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 봄(영화)/실제 역사와의 비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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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실제 역사와의 비교


1. 개요[편집]


영화 《서울의 봄》과 실제 역사와의 비교 및 차이점을 서술한 문서이다.

영화에 등장한 내용이 역사적 사실과 부합할 경우 [사실], 아닐 경우 [허구], 사실을 차용해 다르게 묘사한 경우 [각색]이라 표기한다.


2. 실제 역사와의 비교[편집]


  • [각색] 등장인물들의 모티브가 된 실제 인물은 각각 전두광 ≒ 전두환, 이태신[1][2]장태완, 정상호 ≒ 정승화, 노태건 ≒ 노태우, 김준엽 ≒ 김진기, 최한규 ≒ 최규하, 오국상 ≒ 노재현, 공수혁 ≒ 정병주, 오진호 ≒ 김오랑, 한영구 ≒ 황영시, 도희철 ≒ 박희도, 김창세 ≒ 최세창, 문일평 ≒ 허화평 등이다. 더 자세한 내용은 서울의 봄(영화)/등장인물 문서 참조.



  • 이태신 장군이 갑종장교 출신으로 설명된다.
[사실] 장태완육군종합학교 11기 출신이다. 다만 장교로 임관할 당시 고등학생이었으므로 실제로 갑종장교로 분류된다. 다소 복잡하게 느껴지는 이러한 분류법이 나타난 이유에 대해선 해당문서의 역사 문단 참조.



  • 이태신 수경사령관, 공수혁 특전사령관, 김준엽 헌병감이 연희동 요정에 모이는 장면에서 이들을 맞이하는 사람이 원경 수경사 헌병단장 혼자이다.
[각색] 전두환을 대신해 장태완 수경사령관, 정병주 특전사령관, 김진기 헌병감을 맞이하는 자리에 조홍 헌병단장과 함께 우국일 보안사 참모장도 있었다. 다만 우국일 준장은 반란군 소속이 아니었기에[3] 사건 이후 전두환과 뜻이 맞지 않았는지 일주일만에 결별하고 1995년 12.12 재판에서 증인으로 출석하기도 했다.



  • 육참총장 경호원 권형진 준위가 부상을 입고 피를 흘리면서도 가까스로 도착해서 정 총장의 납치 사실을 전한다.
[각색] 반일부, 김인선 두 명의 실존 인물을 합친 전개이다. 반일부 준위는 총격을 받았지만 다치지 않고 간신히 도망쳐서 해병대 내무반에 도착해 사실을 알렸다. 부상 당한 당사자 김인선 대위는 총탄 4발을 몸에 맞은 후 의식을 거의 잃었다가 잠시 뒤 장태완이 걸어온 전화를 가까스로 받고 앰뷸런스를 보내달라고 외치는데, 그 순간 합수부 요원들이 또 총격을 가해 팔에 관통상을 입고 기절했다. 얼마 후 다시 깨어나서 사력을 다해 공관 밖의 연못으로 기어갔고, 12월의 얼음장 같은 물 속에 몸을 숨긴 채 1시간 반 동안이나 버티다가 결국 공관 초병에 의해 발견됐고 순천향병원으로 후송되어서 가까스로 목숨을 건졌다.



[허구] 실제로는 하나회 소속인 청와대 경호실 병력이 출동하여 무장해제시켰다. 또한 영화에서 묘사된 바와 달리 청와대 경호실 병력과 경호실장 대리 정동호 준장은 공관 안에 상주하고 있지 않았다. 이는 노태우가 경호실에 전화를 걸어 하나회였던 고명승에게 지시를 내려 있었던 일로, 노태우가 12.12 사태에서 2인자 자리를 굳히는 계기 중 하나가 된다.



  • 대통령 경호실장이 하나회 소속이지만 쿠데타 계획을 사전에 몰랐다고 묘사된다.
[허구] 정동호 당시 경호실장 직무대리는 반란군의 일원으로서 부하인 작전과장 고명승과 함께 경호실 병력을 이끌고 헌병들을 제압, 최규하 대통령을 사실상 감금하는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이다. 다만 영화에서는 그가 역사에서처럼 헌병들을 제압하면 전두광이 정문 앞에서 공관 헌병들에게 체포당할 뻔한 장면이 나올 수 없기 때문에 각색된 것으로 보인다. 육사 13기(하나회)라는 자막은 실제 정동호와 맞다.



