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민태/선수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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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관[편집]
1996년부터 2000년, 2003년까지 6시즌간 부동의 KBO를 대표하는 에이스 투수로 군림했던 현대 유니콘스의 레전드였다.
현대가 마지막으로 우승했지만 개인 성적은 좋지 않았던 2004년과, 팀은 해체되기 직전에 기적적으로 정규리그 2위를 했지만 본인은 재활만 하다 단 한경기만을 등판한 2006년을 빼면, 정민태와 현대 유니콘스의 성적은 거의 같은 흐름을 보였다. 또한 2000년까지 탄탄대로를 걷던 현대 팀이 정민태가 요미우리 자이언츠로 진출한 2001년에 잠깐 가세가 기울었고, 정민태가 복귀한 후 2번의 우승을 더하며, 1998년부터 2004년까지 7년간 4번의 우승을 일궈내며 독보적인 강팀으로 군림했다. 더불어 양자 모두 야구에서의 결말이 비참했던 것까지 똑같았으니...이쯤되면 아예 팀과 인생을 같이한 수준. 만약은 없다지만 현대 유니콘스가 재정난을 겪지 않고 지금까지 존속했다면 그의 등번호 20번은 영구결번으로 정해졌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1]
그래서 '투수왕국'으로 불렸던 현대 구단에서도 단연 투수 중 간판, 최고 서열로 대접받았다. 역대 삼청태현 투수 중 스탯티즈 WAR 1위, 최다승 투수(124승), 단일 시즌 20승 투수(1999년), 프로야구 최초의 연봉 7억 투수[2] 등의 타이틀을 가진, 현대의 명실상부한 에이스.
92년 데뷔했으나 토미 존 수술로 2년을 쉬고, 94년부터 본격적으로 뛴 이래 04년까지 선발투수 WAR 1위(45.41)[3] , 다승 1위(123승). 90년대 후반(95~99년)으로 범위를 좁히면 다승1위 (73승), WAR 누적 1위 (29.35) KBO리그 90년대 후반의 투수 1인자 [4] .
5년 연속 200이닝 투구와 더불어 두자리수 선발승. 게다가 98년~03년 (01,02제외)까지 4년연속 리그 선발승 1위 및 4년연속 선발17승 이상을 기록한 유일의 투수. 역대 단일시즌 런 세이브 1위 (62.5)
통산 전적은 290경기 등판(선발 270경기) 1831이닝 124승 96패 평균 자책점 3.48이며, 특히 포스트시즌에서는 유일하게 두 자릿수 승수를 기록한 선수이자 최다 선발 등판, 스탯티즈 WAR 1위 등을 기록한 가을 야구 끝판왕.
포스트시즌 통산 21경기 등판(선발 18경기), 10승 1패 (10선발승) 평균 자책점 2.11, 115.1이닝, WAR 5.01을 기록했다.
이 중에서도 한국시리즈 기록은 더 특별한데, 한국시리즈 통산 유일하게 두 자릿수이상 선발 등판한(12경기) 투수이며 선발승 6승으로 1위를 기록하고 있다. 통산 다승으로는 가을까치 김정수 투수(7승)에 이어 선동열과 공동 2위, 누적 war 2위(2.90)[5] . 또한 최동원과 더불어 단일 한국시리즈에서 선발투수로 3승 이상을 기록한 둘뿐인 사례(2003년 한국시리즈[6] )라는 기록을 갖고 있다. 정민태의 포스트시즌 및 한국시리즈 유일한 1패는 96년 한국시리즈 5차전에서 조계현에게 당한 패배 뿐. 즉, 현대가 우승할 때 정민태는 패전을 기록한 적이 없다.
투수부문 골든글러브 3회이상 수상한 유이한 선수 [7] 이자 선동열에 이은 투수부문 골든글러브 2연패 달성한 투수이기도 하다. 총 3회 수상으로 선동열(6회)에 이은 단독 2위.
투수 골든글러브 기록으로는 역대 No.2.
골든글러브 2연패 기록은 이후 린드블럼 외에는 아직 달성한 사람이 없으며 2회 수상자는 김시진 류현진 린드블럼 3명이다.
2. 목록[편집]
2.1. 초등, 중학, 고교, 대학 시절[편집]
인천숭의초, 동산중, 동산고 출신. 84년 중학야구 MVP로 주목을 받았고 86,87년 팀을 황금사자기 4강에 까지 올렸다. 87년 전국체전 우승은 덤.
87년에는 훗날 국가대표에서 늘 함께한 지연규, 구대성 등과 함께 청소년 야구 대표팀으로 선발되었고, 고교 대어로 주목받으며 한양대에 진학하였다.
한양대 시절에는 1년 후배인[8] 구대성과 함께 좌대성 우민태로 불리며 대학 야구를 평정했다.[9] [10]
1989년에 1학년 구대성과 함께 전국대회 3관왕, 1990년에는 2관왕의 왕좌에 오르는데 1등공신이었으며
1989년 대만 IBA배 국제대회 우승 및 베스트9선발, 아시아야구선수권대회 (공동)우승에도 기여한다.
1990년에는 캐나다 세계선수권 3위 [11] , 북경 아시안게임 준우승[12] 등 화려한 족적을 남기며 1990년 아마야구 MVP로 뽑혔다. 90년 대학리그에서 무려 13승.
1991년에는 6월 IBA 우승의 주역이 되었지만,[13] 7월 스페인 대륙간컵 4강 실패(5위), 9월 올림픽티켓 실패 등의 시련을 겪는다. [14][15]
2.2. 1992년 ~ 1993년[편집]
1992년 태평양 돌핀스의 1차 지명을 받고 데뷔했으나 그 해 겨울 병역비리로 인해 65일 간 유치장에 갇혀 버린 데다가 설상가상으로 팔꿈치 인대가 끊어지는 부상[16] 을 당해 결국 몇 경기 등판하지도 못하고 수술을 받게 된다.[17] 이때 한국프로야구 선수 중 최초로 토미존서저리, 즉 인대 접합 수술을 받았다. 참고로 당시 한국 프로야구계에서는 팔꿈치에 칼을 대는 수술을 금기시하고 있었고, 수술 후 재활방식에 대한 정보는 당연히 없었고, 영입한 신인 투수가 1년 6개월 이상 재활하는 것을 바라만 봐줄 감독도 찾기 어려웠다. 언론에서도 잘못된 계약 운운할 정도로 재활을 곱게 보지 않았다. 때문에 당시 한국 야구의 일반적 상황이었다면 한의원 다니고 진통제나 맞으면서 야구하다가 성적 못 내면 방출돼서, 흔한 학창시절 혹사당한 유망주 중 한명으로 끝나는 거였다. 그런데 토미 존 수술과 재활 결정이라는 것이 가능했던 것은 당시 태평양 감독이었던 정동진이 메이저리그를 경험한 인물이었고, 팀의 완전한 리빌딩을 계획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정동진은 수술을 꺼리던 당시 투수들을 설득했고, 2010년대까지도 토미 존 서저리 최고 권위자로 불리는 제임스 앤드류스 박사를 찾아가서 투수들을 수술시키고, 완벽한 재활을 보장하는데 정민태가 운 좋게 여기에 포함되었다. 이 때 재활을 담당한 코치가 은퇴한 후 막 태평양이 투수코치로 영입한 김시진이었는데, 김시진 역시 정동진 당시 태평양 감독이 그 이전 대구상고 사제지간, 삼성 코치 시절 인연으로 영입한 인물이었다.
