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차 조청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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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조청전쟁
기간
1867년 9월경 ~ 1867년 11월경
장소
봉천, 북경
교전세력
파일:조선 어기.svg 조선
파일:400px-Left-facing_dragon_pattern_on_Wanli_Emperor's_imperial_robe.svg.png 청나라
지휘관
이형
허계
유창근
한성근
괄갸 후쥔[1]
서태후
병력
총 1만 명 → 5만 명[2]

피해 규모
없음

없음[3]
결과
조선의 승리, 서태후와 동치제의 국외 도주
영향
조선의 칭제건원 선언[4]근대화 성공
만주족 국가로서의 청나라 멸망

1. 개요
2. 배경
3. 진행 과정
3.1. 각국의 상황
3.2. 조선의 근대화 시작
3.3. 청나라 내부의 문제
4. 조선의 침공
5. 전후 처리
6. 관련 문서



1. 개요[편집]


폭군 고종대왕 일대기에서 나오는 가공의 전쟁. 작중에서 두 번째로 등장하는 전쟁이자 고종의 두 번째 친정이다. 그리고 제1차 조청전쟁과는 다르게 조선이 공격자의 입장이 되고, 청나라는 수비자의 입장이 된 전쟁이다.

2. 배경[편집]


청나라는 제1차 조청전쟁의 패전으로 봉천 조약이라는 굴욕적인 불평등조약을 체결하게 된다. 그것도 모자라서 서태후가 만주족 팔기군 2만명의 몸값 지불 거부라는 희대의 미친 짓을 벌였고, 조선이 아무런 대가없이 그 포로들을 만주로 풀어주면서 비상 상황에 빠지게 된다. 이게 왜 미친 짓이냐면 청나라는 한족의 국가가 아닌 만주족들이 중원으로 침공하여 세운 나라이기에 만주족은 바로 황실의 친위 세력인데 고작 자기 사비를 터는 것이 싫다고 석방 비용을 안 주겠단다. 이에 적들이었던 고종과 이하응도 어처구니를 잃을 정도.[5]

그리고 이에 대한 심각성을 깨닫고 있는 청나라의 사람은 바로 공친왕 혁흔이다. 같은 만주족 조정에게서 버림받은 그들이 잔뜩 분노하고 있다는 것쯤을 모를 리가 없기에 조선의 손을 잡고 반정이라도 일으켜야 하는지, 아니면 동태후의 손이라도 빌려야 하는지 고민하고 있었다. 다만 모두 헛된 생각이라면서 관두게 되는데 조선이 비록 팔기군을 이겼다고는 하나 팔기군의 상태가 안 좋다는 사실은 이미 공공연한 비밀이고, 조선이 북경까지 함락할 역량이 되는지도 의심스러웠다. 그리고 동태후동치제의 섭정이기는 하지만 워낙 정치에 뜻이 없는 사람이라 호응을 해줄 지도 미지수고, 서태후가 동태후를 완벽하게 장식품으로 만든 상황이기 때문이다. 이에 공친왕은 이도저도 하지 못한 채 그냥 북경으로 돌아가면 서태후의 손에 죽을 것 같아 두려워 제1차 조청전쟁의 전범 김좌근의 시신을 인도받기 전까지는 북경으로 돌아가지 않겠다며 봉천에 남게 되었다.


3. 진행 과정[편집]



3.1. 각국의 상황[편집]


