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리 앙투아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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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리태니커 대백과사전 선정 세계의 여성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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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년 브리태니커 대백과사전은 세계사에 이름을 남긴 여성들을 선정했다.
긍정적 영향을 미친 여성들뿐 아니라 '세계사에 족적을 남긴 여성들'을 뽑았기 때문에 부정적인 인물들 혹은 논란 있는 인물들도 있다.

성인들
성모 마리아
예수의 테레사
마더 테레사
지도자들
앙겔라 메르켈
베나지르 부토
예카테리나 2세
캐시 프리먼
서태후
클레오파트라
코라손 아키노
크리스티나 페르난데스
달리아 그리바우스카이테
다이애나 스펜서
지우마 호세프
에디트 크레송
엘레오노르 다키텐
엘리너 루스벨트
엘리자베스 1세
엘리자베스 2세
엘런 존슨 설리프
에바 페론
골다 메이어
그로 할렘 브룬틀란
한나 수호츠카
하트셉수트
인디라 간디
이사벨 1세
제니 시플리
줄리아 길라드
칼레다 지아
킴 캠벨
마거릿 대처
마리 앙투아네트
메리 로빈슨
메가와티 수카르노푸트리
미첼 바첼레트
미셸 오바마
박근혜
잔 다르크
시리마보 반다라나이케
쑹메이링
탄수 칠레르
테오도라
바이라 비케프레이베르가
빅토리아 여왕
비그디스 핀보가도티르
비올레타 차모로
측천무후
잉락 친나왓
발견자들
에이다 러브레이스
어밀리아 에어하트
바버라 매클린톡
캐롤라인 허셜
도러시 호지킨
엘리자베스 블랙웰
플로렌스 나이팅게일
히파티아
제인 구달
캐서린 존슨
리제 마이트너
마거릿 미드
마리아 미첼
마리 퀴리
마리암 미르자하니
레이첼 카슨
로잘린드 프랭클린
사카자위아
발렌티나 테레시코바
예술가들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
코코 샤넬
도로시아 랭
프리다 칼로
카라 워커
메리 카사트
쿠사마 야요이
자하 하디드
사회운동가들
앨리스 워커
앤절라 데이비스
앤 로이페
아얀 히르시 알리
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
엘프리데 옐리네크
그레타 툰베리
제인 폰다
주디 시카고
리마 보위
나오미 클라인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
수잔 팔루디
타우왁쿨 카르만
와리스 디리
말랄라 유사프자이
마거릿 생어
마리아 몬테소리
해리엇 터브먼
캐롤리 슈니먼
로자 파크스
시린 에바디
왕가리 마타이
에멀린 팽크허스트
글로리아 스타이넘
작가들
에밀리 디킨슨
제인 오스틴
사포
버지니아 울프
마거릿 애트우드
가브리엘라 미스트랄
헬렌 켈러
J. K. 롤링
메리 울스턴크래프트
무라사키 시키부
시몬 드 보부아르
안네 프랑크
토니 모리슨
운동선수들
베이브 디드릭슨
빌리 진 킹
파니 블랑커스쿤
재키 조이너커시
미아 햄
나디아 코마네치
세레나 윌리엄스
퍼포머들
비욘세
엘라 피츠제럴드
캐서린 헵번
마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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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리엄 마케바
오프라 윈프리
사라 베르나르
움 쿨숨
정치인들
에이미 클로버샤
바바라 조던
캐롤 모즐리 브라운
엘리자베스 워런
프랜시스 퍼킨스
제럴딘 페라로
해티 캐러웨이
힐러리 클린턴
저넷 랭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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낸시 펠로시
넬리 테일로 로스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
셜리 치점
빅토리아 우드훌
참정권주의자들
앨리스 폴
앨리스 스톤 블랙웰
캐리 채프먼 카트
크리스타벨 팽크허스트
도리아 샤픽
엘리자베스 케이디 스탠턴
프랜시스 하퍼
프랜시스 윌러드
해리엇 스탠턴 블래치
헤르타 아일톤
후다 샤아라위
아이다 벨 웰스
제인 애덤스
줄리아 워드 하우
케이트 셰퍼드
루크레티아 모트
루시 번스
루시 스톤
메리 처치 테렐
메리 울스턴크래프트
메이 라이트 슈
밀리센트 포셋
소저너 트루스
수잔 B. 앤서니
버지니아 루이자 마이너
출처




