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디라 간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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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 공화국 제3대 총리
인디라 프리야다르시니 간디
इन्दिरा प्रियदर्शिनी गाँधी
Indira Priyadarshini Gandhi


파일:Prime_Minister_Indira_Gandhi_in_the_US_enhanced.jpg

출생
1917년 11월 19일
인도 제국 알라하바드[1]
사망
1984년 10월 31일 (향년 66세)
인도 공화국 뉴델리
재임기간
제3대 총리
1966년 1월 24일 ~ 1977년 3월 24일
제3대 총리2기
1980년 1월 14일 ~ 1984년 10월 31일
서명
파일:인디라간디서명.p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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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력
Ecole de Genève[1] (졸업) (1927 ~ 1931년)
Pupil’s Own School (졸업) (1931 ~ 1934년)
비스바바라티 대학교[2] (중퇴) (1934 ~ 1935년)
옥스퍼드 대학교 서머빌 칼리지 (역사학, 정치학, 경제학 / B.A.) ( ~ 1938년)
종교
힌두교
신체
163cm, O형[3]
부모
자와할랄 네루
자녀
라지브 간디
소속 정당

약력
인도 정보통신부장관
인도 재무부장관
인도 내무부장관
인도 국방부장관
인도 외무부장관


1. 개요
2. 일생
2.1. 집권 전
2.2. 인도 총리
2.3. 비상사태 선포와 철권통치
2.4. 비상사태 해제와 1977년 총선
2.5. 1980년 총선과 재집권
2.5.1. 블루 스타 작전(Operation Blue Star)
2.6. 암살
3. 경제 정책
4. 외교 정책
5. 국내 정책
6. 가족 관계
7. 이야깃거리



1. 개요[편집]


인도의 제3대 총리, 독재자. 정확하겐 1기 집권시 민주 정부의 총리로 취임했다 당내 권력 투쟁에서 이기며 점점 철권 통치 스타일로 변해갔다. 그러다 무슨 생각인지 1977년 재신임을 묻겠다며 총선을 했다 패하여 허무하게 총리직에서 물러났고, 상대측의 삽질로 1980년 다시 총리에 복귀한 이후엔 철권 통치는 덜해졌지만 분리주의 운동을 하던 시크교 세력 일부를 탄압하다 1984년 암살당하고 만다.

초대 총리인 자와할랄 네루 총리의 이기도 하다. '간디'라는 성은 남편을 따랐는데, 남편인 페로제 간디는 마하트마 간디와 아무 혈연관계가 없다.[2]


2. 일생[편집]



2.1. 집권 전[편집]


인디라 간디는 1917년 11월 19일 알라하바드에서 태어났다. 그녀는 자와할랄 네루의 유일한 자녀였지만[3] 유년 시절은 그다지 행복하지 못했다. 아버지 자와할랄 네루는 인도 독립운동의 지도자로서 항상 어딘가로 돌아다니기 바빴고 어머니 카말라 네루는 몸이 병약해 어린 인디라를 제대로 돌보지도 못하고 병상에 누워있는 시간이 더 많았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외롭게 혼자 자랄 수 밖에 없었던 인디라는 주로 가정교사들에게 배웠고, 아버지와는 제대로 만나지도 못한 채 편지로만 접하는 경우가 다반사였다고. 그녀는 초·중등학교는 간헐적으로만 출석했고 대부분의 학문을 가정교육으로 받았다.[4] 그러던 중 스위스 로잔에서 요양하던 어머니 카말라 네루의 건강이 급속도로 나빠지자 이를 계기로 유럽으로 건너갔고, 1937년 영국 옥스퍼드 대학교 서머빌 칼리지에 진학해 정치학, 역사학, 경제학 등에서 뛰어난 성적을 보였다.[5] [6]

인디라 네루[7]는 어머니를 닮았던지 유럽에서 체류하는 동안 건강이 썩 좋지 않았다. 때문에 종종 스위스로 건너가 치료를 받았는데, 1940년에 나치 독일이 유럽 전역을 집어삼키자 유색인종으로서 당연히 위협을 느낀 인디라는 필사적으로 유럽을 탈출해 영국으로 피난했다. 그리고 영국도 안전하지 못하다는 것을 깨달은 인디라는 1941년에 대학 과정을 채 수료하지도 못하고 인도로 돌아오게 된다. 인디라가 영국에서 공부하는 도중에 만난 운명의 상대가 마찬가지로 영국에서 유학하던 페로제 간디였다. 인디라 네루는 페로제 간디와 결혼했고, 이때부터 '인디라 간디'라고 불리게 된다. 1944년에는 페로제 간디와 인디라 간디 사이에서 아들 라지브 간디를 낳았고 1946년에는 산제이 간디를 출산한다.

마침내 인도가 영국으로부터 독립하고 아버지 자와할랄 네루가 인도 공화국의 초대 총리로 선출되자 인디라 간디는 이를 계기삼아 활발하게 정계에 진출한다. 그녀는 사실상 아버지 자와할랄 네루의 개인 비서와 퍼스트레이디 역할을 하면서 정치적 인맥을 넓혀나갔고, 1950년대 말에는 아버지의 후광에 힘입어 인도 국민회의의 당대표 직위에까지 올랐다. 이때 그녀가 남긴 최대 행적은 케랄라 주에서 선거로 선출된 공산주의 주 정부를 강제로 해산시켜버린 것. 냉전이 극심하던 와중에 대놓고 공산주의를 표방하는 지방정권이 들어서는 걸 극도로 꺼렸던 인도 정부로서는 당연한 선택이었다. 어쨌든 1964년에 아버지 자와할랄 네루 총리가 서거하자 그녀는 '라자 사바', 즉 인도 상원의원으로 임명되었고, 이후 랄 바하두르 샤스트리 총리 밑에서 정보통신부 장관으로 일했다. 2년 후 샤스트리 총리가 사망하자 인도 국민회의는 모라르지 데사이 대신 인디라 간디를 새로운 인도 총리로 추대한다.


2.2. 인도 총리[편집]


의외로 인디라 간디가 총리로 추대된 가장 큰 이유는 그녀가 여자였기 때문이다. 그녀를 아버지의 후광만 등에 업고 승승장구한 애송이로 여겼던 당내 지도부가 그녀를 꼭두각시 총리로 올려놓고 제 마음대로 할 음모를 꾸미고 있었던 것. 그래서 그녀의 집권 1년차까지만 해도 언론에서는 그녀를 '궁기 구디야', 힌두어로 '꼭두각시'라고 부르며 노골적으로 당내 지도부의 허수아비라고 조롱하기도 했다. 인디라 간디가 치렀던 첫 전국단위 선거는 1967년 총선이었는데, 이때 중인전쟁과 물가 상승, 높은 실업률 등으로 인해 나라 전체가 뒤숭숭했던 탓에 인도 국민회의는 의석 과반을 차지하긴 했지만 이전에 비해선 줄어든 283석에 그쳤다.[8] 인디라 간디는 울며겨자먹기로 루피를 강제로 평가절하하면서 물가 안정을 꾀했고, 이로 인해 사업가들과 자본가들에게 엄청난 욕을 들어먹으면서 꽤나 험난하게 임기를 출발했다.

이쯤 들어서 인디라 간디는 점점 당내 지도부와 충돌하는 일이 잦아지고 있었다. 인디라 간디의 사회주의적인 정책, 그리고 무엇보다 인디라 간디 총리가 저들의 말을 고분고분 들어먹지를 않자 그녀를 한낱 허수아비로만 여겼던 당내 기존 지도부들의 불만이 커져갔던 것. 특히 인디라 간디 총리는 당 지도부가 정한 대통령 후보를 무시하고 V. V. 기리를 따로 인도 대통령으로 지지하면서 아예 지도부와 다른 길을 걸었고, 재무부장관 모라르지 데사이와는 전혀 상의없이 재정 정책들을 발표하자 갈등은 더더욱 증폭된다. 결국 인도 국민회의 당대표였던 니자링가파가 그녀를 당에서 제명하겠다고 선전포고하면서 당정갈등의 정점을 찍게 되는데, 인디라 간디는 아예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을 데리고나와 당을 두쪽 내버리는 걸로 대응했다. 그녀가 평소 인사 관리를 잘해왔던 덕이었던지 국민회의 의원들 대부분이 인디라 간디의 편에 섰고, 당내 지도부의 편에 선 의원들은 고작 65명 밖에 되지 않았다. 인디라 간디가 주도하는 인도 국민회의(R)[9]은 원내 과반은 차지하지 못했지만 군소 정당들의 지지를 등에 업고 연립정부 구성까지 성공했다. 이로 인해 인디라 간디는 허수아비라는 오명을 벗고 완전히 인도 국민회의를 장악하게 된다.