한편, 러시아 극동 도독부는 차르인 알렉산드르 2세의 명령을 어겨가면서까지 제1차 조청전쟁 당시에 조선과 청나라의 전쟁에 끼어들어 이득을 취하려고 했었다. 그런데 조선과 청나라의 전쟁이 생각보다 훨씬 일찍 끝난 탓에 잘못했다간 직권 남용으로 사형을 당하거나 시베리아 유배형에 처해질 수도 있는 상황. 그렇기에 그들은 이를 만회하기 위해 서태후에게 밀서를 보내 러시아의 아무르강 이남 진주를 용인하는 대신, 러시아는 서태후의 집권을 지지해준다는 입장을 표했다. 그리고 나라 안팎으로 궁지에 몰른 서태후는 "얼씨구나 좋다!" 라면서 이를 받아들였다. 이에 영국과 프랑스, 미국 3개국은 길길이 날뛰며 반발했고 이 소식을 전해들은 고종은 "영국 뿐이면 모를까 프랑스까지 지켜보는 상황에서 저따위 짓을 하다니."라면서 러시아를 비웃었다. 영국이야 그레이트 게임 때문에 항상 러시아와 대립을 하니깐 그렇다 쳐도 이 작품 세계관에서 프랑스는 조선이 가장 먼저 개항한 서양 열강이었기에 따라서 조선을 핵심 이권 지역으로 설정하고 있는 상황.

즉 영국은 러시아 잘 되는 꼴 절대 못 보고 프랑스는 기껏 마련해놓은 조선에서의 이권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러시아 편을 안 든다는 의미고 그 말은 조선을 상대로는 적어도 중립이다. 프랑스는 조선이 가장 처음으로, 그것도 우호적인 분위기로 개항한 나라였기에 처음부터 조선 편에 설 가능성이 높았다.

이에 박규수는 러시아의 아무르강 이남 진출로 인해 청에게 할양받은 간도 일대가 위험할 거란 우려를 표했지만 고종은 영국과 프랑스가 있으니 걱정없다는 말을 하며 봉천에서 돌아올 의병들을 해산시키게 한다. 그리고 조선은 승전행사 준비 외에도 지난 김좌근의 반역에 가담한 세도가들을 줄줄히 잡아 고문하고 죽여버리는 내부 단속을 하는가 한편, 노비해방과 농지개혁 등의 개혁을 실시한다. 이에 당연히 지방의 양반들은 항의하였으나 이에 기다렸다는듯 이하응이 일찍이 조직해둔 해수구제사업으로 모아둔 포수들로 반대하는 양반들을 싸그리 잡아서 숙청해버렸고 농지개혁과 1차 조청전쟁의 승전으로 왕실의 권위와 민심은 하늘을 찔렀기에 차마 반대파들이 뭐라 할 수 없었다.

얼마 후, 프랑스는 러시아의 남하에 대해 만주에서 물러나지 않으면 전쟁조차 불사하겠다는 의사를 밝혔고, 영국과 미국은 직접적인 입장 표명만 안 했을 뿐, 프랑스에 암묵적인 지지를 더한다. 하지만 러시아는 끝까지 버티게 되었는데 차르 알렉산드르 2세는 평생을 총애한 극동 도독부의 수장이자 동시베리아의 총독 무라비요프 백작을 내칠 수 없었기에 그에게 힘을 실어줄 수 밖에 없었다. 여기에 프랑스와 대립 중인 북독일 연방의 수상 비스마르크가 러시아를 지지하게 되면서 차르는 자신감이 붙어 다음과 같은 선언을 하게 된다.

봉천 조약에 의거하여 지린성의 할양은 3년 후로 예정되어 있으며, 그럼 그때까지 아직 만주 전역은 청나라의 영토이다. 청국의 요청을 받아 남하한 우리 러시아군의 정당한 군사적 조치에 대해 어찌 영불미 3개국에서 왈가왈부하는지 도통 모르겠다. 우리 러시아 제국은 청국과 3년 후 조선국을 제외한 어떠한 나라와도 교섭하지 않겠다.[6]


이 선언에 프랑스는 그야말로 격노했지만 당장 러시아와 전쟁을 할 여력이 없었다. 이미 1862년에 멕시코 내전에 개입하여 프랑스의 괴뢰국인 멕시코 제국을 세우려고 군사들을 보냈기 때문이다. 게다가 코앞에 있는 프로이센을 배제할 수도 없는 탓에 군사들을 분산하는 것은 위험천만한 일. 하는 수 없이 프랑스는 조선 주재 프랑스 공사인 앙리 벨로네에게 전문을 보내 형식적인 말로 조선의 국왕을 안심시킨다. 허나 고종은 프랑스가 당장 도움을 줄 수 있는 여력이 못되니 하는 수 없이 자력으로 극복해야만 하는 상황임을 알게 되고 속으로 이를 간다. 그리고 러시아의 이러한 행각은 훗날 조러전쟁의 원인이 되고 말았다.

