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고베르 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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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스트라시아의 왕
프랑크인의 왕
네우스트리아와 부르고뉴의 왕

Dagobert I | 다고베르 1세
파일:Dagobert_I_Portrait.jpg
제호
한국어
다고베르 1세
프랑스어
Dagobert I
생몰 년도
604년 ~ 639년 1월 19일
재위 기간
아우스트라시아의 왕
622년 ~ 629년
프랑크인의 왕
629년 ~ 632년
네우스트리아와 부르고뉴의 왕
632년 ~ 639년 1월 19일

1. 개요
2. 행적
3. 가족



1. 개요[편집]


메로베우스 왕조 프랑크 왕국의 군주. 자신의 의지로 왕권을 행사한 메로베우스 왕조의 마지막 왕으로 일컬어진다.


2. 행적[편집]


604년경 클로타르 2세와 베르트루트의 아들로 출생했다. 베르트루트는 부르군트의 파트리키였던 리키메르의 딸로, 처음에는 왕의 정부였다가 613년 할드트루트 왕비가 사망한 뒤 새 왕비로 등극했다. 9살 때 대장염에 걸린 그는 클로타르 2세의 또다른 정부 시킬트의 아들 카리베르 2세와 함께 파리 동쪽에 있는 왕실 휴양지인 루이리로 보내졌고, 그곳에서 성직자들로부터 라틴어와 역사를 배웠다. 10살 때 말타는 법을 배웠고, 여러 스포츠를 즐기고 무기와 방어구를 제작하고 사용하는 법을 익혔다. 615년 궁정으로 돌아와서 가정교사들로부터 정치와 행정에 관한 교육을 받았다.

618년 베르트루트 왕비가 사망하고 619년 시킬트가 새 왕비가 되었다. 622년, 아우스트라시아 귀족들이 클로타르 2세에게 자신들의 왕을 세워달라고 요구했다. 클로타르 2세는 40여 년간 내란에 시달렸다가 자신의 대에 겨우 통합된 왕국을 또다시 분할하라는 요구를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지만, 자기 아들의 입지를 강화하기 위해 다고베르를 먼 곳으로 보내려는 시킬드의 부추김에 넘어갔다. 그리하여 18살의 나이에 아우스트라시아 왕위에 오른 그는 메츠에 도착한 뒤 메츠 주교 아르눌프와 피핀 1세의 보좌를 받았다. 다만 프로방스와 오베르뉴, 랭스 일대는 아우스트라시아로부터 이탈하여 클로타르의 수중에 들어갔다.

624년, 다고베르 1세는 바이에른 귀족 크로도알트가 막대한 부를 활용해 용병을 고용한 뒤 자국을 침략하는 것에 분노해 군대를 파견해 격파한 뒤 크로도알트를 체포한 후 피핀 1세의 조언에 따라 처형 명령을 내렸다. 클로타르는 크로도알트로부터 자신에게 자비를 베풀면 상응하는 대가를 지불하겠다는 서신을 받고 아들에게 크로도알트를 살려주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다고베르는 아버지의 명을 무시하고 크로도알트를 처형헀다. 이 일로 부자간의 사이가 악화되었다.

625년, 클로타르 2세의 아내이자 다고베르 1세의 계모인 시킬트의 여동생 고멘트루트가 다고베르 1세와 결혼했다. 이때 다고베르는 아버지에게 프로방스, 오베르뉴, 랭스 일대를 지참금 형식으로 돌려달라고 요청했지만 거부당했다. 이로 인해 분쟁이 발생하자, 아르눌프를 포함한 12명의 프랑크 귀족들이 공의회를 개최해 중재에 나섰고, 클로타르 부자는 곧 화해했다. 클로타르는 아들의 요청을 받아들이되 루아르와 프로방스의 일부 영토는 계속 가지기로 했다. 626년, 시킬트 왕비와 에탐피아 공작 보소가 간통한 혐의를 뒤집어쓰고 처형되었다. 627년에는 베르토랄트 공작이 이끄는 작센 봉기가 일어났지만 다고베르 1세에 의해 진압되었다. 이리하여 다고베르 1세의 입지는 공고해졌다.

