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카레드 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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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고트 왕국 가톨릭 군주
Reccared I | 레카레드 1세
파일:레카레드 1세.jpg
제호
한국어
레카레드 1세
라틴어
Flavius Reccaredus
스페인어
Flavio Recaredo
생몰 년도
미상 ~ 601년 12월 21일
재위 기간
586년 ~ 601년 12월 21일

1. 개요
2. 행적



1. 개요[편집]


서고트 왕국 가톨릭 2대 국왕. 서고트 왕국국교아리우스파에서 가톨릭으로 바꾼 인물이다.


2. 행적[편집]


서고트 왕국의 이베리아 반도 통합을 이뤄낸 정복군주 리우비길드와 알려지지 않은 여인 사이의 차남이다. 형으로 헤르메네길드가 있었다. 573년 사바리아를 평정한 아버지에 의해 형과 함께 사바리아의 경영을 맡았다. 리우비길드는 578년 그의 이름을 따서 레코폴리스를 건설했다. 레코폴리스는 30헥타르에 달하는 큰 도시로 성장했고, 도시 내 언덕의 가장 높은 부분에 동로마 제국 양식의 대성당이 있는 궁전이 세워졌다.

579년 또는 580년 세비야를 비롯한 베티카 속주를 맡은 형 헤르메네길드가 가톨릭 세례를 받은 뒤 이단아리우스파로부터 가톨릭을 수호한다는 명분을 내세우며 아버지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켰다. 리우비길드는 584년 반란을 평정했고, 헤르메네길드는 아버지에게 항복한 뒤 타라고나로 유배되었다가 585년 3월 24일 리우비길드의 사주를 받은 것으로 추정되는 시세베르트라는 인물에게 살해당했다. 그렇게 형이 사라지면서, 그가 유력 후계자가 되었다.

585년 프랑크 왕국이 셉티마니아로 쳐들어오자, 그는 아버지의 명령을 받들어 군대를 이끌고 반격해 카바레 요새를 점령하고 툴루즈 일대 대부분을 황폐화하고 많은 포로를 잡았다. 뒤이어 론 강 유역의 잘 요새화된 도시인 우게른을 공략했다. 이렇게 확보된 재산 및 포로들은 님 시로 이송되었다. 586년 레카레드 1세는 재차 공세를 개시해 나르본에 도착하여 여러 전리품을 획득한 뒤 이베리아 반도로 귀환했다. 그러던 중 아버지가 그해 4월 21일에 사망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군대의 추대를 받고 새 군주로 등극했다.

파일:가톨릭으로 개종하는 레카레드 1세.jpg

그는 다수의 신민이 신봉하는 가톨릭을 박해하고 소수의 고트 귀족만이 믿는 아리우스파를 고집하는 건 어리석은 짓이며, 로마 교황과 프랑크 왕국 등 주변 가톨릭 국가들과의 관계를 개선하려면 가톨릭을 국교로 삼는 게 최선이라고 판단했다. 그리하여 587년 2월 또는 3월에 정식으로 가톨릭 세례를 받고 아리우스파 사제들에게 가톨릭으로 개종하라고 권고했으며, 그해 4월 툴레도에서 가톨릭을 따르는 성 마리아 교회를 축성했다. 이후 아버지가 몰수한 교회 재산을 전부 돌려주고 파괴된 교회와 수도원을 복원했으며, 형의 명예를 신원하고 형을 죽인 시세베르트를 체포해 처형했다.[1]

589년 툴레도에서 공의회를 개최해 바르셀로나, 발렌시아, 비세우, 투야, 루고, 포르투, 팔렌시아, 토르토사 등 각 도시의 주교들을 불러들었다. 여기엔 48명의 아리우스파 주교와 8명의 전 아리우스파 주교들도 참석했다. 그들은 왕의 권고에 따라 공식적인 자리에서 가톨릭으로 개종해 지위를 유지했다. 그는 가톨릭 주교와 전 아리우스파 주교가 각각 한 명씩 별도의 교구를 임시로 다스리게 했다. 이외에도 유대인들은 기독교인 노예를 두는 것을 금지하고 기독교인 여성 사이에서 첩을 두는 것을 금지하고, 첩실에게서 낳은 아이들에게도 세례를 주도록 규정하는 등 전례와 교회법에 관한 일련의 법률이 반포되었다. 비클라르의 요한은 그가 325년 니케아 공의회에서 아리우스파를 정죄한 콘스탄티누스 1세와 451년 칼케돈 공의회에서 네스토리우스파를 정죄한 마르키아누스와 동등한 업적을 이뤘다며 극찬했다.