수술을 받고 재활하는 과정에서 미국 커리큘럼을 그대로 받아오긴 했는데, 일상 움직임 회복에 대한 과정은 잘 끝났고, 진짜 투수 피칭을 시작하려 했는데, 할때마다 강한 통증으로 금방 중단되어 꾸준한 투수훈련을 전혀 하지 못했다고 한다. 사실은 이 과정에서 투구부터 시작하지 말고, 약한 단거리 송구부터 시작하면서 약간의 통증은 견뎌서 재활을 하다가 장거리 송구를 하고 통증이 경감되는걸 보면서 투구 재활로 들어가야 하는데 그걸 몰랐던 것. 게다가 처음 아팠을때 의사가 괜찮다고 한걸 믿었다가 잘못되어 인대가 끊어졌던만큼, 훈련시 통증이 올때마다 크게 두려워져 스스로 위축되어 훈련을 거부한 부분도 있었다. 결국 투수훈련을 제대로 안하고 쉬면서 1년 반에 가까운 시기가 되자 구단 내에서 방출 얘기까지 돌게 되고, 코치들과 프런트 직원들이 정민태에게 따가운 시선을 보냈다고 한다. 인사도 안 받아주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결국 정민태는 통증을 참고 억지로 투구를 하는 투수훈련을 시작했는데, 한동안은 극심한 통증에 시달려서 혼자 울기까지 했었지만, 확실히 장기간의 휴식[18] 을 취한 효과가 있는지, 통증이 조금씩 줄어들더니 어느새 점점 빨리 통증이 줄어들기 시작하여 한달쯤 지나니까 별로 안 아팠다고 한다. 본의 아니게 오래 쉬면서 오히려 팔이 더 확실하게 회복된 측면도 있다. 그리하여 투수 복귀를 하게 되었다.
2.3. 1994년[편집]
25경기 모두 선발로 출장, 145.1이닝 (선발 출장 경기당 소화 이닝 5.8), ERA 3.72 / FIP 3.01 (ERA+ 103.4 / FIP+ 127.6)
탈삼진/9 : 5.64 볼넷/9 : 2.35 피홈런/9 : 0.43, sWAR 3.23.
2.4. 1995년[편집]
28경기 모두 선발로 출장, 188이닝(선발 출장 경기당 소화 이닝 6.7), ERA 3.63 / FIP 3.08 (ERA+ 103.4 / FIP+ 120.4)
탈삼진/9 : 5.51 볼넷/9 : 2.78 피홈런/9 : 0.38, sWAR 3.60.
팀 내에서 가장 많은 188이닝을 던지며 8승 14패[19] 를 기록했고 동산고 후배 위재영[20] 과 함께 팀 마운드를 지탱했다. 본격적으로 많은 이닝을 소화하기 시작했으나 태평양의 아름다운(?) 득점력 덕에 리그 최다패를 기록했다. 팀은 최종 순위 7위를 기록.
2.5. 1996년[편집]
30경기 출장(선발 29경기), 210.1이닝 (선발 출장 경기당 소화 이닝 ??), ERA 2.44 / FIP 3.13 (ERA+ 150.5 / FIP+ 117.1)
탈삼진/9 : 5.43 볼넷/9 : 1.93 피홈런/9 : 0.64, sWAR 5.87.
태평양 돌핀스를 인수하고 팀명을 바꾼 현대 유니콘스의 꾸준한 지원과 김재박 감독, 하기룡 투수코치의 도움으로 에이스로 활약, 15승 9패를 기록한다. 한화 이글스와의 준플레이오프에서는 8이닝동안 무실점으로 호투[21] 하며 1차전 승리를 안겨주었고, 플레이오프 쌍방울전에서는 활약이 뚜렷하지 않았으나 마지막 5차전에서의 활약이 컸다. 플레이오프에서도 승리하여[22] 한국시리즈에 진출, 해태전에 2차전(8.1이닝 ND)과 5차전(패배)[23][24] 선발 투수로 나서기도 하였다.
2.6. 1997년[편집]
31경기 모두 선발로 출장, 219이닝 (선발 출장 경기당 소화 이닝 7.1), ERA 3.33 / FIP 3.08 (ERA+ 119.9 / FIP+ 129.6)
탈삼진/9 : 6.53 볼넷/9 : 2.10 피홈런/9 : 0.62, sWAR 5.53.
1997년에는 219이닝을 던지며 13승 13패 평균 자책점 3.33을 기록. 호투하고도 팀 타선이 터져주지 못한 경우가 많아서 아쉬웠던 해. 팀은 6위로 추락한다.
정민철과 탈삼진왕 경쟁을 벌였으나 1개 차이로 2위를 기록.(159삼진, 1위 정민철 160삼진)
2.7. 1998년[편집]
2.8. 1999년[편집]
1999년에는 33경기(선발 29경기) 등판, 230.2이닝을 던지며 20승[32] 7패 3세이브 평균 자책점 2.54[33] (2위)[34] 를 기록한다. 이 해가 정민태의 커리어하이인데, 사실 1999년 시즌은 역사상 손꼽히는 타고투저의 해였다. 30-30 기록자만 세 명이 나오고, 이승엽이 54홈런을 치고, 해태 타이거즈가 팀 홈런 210개를 기록하며, 리그 평균자책점이 4.98인 해. 즉 타고투저 시대에 혼자 투고타저 놀이한 선수[35] . 당장 평균자책점 3위를 기록한 문동환의 평균자책점이 3.28이다.