  • 전두광이 국무총리 공관으로 정 총장 체포 재가를 받으러 갔다가 실패하고 돌아가려 할 때, 육군본부 측의 연락을 받은 경비 병력에 의해 체포될 뻔하다가 간발의 차이로 탈출한다.
[허구] 김진기 헌병감이 국무총리 공관으로 전화를 걸어서 전두환의 소재를 파악했지만 영화에서처럼 즉시 체포 명령은 내리지 않았고 대기 명령만 내렸다. 정승화 총장을 연행한 주체가 확실하지 않았던 상황이라서 즉각 체포 명령을 내리지 못했던 것이다. 그 사이에 전두환은 총리공관을 빠져나갔고, 헌병특별경호대는 하나회의 병력에 의하여 무장해제 당한다. 전화가 걸려올 당시 하나회 일원인 경호실 작전담당관 고명승 대령이 이미 헌병대 무장해제를 위한 병력을 이끌고 온 상태였다.



[각색] 장태완의 전화는 우선 당시 30경비단장으로 해당 장소의 지휘관이었던 장세동이 받았다가 바꾸라는 고성에 선배들에게 넘겼다. 이후 유학성 군수차관보와 먼저 통화한 뒤 황영시 1군단장과 이야기를 나눴다. 이후 차규헌도 바꿔주려 했지만 장태완이 먼저 전화를 끊었다. 유학성, 황영시와 다르게 차규헌은 직속 상관으로 모셨기 때문에 예를 갖추려 전화를 끊었다고 한다. 이 장면으로 유명해진 제5공화국도 황영시와 먼저 통화하다가 유학성과 통화하는 것으로 묘사되었고, 드라마 제4공화국에서는 황영시와 통화한 것은 아예 생략된 채로 유학성과만 연락하는 것으로 묘사되었으며, 경쟁작 코리아게이트에서는 유학성-황영시 순으로 사실 그대로 묘사되었다.



  • 이태신이 행주대교를 홀로 막아서 서울로 진격하던 2공수여단 병력을 돌려보낸다.
[각색] 1공수여단은 특전사령부와 육군본부의 지시를 무시하지 않고 중도에 회군한 뒤, 박희도 여단장이 오면서 다시 출동했다. 다만 '출동하는 전차병력을 혈혈단신으로 막아서는 지휘관의 모습'은 완전히 허구는 아니고, 반란군 소속이었던 김진영 수경사 33경비단장의 일화를 가져온 것으로 보인다. 12.12 당시 하나회의 김진영은 장태완의 명령으로 반란군 진압을 위해 수경사로 집결하는 33경비단 전차중대를 몸으로 막아내고 말로 설득하여 원대복귀하게 했다.[4]



  • 육본 B-2 벙커 입구에 배치되어있던 다수의 헌병 사병들이 차례대로 항전의지를 잃고, 조민범 병장만이 홀로 B-2 벙커의 입구를 끝까지 지키다가 제2공수대원들에게 소총으로 살해당한다.
[사실] 정선엽 병장은 후임 병사 1명과 함께 B-2 벙커 외곽 초소에서 경계근무를 서고 있었으며, 동초 임무 수행 중 계단에서 육본에 침투한 제1공수특전여단 제5대대 제15지역대 소속 공수대원들과 맞닥뜨렸다. 특전사들이 정병장에게 M16 소총을 넘기라고 요구하자 정선엽은 "우리 중대장님 지시 없이는 절대 건네줄 수 없다." 라며 거부하고 자신을 덮치는 공수부대원들과 몸싸움을 벌이며 항전했다. 제압하는 와중 대위 계급의 장교가 자신의 권총으로 정선엽 병장의 목에 댄 뒤 근접사격으로 1발을 쐈고, 권총탄은 그대로 머리를 관통하며 정선엽 병장은 즉사했다. 직후 공수부대원들이 확인사살로 가슴 부위에 소총 3발을 추가로 발포하며 총 4발의 총격을 가했다.# 또한 작중에선 생략됐지만 당시 정선엽 병장 뿐만 아니라 B-2 벙커의 다른 초소의 징집병들 중 일부도 공수부대측의 총기 양도 요구를 거부했다가 특전사들에게 폭행당한 뒤 무장해제 되었다. 러닝타임의 제한과 배역의 비중상 제1공수의 침투과정을 압축하는 방향으로 각색한 듯하다.