이렇게 인디라 간디가 인도 국민회의를 통째로 집어삼키면서 인도 정치판은 크게 인디라 간디 세력과 반-인디라 간디 세력으로 쪼개진다. 인디라 간디는 경제성장과 부정부패 근절을 내세우면서 표를 호소했고, 반대로 온갖 야당들이 모여 결성한 반-인디라 간디 세력은 '인디라 하타오', 즉 '인디라는 물러나라'를 외치면서 진영을 결집했다. 인디라 간디는 그 무엇보다 빈곤층 구제와 경제성장을 모토로 내걸고 정책들을 펼쳤는데, 가장 대표적인 정책이 바로 '가리비 하타오' 정책이다. '빈곤을 근절하라'라는 뜻의 가리비 하타오 정책은 주로 농촌과 시골의 극빈층들을 구제하고 고질적인 카스트 제도를 우회해 정부의 지원을 늘리는 방식으로, 이 정책의 성공으로 인해 인디라 간디는 농촌 지방에 탄탄한 코어 지지층을 쌓을 수 있었다. 덕분에 1971년 치러진 하원의원 총선에서 인도 국민회의(R)은 543석 가운데 352석을 쓸어버렸고, 반면 인도 국민회의 내의 반-인디라 간디 세력이던 인도 국민회의(O)는 겨우 16석, 최대 야당이던 바라티야 자나 상[10]인도 공산당은 각각 22석과 25석 밖에 못건졌다.

1971년 총선에서 대승을 거두고 난 이후 인디라 간디는 1971년 터진 방글라데시 독립전쟁에서 방글라데시가 원수지간이나 다름없던 파키스탄에게서 독립해 떨어져나갈 수 있게 크게 지원했다.[11] 결국 1971년 12월에 방글라데시가 파키스탄에게 독립을 해버리면서 사실상 파키스탄의 패배, 즉 인도의 승리로 전쟁이 끝났고, 결과적으로 파키스탄에 빅엿을 먹인 인디라 간디 총리에 대한 인도인들의 지지율은 그야말로 하늘을 찔렀다. 심지어는 야당 당수아탈 비하리 바즈파이 대표[12]가 인디라 간디를 "현신한 두르가 여신"이라고까지 칭송할 정도였으니 얼마나 인디라 간디의 지지율이 높게 치솟았는지 짐작할 수 있다. 정말 파키스탄에 엿을 먹이는 데에는 여야가 따로없었던 인도였기에 가능했던 일. 인디라 간디 총리와 그녀가 이끄는 인도 국민회의는 방글라데시 독립전쟁의 승리를 내세우며 1972년 치러진 주 선거에서 대부분의 지방들을 석권하면서 '인디라 웨이브'라고 불릴 정도로 인도 전역을 싹 쓸어가버리면서 탄탄한 지지도를 굳힐 수 있었다.[13]


2.3. 비상사태 선포와 철권통치[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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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상사태 선포를 알리는 인디안 헤럴드
7월 1일 라디오로 대국민방송을 진행하는 인디라 간디 총리
이렇게 아슬아슬하긴 해도 나름 정권을 안정적으로 유지하던 인디라 간디에게 청천벽력같은 소식이 떨어진다. 1975년 6월 12일에 알라하바드 고등법원이 지난 1971년 총선때 인디라 간디의 지역구에서 그녀가 선거 캠페인에 공적 자금을 투입하는 등 여러 부정선거가 일어났다고 의원직을 박탈하고 6년 동안 어떤 공직에도 올라갈 수 없도록 판결했던 것이다. 당연히 이게 판결이 잘 안나오면 총리직이고 뭐고 다 박탈당할 판이었기에 인디라 간디는 정부 관료들에게 무조건 판결을 막으라 지시했지만 결론적으로는 법원에서 인디라 간디의 부정선거가 확실하다는 결과가 나왔다. 이보다 더 심각한 문제였던 그녀의 뇌물수수 혐의는 기각되었지만 부정선거 하나만으로 그녀의 의원직이 박탈되고 6년 간 공직 출마가 금지되었기에 사실상 이 판결은 인디라 간디의 정치생명을 끝장내는 거나 다름없는 판결이었다. 게다가 인도 총리직은 의원직을 쥐고 있어야 할 수 있었기에 의원직이 박탈되면 자동으로 총리직 역시 상실되는 구조였다.

인디라 간디는 이러한 고등 법원의 판결을 무시했다. 그녀는 다른 정당도 다 그랬다는 논리를 펼치면서 판결에 항소할 뜻을 내비쳤고, 야당 세력들이 자신의 사퇴를 줄기차게 요구하자 파크룻딘 알리 아흐메드 대통령에게 비상사태를 선포할 것을 요구, 결국 1975년 6월 25일에 전국에 국가 비상사태를 선포했다. 비상사태 선포의 주 이유는 '방글라데시 독립전쟁으로 인한 파키스탄과의 갈등 증폭, 오일 쇼크로 인한 경제적 악화와 전국 곳곳에서 일어나는 시위들로 인한 정부기능의 마비'였지만 실질적인 이유는 인디라 간디의 당선무효형을 없었던 것으로 만들어버리기 위한 시도였다. 인디라 간디는 비상사태를 선포한 후 절대적인 권한을 손에 넣었다. 비상사태가 선포된 바로 그날에 모든 주요 신문의 전기는 차단되고 야당 의원들은 체포되어 비상 사태 기간 동안 당시 야당 의원들의 2/3이 구금당했다. 이렇게 '인도 민주주의의 가장 암울한 시기'라는 말까지 듣는 인디라 간디의 철권통치가 시작되었다.

전국에 대통령령이 발효되면서 결사의 자유, 출판의 자유, 언론의 자유 등에 제약이 걸렸고, 당연히 비상사태와 헌법 개정에 반대하는 사람들과 야당 인사들은 직책에서 쫓겨난 후 구금당했다. 모든 출판물들과 언론들은 방출 이전에 정보통신부의 검열을 받아야만 했고 주 정부 의회의 기능 역시 무기한으로 정지당했다. 또한 인디라 간디 총리는 야당이 장악한 지방의 의회들을 주지사의 권고 형식으로 강제 해산시켜버렸다. 게다가 의회에는 사법적 검토 없이도 헌법의 어느 부분이든 수정할 수 있는 권한이 주어졌고, 1976년 말에는 수정헌법 42조를 공표하여 시민들과 언론이 헌법을 비판하는 것을 금지시키고는 긴급한 시기에는 의회의 승인 없이도 간디 본인이 직접 긴급 법률을 공포하게 했으며, 심지어는 부정선거 판결로부터 무죄를 선고받기 위해 헌법을 개정하기도 했다.

1975년부터 1977년까지 약 2년 동안 지속된 비상사태 기간 동안 인도는 인디라 간디의 공포 정치 아래에서 살았다.[14] 경찰들은 영장 없이 사람들을 잡아다 무기한으로 가둘 수 있었고 무려 11~14만 명에 달하는 정치범들이 재판도 없이 구금당한 데다가[15] 예정되었던 모든 선거는 무기한 정지되면서 인도는 독재 체제 아래로 접어든다. 특히 힌두 우익 단체였던 RSS와 시크교, 인도 공산당에 대한 무자비한 탄압이 가해졌고, 이들은 지하에서 국민회의와 싸우는 수 밖에 없었다. 집회의 자유 역시 금지되어 노동자들이 파업을 벌이는 것이 불가능해졌고, 1976년 4월에는 델리의 빈민가들을 강제로 불도저로 밀어버리면서 70만 명에 달하는 사람들을 쫒아내며 인권이 거꾸로 후퇴하기도 했다. 그리고 당시 인도에서는 다음과 같은 무자비한 고문들이 수감자들에게 가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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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인도의 고문기술자들은 수감자를 거꾸로 묶은 뒤 무자비한 구타를 가하거나 맨발과 척추를 지팡이로 때리는 것은 기본이고, 수감자들을 질식할 때까지 우물과 강에 강제로 밀어넣거나 전기고문을 가하기도 했으며, 수감자에게 Z 자세를 몇 시간 동안 유지하게 했고, 알몸으로 얼음판에 강제로 눕히거나 촛불과 다리미로 지지기도 했으며, 눈과 은밀한 부위에 후추와 매운 고추를 뿌리거나 핀서로 살을 쥐어뜯기도 했다. 심지어는 문자 그대로 고환을 비틀거나(!) 수감자를 강제로 눕히고는 비명을 막기 위해 입에 천을 물린 뒤 몸 위에 무거운 철제와 목제 롤러를 천천히 굴리는 고문을 당한 수감자들도 있었다고 한다.(하술할 대학생 P. 라잔이 이 '롤러 고문'으로 사망했다고 한다.)

