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나지르 부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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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르두어: بینظیر بھٹو
영어: Benazir Bhutto
1. 개요[편집]
파키스탄의 여성 정치인으로 제11대, 13대 총리를 역임했으며 1988년 12월 2일부터 1990년 8월 6일까지, 그리고 1993년 10월 18일부터 1996년 11월 5일까지 이렇게 2번 총리를 역임했다. 줄피카르 알리 부토 전 총리의 딸이며 2007년 암살당했다.
2. 생애[편집]
줄피카르 알리 부토(1928~1979) 전 총리의 딸로, 카라치에서 출생하여 하버드 대학교와 옥스퍼드 대학교에서 수학하였다. 아버지가 쿠데타로 축출당한 후 처형되었고, 베나지르 자신도 여러 번 체포되어 투옥된 바 있다. 1984년 영국으로 망명하는 것이 허락되자 망명상태에서 부친의 정당인 파키스탄 인민당(PPP)의 당수로 취임하였다. 그런데 부토의 아버지를 죽이고 10여년간 독재를 했던 무함마드 지아울하크(1924~1988)가 1988년에 원인 모를 비행기 추락사고로 죽으면서 조국으로 돌아올 수 있게 되었고, 그해 치러진 선거에서 이겨 이슬람 국가 사상 최초로 여성 총리가 되었다.
그러나 2년도 안 되어 아버지처럼 쿠데타를 겪고 군부의 지지를 받은 굴람 이스하크 칸(1915~2006) 에 의해 수상직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같은 해 11월 16일, 부토는 《피플》지의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50인〉에 선정되기도 했다.
1993년 선거에서 이스하크 칸을 제치고 재선되었으나, 3년 후에 여러 비리와 부패혐의로 인해 파루크 아흐메드 칸 레가리(1940~2010)에 의해 또 한번 해임되었다. 총리 재직 당시, 핵개발 총책임자 압둘 카디르 칸을 통해 북한에 우라늄 농축 관련 기술을 전수해 준 것으로 미국 정보기관은 파악하고 있다.[2] 1999년에 부패로 유죄 판결을 받았으나 런던에 머물고 있어서 처벌을 피했다. 다만 부토의 남편 아시프 알리 자르다리는 부패 스캔들로 인해 체포되어 2004년 11월까지 옥살이를 해야했다. 2006년, 국제 형사 경찰 기구인 인터폴이 파키스탄 정부의 요청에 응하여 부토와 남편 두 사람의 체포를 요구하는 국제수배서를 발행했고, 부토는 정부가 사면을 허락할 때까지 파키스탄에 돌아올 수 없었다. 부토는 군부가 뒤집어 씌운 누명이라면서 이 부패 혐의들에 대해 부정했지만, 여러 혐의와 의문점은 지금까지 풀리지 않고 있다.
이런 가운데 파키스탄은 1999년 인도와 벌인 카길 전쟁에서 패했고 같은 해 무샤라프가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이 바뀌는 등 정치 상황이 불안해졌다. 무샤라프가 반발하는 부토의 지지층을 달래고자 부토를 사면해서 2007년 10월, 무려 11년만에 다시 파키스탄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파키스탄에서 2008년에 있을 선거도 대비하고 여러 외교적 활약을 하던 부토였으나...
2007년 12월 27일 파키스탄을 방문한 하미드 카르자이 아프가니스탄 대통령을 만난 것이 부토의 마지막 외교 활동이었다. 그날 오후에 인민당 집회 연설을 끝내고 돌아가던 길에 갑자기 난입한 10대 소년의 자폭 테러로 중태에 빠져 병원으로 긴급 후송되었으나 결국 사망했다. 사실 이런 일이 벌어질 것이라는 것은 어느 정도 예견되고 있었다. 부토가 귀국한 2007년 10월 18일에도 부토를 환영하던 인파 사이에서 폭탄이 터져 수십 명이 사망하는 일이 벌어졌고, 12월 8일에는 부토의 선거 사무실에 괴한이 난입해 총기난사를 하는 등 암살시도가 여러 차례 있었기 때문이다. 범인은 파키스탄 탈레반을 이끌던 바이툴라흐 메흐수드를 추종하던 광신자 근본주의자였다고 한다. 여성이라는 점과 세속적인 정책을 추구하던 점 때문에, 그동안 탈레반 등 이슬람 근본주의 세력은 부토를 증오했다.
하지만 끝내 정확한 범인과 배후 세력은 드러나지 않았고, 사건을 수사하던 검사 줄피카르 알리가 2013년 이슬라마바드에서 암살당하기도 했다. 한편, 배후세력으로 유력시된 메흐수드는 2009년 미군 무인기 공습으로 37세 나이로 폭살당했다.
3. 여담[편집]
여담인데, 부토는 영국 유학 시절에 대학 동창이자 훗날 영국 총리가 되는 테레사 메이에게 남편인 필립 메이를 소개해 주었다고 한다.
부토는 생전에 후계자로 외아들인 빌라왈 부토 자르다리를 생각하고 있었고, 그녀가 죽고 사흘만인 2007년 12월 30일에 인민당은 겨우 19살이며 아직 대학생 신분이던 빌라왈을 새로운 당수로 임명했다. 다만, 빌라왈이 영국에서 유학중인 학생이란 점 때문에 졸업할 때까지는 빌라왈의 아버지이자 부토의 남편 아시프 알리 자르다리가 당수직을 대행했고, 빌라왈이 학업을 끝낸 2011년부터 당을 이끌기 시작했다.
2018년 파키스탄 총선에서 인민당은 342석에서 43석을 차지하며 3번째로 많은 의석을 차지했다.
2022년에 셰바즈 샤리프 내각에서 빌라왈 부토 자르다리가 외무부 장관에 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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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955년생으로 2008년부터 2013년까지 파키스탄 11대 대통령을 지냈다[2] 이는 북한에게서 미사일 기술을 받아오기 위한 것이었으며, 차후 2005년 되어서 페르베즈 무샤라프 당시 대통령 및 샤우카트 아지즈 당시 총리가 파키스탄이 북한에 원심분리기를 제공하였음을 시인하였다. 결국 부토는 북한의 핵개발의 중요한 토대를 놓아 준 인물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