3.2. 조선의 근대화 시작[편집]


얼마 후, 프랑스로부터 파리 외방선교회의 선교사 겸 역관과 함께 루이 베르그송이 이끄는 11명의 프랑스 군사고문단이 조선에 도착하게 된다. 그렇게 조선은 총 3천정의 미니에 소총과 12문의 야포, 이 모든 화기들을 1주일 간 사용할 수 있는 탄약까지 함께 갖고 온 그들의 지도를 받게 된다. 그리고 조선은 청나라로부터 받게 된 전쟁배상금 중 2백만 냥으로 소총 공장과 탄약 공장을 짓게 하며 군대부터 근대화 작업을 착수한다. 금위영을 시위대란 이름으로 개칭하는 한편, 프랑스 고문단의 조언에 따라 편제와 계급 체계까지 프랑스식으로 바꿨다.[7] 그리고 고종은 1개 사단만이라도 우선적으로 근대화를 이루기 위해 지난 제1차 조청전쟁 때 해산된 의병 중에 군대에 남고 싶어하는 이들을 시위대에 편성한다. 그런데 얼마 후, 상투를 자르라는 프랑스 고문단의 요청에 반발한 조선군 시위대를 본 고종은 스스로 상투를 잘라버렸다. 이후 그 누구도 상투를 자르고 서구식 복장을 입는 것에 대해 반대하지 않았다.[8]

그리고 조건없는 애국심 교육을 받은 시위대는 고종이 내린 맹수 토벌령으로 한반도에 있는 맹수들을 때려잡아 그 가죽과 뼈 등을 외국에 팔아서 쏠쏠한 외화벌이 수단으로 삼았다. 또한 고종과 이하응은 김좌근의 시신을 가지러 온 공친왕과 청나라의 사절단이 아직도 청나라로 돌아가지 않자 청나라 내부 문제가 심각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리고 이듬해인 병인년, 이하응은 병인군제개혁을 발표한다. 본격적인 징병제의 시작한 것인데 이 때문에 개혁에 불만을 품은 유림들은 전국적으로 들고 일어섰지만 결국 허망하게 진압된다. 이로부터 한 달 동안 총 8천여 명의 선비들이 참수되었다고 한다. 그렇게 조선의 개혁과 근대화는 더욱 탄력을 받게 되었다. 참고로 이 사건에는 연좌제를 적용하지 않았다.

3.3. 청나라 내부의 문제[편집]


이 시기의 청나라는 더더욱 나락으로 치닫고 있는 중이었다. 제1차 조청전쟁에서의 패전으로 영수고륜공주를 조선의 국왕에게 바치고, 화북의 한족들이 동요하여 도적 떼가 발생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만주 팔기군은 완전히 재기불능의 상태가 되어 해체 수순을 밟았고, 녹영군은 북경 수비도 간신히 하는 상황. 게다가 서태후가 자기 권력을 지키고자 러시아군을 끌어들인 사실까지 알려지자 만주족들의 민심은 그녀와 북경의 조정에게서 떠나게 된다. 그리고 이때 화북의 도적 떼들을 토벌하기 위해 장강 이남에서 태평천국 반군을 진압하던 이홍장을 불러들였고, 그 결과 장강 이남 영토의 통제권을 상실하게 된다.

만주도 다르지 않다. 조청전쟁을 계기로 청의 천명이 쇠하였다는 걸 만천하에 확인사살시키고, 서태후가 만주팔기군 포로들을 버리고 조선이 포로들을 무상으로 해방시켜주면서 만주족의 민심은 애신각라 황실을 등지게된다.

러시아 제국의 동시베리아 총독부는 서태후의 요청으로 표면적이라도 군사적 지원이 가능해지자, 러시아 객척민들을 적극적으로 만주로 남하시킨다. 무장한 객척민들은 만주족을 공격하며 땅을 빼앗는 식으로 만주 전역으로 퍼지며 남하한다. 만주족 관료들과의 다툼에서 자신들은 서태후의 이름으로 청나라를 지원해왔다며 따질 거면 우리에게 아닌 서태후에게 따져라며 횡포를 부린다.

