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리아 몬테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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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리태니커 대백과사전 선정 세계의 여성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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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년 브리태니커 대백과사전은 세계사에 이름을 남긴 여성들을 선정했다.
긍정적 영향을 미친 여성들뿐 아니라 '세계사에 족적을 남긴 여성들'을 뽑았기 때문에 부정적인 인물들 혹은 논란 있는 인물들도 있다.

성인들
성모 마리아
예수의 테레사
마더 테레사
지도자들
앙겔라 메르켈
베나지르 부토
예카테리나 2세
캐시 프리먼
서태후
클레오파트라
코라손 아키노
크리스티나 페르난데스
달리아 그리바우스카이테
다이애나 스펜서
지우마 호세프
에디트 크레송
엘레오노르 다키텐
엘리너 루스벨트
엘리자베스 1세
엘리자베스 2세
엘런 존슨 설리프
에바 페론
골다 메이어
그로 할렘 브룬틀란
한나 수호츠카
하트셉수트
인디라 간디
이사벨 1세
제니 시플리
줄리아 길라드
칼레다 지아
킴 캠벨
마거릿 대처
마리 앙투아네트
메리 로빈슨
메가와티 수카르노푸트리
미첼 바첼레트
미셸 오바마
박근혜
잔 다르크
시리마보 반다라나이케
쑹메이링
탄수 칠레르
테오도라
바이라 비케프레이베르가
빅토리아 여왕
비그디스 핀보가도티르
비올레타 차모로
측천무후
잉락 친나왓
발견자들
에이다 러브레이스
어밀리아 에어하트
바버라 매클린톡
캐롤라인 허셜
도러시 호지킨
엘리자베스 블랙웰
플로렌스 나이팅게일
히파티아
제인 구달
캐서린 존슨
리제 마이트너
마거릿 미드
마리아 미첼
마리 퀴리
마리암 미르자하니
레이첼 카슨
로잘린드 프랭클린
사카자위아
발렌티나 테레시코바
예술가들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
코코 샤넬
도로시아 랭
프리다 칼로
카라 워커
메리 카사트
쿠사마 야요이
자하 하디드
사회운동가들
앨리스 워커
앤절라 데이비스
앤 로이페
아얀 히르시 알리
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
엘프리데 옐리네크
그레타 툰베리
제인 폰다
주디 시카고
리마 보위
나오미 클라인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
수잔 팔루디
타우왁쿨 카르만
와리스 디리
말랄라 유사프자이
마거릿 생어
마리아 몬테소리
해리엇 터브먼
캐롤리 슈니먼
로자 파크스
시린 에바디
왕가리 마타이
에멀린 팽크허스트
글로리아 스타이넘
작가들
에밀리 디킨슨
제인 오스틴
사포
버지니아 울프
마거릿 애트우드
가브리엘라 미스트랄
헬렌 켈러
J. K. 롤링
메리 울스턴크래프트
무라사키 시키부
시몬 드 보부아르
안네 프랑크
토니 모리슨
운동선수들
베이브 디드릭슨
빌리 진 킹
파니 블랑커스쿤
재키 조이너커시
미아 햄
나디아 코마네치
세레나 윌리엄스
퍼포머들
비욘세
엘라 피츠제럴드
캐서린 헵번
마돈나
메릴 스트립
미리엄 마케바
오프라 윈프리
사라 베르나르
움 쿨숨
정치인들
에이미 클로버샤
바바라 조던
캐롤 모즐리 브라운
엘리자베스 워런
프랜시스 퍼킨스
제럴딘 페라로
해티 캐러웨이
힐러리 클린턴
저넷 랭킨
매들린 올브라이트
낸시 펠로시
넬리 테일로 로스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
셜리 치점
빅토리아 우드훌
참정권주의자들
앨리스 폴
앨리스 스톤 블랙웰
캐리 채프먼 카트
크리스타벨 팽크허스트
도리아 샤픽
엘리자베스 케이디 스탠턴
프랜시스 하퍼
프랜시스 윌러드
해리엇 스탠턴 블래치
헤르타 아일톤
후다 샤아라위
아이다 벨 웰스
제인 애덤스
줄리아 워드 하우
케이트 셰퍼드
루크레티아 모트
루시 번스
루시 스톤
메리 처치 테렐
메리 울스턴크래프트
메이 라이트 슈
밀리센트 포셋
소저너 트루스
수잔 B. 앤서니
버지니아 루이자 마이너
출처




