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로드 오킨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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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영국 국기.svg 제2차 세계 대전 영국군의 장성급 지휘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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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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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나드 로 몽고메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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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로드 오킨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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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서가 있는 인물만 종전 당시 계급으로 서술
※ 윗 첨자 : 전사
1. 종전시에는 임시 계급이었으나 이후 정식 진급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300px-Auchinleck.jpg
이름
Claude Auchinleck[1]
클로드 오킨렉
출생
1884년 7월 21일/
영국 햄프셔 올더숏
사망
1981년 3월 23일 (향년 97세)
모로코 마라케시
최종 계급
육군 원수
지휘
제1펀자브연대 1대대 (1929~1930)
페샤와르 여단 (1933~1936)
미러트 구 (1938)
친디트 (1939)
제4군단 (1940)
노르노르게 사령부 (1940)
제5군단 (1940)
남부 사령부 (1940)
중동 사령부 (1941-1942)
제8군 (1942)
인도 총사령관 (1941, 1943-1947)
인도 파키스탄 최고사령부 (1947-1948)
주요 참전
· 제1차 세계대전
 메소포타미아 전역
 한나 전투
 제2차 쿠트 전투
 바그다드 함락
 1935년 모흐만드 전역

· 제2차 세계 대전
 노르웨이 전역
 북아프리카 전역
 영국-이라크 전쟁
 태평양 전쟁

서훈 내역
바스 훈장
인도 제국 훈장
인도의 별 훈장
네팔의 별 훈장
대영제국 훈장
비르투티 밀리타리
세인트올라프 훈장
훈공장
체코슬로바키아 전쟁십자장
영국 특무훈장

1. 개요
3.1. 돌아온 인도군 생활
4. 평가
5. 대중 매체에서



1. 개요[편집]


영국의 군인. 2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의 중동 지역 총사령관이었다.

2. 제2차 세계 대전 이전[편집]


영국 올더숏에서 오킨렉은 전통 있는 군인 집안에서 태어났는데, 이 집안은 매우 가난하였다. 그래서 오킨렉은 어릴 적부터 힘들게 일했고, 노력 끝에 장학생으로 버크셔에 있는 웰링턴 대학을 졸업하게 된다. 대학 졸업 후 오킨렉은 샌드허스트 육군사관학교에 들어갔고 1904년에 졸업하여 제62펀자브연대 장교로 배치되었다.

제1차 세계 대전 때는 팔레스타인에서 오스만 제국을 상대로 이집트, 이라크와 요르단 지역, 예멘에서 싸웠다. 1차대전이 끝난 뒤에는 인도에서 근무했다. 1923년~1924년에 인도 병참부 부장을 맡게 되며, 1929년~1930년까지 중령으로 제1펀자브연대 제1대대장, 1930년~1934년까지 인도 퀘타의 참모학교 교관을 역임했다. 그 뒤 대령으로 진급하여 1933년~1936년까지는 페샤와르 연대장을 맡게 되는데, 인도인이 대부분인 인도 주둔군에서 인도 현지사정을 고려하고 인도인을 잘 대우하여 평판이 좋았다. 이러한 배경 속에 승진은 순조로웠고 1936년에는 준장으로 진급하여 인도군 부참모장에 올랐으며 1938년에 소장으로 진급하여 인도 주둔군의 오랜 병영이 있는 메루트 지역 주둔 영국군 사령관이 된다.


3. 제2차 세계 대전[편집]


멀리 인도에 있었지만 능력을 인정받아 중장으로 진급하며 1940년 영국군의 북노르웨이 총사령관으로 임명된다. 여기서 그는 직속 지휘부대로 영국, 폴란드, 프랑스 연합군으로 구성된 25000명의 제4군단과 제5군단을 지휘하게 되었다. 오킨렉은 독일군이 점령한 항구도시 나르빅을 탈환하는 전공을 세우지만 노르웨이는 독일에게 정복당했기에 어쩔 수 없이 철군하게 된다. 이후 1941년까지 인도군 총사령관직을 수행하다가 윈스턴 처칠의 눈에 띄어 대장으로 진급, 중동지역 총사령관에 임명된다.