이런 무자비한 폭정 속에서 사망자도 나왔다. 1976년 3월 1일에는 P. 라잔(P. Rajan, 1955~1976)이라는 극좌 성향의 코지코드 국립 공과대학의 학생이 무장 경찰들에게 연행된 후 고문 과정에서 사망하고 시체는 행방불명이 되었으며, 동년 10월 18일에는 우타르프라데시의 무자파르나가르에서 17명이 경찰에 체포되자[16] 이에 주민들은 경찰서 앞에서 이들을 석방하라는 시위를 벌였으나, 경찰은 이를 거부하고 오히려 시위대에 발포하여 30명이 사망했다. 그리고 국제앰네스티는 재판 없이 구금된 정치범들 중 22명이 옥사했다고 보고했다.

경제적인 면을 봤을 때는 인디라 간디 정부는 인플레이션을 억누르기 위해 강제로 물가 억제 정책을 펼쳤다. 이는 어느 정도 효과를 보았고 1976년에는 물가가 진정되나 싶었지만 그해 말에 식량 생산이 감소하면서 물가조차 제대로 잡는 데 실패했다. 또한 부유세를 인하하고 직접세를 완화하기도 했는데, 이로 인해 정부의 세입이 감소하자 인디라 간디는 사회복지와 교육에 들어가는 예산을 삭감해버렸다.

인디라 간디 정부는 이 기간 동안 여러 정책들로 욕을 많이 들어먹었지만 최악의 정책은 출산 억제 정책이었다. 1976년 9월에 인디라 간디의 아들이던 산제이 간디(Sanjay Gandhi, 1946~1980)[17]는 인구 조절을 핑계로 3번째 아이를 낳은 남성에게 강제 불임 시술 정책을 실시했다. 그가 벌인 캠페인의 주 내용은 젊은 남성들을 대상으로 강제 정관 수술을 실시하는 거였는데, 대략 대략 1976년부터 1977년까지 무려 830만 건에 달하는 정관 수술이 진행되었다고 한다. 정부는 이 모든 참가자들이 '자발적으로' 참가했다는 것을 강조했지만 이걸 믿는 인간들은 몇 되지 않았으며, 실제로는 '가족 계획 수용소'에 강제로 구금된 사람이 많았던 데다가 원치 않는 사람들도 강제로 잡아다가 이 수술이 뭔지조차 제대로 알려주지도 않고 정관 수술을 받게 했다는 고발이 쏟아져나오는 등 비판이 쇄도한 정책이었다.

이 때 '할당량'을 채워야 한다는 명목으로 억울하게 불임수술을 당한 남성들이 많았는데, 실제로 아예 한 마을을 봉쇄한 후 남자들에게 강제로 정관 수술을 가하거나 치아도 없는 일흔의 노인에게까지 정관 수술을 가한 사례도 보고되었다. 게다가 정관 수술을 할 때 제대로 소독도 되지 않은 상태로 정관 수술을 하는 경우가 다반사였던지라 수술 직후 감염으로 죽는 사람들도 심심찮게 나왔다. 거기다가 강제로 수술을 당한 사람들 대부분이 빈민들이었다. 그 외에도 방송과 언론 장악, 비상사태에 반대하는 시크교[18]와 공산당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 등 수많은 억압 정책들을 펼치면서 인디라 간디의 지지율은 날로 떨어졌다.

그나마 이런 폭압 정치 속에서도 이전까지 혼란에 빠졌던 인도의 사회는 안정되었는데, 비상사태 시기에는 버스와 기차는 정시에 운영되었고[19] 밀수범들과 탈세범들은 상당히 성공적으로 단속되었으며, 힌두교도와 이슬람교도 사이의 범죄와 폭력 행위도 크게 줄었고, 대규모 지주들의 토지를 몰수해 수많은 소작농들을 해방시켜 정부 기반 시설 프로젝트에서 일하게 해 세수를 증가시켜 정부 자금을 이전보다 쉽게 도달할 수 있게 되었다.

세계의 자유 지수에 따르면 1972~1974년까지 인도의 지수는 정치적 권리(PR) 2점, 시민적 자유(CL) 3점으로 '자유로운 국가'로 분류되었으나, 1975년에는 PR은 그대로였어도 CL이 5점으로 떨어져 '부분적으로 자유로운 국가'로 분류되었고, 1976년에는 CL은 그대로였으나 PR이 3점으로 떨어졌다. 인디라 간디가 물러난 1977년에는 PR, CL 모두 2점으로 원상복귀되었고, 1980년에는 CL이 3점으로 떨어져 'PR 2점, CL 3점'을 1990년까지 유지했다.

비상사태 기간 인도의 인권 탄압에 대한 참고자료


2.4. 비상사태 해제와 1977년 총선[편집]


그렇게 인디라 간디는 국제적으로도 독재자라는 욕을 들어먹어가고 혹독한 비난을 받으면서도 2년 동안 2번이나 비상사태를 연장시켜가면서 절대 권력을 휘둘렀다. 그러던 중 1977년, 인디라 간디 총리는 마침내 비상사태를 해제하고 총선을 실시해 국민에게 재신임을 묻겠다는 결단을 내리는데, 왜 인디라 간디가 굳이 비상사태를 해제하고 총선을 실시하려 시도했는지에 대해선 알려진 바가 많지 않다. 아마 정부 통제 하의 언론만 보다보니 여론을 제대로 읽지 못했거나 제 인기도를 과대평가했다는 가설이 주류.[20]

인디라 간디가 비상사태를 해제하고 총선을 실시하겠다고 공표하자 그간 설움에 시달리던 야당들은 그야말로 하나로 뭉쳐 총집결했다. 기존의 인도 국민회의(O)와 아탈 비하리 바즈파이가 중심인 바라티야 자나타 상, 사회주의 정당들, 그리고 북부의 농민들을 주 기반으로 하는 차란 싱 대표 주도의 '바라티야 크란티 달' 당 등이 모두 뭉쳐서 '자나타 당'을 구성했던 것이다. 이들은 '독재냐 민주주의냐'를 프레임으로 걸면서 인디라 간디의 비상사태 선포를 정면으로 비판했다. 반면 그와중에 인디라 간디의 인도 국민회의(R)은 인디라 간디 총리의 아들 산제이 간디의 거취를 두고 집안싸움이 일어나면서[21] 자중지란에 빠졌다. 결국 1977년 총선에서 인도 국민회의(R)는 의석 수가 350석에서 153석으로 수직추락했고 인디라 간디 총리 역시 총선 대패의 책임을 지고 1977년 3월 23일에 비상사태를 해제한 후 바로 다음날인 1977년 3월 24일 총리직에서 사임하고야 만다.

인디라 간디가 총리직에서 물러난 이후 새 총리로 취임한 인물은 옛날에 인디라 간디와의 갈등으로 인도 국민회의에서 탈당하고 자나타 당에 입당한 모라르지 데사이였다. 한편 인디라 간디는 1978년 11월에 보궐선거에서 지역구를 차지하며 하원으로 재입성했다. 권력욕 하나만큼은 대단했던 인디라 간디가 그대로 은퇴할 생각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 와중에 모라르지 데사이 내각 아래에서 내무부장관을 맡고 있던 차란 싱은 인디라 간디를 꼭 감옥에 처넣고 싶어했다. 하도 인디라 간디에게 시달렸던 탓에 인디라 간디에 대한 원한이 골수에 사무쳤던 탓이 컸다. 그러나 인디라 간디의 열성 지지자들이 워낙 전국적으로 많이 깔려있었기에 인디라 간디를 심판하는 일은 제대로 이뤄지지 못했다. 심지어 인디라 간디의 극성지지자들이 인도 항공 410편을 납치해 인디라 간디 총리의 석방을 주장하기까지하면서 국면은 더욱 경색국면으로 접어들었다. 인디라 간디를 증오한다는 걸 빼면 공통분모가 하나도 없는 인도판 반동탁 연합이나 마찬가지였던 자나타 당은 인디라 간디의 처우를 두고 격렬한 집안싸움에 접어들었다.