툴레도 공의회 이후 각지에서 지역 공의회가 소집되어 아리우스파 인사가 가톨릭을 개종하는 것과 관련된 구체적인 문제가 결정되었다. 592년에 열린 세비야 공의회에서는 전 아리우스파 사제들이 사제로서 직위를 유지하고 옛 아리우스파 교회를 가톨릭 교회로 개조하는 조건으로 유지하기로 했다. 그리고 나르본 공의회에서는 글을 읽을 수 없는 사람은 주교로 세워질 수 없다는 법령을 체택했다. 아리우스식 예배는 고트식 언어를 사용했지만, 이제 아리우스파가 공식적으로 사멸되면서 고트인들은 그들의 언어를 거의 완전히 잃어버리고 히스파니아-로마인의 언어로 전환했다.

그러나 아리우스파를 가톨릭으로 개종시키는 정책은 극심한 반발을 초래했다. 많은 고트인들은 아리우스파를 국가 신앙으로 간주하는 데 익숙했으며 이를 바꾸고 싶지 않았다. 여러 귀족은 가톨릭이 국교로 확정되면 자신들의 지위가 상실될 것을 두려워했다. 587년 셉티마니아에서 나르본 주교 아탈루크와 셉티마니아 백작 그라니스타와 빌디게른이 반란을 일으키며 프랑크 왕 군트람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그러나 아탈루크는 곧 죽었고 반란도 신속하게 진압되었다.

588년, 메리다 백작 세가와 아리우스파 주교 수나가 음모자들을 모아 루시타니아 봉기를 꾀했다. 그들은 리우비길드 치세 때 망명했다가 리우비길드가 사망한 뒤 메리다 주교로 복귀한 가톨릭 주교를 살해하고 세가를 왕으로 세워 중앙 정부에 맞서려 했다. 그러나 음모는 도중에 발각되었고, 수나는 망명했으며 세가는 두 손을 잃고 갈리시아로 추방되었다.

더 큰 위협은 리우비길드의 전 왕비이자 독실한 아리우스파인 고이빈타가 지원한 음모였다. 고이빈타는 툴레도에서 반 가톨릭 음모의 주동자 역할을 맡아 아리우스 주교 울디다와 함께 레카레드 1세를 축출할 기회를 노렸다. 그러나 그녀는 곧 사망했는데, 비클라르의 요한은 "목숨을 멈췄다"라는 의미심장한 구절을 남겼다. 이로 볼 때 그녀는 자연사한 게 아니라 모종의 방식으로 살해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또한 울디다는 추방되었고, 음모에 가담한 무리들은 모조리 처벌받았다.

그는 가톨릭으로 개종한 뒤 프랑크 왕국과 친하게 지내려 했다. 킬데베르 2세는 그의 형수이자 자신의 여동생인 인군타 공주의 죽음에 대해 10,000솔디를 배상금으로 받는 조건으로 서고트 왕국과 우호 관계를 맺었다. 그러나 또다른 프랑크 왕 군트람은 동맹 제의를 묵살하고 레카레드에게 반기를 들려는 자들을 지원했다. 그는 이에 대한 대응으로 군트람을 따르는 모든 상인이 셉티마니아를 통과하는 것을 금지했다.

587년, 군트람의 부하인 데시데리우스가 셉티마니아의 도시 카르카손을 침공했다. 이 공격을 미리 파악한 도시 주민들과 서고트군은 도시 외곽에서 데시데리우스와 맞섰다. 전투가 시작되자 고트군은 미리 계획한 대로 후퇴했고, 데시데리우스는 즉시 추격했지만 적을 따라잡아야 한다는 열의가 지나친 나머지 주력부대에서 떨어져 나갔다. 고트군은 즉시 그를 에워쌌고, 데시데리우스는 자신과 함께 오던 소규모 분견대와 함께 살해되었다. 지휘관이 피살당하자, 프랑크군은 어쩔 수 없이 퇴각했다.