프랑스 왕국 루이 16세의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
Maria Antonia von Österreich

파일:wm_marie_antoinette_with_a_rose_Q3937618.jpg}}}
이름
독일어
마리아 안토니아 요제파 요하나
(Maria Antonia Josepha Johanna)
프랑스어
마리 앙투아네트 조제프 잔
(Marie Antoinette Josèphe Jeanne)
출생
1755년 11월 2일
신성 로마 제국 오스트리아 대공국 쇤브룬 궁전
사망
1793년 10월 16일 (향년 37세)
프랑스 공화국 파리 혁명 광장
장례식
1815년 1월 21일
생 드니 대성당
배우자
루이 16세 (1770년 결혼 / 1793년 사망)
자녀
장녀 마리 테레즈, 장남 루이 조제프, 차남 루이 17세, 차녀 소피
아버지
프란츠 1세
어머니
마리아 테레지아
형제
마리아 엘리자베트, 마리아 안나, 마리아 카롤리나, 요제프 2세, 마리아 크리스티나, 마리아 엘리자베트, 카를 요제프, 마리아 아말리아, 레오폴트 2세, 마리아 카롤리나, 요한나 가브리엘라, 마리아 요제파, 마리아 카롤리나, 페르디난트, 막시밀리안 프란츠
종교
가톨릭 (세례명: 안토니아)
서명
파일:Marie-AntoinetteSignature.png
1. 개요
2. 명칭
3. 생애
3.1. 자녀
3.2. 최후
3.3. 유해
4. 특징
4.1. 성격
4.2. 외모
4.3. 성품
4.4. 문화
5. 평가
5.1. 정치적 측면
5.2. 능력
5.3. 사치?
6. 악명
6.1. 악명에 대한 분석
7. 최후로 남긴 서신
8. 여담
9. 대중문화
9.1. 소설
9.2. 영화
9.3. 드라마
9.4. 뮤지컬
9.5. 만화
9.6. 애니메이션
9.7. 게임



1. 개요[편집]


합스부르크 제국공주이자, 프랑스의 국왕 루이 16세왕비.

2. 명칭[편집]


풀네임은 마리-앙투아네트 조제프 잔 도트리슈로렌(Marie-Antoinette Josephe Jeanne d'Autriche-Lorraine). 오스트리아식(독일어) 본명은 ‘마리아 안토니아 요제파 요안나 폰 외스터라이히로트링겐(Maria-Antonia Josepha Johanna von Österreich-Lothringen)’. 외스터라이히 대신 ‘폰 합스부르크로트링겐(von Habsburg-Lothringen)’ 을 쓰기도 한다.

‘마리 앙뚜아네뜨’, ‘마리 앙뚜아네트’, ‘마리 앙투와네트’ 등으로 많이 쓰이나, 외래어 표기법에 근거하여 표기하면 ‘마리 앙투아네트’다. 프랑스어의 ‘t’ 발음은 기식이 약하여 ‘ㄸ’로 들리나, 무성음의 기식의 유무로 뜻을 구별하는 언어가 아니면 파열음에 된소리를 쓰지 않는다는 원칙 때문에 저렇게 표기한다. 자음 뒤에 쓰인 'oi[wa]'의 표기도 분분한데, 'ㅜ아'로 쓰는 게 표준. 순수 프랑스어의 w 발음은 무조건 u 발음의 변이음이기 때문이다.


3. 생애[편집]


1755년 11월 2일에 합스부르크 제국의 수장 마리아 테레지아신성 로마 제국 황제 프란츠 1세11녀호프부르크에서 태어났다. 독일어 본명은 마리아 안토니아 요제파 요안나(Maria-Antonia Josepha Johanna)였다.

참고로 아버지 프란츠 1세의 외종조부(외할아버지의 형제)가 루이 14세이다. 즉, 루이 14세의 조카딸인 엘리자베트 샤를로트 도를레앙[1]이 프란츠 1세의 어머니이자 마리 앙투아네트의 친할머니. 또한 남편 루이 16세의 외할머니인 오스트리아의 마리아 요제파[2]가 어머니 마리아 테레지아의 친사촌으로, 이러한 관계를 통해 마리 앙투아네트는 외가쪽으로 루이 16세에게 7촌 이모가 된다.