차란 싱은 독자 행보를 계속하며 자나타 당 내부에서도 데사이 총리를 반대하는 자나타 당 의원들의 지지를 얻어낸다. 결국 차란 싱은 데사이 총리를 압박해 강제로 사퇴하도록 만들었고, 1979년 7월 28일에 차란 싱이 인도의 제5대 총리로 취임한다. 차란 싱은 총리로 취임할 적에 인디라 간디와 산제이 간디에게 제기된 모든 기소들을 취하하는 조건으로 인도 국민회의의 지지를 얻어내며 연정을 구성할만한 의석수를 겨우 채웠다. 하지만 차란 싱 총리가 정작 취임한 이후에는 인디라 간디에 대한 기소를 취하하지 않자 당연히 인도 국민회의의 지지도 철회당했다. 1979년 8월에는 레디 대통령이 직접 의회를 해산했고 총리직을 유지할만한 의석수를 챙기지 못한 차란 싱 총리는 취임한 지 1년도 안된 1980년 1월 14일에 그대로 사임했다.


2.5. 1980년 총선과 재집권[편집]


차란 싱 총리가 1년도 안 돼서 쫒겨나자 인도 정국은 날로 혼란 속으로 빠졌다. 1980년에 다시 총선이 치러졌고, 자나타 당 내부에서 일어나는 지지부진한 파벌싸움에 지친 국민들은 다시 인디라 간디의 손을 들어줬다. 다시는 정권 탈환을 할 수 없을 것만 보였던 인도 국민회의가 사실상 어부지리로 정권을 3년 만에 되찾은 셈이다. 인도 국민회의는 전체 543석 가운데 353석을 차지하면서 화려하게 복귀했고, 반대로 자나타 당은 차란 싱찬드라 셰카르로 나눠져 집안싸움을 계속하다가 각각 41석, 31석을 차지하며 대패했다. 불과 3년 전의 총선이 그대로 반대 양상으로 재현된 것이다.

인디라 간디가 다시 인도 총리로 복귀한지 얼마 지나지 않은 1980년 6월 23일, 그녀가 가장 믿던 최측근이자 둘째 아들이던 산제이 간디가 델리에서 비행 능력이 초보 수준이었음에도 미숙하게 곡예비행을 하다가 비행기 추락으로 즉사했다. 아들의 사망으로 인해 그녀는 엄청난 슬픔에 빠졌으며, 원래부터 최측근을 제외하고는 믿지 않던 성향이 더욱 강해졌고, 정치에 관심이 없던 큰아들인 라지브 간디를 억지로 정치판에 끌여들여 제 정치적 후계자로 내세웠다.


2.5.1. 블루 스타 작전(Operation Blue Star)[편집]


1977년 총선에서 시크교 신자들이 많이 살던 펀자브 지방에서는 시크교 정당 '아칼리 달'이 과반을 차지하고 연정을 구성했다. 인도 중앙정부가 통제할 수 없는 시크교도들이 지방정부를 차지하자 경악한 인도 정부는 그나마 친정부적인 성향의 시크교 정통주의자 자르나일 싱 빈드나왈레를 전폭적으로 지원해줬다. 빈드나왈레를 지원하면 시크교도들 사이에서 분열이 일어나 아칼리 달을 견제할 수 있을 것이라는 속내가 깔려있었다. 하지만 빈드나왈레를 기껏 키워놓았더니 또다른 문제가 터진다. 빈드나왈레가 주도하는 종교단체 담다미 탁살이 또다른 종교 갈등에 휘말리면서 폭동을 일으켰고, 빈드나왈레는 이 폭동의 주동자로서 심지어 펀자브 케사리 신문의 사장 야가트 나라인을 살해하도록 선동했다는 혐의까지 씌워졌다. 시크교도 견제고 뭐고 폭동을 제어할 수 없는 수준까지 끌어올린 빈드나왈레를 내버려둘 수 없었던 중앙정부는 어쩔 수 없이 빈드나왈레를 체포했다.

빈드나왈레는 경찰에 체포된 직후 인도 국민회의에서 탈퇴, 인디라 간디와의 관계도 모두 끊어버렸다. 그는 아칼리 달에 합류해 시크교 세력들을 모았고, 1982년 7월부터 본격적으로 시크교도들의 자치권 향상을 요구하면서 본격적인 반정부 시위를 이끌었다. 이들의 분리주의 시위를 가만히 놔둘 생각이 없던 인도 정부는 당연히 이들을 탄압했고, 이들은 점차 극단화되면서 무장 단체로까지 발전했다. 1982년 빈드나왈레와 그를 추종하는 200여 명의 시크교 무장 극단주의자들은 암리차르 황금사원 근처의 게스트하우스로 이주해 아예 아지트를 깔고 살았다. 빈드나왈레와 시크교 무장주의자들은 이 게스트하우스를 거의 요새로 개조했다. 1년여에 걸쳐 자동소총과 기관총, 탄약들을 구비해두면서 경찰들에 맞설 전력을 쌓았고, 수많은 시크교도 무장 세력들이 이 게스트하우스를 거점으로 무장행위를 벌였다. 거의 반국가 단체 수준으로 성장한 빈드나왈레를 두고보기 힘들었던 인도 정부는 1983년 4월 23일 펀자브 주 경찰차장 A. S. 아트왈이 이 사원을 출입하던 도중 빈드나왈레 세력의 총에 맞아 죽은 걸 계기로 빈드나왈레의 진압을 결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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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루 스타 작전으로 파괴된 암리차르 황금사원
사원 내에 진입하는 인도 장성들.
인도 정부는 지지부진한 협상을 끌다가 실패하자 결국 1984년 6월 1일에 인디라 간디는 평화적 해결을 포기하고는 암리차르 사원에 군대 투입을 지시했고, 이렇게 6월 10일까지 '블루 스타 작전'이 진행되었다. 진압 첫날에 인도 보안군은 사원에서 무장세력 진압을 명분으로 기관총을 발포하여 어린이를 포함한 민간인 8명이 사망하고 25명이 부상을 입었으며, 3일에는 펀자브 주에 36시간 통행금지령이 내려지고 외부인의 출입과 모든 전기와 통신, 심지어는 수도 공급까지 차단한 후 군대가 탱크나 중화기들까지 가지고 암리차르 황금사원을 포위했다. 당연히 시크교 최고 성지에 군대가 쳐들어갔으니 시크교도들은 뒤집어졌다. 빈드나왈레를 포함한 시크교 무장세력들은 격렬히 맞섰지만 당연히 국가의 정규군을 이기기란 불가능했고, 얼마가지 않아 인도군은 시크교도들을 모두 제압하고 무장해제하는 데 성공한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인도군은 지나치게 무자비하게 진압을 했는데, 실제로 진압군은 헬기에서 총을 발포하기도 했고, 남자들을 손을 뒤로 묶은 채 집단으로 총살하거나 여성들을 강간하기도 했고, 심지어는 사람을 살아있는 채로 불태워 죽이거나 엄마 품에 안긴 태어난 지 18일(!)밖에 안 된 아기에게 총을 쏴 죽이기도 했다. 그리고 6월 6일 저녁에는 임시 구금 센터 역할을 했던 방에 모인 사람들을 사원의 안뜰로 옮기고는 발포하여 민간인을 최소 70명(그 중 30명은 여성과 어린이들이었다.)을 살해하는 일도 있었다. 그리고 진압군들은 '모든 체포된 사람들을 존엄과 배려로 대우하라'고 지시한 백서를 찢고는 수감자들을 잔인하게 대우했는데, 어느 정도였냐면 한 목격자는 군인들이 수감자들을 '마치 그들의 군대가 속한 나라의 시민이 아닌 외국인인 것처럼 대우했다'고 증언했을 정도였다. 실제로 진압군들은 수감자들에게 음식은 커녕 물도 주지 않았으며, 물을 마시는 것을 허용할 때면 피가 섞인 물을 마시게 했다. 여담으로 당시 테러리스트로 판단되어 수감된 1,592명의 시크교도 중에는 2살~16살 정도밖에 안 된 39명의 시크교도 어린이들도 있었는데, 심지어 이 아이들은 1년 넘게 감옥에서 무자비한 구타를 당하고 식량도 제대로 주지 않아 진흙을 먹으며 버틴 경우까지 있었다.

폭압적인 진압 때문에 수많은 무고한 시크교 순례자들이 목숨을 잃었는데, 인도 정부는 공식적으로 육군 83명이 죽고 시크교도 492명이 사망했다고 발표했지만[22], AP의 특파원 브라마 첼라니(Brahma Chellaney, 1962~)는 총격전으로 시크교도 780명과 군대 400명이 죽었다고 추산했고, 시체들을 치우고 화장하는 임무를 맡았던 펀자브의 경찰이던 아파르 싱 바좌(Apar Singh Bajwa)는 사원 단지 내에서 '800구가 조금 넘는' 비무장 민간인들의 시체를 세었다고 증언했으며, 시크교 측에서는 5천~8천 명 이상이 죽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게다가 진압군은 가족들이 시신을 확인하기도 전에 시신들을 쓰레기 수거차에 싣고는 강제로 화장했기 때문에 정확한 사망자 수는 현재까지도 불명이다.