조선은 봉천조약을 계기로 간도 지방을 중심으로 조선인 마을에 조선의 공권력으로 보호받을 권리가 있으며, 조선에서 노비들을 해방시키며 그들을 만주로 이주시켜 만주를 개척해나간다. 게다가 만주족 관료들과의 다툼에도 봉천조약을 계기로 조선인 마을에 조선의 공권력에 보호받을 권리가 있다며 이 땅은 오래전부터 조선인들의 모인 땅이다로 조선인들이 모인 마을의 민심은 금방 안심시킨다.

그러다가 무장한 러시아 개척민들의 횡포, 몽고는 러시아와 몽고와의 전쟁으로 만주족, 몽골족 피난민들이 조선쪽으로 의탁하게 된다. 이에 조선은 피난민들을 받아들이면서 만주의 민심을 장악해나간다. 그러던 중, 러시아 개척민들이 조선 마을을 공격하면서 조선은 그대로 반격한다. 러시아에게 한발자국도 물러서지 말라는 왕의 엄명도 있기에 조선인들은 러시아의 남하에 맞선다.

그리고 만주족 관료들은 청 조정의 지원을 받을 수가 없어서 조선과 러시아와의 틈바구니에서 사실상 러시아와 조선의 편으로 갈라지게 되었고, 그대로 만주는 조선 VS 러시아의 분쟁지대로 발전한다.

이 와중에도 서태후는 정신을 못 차리고 도사를 불러들여 제사나 지내니 더더욱 민심을 잃어가고 있다. 사실상 서태후의 유일한 고삐인 동태후는 병으로 사망, 공친왕 혁흔은 사실상 조선으로 망명. 비록 권력 자체는 온전히 서태후에게 집중되는 상황이었지만 아주 불안정한 혼자 놀기에 불과했고, 민심은 반군과 도적 떼를 상대로 승전을 거두던 이홍장에게 향하고 있었다. 이에 서태후는 서양 열강들의 지원을 받고 있는 이홍장을 직접 건드리긴 뭐하니깐 그의 명성을 깎아버리려고 하는데 그건 바로 조선에게 전쟁을 걸어서 이기면 해결된다는 생각이다. 그리고 러시아와 연합하여 조선을 치자고 무라비요프 백작을 충동질한다. 그렇게 전운이 감돌았지만 문제는 이미 개판인 청황실의 능력은 이미 만주에 발을 뻗치고 있는 조선과 각국 열강의 정보력을 넘지 못했다. 침공 계획이 제대로 발동도 하기 전에 조선에게 들키고 만 것이다.

당연히 러시아의 남하를 조선이 막아주고 있다고 생각하고 안심하던 영국과 프랑스는 극렬히 반발, 영국의 함대가 연해주 인근까지 이동해 러시아의 항구를 위협하고, 프랑스는 한 술 더떠서 고종의 허가만 있다면 "2차 크림전쟁을 각오하고 극동본부의 총전력을 동원한 포병, 기병 대부대를 포함한 8만명 이상의 군대를 지원하겠다."고 루이를 통해 전해온다. 상상 이상으로 격렬한 열강의 반발과 서태후의 한심한 능력에 위기감을 느낀 러시아는 발뺌하여 봉천 조약의 준수를 선언했다. 이때 고종은 상당히 허탈해했는데 조선이 군제부터 군대화를 시도한 이유가 바로 러시아의 침공을 대비하기 위함이었는데 정작 러시아가 빤스런해버린 것.[9]

하지만 서태후가 봉천 조약을 어긴 사실은 자명한 일. 이것이 빌미가 되어 조선은 청나라가 서태후 한 사람에게만 책임을 돌리고 빠져나오지 못하게 하기 위해, 그리고 다시는 청에서 전쟁을 꾀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 청과의 전쟁을 결심하게 된다.

