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오랑

덤프버전 :


김오랑
金五郞 | Kim Oh-rang


파일:attachment/kor.gif

출생
1944년 4월 5일
경상남도 김해군 김해읍 남역리
(現 경상남도 김해시 삼정동 119번지)[1]
사망
1979년 12월 13일 (향년 35세)
서울특별시 강동구 거여동[2] 육군특수전사령부
묘소
국립서울현충원 제29묘역-2923호
본관
김해 김씨
배우자
백영옥
학력
김해 삼성국민학교 (졸업)
김해중학교 (졸업 / 10회)
김해농업고등학교 (졸업 / 34회)
육군보병학교 (졸업)
육군공병학교 (졸업)
육군포병학교 (졸업)
육군대학 (졸업)
군사 경력
복무
대한민국 육군[3]
1969년 ~ 1979년
임관
육군사관학교 (25기)
최종 계급
중령 (대한민국 육군)[4]
최종 보직
육군특수전사령부 비서실장
주요 보직
육군특수전사령관 전속부관
제3공수특전여단 중대장
병과
보병
상훈
보국훈장 삼일장
참전
베트남 전쟁

1. 개요
2. 생애
2.1. 12.12 이전의 이력
2.2. 12.12 당시의 상황
2.3. 순국 후의 이야기들
3. 추모
4. 미디어 매체에서
5. 기타
6. 관련 문서



1. 개요[편집]


12.12 군사반란 당시 육군특수전사령관이었던 정병주 소장비서실장.

정병주 사령관을 불법체포하려던 반란군 신군부 측 무장 병력에 홀로 맞서다가 박종규 중령에게 피살당했다. 사망 당시의 계급은 소령이었으며 사후 10여 년이 넘도록 추서되지 못하다가, 1990년에 이르러서야 중령으로 추서되었다.

2. 생애[편집]



2.1. 12.12 이전의 이력[편집]


1944년 4월 5일 경상남도 김해군 김해읍 남역리(現 김해시 삼정동) 119번지에서 아버지 김종수와 어머니 임순이 사이에서 4남 1녀 중 넷째 아들(막내)로 태어났다. 1957년 김해 삼성국민학교를 졸업하고 어려운 가정형편 탓에 또래보다 1년 늦게 김해중학교(10회)에 입학했다. 김해중학교 졸업 후 김해농업고등학교(現 김해생명과학고등학교, 34회)를 수석으로 졸업한 뒤 부산대학교 공과대학합격했으나, 학비 문제로 인해 등록하지 못하고 이듬해인 1965년에서야 육군사관학교(25기)[5]에 입교했다.

육군사관학교 졸업 후 1969년에 보병 소위로 임관해 제2보병사단 제32보병연대 수색중대 소대장으로 첫 부임하게 되었다. 중위 진급 후 1970년 7월 맹호부대 소속으로 베트남 파병을 다녀왔고, 이듬해인 1971년 10월에 귀국했다. 1972년에는 육군3사관학교 교관을 거쳐 충남대학교 학생군사교육단 교관에 부임했고, 1974년에는 제3공수특전여단 중대장을 맡음으로써 육군특수전사령부(이하 특전사)와 첫 인연을 맺었다. 이후 작전장교, 정보장교 등 여러 보직을 거치며 3년 8개월 동안 특전사에 몸담았다가 육군대학 과정에 입교했고, 육군대학 졸업 후에는 소령으로 진급해 특전사로 원대복귀했다.

장교들이 특전사로 오래 복무하다가 육군대학을 마치면 통상 후방 지역에서 본인이 원하는 편한 보직을 맡을 수 있었다. 그럼에도 굳이 특전사로 복귀한 것은 아내 때문이었다. 그의 아내가 심각한 시력장애를 앓았기 때문에 그나마 치료가 용이한 수도권에 계속 머물고자 했던 것이다. 특전사 복귀 후 제5공수특전여단 부대대장으로 발령 받았으나 불과 한 달 만인 1979년 3월에 특수전사령부 행정장교로 발령받아 정병주 육군특수전사령관비서실장으로 차출되었다.