당시 북아프리카 전역에르빈 롬멜이 헤집고 다니고 있었다. 오킨렉의 선임인 아치볼드 웨이블은 상당수의 병력이 그리스로 떠난 상태에서 롬멜의 예상치 못한 공격을 받고 사막전의 대가인 리처드 오코너 중장을 비롯해서 6명의 장군을 포로로 내주었다. 롬멜의 공격은 완벽한 기습이었고 파죽지세로 밀어닥치는 롬멜의 진격은 토브룩에서 간신히 저지되었다. 롬멜은 계속해서 공격을 가했으나 토브룩은 롬멜의 공세를 막아냈다. 이것을 기회로 웨이블은 반격작전을 감행하지만 롬멜은 두 차례의 영국군의 공세를 모두 막아냈고 롬멜의 드높은 명성은 높아만 갔다.

반격작전의 실패로 아치볼드 웨이블에게 실망한 처칠은 대신 롬멜을 상대할 지휘관을 물색했고 이에 오킨렉이 낙점되었다. 오킨렉은 규모는 작지만 대단히 유능하고 공격적인 장군을 둔 질적으로 우수한 군대를 상대해야 했다.

전체적인 상황은 오킨렉에게 유리했다. 이미 웨이블이 반격을 가하던 시점부터 그리스에서 영국군이 패퇴한 이후로 북아프리카 영국군의 지원은 점점 확대되고 있었다. 그리스로 갔던 병력도 속속 귀환하였고 보급도 원활했다. 반대로 롬멜은 제대로 된 보급을 받지 못하고 있었고 그나마 오는 보급도 영국 공군과 해군에 의해 저지되고 있었다. 이런 유리한 상황을 기회로 오킨렉은 크루세이더 작전을 개시하였다. 크루세이더 작전은 성공하였지만 시디 레제흐 전투에서 롬멜의 공격 때문에 상당한 피해를 입는다.

오킨렉은 롬멜을 거의 격파한 것처럼 보였다. 실제로 오킨렉은 롬멜을 서쪽으로 밀어 붙이면서 최종적인 승리를 앞두고 있었다. 그러나 롬멜은 만만치 않은 상대였다. 롬멜은 군을 추스려 다시 공세로 돌아섰고 다시 한번 승리를 거두며 동진을 개시했다. 롬멜의 신속한 공격 앞에 영국군은 무너졌고 롬멜의 명성은 점점 더 높아졌다. 처칠을 비롯한 수많은 사람들이 롬멜을 칭송하기 시작했다. 원치 않게 롬멜 신화의 밑거름이 된 오킨렉은 롬멜의 명성이 아군의 사기에 미칠 영향을 우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미 오킨렉은 승리를 거둘 때도 롬멜의 만만치 않은 공격을 받아야 했고 다시금 밀리는 상황이었다. 이 상황에서 엄청난 적 지휘관의 명성이 아군에게 부담으로 작용할 것을 걱정할 수 밖에 없던 오킨렉은 결국 이 상황을 우려한 특별포고까지 할 수 밖에 없었다.[2]

가잘라 요새에서 영국군은 다시 한번 기회를 잡았지만 영국군의 실수를 놓치지 않은 롬멜은 이 위기를 넘기고 토브룩으로 진격했다. 롬멜은 이전과 달리 토브룩을 정면공격하는 대신에 토브룩을 지나쳤다가 다음날 바로 회군하여 기습하였고, 토브룩은 함락되었다. 이제 롬멜의 진격을 막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보였다. 처칠은 토브룩 함락을 전쟁 중 가장 놀라운 일로 꼽았을 정도였다. 이집트가 점령되면 영국의 숨줄은 극도로 약해지고 독일군은 중동의 반영세력과 손잡을 수 있으며 더 나아가 인도까지 진격할 수 있을 터였다. 알렉산드리아 항구에서 영국군은 떠나기 시작했고 기밀문서는 불에 태워졌다.

이처럼 위기상황이었지만 오킨렉은 결코 무능한 장군이 아니었다. 오킨렉은 스스로 8군단의 지휘권을 잡았고 이집트로 들어가는 관문인 엘 알라메인에 견고한 방어선을 구축했다. 오킨렉은 엘 알라메인에서 8군단을 지휘하며 롬멜의 공격에 대항했다. 롬멜은 보급이 한계에 다다랐고 오킨렉은 지형상, 보급상의 이점을 살리며 롬멜의 공격을 저지하였다.