그리고 이 시기, 서태후의 각종 막장 행동들을 보다 못한 열강들은 마침내 이홍장을 꼬드겨서는 독자적인 세력을 일구자는 제안을 했고, 이홍장은 갈등 끝에 이를 받아들이게 되니 그 결과가 장강 이남의 중화제국의 탄생과 대만 섬 할양이다.

4. 조선의 침공[편집]


서력 1867년 추석날이 지나자 마침내 고종이 시위군 제1 기병연대를 이끌고 심왕의 적법한 영토인 봉천을 향해 북상을 시작한다. 명분은 청의 부마로서 국정을 농단하고 청나라를 망치는 역적 서태후와 그 일당들을 토벌하고 천하를 안정시켜 백성들을 평온하게 만드는 것. 어차피 서양 열강들이 적극적인 지지도 받았겠다, 거칠 것이 없었다. 그리고 1개 대대도 간신히 채우던 시위대도 어느덧 그 규모가 크게 늘어서 보병 3개 연대와 기병 1개 연대, 포병 1개 대대로 1만이 넘는 정병을 보유하게 된다. 고종은 이들을 제1 보병사단으로 삼아 앞으로 새로이 병사들을 편성할 때도 이들을 기준으로 삼게 한다. 그리고 앞으로 새로운 사단을 편성할 경우에는 보병 9 : 기병 3 : 포병 1의 비율을 유지하게 만든다. 비록 각 연대별로 다른 국가의 제식 소총을 쓰고 있는 문제가 있긴 하지만 그래도 순조롭게 봉천까지 진군한다.

그 이유는 바로 조선의 지원을 받아 러시아의 남하에 맞서던 친 조선계 마을의 합류와 제1차 조청전쟁 때 석방된 만주팔기군 잔존 병력들이 일제히 조선에 충성을 바쳤기 때문이다. 어차피 1차 전쟁 때 전범은 김좌근이라 딱히 고종에게 원한을 품을 이유도 없었고,[10] 그 전쟁에서 북경의 황실과 조정에게 버림받은 탓에 애신각라 황조에 대해 극렬한 증오를 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심양성의 성주는 조선군이 항복을 요구하자 항전을 포기하고 바로 항복해버렸다. 그렇게 손쉽게 봉천을 얻은 조선군은 바로 북경으로 향한다. 고종이 행군 속도를 높히자 4만의 보병들은 낙오되고 1만의 기병대만이 그를 뒤따르게 되었지만 산해관의 수비군들은 팔기군의 만주 8기를 확인하고, 고종이 스스로를 칸으로 칭하자 만주족이 새로운 칸을 추대했다는 것에 동요하여 항복하게 된다. 그리고 북경의 수비군도 덩달아 같이 싸우지도 않고 항복해버리며 제2차 조청전쟁은 허망하게 끝나버렸다.

5. 전후 처리[편집]


자금성마저 함락해버린 조선군이었지만 서태후와 동치제는 흔적조차 찾을 수 없게 되었는데 이는 두 사람이 황족들만 알고 있는 비밀 통로로 몰래 빠져나갔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이 끝이 아니었다. 북경에서 재화를 털 목적이었던 고종은 백성들을 건드는 대신, 탐관오리들을 털었으니 이것이 바로 북경 약탈이었다.[11] 서태후를 따르던 간신배들을 모조리 모아서 전재산 내놓으라고 한다. 끝까지 내놓지 않겠다고 반항한 간신배들은 그대로 백성들 앞에서 각종 부정비리를 폭로하고, 멍석말이후 저자거리에 던져버린다. 그러면 그 동안 원망과 원성이 쌓인 백성들에게 두들겨맞아 사망. 시체는 저자거리에 팔리게 되었고, 그대로 간신배의 집은 불태워져 버리고, 그 가족들은 분노한 백성들에게 두들겨 맞았다고 한다. 그렇자 간신배들은 제발 자신들을 보호해달라며 가진 전재산을 그대로 조선군에게 바친다. 은화의 양이 엄청났으며 이 어마어마한 은화의 양을 본 고종은 고작 자신의 사비가 털기 싫어서 만주팔기군을 버린거냐며 서태후에 대해 어이없어 한다. 하지만 서태후의 보물창고는 감히 털 엄두도 못냈는데 이미 이득을 볼 만큼 본 상황에서 무리한 욕심을 냈다가는 반발을 살까 우려된 것. 결국 고종은 당장 가져가기 어려운 쌀과 술은 잔치를 열어 해소하고 축제를 열어 민심도 얻고 그 사이에 탐관오리에게 뜯은 자산들을 조선으로 옮겼다.