타고투저에서 20승을 거두고 평균자책점이 2점대인 것을 보고 팀 운을 받았다고 생각할 수도 있는데, 이 해 현대 유니콘스는 드림리그 3위, 종합 5위로 시즌을 마쳤다[36] . 팀 실점은 2위를 기록하였지만 이건 정민태의 지분이 크고, 나머지 투수들은 그 해의 타고투저를 버티지 못하였다. 김수경은 탈삼진왕을 차지하기는 하지만 기복이 심했고, 위재영은 시즌 중 병역비리에 걸려 한 동안 경기에 나서지 못했다. 최원호는 방콕 아시안 게임 뒤에 제대로 박살나버렸다. 중간계투의 조웅천은 성적이 점점 내려가고 있었고, 김홍집은 LOOGY로 많은 경기에 등판하긴 했지만 5점대 평균자책점을 기록, 나머지 계투들 또한 성적이 좋지 않았다. 초반에 선발로 나섰다가 마무리로 복귀한 정명원은 구위 저하가 현저히 드러났다. 결국 이 해 현대는 특정한 마무리 없이 집단 마무리 체제를 가동, 10명의 선수들이 세이브를 번갈아 가면서 획득했다. 이 상황에서 정민태의 승리를 지켜주거나 분식회계를 막아준다거나 하는 것은 생각할 수 없었다.
팀 타선은 더 심각했다. 팀 득점은 쌍방울 다음으로 낮은 7위에 불과하였다. 작년도 좋은 성적을 낸 이명수와 김경기는 규정타석도 소화하지 못한 채[37] 그대로 고꾸라졌고 전준호는 그나마 규정타석은 소화했으나 타격성적이 전년도 보다 3푼이나 급락했다. 이숭용이나 나머지 선수들도 모두 성적이 조금씩 하락하였다. 이 시즌은 가중출루율(wOBA)이 4할 이상인 선수가 15명이나 있었지만 그 중에 현대 선수는 단 한 명도 없었다. 그나마 wOBA 순위를 상위 25위로 범위를 넓혀야 박재홍(19위, .391), 박종호(24위, .370)만 이름을 보인다. 야심차게 데려온 외국인 선수 에디 피어슨은 wOBA 리그 28위(.365)로 전 해의 스캇 쿨바만큼의 활약을 하지 못하였다. 사실 피어슨은 공격력만 보고 데려온 외국인 타자인데[38] , 그 공격력마저도 그저 그랬다. 이런 상황에서 유일하게 버틴게 정민태였다.
선동열 이후 처음으로 투수 골든글러브 2연패를 달성하지만, 정규리그 MVP는 54홈런을 때린 이승엽에게 밀려 수상에 실패한다.
시즌이 끝나고 일본 진출을 하려했으나 KBO 규정상 1시즌을 더 소화해야 해서[39] 2000년까지 KBO에서 뛰게 된다.
여담으로 정민태는 이때를 회상하면서 1999년 230이닝을 넘게 던졌을 때 나중에는 팔이 안들어지고 밥도 못 비빌 정도로 마비되는 기분을 느꼈다고 한다. 그만큼 무리하게 던졌다는 것.
이와중에 아시아야구선수권 겸 시드니올림픽대회 예선 국가대표, 한일 슈퍼게임까지 출전하였다. 아시아야구선수권대회 결승리그 2차전 대만전에 선발로 나서 7이닝 2실점으로 승리의 발판을 놓았다.[40]
시즌 후 11월 도쿄 돔에서 열린 한일슈퍼게임에서는 4차전에 선발로 출전하여 3.1이닝 동안 5안타 3실점하였는데 마쓰이 히데키한테 1회 2루타를 맞으며 2실점한게 컸다. 5:3 상황에 내려온 이 경기는 결국 8:8로 무승부.[41]
선발 등판했지만 1회부터 2실점하고 이후 4회에 추가실점 후 조기강판당했다. 99년 슈퍼게임은 95년 슈퍼게임의 선전으로 많은 기대를 받았으나 선발들이 모두 5이닝을 못 버티고 강판당하며 선발 구대성(4.2이닝 5자책), 문동환(3이닝 2자책), 정민철(3이닝 1자책), 정민태(3.1이닝 3자책) 모두 부진했다.
사실 정규시즌 230이닝을 던진 데 이어 시즌 후에는 아시아야구선수권 국가대표팀 차출, 그리고 한일 슈퍼게임까지 뛰면서 총 250이닝 가까이 던진 시즌으로 그는 허벅지 부상으로 시즌 내내 고생했으며 2000 시즌의 구위저하로 연결된다.
2.9. 2000년[편집]
2000년에는 김수경, 임선동과 함께 18승을 올리며 리그 최초 공동 다승왕에 올랐고[42] 삼성과의 플레이오프에서 2승, 두산과의 한국시리즈에서 1승을 올렸다. 그 해 플레이오프 MVP와 스포츠 신문사에서 주관하는 정규리그 우수 선수상을 받았다.
이해 7월 30일부터 정규시즌 종료까지 7연승을 거두었는데, 이는 일본 진출 및 복귀 이후인 2003년 21연승까지 이어진다.
http://mn.kbs.co.kr/news/view.do?ncd=108486
그러나 99년의 무리 탓에 후반기에는 허벅지 부상에 시달렸으며 플레이오프에서는 삼성과의 7전 4선승제의 경기에서 2승을 거두며 한국시리즈 진출에 앞장섰으며 한국시리즈에서 3차전 선발로 승리를 거두었다.
2.10. 2001년 ~ 2002년, 요미우리 자이언츠 시절[편집]
2002년에는 6월에서야 1군에 올라가게 된다. 중간계투로 등판하면서 7월 중순까지는 선방하는 모습을 보였지만 7월 25일 한신전에서 끝내기를 당하면서 2군으로 내려가고, 8월 18일에 1군에 복귀하여 0이닝 3실점을 기록하고 만다. 그래도 바로 2군으로 내려가지는 않고 몇 경기 더 던졌지만, 8월 30일에 역시 0이닝 3실점을 기록하고 이후 1군 경기에 나오지 못한다. 2002년 성적은 17경기(선발등판 없음) 1패 방어율 6.41.
이후 정민태는 계약기간 1년을 남기고 KBO에 복귀하겠다는 의사를 밝히고, 12월 16일 연봉 5억 원에 현대 유니콘스로 복귀한다.
일본에서의 실패 요인이라면, 정민태 본인은 차별대우와 코칭스태프(특히 가토리 요시타카 투수코치)와의 불화를 이유로 들었다. 이러한 불화는 정민태 본인을 통해 일본 시기 때부터 한국에서 기사화될 정도로 널리 알려진 사실이었고, 이후 2022년에도 스톡킹을 통해서 정민태가 재차 언급하였다.
물론 본인이 이야기한 요미우리 특유의 배타적 문화와 정민태에게 호의적이지 않았던 가토리 투수코치 등 외적 요인으로 인한 심리적 위축도 무시할 수는 없겠지만, 일본 진출 당시 정민태의 몸상태가 최상이 아니었다는 점 또한 중요한 요인이다. 정민태는 1996~00년까지 5년연속 200이닝을 던지면서 구위가 약해지고 있었고, 이미 1999년부터 고생했던 허벅지 부상으로 인해 하체 중심의 투구폼에 나오는 특유의 구위를 잃어가고 있었다. 한국시리즈의 무적 투수라지만 2000년 무렵 실전에서 보여주는 정민태의 구위는 96~99년과는 많이 달랐다.
