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인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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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서고트 왕국 가톨릭 8대 국왕.
2. 행적[편집]
일부 기록에 따르면, 레카레드 1세와 고트족 첩실인 바도의 아들이라고 한다. 하지만 역사가들은 이 기록의 신빙성을 의심하고 있다. 또한 시세부트의 딸이자 레카레드 2세의 누이인 테오도라와 결혼했다는 일부 역사가들의 가설 역시 확실하지 않다. 그는 시세부트에 의해 사령관으로 임명된 후 칸타브리아 부족 로콘 또는 룬콘 부족을 복속시켰으며, 이베리아 반도 남부 지대를 점거하고 있던 동로마 제국과 맞서 싸워 여러 요새를 공략했다. 621년 2월 시세부트 왕이 사망하고 뒤를 이은 레카레드 2세마저 그해 3월에 사망하자 왕으로 선포되었다. 역사가 베르나르드 배크라치는 수인틸라가 어린 왕을 살해했으며, 시세부트의 박해에 원한을 품은 유대인들이 수인틸라를 지원했을 거라고 주장했지만, 이것이 사실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그는 즉위 직후 동로마 제국군을 이베리아 반도에서 완전히 축출하기 위해 전쟁을 감행했다. 2명의 동로마 총독을 사로잡는 등 맹렬한 공세를 벌인 끝에, 625년경 이베리아 반도의 마지막 동로마 요새인 카르타헤나가 함락되었고, 발렌시아에서 카디스까지 이어지는 지중해 연안지대가 서고트 왕국의 영역에 귀속되었다. 세비야의 이시도르는 그가 이베리아 전역을 통치한 최초의 왕이라고 밝혔다. 다만 지브롤터 해협 건너편의 세우타와 발레아레스 제도는 동로마 제국의 영역으로 남았다.
한편, 그의 통치 초기에 바스크인들이 서고트 왕국 북쪽 지대를 습격했다. 그는 동로마 제국과의 전쟁을 마무리한 뒤 이들을 상대로 공세를 벌인 끝에 바스크인들이 자신의 권력에 복종하고 인질을 바치게 했다. 이후 바스크인들의 재침을 막기 위해 올리타 요새를 건설하고 수비대를 배치했다.
그는 왕권을 강화하고 세속 귀족과 고위 성직자의 영향력을 제한하려 했다. 그는 후계를 미리 정하기로 하고, 어린 아들 레키메르를 공동 왕으로 선임했다. 그러나 레키메르가 요절해버리면서, 후계 구도를 굳히려던 그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또한 귀족의 권리를 축소하려는 그의 정책은 귀족들의 반발을 샀다. 프랑크 연대기 작가 프레데가르는 "수인틸라가 동료들에게 매우 무례했고 왕국의 모든 고귀한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았다"라고 기록했다. 한편, 그는 시세부트의 반유대주의 정책을 지속했지만 강도를 어느정도 누그러뜨렸기 때문에 해외로 망명한 유대인들이 이베리아 반도로 돌아갈 수 있었다.
631년, 시세난드가 이끄는 귀족들이 수인틸라에 맞서 반란을 일으켰다. 그들은 프랑크 왕국에 도움을 요청하면서 그 대가로 500파운드에 달하는 황금 접시를 바치겠다고 제안했다. 이 접시는 훈족과의 전쟁 때 플라비우스 아에티우스가 아버지 테오도리크 1세를 잃은 토리스문드에게 위로하는 차원에서 선물했다고 전해지는 보물이었다. 프랑크 왕 다고베르 1세는 이 제안에 혹하여 시세난드롤 돕기로 했다.
프랑크 왕국이 시세난드를 도우려 한다는 소식이 이베리아 반도 각지에 알려지자, 민심은 급격히 동요했다. 프랑크군이 사라고사에 도착하자마자 사라고사 시민들이 시세난드에게 귀순했고, 모든 군대는 시세난드를 왕으로 선포했다. 631년 3월 26일 시세난드가 툴레도에 입성한 후 그는 폐위되었지만, 시세난드는 그를 죽이지 않고 2년간 감옥에 가두었다. 633년 제4차 툴레도 공의회에서 새 왕의 즉위가 합법화된 후, 그는 아내와 아이들과 함께 유배된 뒤 곧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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