  • 김준엽 헌병감이 육본 벙커에서 체포된다.
[허구] 김진기 헌병감은 수경사에서 장태완과 함께 신윤희 중령에 의해 무장해제 당하고 체포되었다. 이 과정에서 육군본부 작전참모부장 하소곤 소장이 저항하다 총탄에 맞은 부분도 생략되었다.



  • 총격전이 여러번 등장하고, 총에 맞고 쓰러지는 인원이 있으며 수류탄도 터지는 등 격렬한 액션 장면이 다수 그려진다.
[허구] 총격전이 정승화 대장 공관 납치와 특전사 점령, B-2 벙커 침투, 수경사 점령 당시 벌어지긴 했으나 영화에서 묘사되는 것 보다는 총격에 당한 인물이 적었다. 전화를 통한 명령과 견제, 협박, 회유가 선행되고 무력사용은 차순위로 사용했기 때문인데, 특히 방어를 하는 진압군은 직접적인 충돌을 최대한 피하려 했기에 실제 인명피해는 9시간 동안 사망자 3명(33헌병대 박윤관 상병, 국방부 헌병중대 정선엽 병장, 특전사령관 비서실장 김오랑 소령)과 부상자 약 40여 명(정확한 부상자수는 파악되지 못했다)으로 그쳤다. 그래서인지 작중 총격전으로 쓰러진 인원이 꽤 나오지만 오진호(김오랑) 소령과 조민범(정선엽) 병장 둘에게만 전사했다는 별도의 자막을 붙여 구분했다.



  • 오진호 소령이 홀로 남아 특전사령관 공수혁 소장을 지키다가 제3공수 15대대장 박수종 중령이 지휘하는 반란군과 교전 끝에 전사한다.
[사실] 극적으로 보이지만 허구가 아닌 실화다. 당시 특전사령부는 하나회의 회유와 협박으로 인해 모든 간부들이 도주한 상태였으며, 사령관 정병주와 비서실장 김오랑만이 사령관실에 남아 문을 막고 끝까지 저항하는 길을 선택했다. 이후 김오랑은 박종규가 이끌고 온 반란군들에게 6발의 총탄을 맞고 현장에서 즉사, 정병주 소장은 영화에서 묘사됐듯 팔에 총탄을 맞고 부상을 입은 채 감금됐다.[5] 특히 작중 김창세(최세창) 준장과 박수종 중령 간의 대화에서 밝혀지는 것처럼, 김오랑은 박종규와 관사 위아래 집에 살며 호형호제하던 절친한 사이였으며, 사건 당일날로부터 불과 며칠 전에도 부부 동반으로 저녁 식사를 같이 할 정도로 가족 간에도 친밀한 관계였다. #[6]



  • 공수혁 소장이 김창세 준장을 보고 "널 15년을 데리고 친자식처럼 생각했는데..." 라며 배신감에 울분을 토한다.
[사실] 육사 13기 최세창 제3공수특전여단장은 영관급 장교였던 시절부터 정병주의 부관으로 복무하며 별까지 단 최측근이었으나, 하나회의 명령을 받고 하극상을 일으켰다. 직속상관을 배신함으로써 전두환을 향한 충성심을 증명한 최세창은 12.12 군사반란 이후 하나회의 핵심 멤버로서 승승장구하여 제20사단장, 수도방위사령관, 제1군단장, 제3야전군사령관, 육군참모차장, 국방부 장관, 대한광업진흥공사 사장, 대한태권도협회장직 등을 역임한다.



