 포병(포병) 10만을 길러 자식처럼 사랑하고 위무하여 모두 결사적으로 싸우는 용감한 병사로 만든 다음, 기회를 봐서 저들이 예기치 못하였을 때에 곧장 관(관)으로 쳐들어갈 계획이오. 그러면 중원의 의사(의사)와 호걸 중에 어찌 호응하는 자가 없겠소. 아마 곧장 관으로 쳐들어가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을 것이오. 저들은 무비(무비)를 힘쓰지 않아 요동(요동)과 심양(심양)의 천 리 길에 활을 잡고 말을 타는 자가 전혀 없으니, 우리가 쳐들어가면 무인지경에 들어가듯 할 수 있을 것이오. 또 하늘의 뜻을 헤아려 보건대, 우리나라의 세폐(세폐)를 저들이 모두 요동과 심양에 쌓아 두고 있으니, 하늘의 뜻은 아마 다시 우리의 물건이 되게 하려는 것인 듯하오. 또 우리나라에서 잡혀간 수만 명의 포로가 그곳에 억류되어 있으니, 어찌 내응하는 자가 없겠소. 오늘날의 일은 과단성 있게 하지 못하는 것을 걱정할 뿐이지, 성공하기 어렵다는 점에 대해서는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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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가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마음에 굳게 정하시기를 ‘이 오랑캐는 임금과 아버지의 큰 원수이니, 맹세코 차마 한 하늘 밑에 살 수 없다’고 하시어 원한을 축적하십시오. 그리고 원통을 참고 견디며 말을 공손하게 하는 가운데 분노를 더욱 새기고, 금화를 바치며 와신상담을 더욱 절실히 하여 계책의 비밀은 귀신도 엿보지 못하게 하소서. 또한 의지와 기개의 견고함은 분육(賁育)도 빼앗지 못하도록 하시고, 5~7년 또는 10~20년까지도 마음을 늦추지 말고 우리 힘의 강약을 보며 저들 형세의 성쇠를 관찰하소서. 그러면 비록 창을 들고 죄를 문책하며 중원을 쓸어 말끔히 우리 신종 황제의 망극한 은혜는 갚지 못하더라도, 혹 관문(關門)을 닫고 약속을 끊으며 이름을 바르게 하고 이치를 밝혀 우리 의리의 원만함은 지킬 수 있을 것입니다. 성패와 이둔(利鈍)은 예견할 수 없더라도 우리가 군신⋅부자의 사이에 이미 유감이 없다면, 굴욕을 당하고 구차하게 보존하는 것보다 훨씬 낫지 않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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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쪽으로는 요동을 얻고 동쪽으로는 여진을 평정하고 북으로 흑룡의 원류에 닿고 오른쪽으로 몽고와 다툰다면 이 또한 통쾌한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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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벌의 기회를 이용해 조선이 천하를 통제해야 한다”
-- 한원진[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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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여담[편집]
북벌론이 논의되기 전인 병자호란 당시 의주부윤으로 있던 임경업이 청군이 남한산성을 포위한 틈을 타 청나라의 수도인 심양을 역공한다는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고 한다.
당시 청 태종은 조선 침략에 정예 병력의 거의 대부분을 올인한 상황이였으니 발상 자체는 좋았지만 현실은 암울했다. 우선 임경업의 군은 위에 언급됐듯이 고작 400명 밖에 안됐다. 고로 원래는 아마 명나라의 군대나 김자점의 북방군과 연계하여 적의 심장부를 역공을 가할 계획이었을 듯 한데, 김자점은 애초에 청나라군과 싸울 의지가 없었고 명나라는 국내 각종 도적들의 반란들 때문에 신경을 쓸 여력도 없었다.[14] 그래서 임경업이 평안 병사 유림과 함께 연합 전선을 펴고자 했지만 유림은 어명이 없다는 이유를 들어 거절했다는 일화도 존재한다.
이 설을 바탕으로 말하자면 임경업의 심양 역침공 발상은 큰 문제가 3가지가 있었다. 우선 유림이 이끄는 병력조차도 2,000명이었다. 합쳐봐야 2,400명, 그나마 거의 조총수로만 이루어진 병력으로 심양을 침공하는 건 큰 무리였다. 애초에 이 설에서 임경업은 본인에게 5,000명의 군사를 준다면 심양을 치겠다는 말을 했다고 하는데, 이는 본인이 본래 생각하고 있던 병력의 반도 채 안되는 숫자다. 다음으로 청군은 한덩어리로 움직이는 상황이 아니었다. 임경업이 인근 병력과 합류해서 북으로 진군하려면 인근의 청군과 싸워야 하는 상황이었다. 청군 병력은 아무리 적게 잡아도 3-4만명[15] 은 족히 나오기 때문에 설사 임경업이 만약 5,000명의 군사를 모았다고 해도 청이 군의 일부만 보내서 때려잡아도 되는 상황이다. 게다가 청이 아직 명나라가 남아있는 상태에서 수도를 완전 텅텅 비워놓고 갔을 리가 없으니 심양과 주변에 최소한의 예비 병력이 주둔해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 마지막으로 당시는 이미 인조가 남한산성에서 포위된 상황이었기 때문에 이것부터 해결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안되는 상황이었다. 실제로 정작 유림은 평안도 관찰사 홍명구와 함께 인조를 구원하기 위해서 남하하던 중에 자모산성 전투에서 4차례에 걸친 청군의 공세를 모조리 격퇴한 활약을 펼쳤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서 인조가 항복했으니 원대 복귀하라는 명령을 받게 된다. 이런 점을 고려하면 임경업의 심양 공격론은 2가지 중 하나로 보인다. 하나는 임경업 장군님 만만세 하면서 후대에 지어낸 이야기란 것이고,[16] 다른 하나는 임경업이 전략적 상황 파악 능력이 결여되어 있었을 수 있다는 것이다.[17]
이후 임경업은 이미 화의를 맺고 철군하던 청나라 황제의 조카 요퇴의 병력 300명을 압록강 인근에서 공격하여 격파하고 포로로 잡힌 남녀 120여 명과 말을 회수한다. 의도와 결과는 좋았지만, 자칫 잘못했으면 이를 빌미로 삼아 청군의 재침을 부를 수도 있는 행동이었고, 조선 조정의 의도도 아니었다[18]
화친을 반대한 삼학사가 청나라로 끌려가는 도중 백마산성에서 머물게 되자 임경업이 찾아가 위로하였다.
청나라의 지배민족이었던 만주족이 언어·문화적으로 한족에 동화되고 자신들만의 독립국가를 세우지도 못한 채 중국인으로 살아가는 현대 시점에서 보면 북벌론 자체가 매우 의미심장하게 느껴지는 측면도 있다. 물론 실제 효종 치세 조선인들의 입장에서 보면 이러한 미래는 도저히 몰락할 것 같지 않게 보이던 만주족이 몰락한 셈이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