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러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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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러전쟁
기간
1868년 6월 1일
장소
만주 동북 평원
교전세력
조선
러시아 제국
지휘관
이형
유창근
한성근
니콜라이 무라비요프아무르스키
병력
총 1만 명
총 1만 명
피해 규모
대략 100여명
9000명 이상 사망
결과
조선의 대승, 러시아 제국 제2 기병사단 궤멸
영향
조선의 완전한 만주 병합
조선 → 대한제국으로 국호를 격상하고 완전한 칭제건원 선언
참호전과 근대전의 시작
1. 개요
2. 배경
3. 진행 과정
3.1. 조선의 내부 정리
3.2. 다른 나라의 상황
3.3. 준비
3.4. 결전
4. 전후 처리
5. 관련 문서



1. 개요[편집]


폭군 고종대왕 일대기에서 나오는 가공의 전쟁. 작중에서 네 번째로 등장하는 전쟁이며 고종의 세 번째 친정이기도 하다.


2. 배경[편집]


제2차 조청전쟁에 앞서 제1차 조청전쟁에서 패한 서태후는 점점 좁아지는 자신의 입지 때문에 권력을 잃을까 염려하여 봉천 조약을 무시하고 러시아를 끌어들이게 된다. 그 조건은 러시아가 서태후를 지지해주는 조건으로 러시아는 아무르강 이남 진주를 용인해준다는 것. 이 때문에 다른 열강들인 프랑스, 영국, 미국 뿐만이 아니라 마침내 러시아와 직접적으로 국경을 맞닿게 된 조선 또한 한 목소리로 러시아를 성토한다. 허나 러시아는 이를 무시하고 계속 만주에 주둔했다가 결국 열강들의 격렬한 반발과 서태후의 한심한 능력에 의해 한 발 물러서게 되었다. 이후, 서태후를 응징하기 위해 제2차 조청전쟁이 발발하였고, 이 전쟁에서 조선이 승리하게 됨에 따라 고종이 프랑스, 영국, 미국, 러시아 4개국 열강들을 불러서 이번 승전에서 얻게 된 이득을 그들과 함께 나누게 된다.

다른 나라들은 고종의 제안을 받아들이고 만족한다. 그러나 러시아는 신장과 몽골의 지배를 인정할 테니 아무르강 이남 만주 일대에 있는 병력들을 철수시키고, 심요를 포함한 만주 전역의 조선의 지배를 인정해달라는 고종의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게 되면서 고종은 다음과 같은 제안을 하게 된다. 그것은 바로 만주의 동북 평원에서 조선 1만 vs 러시아 1만의 결투를 벌이자는 제안이다. 사실 러시아의 외교 방식은 이웃 국가에게 자신이 원하는 것을 말한 다음, 상대가 이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위협을 하여 원래 목적만큼은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 원하는 수준의 이득을 챙기고, 만약 수틀리는 순간, 바로 전쟁을 거는 전형적인 양아치 외교이다. 이 때문에 러시아가 다른 열강들에게 왕따를 당한 것이고. 이를 알고 있는 고종은 확실히 러시아를 제압하지 않으면 미래가 없다고 판단하여 결투 신청을 하게 된 것이다. 중세가 끝난 뒤, 전무후무한 결투 전쟁이 19세기 중후반의 동북아시아 평원에서 벌어진 것.

당연하지만 갓 근대화를 시작한 조선이 러시아를 이길 확률은 극히 희박. 고종의 이 말에 프랑스 공사 앙리 벨로네가 기겁을 했다. 심지어 극동에서 조선이 러시아를 이길 수 있는 유일한 이점이 물량 뿐인데 그것을 고종 스스로가 없애버린 것이니 놀라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1] 그러나 이는 고종의 다분히 의도적인 노림수인데 이런 식으로 러시아를 낚아서 강제로 전쟁에 끌어들이는 것. 실제로도 그렇고 명백히 조선과 러시아의 체급차이는 엄청났기에 먼저 조선이 이런식으로 결투 전쟁을 제안하면서 조선이 대인배가 되고 러시아가 악당이 되는 구도가 되었으며, 아예 자신과 이그나티예프 공사 둘의 결투로 끝내자며 도발함으로써 이게 언론으로 보도될시 악당 러시아와 낭만주의 호쾌한 소년군주의 대립구도로 친조선 여론을 끌어올릴 수 있었다. 그러면서 러시아가 쩔쩔매고 조선이 강하게 나오는 모습에 고종의 생각을 눈치챈 영국과 프랑스 대표가 러시아 대표인 이그나티예프 공사를 은근슬쩍 조롱하자 결국 이그나티예프는 이를 받아들인다. 심지어 조선에게 전투를 개시할 권리와 러시아군의 진형을 확인한 뒤, 진형을 결정할 권리까지 주는데 이조차도 동등한 숫자의 대결이니 러시아에서는 핸디캡이라 생각하지도 않을 정도였다.[2] 그리고 프랑스 공사에 이어서 영국 공사 토마스 그로스 베너와 미국 공사 로버트 프라인도 혀를 내둘었다. 고종의 행동을 만용으로 취급한 것.