마리아 몬테소리
Maria Tecla Artemisia Montessori

파일:external/1.bp.blogspot.com/Montessori.jpg
출생
1870년 8월 31일
이탈리아 왕국 마르케 키아라발레
사망
1952년 5월 6일 (향년 81세)
직업
아동 교육학자, 아동 정신과 의사
국적
[[이탈리아|

이탈리아
display: none; display: 이탈리아"
행정구
]]

학력
로마 사피엔차 대학교 의학과
경력
로마 국립 특수 교육학교(1898~1900)
이탈리아 교육부 장관(1922~1934)


1. 개요
2. 생애
3. 아동 교육에의 기여
4. 개인사


1. 개요[편집]


이탈리아의 아동교육학자이자 아동정신과 의사. 교육학에 문외한이더라도 몬테소리 교육법이란 표현은 워낙 교육업체에서 많이 홍보문구로 써와서 들어본 사람이 많을 것이다.


2. 생애[편집]


이탈리아 키아라발레(Chiaravalle)에서 태어났다. 아버지의 격렬한 반대와 어머니의 열렬한 서포트를 업고 로마 사피엔차 대학교 의학과에 입학한 유일한 여학생이었다.

설에 따르면 의학과 재학 당시 여자라는 이유로 해부실습 수업 참여가 금지되었다고 한다. 마초 문화 경향이 강한 이탈리아, 그중에서도 의대는 심각한 남초사회였으니 이러한 불평등이 심했다고 한다.

졸업 후 동 대학의 부속병원 정신병과 조수가 되었으나 여전한 차별대우 및 아이들을 학대하는 당시의 관습에 지쳐 교육학으로 전향을 결심, 1898년부터 2년 간 로마의 국립 특수교육학교에서 일한 다음 로마대학교에 재입학해 7년간 실험심리학과 교육학을 배웠다. 1907년 3~6세까지의 노동자 자녀들을 위한 유치원 '어린이의 집(Casa dei Bambini)'을 열어, 이른바 몬테소리 교육법(法)에 의한 교육을 실시하였다.

1922년에는 이탈리아의 교육부 장관이 되었으며, 몬테소리의 학교 및 교육 방법은 베니토 무솔리니 정권의 지원을 받았다. 그러나 평화와 어린이 교육을 강조하는 등 몬테소리의 교육 방식은 무솔리니의 파시즘 정권과 부딪히는 부분이 많았다. 결국 몬테소리는 공직을 사임하고 1934년 이탈리아를 떠나서 아들이 거주하고 있는 스페인 바르셀로나에 정착했다. 이후 몬테소리는 네덜란드, 영국, 인도 등을 찾아다니며 교육법을 전파하다가 1952년 네덜란드 노르트베이크(Noordwijk)에서 뇌출혈로 향년 82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3. 아동 교육에의 기여[편집]


교사들의 권위주의적 교육에 강력히 반대하고 어린이의 권리존중을 주장하여 어린이의 신체 및 정신의 발달을 북돋우는 자유로운 교육과, 어린이 하나하나의 활동리듬에 알맞은 개성발전교육을 역설하였다. 이러한 교육 방향이 어린이들로 하여금 자율성과 자발성을 배울 수 있도록 하며, 자기개발에 적합한 환경을 만들어 간다는 것이다. 또, 감관(感官)의 훈련이야말로 모든 정신발달의 기초가 된다고 생각하고, 갖가지 놀이 도구를 고안하여 감관을 훈련시키고자 하였다.