629년 클로타르 2세가 사망했다. 네우스트리아인들은 아우스트라시아 왕이 자신들을 다스리는 것에 반감을 품고 카리베르 2세를 자신들의 왕으로 추대하려 했다. 하지만 아버지의 사망 소식을 전해들은 다고베르는 그들이 미처 왕을 선출하기 전에 재빨리 행동했다. 모든 아우스트라시아 측근들에게 스스로 무장하도록 한 뒤 부르군트와 네우스트리아에 사절을 보내 자신에게 복종하라고 명령했다. 이후 친히 랭스를 거쳐 수아송으로 이동하면서 여러 귀족과 주교들로부터 충성 서약을 받아냈다. 그가 이렇듯 신속하게 움직이자, 네우스트리아 귀족들은 어쩔 수 없이 그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그 후 파리를 수도로 삼고 아우스트라시아 귀족들이 군사적 자치권을 누릴 수 있게 해줘서 지지 기반을 강화했으며, 란덴의 피핀 1세를 궁재로 임명해 지역 귀족들을 통제하게 했다. 또한 카리베르 2세의 외삼촌이며 일전에 그를 네우스트리아 왕으로 세우려는 계획을 주도했던 브로돌프를 처형했다. 이제 이복동생을 자기 마음대로 통제할 수 있다고 확신한 그는 카리베르 2세를 아키텐의 왕으로 세웠다. 몸이 허약했던 카리베르 2세는 3년만인 632년에 사망했다. 아키텐 귀족들은 카리베르 2세의 아들 킬페리크를 왕으로 추대했지만 곧바로 투입된 다고베르의 군대가 킬페리크를 살해했다. 이로써 아키텐은 다고베르 2세에게 귀속되었다.

한편, 슬라브가 점차 서진하면서 프랑크인들과 접촉했다. 프랑크 왕국의 북동쪽 지역에서는 슬라브 상인들이 잇따라 방문했으며, 사모[1]는 6세기부터 시작된 서부 슬라브와 판노니아 평원에 정착한 아바르 사이의 분쟁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가 625년 최종적으로 승리를 거둔 보헤미아의 벤트인[2]으로부터 왕으로 선출되었다. 그는 이러한 상황을 면밀히 살피면서 동방 원정을 떠날 적절한 때가 오기를 기다렸다. 그려던 630년경, 프랑크 상인들이 보헤미아를 지나가던 중 벤트인의 습격을 받아 몰살당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다고베르는 이를 빌미삼아 사모와 전쟁을 벌이기로 결의했다.

왕의 명령이 내려지자, 아우스트라시아 전역에서 군대가 소집되었다. 그는 군대를 세 부대로 나누고 한 부대는 자신이 이끌고 알레만니인으로 구성된 두번째 부대는 흐로도베르크 공작이 이끌었으며, 랑고바르드족 출신 용병들이 세 번째 부대를 결성해 슬라브의 영역을 공격했다. 알레만니족과 랑고바르드족은 국경지대에서 벌어진 몇 차례의 소규모 접전에서 승리해 포로와 전리품을 확보했다. 다고베르가 이끄는 아우스트라시아군은 사모와 수행원들이 자리잡은 보가티스부르크 요새를 포위했다. 그러던 중 사모와 벤트인들이 성문을 열고 프랑크인에게 싸움을 걸였다. 3일간 벌어진 전투에서 패배한 프랑크인들은 숙영지, 보급품, 전리품을 남겨두고 도주했다. 프레데가르 연대기에 따르면, 이 패배는 벤트인들이 특별히 용맹했기 때문이 아니라 다고베르 왕의 왕권 강화 정책에 반감을 품은 프랑크 귀족들의 배신 때문이었다고 한다.