그리고 인도군은 탱크와 대전차포, 박격포로 포격까지 해댔기에 황금사원에도 상당 부분 파손이 가해졌고[23], 란지트 싱[24]의 유품들이 보관된 창고와 2만 점 가까운 필사본들이 보관되었던 도서관도 잿더미가 되었다[25]. 인도 정부는 무장세력들을 토벌했다고 자찬했지만 국제, 국내적으로 시크교 사회의 비난이 쇄도했다. 하지만 인디라 간디는 이를 묵살했다.


2.6. 암살[편집]


블루스타 작전을 통해 시크교도들을 강경진압한 인디라 간디 총리는 1984년 10월 31일 뉴델리에서 시크교도 경호원에게 암살당한다. 그녀는 그날 아일랜드 방송국에서 만드는 다큐멘터리에 쓸 피터 유스티노프와의 인터뷰를 촬영하기 위해 길을 나서고 있었다. 그녀가 길을 가던 도중 문 양쪽으로 서 있던 시크교도 출신 경호원 사트완트 싱(26)과 베안트 싱(40)이 그녀에게 총을 난사했다. 특히 사트완트 싱의 경우 인디라 간디에게 기관단총으로 30발이 넘는 총탄을 난사하며 그녀를 잔혹하게 공격했다. 멀리 있던 경호원들이 달려들자 사트완트 싱과 베안트 싱은 즉각 항복했고, 원인은 몇 달전 있었던 블루스타 작전에서 시크교도들을 탄압한 인디라 간디에 원한을 품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베안트 싱의 경우 옆방으로 끌려가 즉결처분당해 죽었고 사트완트 싱은 델리 교도소에서 교수형당했다.

한편 인디라 간디는 그때까지만 해도 숨은 붙어있었기에 즉각 병원으로 이송되어 치료를 받았으나 총탄을 30발 가까이 직격으로 맞았던만큼 워낙 부상이 심각해 오후 2시 20분에 향년 66세로 사망선고를 받았다.[26] 그녀의 사망소식은 총격이 발발한지 10시간이나 지난 후 저녁 뉴스에서 발표된다. 인디라 간디의 암살 소식이 알려지자 국민들은 경악했고, 대권은 그대로 그녀의 아들이자 비공식적 후계자나 다름없던 라지브 간디에게로 넘어갔다.

인디라 간디는 본인이 그렇게 극렬하게 시크교도들을 탄압하고도 경호원인 사트완드 싱과 베안트 싱은 그대로 두었는데[27] 그것이 목숨을 재촉했다. 시크교에서는 이 날을 순교자의 날로 기리며 이 2명을 성자로 찬양했다. 이 2명의 유족들은 시크교를 탄압하고 많은 시크교인을 죽게 한 인디라 간디를 응징한 영웅이라고 자랑스럽게 여긴다고 한다.[28]

이 암살의 여파는 굉장히 커서 11월 3일에 열린 간디의 장례식에는 50만 명이 참여했고, 인디라 간디의 죽음에 분노한 힌두교도들이 폭동을 일으켜 수도 뉴델리에서만 시크교도들이 3천 명, 전국적으로는 무려 8천 명의 시크교도들이 보복학살을 당했다. 더 최악인 것은 인도 정부가 폭동을 진압만 하고 학살자들을 처벌하는데 지지부진했다는 것이다.[29]

결국 더욱 분노한 시크교도들도 인도항공 182편 폭파 사건을 비롯한 테러로 맞대응하고, 이로 인하여 국제적으로 인도 정부가 비판을 받자 부랴부랴 학살에 대하여 책임 소재를 따지고 뒷북을 치는 등 총체적 난국을 연출한다.


3. 경제 정책[편집]


인디라 간디 총리는 총 3차례 '5개년 계획'을 발표했다. 5개년 계획아라는 개념 자체는 소련스탈린이 원조로 사회주의 국가들에서 시행된 정부주도의 경제정책이었는데, 사회주의 성향의 정당이던 인도 국민회의 역시 이 5개년 계획을 그대로 이어받았던 것이다. 제1차, 제2차, 제3차 5개년 계획은 초대 총리 자와할랄 네루 아래에서 이루어졌다. 제1차 5개년 계획은 1951년 시작됐고, 목표는 전쟁과 독립으로 피폐해진 인도를 재건하는 것으로 인도의 농업을 복구하고 식량 생산량을 대폭 늘리는 것이었다. 즉 200년에 걸친 영국의 수탈 끝에 망하기 직전의 인도에 호흡기를 붙여놓기 위한 노력이었던 것이다. 1차 5개년 계획은 성공을 거두었고 목표 성장률이던 2.1%를 훌쩍 뛰어넘어 GDP가 무려 3.5%에 가까운 성장률을 보였으며[30] 국내 순생산은 15%나 증가했다. 몬순과 풍작 덕에 식량난도 줄었고, 외환보유고와 1인당 소득도 무려 8%나 증가했다. 여러모로 대단히 성공적인 결과를 거두었고, 이때 인도 공과대학교가 설립되기도 했다.

제1차 5개년 계획의 성공에 고무된 네루 총리는 1956년 바로 제2차 5개년 계획을 발표했다. 1차 계획이 국가 재건과 농업 향상이었다면 이번의 주 목적은 인도의 산업화와 공공부문의 발전이었다. 소련영국, 서독의 지원을 받아 곳곳에 제철소가 건립되었고, 수많은 공장들이 세워지면서 철과 석탄의 생산량이 크게 늘어났다. 다만 외부에서 자금을 조달해오는 방식 때문에 비판받기도 했고, 실제로 1957년에 외환지불위기에 직면하면서 일시적으로 경제에 위기를 맞기도 했다. 그래도 제2차 5개년 계획 역시 결과적으로 보면 성공적이어서 목표 성장률인 4.5%에는 미치지 못했지만 4.27%라는 성장률을 찍을 수 있었다.

제1차 계획과 2차 계획이 연달아 성공을 거두자 신난 인도 정부는 야심차게 제3차 5개년 계획을 추진했다. 제3차 5개년 계획은 주로 밀 생산 증가와 농업 발전에 초점을 맞췄는데, 안타깝게도 제3차 5개년 계획은 실패로 돌아갔다. 1965년에 파키스탄과 전쟁이 벌어지며 농산물 가격이 폭등했고 가뭄까지 겹치면서 아무 쓸모가 없게 되어버렸던 것이다. 인플레이션이 일어나 정부는 경제성장이고 뭐고 물가 안정에 모든 힘을 쏟아야만 했고, 이과정에서 국제통화기금에 손을 벌려야 할 정도까지 추락했다. 1966년에는 처음으로 루피가 평가절하되기까지 했다. 목표 성장률은 전보다도 높게 잡은 5.6%였지만 실제 성장률은 2.4% 밖에 안됐다. 제3차 5개년 계획이 처참하게 실패하자 인도 정부는 재고 기간에 들어가 다시 목표를 재설정했다.

인디라 간디가 인도 총리를 맡게 된 게 바로 이 시점이었다. 즉, 랄 바하두르 샤스트리 총리의 급작스런 사망 이후 급하게 총리가 되었는데, 제3차 5개년 계획의 실패로 주춤하던 인도 경제를 살려야하는 막중한 책임을 떠맡게 된 것이다. 그러다보니 취임 초기 간디 총리는 속내야 어떻든 경제 자유주의를 표방하면서 자국의 통화가치 절하를 대가로 외국의 원조를 받기 시작했다. 그 덕에 1966년에 경제는 그럭저럭 회복세를 띄었고 경제성장률도 1969년까지 평균 4%대 성장을 기록했다. 하지만 미국 자본가들은 이런 원조를 대가로 점차 인도 내정에 깊이 간섭하려 들었고, 인도 정부가 지나치게 경제를 꽁꽁 닫아걸고 있다고 비난했다. 그와중에 베트남 전쟁이 터지고 인도 정부가 미국을 비난하며 닉슨 행정부와 관계가 경색된다. 미국은 이를 빌미로 인도에 대한 곡물 원조량을 줄여버렸고, 격분한 인디라 간디 총리는 다시는 외국 원조에 국가 식량계획을 기대지 않을 것을 천명하면서 더이상의 원조를 받지 않았다. 게다가 기존의 경제 자유화 정책까지도 대거 폐기해버린다.