3. 진행 과정[편집]



3.1. 조선의 내부 정리[편집]


그렇게 열강들과의 볼 일을 마친 고종은 자기 장인어른에게 대놓고 만주의 완전한 할양을 요구했다. 그것도 만주의 칸 작위마저도 같이 말이다. 이에 공친왕은 그 동안 조선이 만주족들을 짐승만도 못한 오랑캐라고 멸시했는데 오랑캐 두목의 자리를 가지겠다는 사위의 말에 어이없어한다. 게다가 고종은 자기 조상(목조)을 끌어들이면서까지 "본디 태조께서는 옛 예케 몽골 울루스의 천호였다가 고려에 귀화하여 이 나라를 세웠소. 이제 와서 짐이 오랑캐가 된다고 한들, 그것이 우리 근본을 되찾는 것인데 뭐요? 우리 전주 이씨 또한 몽골의 칸이 될 정당한 자격이 있단 말이오."라는 말로[3] 공친왕의 넋을 빼놓는다.

그 직후에 고종은 무라비요프 백작이 보낸 친서를 떠올린다. 그 친서에는 러시아가 이번 결투에서 승리할 시의 요구사항이 적혀있었다. 그것에는 만약 러시아가 이번에 승리한다면 조선 전 국토에 대한 러시아인들의 자유로운 이주 보장, 만주에 자유롭게 철도를 지을 권리, 원산항에 자유로이 러시아군이 주둔할 권리 등을 요구한다. 반면, 조선은 만약 자신들이 승리를 거둔다면 아무르강을 기준으로 조선과 러시아의 국경을 확립시키고, 러시아의 몽골 & 위구르에 대한 지배적 이권을 인정해주는 대신에 조선의 만주에 대한 지배적 이권을 인정할 것. 이것 두 개 뿐이었다. 결국 이 전쟁의 목적은 뭐냐면 장기적인 전쟁을 피하고, 단판 승부로 양국의 피해를 최소화시킨 채로 끝내려는 명분이었다.

이제 제2차 조청전쟁의 전후 처리를 마친 고종은 이전에 항복한 만주족 장수인 괄갸 후쥔에게 기병 소장 자리를 주면서 자신에게 호의를 품고 따르기로 한 만주족 1만 명[4] 중, 6천 명을 골라서 병사로 삼을 것을 명하였고, 병사로서 적합하지 않는 나머지 4천 명을 고향으로 돌려보내게 된다.

그리고 한양으로 돌아간 고종은 만주의 칸이 되겠다는 자신의 뜻을 반대하는 허계를 비롯한 무관들의 의견을 묵살하고, 1866년 12월 31일, 봉천에서 만주의 칸으로서의 의식을 거행하게 된다. 이는 만주가 조선의 전신인 고구려발해의 고토지만 현재 만주에 살고 있는 민족들 절대 다수가 바로 만주족이었기에 그들의 인정을 받기 위해 그런 것이다. 게다가 러시아에 충성하고, 조선에 반감을 갖고 있는 만주족들도 엄연히 존재하는 현실에서 이 민족 감정을 청산하기 위해서는 조선의 국왕이 바로 만주의 칸을 겸한다는 사실을 통해 두 민족이 하나의 국왕과 하나의 왕가를 섬긴다는 구심점으로 삼으려는 것이다. 게다가 만주를 날로 먹으려면 그까짓 악평쯤은 아무 것도 아니라는 고종의 생각 때문에 무관 뿐만이 아니라 문관들도 자기들 왕이 오랑캐 두목이 되겠다는 공개 선언을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이게 된다. 심지어 아버지조차도 말이다.


3.2. 다른 나라의 상황[편집]


한편 서양 열강들의 충동질에 중화제국을 건설한 이홍장은 북경 함락을 위해 청의 장강 수군을 격파하고, 화북에 상륙하여 산둥성에서 20만의 청군을 격파한 뒤, 황하를 넘어 화북 평야 이북까지 북진을 하려다가 이미 조선이 먼저 점령하고 공친왕을 섭정으로 삼게 된 것을 알아차리고 분노하게 된다. 서태후를 타도하면 자신이 정당한 천자로서의 계승을 할 수 있었지만 이미 상황이 종료되어 이홍장은 이제 그저 천자를 탐하는 역적에 지나지 않게 된 탓이다. 그것도 외세의 지원까지 받는 역적 말이다. 그러나 이홍장은 더 이상 북진을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 이유는 바로 청나라 군대만 북경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같이 북경을 지키는 프랑스군 2만 명도 있기에 그들과 싸울 여력도 없으며 정말 싸울 결심을 한다면 열강들의 지원도 같이 끊기게 된다. 하는 수 없이 이홍장은 영국의 평화협상 중재를 받아들여 휴전을 하게 된다. 그 조건은 황하 이남까지의 모든 영토가 중화제국의 것임을 인정하는 대신, 황하 이북의 영토를 모두 청나라의 것으로 인정하며 황하 일대를 완충지대로 만들기 위해 비무장 지역으로 설정하는 것이다.