이리하여 다고베르를 물리친 뒤, 사모는 프랑크 왕국으로 서진하여 튀링겐 일대까지 밀어붙이며 약탈과 파괴를 자행했다. 그동안 프랑크 왕국의 봉신으로 지냈던 소르브 공작 데르반은 다고베르를 떠나 사모에게 복종했다. 다고베르는 보복 원정을 벌이려 했지만 귀족들을 통제하는 데 애를 먹었기 때문에 쉽사리 병력을 확보할 수 없었다. 631년, 슬라브인들의 서진으로 곤경에 처했던 색슨족이 다고베르에게 사절을 보내 슬라브인을 포함한 외적의 습격으로부터 아우스트라시아의 국경을 지켜줄 테니 공물을 줄여달라고 요청했다. 다고베르는 그들의 요청을 받아들여 클로타르 1세 시기부터 매년 500마리의 소를 바치는 관례로부터 그들을 해방시켰다. 그러나 슬라브인들이 왕국의 영역을 침략해 약탈을 자행하는 상황은 여전히 지속되었다. 결국 튀링겐 공작 라둘프는 프랑크 왕국이 슬라브인의 습격으로부터 자신들을 지켜주지 못하는 것에 반감을 품고 프랑크 왕국으로부터 독립한 뒤 사모와 동맹을 맺었다.

631년, 수인틸라 왕의 귀족 억압 정책에 반감을 품은 서고트 귀족들이 시세난드를 중심으로 반란을 일으켰다. 시세난드는 프랑크 왕국에 도움을 요청하면서 그 대가로 500파운드에 달하는 황금 접시를 바치겠다고 제안했다. 이 접시는 훈족과의 전쟁 때 플라비우스 아에티우스가 아버지 테오도리크 1세를 잃은 토리스문드에게 위로하는 차원에서 선물했다고 전해지는 보물이었다. 그는 이 제안에 혹하여 시세난드롤 돕기로 했다.

프랑크 왕국이 시세난드를 도우려 한다는 소식이 이베리아 반도 각지에 알려지자, 민심은 급격히 동요했다. 프랑크군이 사라고사에 도착하자마자 사라고사 시민들이 시세난드에게 귀순했고, 모든 군대는 시세난드를 왕으로 선포했다. 631년 3월 26일 시세난드가 툴레도에 입성한 후 수인틸라는 폐위되었지만, 시세난드는 수인틸라를 죽이지 않고 2년간 감옥에 가두었다. 프랑크군이 노획한 전리품을 싣고 조국으로 돌아간 뒤, 다고베르 1세는 약속한 접시를 받기 위해 시세난드에게 사절을 보냈다. 시세난드는 약속대로 접시를 건넸지만, 사절들이 귀환 중에 강도떼의 습격을 받으면서 접시를 잃어버렸다. 이후 양자간의 긴 협상 끝에, 다고베르 1세는 200,000솔리디에 달하는 금액을 보상받기로 합의했다.

632년, 다고베르 1세는 아우스트라시아 귀족들의 요구에 따라 3년 전에 왕비 라그네트루드 사이에서 낳은 시게베르 3세를 아우스트라시아 왕으로 세웠다. 이듬해, 그는 왕비 난틸다로부터 또다른 아들 클로비스 2세를 낳았다. 그는 네우스트리아, 부르군트, 그리고 아우스트라시아 귀족들을 불러모은 후, 네우스트리아와 부르군트인들에게 클로비스 2세를 왕으로 받들고 아우스트라시아인들은 시게베르 3세에게 충성을 맹세하도록 했다.

635년, 하도인에게 부르군트에서 소집한 병력을 이끌고 가스코뉴와 연합하고 프랑크 왕국에 쳐들어와 약탈을 일삼고 있는 바스크인들을 토벌하게 했다. 바스크인들은 전투에서 패한 뒤 피레네 산맥으로 피신하려 했다. 부르군트군은 그들을 맹렬히 추격해 많은 포로를 확보한 뒤, 여세를 몰아 그들의 산악 마을까지 들어가서 집을 모조리 불태우고 모든 재산을 빼앗았다. 다만 철수하던 중 바스크인들의 습격으로 후위대를 이끌고 있던 프랑크 공작 1명이 전사했다. 636년, 가스코뉴 귀족들과 그들의 공작 아이기나는 다고베르에게 바스크인과 손잡았던 것에 대해 용서를 구하고, 아들들을 인질로 보냈다.