상황이 오킨렉에게 유리하지는 않았지만 미국의 지원과 본국의 보급으로 북아프리카의 영국군은 점점 증강되고 있었다. 반대로 롬멜은 보급기지로부터 굉장히 멀리 떨어진 상태였고 오는 보급물자조차 중간에 영국군의 공격을 받아서 손실률이 굉장히 높았다.

시간이 지나면서 롬멜의 공격력은 약해졌고 위기를 넘긴 오킨렉은 영국군의 전력을 강화시켜서 반격을 준비했다. 엘 알라메인의 소모전 상황에서 롬멜에게 한계는 확실했다. 마침내 오킨렉에게 롬멜을 상대로 완벽한 승리를 거둘 기회가 찾아오고 있었다. 그동안 롬멜 신화의 밑거름이 되었지만 이제는 그동안 당한 것을 되갚아줄 차례였으나 운명의 신은 끝까지 오킨렉을 외면했다. 처칠은 엘 알라메인에서 롬멜의 공세를 저지한 오킨렉을 인도로 돌려보내는 인사를 단행하고 북아프리카 총사령관에 해롤드 알렉산더를, 제8군 사령관에는 버나드 몽고메리를 임명한다.

이렇게 된 건 오킨렉이 처칠과 갈등을 빚은 상태였기 때문이다. 처칠이 오킨렉을 선택한 이유는 적극적인 감투정신을 기대하였기 때문이고, 오킨렉이 임명된 후 제일 처음(1941년 7월 1일) 보낸 전보는 "독일은 러시아하고 난리를 벌이느라 정신이 없는데 언제 공격할건가?"였다. 그런데 5일 오킨렉에게서 돌아온 대답은 "준비도 안됐는데 어떻게 들어가는가?"였다. 이 준비란 것을 오킨렉은 하나 하나 나열해가며 마치 어린아이를 달래듯 가르치려고 들었는데, 우선 시리아 점령이 완료되어야 이라크키프로스 권역을 지탱할 수 있다고 운을 뗀 오킨렉은 다음으로 사막전에서는 기갑부대를 마련해야 한다고 넘어갔고, 기갑부대를 뒷받침해줄 보병부대가 필요함을 짚었다. 그리고 이런 지상부대들이 적절하게 운용되기 위해선 전투기, 폭격기, 정찰기, 근접지원기가 충족되어야 하겠으며, 또 지중해 전역의 특성상 해군의 함상지원과 해상봉쇄가 있으면 좋겠고 이 전보를 보고 처칠이 6일에 대답한다. "그런데 저번에 보낸 기갑연대 6개는 어디 있는가?"

이런 식의 대화가 1941년을 넘어 1942년까지 계속, 계속 이어진다. 학을 뗀 처칠은 엘 알라메인이라는 중요한 고비가 넘어가자 기어이 오킨렉을 해임했으나, 곧 알렉산더와 몽고메리 모두 오킨렉 못지 않은 고집쟁이라는 걸 철저하게 깨닫게 되었다.


3.1. 돌아온 인도군 생활[편집]


인도군 총사령관으로 돌아온 오킨렉은 인도 군인들을 배려한 정책을 취했고[3] 이에 많은 인도 군인들이 오킨렉을 좋아하였다. 이렇다보니 인도군은 그에게 충성을 다하며 버마 전선과 북아프리카 전선, 이탈리아 전선에서 활동하였는데 특히 북아프리카에선 뛰어난 지뢰 제거로, 이탈리아의 몬테카시노 전투에서는 용맹한 부대로 활약하게 된다.

그러나 일본군과의 실질적인 교전은 신설된 동남아시아 지역 연합군 총사령부(SEAC)와 그 총사령관 루이 마운트배튼 해군원수에게 맡겨지면서, 오킨렉의 업무는 인도 지역 치안유지와 후방지원에 국한된다. 처칠과의 불화로 야전지휘관으로서의 업무는 사실상 종언을 고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버마-인도 전선에서 활약한 지휘관들은 오킨렉이 인도를 잘 통제하면서 전쟁 수행에 큰 지원 역할을 했다고 인정한다.

한편 급박한 전쟁 중에 오킨렉의 뒤통수를 치는 사건도 벌어진다. 오킨렉은 상당한 애처가로도 유명한 사람이었는데, 아내 제시가 영국 공군의 리처드 피어스(Richard Peirse) 대장과 바람이 난 것이다. 피어스 장군은 전쟁 초기에 영국 공군 폭격기부대 사령관이었다가 1942년부터 인도로 전보되어 인도주둔 영국 공군 및 동남아시아 지역 연합군 공군 총사령관 직을 맡게 되었다. 마침 오킨렉은 피어스와 개인적인 친분도 깊어 임지인 인도에서도 두 가족 사이에는 왕래가 잦았는데… 이게 화근이 되어 불륜으로까지 번진 것이다.