이렇게 중화제국은 허베이성만 취하고 있는 청나라과 쓰촨성을 포함한 내륙 지방을 장악한 태평천국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큰 세력을 갖추게 되었지만 정작 가장 중요한 천명을 청나라에게서 빼앗아오지 못했으니 이홍장은 좌절하게 된다. 하다못해 조선의 국왕이 그대로 북경에 남아 천자를 참칭했더라도 침략자 오랑캐에 맞서 싸울 명분이라도 생긴다. 허나 조선왕은 이미 서태후에 빌붙은 탐관오리들을 벌하고, 프랑스군과 공친왕에게 북경을 맡긴 채 군대를 이끌고 철수하게 되었으니 행운의 여신이 이홍장을 버렸다고 해도 할 말 없는 수준. 이홍장은 별 수 없이 화친을 하게 되었지만 언젠가 완전히 중원을 탈환하고, 진정한 천자가 되겠다며 훗날을 기약한다. 그리고 이것이 하나의 원인이 되어 천명대전으로 이어지게 된다.

그리고 몽골의 친왕인 보르지기트 셍게린첸은 여전히 자신을 따르는 내몽골의 부족들과는 다르게 러시아에게 빌붙는 외몽골 부족들을 보면서 치를 떨며 몽골의 통일을 위해, 러시아를 몽골에서 완전히 몰아내기 위해 만주의 칸이 된 고종에게 전령을 보내 동맹을 맺자는 제안을 한다.

한편 일본의 정이대장군 도쿠가와 요시노부는 조선이 개항한지 불과 5년 만에 청나라를 2번이나 제압하고, 만주를 차지하고, 러시아와 싸울 준비부터 하는 고종이 생각보다 훨씬 대단한 걸물이라는 것을 알게 되고 일본이 여기서 뒤쳐지면 영원히 아시아의 변방 자리에나 머무르게 될까 우려한다. 이에 그는 조선과 러시아의 전쟁이 끝나기 전에 최대한 빨리 존왕파를 처리하기로 마음먹었고, 그렇게 본격적인 일본의 내전인 무진전쟁이 시작하게 된다.


3.3. 준비[편집]


만주의 칸으로서의 즉위식을 마친 고종은 여전히 봉천에 머무른 채 러시아와의 전쟁에 대비하고 있었다. 그는 루이 베르그송 대령의 프랑스 군사고문단과 브라이언 리들리 포병 소령의 영국 군사고문단과 함께 전장을 파악하고, 병사들을 훈련시켰다. 이 시기의 조선은 조선은 남포항부터 장춘까지 이어지는 철도 구간을 완공시키고, 평양과 남포에 군수 공장을 건설한 후 가동시켜 프랑스군의 제식 소총인 샤스포 소총을 시위군에게 보급시킬 수 있게 된다. 또한 속오군에게는 남북전쟁 당시 사용되었던 전장식 엔필드 소총 20만 정을[5] 보급하게 된다. 게다가 청나라에게서 헐값으로 사들이는 화약을 통해 그동안 조선을 괴롭혔던 고질적인 문제인 탄약 부족을 해결할 수 있게 됐다.

그리고 고종은 스스로 병사들의 마음을 얻기 위해 병사들과 똑같이 훈련을 받으면서 승마 훈련과 사격 훈련을 하면서 장교들과 함께 훈련에 관해 토의도 하고, 조선군과 러시아군의 장단점에 대해서 분석도 했다. 이 시기 루이 베르그송은 중요한 첩보를 고종에게 가져다줬다. 그것은 바로 러시아는 기병 위주의 편성을 할 것이며 코사크인들과 극동의 민병이 아닌 유럽 최전선에서 활약하는 최정예 기병 부대인 제2 기병사단이 우랄 산맥을 넘어 만주로 오고 있고, 여기에 동시베리아 총독부에서 1개 경보병연대와 1개 포병대대를 지원한다는 것.[6][7]

이에 고종은 조선 또한 기병 중심으로 공격적인 편성을 구축하여 강과 강에서 정면 대결을 펼치는 것과 보병과 포병을 조합해서 미리 방진을 짜놓고 러시아군이 오는 것을 받아치느냐의 두 가지 선택지를 두고 고민하게 된다. 물론 어느 쪽도 쉬운 선택은 아니다. 만주는 언덕이 적은 탁 트인 평야 지대이고, 조선이 미국에게 구매한 초기형 개틀링 포는 수동형 기관총이기에 기병들을 몰살하기 전에 되려 기관총 부대가 러시아 기병의 공격 속도를 감당하지 못하고 무너질 우려가 있기 때문.