마리 앙투아네트가 태어났을 당시 오스트리아 궁정의 에티켓은 비교적 느슨했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쇤브룬 궁전에서 회화, 클라비코드, 춤, 피아노 등을 배우며 상당히 자유로운 어린 시절을 보냈다.

14세 때 합스부르크 제국프랑스 왕국의 우호를 증진시키기 위한 동맹의 역전으로, 루이 15세의 손자 루이 16세와 결혼하여 프랑스의 왕태자비가 되었다.

얼마 후 시할아버지 루이 15세천연두로 세상을 떠나고, 남편이 왕위에 올라, 마리 앙투아네트는 고작 10대의 나이로 프랑스의 왕비가 되었다.

루이 16세와의 사이에서 2남 2녀가 있었다.


3.1. 자녀[편집]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Marie_Antoinette_and_her_Children_by_%C3%89lisabeth_Vig%C3%A9e-Lebrun.jpg}}}
이 초상화는 당대의 유명 여성 화가이자 앙투아네트의 화가라 불린 엘리자베스 루이즈 비제 르 브룬의 작품으로, 프랑스 혁명으로 인해 처형되기 2년 전인 1791년의 작품이다. 마리 앙투아네트의 어머니로서의 이미지를 부각시키고자 그려진 집단 초상화이나 당시 연속된 일련의 사건으로 인해 왕비의 표정은 수심으로 가득 차 있다. 장남 루이 조제프가 가리키고 있는 요람은 차녀 소피 엘렌 베아트리스의 것으로, 여기에 누워 있던 소피가 죽었기 때문에 검은 천이 둘러져 있다. 정확히 말하자면 처음엔 차녀가 그려져 있었으나 그림이 완성되기 전에 죽었기 때문에 최종본에서는 지운 것이다.

1778년 ~ 1851년. 마담 루아얄이라는 칭호가 있었다. 여담으로 프랑스 왕실은 왕비출산 시에 아무나 공공연하게 입회하도록 하는 관행이 있었는데,[3] 이때 창문을 모조리 닫아서 환기도 안 되는 방에 너무 많은 구경꾼이 몰려들어 마리 앙투아네트는 거의 질식해서 죽을 뻔 했다고 한다. 루이 16세는 안전을 고려하여 이후의 출산은 허가받은 소수만 참관할 수 있도록 관행을 바꾸었다. 어머니 마리 앙투아네트는 아이의 성별을 듣고 처음 아이를 안았을 때 울음을 터뜨렸지만, 훗날 그녀의 시녀 마담 쵸팡의 회고록에 쓰일 감동적인 말을 남겼다.
"불쌍한 어린 것, 너는 그들이 바라던 아이는 아니야. 거짓말을 일삼는다 할지라도 현실을 속일 수는 없어. 특히 눈모양을 보기만해도 단번에 들통이나지.그렇다고 우리에게 소중하지 않다는 것은 아니야. 아들이였다면 국가의 아들이 되었겠지만, 너는 나의 것이야. 너는 내 모든 보살핌을 받게 될 거고, 내게 기쁨을 주고 슬픔을 나누게 될 거야."
의사가 산후처리를 잘못하는 바람에 마리 앙투아네트는 많은 출혈을 했고, 그래서 딸을 낳은 후 기절했다. 그리고 2주 만에 포기하고 유모에게 보내야 했다. 이후 마리 앙투아네트는 첫 출산을 하고 1년 만에 임신을 하나, 임신 초기에 마차 문을 닫다가 문을 배에 부딪히는 바람에 유산한다. 루이 16세는 마리 앙투아네트를 배려해 이 일을 함구했다고 전해진다. 이 내용들은 기록이 있어서 그런지 마리 앙투아네트의 생애와 관련된 매체에서는 매우 자주 묘사된다.

  • 장남 루이 조제프 자비에 프랑수아
1781년 ~ 1789년. 왕위계승권자로 도팽에 책봉됐다. 그러나 어린 나이에 척추결핵(척추카리에스)으로 죽었다. 위의 그림에서는 건강히 서 있는 모습으로 나오지만, 사실 저 그림을 그릴 때는 이미 제대로 일어서지도 못할 정도로 병세가 심했다고 한다.


  • 차녀 소피 엘렌 베아트리스
1786년 ~ 1787년. 11개월 만에 숨져 영아기를 넘기지 못했다.