다고베르는 여세를 몰아 그동안 프랑크 왕국에 대적하며 연이어 약탈을 벌였던 브르타뉴를 공격해 렌과 낭트를 파괴한 뒤, 친구 엘리기우스 등 사절단을 파견해 복종을 요구했다. 브르타뉴 공작 주디카엘은 다고베르에게 찾아가서 충성을 맹세하며 다시는 프랑크 왕국에 해를 입히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또한 다고베르는 라인 강 하류에 있는 왕국 소유지와 이전의 국경선을 따라 세워진 요새를 회복하고 위트레흐트에 성 베드로 성당과 조폐국을 세웠다. 이리하여 프랑크 왕국은 서고트 왕국의 영토인 셉티마니아를 제외한 갈리아 전체를 장악했다. 그리고 동로마 제국 황제 이라클리오스에게 사절을 보내 양국간의 영구적인 평화를 약속했다.

이리하여 위신을 세웠지만, 일전에 슬라브인들에게 굴욕적인 패배를 당한 일로 아우스트라시아 귀족들에게 경원시되는 것에 불안을 느끼고 그들을 통제하고자 노력했다. 그는 공작들을 해임하고 새롭게 임명하는 방식으로 귀족들이 제멋대로 굴지 못하게 했으며, 콘스탄츠와 추르 등 새로운 교구들 사이의 경계를 규정하는 등 동부 교회도 통제하려 했다. 638년 9,000명의 불가르인들이 아바르족을 피해 바이에른으로 피신한 후 자신들이 이곳에서 겨울을 보내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그는 이를 허용했다간 그들이 아우스트라시아 귀족들의 사병으로 귀속되어 그들의 군사력을 강화시킬 것을 우려했다. 이에 겨울을 보낼 수 있도록 허락한 뒤 군대를 은밇히 파견해 모조리 몰살시켜버렸다. 한편, 그는 유대인들의 공직 참여를 금지한 아버지 클로타르 2세의 반유대주의 정책을 이어가 유대인들에게 가톨릭 세례를 강요했고, 이를 따르지 않은 이들을 추방하라고 명령했다.

638년 말 병에 걸려 생드니 수도원으로 이송된 그는 639년 1월 19일에 사망했다. 그는 죽기 전에 네우스트리아 공작 에가에게 클로비스 2세와 난틸다 왕비를 보필하게 했다. 그러나 그의 아들들이 귀족들에게 휘둘리다가 이른 나이에 잇따라 사망하면서, 메로베우스 왕조의 운명은 암울해진다.


3. 가족[편집]


프레데가르 연대기에 따르면, 다고베르 1세는 세 명의 왕비를 두었다고 한다. 625년, 다고베르는 아버지 클로타르 2세의 왕비 시킬드의 여동생인 고멘트루트와 결혼했지만 자식을 얻지 못했다. 629/30년에 고멘트루트와 이혼한 후 색슨족 출신의 시녀 난틸다를 새 왕비로 세웠다. 난틸다는 네우스트리아와 부르고뉴의 왕이 될 클로비스 2세를 낳았다. 얼마 후 라그네트루트라는 이름의 여인을 왕비로 들여 아우스트라시아의 왕이 될 시게베르 3세와 두 딸 울프군트, 베르힐트를 낳았다. 프레데가르 연대기는 다고베르 1세가 수많은 정부들을 들였지만 이를 일일이 기록하기엔 너무 많아서 지루함을 느낄 수 있기에 언급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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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프레데가르 연대기는 그의 기원을 프랑크인이라고 명시했지만, 현대 학자들은 슬라브인이며 본명은 사모슬라프 또는 사모스뱌트였을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2] 중세에 게르만인들이 자신들과 인접한 지역에 살던 슬라브족을 부르던 명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