2000 시드니 올림픽에서의 구위도 1999년의 아시아선수권과는 많이 차이가 났으며 2000년에도 비록 18승을 거두고 한국시리즈 에서 1승을 거뒀으나 예전의 구위는 아니었다.[45]
정민태가 스톡킹에서 얘기했듯이 한국리그에 복귀하여 2003년에 선보인 투구와 기록한 성적은 투심을 새롭게 장착해서 거둔 성적이다. 또 한국시리즈에서 진통제를 맞아가며 3승 선발승(7차전 완봉)을 해냈는데, 이는 사실상 본인의 있는 힘 없는 힘 다 끌어모아 만들어낸 마지막 불꽃이었다. 결국 그 후유증이 2004년 폭발, 허벅지 부상이 재발하고 어깨부상으로까지 이어지면서 전성기 정민태의 모습은 다시 볼 수 없게 되었다.
한편 정민태는 가토리 코치가 한국인 선수를 차별했으며, 자신뿐 아니라 정민철, 조성민에게도 엄격했다고 주장했다. 다만 가토리 코치가 정민철에게는 우호적인 편이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정민태와 가토리 둘은 처음부터 서로 상성이 맞지 않았을 가능성도 있어보인다.
아마도 가토리는 일종의 '선수 길들이기'를 통해 정민태를 통제하려 했던 듯하다. '정민태 선수가 한국의 스타플레이어 출신이지만 여기는 일본이니, 일본 야구를 존중하는 태도가 느껴지지 않으면 요미우리의 선수로 절대 인정해줄 수 없다'고 생각했을 가능성이 있다. 사실 가토리뿐만 아니라 당시 대부분의 일본 코칭 스태프들이 일본에 진출한 한국 스타플레이어를 접했을 때, '한국에서는 스타 대접을 받았겠지만, 여기서는 아니니까 일단 그런 마인드부터 고쳐줄 필요가 있다.'라고 생각하는 게 일반적이었다. 선동열, 이종범, 이승엽 등 초창기 일본 진출 선수들이 1년차 때 고생한 게 다 이런 편견 때문. 게다가 정민태는 한국에서부터 자존심도 센 편이었고 감독과 직접 이야기를 해서 여러 문제를 해결하는 등 기가 센 것으로 유명했던 선수였다. 만일 가토리가 현대 유니콘스 구단 관계자들을 통해서 정민태에 대해 뭔가 이야기를 들은 게 있었다면, 일단 무조건 기부터 죽여놔야겠다고 생각했을 가능성이 충분하다. 이런 정황은 정민태 본인이 2011년에 스포츠 2.0에서 박동희와 한 인터뷰에서 드러난다.
가토리코치는 나(정민태)를 보자마자 “네가 한국 최고의 투수라고 하는데 얼마나 콧대가 센지 두고 보자”라고 하더라. 왜 그가 나를 경계하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가토리코치는 삼성을 비롯한 한국프로야구 관계자들과 친했다. 전날 밤 삼성 코칭스태프와 술자리를 한 모양이더라. 거기서 가토리코치가 삼성 코치들한테 “정민태 이 녀석, 콧대 좀 납작하게 해달라”는 부탁을 했단다. 아무래도 팔이 안으로 굽지 밖으로 굽겠는가. 나중에 삼성 코치 가운데 한 분이 그 이야기를 해주더라. 그러면서 “네가 어떻게 처신했기에 가토리가 너를 박살내달라고 하느냐”고 묻는데 그때 이런 생각이 들더라. '아, 여기서는 더 이상 야구할 수 없겠구나.'
앞서 언급했듯 정민태는 가토리 코치가 한국 선수를 차별했다고 했지만, 해당 내용을 봤을 때 가토리가 특별히 혐한 정서가 있었다기보다는 한국의 스타 플레이어를 컨트롤해야 하니 자만심을 꺾고 길들일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던 측면이 커 보인다.[46]
어쨌거나 구대성과 같이 한국야구와 비슷한 성향의 퍼시픽리그나 좀더 여유있는 코칭과 기용이 가능한 요미우리 외의 구단에 입단 했었으면 어땠을까 하는 얘기도 있다. 실제 구대성은 절친한 선배인 정민태에게 같은 조언을 하기도 했다. 일본야구-구대성, 정민태 만나 조언 심지어 위의 스포츠 2.0 인터뷰에서 정민태 본인 역시 '일본 해설가들이 본인(정민태)를 만나면 왜 요미우리 와서 고생하냐, 불쌍하다'라고 얘기했다고 증언했다.
당시에도 정민철과 정민태의 사례를 들며 요미우리가 한국의 에이스급 선수를 데려다가 망친다는 얘기는 심심찮게 있었다. 그러나 이는 한국인만 골라서 차별한 건 아니고, 애초에 요미우리가 선수들을 소모품 다루듯 했던 탓이 크다. 본래 교진은 예나 지금이나 FA매물만 나왔다 하면 가격표 안 보고 쓸어담는 팀이며, 팀에 필요한 선수만 사는 게 아니라 적으로 만나기 싫은 선수를 그냥 팀 내에 묶어버리려고 영입하는 경우가 생각 이상으로 많다. 때문에 괜찮은 선수만 나왔다 하면 포지션 중복도 신경쓰지 않고 얼마든지 사들이며 조급증도 심해서 1년만 부진했다 하면 바로 2군에 박아버리고 또 새로운 FA를 사들이는 일도 예삿일이라 명색이 FA로 입단한 선수인데도 주전 보장이 안 되는 경우도 많고, 그렇다보니 좀 여유를 갖고 기다려주면 살아날 수도 있는 선수가 기회를 박탈당해 폼을 회복하지 못하는 등 망가지는 선수도 많다.[47] 여튼 이런 교진의 환경은 국적 상관없이 어떤 선수에게나 평등하게 가혹하다. 정민철과 정민태는 이런 교진의 무한경쟁을 이겨내지 못했을 뿐. 그 외에도 교진은 역대 감독이나 영구결번자 등 재일교포들이 여럿 레전드로 있을 뿐더러 한류 붐이 일기 전부터 홈구장 내에 한국음식점을 유치하거나 홈페이지, 유튜브에서도 한국어 지원을 하는 등 오히려 친한에 가까운 구단이다.[48]
게다가 현대가 거액의 이적료 (5.5억엔)을 위해 요미우리를 선택했고 정민태의 말로는 요미우리 퇴단 시 관계자와 협상을 하면서 3년간 일본리그 타 구단 이적 금지 각서를 쓰고 나왔기 때문에[49]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
어떤 이유에서건 간에, 정민태의 일본 시절은 대실패로 막을 내렸다. 이적료 및 연봉을 합친 액수로 따지면 마이크 그린웰 같은 메이저리거 출신 대형 먹튀와도 맞먹을 수 있는 영입이었다.