  • 이태신이 아내와 통화하며 "오늘도 못 들어갈 거 같으니 미안하다."라고 말한다.[7]
[각색] 사실 이 일화의 주인공은 장태완 장군이 아니라 김오랑 소령이다.# 주인공 이태신에게 관객들이 더 집중할 수 있도록 여러 사건들을 몰아주고, 조연에 해당되는 오진호는 이미 '친한 동료이자 형님에게 살해당하는 최후'라는 비극이 예정되어 있었기에 극의 서사상 오진호에게 감정이 과도하게 집중되는 일을 막기 위해 각색이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 강동찬 대령이 이태신의 30경비단 출동을 말릴 때 '똑똑한 아들'을 언급하며 입학식날 꽃다발 들고가야 하지 않겠냐고 한다.
[사실] 장태완의 아들 장성호는 1981년 서울대 자연대에 수석입학을 할 정도로 총명한 학생이었으나, 이듬해 1982년 1월 9일 돌연 실종 된다. 그리고 한달 뒤인 2월 10일, 경북 칠곡군 왜관읍 근처 산기슭에서 안구를 포함한 몸에 나 있는 모든 구멍에 얼음이 가득 차 있는 상태의 변사체로 발견된다.# 이 장소는 2년 전인 1980년 4월, 아들이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과음 끝에 사망한 장태완의 아버지, 즉 장성호의 친조부의 무덤 근처였다. 반란군들에게 끌려가 서빙고 분실에서 3개월간의 고문 끝에 풀려난 뒤 전국을 유랑하며 줄곧 야인으로 살던 장태완은 이를 계기로 마지막 남은 딸 장현리를 살리기 위해 전두환 정부가 제안한 한국증권전산 사장직을 수락, 2주 뒤인 1982년 2월 25일 주주총회를 거쳐 정식으로 취임]]한다.#



  • 종반부, 이태신이 휘하 부대와 함께 광화문까지 전차를 몰고 행진하여 전두광을 위시한 반란군들과 직접 대치한다. 이후 수경사 야포단에 내린 포격을 준비하라는 명령을 내리지만 국방부 장관은 이태신에게 직위해제를 선언하고, 이태신은 바리케이드를 맨몸으로 뚫고 간 뒤 전두광에게 인간실격 선언을 하고 체포당한다.
[허구] 오락영화로서의 재미와 마무리를 위한 창작이다.# 또한 마지막 실격 선언은 전두환에게 김성수 감독이 하고 싶었던 말을 전달하기 위한 연출로 풀이된다. 실제로 장태완이 요구해서 전두환과 서빙고 분실에서 일대일 독대를 한적이 있었지만, 서로 장선배, 전장군이라고 존칭을 쓰면서 대화를 나누었다고 한다.[8]
다만 노재현 국방장관이 하나회에게 포섭되어 장태완 장군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 무장해제와 항복을 권고하기는 했다. 야포단의 경우 수경사령부로 집결시키려고 했지만, 30사단 관할이었던 행주대교가 1공수에게 점령 당해서 야포단장에게 그 위치에서 30경비단을 향해 포 조준 명령을 내렸다. 다만 경복궁 인근엔 다수의 민가가 밀집해있고, 장태완 장군도 이것을 모르지 않았기에 실사격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작중에서는 2공수가 조명탄을 쏜 것으로 묘사되지만 이 또한 각색된 장면이다. 조명탄일지라도 추진제로 인한 화재 위험이 존재하며, 장태완 장군 역시 회고록에서 조명탄일지라도 발사했다면 막대한 민간 피해가 발생했을 것이라고 회고했다.[9]
마지막 30경비단을 향한 최후의 출동은 실제로 사령부에 주둔하던 전차 4대와 TOW미사일 중대, 그리고 수경사령부 내의 가용 가능한 모든 병력(작중 묘사된 대로 비전투병까지 다 긁어모아 총 104명)을 소집하여 아스토리아 호텔을 공격개시선으로 설정하고 나서려 했다. 그러나 이 때 보유중인 패튼 전차에서 전차부대 본부에서 내려오는 장태완 사살 무전이 들리자 유사시 전차 전력의 배신이 우려된다는 부관들의 만류, 그리고 상술한 반란군에게 포섭된 노재현 국방장관까지 장태완에게 모든 무장을 해제하고 상황을 종료하라는 지시까지 내려와 공격을 포기했다.[10] 결국 장태완 이하 수도경비사령부 HQ의 병력들은 전두환 체포를 포기하고 사령관실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반란군들에게 체포되었다.