그렇기에 고종은 허계의 뒤를 이어서 시위대장이 된 유창근에게 기병 대 기병으로 맞상대를 하면 어떤지 조언을 구하지만 유창근은 기병으로 맞서게 된다면 개틀링 포의 도움을 얻기는 어렵고, 오히려 아군을 향해 오사를 저지를 수 있다는 답변을 했다. 그래서 고종은 기병 대 기병 전략은 포기하기로 마음먹었다. 어차피 조선이 러시아에게 우위에 서있는 것은 보병과 개틀링 포 뿐. 따라서 아군의 개틀링 포를 제대로 활용할 수 없는 전략을 배제하게 된다.

그리고 루이 대령은 만약 기병대가 적 주력의 시선을 끌어서 적 주력의 측면을 노출시킨다면 개틀링 부대가 여러 사유로 제 힘을 발휘하지 못하더라도 조선군 보병만의 화력으로 충분히 적들에게 타격을 가할 수 있다고 조언해준다.[8] 허나 그렇게 된다면 조선군의 기병대는 아군 주력과 떨어진 상태에서 적 주력 부대의 정면 혹은 측면에서 부딪혀야만 하고, 만약 러시아군이 조선군 기병대의 돌격을 무시하고 계속 돌격을 감행한다면 조선군 보병대는 아군 기병의 도움없이 적 기병대에 노출이 되는 위험을 감안해야만 한다. 무엇보다도 러시아가 최정예 기병대를 데려온 시점에서 이제 막 최신 보병 전술을 도입한 조선군이 기병 돌격을 막아내기란 버거운 일이었다.

고종은 심사숙고한 끝에 아군의 보병에게 큰 피해가 동반될 수 있더라도 개틀링 부대를 적극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루이의 작전안을 따르기로 마음먹었다. 그리고 그는 "그래서 짐에게 마상 검술을 언제 가르쳐줄 거요?"라며 본인을 적극적으로 미끼로 써달라 요구했고, 이에 장교단은 아연실색하게 된다. 특히 루이 대령의 반대가 가장 극심했는데 루이는 조선군 3명이 모여야 간신히 러시아군 1명의 전력을 낼 거라 판단하였다.[9] 썩어도 열강의 군대와 맞서 싸우는데 오히려 국왕이 가장 위험한 기병대로 참전하게 내버려둘 수는 없어서다. 한성근을 포함한 다른 조선군 장교들도 고종을 말려보지만 고종은 길어야 10분 안에 모든 것이 결판날 거라며 확신에 찬 대답을 한다. 하지만 미래의 전장이 단순한 적의 도살을 목적으로 둔 것을 아직 모르는 장교단은 그런 고종의 발언을 이해하지 못하였고, 고종은 설령 자신이 죽더라도 러시아를 이기기만 한다면 개항한지 얼마 안 된 극동의 국가가 서구 열강을 이겼다는 이변을 일으켜 그동안의 불평등조약을 싹 다 개정시킬 수 있다는 생각에 이를 강행한다.

일이 이렇게 되니 훈련의 강도는 날로 빡세지는 가운데, 조선의 신식 군복이 등장한다. 디자인 자체는 프랑스 제국의 것과 유사하나 상의는 흑색, 하의는 어두운 남색, 안감은 흑갈색으로 당대 유럽 국가들이 쓰는 군복과는 달리 칙칙한 색깔이다. 허나 이는 고종의 철저히 실용주의적인 성향에 의해 제작이 된 것. 환생자인 고종은 제1차 세계대전 당시 화려한 색상의 군복을 고집하여 큰 인명 피해를 본 프랑스군과는 다르게 보어전쟁의 영향으로 일찌감치 갈색 군복을 입은 영국군은 피해를 덜 입어서기 때문이다.[10]

그리고 고종은 한성근의 제1 기병연대와 같이 훈련을 받으면서 적진으로 향한 돌격이 생각보다 어려울 거란 전망에 깊이 고민하게 된다. 한 번 러시아군과 부딪혀서 거짓으로 후퇴한다 손 치더라도 적 경보병 부대에게 큰 타격을 입을 것이고, 적 포병 부대에게 타격을 입다보면 그 참상에 의해 출진 명령을 거부하는 사태가 벌어질 수 있다. 이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기 위해서는 러시아군의 시선을 확실하게 끌어서 개틀링 포대와 보병들을 공격하려는 것을 제1 기병연대에게 집중하게끔 유도하려는 것이 필요한 상황. 허나 식별의 문제도 있고, 제1 기병연대의 돌진을 눈치채지 못한 러시아 기병들이 보병대를 덮치는 순간, 화력을 위해 최대한 넓고 얊게 산개한 보병들이 학살당할 가능성이 컸기에 제1 기병연대의 돌파력에 힘을 싣는 방향으로 작전을 짜게 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군마의 품종 개량이 최선이긴 하지만 문제는 그것이 하루 이틀만에 해결될 문제는 아니기에 제외시켰고, 기병들을 중무장시키는 것도 어차피 총알 맞으면 사이좋게 한 방에 가는 것은 똑같고 괜히 기동성만 떨어트리기에 이 또한 제외시킨다.