인디라 간디 총리의 국가 통제 경제 정책은 1976년 대놓고 국가 주도의 사회주의 경제를 선포하면서 절정을 찍는다. 이후 인도 정부는 기존의 민영화 정책과 자유주의 정책들을 뒤집어버린 후 대규모 국영기업 육성, 각종 민영기업 제재 등의 사회주의적인 정책들을 펼친다. 인디라 간디는 1969년 야심차게 제4차 5개년 계획을 실시했다. 제4차 5개년 계획의 주 목표는 식량 자급자족과 경제 자립, 그리고 보호주의 무역의 극대화였다. 이로 인해 이전까지 이뤄졌던 모든 자유화, 개방 정책은 그대로 쓰레기통으로 들어갔고 그 어떤 시절보다 국가가 경제에 개입하는 경향이 늘어나게 된 것이다. 14개에 달하는 은행들이 모조리 국유화됐고, 그 외에도 부의 재분배와 균형잡힌 성장을 위해서 대규모의 국가 주도 사업이 전국에서 벌어지기도 했다. 또한 무엇보다 우선순위였던 식량 자립을 위해 녹색 혁명을 일으켜 실제로 꽤 성과를 거두었다. 하지만 농업을 제외하면 썩 그닥이었다. 인도 정부는 제4차 5개년 계획의 목표 성장률을 대략 5.6%로 잡았지만 실제 경제 성장률은 3%대에 불과했다. 결과적으로 제4차 5개년 계획은 생각보다 큰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1974년에 수립된 제5차 5개년 계획은 이전의 제4차 5개년 계획에 비하면 중구난방에 얼기설기 끼워맞춘 조잡한 경제계획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애초에 체계적인 목적을 가지고 수립한 정책이 아니었고, 인디라 간디 총리가 비상사태를 선포하면서 대충 경제 비전을 제시하기 위해 만들어진 계획이었기 때문이다. 제5차 5개년 계획의 기본 목적은 심각한 실업률 해결과 빈곤률 감소였다. 인디라 간디 총리는 비상체제를 통해 얻어낸 막대한 권력을 휘두르면서 인도 경제를 확실하게 휘어잡았다. 국가가 보호주의 무역정책을 펴고 시장에 깊숙이 개입하면서 의외로 인도는 70년대 브레튼우즈 체제의 붕괴로 인한 세계적인 경제 혼란을 피해갈 수 있었고, 1973년의 오일 쇼크로 인한 경제난도 어느 정도 막을 수 있었다. 정부가 거의 초법적인 권한으로 국가 경제를 떠받쳤는데, 덕분인지 제5차 5개년 계획 동안 인도의 경제성장률은 5% 대를 찍으면서 기존의 목표 성장률을 훌쩍 넘겼다. 다만 비상사태가 끝나고 난 직후 실시된 총선에서 인디라 간디는 본인은 예상치 못했을 패배로 실각을 하고, 대신 상대방 모라르지 데사이 내각이 출범하면서 5개년 계획은 바로 철회된다.

허나 모라르지 데사이 총리와 자나타 당은 정치싸움에 매달리다가 인도 경제를 제대로 돌보지 못했다. 결과적으로 인디라 간디의 실각 이후 인도의 경제성장률은 2년 동안 -5.2%라는 역사상 최악의 수치를 보였고, 18.2%라는 엄청난 인플레율을 보이면서 경제가 심각하게 악화된다. 이렇게 경제가 파탄나자 안그래도 자나타 당 내부의 싸움에 지쳤던 국민들은 다시 인디라 간디에게 힘을 실어줬다. 인디라 간디 총리는 1980년에 다시 총리직에 복귀했다. 간디 총리는 총리직에 복귀하자마자 기존 자나타 당의 경제정책들을 모두 폐기하고 제6차 5개년 계획을 실시했다. 제6차 5개년 계획의 경우 이전 계획들과는 달리 사회주의적 이념에 박혀있지 않았고 대신 실용주의적인 노선을 택했다. 때문에 국영기업들의 효율화, 비대한 조직 정리 등이 이루어졌고 자본시장의 규제도 완화해주면서 실리적인 방법을 따랐다. 이 덕에 제6차 5개년 계획은 그동안의 5개년 계획 중 가장 성공적인 경제정책이 될 수 있었고, 인도 경제는 다시 매년 5% 대의 성장률을 보이면서 빠르게 성장했다. 이후 인디라 간디 총리가 1984년 암살당하기 직전까지도 인도 경제는 그럭저럭 양호한 수준이었다.


4. 외교 정책[편집]


인디라 간디 총리는 오랜 기간 동안 인도를 이끌었던 장기집권총리였던만큼 많은 족적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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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레즈네프 소련 서기장과 인디라 간디 총리
리처드 닉슨 대통령과 인디라 간디 총리[31]
외교적으로 보면 한창 냉전이 진행되고 있던 시절에 미국소련 그어디에도 붙지 않고 중립적인 외교 정책을 펼쳤다. 아버지 자와할랄 네루의 기본 외교기조를 그대로 계승한 거나 마찬가지였다. 인도는 제3세계의 수장국으로서 중립적인 외교정책을 보이려 노력했는데, 그와중에 인디라 간디 시절에는 유난히 소련과의 관계가 좋았다. 특히 소련이 방글라데시 독립전쟁에서 방글라데시에게 군수물자를 제공하고 인도의 편을 들어 유엔에서 거부권을 행사하면서 그때 이래로 대소련 관계는 급속도로 호전된다. 인디라 간디는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을 껄끄럽게 여겼지만 소련과의 관계를 생각해 일부러 비판을 자제하기도 했다. 소련은 인도와의 밀월관계를 이어가면서 경제적, 관세적 혜택을 줬고 1980년대 초에는 인도의 최대 교역국으로 떠오르기까지 했다. 여러모로 소련과 인도가 서로의 편의를 봐주면서 괜찮은 관계를 이어갔던 시절이었던 것.

반대로 미국과의 관계는 소련만큼 매끄럽지는 못했다. 아무래도 자유민주주의 국가들의 수장을 자처하던 미국으로서는 민주주의 국가임에도 따로노는 인도가 예뻐보일 수가 없었고, 인도가 비동맹운동을 창설해 제3세계 국가들을 규합하려 시도하자 이 시도도 딱히 좋게 보진 않았다. 특히 리처드 닉슨 대통령이 인디라 간디 총리를 엄청 싫어했는데, 그녀를 '암캐' 혹은 '교활한 여우'라고 불렀다는 기록이 남아있을 정도다. 다만 1980년대에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 시대 들어서는 관계가 상당히 개선된다. 미국 외에 서유럽 국가들과는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 일단 그녀가 유년 시절 유럽으로 유학을 떠나면서 인맥이 많았기도 했고, 빌리 브란트 서독 총리나 마가렛 대처 총리와 친구를 먹기도 했다.

중동 외교의 경우 팔레스타인을 지지했다. 이스라엘을 밀어주던 미국으로서는 인도가 곱게 보일 리가 없었던 또다른 이유기도 했다. 인도가 미국과의 갈등도 감수하면서 굳이 팔레스타인을 지지했던 이유는 유대교를 모태로 한 이스라엘이 종교국가처럼 보였기 때문이었다. 최대 적국인 파키스탄도 종교국가를 자처했기에 세속주의를 추구하던 인도로서는 도저히 이스라엘을 좋아할 수가 없었다. 인도는 이렇게 친아랍 정책을 펴면서 파키스탄과의 신경전을 벌였는데, 정작 이렇게 공을 들였음에도 불구하고 1971년 인도-파키스탄 전쟁이 터졌을 때 아랍 국가들이 파키스탄을 지지하거나 중립을 유지하자 인디라 간디는 어마어마하게 실망하게 된다. 아랍 국가들도 경제력이나 국력이 인도가 우위에 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결정적으로 파키스탄이 이슬람 국가였기 때문에 보수주의적인 아랍 특성상 파키스탄을 지원해주는 경우가 더 많았다. 이후 인디라 간디는 아랍 국가가 아니라 이란팔라비 왕조와 급속도로 가까워진다. 당시 팔라비 왕조의 모하마드 레자 팔라비가 반이슬람적 개혁 정책을 폈기에 서로의 입장이 맞았던 덕에 이란과 인도 관계는 크게 호전된다.