그 외에 남편과 함께 아이를 4명 입양했다. 이 아이들은 입양된 순서대로 다음과 같다.

  • 아르망(Armand) 혹은 자크(Jacques)라 불린 고아 프랑수아미셸 가녜(Francois-Michel Gagné)(1771~1792, 1776년 입양): 루이 16세 부부가 아이를 갖지 못할 때 입양했다. 이 인연으로 그의 형제자매들도 경제적인 지원과 교육 기회를 얻어, 형 드니는 궁정 첼리스트가 되며, 누이 2명도 꽤 많은 돈을 얻었다. 그러나 루이 16세가 수술을 통해 생식기능을 회복한 뒤로는 자녀들이 태어나면서 찬밥신세가 되었고, 이후 프랑스 혁명이 터지면서 공화주의의 지지자가 되어 양부모를 맹비난하면서 돌이킬 수 없는 관계가 되어 버렸다. 1792년 벨기에의 주마프 전투에서 전사했다.

  • 세네갈인 장 아밀카르(Jean Amilcar)(1787년 입양): 세네갈 총독 슈발리에 드 부플레르(Chevalier de Boufflers)[4]에 의해 국왕 부부에게 바쳐져 세례성사를 받아 이름을 얻었다. 궁전에서 도망친 국왕 부부에 의해 생 클로드의 고아원에 맡겨져 거기서 경제적 지원을 얻었지만, 그 뒤로는 행방을 알 수가 없다. 루이 16세 부부가 처형된 후 물주가 사라지면서 금전적 지원을 받지 못하게 되자 시설에서 내보내졌으며 부랑아가 되어 거리에서 굶어 죽었다는 설도 있고, 혁명 정부에 협력해 새로 미술학교에 들어가 공부하다가 1796년 병사했다는 설도 있다.

  • 궁전 하녀의 딸 에르네스틴 랑브리케(Ernestine Lambriquet)(1778~1813, 1788년 입양): 파리에서 평범하게 살다가 나폴레옹 시대에 사망했다. 자세한 건 마리 테레즈 샤를로트 문서 참조.

  • 엄마를 잃은 시종의 딸 조이(Zoe)(1790년 입양): 본명은 잔 루이즈 빅투아르. 위로는 수녀원에 입회한 두 언니가 있었고, 본인도 혁명 중에 수녀원에 입회하여 수녀로 살다가 세상을 떠났다.

3.2. 최후[편집]


그녀의 사형을 결정한 재판에서 마리 앙투아네트에게는 온갖 혐의가 걸렸다. 그녀는 혁명정부로부터 국고 낭비, 정부의 부패, 오스트리아와의 결탁, 루이 16세를 타락시킨 혐의, 백성에 대한 기만, 프랑스를 멸망시키려는 시도, 전쟁 유발으로 기소당했다.

우선 국고 낭비 혐의는 당시 정부에 워낙 만연하던 것이라, 이걸로 사형을 걸면 사형당하지 않을 관료가 별로 없었지만 결국 유죄로 인정되었다. 소위 반역죄 및 국가 안보에 대한 음모 혐의는 루이 16세와 함께 유죄로 인정됐다. 판결에 비판적인 사람들은 마리 앙투아네트는 적극적으로 정치에 개입하지 않았다고 본다. 당시에는 여성이 정치에 개입하지 않는 것이 미덕이었기에, 왕이 아예 지적장애나 중증 정신병을 갖고 있지 않으면 왕비가 나설 수 없었다. 그나마도 이런 경우 왕자나 형제에게 물려주고 말지, 여성의 개입을 허락하는 일은 드물었다. 무엇보다 프랑스도 살리카법이 유효했기 때문에 애초에 여자들이 왕위를 물려받기는 사실상 어려웠고, 그나마 퐁파두르 부인이나 카트린 드 메디시스처럼 비선 실세로 활동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래서 마리에 대한 유죄는 잘못되었다고 주장한다.

