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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율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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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일제강점기 조선에서 태어난 항일운동가로, 중국에서 중국공산당에 입당한 후 활동하다가 광복 후 월북했으나 6.25 전쟁 기간 중에 중국으로 귀화한 조선족 작곡가다.
2. 생애[편집]
본명은 '정부은(鄭富恩)'으로, 광주광역시 출신이다.
1928년 광주 숭일소학교를 졸업하고 이듬해(1929년) 전주신흥학교에 입학했는데 1933년 신흥학교를 중퇴하고 중국 난징으로 건너갔다. 중국으로 건너가 조선혁명간부학교에서 공부하던 중 의열단에 가입했다. 중국에 머물면서 피아노, 바이올린, 성악 등을 공부했다. 이 때 의열단장이자 조선혁명간부학교장이던 김원봉이 '음악으로 성공하라'는 뜻으로 '율성(律成)'이라는 이름을 지어줬다.
1936년 그는 첫 작품 '오월의 노래'(五月之歌)를 작곡했으며 중일전쟁 발발 후 난징을 떠나 1937년 10월 중국공산당의 본부가 있는 옌안에 도착했다. 1939년 중국 공산당에 가입하고 '팔로군 행진곡'(현 중국인민해방군진행곡)을 작곡했다.
작곡 활동과 함께 1941년 7월부터 화북조선청년연합회를 비롯해 이듬해(1942년) 12월부터 타이항산의 화북조선혁명청년학교 등에 소속되어 항일 운동을 전개했다는 설이 알려져 있으나, 항일 운동 사실은 객관적으로 증명되지 않았다.[2] 1944년 4월 다시 옌안으로 돌아온 뒤, 1945년 해방을 맞이했다.
해방 후 북한으로 귀국, 황해도 해주에서 황해도 도당위원회 선전부장으로 활동했다. 이 때 음악전문학교를 창설하고 인재를 양성했다. 1947년 평양으로 들어와 조선인민군 구락부장을 지냈고, 인민군 협주단을 창단하여 단장이 됐다.
6.25 전쟁 중인 1950년 9월 중국으로 갔다가, 동년 12월 중국 인민지원군의 일원으로 북한에 돌아와 전선 위문활동을 했다. 1951년 4월 저우언라이의 요청으로 다시 중국으로 간 뒤, 1956년 북한에서 8월 종파사건으로 연안파가 숙청되는 것을 보고 중국 국적을 얻어 정착했다.[3] 이후 중국에서 작곡가로 많은 작품을 남겼다.
한편 1966년부터 시작된 문화대혁명 기간에 홍위병들의 수많은 협박과 함께 친구들에게서 받은 원고가 모두 수색당해 많은 악보 등이 유실되는 등 시련을 겪었다. 마오쩌둥이 죽고 문화대혁명이 끝난 1976년에 베이징 근교의 한 운하에서 낚시를 하던 도중 심장병으로 돌연 쓰러져 62세로 사망했다.[4]
사후 1988년에 덩샤오핑의 명령으로 그가 작곡한 ‘팔로군 행진곡’이 ‘중국 인민해방군가’로 정식 지정되면서 복권됐다.
2009년에는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60주년 기념으로 선정된 신중국 창건 영웅 100인에 이름을 올렸다.#
3. 작품[편집]
'팔로군 행진곡(중국 인민해방군 군가)'가 가장 널리 알려져 있으며, 이외에도 '연안송' 등 여러 곡들을 작곡했다.
4. 정율성 기념 사업[편집]
- 생가가 광주광역시 남구 양림동에 있다. 그의 이름을 딴 도로명인 '정율성로'가 있다. 양림동 휴먼시아2차 아파트 정문 부근 일대인 이곳에는 정율성을 기념하고 소개하는 표지와 작품 등으로 '정율성거리'가 조성되어 있다.네이버 지도 거리뷰 - 정율성로 3.1 만세운동길과 붙어있다. 네이버 지도 거리뷰 - 3.1 만세운동길
- 정율성거리에는 연안송 악보 동판 및 정율성 흉상, 사진, 이력, 키오스크 등 다양한 야외 전시물이 있다. ‘연수요’, ‘평화의 비둘기’, ‘3.1행진곡’, ‘우리는 행복해요’, ‘중국인민해방군 군가’ 등 6곡의 음악을 버튼을 눌러 들을 수도 있다고 한다. 디지털광주문화대전 - 정율성 거리
- 전라남도 화순군 능주초등학교는 교실 하나를 할애해 정율성 한 사람을 기념하는 "정율성 교실"을 설치해 운영하고 있다. 화순군은 2015년 9월 "전라남도교육청과 함께 정율성 선생이 다녔던 능주초등학교에 그의 어린 시절을 담은 ‘기념 교실’을 이달 말까지 설치키로 했다"고 했다.# 그러나 2022년에도 호남대학교 공자아카데미에서 정율성 교실을 탐방했다는 기사와 사진이 있어#, 수년이 지난 현재도 계속 운영 중임을 알 수 있다.