  • 쿠데타가 끝나고 전두광이 반란군 주역들과 함께 파티를 열고 '방랑시인 김삿갓' 노래를 부르며 즐거워 한다.
[사실] 실화이다. 검은색 정장 대신 작중 내내 입고 다닌 군복을 입고 나오는 등 관객의 이해를 돕기 위한 연출이 들어가긴 했으나 실제로 1980년 1월 23일 소격동에서 열린 국군보안사령부 식당에서 촬영된 위로연의 모습을 재현한 것이다. 노래가 끝나고 손을 드는 장면도 세심하게 고증했다.[11]



  • 진압군과 반란군 양측 모두 주요 인물들을 제외하면 소심하거나 수동적으로 묘사된다. 진압군의 경우 육본 및 각 전방부대 및 재경부대 지휘관들이 어리석거나 겁쟁이거나 고지식하거나 순진하게만 그려졌고, 반란군의 경우도 특히 도희철은 전두광에게 등 떠밀려서 자신의 부대를 움직이고 출동 명령을 내릴 때도 어쩌지 못해 노태건이 핀잔을 준 후에야 제대로 지시를 내린다. 한영구 1군단장 및 배송학 군수차관보 등 전두환보다 선배인 장성들 또한 상황이 불리하게 돌아가자 내뺄 궁리부터 하는 겁 많고 무능한 기회주의자로 그려진다.
[허구] 주요 인물들을 강조하기 위해 각색된 측면이 있다. 실제로 진압군은 한남동 공관 총격전 소식을 들은 후 누가 정 총장을 납치했는지 그리고 보안사가 어떤 계략을 꾸미는지를 파악하지 못한 채 우왕좌왕 한 정도이고, 영화에서처럼 명백히 보안사와 하나회의 짓인걸 알고 있음에도 대응책 마련을 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다. 또한 김준엽 헌병감 외의 다른 모든 육본 지휘관들을 무능한 캐릭터로 묘사한 영화와 달리, 실제로는 김진기 헌병감 뿐만 아니라 안종훈 육본 군수참모부장[12], 하소곤 육본 작전참모부장[13] 등 다수의 장군이 강경 진압을 주장했다.
반란군 측 조역들도 9사단을 출동시키고 전두광 부재시에 작전 지시를 내리는 등 실제 역사와 흡사하게 묘사한 노태건 외에도 나름대로 스스로 판단과 결단을 내려서 사태를 유리하게 뒤집기 위한 시도들을 했다. 쿠데타 성공의 또다른 1등 공신 박희도는 1공수를 움직이라는 명령에 망설임 없이 단독출동시켰었다. 장태완 장군이 30경비단으로 전화를 걸었을 때 유학성황영시가 직접 받아 대응하며 시간을 끌기도 했고, 신사협정 전략도 입안하는 등 작중에서 묘사된 것처럼 극단적으로 희화화된 모습만 보인 것은 아니었다.



  • 작중 진압군들 중 일부가 북한의 남침 가능성을 언급하며 초동대처와 무력진압에 망설인다.
[사실] 제5공화국 이후에 이뤄진 재판기록이나 출간된 회고록들을 보면 초동대처 진압에 반대했던 인사들은 북한군의 남침 가능성을 신경써야 했고 서울에서 총격전이나 화력을 동원한 전투가 벌어질시 많은 민간인 인명피해가 날 수도 있음을 염려하여 반대했다고 주장했다.