백성에 대한 기만의 경우 그 유명한 다이아몬드 사건이 있었으나 조사 결과는 "왕비는 다이아몬드 사건과 아무 관련이 없다."였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모든 혐의에 대해 재판 끝에 무죄가 선고된 것이다. 현대 법학자들이 이 사건의 기록 문서를 찾아 다시 회의를 열었지만 앙투아네트에게 전혀 죄목을 물을 수 없을 정도로 아무런 혐의가 없었다. 다이아몬드 목걸이 사기 사건 자체도 뭔가 정치적인 목적이 개입되었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심지어 아들 루이 17세와의 근친상간이라는 혐의도 제기되었다. 루이 17세에게서 증언을 얻어 이를 바탕으로 혐의를 제기한 것이기는 한데, 당시 심신미약 상태였던 루이 17세는 신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만신창이 상태에 말 그대로 제정신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이를 가져다가 써먹었던 것. 그 시절의 동성애근친상간은 기본이 사형이었다. 물론 혁명정부도 이게 유죄가 될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을테니 그냥 왕비에 대한 모욕과 사형에 대한 정당성 확보를 위한 사소한 첨가물이었을 것이다. 이 근친상간 혐의의 고발자인 에베르가 마리 앙투아네트에게 묻자, 재판 내내 왕비의 품격을 지키며 어떠한 대답도 하지 않고 침묵을 유지하던 마리 앙투아네트는 그 순간만큼은 유일하게 입을 열어 대답했다.

내가 대답하지 않은 것은, 어머니에 대한 그런 비난에 대답하는 것을 자연이 거부하기 때문이다. 나는 나와 같은 처지에 있는 모든 어머니들에게 묻고자 한다.


이때 재판장에 있던 모든 여성은 가혹했던 프랑스 사회를 견뎌내면서 악에 받친 시장의 아낙네였다. 사치스럽다고 알려진 마리 앙투아네트에 대한 증오는 말할 것도 없었다. 그럼에도 마리 앙투아네트는 뻣뻣한 태도를 유지하여 아낙네들의 증오를 받았고, 급기야 마리 앙투아네트가 자신의 근친상간 혐의에 대해 다른 어머니들에게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한다고 말하자 태도가 돌변해서 에베르를 마구 비난하기 시작했다. 몇몇 남성도 그녀를 옹호할 정도로 기가 막힌 일이었다.

마리 앙투아네트의 근친상간 혐의는 너무 어설프게 급조되어 만들어졌던지라 도리어 그랬을 거라는 의심조차 할 수 없어서, 오히려 용서할 수 없는 죄목을 갖다 붙여 앙투아네트를 죽이려는 혁명 정부에 부정적인 반응이었다고 한다. 역사가 막스 갈로는 재판정이 수치와 부끄러움에 휩싸였다고 기술하고 있다. 로베스피에르"에베르라는 바보는 그녀에게 또 한 번 승리를 안겨주고 말았다"고 평했다.

슈테판 츠바이크는 근친상간 혐의에 대해서 좀 길게 서술했는데, 왕실의 억압된 삶에서 벗어나 새롭고 낯선 환경에서 사람들과 사귀는 장난기 어린 나이의 병약한 아이가 '어른들이 이야기하는 말을 믿고 재밌게 반복한다'는 장난기 어린 증언으로 평가한다. 결국 한 어린아이가 온전치 못한 정신상태로 자기가 뭔 소리를 하는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한 말이 어머니와 고모를 죽음으로 몰아가는 데에 단단히 일조하는 비극을 낳은 것이다.

결국 국고낭비, 반역죄, 국가 안보에 대한 음모죄를 유죄로 인정하여 마리 앙투아네트에게 사형이 선고되었다. 또한 같은 혐의로 루이 16세의 여동생이자 루이 17세의 고모인 엘리자베트 필리핀 마리 엘렌 공주도 사형 판결을 받고 몇 개월 후 처형당했다. 감옥으로 돌아간 마리 앙투아네트에게 혁명정부는 고해성사의 기회를 주었지만, 마리 앙투아네트는 혁명정부에 서약한 사제에게 고해하는 것을 거부했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남편 루이 16세와 달리 그다지 품위있는 대접을 받으며 죽진 못했다. 왕실 전용 황금마차를 타고 정장을 제대로 차려 입고 육군 병력의 정중한 호위하에 단두대로 이동해 죽은 루이 16세와 달리, 허름한 옷차림에[5] 머리카락을 강제로 깎인 다음 두 손이 뒤로 묶인 채, 사형수를 호송할 때 흔히 쓰인 가축 수송용 마차에 실려 대중들에게 욕을 먹으며 호송됐다.