인도를 책임지는 최고위급 사령관 가족 사이에 벌어진 이 불륜 사건은 큰 이슈가 되었다. 1944년 초에 불륜의 낌새를 눈치챈 마운트배튼 제독은 영국 공군 참모총장인 찰스 포털 장군에게 빨리 이들을 떼어놓아야 하니 피어스 장군을 본국으로 소환해 달라고 요구한다. 그러나 불륜관계가 널리 알려지고 돌이키기 어려운 지경이 되자, 마운트배튼 제독은 1944년 11월에 피어스 장군을 보직해임시키고 제시 오킨렉과 함께 영국으로 보내버린다. 이후 피어스 부부는 1945년에, 오킨렉 부부는 1946년에 정식으로 이혼한다.


3.2. 제2차 세계대전 이후[편집]


전쟁이 끝난 뒤 오킨렉은 1946년에 왕의 부관직을 끝낸 후 원수로 진급되고 기사 작위까지 받게 되었다. 그러나 인도와 파키스탄의 분리 정책에 대해서는 불명예스러운 정책이라며 비판했다. 문제는 오킨렉의 이러한 비판이 인도 총독인 마운트배튼 제독과 갈등을 빚게 하는 일이었다는 점.[4] 마운트배튼 백작은 오킨렉을 파키스탄 쪽 주둔군 사령관으로 보냈다.

인도인을 좋게 대해준다는 소문으로 파키스탄에서는 오킨렉을 껄끄럽게 여겼다. 그럼에도 오킨렉은 중립적으로 파키스탄군을 대했지만 파키스탄인들에게 차별대우를 한다는 비난과 고발이 이어지자 1947년 사령관직에서 물러난다. 어차피 파키스탄이 독립하면서 오래가지 않은 직위이긴 했다.

오킨렉은 1948년에 영국으로 돌아오며 실질적으로 퇴역한다. 영국군의 원수는 종신직이며, 모든 보직에서 물러난 뒤에도 현직 시절의 절반의 급료를 지급받는 특혜를 누리기에, 일단 서류상으론 본인이 이것도 포기하지 않는 이상은 현역 군인 신분이 유지된다. 퇴역 이후에는 이런저런 활동으로 소일했는데, 특이하게도 처칠처럼 수채화 화가로도 제법 이름이 높았다고 한다. 이후 1967년에 모로코의 마라케시로 이민을 가서 그곳에서 조용하게 여생을 보내다가 1981년 3월 23일에 97세로 세상을 떠났다.


4. 평가[편집]


전쟁 전에 인도군 총사령관에 오를 정도였고 2년마다 계속 진급할 정도로 확실히 능력이 있었으며 비록 롬멜에게 여러 차례 패배했고 승리조차 확고하게 얻어내지 못했지만 롬멜에게 오킨렉은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롬멜은 생애 최고의 기회를 잡았지만 엘 알라메인에서 오킨렉의 철저한 대비 때문에 좌절해야 했다. 그러나 능력에 비해서 비중은 거의 없다.

흔히 에르빈 롬멜라이벌버나드 로 몽고메리를 기억하지만 롬멜과 오랫동안 제대로 싸운건 오킨렉이다. 그럼에도 몽고메리가 기억되는건 몽고메리가 승리자였기 때문이다. 오킨렉은 능력은 있지만 정치인들과 사이가 무척 나빠서 공을 세워도 더더욱 정치권에서 나 몰라라 묻히고 작전이 막판에 틀어진다거나 하는 등 운이 안 따라주었다. 엘 알라메인에서도 고비를 넘기자 몽고메리와 교대해야 했다. 덕분에 '패배는 없지만 승리도 없는 어정쩡한 장군'으로 남았다.