그리고 고종은 프랑스에게 조선에 있는 북경에 대한 통제권을 프랑스에 넘기는 조건으로 공친왕을 북경까지 모셔달라는 요청을 했고, 영국에게는 채권의 변제를 위해 서태후의 보물창고를 넘기는 대신 중화제국과의 화친 주관과 영국 학자들을 조선에 초빙하는 것을 요청했다. 그리고 미국에게는 기존에 부설하던 철도에 봉천과 목포까지 추가하고 채광 기술의 협력을 구하며, 5천개 이상의 학교 건설 및 시멘트 공장 건설을 미국에게 주문했다. 러시아에게는 신장과 몽골의 지배를 인정할 테니 아무르강 이남 만주 일대에 있는 병력들을 철수시키고, 심요를 포함한 만주 전역의 조선의 지배를 인정해달라 했다. 하지만 이미 러시아의 이그나티예프 공사는 이주한 러시아 백성들을 핑계로 이를 거절했고, 이는 조러전쟁의 빌미가 되었다.

그리고 고종은 공친왕에게 만주의 완전한 할양과 만주의 칸 자리를 요구하여 가져가게 되었고, 공친왕의 만주를 가져가면 이제 남는 게 뭐냐는 반발에 "그 변발부터 자르고, 면류관을 쓰시오. 기왕이면 한족들의 말도 좀 배우고. 이제부터 조선의 국왕이 곧 만주의 칸이니 말이오. 청은 이제 중원의 천자국일 뿐이니 한족들의 황제라도 칭하고 싶다면 그들처럼 생각하고, 그들처럼 행동하시오."라는 말을 한다. 그렇게 공친왕은 사위의 말을 받아들이며 만주족으로서의 정체성을 포기, 만주족 국가로서의 청은 멸망하게 된다. 몽골에게 만주를 잃고 화북땅에서 버텨나간 전대의 금나라와 묘하게 겹치는 신세가 되었다.[12] 이후 공친왕은 모든 저항을 포기하였다.

중화제국의 황제 이홍장은 첫계획부터 틀어진다. 고종이 빠르게 북경을 함락해서 서태후를 쫒아내고 친열강 공친왕 정권을 수립함으로서 청에게 선양 받아 중원에서의 명분을 확실하게 만들겠다는 계획을 산산조각냈다. 중원의 역사는 일반적으로 "전 왕조에게서 천명이 떠나서 멸망하면 새 왕조가 그 천명을 이어받는다." 라는 식으로 전개되어 왔기 때문에, 청이 멀쩡하게 버티고 있으니 계획은 완전히 산산조각난다. 청을 멸망시키지 않고서는 천명을 이어받을 수도 없는 데다, 이 모든 일이 조선을 중심으로 일어나면서 천명의 주체가 이미 조선에게 넘어갔고(정확히는 청의 천명을 쇠하게 만든 게 조선이라는 점을) 청과 중화제국 양쪽 모두가 인지하고 있기 때문.

하다 못해 조선이 북경에 남아있기만 했더라도 오랑캐에 맞서자는 명분으로 전쟁을 지속할 수 있었겠지만 이미 조선군은 북경을 떠나 완전히 철수를 한 상황이었고, 열강들도 사태가 커지는 것을 원치않았다. 이에 이홍장은 공친왕과 조선에 대해 증오를 불태우나 이를 표면화하지 않고 영국의 중재로 공친왕과 평화협정을 체결한다.