2.11. 2003년[편집]
2003년은 정민태가 사실상 선수로써의 마지막 불꽃을 태운 시기. 정민태는 이 해 8월 31일 세계 기록인 선발 21연승[50] 을 기록했다. 하지만 단일 시즌이 아니라 세계기록으로 인정받지는 못했다. [51] 최종 성적은 29경기(전부 선발등판) 177이닝 평균자책점 3.31(3위), 17승(1위) 2패를 기록. 세번째로 다승왕 타이틀+골든글러브를 차지했고 승률부문 타이틀도 차지한다. 다만 선발 21연승의 임팩트가 워낙 강렬해서 그렇지 세부 스탯으로만 보면 한화의 이상목이 더 뛰어났다고 보는 사람이 많다.[52][53][54] 스톡킹에서 후술하기를 일본에서 복귀 당시 몸이 매우 안 좋았으나 살아남기 위해 새로운 구종인 투심 패스트볼을 장착했고 그것으로 03년을 버텼다고 한다.
9월말에 열린 KIA와의 정규시즌 1위 결정전에서 8이닝 1실점 완벽투로 팀의 정규시즌 우승을 확정지었고 SK와 맞붙었던 한국시리즈에서는 1, 4, 7차전에서 선발로 나서며 모두 승리를 따내 1998년에 이어 2번째로 한국시리즈 MVP에 오른다. 단일 한국시리즈 선발 3승은 1984년 한국시리즈에서 최동원이 거둔 4승(선발3승, 구원1승) 이외에는 나오지 않은 기록.[55] 또한 정민태 이후로 아직까지 7차전을 완봉승으로 장식한 선수는 없다. 정민태의 KS 7차전 완봉승은 현재까지 처음이자 마지막.
그러나 선발 21연승, 한국시리즈 3승이라는 대기록이 정민태의 남은 선수생활에 악영향을 미치는데, 우선 정규시즌에서 7연승을 한창 달리던 중 정민태는 고질적인 허벅지 근육통으로 인해 2군에 한 번 다녀온 적이 있다. 그런데 당시 현대의 선발진이 무너지기 직전이었고[56] 이 때문에 제대로 치료를 받지 못하고 선발 로테이션에 끌려나온 것. 한국시리즈에서도 정민태는 허리 상태가 썩 좋지 못했는데, 그걸 참고 1, 4, 7차전에 선발로 등판했고, 특히 7차전에서는 허리에 테이핑을 하고 완투를 하게 된다. 거기에 다시 2003년 아시아야구선수권 대회 대표로 차출되어 대만전 선발로 나서지만 4이닝 2실점의 부진한 투구를 선보이고 강판된다. 그리고 팀도 연장끝에 패배한다.[57] 이렇게 무리를 한 결과는 바로 다음 해부터 드러나게 된다.[58]
아무튼 화려한 성적을 거둔 그는 당시 프로야구 역대 최고연봉인 7억 4천만원에 연봉협상을 마무리한다.[59]
2.12. 2004년[편집]
개막전에 출전. 이전까지 개막 5연승을 달리던 정민태였는데, 시즌 개막전에서는 홈런 2방을 맞고 7이닝 3실점. 잘 던졌으나 패전을 떠안고 만다. 그러나 그 이후로 3연승을 하며 5년만의 20승 재도전이라는 말까지 나왔는데, 4월 25일 두산전[60] 에서 1.1이닝 9실점(6자책)을 기록하며 털리고 만다. 이후 정민태는 그대로 무너졌고, 이 와중에 허리부상과 무릎부상까지 닥치면서 선수생활 자체에 빨간불이 켜지게 된다. 결국 최종성적은 28경기(전부 선발 등판) 165.2이닝 7승 14패(최다패 2위) 평균자책점 5.00을 기록한다.
그래도 왕년의 에이스이고 워낙 포스트시즌에 강했던 모습을 보여 한국시리즈 엔트리에 이름을 올리고 2차전과 7차전 선발로 출격했지만, 2차전에서는 1.1이닝 6실점, 7차전에서는 4.1이닝 3실점으로 무너졌다. 다만 두 경기 모두 무승부를 기록.[61] [62]
시즌 종료 후 바로 연봉이 25% 삭감, 5억 5500만에 연봉협상을 마무리한다.
2.13. 2005년[편집]
2005년에는 시즌 개막 전에 어깨 물혹 증세가 발견, 재활에 힘쓰다 5월에 1군 등록. 8일 복귀전에서 7이닝 2실점으로 호투했지만 패전을 떠안았다. 그런데 5월 13일 경기에서 2.2이닝만에 허벅지 부상으로 인해 강판되고, 그대로 시즌 아웃. 9월에 조용준과 함께 어깨 수술을 받는다.
2.14. 2006년[편집]
2006년에는 전해 받은 어깨 수술로 인해 7월 이후에나 복귀할 예정이었다. 이 해 정민태는 FA까지 60이닝 정도 남은 상황이어서 건강하게 복귀하는 것이 절실했던 상황. 그러나 복귀가 점점 늦어졌고, 그 와중에 2군 경기에서 3이닝 12실점이나 하는 모습도 보이고 말았다. 그래도 끝내 1군 복귀를 하지 못한 조용준과는 달리 9월 29일, 1년만에 1군에 등록되고 10월 1일 삼성전에서 중간계투로 첫 등판을 가졌다. 복귀하자마자 심정수에게 투런홈런을 맞고 말았지만[63] , 2이닝 1실점을 하며 그런대로 지켜볼 만한 투구를 펼쳤다. 팀은 당시 정규리그 2위를 기록했고, 정민태가 막판에 PO 엔트리에 들어갈 수 있을지가 관심사였으나, 결국 PO 엔트리에는 들어가지 못한다. 그리고 현대가 PO에서 한화에게 업셋을 당하면서 정민태에게 더 이상의 기회는 주어지지 않았다.