결국 남는 것은 정신론인데 아무리 정신교육을 시킨다고 한들, 사람이 죽음에 대해 공포를 느끼는 것은 별 수 없는 일. 이에 고종은 어쩔 수 없이 한성근에게 "아편 10kg을 강남에서 밀수하고, 독한 고량주 1천 병도 준비해줄 수 있겠나? 그리고 말 정도 크기의 대형 포유류들에게 환각 작용을 일으키는 독초도 구해오면 더 좋고."라는 말을 태연하게 내뱉으며 그를 당황하게 만든다.

그러면서 조선군은 동북 평원에 러시아군을 맞이하기 위해 좌우 길이 1km나 되는 3겹의 철조망 지대를 설치해두고, 그 끝마다 모래주머니를 채우고, 목판을 덧댄 형태의 깊이 1m 30cm의 개인 참호를 만들었다. 그 뿐만이 아니라 철조망 지대 사이마다 1미터 너비의 지뢰 지대를 설치하고, 그 위를 쇳가루로 뒤덮게 했다. 또한 12곳에다 개틀링 토치카[11]를 설치까지 한다. 이 모습을 본 러시아는 길길이 날뛰었지만 결투에서 심판을 담당한 미국이 러시아에게도 정정당당하게 진지를 설치할 권한을 주겠다고 받아친다.[12] 결국 하는 수 없이 러시아는 시베리아에서 베어낸 수십 톤의 목재로 요새를 만들어냈다. 그러나 철저히 방어로 일관할 목적의 조선군의 진지와는 다르게 지역 거점이나 감시탑 형태의 공격적인 요새였다.

한편 조선에서는 이하응이 첩보를 통해 상상을 뛰어넘는 아들의 기행을 접하게 되고 할 말을 잃는다. 1만 대 1만의 결투는 그렇다 치더라도 전쟁을 위해 쓴답시고 아편까지 밀수하니 당연한 반응. 그러나 때마침 만주와 화북 일대에 러시아의 지원을 받는 끄나풀들의 존재를 인지한 상황이기에 이하응은 익문사들을 시켜 훗날을 위해 러시아인들 첩보망을 와해시키기 위한 밑밥을 깔 목적으로 조선의 국왕이 아편을 복용한 채 친히 병사들을 이끌고 나타날 것이라는 진실의 정보를 흘렸다. 그리고 그로부터 나흘 뒤, 극동 도독부는 협력자들과의 연락을 끊고 새로운 연락망을 구축해버렸다.[13]


3.4. 결전[편집]


1868년 6월 1일, 고종은 러시아의 총지휘관인 니콜라이 무라비요프 아무르스키 백작을 만나게 된다. 무라비요프는 조선의 국왕이 멀쩡한 모습을 보이니 역시나 어처구니없는 헛소문일 뿐이라며 헛웃음을 짓는다. 그렇게 개전 시각은 10시 정각, 종전 시각은 18시 정각의 이번 전쟁은 항복과 전황에 따라 도중에 조기 종전을 선언할 수 있으며, 포로들의 학살을 금지시켰고, 자발적인 전장 참가를 한 부상병들을 제외하면 부상병에 대한 공격을 금지시켰다. 양측은 서로의 진영을 육안으로 확인할 수 있도록 1km의 거리를 두고 포진하게 했고, 사전에 참전을 하겠다 알린 부대를 제외한 부대들의 참전을 금지, 특수 규정으로 개전 이후, 45분까지는 상대편 포병대를 향한 대포병사격을 금지시키는 것을 규칙으로 삼은 근현대사상 유례없는 전쟁이 시작되었다.

그렇게 심판을 맡은 미군이 개전을 알리는 신호탄을 전장 중앙에다 날리자 무라비요프는 러시아 기병대의 전진을 방해할 철조망 지대를 제거하기 위해 그곳에다 포격을 개시했다. 반면 조선군은 화력의 전부를 러시아군이 설치한 목재 요새를 향해 퍼붓는다. 이에 피해를 입는 것은 당연히 러시아 경보병부대. 이들은 동시베리아 총독부에서 현지 징발된 농노 계급 출신 사냥꾼들이기에 그다지 사기가 높지 않았고, 전쟁이 시작되자마자 포격에 노출되었으니 순식간에 멘탈이 터져나갔다. 게다가 조선이 사용하는 암스트롱포의 성능에 대해서는 말이 많다지만 적어도 목재 요새의 벽을 뚫는 것 정도는 우습게 해낼 수 있었고. 여기에 러시아의 총지휘관 무라비요프도 요새의 경보병부대들은 어차피 전력이 될 수 없는 비천한 농노들이니 처음부터 그들을 죽을 확률이 높은 요새에다 배치를 해두면서 그들의 죽음을 외면했다.