그럼에도 마리 앙투아네트는 단두대 앞에 설 때까지 품위와 침착함을 잃지 않았다. 처형 직전 유언은, 사형 집행자의 발을 밟고서 남긴 "실례합니다, 무슈. 일부러 그런 건 아니예요." 실제로 사형 전에 그녀가 남긴 글에는 "부끄러워 할 것 없어요, 나는 죄를 지어서 죽는 게 아니니까요."라고 적혀 있었다.

물론 마리가 완전무결한 사람은 아니었기에, 젊었을 때의 유흥 행각과 바렌 사건 같은 명백한 실책들이 있었다. 그러나 그것들은 사형당할 만한 죄는 아니었다. 그래서 후대의 역사가들은 지은 잘못에 비해 너무나도 크고 무거운 벌을 받은 사람으로 평가하고 있다.

격한 감정을 일으키지 않으면서 그녀의 삶이라는 특이한 여정을 살펴볼 때, 그녀의 결점들이 명백하기는 하지만 그녀의 불행과 저울질해 볼 때 하찮은 것이었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 안토니아 프레이저



3.3. 유해[편집]


파일:external/2.bp.blogspot.com/048+Louis+XVI+X.jpg
루이 18세 때 조성된 무덤
그리고 마리 앙투아네트의 유해는 파리생 드니 대성당남편, 그리고 아들의 심장과 함께 안치되어 있다.

일설에 따르면 프랑스 국민들이 그녀를 어찌나 증오했던지 단두대에 엎드리게 하지 않고 바로 눕혀서[6] 사형을 집행했다는 설도 있다.[7] 하지만 당시 사형 장면을 묘사한 그림에 그런 장면은 나와 있지 않고, 무엇보다 단두대의 구조상 사람을 바로 눕히기가 쉽지 않다.[8]


4. 특징[편집]



4.1. 성격[편집]


근래까지는 혁명이 정당화되려면 왕실이 악의 축이 되어야 했기에 남편과 도매금으로 묶여 사악하고 사치스러운 이미지로 알려져있었으나, 실제로는 프랑스 왕비치고는 오히려 매우 검소한 편이었으며 선량하고 동정심 많은 성격이었다고 한다.[9] 사교적이었고 만나는 누구에게나 친절하고 사근사근했으며, 신분 고하를 막론하고 편견없이 사람을 대했다. 루이 16세가 사냥 중에 농민을 다치게 하자, 직접 달려가서 간호해주고 모든 손해를 물어주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평생 소식을 했기 때문에 뚱뚱한 다른 왕족과 달리 호리호리한 몸매를 가졌다.[10] 식사 시간에 루이 16세가 음식을 깨끗하게 비우는 동안, 마리 앙투아네트는 음식을 거의 먹지 않았다고 한다.

자유롭고 가족적인 분위기에서 느슨하게 자란 앙투아네트는 루이 14세 때부터 형성된 프랑스 궁정의 시시콜콜한 격식을 잘 이해하지 못했다고 전해진다. 오스트리아에서는 공식 행사에서만 굉장한 에티켓을 요구했고 할 일만 잘 하면 나머지 시간은 마음대로였는데 프랑스에서 왕족의 생활은 하루종일 구경거리였다. 아침마다 왕비가 옷을 입을 때만 최소 4명의 수행원이 필요한데, 담 다투르가 치마를 보여주고 드레스를 보여주면 담 도뇌르가 속옷을 골라준다. 담 도뇌르보다 서열 높은 귀족이 들어오면 그가 속옷을 골라준다 등등 온갖 까다로운 절차가 있었다. 이 때문에 왕비는 30분이 넘도록 추위에 떨며 수행원들이 옷을 입혀주기를 기다려야 했다. 이에 부르주아 출신인 의상 전문 디자이너 로즈 베르탱을 고용해 아침마다 카비네에 불러들여 둘이서만 옷을 골라 입었다. 이 때문에 20명이 넘는 왕비의 수행원들이 잘려버린다.