6. 관련 문서[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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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제1차 조청전쟁 당시에는 적으로 싸우던 만주족 팔기군 장수였다.[2] 중간에 만주족들이 합류하여 그렇다.[3] 싸우거나 하지 않았기 때문에 서로에게 피해가 사실상 없음.[4] 엄밀히 말하자면 원 간섭기 이전의 고려 때의 왕실 호칭으로 돌아간 것 밖엔 없다. 전하에서 폐하로 격상한 것 외에는 딱히 변한 것이 없다. 실질적으로 조선이 황제국으로 선포한 것은 조러전쟁 직후다.[5] 고종과 박규슈가 나눈 대화가 이를 요약하는데 고종이 "그대가 서태후라면 포로들을 안 구해올 거요?" 묻자 박규슈는 "버리지 않을 겁니다. 백성을 지키는게 위정자의 의무옵니다." 라는 아주 당연한 말을 했는데 이에 고종이 "그럼 저것들은 뭐요? 역적 김좌근 일당도 그랬지만 도대체 조선이고 청이고 자기 나라 백성들을 책임지는 걸 귀찮아하는 것들이 위정자 흉내를 내고 있는 거요?" 라고 조선과 청을 둘 다 디스한다.[6] 쉽게 말하자면 "싫어! (영불미) 니들 말 안 들어!"라는 뜻이다.[7] 당장 가장 큰 변화는 나이와 경험 많은 병졸들을 부사관으로 삼은 것과 그해 무과에 급제한 젊은 무관들을 모두 한양으로 불러들여 군사고문단을 통해 시위대로 편성하여 그들에게 프랑스군 군사전통과 문화를 철저히 이식한 것이다. 물론 당대에서 가장 최신식의 군대를 자랑하는 프로이센에 비하면 부족한 감이 없잖아 있지만 애국심과 군주에 대한 충성을 기초로 삼은 프랑스 고문단의 군사교육의 수준은 조선 무관들이 받아들이기에 아주 쉬웠다.[8] 물론 유림들은 이 사태에 상소를 올리고 조선이 서양 오랑캐처럼 되가는 것에 우려를 표했지만 고종은 이를 들을 생각조차 안 한다.[9] 역사를 보면 알겠지만 조선은 위부터 아래까지 근대화의 동기를 느끼지 못했다. 그런데 이런 국가적 위기(?) 상황이 닥쳐오니 "쟤네들 보이지? 쟤네 여기로 내려오면 우린 다 망하는데 내게 안 망할 방법이 있음. 그러려면 우리 근대화 해야 함." 이라고 하여 근대화를 강제할 동기로 삼을 수 있다. 하지만 러시아가 발을 빼니까 그 동기가 사라져 버린 셈.[10] 실상은 고종이지만 고종은 교묘하게 그 책임을 김좌근에게 전가하는데 성공했다.[11] 민족주의가 꽃피는 지금 조선보다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살고있는 베이징을 정복해봤자 유지도 힘들고 득보다 실이 많았다. 그렇기에 베이징은 다시 돌려주고 가야하는데 여기서 백성들을 약탈하면 민심을 잃어버리는 셈이었다.[12] 물론 금나라와는 사정이 조금 다른데 금나라는 비록 만주를 잃긴 했지만 그 땅에 포선만노의 동진이 세워졌으며 결정적으로 금나라가 망했다고 만주 일대에서 여진족의 영향력이 사라진건 아니었고 결국 여진족은 원나라의 패망 후 몽골의 통제에서 벗어나 명나라와 어느정도 관계를 유지하며 지냈다가 만주족의 청나라라는 금나라의 뒤를 잇는 국가를 맞이하게 되었다. 하지만 이때는 그 만주를 잃었다는 것으로 그 말은 금나라 시즌 3은 불가능하다는 거다. 원래부터 한족과 너무 많이 동화된데다가 한족과 떨어져 살 공간마저 없으니 이젠 청나라가 망하면 한족 국가의 소수민족으로 영원히 지낼 수 밖에 없다는 소리다. 그리고 실제로도 현재 만주족의 신세가 이렇다. 그나마 숫자만은 소수민족 중 2위인게 만주족의 자부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