수십분의 포격 끝에 러시아 경보병부대는 완전히 침묵, 조선군의 장애물지대에도 길이 거의 열렸다. 그러자 두 포병대는 서로를 향해 포격을 개시한다. 그러나 방심하고 있던 러시아 포병대와는 달리, 국왕의 친정과 프랑스 고문단의 돈을 아끼지 않는 근대화 훈련으로 독기가 바짝 오른 조선군 포병대가 우위를 점하자, 러시아군은 불필요한 피해를 줄이기 위해 포병대를 후퇴시키고 러시아 제2 기병사단을 돌진시킨다. 이에 조선군 포병대의 목표는 러시아군 포병대에서 러시아군 기병대로 바꿨다. 허나 러시아군 기병대는 포격에 대비해 산개하면서 돌격했기에 명중률은 썩 좋지 못한 상황. 때문에 러시아군 기병대는 철조망 지대를 빨리 돌파하는데 그 순간, 매설한 지뢰들에 의한 함정에 빠지면서 그 자리에서 채 1분도 지나지 않아 1,000명의 기병들이 사망하고 말았다. 그리고 조선군 개틀링 토치카의 십자포화가 빗발치고 러시아의 창기병 부대는 아무 것도 못하고 궤멸당하고 말았다. 그래도 장교들이 정신을 꽉 붙들어맨 덕분에 러시아군은 포기하지 않고 조선군의 참호까지 돌진을 감행했다. 어쨌든 조선군의 참호까지 도달하기만 한다면 조선군들은 아군 오사 문제 때문에 사격을 중단할 것으로 계산했고, 그 판단은 적중한다. 그러나 전열에 있던 러시아군들은 조선군 보병대의 소총 사격에 얻어맞게 되나, 이제 양군의 간격은 고작 30m 밖에 안 남은 상황. 이대로 가면 러시아군 기병대의 돌진에 노출된 조선군 보병대는 고스란히 큰 피해를 입게 된다. 그런데...

끼리릭, 끼릭, 끼효오옷!


이제껏 보이지 않았던 조선군 기병대가 모르핀과 술을 빨고 나타났다. 그리고 온갖 대미지를 입으면서도 죽음조차 두려워하지 않는 저 광기찬 돌진에 러시아군은 공포와 패닉 상태에 빠져 그야말로 일방적인 학살을 당하기 시작한다.[14] 그렇게 참담한 꼴을 당하게 된 병사들을 보다못한 무라비요프 백작은 항복을 선언하였고, 전쟁은 조선의 승리로 끝나게 된다. 그리고 백작 본인도 부상을 입게된다.


4. 전후 처리[편집]


실질적으로 이 전쟁은 1시간 30여 분만에 종료됐고, 부상병들의 치료와 뒷수습으로 인해 3시간여가 더 소모된 탓에 총 4시간 30여 분만에 전쟁이 끝나게 되었다. 그리고 전쟁의 결과는 매우 충격적이었다. 러시아군 1만 명이 사실상 전멸당하고, 생존자는 1개 대대를 간신히 채우는 수준이며, 아이러니하게도 원래 무라비요프 백작이 버린 패로 여겼던 경보병 연대가 다수였다. 반면 조선군은 1개 중대도 못 채운 수준의 경미한 피해를 입었으며 그나마도 직접적인 부상보다는 음주와 약물복용을 동시에 행한 상태에서 무리한 움직임으로 쇼크를 일으켜서 피해를 입은 제1 기병연대들 뿐이었다.[15] 더 충격적인 사실은 불과 5분여 만에 5천 명이 넘는 러시아군 기병들이 철저하게 몰살당한 탓에 개틀링의 위력이 얼마나 무시무시한지 이를 발명한 미국인들조차도 공포로 물든 것이다.

고종은 압승을 거뒀지만 위험성이 너무 높은 기병대에서 미쳐날뛴 덕분에 무릎에 총상을 입고 절름발이 신세가 되었다. 특히나 무릎 관절을 부순 총알을 빼내고 인두로 생살을 지지는 고통을 겪고, 등 뒤로 식은땀을 줄줄 흘리는 와중에도 해외에서 이번 전쟁을 취재하러 온 기자들에게 애써 강한 척 허세를 부리느라 한성근을 안절부절하게 만들었다.[16] 그리고 두렵지 않았냐는 어느 기자의 질문에 고종은 모르핀과 고량주 때문에 두렵지 않았다는 대답을 하면서 기자진들을 웃기거나 어이를 상실케 만들었다. 그래도 기삿거리로서는 더할 나위가 없었지만 말이다. 그런데 어떤 기자가 이번 결투가 공정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여론을 들먹이자 "그래서 짐이 직접 기병대로 참전하여 돌격하였거늘, 그게 정정당당하지 않다면 정정당당함의 기준이 뭔가?"라는 말로 그 여론을 잠재웠다.

