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치볼드 웨이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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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영국 국기.svg 제2차 세계 대전 영국군의 장성급 지휘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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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서가 있는 인물만 종전 당시 계급으로 서술
※ 윗 첨자 : 전사
1. 종전시에는 임시 계급이었으나 이후 정식 진급





초대 웨이벌 백작
아치볼드 퍼시블 웨이벌
The Rt Hon. Archibald Percival Wavell
GCB GCSI GCIE CMG MC KStJ PC


파일:Archibald_Wavell,_1st_Earl_Wavell.jpg

출생
1883년 5월 5일
그레이트브리튼 및 아일랜드 연합왕국 에식스 주 콜체스터
사망
1950년 5월 24일 (향년 67세)
그레이트브리튼 및 아일랜드 연합왕국 런던 웨스트민스터
국적
[[영국|

영국
display: none; display: 영국"
행정구
]]

직업
군인 정치인
작위
제1대 웨이벌 백작
에리트레아의 케렌과 윈체스터의 자작
복무
영국군 (1901~1943)
최종 계급
원수
경력
제6보병연대장
제2사단장
팔레스타인 사령부 사령관
남부사령부 사령관
중동사령부 사령관
인도사령부 사령관
미국-영국-네덜란드-호주 사령부(ABDA사령부) 사령관
참전
제2차 보어 전쟁
바자르 계곡 전역
제1차 세계대전
팔레스타인 독립 전쟁
제2차 세계대전

1. 개요
2. 생애
3. 평가
4. 기타



1. 개요[편집]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의 지휘관. 양차 세계대전에 모두 참전했다. 정부의 신뢰를 얻지 못해 자주 교체당했던 불운의 지휘관이다.


2. 생애[편집]



2.1. 제2차 세계대전 이전[편집]


1883년 5월 5일, 아치볼드 그라함 웨이벌[1]의 아들로 태어났다. 서머필즈스쿨(Summer Fields)의 장학생이었던 웨이벌은 이턴 하우스(Eaton House)[2]와 샌드허스트의 영국육군사관학교에 다녔다. 이때, 교장이었던 피어론(Fearon)은 웨이벌의 아버지에게 그(웨이벌)는 충분히 다른 삶을 살아갈 능력이 있으니 굳이 군대에 보낼 필요는 없다고 조언하기도 했었다.[3]

샌드허스트에서 졸업한 후, 1901년 5월 8일, 웨이벌은 블랙와치의 제2대대에 소위로 임관했다. 그리고 제2차 보어 전쟁에 참가하기 위해 전쟁이 끝난 1902년 6월까지 남아프리카로 파견되었다. 그해 10월, 그의 대대는 인도로 파견되었지만, 당시 병에 걸렸던 웨이벌은 그들과 합류하지 못했다. 그는 1903년이 되어서야 인도에 있는 자신의 대대로 복귀할 수 있었고, 1904년 8월 13일, 중위로 진급했다. 1908년 2월, 그는 바자르 계곡 전역[4]에 참여했었다. 1909년 1월, 그는 참모대학에 들어갔고, A 학점으로 졸업한 단 두명의 졸업생 중 한 명이 되었다. 1911년에는 1년 동안 러시아 군에 옵저버로 참여했고, 그해 12월, 그의 대대로 복귀했다.

1912년 4월, 웨이벌은 전쟁성(War Office)의 러시아 부서를 담당하는 3등참모장교(GSO3)가 되었고, 그해 7월, 임시 대위직을 받고 군사훈련국(Directorate of Military Training)의 GSO3로 임명되었다. 1913년 3월 20일에는 정규 대위직을 받았다. 1913년 여름, 키예프의 군사훈련을 방문한 후, 러시아-폴란드 국경에서 스파이 혐의로 채포되었다. 하지만 간신히 자신의 서류에서 의심을 살 만한 문서들[5]을 제거하는데 성공했기 때문에 곧 풀려났다.

1914년 3월, 커라 사건(Curragh incident)[6]이 발생했을 때에도 웨이벌은 전쟁성에서 일하고 있었는데, 이때 그가 자신의 아버지에게 보낸 편지에는 장교들에게 최후통첩을 하는 정부의 태도에 대한 반감이 드러나 있었다.

웨이벌은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할 당시 참모장교로 일하고 있었다. 그리고 1914년 11월, 제9보병여단의 여단장이 되었다. 1915년, 웨이벌은 제2차 이프르 전투에서 그의 왼쪽 눈을 잃었다. 1915년 12월, 몸을 회복한 웨이벌은 프랑스 사령부의 GSO2로 들어왔고, 이듬해 10월, 중령으로 진급하며 1등참모장교(GSO1)으로 임명되었다. 그리고 1918년, 웨이벌은 임시 준장이 되어 팔레스타인으로 파견되었다.