2.2. 12.12 당시의 상황[편집]


12.12 군사반란의 성패는 수도경비사령부(이하 수경사)와 육군특수전사령부를 조기에 제압할 수 있느냐의 여부였다. 당시 수도권에 주둔했던 부대 중에서 쿠데타에 대처 가능한 부대는 수경사와 특전사였기 때문이다.[6] 이에 전두환 국군보안사령관의 지시로 제3공수특전여단이 정병주 특전사령관 제압을 포함한 지휘부 무력화를 위해 동원된다. 이날 저녁, 김오랑 소령은 아내 백영옥에게 ‘오늘 저녁도 못 들어갈 것 같아. 미안해’ 라는 마지막 전화를 남겼고, 백영옥은 마지막으로 한 ‘미안해’라는 말이 계속 귓전에서 맴돌았다고 한다.

12월 13일 새벽, 제3공수특전여단장최세창 준장이 특전사령관실을 방문하여 마지막으로 정병주 사령관을 회유하려 했지만 성과를 거두지 못한다. 최세창 준장이 돌아간 지 10여 분 뒤 제3공수특전여단 제15대대장 박종규 중령이 이끄는 체포조 10여멍이 특전사령관실로 진입했는데, 이는 특전사령관이 근무하는 사령부 건물이 바로 3공수특전여단의 영내에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김오랑 소령만이 정병주 장군을 지키고 있었다. 다른 장교들, 심지어 자신이 모시는 장군과 제독을 목숨바쳐 지켜야 할 전속부관이 포함된 대부분의 장교들이 신군부 측에 회유당했기 때문이다.

사실 김오랑 소령에게도 신군부 측의 회유가 들어오기는 했다. 그러나 김오랑 소령은 이를 거절하고 상관을 호위하기로 결심하였다. '한겨레 포커스' 관련영상 체포조가 투입될 당시 김오랑 소령이 가진 무기는 8발이 들어있는 권총 한 자루에 불과했다. 결국 김오랑 소령은 반란군에게 가슴과 배 등에 6발의 흉탄을 맞고 현장에서 전사했다.

시신은 당초 특전사령부[7] 뒷산에 암매장되었으나 동료 장교들의 항의로 3개월이 지난 1980년 2월 28일 국립서울현충원 제29묘역에 이장되었다. 김충립 전 특전사 보안반장에 따르면 당시 국군보안사령부에서 김오랑의 장례식을 가족장으로 치르도록 지시했으나, 정호용 특전사령관이 김오랑의 장례식을 부대장으로 치르고 그의 유해를 국립서울현충원으로 이장시켜 주었다고 한다. 정호용 장군이 쿠데타 주역은 아니지만 전두환의 측근이었던 점을 생각하면 꽤 의외의 일. 정호용 장군이 특전사령관 부임 후 가장 먼저 한 일이 김오랑 비서실장의 빈소를 차린 일이었다는 말도 있다. 아무래도 뒤숭숭한 특전사 내부 분위기를 수습하고 반발을 무마시키기 위함이거나 혹은 정호용 장군 개인의 양심 문제였을 수도 있다.

2.3. 순국 후의 이야기들[편집]


김오랑 소령의 양친은 막내아들의 비참한 죽음에 충격을 받고 홧병으로 사망했다. 김오랑의 부인인 백영옥(白榮玉)은, 남편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충격으로 완전 실명했다. 체포조를 지휘했던 박종규 중령과 김오랑 소령은 가까운 선후배라서 충격은 더했다. 두 사람은 관사에서도 위아래층에 살던 이웃이였고 쿠데타가 발발하기 불과 며칠 전에도 부부들끼리 동반으로 저녁식사를 할 정도로 친밀한 사이였다.

훗날 백영옥은 관사에서 퇴거하라는 지시를 받았지만 갈 곳도 없는 상황이였다. 관사에 머무는동안 남편의 죽음에 대해 조사하던 도중, 총격에 맞은 김오랑을 의무실까지 업어준 당번병을 찾았다. 그 역시 상관들에 의해 함구령을 받은 상태였으나, 설득끝에 친하게 지낸 이웃인 박종규 중령이 지시했단걸 알게 되었다. 그 뒤 전화로 왜 그랬냐고 원망하듯 따지자. 박종규 중령은 "난 군인이니까 명령대로 한 거요!" 라고 외쳤다고 한다. 이에 백영옥이 "군인이 반란 일으키라는 걸 명령대로 하나 보죠?" 라며 일갈하자 반론하지 못하고 끊어버렸다고 한다.

