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세난드
덤프버전 :
1. 개요[편집]
서고트 왕국 가톨릭 9대 국왕.
2. 행적[편집]
갈리아 나르본네시스 지역에서 광대한 영지를 소유하고 셉티마니아 공작을 맡았던 서고트 귀족으로, 형제로 나르본의 셀바 주교, 베지에의 베드로 1세 주교가 있었다. 또한 친척으로 브라가의 성 프룩투오수스가 있었다. 631년, 수인틸라 왕의 귀족 억압 정책에 반감을 품은 서고트 귀족들이 그를 중심으로 반란을 일으켰다. 그는 프랑크 왕국에 도움을 요청하면서 그 대가로 500파운드에 달하는 황금 접시를 바치겠다고 제안했다. 이 접시는 훈족과의 전쟁 때 플라비우스 아에티우스가 아버지 테오도리크 1세를 잃은 토리스문드에게 위로하는 차원에서 선물했다고 전해지는 보물이었다. 프랑크 왕 다고베르 1세는 이 제안에 혹하여 시세난드롤 돕기로 했다.
프랑크 왕국이 시세난드를 도우려 한다는 소식이 이베리아 반도 각지에 알려지자, 민심은 급격히 동요했다. 프랑크군이 사라고사에 도착하자마자 사라고사 시민들이 시세난드에게 귀순했고, 모든 군대는 시세난드를 왕으로 선포했다. 631년 3월 26일 시세난드가 툴레도에 입성한 후 수인틸라는 폐위되었지만, 시세난드는 수인틸라를 죽이지 않고 2년간 감옥에 가두었다. 프랑크군이 노획한 전리품을 싣고 조국으로 돌아간 뒤, 다고베르트 1세는 약속한 접시를 받기 위해 그에게 사절을 보냈다. 그는 약속대로 접시를 건넸지만, 사절들이 귀환 중에 강도떼의 습격을 받으면서 접시를 잃어버렸다. 이후 양자간의 긴 협상 끝에, 다고베르 1세는 200,000솔리디에 달하는 금액을 보상받기로 합의했다.
그러나 즉위 직후 그라나다, 메리다 일대에서 유딜라가 대규모 반란을 일으켰고, 톨레도 교회에서도 새 정권을 지원하는 문제에 대해 이견이 오간 끝에 갈라디 대주교가 인근 수도원으로 은퇴한 사건이 벌어졌다. 뒤이어 대주교를 밑은 유스투스는 왕의 지원을 받은 장로 게론티우스와 정쟁을 벌였다. 이렇듯 안팎으로 갈등이 벌어졌지만, 세비야의 이시도르 주교가 시세난드를 지지하자, 명망높은 그의 의견을 무시할 수 없었던 성직자들이 순응하면서 교회의 분란은 잦아들었다.
633년 12월 5일, 세비야의 이시도르 주교가 의장을 맡고 나르본과 이베리아 전역에서 온 66명의 주교가 참여한 제4차 톨레도 공의회가 열렸다. 이 공의회에서 전 왕 수인틸라의 '악행'을 폭로하고 시세난드의 왕위 계승을 확정했으며, 수인틸라를 먼 곳으로 유배하는 조치가 내려졌다. 또한 공의회는 왕에 대한 충성 맹세를 지키지 않고 목숨을 노리거나 왕위를 찬탈하려고 시도한 모든 사람들을 저주하기로 결의했으며, 그에게 대적한 사제들은 공개적으로 회개하고 수도원으로 물러가야 했으며, 외국 교회와 비밀 서신을 주고받은 것 역시 금지되었다. 시세난드는 온건한 군주로서 정당하고 경건하게 통치할 것을 약속했으며, 세습을 포기하고 왕위 계승을 귀족과 성직자들에게 맡기겠다고 밝혔다. 이 공의회가 631년 시세난드가 왕위를 장악한 직후가 아니라 2년 후에야 소집된 것은 633년에 유딜라의 봉기를 진압한 것과 관련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시세난드는 교회에 대한 감사의 뜻으로 성직자들의 모든 세금을 폐지했다.
공의회는 시세부트 왕으로부터 개시된 유대인에 대한 박해를 더욱 강화했다. 유대인이 기독교인 노예를 갖는 것을 금지하는 법령을 재확인하고, 유대인이 기독교인 여성과 결혼하거나 동거하는 것을 금지했다. 또한 세례를 받은 유대인 자녀는 부모와 분리되어야 하며, 세례받은 유대인들이 유대교 신앙을 가진 유대인들과 접촉을 유지하는 것도 금지되었다. 이를 따르지 않는 자는 처형되거나 노예로 팔려갔고, 기독교인이었다가 유대교로 개종한 자는 공개 채찍질을 당했다. 유대인으로부터 뇌물을 받아 법령을 집행하지 않는 자는 세속인이든 성직자이든 상관없이 파문을 선고받았다.
그리하여 왕위를 공인받은 시세난드는 636년 3월 12일에 사망했고, 친틸라가 귀족과 주교들에 의해 왕으로 선출되었다.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2023-12-05 13:02:29에 나무위키 시세난드 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