웨이벌은 1915년 4월 22일 유진 매리 쿼크(Eugenie Marie Quirk)와 결혼했고, 4명의 자녀를 낳았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그는 다시 중령이 되었다. 1930년 7월, 웨이벌은 임시 준장 계급을 받고 제5보병여단을 지휘하게 되었다. 그리고 1932년 3월에는 조지 5세의 전속부관(aide-de-camp)이 되어 1933년 10월 소장으로 진급했다. 그러나 당시에는 소장을 위한 직무가 마땅한 것이 없어서 한동안 직무를 담당하지 못하게 되었다. 그러다가 1935년 3월, 그는 제2사단을 지휘하게 되었다. 그리고 1937년 8월, 그는 팔레스타인으로 파견되어 팔레스타인 독립 전쟁에 참전했고, 1938년 1월 21일, 중장으로 진급했다.
1938년 4월, 웨이벌은 남부사령부의 사령관이 되었고, 1939년 7월에는 대장으로 진급하고 중동사령부의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2.2. 제2차 세계대전[편집]



2.2.1. 중동사령부[편집]


웨이벌이 담당한 중동 전선은 전쟁 초기 한동안은 잠잠했으나, 1940년 6월, 이탈리아가 영국에 전쟁을 선포하고 이집트를 침공했다. 당시 이탈리아군의 전력은 영국군을 압도했고, 웨이벌은 이탈리아군을 유연하게 견제하며 반격을 위한 시간을 벌고 있었다. 그리고 1940년, 콤퍼스 작전(Operation Compass)을 통해 리비아에서 성공적인 반격을 가했고, 1941년 1월에는 에리트레아와 에티오피아에서도 이탈리아군을 상대로 승리를 거두었다. 리처드 오코너(Richard O'Connor) 중장이 이끄는 서부사막군단은 13만 명의 이탈리아군 포로를 사로잡는 등 대승을 거두며 리비아에서 이탈리아군을 완전히 몰아낼 기세로 전진하고 있었고, 에리트레아와 에티오피아에서도 이탈리아군들을 격퇴시키며 승승장구하고 있었다. 그러나 1941년 2월, 영국 지휘부는 웨이벌에게 그리스로 병력을 보내라고 압박을 가했고, 웨이벌은 어쩔 수 없이 리비아에서의 진격을 중단시키고 병력을 차출하여 그리스로 파견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참담했다. 1941년 3월, 에르빈 롬멜이 이끄는 아프리카 군단이 리비아에 도착했고, 불과 1주일만에 영국군을 이집트 국경부근까지 몰아냈다. 독일군은 그리스에서도 영국군을 몰아내는데 성공했고, 크레타 섬 전투 이후, 영국군은 상당한 피해를 입고 그리스에서도 완전히 물러나야만 했다.

상황이 이렇게 흘러가자, 갑자기 이라크에서도 파시스트 정권이 들어섰다. 윈스턴 처칠은 이라크를 영국의 주요 거점으로 여겼고, 웨이벌에게 신속히 이라크를 장악할 것을 명령했다. 5월 말, 웨이벌은 이라크를 장악하는데 성공하지만, 처칠은 웨이벌이 중동사령부에 부적합하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웨이벌은 비시프랑스의 지배 하에 있는 시리아와 레바논까지 장악하기 위해 군사를 보냈지만, 생각보다 강력한 프랑스군의 저항에 부딪혔고, 토브룩의 포위망을 뚫기 위해 실행한 배틀액스 작전마저 실패로 끝나자, 처칠은 웨이블 대신 클로드 오킨렉을 중동사령부 사령관으로 임명하게 된다.


2.2.2. 인도사령부[편집]


이후, 웨이블은 인도사령부의 사령관이 되었다. 그는 사령관직을 맡자마자 인도와 이라크 지역을 관할했고, 한달 만에 이라크군을 편성하여 페르시아 침공에 투입했다. 그러나 웨이벌에게는 또 한번의 불행이 찾아왔는데, 바로 1941년 12월, 일본 제국이 영국에 선전포고를 한 것이다. 이후, 웨이벌은 미국-영국-네덜란드-호주 사령부(ABDACOM)의 사령관이 된다.