589년, 군트람의 또다른 부하 보손이 이끄는 대군[2]이 셉티마니아를 침공해 카르카손에 접근했다. 도시 주민들은 대군에 감히 대항할 엄두를 못내고 군트람 왕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그러나 프랑크군이 승리에 취해 잔치를 벌이고 있던 사이, 레카레드가 파견한 루시타니아의 클라우디우스 공작이 갑작스럽게 습격했다. 프랑크군은 갑작스러운 습격에 당황했지만 곧 전열을 가다듬고 수적으로 열세한 적을 밀어붙였다. 클라우디우스는 후퇴하는 척 하면서 적군을 미리 준비한 매복 지점으로 유인했다. 프랑크군은 적을 추격하던 중 메복에 걸렸다. 투르의 그레고리우스에 따르면, 프랑크군은 약 5,000명을 잃고 2,000명 이상이 포로로 잡혔으며 모든 보급물자를 상실했다고 한다. 나머지 병력은 고트군의 추격에서 가까스로 벗어나 프랑크 왕국으로 도주했다.

한편, 동로마 제국 황제 마우리키우스는 일찍이 리우비길드에게 빼앗긴 이베리아 영토를 탈환하기로 마음먹고 코멘티올로스 장군에게 공세를 시작하라고 명령했다. 코멘티올로스는 먼저 동로마 제국의 이베리아 영토 중심지인 카르타헤나 성벽을 복원하고 새로운 성문을 건설했다. 뒤이어 이베리아 남부 도시들을 차례차례 공략하여 잃어버린 영토를 상당 부분 탈환했다. 레카레드는 프랑크 왕국과의 전쟁을 치르느라 동로마군의 공세를 저지하지 못했다.

한편, 리우비길드에게 패배한 뒤 서고트 왕국에 굴복했던 바스크인들이 반기를 들어 독립을 회복한 후 이웃 지역에 대한 침략을 시작했다. 레카레드는 군대를 파견해 이들을 제압하려 했지만, 평원으로 내려온 적을 격퇴했을 뿐 고산 지대로 숨은 적을 결정적을오 물리치지 못했다. 그는 바스크인들의 침략을 막기 위해 빅토리아를 기점으로 장벽을 세우게 했다.

레카레드는 클라우디우스 등 이베리아-로마 귀족들을 중용했고, 고트인과 로마인에 대해 통일된 법적 절차가 확립된 법률을 발표했다. 이후 고트족과 이베리아-로마인은 동일한 법원에서 동일한 법규로 재판을 받았다. 또한 그는 로마식 이름인 '플라비우스'를 채택했는데, 이후 역대 서고트 국왕들은 플라비우스를 항상 사용했다. 그러나 이러한 정책은 특권을 잃을 것을 두려워한 고트족 귀족들의 반발을 샀다. 590년, 아르기문드 공작이 그를 축출하기 위해 반란을 꾀했다. 그는 왕에게 직접 접근할 수 있는 가장 가까운 신하였기에, 기회가 오면 단검으로 레카레드를 찌르려 했다. 그러나 계획은 도중에 발각되었고, 그는 체포되어 쇠사슬에 묶인 채 툴레도로 끌려갔다. 그 후 오른팔이 잘리고 당나귀에 앉은 채 툴레도 광장을 돌며 민중의 비웃음을 샀다.

그는 586년 프랑크 왕국의 네우스트리아 왕 킬페리크 1세의 딸인 리군타와 약혼했지만 결혼은 하지 않았다. 이후 프랑크 아우스트라시아 왕 시게베르 1세의 딸 클로도신다와 약혼했지만, 프랑크 왕실 일원이었던 고이빈트 왕비가 죽음을 맞이하는 사건이 벌어지면서 약혼은 취소되었다. 이후 레카레드는 바도라는 이름의 고트족 여성과 결혼해 아들 리우바 2세를 낳았다. 601년 12월 21일 툴레도에서 사망했고, 아들 리우바 2세가 왕위에 올랐다.


파일: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__CC.pn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2023-11-25 15:41:19에 나무위키 레카레드 1세 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

[1] 비클라르의 요한에 따르면, 헤르메네길드가 코르도바의 교회로 피신했을 때 레카레드 1세가 아버지에게 귀순하면 목숨만은 보장받을 수 있다며 설득했고, 이를 믿은 헤르메네길드가 귀순했다가 목숨을 잃었다고 한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그가 형의 신원을 회복하고 살인자를 처벌한 것은 형을 죽음으로 몰아가는 데 일조한 것에 대한 죄책감이 반영되었을 가능성이 있다.[2] 서고트 측 기록에 따르면 60,000명에 달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