버나드 로 몽고메리가 '사막의 여우' 에르빈 롬멜을 몰아낸 승리자로서 유명해졌고, 이후에 노르망디 상륙작전에 참여해서 연합군의 베를린 진격을 지휘하고 이 공적으로 원수계급에 작위까지 받았으며 롬멜의 라이벌인 연합군의 명장으로 길이 기억되는걸 생각하면 오킨렉은 어지간히도 운이 없다. 본인은 몽고메리를 보면서 매우 씁쓸해 했을 듯 하다. 물론 그도 전후에 원수로 진급되긴 했지만.[5] 엄밀히 따지면 롬멜의 북아프리카 전선 패배는 사실상 오킨렉이 거의 만들어놓은 것이나 다름없게 때문에 더욱 안타까운 부분.

성격적으로는 사치와 화려함을 매우 싫어하고 조용한 성격이었으며 일반 사병을 무척 생각해준 덕장이었기에 사병들에게 인기가 많았다고 한다. 이런 점으로도 버나드 몽고메리와 극과 극. 또한 정치인들과 무척 극과 극이라서 윈스턴 처칠이라든지 왕족인 루이 마운트배튼 경에게 따져들었기에 그의 공이나 존재가 더 묻혀졌던 비운의 장군이다.


5. 대중 매체에서[편집]


미국대체역사소설 최후의 신조 초반부에 잠깐 등장한다. 1941년, 영국이 나치 독일에 항복한 뒤로도 오킨렉 원수의 인도 주둔 영국군은 추축국에 끝까지 저항하다가, 1947년에야 발터 모델 원수가 이끄는 독일군에 항복하게 된다. 항복 절차를 밟으면서 오킨렉은 '"본국은 옛날에 항복했는데 니들은 계속 저항했으니 인도 주둔군은 산적떼 아니냐?"라고 도발하는 모델 원수에게 빡쳐서 항의했으나, 이미 대세는 기울어진 바 순순히 항복하고 수용소로 끌려가고 만다.

Easy Tech 작품에서도 다음과 같이 등장한다.
  • 세계 정복자 3에서 플레이어가 고용 가능한 장군과 소련 진영 캠페인 5단계에서 적장으로 나오지만 그다지 강하지는 않다.

  • 그러나 그 후속작인 세계정복자 4에서는 기갑 기본 3성에 최대 5성에다가 사막전 특성도 보유한, 나름 쓸만한 장군이 되었다. 그런데 몽고메리는 기본 5성에 최대 6성이다.

  • 장군의 영광 3에서 인해전술과 사막전 특성을 가지고 있는 장군으로 등장하나 성능은 그닥 좋지 않다.

제2차 세계대전을 배경으로 하는 전략게임인 Hearts of Iron IV에서 영국군 장군으로 등장한다. 또 참모로도 굴릴 수 있으며 성능도 좋다.

위 게임에서 추축국이 제2차 세계대전에서 승전했다는 대체역사로 만든 모드인 The New Order: Last Days of Europe에서 독일에게 패망하여 독일의 괴뢰국이 된 잉글랜드에서 활동하는 잉글랜드 저항군의 지도자로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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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클로드 오킨레크 혹은 클로드 오친렉으로도 불리운다.[2] 부하들을 불러놓고 "롬멜 별거 아니다. 이름만 듣고 겁먹지 마라."한 뒤에 "그렇다고 내가 롬멜은 질투하는건 아니다."라고 덧붙인다. 지휘관으로써는 엄청난 굴욕. 하지만 뒷붙인 한 줄은 그냥 흔한 영국식 유머였다고 보는 이들도 있다.[3] 인도 식민지군에서 대대장과 사단장을 역임하는 등 오랫동안 인도에 체류했기 때문에 인도인들과 친했고 인도 문화에도 익숙했다.[4] 마운트배튼은 내각으로부터 인도를 최대한 온전하게 독립시키되, 그게 불가능하다고 판단될 경우 영국의 위신 손상을 최소화하는 선에서 조치하라는 직접적인 지시를 받은 상태였다. 그가 인도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힌두교도와 이슬람교도 간의 갈등이 돌이킬 수 없을 수준으로 커졌고, 그래서 마운트배튼은 플랜 B인 분리 독립을 밀어붙인 것이다. 그 와중에 오킨렉이 불명예적인 정책이라며 비판을 해 내부 총질을 하니 당연히 총독 입장에서는 고까울 수밖에 없다.[5] 영국 공군휴 다우딩과 비슷한 케이스. 다우딩 또한 처칠과 갈등을 빚었으며 결국 영국 항공전의 승리를 앞두고 해임되었다. 그리고 결국 최종계급은 대장으로 끝났다. 그나마 인정은 빠르게 받은 편이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