  • 작중 하나회의 폐쇄성과 영향력이 엄청난 것으로 묘사된다. 정 총장은 하나회의 준동을 경계하지만 막연하게 대비하는 것으로만 그쳤고, 이태신은 진압군 내의 장민기(장세동), 원경(조홍), 진영도(김진영) 3인 정도를 미리 주시했을뿐, 최후의 보루였던 수경사의 장교진들마저 하나회의 마수가 뻗쳐있는 것을 파악하지 못했다.
[사실] 이는 당시 상황을 정확히 묘사한 것으로, 오늘날에는 이 사건이 군내 비밀 사조직이었던 하나회의 짓이었다는 것이 널리 알려져 있지만, 12.12 당시는 물론 90년대 초반까지도 하나회가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지, 나아가 하나회라는 조직의 존재조차 군대 내 몇몇 사람들을 제외하곤 잘 알려지지 않은 상황이었다. 1973년 윤필용 사건을 수사하던 강창성 보안사령관이 하나회의 존재를 알아차리고 이를 파헤치려 했으나, 이를 원치 않았던 박정희 대통령에 의해 수사가 덮어지고 강창성은 제3군관구사령관으로 좌천당했다.[14] 심지어 대선배이자 창설멤버인 11기를 비롯한 초기가입자들(대략 50년대 군번) 정도만 제외하면 하나회 내부에서도 서로 누가 하나회인지 조차 모르는 정도였다.[15] 말 그대로 전두환이 패거리를 만들어서 친한 사람들과 몰려다니고 권력 욕을 드러낸다는 정도 수준으로만 알려져 있었고, 정상적인 상황이라면 보안사령부가 이런 상황을 감찰ㆍ파악ㆍ수사를 해야 했으나 그 보안사가 하나회를 비호하는 박정희 대통령의 심복인 전두환의 손아귀에 있어 수사가 이뤄지지 않았다. 반란 당시 녹취된 이건영 3군사령관을 필두로 한 장군들의 통화 내용을 들어보면 # '하나회'라는 단어는 일절 나오지 않으며[16] 이 기록에 따르면 초반에는 반란의 주모자가 누구인지를 몰라서 진압군이 우왕좌왕하는 걸 알 수 있다. 물론 아무리 비밀이었다고는 해도 전두환노태우를 필두로 일부 장교들이 자주 모여서 움직인다는 이야기는 공공연하게 떠돌고 있었고 육군본부 측에도 장세동, 김진영 등이 전두환과 한패라는 것은 어느 정도 알려져 있었다. 하지만 상상 이상으로 깊숙하게 뿌리내리고 있다는 게 백일 하에 드러난 것은 군부정권이 완전히 퇴장하고 난 뒤 문민정부 출범 이후에서야 이루어진다. 정확히 하나회의 정체가 드러나는 것은 6월 항쟁3당 합당 등 수많은 정치적 격변을 겪은 뒤 김영삼이 대통령에 취임한 직후 단행된 하나회 숙청을 위한 대규모 군 인사와 그 과정 속에서의 투서 사건 등을 통해서였다.



  • 쿠데타가 성공으로 끝난 뒤, 전두광과 쿠데타 세력들은 국방장관으로부터 정 총장 체포 관련 동의를 얻고서 대통령 재가를 받기 위해 국무총리 공관으로 다시 찾아가고 최한규 대통령이 어쩔 수 없이 재가하는데, 날짜와 시간을 적으며 사후재가임을 명시한다.
[사실] 실제 노재현 국방장관이 동의한 뒤 최규하 대통령의 재가가 이루어졌고, 당시 자리에 있었던 신현확 총리는 최규하 대통령이 재가 시간인 12. 13. 05:10 AM이라고 적은 사실을 12.12 관련 공판 및 수사에서 몇 차례에 걸쳐서 언급했다.[17] 그러나 신군부 입장에서는 대통령이 재가 시간을 적어놓았다는 것이 기록으로 남으면 명백한 불법 행위임을 드러내는 것과 다를 바 없었기에 이후 신군부가 펴낸 <제5공화국 전사> 부록 1편 390페이지에 실린, 이른바 '수사착수건의' 문서엔 이 재가 시간이 삭제되었다.#
이 사후재가는 12.12 사태가 위법한 행위라는 증거가 되어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 구속 사건/재판 1심에서 전두환 사형이라는 판결을 이끌어낸다. 당시 판결문에 따르면 "이들의 행위는 군형법상 반란죄는 다수의 군인이 작당하여 병기를 휴대하고 국권에 반항함으로써 성립하는 범죄이고, 여기에서 말하는 국권에는 군의 통수권 및 지휘권도 포함된다고 할 것인바, 피고인들이 대통령에게 정승화 총장의 체포에 대한 재가를 요청했다고 하더라도, 이에 대한 대통령의 재가 없이 적법한 체포절차도 밟지 아니하고 정승화 총장을 체포한 행위는 정승화 총장 개인에 대한 불법체포행위라는 의미를 넘어 대통령의 군통수권 및 육군참모총장의 군지휘권에 반항한 행위라고 할 것이며, 원심이 적법히 인정한 바와 같이 피고인들이 작당하여 병기를 휴대하고 위와 같은 행위를 한 이상 이는 반란에 해당한다"는 이유로 전원합의체에서 내란죄가 인정되었다.