1942년 2월 10일 밤, 웨이벌은 싱가포르에서 자바로 떠나기 위해 준비를 하던 도중 사고를 당했다. 사고 당시, 그의 지휘차량이 절벽 끝부분에 주차되어 있었는데, 제2차 이프르 전투에서 왼쪽 눈을 잃었던 그가 이 상황을 파악하지 못하고 그대로 문을 열고 내려버린 것이다. 결국 그는 절벽에서 굴러떨어졌고, 등뼈 2개가 부러지는 사고를 당했다. 이 사고 때문에 웨이벌은 종종 신경질적인 면모를 보이게 되었다.

1942년 2월 23일, 말라야가 함락되면서 ABDACOM은 해체되었고, 지휘부는 자바 섬을 떠났다. 따라서 웨이벌은 다시 인도사령부로 복귀했고, 버마의 방어를 담당하게 되었다. 하지만 버마를 방어하는 과정에서 시탕 강 다리를 폭파하려던 사단이 강에 고립되어버리는 사건이 발생했고, 해럴드 알렉산더와 윌리엄 슬림이 버마군단을 지휘하기 위해 파견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군의 공세를 당해내지 못한 영국군은 결국 인도로 철수하게 된다.

1943년 1월, 웨이벌은 원수로 진급하고 그해 4월 22일 런던으로 돌아왔다. 6월 15일, 처칠은 웨이벌을 저녁식사에 초대해서 그에게 인도 총독 자리를 권유했다.

그는 곧 자작 작위를 받았고, 1943년 9월, 공식적으로 인도의 총독이 되었다. 인도의 총독이 된 웨이벌의 첫 업무는 1943년의 벵골 기근 동안 군을 통해 구호품을 보급하여 시민들을 구제하는 일이었다. 웨이블은 집권 초기 인도의 정치인들에게 적지 않은 지지를 받았었지만, 당시의 전반적인 분위기는 인도의 독립을 향해 가고 있었다.[7] 웨이벌은 이런 정치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여러 노력을 기울였지만 처칠과 그의 후임인 클레멘트 애틀리에게 지지를 얻지 못했고, 결국 1947년, 루이 마운트배튼이 인도 총독 자리를 넘겨받게 된다.


2.3. 제2차 세계대전 이후[편집]


1947년, 웨이벌은 영국으로 돌아와서 백작 작위를 얻고, 추가적으로 에리트레아의 케렌과 윈체스터의 자작 칭호를 받았다.

웨이벌은 문학을 대단히 사랑했었다. 그는 다양한 시를 암기했으며, 인도 총독으로 있는 동안 시집을 편찬하기도 했다.

그는 복부 수술 후 병이 재발하여 1950년 5월 24일 사망했다. 그의 장례는 1806년 호레이쇼 넬슨의 장례식 이후로 처음 있는 강변에서의 군장(軍葬)으로 치루어졌고, 그의 시체는 윈체스터 대학에 묻혔다.


3. 평가[편집]


윈스턴 처칠은 1941년의 웨이블의 지휘를 못마땅하게 여겨 그를 오킨렉으로 교체했지만, 오히려 상대였던 롬멜은 웨이벌을 높게 평가했다고 한다.[8]

패전의 장소로만 파견되었던 불운의 장군으로 보이기도 한다.
다만, 그보다는 신뢰를 받지 못했다는 점이 그에게는 더 불운이었을 것이다.


4. 기타[편집]


장군의 영광이나 장군의 영광 3과 같은 게임에서 영국군 지휘관으로 등장한 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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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훗날 제2차 보어 전쟁의 공으로 소장이 된다.[2] 이튼 스쿨(Eton School)과는 다른 학교이다.[3] Schofield, Victoria (2006). Wavell: Soldier and Statesman. London: John Murray. ISBN 978-0-71956-320-1. p.15[4] 1908년, 영국령 인도 북서 변경 지방의 산에 거주하는 부족과 영국군 사이의 전쟁[5] 전쟁성에서 요구한 정보들의 리스트였다.[6] 1914년 영국의 아일랜드 자치법 제정을 앞두고 영국군이 얼스터의 통합론주의자들에 대한 군사적 조치를 준비하자, 상당수의 장교들이 이 명령을 따르기를 거절했던 사건.[7] 웨이블 집권 당시는 모한다스 카람찬드 간디, 무함마드 알리 진나 등 영향력 있는 인도 독립운동가들이 활동하던 시기었고, 영국인들에 대한 인도인의 반감이 거세져가던 시기였다.[8] Mead, Richard (2007). Churchill's Lions: A Biographical guide to the Key British Generals of World War II. Stroud: Spellmount. ISBN 978-1-86227-431-0. p.48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