몬테소리식 교육이 자신의 유치원 운영을 통해 효능이 입증되자, 세계 각국에서 그녀의 방식을 배우려 몰려왔는데, 이 때를 계기로 그녀의 이름을 따 교구(敎具) 회사를 세웠다. 하지만 의사 시절의 과거 스캔들이 걸려서 홍역을 치르기도 했었다.

몬테소리의 교육법에 대해 공격을 일삼는 극우 선동가들은 그녀의 학교를 탄압하였으나 1945년 그들의 지도자인 베니토 무솔리니가 처형되면서 그녀의 학교에 대한 탄압은 끝을 맺고 그녀의 교육은 보편적인 교육론 중 하나로 널리 받아들여졌다.[1][2]

오늘날에도 권위주의적 교육론과 어른들의 의식이 팽배한 상황인데[3] 정말 시대를 앞서 간 교육자이자 교육학자 중 한명이다.

저서로 《가정에서의 어린이 Das Kind in der Familie》(1926) 《교회에서의 어린이 The Child in the Church》(1929) 《인간 가능성의 교육 To Educate Human Potential》(1948) 등이 있다.

몬테소리 교육법에 의하여 한국 몬테소리(공식 홈페이지)가 생겨났는데, 특유의 억양 때문에 못된소리라 불리고 있다. 이후, 못된소리가 대세론을 이루자 한국에서만큼은 몬테소리 교육을 회피하는 특유의 바람이 불었다.

또한 몬테소리 교육법이 미국 등을 거쳐가면서 마치 영재를 만들어주는 기적의 조기교육 방법인양 소개되기도 했다. 위에 나왔듯이 어린이의 놀이와 자율성을 강조하는 몬테소리의 본래의 의도를 생각하면 심각한 왜곡이라 할 수 있다.

인도에서는 이러한 교육법을 전파한 그녀의 영향을 받아 1959년에 시티 몬테소리 스쿨(City Montessori School, CMS)이 설립되었다.[4]


4. 개인사[편집]


미혼모이기도 했다. 함께 병원에서 일한 동료 의사인 주세페 몬테사노 박사와 결혼을 전제로 교제하다가 임신을 했는데 남자 쪽 집안에서 여자가 의사라는 이유[5]로 반대가 심해서 파혼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아들 마리오 몬테사노를 홀로 키우게 되었다. 당시 미혼모에 대한 시선은 지금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이 싸늘했기 때문에, 몬테소리는 아들을 항상 조카라고 소개하였다고 한다. 지금도 사회적 유명인 중에 미혼모인 여성을 생각해 보라. 특히 동양권에서는 후지타 사유리 정도 외에는 찾기 힘들 것이다. 입양의 경우는 있을 수 있더라도 말이다.

유로화 도입 전인 이탈리아 종이화폐인 1,000리라의 모델로 차용된 적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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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마리아 몬테소리에 대한 글[2] 이 글은 교육에 의한 평화주의를 실천한 마리아 몬테소리의 견해를 소개하는 내용이기도 하다.[3] 나무위키의 급식충, 초딩 항목 등을 보면 여전히 중년 꼰대를 비판하는 나무위키에서 마저도 꼰대스러운 서술이 많다.[4] 초등학생, 중학생, 고등학생들을 모두 수용할 수 있을 정도로 규모가 엄청나게 큰 편이며, 전세계적으로 가장 많은 수용인원을 자랑하여 심지어 기네스북에 등재되기도 하였다.[5] 의대에 처음 입학할 때도 그렇고 당시 이탈리아의 사회상이 여성에 대해 워낙 보수적이었다보니 여성이 직업, 그것도 의사라는 고스펙을 갖고 있는 것에 대해 아니꼽게 여기는 분위기가 강했다. 지금도 여성관이 보수적인 국가에서는 고스펙 여성들을 부담스러워하는 분위기가 팽배한 경우가 많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