- 전라남도 화순군은 정율성 고향집도 복원해 전시하고 있다. 구글 맵스 - 정율성 선생 고향집
4.1. 국내 기념 사업 진행 논란[편집]
자세한 내용은 정율성 역사공원 조성 논란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5. 기타[편집]
- 귀화한 중국인이기 때문에 공식적인 명칭은 郑律成(zhèng lǜ chéng)이다. 한국어로 읽으면 정뤼청. 중국 바이두백과는 그를 "근대 중국 작곡가"로 소개하고 있다. 바이두백과 郑律成
- 1989년에 김정일의 지시로 조선 2·8영화예술촬영소[8] 에서 정율성의 생애를 그린 장편영화 《음악가 정률성》 제작에 착수하였다. 1988년 '인민상'을 수상한 오혜영 작가가 시나리오 집필을 맡아 중국에 파견되어 자료를 수집하는 등 3년에 걸쳐 공들여 제작되었으며, 1992년에 개봉되었다.
- 2019년, 정율성의 생애를 다룬 만화가 발간되었다. 제목은 《옌안송: 정율성 이야기》. 민중미술가이자 좌파 성향 시사 만화가인 박건웅이 제작했다. 정율성의 딸인 정샤오티가 감사의 인사를 친필로 남겼다.
- 문재인 정부가 정율성을 국가유공자로 서훈할 것을 추진했다는 사실이 뒤늦게 알려졌다. 2017년 문재인 정부의 중국 국빈방문 직후 국가보훈처가 정율성 유족의 신청을 받고 국가유공자 서훈 절차에 착수했다.[9]
그러나 보훈처 내부에서도 북한에서 지역 선동부장을 맡고 인민군가를 작곡한 정율성을 대한민국 유공자로 추서하는 것은 법에 어긋난다며 난색을 표한 것으로 알려졌다. 정율성이 해방 전 중국에서 항일 운동을 했다는 주장도 객관적으로 입증이 되지 않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결국 2018년 제3회 독립유공자 제1공적심사위원회 제3분과 위원 회의에서 "활동 내용의 독립운동 성격이 불분명하다"는 사유로 서훈은 부결됐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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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음력 7월 7일[2] 2018년, 정뤼청 유족은 정뤼청을 대한민국 국가유공자로 등록해달라고 신청했다. 당초 유공자 등록을 추진했던 문재인 정부의 국가보훈처는 검증 결과 끝내 "활동 내용의 독립운동 성격이 불분명하다"는 사유로 서훈을 부결시켰다. 기사[3] 중국인으로 귀화했기 때문에 영어 위키백과는 정율성의 표준중국어 발음의 한어병음 표기인 Zheng Lücheng으로 그의 이름을 표기한다.[4] 1918년생으로 간주할 경우에는 58세.[5] 조선인민군가와는 다른 노래다. 이 쪽은 리범수 작사, 라국 작곡의 노래다. 제목이 비슷해서 그런지 '조선인민군가'도 정률성 작곡으로 잘못 알려져 있는 경우가 많다.[6] 한국명 정설송[7] 한국명 정소제.[8] 조선인민군 총정치국 소속의 예술영화촬영소로서, 주로 북한군의 공적을 찬양하는 영화를 제작하고 있다. 1995년에 조선인민군 창건일이 4월 25일로 변경됨에 따라 '조선 4·25영화촬영소'로 이름이 바뀌었다.[9] 문재인은 당시 베이징대학교에서 연설을 하면서 "광주시에는 중국 인민해방군가를 작곡한 한국의 음악가 정율성을 기념하는 ‘정율성로’가 있다. 지금도 많은 중국인이 ‘정율성로’에 있는 그의 생가를 찾고 있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