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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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서고트 왕국 가톨릭 17대 국왕.
2. 행적[편집]
에기카 왕과 에르위그 왕의 딸 시실로의 아들로, 698년 아버지에 의해 공동 왕으로 선임된 뒤 옛 수에비 왕국의 영역을 할당받았다. 701년 11월 15일 톨레도로 소환된 뒤 정식으로 왕위에 선임되었고, 702년 말 에기카가 사망하면서 단독 군주가 되었다. 알안달루스 시기 익명의 무슬림 역사가가 집필한 <754년 연대기>에 따르면, 그는 불신자들과 유배된 이들을 자비롭게 받아들여 하급 관료의 지위를 회복했고, 아버지가 부과한 세금을 줄여 백성들을 기쁘게 했으며, 아버지가 부정직한 신하들에게 부과한 모든 벌금을 공개적으로 해제시켰다. 그는 무고한 사람들을 강한 속박에서 해방시켰고, 그들의 소유물을 돌려주고 재무부가 몰수한 것을 보상했다고 한다.
반면 <알폰소 3세 연대기>에 따르면, 위티자는 자유분방하고 불경건한 인물로 조언을 좀처럼 듣지 않았으며, 많은 아내와 첩이 있는 것에 대한 추문을 방지하기 위해 주교, 장로, 집사들에게 아내를 맞이할 것을 강요했다고 한다. 707년에서 709년 사이에 이베리아 반도에 전염병이 강타하여 많은 이들이 기근과 역병으로 희생되면서, 서고트 왕국의 인구가 크게 감소했다. 그가 망명자들을 불러들이고 성직자들이 아내를 들여서 자녀를 낳을 수 있도록 한 것은 어떻게든 인구를 보충하기 위한 필사의 몸부림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망명자들은 에르위그의 지지자들일 수도 있고, 에기카의 친척인 왐바 왕의 반대자들일 수도 있다.
그는 아직 성인이 되지 못한 아들인 아길라 2세에게 왕권을 넘기려 했으며, 이에 반발하는 귀족들을 가차없이 숙청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중에는 에기카 왕의 궁정에서 고관으로 일했던 파빌라도 있었는데, 파빌라의 아들인 펠라요는 아버지가 처형된 후 이베리아 반도 북서부에 위치한 아스투리아스로 피신한 뒤 그곳에서 나름의 세력을 구축했다. 위티자는 710년경에 사망했는데, 친다수윈트 왕의 손자로 전해지는 로데리크가 귀족들의 추대를 받아 쿠데타를 일으켜 그를 제거했다는 설과 위티자가 자연사했다는 설이 제시되지만 어느 쪽이 사실인지는 불분명하다. 로데리크는 툴레도 등 남부 서고트 왕국의 영토에서 군림했고, 아길라 2세는 이에 맞서 아버지의 측근들을 거느린 채 북부에서 할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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