인디라 간디는 끊임없이 앞마당인 남아시아 지방에서 인도의 영향력을 확고히 하려 시도했다. 반대로 최대 경쟁국이자 원수나 다름없던 파키스탄의 힘을 빼놓기 위해 온갖 짓을 다했는데, 가장 대표적인 정책이 방글라데시 독립 전쟁에서 방글라 반군을 지원해준 일이었다. 인디라 간디는 막대한 군수물자를 지원하며 결국 동벵골이 파키스탄에서 떨어져나와 방글라데시로 독립하도록 만드는 데 성공한다. 이후 방글라데시가 지나치게 인도와 밀착하면 자연스레 인도에 흡수되어버릴 걸 두려워해 조금 사이가 멀어졌지만 그대로 인도와 방글라데시 사이의 관계는 어느 정도 호의적이었다. 어쨌든 그 외에도 파키스탄과의 충돌은 끝없이 일어났다. 비록 1972년 심라 협정으로 일시적 평화를 찾긴 했지만 파키스탄과 인도의 관계는 여전히 최악이었다. 인디라 간디 총리가 70년대에 '미소짓는 부처' 프로젝트로 첫 핵실험을 강행하자 파키스탄이 이를 맹비난하면서 전쟁 직전까지 수 차례 몰리기도 했지만 어찌어찌해서 아슬아슬하게 힘겨루기를 계속했다.


5. 국내 정책[편집]


인디라 간디 총리의 최대 업적(?) 중 하나가 바로 1974년에 치러진 인도 최초의 핵실험 '미소짓는 부처 프로젝트(Smiling Buddha Project)'다. 원래 인도는 자와할랄 네루 총리 시절부터 핵무기에 대한 야심을 드러내고 있었는데, 그와중에 바로 옆 중국에서 핵실험을 진행하자 이에 자극받아 1964년부터 본격적인 독자적 핵무기 개발에 박차를 가했다. 결국 10년만인 1974년에 핵실험을 제외하면 모든 준비가 완료되었고, 인디라 간디 총리가 실험을 구두로 승인하면서 인도의 포크란 지방에서 최초의 핵실험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진다. 전세계는 당연히 불만이 많았지만 인도의 제3세계 국가의 수장이라는 민감한 특성을 고려해 약한 제재를 할 뿐 별다른 타격을 입히기는 꺼렸다. 반면 최대 적국인 파키스탄은 그대로 뒤집어졌다. 줄피카르 알리 부토 총리는 인도를 맹비난하면서 독자적인 핵무기 개발에 착수했다. 세계적으로 핵실험에 대한 제재를 받긴 했지만 그 효과도 미약했기에 국내 여론은 대단히 좋았고, 이 미소짓는 부처 핵실험으로 인도 국민회의의 지지율은 쭉쭉 올라갔다.

간디 총리는 완고한 성격답게 분리주의 운동이나 공산권들의 준동에는 대단히 엄격하게 대처했다. 대표적인 예가 시크교의 최대 성지 암리차르 황금사원에 직접 군대를 투입한 '블루스타 작전'이나 북동부 미조람 지역에서 일어난 공산주의 반란을 공습해 쓸어버렸던 일이다. 60년대에 방글라데시가 독립을 찾자 인근의 미조람 지방에서도 인도에서 독립하고자 하는 열기가 거세졌는데, 공산주의자들이 반란을 선동하자 대군을 투입해 막대한 포탄을 쏟아부으면서 지역을 싹 정리해버렸다. 덕분에 또는 때문에, 미조람 지방은 현재까지도 북동부 지방에서 가장 평화로운 지역들 중 하나로 꼽힌다. 그 외에도 카슈미르 지방에서의 분리주의 운동도 굉장히 강경하게 진압한 것으로 유명하다.

사회 개혁도 진행했다. 당시 인도는 막 독립한 지 얼마되지 않았던 터라 전국 곳곳에 왕실과 귀족정이 여전히 남아있는 상태였다. 인도 제국 시기 영국인들이 모든 영토를 직할령으로 다스린 게 아니라 각 지방에 산재해있던 소국들을 제후국으로 삼은 채로 간접적으로 지배하는 방식을 택했기 때문이다. 인도 독립 초기에는 인도-파키스탄 분리로 인해 혼란했었기 때문에 더 이상의 분열을 막기 위한 방책으로 직접적으로 반항하지 않는 이상 지역 왕족들과 귀족들에게 여전히 자치권과 특권을 보장시켰지만, 이들은 여전히 카스트 제도같은 특권의식을 지닌데다가 특권을 이용해 지역사회에서 여전히 큰 영향력을 행사했기 때문에 공화정 인도와는 맞지 않는다는 목소리가 높았다. 사회주의 정당 소속 인디라 간디는 이 구 왕실들의 힘을 빼놓기 위해 노력했다. 당연히 왕족과 귀족들의 반발이 엄청나 우익 정당과 야당들에게 막대한 로비를 퍼부으며 이를 막으려 시도했다. 왕실의 비밀 자금 은닉처를 폐지하고 그때까지만 해도 보장되었던 왕족 특권을 몰수한다는 내용의 법안이 1970년 발의되었지만 왕족들의 필사적인 발악으로 단 1표 차이로 상원을 통과하는 데 실패했다. 인디라 간디는 의회에서 법안이 막히자 대통령령으로라도 우회하려 시도했지만 이마저도 대법원에 막혔다. 하지만 인디라 간디는 왕족의 특혜 폐지에 진심이었고, 결국 끝끝내 1971년에 수정헌법 26조를 통과시키면서 인도 내 왕실의 특권을 공식적으로 폐지하는 데 성공한다.

인도 최초이자 유일한 여성 총리였던 인디라 간디는 페미니스트는 아니었다. 하지만 그녀는 여성 문제에 대단히 관심이 많았고, 실제로 인도 국민회의 내에 여성 관련 부처를 신설하는 데 큰 영향을 끼치기도 했다. 아무래도 여성 인권이 바닥이었던 인도 특성상 여성 인권의 증진은 반드시 한번쯤 짚고 넘어가야할 문제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딱히 페미니즘에 관심이 많았던 것은 아니어서, 실제로 총리 재임 내내 내각에 단 한 차례도 여성 장관을 임명한 적이 없다. 오히려 '능력만 있다면 누구든지 자리에 오를 수 있을 것이다'라고 주장하며 여성계를 비판하기도 했다. 물론 아버지의 휘광을 업은 그녀가 딱히 할말은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도 최고의 자리에 올랐던 인물이었기에 인도 여성계와 여성 대부분들은 그녀를 페미니즘의 상징으로 여겼다고 한다. 참고로 인디라 간디는 가족과 자식들에게 많은 시간을 쏟지 못했던 거에 대해 죄책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녀 자신도 아버지 네루 총리가 일에 바빠 자신을 챙겨주지 못했기에 부모의 관심없이 자라나는 외로움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 때문.


6. 가족 관계[편집]


  • 아래 사진의 왼쪽 2번째가 인디라 간디. 가장 왼쪽은 아버지 자와할랄 네루, 옆은 아들인 라지브 간디로 지금은 죽은 세 사람은 흑백사진이며 오른쪽에 있는 컬러 사진으로 나온 세 사람은 며느리(즉, 라지브 간디의 미망인)인 소냐 간디(1946 ~ )[32], 손녀인 프리양카 간디, 손자인 라훌 간디(1970년생). 이 셋은 2021년에도 모두 살아 있으며, 인도 국민 회의의 지도부로 활동하고 있는 인도 정계의 명실상부한 실력자들이다. 손자나 손녀가 총리가 된다면 무려 4대에 이르는 총리가 탄생하는 셈이다. 그래서 네루-간디家는 인도 정계 최고의 명문가로 인정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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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이야깃거리[편집]