2.15. 2007년[편집]
2007년에는 시작부터 복귀 가능성에 대해 좋지 않은 평이 들려왔다. 그리고 4월 7일 롯데전 홈 경기에 7회 계투로 나온 첫 등판부터 0.2이닝 4실점으로 무너지고, 15일 LG전에 선발로 나와서도 4이닝 4실점(3자책)을 기록한다. 그리고 21일 롯데전에는 이대호에게 사직구장 첫 장외홈런을 허용하는 등 0.2이닝 5실점을 기록. 평균자책점이 3경기 20.25까지 치솟자 정민태는 자진해서 2군으로 내려간다. 결국 김시진 감독의 입에서 은퇴 이야기까지 나오고 만다. 그래도 7월 12일에 1군에 다시 등록되고, 비로 한 차례 선발 등판이 밀려 22일 KIA전에 선발로 등판했지만 4.1이닝 4실점을 기록. 29일 LG전에서는 1회부터 강습타구에 맞는 등 불운까지 겹쳐 2.2이닝 4실점을 기록. 이제까지 등판한 경기에서 모두 패전을 떠안았고, 평균자책점도 14.59. 다행히 시간이 조금 지난 8월 19일 롯데전에서는 그래도 5이닝 2실점을 기록하지만 ND. 게다가 다음 등판인 8월 25일 두산전에서 2.1이닝 6실점 패전을 기록하며 도로 원상태로 돌아오고 만다. 그리고 이 경기가, 그가 현대 유니폼을 입고 뛴 마지막 경기가 된다. 그리고 9월 20일 두산과의 홈경기에서 다니엘 리오스가 본인 이후 8년만에 20승을 하는 광경을 지켜봐야 했다. 07시즌 최종 성적은 7경기(선발 6경기) 19.2이닝 0승 6패 평균자책점 12.81.
3년 동안 무승, 10연패. 한 때 KBO를 대표하는 에이스였던 그는 너무나 처참하게 무너져 있었다.
2.16. 2008년[편집]
선수 말년에는 무리한 연봉으로 '돈민태'라는 불명예스러운 별명을 얻었는데, 이는 2004년 4월 말 이후 급격한 노쇠화와 부상 등으로 인하여 전혀 팀에 도움이 안 됨에도 불구하고 연봉 협상에서 난항을 겪었기 때문이다.[64] [65] 그러다 현대 유니콘스가 히어로즈로 재창단될 때, 이장석 사장과 박노준 단장은 '연봉 거품을 빼는 MLB식 운영'이란 명목으로 김동수, 전준호, 이숭용, 송지만, 조용준 등의 고액연봉자는 물론 모든 선수의 연봉을 후려치려 했다. 고참 선수들은 집단으로 반발했고 박노준 단장과 계속 트러블이 나다 박노준은 선수들에게 경고장을 날리는 목적으로 3월 4일 정민태를 자유계약 공시하며 방출시켰다.[66] 그 후 선수들은 결국 3월 말에야 깎인 연봉안을 받아들였다.
어쨌건 평소 고향 팀에서 커리어를 마무리하고 싶다고 밝혔고, 김성근 감독과 마지막 커리어를 하고 싶어 SK에 입단을 타진하였으나 SK와 협상이 실패하였다. [67] 안타깝게 여긴 김용휘 현대 유니콘스 사장이 KIA 타이거즈에게 정민태를 영입해 달라고 요청하고[68] , KIA 타이거즈도 정민태에게 선발 자리를 보장한단 조건을 내건 결과, 정민태는 KIA 타이거즈로 이적한다.
그러나 2008년 4월 18일 광주 한화전에 선발 등판했지만 김태완에게 홈런을 맞는 등 부진하여 패전 투수가 된 뒤 2군으로 내려갔고, 그게 마지막 경기가 됐다. 2군으로 내려가서도 재기에 실패하며 결국 현역 은퇴를 선언한다.[69] 은퇴할 때도 고운 눈으로 보는 사람이 거의 없을 정도로 이미지가 많이 실추되었다. 이는 원래 그를 옹호해줘야 할 현대 팬 자체가 적을 뿐더러, 히어로즈로 이전하는 과정에서 그나마 적던 팬들이 뿔뿔이 흩어지면서 더욱 심화된 것이기도 하다.
동아일보 [허구연의 스포츠클럽] ‘대투수’ 정민태의 쓸쓸한 은퇴
입력 2008-07-14 08:45수정 2009-09-24 16:40
지난 주 갑작스런 정민태의 은퇴 소식은 그 며칠 전 타계한 김진우의 비보와 함께 필자에겐 충격적이었다. 김진우는 삼미·청보의 주전 포수였다. 짧은 감독 재임기간이었지만 청보 선수였던 그의 밝은 생전 모습을 지울 수 없다. 건강이 악화돼 먼저 세상을 떠난 고인의 명복을 빈다.
그보다 후배인 정민태의 은퇴는 화려한 성적과 경력에 비하면 너무 허무하게 무대를 떠나는 배우 같아 가슴 아팠다. 그는 팀이 넘어가는 과정에서 강한 저항 속에 결국 KIA 유니폼을 입었기에 그를 아끼는 팬들의 아쉬움은 더욱 컸을 것이다.
올 초 현대 유니콘스 매각과정 때 우리 히어로즈의 운영주체인 센테니얼 인베스트먼트와의 갈등 속에 그는 스스로 방출을 요구했고, 4월 18일 딱 한차례 광주에서 등판한 것이 팬들 앞에서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인천 야구팬들은 고인이 된 박현식, 최관수 선배들이 아마추어 야구의 대표적 선수였다면 프로야구 출범 후 최고의 투수 중 한명이었던 정민태가 은퇴식도 없이 쓸쓸히 운동장을 떠난 소식을 듣고 착잡했을 것이다. 그가 많은 기록을 보유하고 있지만 선발 21연승 기록은 세계 최다 선발투수 연승기록이고, 4차례 한국시리즈 우승 및 2차례 시리즈 MVP수상(1998년·2003년)도 값진 기록이다. 이 정도면 무대를 떠나는 그가 당연히 축하 속에 유니폼을 벗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그의 은퇴 소식을 접하면서 장종훈의 화려한 은퇴식과 대비됐고, 또 슈퍼스타들의 은퇴시기를 선수들 스스로 잘 조절했으면 하는 안타까움도 교차했다. 현재 뛰고 있는 스타들도 구단이나 코칭스태프, 동료·후배들에게 짐이 되면서 은퇴시기의 결단을 내리지 못하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124승 투수 정민태가 후배들의 기회나 뺏는 선배 투수, 연봉이나 축내는 선수라는 소리를 듣고 싶지 않았다는 은퇴의 변은 대투수다운 모습이었다.
그의 은퇴를 보면서 히어로즈의 노장 전준호와 김동수가 어떤 형태로 은퇴할 지 궁금한 반면 이종범, 송진우, 마해영, 양준혁 등은 본거지에서 은퇴할 수 있는 ‘행운아’라고 생각된다.
멋진 마무리를 할 수 있도록 스타들은 구단과 함께 미리 입장을 조율했으면 한다. 실제 구단과 선수 사이에는 팬들이 생각하는 이상으로 대립적 가치의 갈등이 있는 경우도 많다. 그러나 양보와 화해의 부드러움 속에 스타들의 멋진 은퇴식이 이어지길 팬들과 함께 기대해 본다.