1986년 한 여성지에서 백영옥을 인터뷰한 바에 따르면 매달 30만원씩 나오는 연금으로 생계를 유지하고 있었다고 한다.[8] 김오랑-백영옥 부부 사이에 자식은 없었다. 백영옥의 건강문제로 인해, 자녀 계획 자체를 미루고 있었기 때문.

백영옥은 1990년에 전두환, 노태우, 최세창, 박종규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려 했으나 알 수 없는 이유로 보류되었으며, 1991년 6월 28일 자신이 운영하던 부산 자비원 마당에서 변사체로 발견되었다. 당시에는 실족사로 수사가 마무리되었으나 백영옥의 유족들은 의문을 제기했다.[9] 그나마도 처음에는 자살로 발표했으나 유족들의 강력한 반발이 있자 경찰에서 슬쩍 실족사로 수정한 것이다.[10] 또한 국립묘지 안장 대상자였건만, 괴상망측한 까닭에 걸려서 남편과 합장되지 못했다. 백영옥은 사후 친정 오빠들에 의하여 수습되고 화장처리되어 1991년 11월 15일 친정오빠였던 백영도씨가 부산영락공원 무연고 납골당에 안치를 신청하여 20년 가까이 무연고자로 방치되어있다 2008년 3월 31일 개장되어 무연고자들과 합동으로 산골되었다고 한다.

김오랑을 사살한 박종규 중령은 소장 계급까지 진급하였으나 김영삼하나회 숙청 당시 강제 예편되었고 군인연금끊기고 비참하게 살다가 2010년 12월 7일 식도암으로 사망했다. 향년 67세. 늦게나마 참회했는지, 죽기 1년 전인 2009년 12월 9일, 참군인 김오랑기념사업회에 전화를 걸어 자신이 지금 병고에 시달리고 있는 것은 하늘의 벌이라면서 12.12에 참여했던 자신과 자신의 부하들을 용서해달라는 말을 전했다고 한다. #

2022년, 국방부 중앙전공사상심사위원회는 김오랑 중령의 사망을 전사로 판정하였다.[11] 김오랑 중령은 적 교전-무장 반란 등을 방지하다가 사망하였기 때문에 순직에서 전사로 변경된 것이다. #

3. 추모[편집]


12.12 군사반란이 일어난 지 수십년이나 지났지만, 김오랑 중령을 비롯하여 반란군에 대항하다 사망한 장병들에 대한 추모사업은 신군부의 핵심 장본인들을 반란수괴로 단죄했음에도 진행이 지지부진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제19대 국회의원 선거에 당선되어 전반기 국회의장직을 맡게 된 강창희 의원은 김오랑 중령과는 육사 동기이지만 하나회 출신이라 특별법 상정을 꺼린다는 카더라가 돌 정도.

2009년 고 김오랑 중령 추모사업회는 "지난 11월 11일 '고 김오랑 중령 무공훈장 추서 및 추모비 건립 건의안'을 여야 국회의원 48명이 공동 발의하여 국회 본회의에 제출될 예정"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육군사관학교 출신의 국회의원들은 아무도 이 법안에 서명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2013년 4월 22일에야 국회 국방위원회에서 '고(故) 김오랑 중령 훈장 추서 및 추모비 건립 촉구 결의안'과 '10·27법난 피해자의 명예회복법', 군사반란 과정에서 발생한 피해자 보상과 명예회복을 위한 법률안 2건을 심의 및 의결하면서 추모사업의 길이 열리게 되었다. ### 이 과정에서 국회의원들 간에 논쟁이 있었는데, 서훈에는 모두 동의했지만 고 김오랑 중령에게 "무공" 훈장이 적절한지에 대한 여부와 추모비를 육사 내에 세우는 안에 대한 호오가 갈렸다.