  • 대한항공에어 인디아한국에서 출발해 인도 뉴델리로 운항하면서 도착하는 국제공항의 이름이 인디라 간디의 이름을 딴 인디라 간디 국제공항이다.
  • 시크교도에 대한 무력진압과 국가비상사태 선포, 가족계획을 표방한 산아제한 정책[33] 때문에 벌어진 당시의 비극은 인도의 유명 작가인 로힌턴 미스트리의 소설 《적절한 균형》(A Fine Balance)에 잘 묘사되어 있다.
  • 네루가 감옥에 갇힌 1930년부터 그는 옥중에서 수시로 편지를 써서 보냈는데, 이때 당시 인디라 간디의 나이는 13살이었고, 그 내용은 안부편지에 더해 세계사 이야기였다. 그 편지를 책으로 엮은 것이 바로 《세계사 편력》이다.
  • 아버지가 장신이여서 그런지 인디라 간디 역시 인도 여자치고는 키가 큰 편이었다.
  • 2012년에 선정된 '위대한 인도인'에서는 7위에 올랐다. 참고로 아버지는 이 조사에서 4위에 올랐다.[34]
  • 문명 2에서 마하트마 간디와 함께 인도 문명의 지도자로 등장한다. 다만 문명마다 개성이 생기는 건 후속작인 문명 3부터의 일이라, 지도자로 나온다는 것 이외에 특기할 만한 점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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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우타르프라데시프라야그라지[2] 인도에서는 '간디'라는 성이 한국의 김씨, 이씨처럼 흔하다고 알려져 있는데, 이는 사실이 아니다. 인도 내에서도 간디 성을 가진 사람은 겨우 15만 명 뿐인, 오히려 적은 편에 속하는 성씨다.# 그렇지만 인디라 남편인 페로제 간디가 모한다스 간디를 존경해서 성씨를 바꾸기는 했는데, 그 마저도 철자를 달리한 수준이다. 그래도 네루의 딸이었기 때문에 그런지 마하트마 간디와 어려서부터 친분은 있었다. 인디라 간디가 6세 때 마하트마 간디와 같이 찍은 사진.[3] 동생이 하나 있었지만 어릴 때 죽었다.[4] 물론 최고급 교육을 받아서 웬만한 학생들보다 실력은 훨씬 좋았다.[5] 어머니는 결국 1936년 2월 사망했다[6] 다만 당시까지만 해도 필수이수과목이었던 라틴어는 정말 지지리도 못했다고 한다.[7] 당시는 아직 페로제 간디와 결혼하지 않았기 때문에 성이 '네루'여서 풀네임이 '인디라 네루'였다.[8] 개헌선을 훌쩍 넘겼던 1961년 총선에 비해 크게 의석수가 떨어진 283석에 그치는 사실상의 패배였다[9] 이 갈라진 두 파벌을 구분하기 위해 인디라 간디편 의원들을 인도 국민회의(R). 당내 지도부편 의원들을 인도 국민회의(O)라고 따로 부른다.[10] 힌두 우익 단체 RSS가 창당한 정당으로 훗날 인도 인민당의 모태가 된다.[11] 실제로 당시 인도인들은 여야 가리지 않고 파키스탄을 증오했다.[12] 후에 인도 총리가 됨.[13] 다만 좋은 일만 있던 것은 아니었다. 전시 세금으로 인해 세금이 불어나다보니 국민들의 불만이 증가했고, 1973년의 오일 쇼크를 얻어맞으면서 경제가 악화되자 인도인들 사이에서 비판이 쇄도했다. 인디라 웨이브가 어느 정도 진정되고 나자 비하르구자라트 주를 중심으로 인디라 간디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가 점점 거세진다.[14] 어느 정도였냐면, 당시 인도에서는 정부의 조치에 대한 대규모 저항이 없는 나머지 인디라가 '개가 짖지 않았다'라고 말할 정도였다고 한다. 그러면서도 인디라는 야당과 노동조합, 언론의 '있을 리가 없는' 반대를 두려워했다.[15] 숫자만 보면 어마어마해 보이지만, 정작 1977년 기준으로 인도 인구가 6.5억 명 정도였기에 인구 비례로만 따지면 고작(?) 0.02%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이는 전두환 시기 대한민국의 인구 대비 양심수 비율(약 0.03%)보다도 적다.(...)[16] 이중 2명은 18세 미만의 미성년자였고, 2명은 75살이 넘은 노인이었다.[17] 제대로 된 공직 하나 맡고 있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단지 인디라 간디 총리의 아들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막대한 권력을 남용해서 비판을 많이 받은 인물이었다. 실제로 산제이 간디는 1976년 1월에 인도의 전설적인 플레이백 싱어이자 배우였던 키쇼레 쿠마(Kishore Kumar, 1929~1987)에게 봄베이에서 열리는 의회 집회에서 노래를 불러달라는 요구를 거절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1976년 5월 4일부터 국영 라디오에서 그의 음악을 송출하는 것과 그의 노래가 담긴 레코드판을 판매하는 것도 금지시킨 적도 있었으며, "자마 마스지드(Jama Masjid, 델리에 있는 인도 최대의 모스크 중 하나)에서 인디아 게이트(India Gate,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사망한 영국군을 기리기 위해 1931년에 완공된 문)를 방해받지 않고 보고 싶어서"라는 황당한 이유만으로 델리의 슬럼가를 철거해버렸다.[18] 당시 재판 없이 수감된 사람들 중 4만 명(전체 수감자의 약 1/3~1/4 정도)이 인도 인구의 2%에 불과한 시크교도였다고 한다.[19] 오늘날 인도에서는 30분~1시간 정도 열차가 지연되는 것도 사소한 일로 간주될 정도로 열차 지연이 잦으며, 심지어는 열차가 정시에 도착하자 지연될 줄 알던 사람들이 화를 내면서 따졌는데 알고 보니 그 열차는 사실 그 전날에 도착했어야 할 열차였다는 황당한 일화까지 있다.[20] 참고로 인디라 간디는 네루의 딸로서 해방 운동을 가까이서 알게 되었고, 이 영향으로 보다 개인적인 대통령제가 다원적 민주주의가 이질적인 인도를 위해 유일하게 적합한 정부라고 평생 믿어왔다고 한다.[21] 산제이 간디의 권한이 지나치게 강화되자 인도 국민회의 내부에서도 산제이 간디가 인디라 간디를 뒤에서 조종하고 있느냐는 게 아니냐는 의문이 나왔다. 일부 인사들은 인디라 간디를 보위한다는 목적으로 산제이 간디를 쫒아내려 들었다.[22] 정부는 민간인 사망자 대부분이 시크교도들이 인간 방패로 삼은 사원 안의 순례자들이라고 주장했다.[23] 실제로 사원에 남겨진 총알 자국이 최소 300만 개였다고 한다.[24] Ranjit Singh, 1780~1839, 시크 왕국의 건국자[25] 그나마 불행 중 다행히도(?) 인도 당국이 이미 도서관의 필사본들을 몰수해간 상태라 인도군이 도서관에 불을 질렀을 때 도서관은 텅 빈 상태였다고 한다. 이 필사본들은 오늘날에도 행방불명 상태이며, 최소한 117개의 '선동적인' 문서가 인도 당국에 의해 파기되었다고 한다.[26] 당시 그녀를 치료했던 의사의 말에 의하면 총 30발의 총탄을 맞았는데, 개중 23개는 그대로 그녀의 몸을 관통했고 7발은 몸 속에 남아있었다고 한다.[27] 본래 시크교도들은 육식과 운동을 권장하고 힘을 키우는 걸 장려했기 때문에 체격이 좋고 힘도 쎄 오래전부터 군인이나 경호원으로 선호되어 왔는데, 시크교도 독립운동 탄압 이후 측근들은 계속 사트완트 싱과 베안트 싱을 해임하라고 권고했다고 한다. 하지만 인디라 간디는 그들을 크게 신뢰하였고 그대로 경호원으로 임용했고 총 맞기 직전까지도 그들에게 미소를 보였다고 한다.[28] 훗날 베안트 싱의 아버지와 아내는 인도의 국회의원으로 선출되었고 그중 사트완트 싱은 1988년 수감되어 있을당시 약혼녀와 옥중결혼까지 하였다. 단 결혼식을 할때는 결혼식장에 사트완트 싱의 사진을 갖다놓고 식을 올렸다고 한다.[29] 심지어 인도 국민회의 간부들이 시크교도 학살의 배후였다는 소문이 돌았고 일부는 사실일 가능성이 크다.[30] 5%대라는 말도 있는 등 정확한 수치는 확인이 필요해보인다.[31] 저 사진 하나만으로 당시 미국과의 관계가 보인다. 닉슨 대통령은 인디라 간디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에 표정을 한껏 찌푸리고 있었다.[32] 이탈리아 출신으로 인도 최초의 (귀화) 외국인 의원이기도 하다. 사실 남편도 유세 도중 폭탄 테러에 숨진 비극이 있다.[33] 문제는 빈민층에게 강제로 불임 수술을 받게 하는 등 강압적으로 산아 제한 정책을 펼쳤기 때문이다.[34] 여담으로 이 조사에서 마하트마 간디는 순위권에도 오르지 못했는데, 이는 '1947년에 독립 후 활동한 인물만을 기준으로 투표한다'는 조건에 부합하지 못해 조사 대상에 들어가지 못했기 때문. 심사위원들은 '만약 간디가 이 조사에 포함된다면 이견 없이 1위를 차지할 것이다'고 판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