허구연 야구해설가
3. 히어로즈로의 귀환, 은퇴식[편집]
사실 KIA에서 은퇴한 뒤에 KIA에서 투수코치로 일하면서 영건들을 키우고 싶다는 의견을 표력했지만, 선수들이 전혀 따라주지 않는 바람에
2009년 8월 2일 목동 LG전에서 히어로즈 유니폼을 입고 은퇴식을 치렀다.[70] 코치를 하면서 보람을 많이 느낀다고 한다. 사진에도 나오듯이 평소때의 인상은 둥글둥글하고 인자해 보이지만, 투수가 어이없이 털릴 때 눈에 힘이 들어가는데 그땐 굉장히 무서워 보인다.(...)[71]
4. 국가대표 경력[편집]
아마/프로에서는 그는 주로 대만전 담당, 구대성은 일본전 담당이었는데 사실 대학 3학년때까지는 일본에 매우 강했었다.
4.1. 1989 한미야구선수권[편집]
1989년 7월 미국 본토에서 열린 한미야구선수권[72] 4차전에서는 미국을 상대로 5피안타 1실점 완투승,[73][74] 11월 대만에서 열린 IBA 국제대회 결승전에서 일본을 상대로 삼진 12개, 4안타 무실전 완봉승을 거두었고, 아시아선수권에서는 결승전에서 5회부터 구원하여 2안타 무실점으로 호투했다 [75][76] 특히 1990년 8월 캐나다 에드먼턴에서 개최된 세계야구선수권에서는 팀의 5승 중 3승을 혼자 책임지면서 한국이 3위하는데 공헌을 하면서 메이저리그 스카우트들의 이목을 끌기도 했고, 그해 9월 북경 아시안게임 준결승 일본전에서는 1실점 완투승으로 한국을 결승으로 이끌기도 했다.
4.2. 1990 베이징 아시안 게임[편집]
4.3. 1991 IBA[편집]
그렇지만 1991년에는 6월 IBA대회[77] 우승을 하기도 했다.[78]
4.4. 1991 대륙간컵[편집]
그러나 7월 스페인 대륙간컵과 9월 중국 바르셀로나올림픽 예선(아시아야구선수권)에서 부진했는데 정&구 원투펀치가 부진하면 한국대표팀은 바로 부침을 겪었다.
4.5. 1991 아시아 야구 선수권 대회[편집]
특히 1991년 아시아야구선수권 대회 겸 바르셀로나 올림픽 예선에서는 첫 경기 대만전에서 부진했고[79] 일본전에서는 7회까지 1실점으로 호투했지만 (1대1 동점상황이던) 8회에 상대 4번타자 '나카모토 히로시'에게 3점홈런을 허용하면서 경기가 넘어가 버렸다.[80][81]
정민태 입장에서 일본전이 더욱 아쉬웠던 점은 대만전(9월 20일)과 일본전(9월 21일)을 휴식일없이 연달아 선발등판하면서 결국 일본전 경기 후반 체력이 떨어진 점인데, 이 지옥같았던 경기일정 또한 사연이 있다. 요약 참조.[82]
후일 구대성이 프로입단 직전 야구잡지 <주간야구>에서 하일성과 가진 '직격인터뷰'에 의하면, 원래 대만전 정민태, 일본전 구대성 순번이었지만, 생각보다 일이 꼬이다 보니 참사가 발생한 것 같다고 밝힌 바 있다.[83][84]
4.6. 1999 서울 아시아 야구 선수권 대회[편집]
당시 한국 아마대표팀의 전략은 일본과는 백중세이므로 반드시 대만을 이겨서 최소 2위를 확보해서 진출하는 전략이었다.
98년 이후 프로위주의 드림팀이 구성되면서 전략이 바뀌긴 했으나 99년만 해도 일본은 퍼시픽리그 중심의 아마프로 혼성팀으로 출전을 했고 대만은 프로위주의 정예를 내세웠다. 역대 경기에서 늘 대만과의 경기는 막연하게 알려진 수준의 격차보다는 늘 대만의 한방에 당하는 적이 많았기에 당시에도 대만전에 에이스 정민태를 내세웠다.
정민태는 가장 중요한 대만전에서 선발 7이닝 2실점의 호투를 펼쳤다. 4대2로 앞서고 있는 상황에서 8회 임창용에게 마운드를 넘기지만, 임창용이 동점을 허용하면서 정민태는 승리투수가 되지 못했으나 해당 경기 승리를 통해 한국팀은 귀한 첫 승을 획득한다. [85]
여기까지가 그의 국제무대 전성기였다.
4.7. 2000 시드니 올림픽[편집]
2000년 올림픽에서의 부진이 그의 이미지를 많이 퇴색하게 하는데 일조한 것이 사실이다. 다만 직전 99년에 아시아선수권 및 올림픽예선 대만전에서 호투를 펼쳤고 이미 2000년에는 구위 저하 현상이 있었음을 감안할 필요는 있다. 또한 아마시절부터 대만은 정민태, 일본은 구대성이 막는 구조였고 전통적으로 일본에는 좌완에이스를 대만에는 우완 파워피쳐를 내왔었다.
호주전 : 1.1이닝 2실점 조기강판(팀도 패배)
일본전 : 0.1이닝 2실점 조기강판(팀은 승리)[86]
4.8. 2003 아시아 야구 선수권 대회[편집]
다만 그해 정민태는 한국시리즈에 3차례 등판[87] 때까지 허벅지 부상을 안고 뛰었고[88] 원래 정민태 본인은 한국시리즈 직후 대표팀 사퇴를 고민할 정도로 몸상태가 안 좋았지만, 당시 소속팀 감독이자 대표팀 감독인 김재박 감독의 반강요에 가까운 설득으로 대표팀에 승선하게 된 배경이 후에 전해졌으나 [89] [90] . [91] 당시에는 일본진출실패와 연계되어 많은 비난을 감수해야만 했다.
사실 대만전 역전패의 가장 결정적인 원인은, 4대2로 앞선 9회 위기상황에서 (당시 대체선수로 뽑혀 훈련이 부족했던) 조웅천[92] 을 끝까지 고집한 김재박 감독의 용병술이 첫손[93] 으로 꼽힌다.
5. 기타[편집]
5.1. 90년대 최고 투수 논쟁[편집]
일단 다승 측면에서만 보면 161승(우완 최다승)의 정민철이 124승의 정민태를 압도한다.
92년에 같이 데뷔해서 95년까지 4년간 정민철은 54승, 정민태는 17승을 거뒀으나 이후 96년부터 04년까지 각각 7시즌을 KBO에서 뛰면서 정민철은 73승(평균10승), 정민태는 107승(평균 15승)을 거뒀다.