그리고 고종은 승리를 거뒀으니 오른다리를 절름거리면서도 무라비요프 백작의 앞에 나타나 "아무르강 이남에서 나가는 것은 물론이고, 블라디보스토크에서도 나가라."는 말을 했고, 백작은 이를 받아들일 수 없다고 고집피우지만 "꼬우면 전쟁에서 이겼어야지? 그리고 만약 이 결과를 받아들이기 싫다면 조선군이 바로 연해주를 먹으러 갈 것이고, 백작 그대와 지금 있는 러시아군들을 포로로 삼거나 죽일 것이다."라는 위협을 하자 하는 수 없이 항복 문서에 서명하게 된다. 그렇게 조선은 연해주를 포함한 만주 전역을 차지하게 되었고,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돌아간 무라비요프 백작은 크게 진노한 차르 알렉산드르 2세에 의해 작위를 몰수당한 채 시베리아로 유배되었으나 탈출하여 영국령 인도로 망명을 떠나는 신세가 된다.

루이 베르그송도 자신과 프랑스 군사고문단은 조선군의 승리를 위해 노력했지만 예측을 넘어서 조선군이 압승을 거두게 되자 감탄을 금치 못했다. 서양인들이 만든 무기를 서양인들보다 능히 다룬 조선군이 서양 열강 중 하나인 러시아를 쓰러트릴 줄은 꿈에도 몰랐던 것. 그도 그럴 것이 조선은 개항한 지 겨우 5년도 안 된 비문명국이었다. 그런 조선이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다니 놀랍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후, 조선의 승리로 끝난 이번 전쟁에 영국의 언론들은 하나 같이 조선의 승리를 축하해주고, 러시아의 패배를 비웃었다. 그레이트 게임의 주요 라이벌이었기에 두 나라의 감정은 결코 좋을 리가 없었고, 러시아를 쓰러트린 조선에 호의를 품게 되었다. 물론 조선이 바다를 통해 세력을 확장했다면 조금 경계했겠지만 조선은 대륙으로 뻗어가는 것에만 관심있으니 이는 영국과 조선 두 나라 모두에게 다행인 셈.

프랑스 언론들은 조선의 승리를 프랑스의 승리인 것처럼 보도했다. 조선이 압승을 거둔 이유가 다름아닌 프랑스군 군사고문단이 성실하고 훌륭하게 일을 해준 덕분이고, 조선은 그저 프랑스와 손을 잘 잡은 거라 여겼기 때문이다. 그래도 조선의 승리를 축하해주긴 했지만 파리의 어떤 황색언론에서 고종이 폐쇄적인 나라 조선에서 몰래 나폴레옹의 일대기를 읽으면서 정복 군주의 꿈을 키웠다니, 나폴레옹의 복수를 해주기 위해 러시아를 응징해줬다니 등의 온갖 낭설들이 떠돌기 시작했다. 반대로 프랑스 정부는 프로이센과의 결전이 다가오면서 러시아와의 외교 관계에 재고할 필요가 있기에 공식 발표는 신중하게 할 수 밖에 없었다. 프로이센과 싸움이 임박한데 멀리 있는 러시아와 다툴 여력이 현재로서는 부족한 실정. 그렇기에 조선의 승리를 축하해주기 보다는 다시 극동에 평화가 왔음을 축하해줬다. 이에 프랑스는 조선에 대한 지원을 축소하는 결의안을 논하였고, 대표적인 친불 국가인 조선과 조금 거리를 두려한다. 물론 그래도 조선에 가장 우호적인 열강이 프랑스란 사실은 변함없지만.

러시아의 차르는 패배 소식에 그야말로 극대노하여 "이번 전쟁은 개틀링 같은 사기 무기를 조선에게만 판 미국이 심판을 봤으니 무효."라는 어처구니 없는 정신승리를 하여 미국을 황당하게 만들었다.[17] 이 일을 계기로 러시아와 미국의 사이가 완전히 틀어졌다. 그리고 서태후가 위구르를 통해 국경을 넘은 보고를 받은 차르는 패배에 불복하고, 그렇게 극동을 둘러싼 러시아와 조선의 패권경쟁이 시작된다.

이 전쟁을 계기로 조선은 열강국들로부터 문명국으로 인정받았으며, 당시 시대 문명국 기준은 게임을 할 플레이어를 뜻하며 2차례의 조청전쟁과 조러전쟁을 계기로 유럽 열강들로부터 대등한 관계로 인정받는다. 이 전쟁을 계기로 조선은 불평등조약을 폐기한다.[18] 이후 조선은 국호를 조선에서 대한제국으로 귀를 파면서개명한다.

또한 이 전쟁의 결과는 유럽 판도에 크나 큰 대격변을 일으켰다. 이형이 친정해서 약물투여 이후 기마돌격을 펼친 것이 알려지며 보불전쟁의 패전이 짙어진 나폴레옹 3세가 자포자기로 이형의 기마돌격을 따라해 사망, 전쟁이 장기화되어 유럽이 대격변을 맞이했다.