송영근 의원은 "12·12는 법원 판결로 군사반란으로 규정이 돼 있다. 국방부에서 이와같은 사람의 공적을 기려줘야 앞으로 상무정신이 살아나고, 진짜 국가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군인이 나타난다"고 밝혔다.

반면 김종태 의원은 "여기 예비역, 현역군도 반역군의 후배다. 그 당시 임무 수행에서 김관진 장관도 자유롭지 못할 것"이라며 "안보 상황이 위태로운 이 시기에 군을 분열시키는 논란은 중지해야 한다"고 밝혔다.

김관진 국방장관마저 "상관 신변을 보호하고 경호를 하는 것은 부관으로서의 임무이고 또 그분(김오랑)의 정신이나 행위를 높이 평가하지만, 전투에 참가하거나 적접 지역에서 공격에 대응하는 등 전투에 준하는 직무수행인지는 전문가 의견을 들어봐야 한다"며 반대 의사를 밝혔고, 결국 무공훈장 대신 보국훈장으로 수정하여 통과하게 되었다.[12] 그리고 2014년 1월 14일, 국무회의에서 김 중령에게 보국훈장 삼일장을 추서하는 안을 통과시켰다.[13]


파일:external/kookbang.dema.mil.kr/YA_NP_20140402_00813146.jpg

김오랑 중령의 형인 김태랑(왼쪽)에게 보국훈장 삼일장을 전수하는 전인범 특전사령관

2014년 4월 1일 특전사령부 연병장에서 고 김오랑 중령 훈장 전수식이 열렸다. 특전사는 고 김오랑 중령의 가족에게 최고의 예를 갖춘 공식 부대 행사로 훈장을 전수했다. 국방일보 기사 그러나 이 전수식을 다룬 국방일보 기사는 김오랑 중령의 살신성인 정신을 칭송하면서도 김 중령이 누구에 대항해서 그 살신성인 정신을 발휘하다가 전사했는지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없이 슬그머니 넘어가고 말았다.

이때 국회 국방위원회에서 이 훈장 수여를 추진한 민홍철 의원과 유승민 의원은 보답으로 김오랑의 유가족에게 감사패를 받았다. 그런데 유승민은 반란 당시 문제의 제33경비단 소속으로 복무했다. 물론 당시 유승민은 일반 병사여서 하나회와는 관련이 없지만, 묘한 인연이긴 하다. 그래서 유승민이 당시의 경험 때문에 김오랑에게 나름의 속죄를 하겠다는 의미로 훈장 추서를 추진했다는 해석도 있다.

4. 미디어 매체에서[편집]


  • MBC 드라마 제4공화국에서는 이종국 씨가, 제5공화국에서는 양동재 씨가 맡았다. 특히 제5공화국의 나레이션을 맡은 안지환 성우는 자신이 죽인 김오랑 중령을 보며 오열하는 박종규를 보여주면서 이렇게 해설했다.

"적과 동지. 불과 몇시간 전만해도 전우였고 아래윗집에 살며 형과 동생처럼 지냈던 박종규와 김오랑. 이날 밤 이들은 서로에게 적이 되어 차가운 총구를 겨누었다. 과연 이들에게 쿠데타는 어떤 의미였고 조국은 어떤 의미가 있었을까..."


  • 2023년 영화 서울의 봄에서는 그를 모티브로 한 오진호가 등장하며 정해인이 연기한다.

5. 기타[편집]


  • 강경 보수 인사로 유명한 남재준국정원장이 그와 육사 동기였다.[14] 그러나 이때의 남재준의 행보는 매우 긍정적이었다. 이 사건이 터졌을 당시 남재준은 소령 계급으로 육군대학 교관을 맡고 있었고, 친구가 사망한 직후 강의 도중 군의 정치개입을 강력히 성토했을 뿐만 아니라,[15] 자주 김오랑 중령의 무덤을 찾아가 울분을 터뜨렸기 때문이다. 즉, 육군 내부의 청년장교들 중 전두환 반대파였기 때문에 단단히 찍혔던 것. 新東亞 2004년 10월호 기사[16]