  • 이태신은 수경사 내 파견된 보안사 소속 보안부대의 존재에 신경 쓰지 않는 모습을 보이고, 상황이 끝날 때까지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서 보안사 도청에 계속 무기력하게 당한다.
[각색] 장태완은 사태 초반엔 도청에 대해 생각치 못하고 있다가 중반부에 참모 중에 한 사람이 몰래 다가와서 보안부대 요원들이 사령부 작전 상황 등을 실시간으로 보안사령부에 보고하는 것 같다며 알려주었고, 그러자 자신이 실수했다면서 자책했다고 한다. 그러고 나서 곧바로 보안부대 요원들을 전부 다 영창에 입창시켰고 동시에 보안부대로 통하는 모든 통신선을 절단하도록 지시했다.#[18] 작중에서도 일부 언급되지만, 보안사는 그 특성상 모든 군부대를 감찰하고 감시하는 임무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모든 각급 부대에는 이를 담당하는 보안부대를 파견해둔다. 국방부부터 각 야전군, 군단과 사단급 부대 등엔 모두 이에 해당하는 보안부대가 있는데 반란 당시 이 보안부대들은 각급 야전 부대장을 감시, 미행하고, 나아가 부대장 및 지휘부에 대한 회유 및 협박 공작을 진행하면서 쿠데타 성공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보안부대 특성상 각급부대에 분산배치되어 있지만, 그 지휘권은 파입부대가 손댈 수 없고 보안사가 중앙집권적으로 통제하는데 이 점이 보안사 입장에선 최고의 장점으로 발휘된 것이다. 그렇기에 보안사령관이 군부정권 내내 최고의 요직이 된 것이며, 그 이후에도 중시된 것이다.



[사실] 이 역시 당시 군부 지휘계통을 정확히 묘사한 것이다. 1979년 당시 합동참모의장은 군령권이 없고 국방장관을 보좌하는 현역 최고 대장이라는 상징성만 있었다.[19] 군령권과 군정권 모두 다 각군 참모총장이 가지고 있었는데, 그렇다 보니 반란군에게 있어서 합동참모의장은 안중에도 없었고 육군참모총장을 납치한것이다. 실제로 이후 노태우는 회고에서 쿠데타 전 전두환을 만나서 정승화 총장을 참모총장 직에서 물러나게 하기 위해 "군에 대해 미련을 버리지 못하겠다면 합참의장으로 올라가시게 하는 방법도 어려움을 푸는 실마리가 되지 않겠느냐"# 라고 이야기했을 정도로 당시 합참의장은 사실상 없는 사람 취급을 받는 바지사장에 불과했다.



  • 마지막, 반란군 주역들의 기념사진.
[각색] 실제 촬영 당시와는 구성이 약간 다르다. 해당 사진엔 없는 이학봉이 포함돼있고, 개인 사정으로 당시엔 빠져있다가 합성을 통해 사진에 들어간 박준병백운택이 처음부터 함께 등장한다.[20]