5. 관련 문서[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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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러시아의 정예 병력들은 하나 같이 주요 전선인 유럽에 배치하였고, 극동에는 카자크 부대와 같은 2군 위주로 운용한다. 그나마도 만주와는 한참 거리가 머니 병력과 물자를 조달하기 어렵고.[2] 이는 직접적으로 결투를 제안한게 조선인만큼 러시아도 조선에게 무언가 이점을 줘야 세간의 조롱을 조금이나마 줄일수 있었다는 계산도 있었다.[3] 그런데 사실적으로 말하자면 원칙적으로는 없다. 몽골 대칸은 원래대로라면 황금씨족만 차지할 수 있고, 그래서 만주족인 청나라도 원칙적으로는 없기는 해도 그래도 청나라는 그걸 몽골족 여자와 혼인관계를 많이 맺는 것으로 땜빵했는데, 조선은 그저 청나라 공주를 왕비로 맞은 것 외엔 아무것도 없다. 하지만 혼란스러운 아시아의 상황상 아무도 그것을 가지고 따질 사람도 없고, 위상이 상승중인 고종에게 뭐라고 할 수도 없다.[4] 이전에는 총 5만 명의 만주족이 그를 따라 북경을 함락했지만 이후, 그들 중 일부는 공친왕을 따라 청나라로 떠났고, 일부는 약간의 전리품을 갖고 고향으로 떠났다.[5] 당시 미국은 내전을 방지할 목적으로 철도 수주에 우선권을 주는 대가로 엔필드 1정당 탄약 60발씩을 더해서 총 1만달러에 20만정의 엔필드를 판매했다.[6] 이 말에 조선군 장교단은 잔뜩 긴장했는데 서역의 군사고문단들은 하나 같이 2군에 지나지 않는 극동의 러시아군과 1군인 유럽의 러시아군은 아예 차원이 다른 존재들이라고 귀에 못이 박도록 얘기한 사실 때문이며 원래 역사에서도 마찬가지이다.[7] 게다가 고종의 도발 때문에 러시아에서도 최선을 다해 조선을 박살내려고 최정예 부대를 긁어모은 것이다.[8] 루이가 조선에 파견된 지 얼마 안 됐을 때, 자국에서 미트라예즈 볼리 건의 라이센스까지 넘겨줬는데도 고종이 개틀링을 도입하려 했을 때는 불만이 많았었다. 하지만, 미국에서 건너온 개틀링의 시연을 보고는 "무식한 양키 놈들."이라며 혀를 내둘렀고, 이는 다른 고문들도 마찬가지였다. 아이러니하게도 조러전쟁에서 겪은 경험들이 훗날 보불전쟁 때의 루이에게 많은 도움이 되고, 역사를 뒤바꾸는 계기가 된다.[9] 루이는 러시아군은 프랑스군의 한 수 아래라고 판단할 지언정, 러시아군이 조선군보다 아래라고 생각할 수 없었다. 당연하지만 이번 상대는 극동 러시아군이 아닌 최정예인 유럽 러시아군이니깐...[10] 그나마 짙은 남색 내지는 청색의 상의는 무난했지만 문제는 그놈의 빨간 바지와 빨간 군모. 프랑스 삼색기 톤과 깔맞춤을 하겠다는 정치적 의도로 선정되어 개전직전인 1914년 6월엔 연하늘색 군복이 통과된 상황이었다. 의외로 연하늘색은 하늘이나 돌과 어우러지는 위장효과가 있었다고 전해진다. 프랑스 수뇌부도 해당 문제를 인지하고 1915년이 되자마자 재빠르게 새로운 군복을 보급했다.[11] 남북전쟁이 끝난 직후, 잉여 무기를 헐값에 매입한 거다.[12] 정확히 말하자면 미국은 심판 역할은 핑계고 순전히 조선과 러시아 두 나라의 사이에서 자기들 무기나 팔아먹자는 심보였지만 러시아가 미국의 무기는 필요없다며 먼저 거절했다.[13] 아무리 극동의 미개한 국가라고는 하나 왕이 직접 약빨고 기마돌격할 거라는 소리를 믿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하응 입장에서는 나중에 첩보망 혼선시키려고 진짜 정보 던져주며 밑밥 깔려다가 의도치 않게 본래 목적을 4일만에 달성한 게 됐다.[14] 러시아군이 처참하게 짓밟히다 못해 목숨을 구걸함에도 언어의 장벽까지 더해져 조선군에게 도륙당하는 장면의 상황 묘사는 그야말로 압권.[15] 작중 묘사로는 만약 조선군이 끝까지 수비로 일관했다면 다른 결과가 나올 수도 있었다고 표현한다.[16] 정작 한성근도 머리에 붕대를 감는 부상을 입고 있었지만 말이다.[17] 다시 말하지만 미국은 러시아에게도 개틀링을 팔려고 했으며 그걸 러시아가 거부한 것이다.[18] 원래 역사에서도 일본이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을 승리한 것을 계기로 문명국으로 인정받았으며 불평등조약을 폐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