6. 관련 문서[편집]



파일: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__CC.pn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2023-11-16 12:12:41에 나무위키 김오랑 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

[1] #[2] 1988년 1월 1일 송파구 관할이 되었다.[3] 군번 19536[4] 1990년 특진 추서된 계급으로 전사 당시 계급은 소령이다.[5] 동기로는 강창희 전 국회의장, 남재준 전 국정원장, 황진하 전 국회의원 등이 있다.[6] 수도권에 있는 특전사 부대 4개 여단 중 3개 여단(제1공수특전여단, 제3공수특전여단, 제5공수특전여단)이 하나회 소속이었으며, 여단장들은 12일 저녁부터 제30경비단에 와서 앉아 있었다. 수경사는 특성상 서울의 방위하지만 기본적인 편성 자체에서 주요병력이 청와대 경비를 위한 제30경비단과 제33경비단이었는데, 이들은 하나회 소속이었다. 이외에 그나마 병력이 있는 것이 수도경비사령부 헌병단수도경비사령부 제10방공포병단이 있었지만, 특성상 제10방공포병단은 대공방어를 위한 곳이니 필요가 없었고, 헌병단은 하나회 출신들이 아니었음에도 전두환에게 충성을 맹세하였다. 다만 부평의 제9공수특전여단과 수도권 인근 사단들(수도기계화보병사단, 제26기계화보병사단 등)을 필요시 충정부대라는 명목으로 수경사 예하에 둘 수있어서 위협이기는 하였다.[7] 당시 특전사는 서울특별시 송파구 거여동에 위치했다.[8] 당시 대기업 사원 월급이 보통 30만 원 정도였으니 제법 큰 돈이었다.[9] 떨어진 난간의 높이가 고작 사람의 허리정도인데 어떻게 거기서 실족해 떨어졌냐는 것.[10] 사실 이전인 1988년에 그보다 먼저 김오랑 중령의 상관이었던 정병주 소장이 12.12 진상조사 및 김오랑 중령의 명예회복을 위해 노력하던 와중에 갑자기 실종후 120여일이 지나서 죽은채로 발견되었다.[11] 과거에는 순직.[12] 무공훈장은 '전투에 참가해 무공을 세운 자'를 대상으로 하며, 보국훈장은 '전투 이외의 공적으로 국가안보에 기여한 자'를 대상으로 수여한다. 결국 박근혜 정부는 고 김오랑 중령과 반란군의 전투를 전투로 인정하지 않은 것이다.[13] 보국훈장은 총 5개 등급으로 나뉘어 있다. 위에서부터 보국훈장 통일장-국선장-천수장-삼일장-광복장. 문제는 이게 서훈자가 국가에 바친 공헌도와 전혀 상관이 없다. 가장 높은 통일장은 대장, 두 번째 국선장은 중장, 세 번째 천수장은 소장과 준장 및 군무원 1급, 네 번째 삼일장은 영관급과 군무원 2~4급, 가장 낮은 광복장은 위관급 장교와 병, 부사관들이 받는 식으로 공헌과 상관없이 단순히 계급에 따라 등급이 미리 정해져 있다. 김 중령이 삼일장인 이유는 고인의 공헌과 상관없이 그저 계급이 중령이라서다.[14] 시간이 지나고도 친구 무덤에 찾아가서 울분을 토했던 걸 보면 꽤나 친했던 모양이다.[15] 당시 그가 육군대학 교관이었다는 것은 유능한 장교였음을 방증한다. 육대 교관 중 한직도 물론 있지만, 정규과정 장교를 직접 대면하고 강의해야 하는 육대의 소령급 교관은 예나 지금이나 요직이다.[16] 전두환에 대한 증오가 나이를 먹어서도 식지 않았는지 남재준은 국정원장이 되자마자 가장 먼저 전두환 은닉재산을 추적해 데이터를 모아 검찰에 넘겨줘서 터트리게 만들었다. 이 때문에 전두환은 끝내 추징금을 납부하지 않았으나 대신 그의 차남을 노역신세로 만드는 데 성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