[1] 장태완 장군 이름의 앞뒤 글자를 다르게 바꾼 건 충무공 이순신과 합친 것이라는 분석이 있다. 실제로 작중에서 이태신의 사령관실에 사즉생이 적힌 액자가 걸려있으며, 전두광을 잡으러 출동하는 이태신이 광화문 앞 이순신 장군 동상 아래를 지나며 주시하는 장면이 나온다. 반면 정상호 참모총장을 연행하려는 보안사 요원들은 이순신 장군 동상의 뒷모습만 보고 지나갔는데, 이들이 군인정신에 맞지 않는 반란을 자행한다는 점을 암시하는 장치로 해석할 수 있다.[2] 단 김성수 감독은 이태신과 이순신의 직접적인 연관성에 대해 부정했다. 장태완은 세간에 알려진 대로 불같은 성격이었으나, 극중 전두광도 다혈질 캐릭터로 그려지기 때문에 이태신과 대립 구도를 만들기 위해 평소 자신이 생각한 배우 정우성의 이미지를 투영해 고요한 물 같은 새로운 캐릭터로 창조했다고 한다.[3] 쿠데타 성공 이후 주역들의 기념 사진에 얼굴이 나오지만 보안사 참모장 자격으로 찍은 것이고 실제로 전두환 측에서 우국일 장군에게는 쿠데타 계획을 전혀 알려주지 않아서 총격전 이후 장태완, 정병주, 김진기 세 장군들과 함께 원대복귀했다고 한다.[4] 본작에서도 이태신은 33경비단 전차 중대를 출동시키려 하였지만 중대장이 진영도랑 친한 사이라 출동을 거부했다는 언급을 하는 장면이 있다. 참고로 실제 역사에서도 김진영은 전차 중대장과 잘 아는 사이라 설득할 수가 있었다.[5] 김오랑 소령의 시신은 특전사령부 뒷산에 암매장됐다가 정병주 소장의 후임으로 온 정호용의 지시로 부대장이 거행되고 국립서울현충원 유골 안치소로 옮겨졌다. 이후 김오랑의 시신은 사건 3개월이 지난 1980년 2월 28일 국립서울현충원 제29묘역-2923호에 이장되었다. 그의 죽음 이후에 대한 이야기는 김오랑박종규 문서를 참조.[6] 두명 다 44년생 동갑이지만 박종규와 김오랑이 각각 육사 23기, 25기 출신으로 2기수 차이나는 선후배 관계였으며 생일도 2개월 빨랐기에 형 동생으로 가까이 지낸듯 하다. 그래서 박종규 역시 김오랑의 아내 백영옥을 '제수씨'라고 호칭했다.[7] 애처가임을 드러냄과 동시에 암울한 결말을 향한 서사가 강조된다.[8] 사실 이미 대세가 결정된 상황에서, 아무리 성격이 불같았다던 장태완 장군이라 하더라도 저렇게 원색적인 비난을 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9] 사실 아무리 정밀타격을 한다고 해도 155mm 야포를 서울 시내에 사격한다면 작중 전두광의 언급처럼 수많은 인명피해가 불가피했을 것이다.[10] 전차 무전은 엔진 소음 때문에 소리가 굉장히 크게 설정되는 관계로 연병장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들을 수 있었다.[11] 당시 전두환의 옆에서 맞장구를 쳐주는 사람은 당대 최고의 코미디언이었던 서영춘.[12] 이후 군수기지사령관으로 전보된다. 신군부5.17 내란 때도 5월 17일 오전 11시 국방부 제 1회의실에서 열린, 신군부 세력의 비상계엄 전국 확대를 관철하기 위해 열린 전군 지휘관 회의에서도 "비상계엄 전국 확대는 시기상조다. 국민의 합의와 총화에 따라야 한다."라고 끝까지 반대 의견을 내지만 묵살당했다.[13] 이후 수경사에서 진압회의 중 하나회 소속 수경사 헌병단 부단장 신윤희 중령이 이끌고 온 병력의 총격에 폐를 다쳐 중상을 입은 후 3개월의 치료 끝에 겨우 살아남고 하나회에 의하여 80년 2월 강제 예편조치된다. 영화에선 이 부분이 등장하지 않는다.[14] 이후 12.12 군사반란으로 정권을 잡은 전두환은 훗날 강창성을 뇌물수수 혐의로 감옥에 보냈다.[15] 작중에서도 강동찬 대령이 이태신 소장에게 수방사 휘하 지휘관들의 신상을 보고하는 과정에서 "누가 하나회인지 멤버들도 잘 모른다"라는 말로 이러한 하나회의 폐쇄성이 묘사되기는 한다.[16] 영상의 29:58에 쓰인 하나회 말이지요는 (진도개) 하나 (추임새) 말이지요의 오기이다.[17] 1995년 12월 16일 서울중앙지검에서 있었던 검찰 수사에서 신현확 당시 총리는 검사의 질의에 "위와 같이 노재현 국방부 장관이 이미 결재를 하여 가져온 재가서류의 내용을 대략 검토하신 후 일자와 시간을 기입하고 사인을 하는 방법으로 재가했습니다."라고 얘기했다. 출처: 전남대 5.18 연구소가 공개하고 있는 조사 당시의 조서.#[18] 제5공화국에서 이 장면이 묘사되는데 장태완 사령관이 선제적으로 사령부 내 보안부대를 진압할 것을 김기택 참모장에게 지시한다. 또 육군본부 지휘부가 수경사로 이동하면서 함께 넘어 온 육군본부 보안부대장 변규수 준장도 체포해 감금했다.[19] 합참의장이 군령권을 보유한 실권직이 된건 1991년 노태우 정부 때였다.[20] 촬영은 실제 장소였던 국군기무사령부 본관 건물이 아닌 원광대학교 생명과학부 건물 앞에서 촬영했다. 국군기무사령부 본관 건물 자체는 현존하나 2013년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으로 개관함에 따라 미술관의 일부로써 사용되고 있다. 외장재 또한 리모델링 과정에서 교체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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