벵골 대기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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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과정
3. 원인에 대한 고찰
3.1. 정설
3.2. 영국의 책임 논쟁
3.2.1. 영국의 실책설
3.2.2. 영국의 의도적 제노사이드설
4. 출처 및 참고 자료


1. 개요[편집]


1942년 말부터 1944년까지 인도 제국의 동부에서 진행된 대기근. 약 200~300만명의 인도인이 아사한 사건으로 원인과 경과, 그리고 대처 과정에 대한 논란이 있다.


2. 과정[편집]


1943년부터 대기근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자 당시 인도에 주둔하고 있었던 주둔군과 여러 장성들은 인도 지역을 지키기 위해서 본국에 식량 지원을 요청했지만 윈스턴 처칠의 전쟁 내각에서 반대했다. 이것에 대해선 여러 가지 분석이 있지만 확실한 것은 당시 영국 본토마저도 미국의 식량 보급에 의존하고 있었다는 것과 영국 상선들 역시 독일 유보트로 인해 격침되어 심각한 타격을 받고 있었으며 1943년은 일본 해군의 영향력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고 일본의 버마 대공세 등 군사적인 이유에서 손실이 계산에 들어갔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루스벨트 역시 처칠의 식량수송선 지원 요구에 대해 군사작전에 대한 지장을 이유로 거부했다.

본토의 내각의 대처도 안이했지만 최소한의 대처는 하였다. 앞서 언급했듯이 여러 원인으로 인도로 식량 수송에 대해서 부정적인 입장을 보였지만 동시에 호주미국에 원조 요청을 하여 식량을 풀려고 했다.


3. 원인에 대한 고찰[편집]



3.1. 정설[편집]


기근 문서에도 있는 전쟁, 자연재해, 정책의 미비 3개가 겹친 것이 문제라고 할 수 있었다.

  • 전쟁: 당시 태평양 전쟁이 발발한 후 일본군남방작전과 버마 공세로 인해서 버마의 난민들이 벵골 지방을 통해서 유입되고 있었다. 더군다나 일본 해군미드웨이 해전에서 패했어도 아직까진 동남아시아 지역의 영향력이 강한 시기였다. 미드웨이 해전 이후 벌어진 과달카날 전역에서 지난 전투의 피해를 나름 수습한 일본 해군이 미국 해군을 상대로 몇 번의 승전을 거두는 식으로 일본 해군의 영향력이 축소되기까지 많은 시간이 걸렸다. 또 일본의 버마 공세로 인해 영국령 아시아 식량의 15%를 공급하는 곡창이었던 버마산 곡물 수입이 중단된 것도 큰 문제였다. 또한 전시로 인해 교통수단이 징발되거나 국가 통제하에 놓였고 때문에 원활한 식량 공급이 불가능해졌다.

  • 자연재해: 1942년 겨울 벵갈 지역에 폭풍이 왔으며 여기에 더불어 폭풍 후에 병풍해까지 겹쳤다.

  • 현지 악덕 상인의 사재기: 현지 악덕 상인들이 쌀을 유통하지 않고 가격을 올리기 위해 사재기했다. 대개 이런 악덕 상인들은 힌두교도 사회 기준으로 상층 카스트거나 무슬림 사회 기준으로는 벵골어를 사용하는 현지 벵골인이 아닌 우르두어를 사용하는 비하르계였다.[1] 이들 힌두교도 지주와 상인 중 적지 않은 수가 영국 식민통치 기간 동안 벵골에 안착했던 인구였고 영국이 벵골의 치안 확보와 통치를 위해 의도적으로 이주시킨 인구였다. 이들은 자신들과 같은 사람들이 기근으로 죽어나간다는 생각을 하지 않고 "내가 돈 좀 벌겠다는데 천한 것들이 좀 죽으면 어때"라는 마인드로 사태를 키웠다. 이는 원래 공교육을 통한 인권 개념이 제대로 보급되지 않은 사회에서 종종 나타나는 현상이다.[2] 또 1935년 인도 정부법(Government of India Act 1935)에 의거하여 인도에는 수많은 지자체들이 난립하는 가운데 동벵골 인근 힌두교 지자체들은 무슬림들이 많은 벵골에 식량지원을 거부했다. 이후 벵골은 이슬람 국가인 동파키스탄과 인도의 힌두교 다수 주인 서벵골트리푸라로 분리되었다.[3] 여기에 결정적으로 영국 식민 당국은 인근 현지인 곡물 도매상들의 무자비한 이기주의나 힌두교와 이슬람 간의 극한 종교갈등 등 이 지역의 난제들을 바로잡고 무마해서 악영향을 최소화하는 데 관심이 없었다. 그러나 앞서 언급한 "인도정부법"에 의해 이미 당시는 외교, 국방을 제외한 대다수의 내정이 이미 인도 현지 지자체에 이양된 시점이었다.

