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함마드 지아울하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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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파키스탄의 6대 대통령이자 독재자. 1977년 7월 쿠데타를 일으켜 줄피카르 알리 부토 총리를 몰아내고 계염령을 내려 계엄사령관으로 있다가 이듬해 대선에 출마해 당선되면서 대통령이 되었고 1988년 비행기 추락사고로 사망할 때까지 대통령을 지냈다. 나름 세속주의 국가였던 파키스탄을 지금처럼 막장 이슬람 국가로 만든 장본인이다.
2. 생애[편집]
영국령 인도 제국의 펀자브 지방의 잘란다르의 독실한 무슬림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가 어렸을 때 인도와 파키스탄은 같은 나라였고 영국의 식민지였는데 그는 지금의 인도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했다. 1943년 식민군에 입대해 버마 전선에서 일본군과 싸운 전적도 있다. 1947년 인도와 파키스탄이 분할 독립하는 와중에 펀자브 지방이 별 다른 준비나 예고도 없이 파키스탄 영토와 인도 영토로 갑자기 분할되는 과정에서 대규모 유혈 사태와 피난민이 발생하는데,[1] 이 과정에서 지아울하크 역시 실향민이 되었다.
1947년 파키스탄군이 창설되자 소령 신분으로 합류했고 1962년부터 64년까지 미국으로 군사 유학을 다녀오기도 했다. 1965년 3월 2차 인도-파키스탄 전쟁이 터지자 참전하기도 했고 1967년부터 1970년까지 준장 신분으로 요르단에 머물며 요르단군을 훈련시키기도 했다.
1975년 중장으로 진급했고 이듬해인 1976년 3월 줄피카르 알리 부토 총리는 그를 대장으로 진급시킴과 동시에 육군참모총장에 임명한다.
2.1. 쿠데타[편집]
1977년 7월 페어플레이 작전이라고 불리는 무혈 쿠데타를 일으켜 부토 정권을 뒤엎어버리고 계염령을 선포한 후 계엄 사령관을 맡았다. 육군참모총장직도 계속 유지했다. 이듬해인 1978년 9월에 대통령으로 취임한다. 그리고 국방장관, 육군 참모총장, 계엄사령관을 맡으며 군권을 계속 장악한다. 부토 총리는 1979년에 사형시켜버렸다. 쿠데타 이후에는 아예 총리 직책을 없애버렸다가 1985년이 되어서야 부활시켰다.
2.2. 대통령 취임 이후의 행적[편집]
대통령이 된 후 정당활동을 정지시켰고, 파업을 금지했으며, 언론에 엄격한 검열을 가하면서 계엄령을 계속 유지했다.
그는 미국과의 관계도 중시하며 친미 반공을 내세워 소련 같은 공산권을 견제하게 된다. 1980년대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에서 무자헤딘을 지원한 것이 대표적이다. 이렇게 보면 좋은 대통령으로 보이지만 이 사람도 정적을 탄압하고 무자비하게 고문하고 죽인 사람이다. 1979년 4월에는 줄피카르 알리 부토 전 총리를 사형시켜 버렸다. 반공 정책의 경우 전임자인 부토가 이끌던 파키스탄 인민당의 경우는 이슬람 사회주의 노선이었기 때문에 자신이 쿠데타로 뒤엎은 전임자의 노선을 거부한다는 뜻도 있었다. 파키스탄 인민당이 소련과 친교 관계를 강화했던 것과 반대급부로 그는 당시 소련을 수정주의자라고 비난하던 중국의 노선을 타서 소련을 적극 견제하였다.
그리고 젊었을 때 트라우마 때문인지 이슬람 극단주의적 성격도 있어서, 극우 이슬람주의 정당 자마아티 이슬라미를 지원하였고 이를 통해 아불 알라 마우두디의 이슬람 근본주의 사상을 유행시키면서 파키스탄/아프가니스탄의 탈레반의 토대를 만든 것으로도 현재도 비난 받고 있다. 국가를 이슬람화할것인지에 대한 국민투표를 1984년 12월 19일 시행했는데 투표 결과, 유권자의 97%가 이슬람화 정책을 지지하는 것으로 나타나면서, 지아울하크 정권 시절 파키스탄은 이슬람 국가 건설 프로그램을 추진했다. 이에 기존의 모든 법제도는 샤리아(Sharia)에 부합되도록 변경되었으며, 이 정책의 영향으로 인해 파키스탄은 이슬람권에서도 꼴통 취급받는 국가가 되어 지금까지 이르고 있다.
1985년 3월이 되어서야 계엄령을 해제하고 비당원 선거를 치른 뒤 무함마드 칸 주네조(Muhammad Khan Junejo)를 총리를 임명했는데, 1988년 주네조 총리가 지아울하크 대통령과 사사건건 반목하자 지아울하크는 주네조 내각을 해체시키고 11월에 새로운 선거를 치를 것이라고 발표하였다. 그러나...
3. 의문의 추락사고로 사망[편집]
파키스탄 공군 C-130B 추락 사고 참고
1988년 8월 17일 지아울하크와 파키스탄군 합참의장, 아놀드 라펠 파키스탄 주재 미국 대사등 승객 17명과 승무원 13명 총 30명을 태운 C-130B 수송기에 탑승하여 펀자브 주 바하왈푸르 공항에서 이슬라마바드로 가던 도중 추락해 지아울하크를 포함한 탑승객 30명 전원이 사망했다. 향년 64세. 이륙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컨트롤 타워와 교신이 끊겼으며 목격자들의 말로는 비행기가 매우 불규칙하게 날았다고 한다. 이 사고의 진상은 미스테리인데 정적들이 그를 암살하려던 시도거나 아니면 그냥 단순한 사고인가라는 의견들이 있다. 진실은 저 너머에..
4. 여담[편집]
파키스탄으로 쏟아지는 대외 원조금을 방산비리로 해먹고, 이웃국가 아프가니스탄을 예속화하려는 시도를 통해 탈레반의 토대를 마련한 것, 파키스탄을 이슬람 근본주의 국가로 만든 것으로 비판을 받는다. 자마아티 이슬라미 문서 참조.
1950년 친척인 샤피크 자한(Shafiq Jahan)과 결혼했다.[2] 1988년 지아울하크가 죽으면서 사별했고 부인은 1996년 1월 6일에 사망했다. 2남 3녀를 낳았는데 아들인 무함마드 이자즈 울하크(Muhammad Ijaz-ul-Haq)는 1953년생으로 정계에 입문하여 샤리프 정권과 무샤라프 정권시절 각료를 지냈으며 그 외에도 1960년생 아들 안와르가 있다. 딸 자인(Zain)은 1972년생으로 꽤 늦둥이인데 선천적인 장애가 있고 은행가와 결혼했으며 또다른 딸 루비나 살렘(Rubina Saleem)은 1980년부터 미국에서 살고 있고, 또다른 딸인 쿠라툴린 지아(Quratulain Zia)는 파키스탄인 의사인 아드난 마지드와 결혼해 런던에서 살고 있다고 한다.
1985년 5월 방한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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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오늘날 기준으로는 파키스탄령 펀자브 지역 인구의 90% 이상이 무슬림이고 인도 펀자브주는 인구 상당수가 시크교도와 힌두교도이지만, 파키스탄과 인도가 분할되기 전에는 서로 종교가 다른 사람들이 마을과 마을을 경계로 어울려 살았었다.[2] 장인이 우간다 캄팔라 출신의 인도계 의사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