이에 2004년까지 양 정의 누적은 각각 127승(정민철), 124승 (정민태) 으로 비슷했으나 05년 이후 정민태는 폭망했고 정민철은 다시 살아나 09년까지 34승을 더해 둘의 누적 스탯 격차가 벌어지게 되었다.
현재 시점에서 기록으로 보는 두 정의 비교는 누가 봐도 정민철의 우위.
90년대 에이스 논란도 90~99년을 놓고 보았을 때 데뷔시즌 부터 활약한 정민철이 96년부터 본 궤도에 오른 정민태보다 90년대 누적 WAR 에서 우위이다. 다만 분석 경향에 따라 5년 단위 war 또는 연속 7개년간 누적 다승 또는 선발승이란 기준으로 조회를 하게 되면 90년 전반기의 정민철, 후반기의 정민태라는 결과를 얻기도 한다.
하여튼 정민태가 부상에서 복귀하여 본격적으로 뛴 94년 시즌부터 기준을 하게 되면 이후 6년간 또는 04년을 포함하여 7년간 보여준 포스와 기록은 당대 누구도 그를 이길 수 없었다.[94] 당대의 임팩트와 리그 지배력만 놓고 봤을 때 정민태의 위상은 포스트 선동열이라는 수식어가 다른 이보다 부끄럽지 않을 수준. 투수부문에서 선동렬이후 3시즌 연속 다승왕, 골든글러브 3회 수상자는 정민태 밖에 없다.
(96~03년 6시즌 간 100승, 한국시리즈 MVP 2회(98,03), 다승왕 3회(99,00,03 - 실질적으로 3시즌 연속), 골든글러브 3회(98,99,03), 4시즌 연속 최다선발승(98년 17승, 99년 19승, 00년 18승, 03년 17승 - 선발승 기준. 최종 승수는 각각 17,20,18,17) 등) ]
반면에 정민철은 90년대 내내 꾸준했지만 전성기가 90년대 초중반에 있었기에 현대왕조 출범과 더불어 90년대 후반~00년 초반에 걸쳐져 있는 정민태의 임팩트보다 묻혀있기도 하다. 90년대의 다승 우월주위에 묻힌 면도 분명히 있다.
90년대 에이스의 기준은 최소 15승이었는데 정민철은 당대 에이스 기준인 15승를 99년 (18승)에 딱 한 번 달성했다. 물론 그해에는 정민태가 20승. 정민태는 15승이상을 5회기록했다. [95]
90년대 전체를 놓고 봤을 때 그리고 통산 성적을 놓고 보면 정민철의 우위. 그러나 96년부터 03년까지의 리그 지배력은 정민태의 승리.
5.2. 역대 선발승 순위에서의 정민태[편집]
2022년 종료 기준으로 역대 선발승 순위를 정리해 보면[96]
28승: 83년 장명부
22승: 07년 다니엘 리오스(약쟁이)
21승: 85, 87년 김시진, 16년 니퍼트 21승
20승: 85년 김일융, 95년 이상훈, 14년 앤디 벤헤켄, 17년 헥터 노에시, 양현종, 19년 조쉬 린드블럼, 20년 라울 알칸타라
19승: 99년 정민태, 02년 키퍼, 15년 에릭 해커
18승: 94년 조계현, 이상훈, 96년 주형광, 99년 정민철, 00년 정민태/임선동/김수경 , 06년 류현진
철완 최동원, 국보 선동열도 밟지 못한[97] 선발 20승은 국내투수 기준 김시진, 이상훈, 양현종 만 밟은 고지이며[98] , 또한 18선발승을 2회 이상 기록한 투수는 김시진 (20선발승 이상 2회), 이상훈, 정민태 세 명뿐이다. 정민태는 단일시즌 선발 19승으로 국내 우완 3위, 국내투수기준 6위에 위치한다.구원 1승이 아쉽지만 이 정도로도 그의 단일 시즌 임팩트를 가늠해 봄 직하다.
여담으로 재미있는 것은 삼청태현 팜에서 상위권을 차지하고 있다는 것 [99] 과 김시진 및 그의 제자들이 최상위권이라는 점이다 [100]
또한 역대 단일 선발승 순위에서도 보듯이 선발 18승 이상을 달성한 국내 투수 중에서 장명부, 김일융 (이 둘은 일본리그 베테랑) 을 제외하면 10명뿐 (김시진,이상훈,조계현,주형광,정민철,정민태,임선동,김수경,류현진,양현종) 인데 그 중 3명을 한 시즌에 동시에 배출해 버린 2000년 현대가 얼마나 강팀인지 새삼 알 수 있다.
5.3. 저평가[편집]
현대 유니콘스의 에이스로서 시대를 풍미했지만 유독 저평가가 심하다. 그 이유로는 소속팀인 현대가 비인기 구단이었다는 점과 야구 인기가 시들했던 IMF 시대라는 점이 겹쳐있기도 하지만, 2000년대 중반이후 활동이 부진하거나 없었던 관계로 영상이 많이 남아있지도 않다.
단일 시즌 WAR만 놓고 보아도 그 보다 위인 투수가 선동열[101] ,장명부[102] , 최동원, 김시진[103] , 박철순[104] , 류현진[105] 뿐이고 이들 다음의 일곱 번째 투수이자 순위로서는 16위 [* 99년 WAR 8.84[] 기록이다
9이닝 기준 (RA9-WAR)으로 하면 8위로서 그 위로는 선동열, 장명부, 김시진, 박철순, 최동원 5명 만이 존재한다. 즉, 한 시대를 풍미한 대투수들과 어깨를 견주고 있다는 것.
6년 만에 100승을 달성하며 6년 연속 10승을 이룬 단 3명의 투수로[106] , 정민태는 96년부터 03년까지 연평균 16.6승을 기록하였다. 동 기간 5년연속 200이닝 투구는 덤.
99시즌의 선발 19승도 장명부와 김일융을 제외하면 국내 투수로서는 김시진,이상훈,양현종에 이은 네 번째이며 3년 연속 다승왕, 골든글러브 3회이상의 기록 또한 선동열 이후 정민태만 보유하고 있는 기록이며, 잘 알려지지 않았으나 4년 연속 선발승 1위 [107] 의 기록은 정민태만이 유일하다. 또한 5년 연속 200이닝 투구의 기록은 철완 최동원과 함께 그만이 갖고 있는 기록이기도 하다. 90년대 후반 그가 얼마나 리그에서 임팩트있는 투수였는지 보여준다.
다만, 상술했듯이 많은 기록이 남아 있는 2000년대의 국제경기에서의 부진과 일본 리그에서의 부진, 그리고 04년부터 은퇴까지 이어진 부진한 모습과 함께 전성기였단 90년대의 영상자료가 디지털화 되지 않은 한계 등이 그에 대한 기억을 흐리게 하는 원인으로 작용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