  • 부정확한 통계: 당시 뱅골은 추정기반의 매우 후진적인 통계시스템을 가지고 있었는데 평소에도 30~40%의 오차는 빈번했다. 당시 인도 대륙에서의 영국인의 비율은 민간인을 포함해도 매우 낮았고 결국 하급 공무원들은 인도 현지에서 조달했는데, 이들은 통계 작성을 위한 필요한 현지 정보를 제대로 제공받지 못할 때가 많았고 공무원의 동기부여나 교육 수준도 낮았다. 기근 당시에도 부정확한 통계로 피해를 가중시켰다.

  • 전염병: 태풍과 홍수 이후 이질, 홍역, 말레리아와 같은 전염병이 창궐했다. 사망자들 중 절반 가량이 어느 정도 식량 수급 안정화된 후 전염병으로 사망했다. 특히 말레리아는 1943년 후반에 급속도로 증가해 기아를 제끼고 가장 큰 사망원인이 되었다.


3.2. 영국의 책임 논쟁[편집]


최대 약 300만 명의 인도인들이 사망하였고 1944년부터 연합군의 우세로 전황이 바뀌고 나서야 대기근을 수습할 수 있었다. 하지만 제1차 세계 대전 때 인도와의 약속을 어긴 영국에 대한 불신이 대기근으로 더욱 심해졌고 이후 벵골 대기근을 제대로 대처하지 못한 것은 꾸준하게 처칠에 대한 비판거리로 작용하고 있다.

다만 원인과 결과를 도출하는 과정애서 여러 논란이 일어나는데 마두스리 무케르지(Madhusree Mukherjee)[4]의 저서 '처칠의 비밀 전쟁'을 바탕으로 히틀러가 학살한 유대인들보다 많은 사람이 죽었다는 등 피해 규모가 부풀려지거나 처칠이 인도인을 학살하기 위해서 일부러 저질렀다는 주장이 정설인 양 퍼지기도 한다.

한국 인터넷상에서는 이 주장으로 인하여 영국을 적대하는 감정을 가진 사람이 늘어났다. 이에 대해서 반박하는 에서는 인도인 다음으로 벵골 대기근의 피해를 입은 벵골인들도 사망자 수가 300만을 초과한 건 아니라고 언급하며 당시 처칠이 군사물자를 줄이며 인도로 식량을 보내도록 지시했고 미국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대통령에겐 인도의 상황을 감안하여 인도로 가는 식량 수송선을 할당 해달라고 편지를 통해 간청한 것이 역사적 사실이며[5] 미국의 유명 역사가 아서 허먼 (Arthur Herman) 역시 "처칠이 없었어도 기근은 악화 되었을 것"과 "처칠과 그의 내각이 기근의 심각성을 알게 되었을때, 전쟁에 대한 노력을 훼손하지 않으면서 최대한 그 피해를 줄이기 위해 노력했다"고 평론했다. 링크 게다가 당시엔 무려 250만 명의 인도 청년들이 영국군에 자원입대해 영국군 소속으로 같이 싸우고 있었기 때문에 영국 입장에선 전쟁으로 본토마저 풍전등화인 상황에서 굳이 인위적인 기근을 만들어 같은 편인 인도를 팀킬해 적을 만들 이유가 하등 없었다.

3.2.1. 영국의 실책설[편집]


It was ultimately special wartime factors that caused this difficult situation to become a disastrous famine. Fearing Japanese invasion, British authorities stockpiled food to feed defending troops, and they exported considerable quantities to British forces in the Middle East. They also confiscated boats, carts, and elephants in Chittagong, where the invasion was expected. This deprived fishermen and their customers of the ability to operate and generally inhibited the sort of low-level commerce upon which many Bengalis relied for survival.

이 어려운 상황이 비참한 기근이 된 것은 궁극적으로 특별한 전시 요인이었습니다. 일본의 침략을 두려워한 영국 당국은 방어군을 먹이기 위해 식량을 비축했고 상당한 양을 중동 의 영국군에게 수출했습니다 . 그들은 또한 침략이 예상되는 Chittagong 에서 보트, 수레, 코끼리를 압수했습니다 . 이로 인해 어부와 고객의 운영 능력이 박탈되었고 일반적으로 많은 벵골인이 생존을 위해 의존하는 일종의 저급 상업이 금지되었습니다 .

(브리태니커)Bengal famine of 1943


당시 인도는 영국의 식민지였고 대기근을 영국이 의도적으로 일으킨 제노사이드였냐 아니냐와는 별개로 영국에 책임이 있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다.

영국이 식민지배를 하면서 인도의 쌀농사를 축소시키고 그것을 가치가 더 높은 목화 산업으로 대체함으로서 인도의 자체 식량생산량과 인구부양력이 파괴된다. 이것이 다른 식량공급지인 버마와 제대로 운송관계가 유지되고 있었을 때는 문제가 없었지만 전쟁이 터지고 버마가 점령된 상황에서 영국이 식량 통제를 하고 운수 시스템에 개입을 함으로서 원활한 식량공급이 불가능해졌고 한 것도 기근 문제를 악화시켰다.

(알자지라)Churchill’s policies to blame for 1943 Bengal famine: Study

기후를 연구하면서 이 기근 참사의 원인은 영국 총리 윈스턴 처칠의 “완전한 정책 실패”의 결과, 즉 정책 실패의 결과라는 의견이 일부 학자들에게서 제시되기도 했다.


3.2.2. 영국의 의도적 제노사이드설[편집]


주로 네오 나치들이 양비론으로 이용하지만 홀로코스트를 일으킨 나치 독일은 전쟁 패망 직전까지 홀로코스트를 그치지 않았으며 이와 달리 영국 정부는 대기근을 수습을 하려고 노력했다는 것은 사실이고 처칠에게만 모든 책임을 돌리는 것은 문제가 있다.[6]

독일 정부의 의도적인 대량 학살과 재난에 대한 방조로 인한 대규모 아사를 동일 선상에 놓을 수는 없다. 독일은 전쟁 말기 물자가 딸리는 와중에서도 가스를 이용해서 유대인들을 대량학살한 것에도 보듯 말 그대로 자신들이 적이라고 여기는 대상에 대한 살상을 위해 계획적, 조직적인 학살을 벌였지만 인도 제국은 기근 사태를 소극적으로 방관하는 데 그쳤다.

결정적으로 영국이 굳이 적을 만들 이유가 1도 없었기 때문에 의도적인 대기근을 일으킬 이유는 없었다.일본에 가담한 자유 인도 임시정부군뿐만 아니라 당시 인도를 방위하던 영국군에도 인도인 병사들이 다수 배치되어 있었는데 행정력에 부담을 주고, 적들에게 명분을 줄만한 짓을 할 이유가 없었다.[7]


4. 출처 및 참고 자료[편집]


  • Hungry Bengal: War, Famine, Riots, and the End of Empire, 1939~1946. Janam Mukherjee
  • 엘니뇨와 제국주의로 본 빈곤의 역사 / 마이크 데이비스 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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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당시 벵골인 무슬림들은 힌두교와 이슬람교가 습합된 형태의 수피 이슬람교를 믿고 있었고 비하르인들은 이들을 같은 무슬림이 아닌 이단 종파로 여겼다.[2] 유사 사례로 1970년대 에티오피아 대기근 당시에도 국제사회의 보급물자가 에티오피아에 도착하자 암하라인 관료들이 "기근은 원래 자주 발생하던 일인데 왜 외국인들이 함부로 이래라저래라 하는가?"라고 따지면서 구호물자가 이웃 피지배 부족들에게 가지 못하게 방해하고 정 구호물자를 전달하고 싶으면 "관세"를 지불하고 가라고 으름장을 놔서 이윤을 챙긴 사례가 있다. 출처 : 독재자의 핸드북[3] 이후 동파키스탄에서도 과거의 악감정까지 쌓여서 비하르인들과 벵골인들 사이에 싸움이 더 커진 것은 물론이다.[4] 서프라이즈 방송에선 역사학자라고 소개됐으나 역사 경력과 무관한 과학자고 시카고 대학에서 물리학 박사를 받았으며 미국 과학잡지에서 편집자로 일했다.[5] 다만 루스벨트는 노르망디 상륙작전 등 군사적인 문제로 거절했다.[6] 나치 독일의 레벤스라움이 홀로코스트, 제노사이드를 통해서 해당 지역의 원주민과 타민족, 타인종을 완전히 절멸시킨 후에 재정착하는 것이 목표였던 반면 영국의 식민지 운영은 최소한 해당 민족의 인종과 절멸을 골자로 삼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일설에서는 오히려 처칠의 노력조차 없었으면 300만 명보다 더 많은 인구가 사망했을 것이라는 의견을 제시하기도 한다.[7] 당장 의도적인 학살인 홀로코스트만 해도 '비용을 최소한'으로 줄이며 효율적으로 진행하기 위한 반제 회의를 열 정도였다. 그리고 이 부담을 줄인다고 한 결과물조차 어떤 방향으로든 당시 독일 행정력과 연관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