거기다 우아함으로 대표되는 마리 앙투아네트의 취향은 기존 프랑스 궁정환경과는 잘 맞지 않았다. 당대의 프랑스 궁정은 베르사유 궁전을 건설한 뒤에 누가 더 사치스러운지 겨루기 식으로 대단한 사치를 부렸고 왕실 식구들의 일과는 전부 공적 영역이라 귀족뿐 아니라 일반 백성까지 왕의 저녁식사를 구경하면서 하늘처럼 우러러 보았다. 하지만 호기심 어린 수백 명 앞에서 일거수일투족이 구경거리가 되는 삶은 왕족에게도 고된 일이라, 루이 15세의 딸들도 이런 자리에는 꼭 참석했지만 불편해서 거의 음식을 먹지 못할 정도였다. 하지만 마리 앙투아네트는 프티 트리아농 궁을 요양처로 받은 뒤에는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기 전까지 주로 이곳에 머물며 베르사유 궁정에 모습을 잘 드러내지 않았다.

역대 프랑스 왕비 중 자신만의 거처를 받은 왕비는 마리 앙투아네트가 유일했는데, 그녀는 프티 트리아농 궁을 자기 취향으로 꾸몄다. 사치스럽지는 않았지만 전원생활에 환상이 있던 왕비는 오리, , 를 키우고 세브르산 고급 도자기에다 우유를 짜기도 하였다. 왕비는 목가적이고 여유로운 삶을 꿈꾸며 도교와 비슷한 삶을 살았지만, 이게 대중들에게는 오히려 미운 털 박힐 만한 것이었다. 마리 앙투아네트와 관련된 악의적인 소문이 떠돌던 당대 생각과는 달리, 프티 트리아농은 방이 8개 정도 되는 건물로, 현대 기준으로도 부잣집 별장 정도의 크기다.

프티 트리아농 궁의 내부도 섬세한 장식과 전원풍의 우아함을 간직한 형태이며 사치스럽기보다는 편안하고 우아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프티 트리아농은 증축 공사도 없었고 바리 백작부인이 남긴 가구를 받아 쓰는 등 쓸데없이 건물에 돈을 쓰지도 않았다. 실내장식에 거금을 들였다는 소문이 돌았지만, 실제로는 건설 비용이 20만 리브르로 당대 왕실에서 건물 하나 개조하는 데 사용한 돈의 일부밖에 안 썼다.[11]

하지만 대중들은 프티 트리아농에 틀어박혀 살아가는 왕비를 비난했는데, 그곳에서 친한 사람들끼리만 모여 연회를 열고 살아가는 왕비의 모습은 "로트리시엔(오스트리아 년), 외국인이어서 저런다!"는 비난과 함께 이런저런 오해를 살 만한 것이었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프티 트리아농에 정원, 동굴, 작은 폭포, 사랑의 신전 등을 꾸미고 목가적인 삶을 즐겼는데, 이건 안 그래도 보는 눈 많은 왕실에서 '일국의 왕비가 왕비로서 규정된 의무를 방임한 채, 그저 소수의 친한 측근들과 숨어서 놀기만 하는 게으름'으로 비춰져 입방아에 올랐다.

한발 더 나아가 프티 트리아농에 입회하지 못하는 다른 많은 귀족이 상대적 박탈감을 느낌으로써 왕비가 자기와 친밀한 몇몇을 챙겨서 권력과 이권을 나눠먹는다는 인식을 심어주었다. 왕비란 항상 귀족 사교계 중심에 서서 사교계 전체를 두루두루 살피고 균형을 조율해야 하는 위치인데, 마리 앙투아네트는 소수의 측근을 데리고 그 중심에서 도피해버렸으니 이런 불만이 터져나오는 건 당연했다.

왕비의 이런 태도는 다수의 귀족들을 무시하고 외면하는 것으로 보여 왕실에 대한 지지기반을 점차 흔들리게 만들었다. 또한 베르사유 궁전에서 벗어나 자기만의 인위적인 이상향에 빠져들게 됨으로써 정작 중요한 바깥 민중들의 삶을 보지 못하게 되어 프랑스 전체에 심상찮은 분위기가 돌고 있음을 파악하지 못하게 되고 말았다. 마리 앙투아네트 본인이야 단지 나이가 들수록 허례허식 심한 베르사유 본궁에서 정신없이 살아가는 것에 지쳐서 조용한 프티 트리아농 궁에서 휴식하며 살고자 그런 것뿐이었겠지만, 이 행동의 결과는 최악의 형태로 나타나고야 말았다.

4.2. 외모[편집]


얼굴은 '예쁘장하다'고 할 수 있었다. 일단 처녀 때 미인으로 전 유럽에 많은 남자들의 첫사랑이자 짝사랑이었던 어머니 마리아 테레지아의 외모를 '조금' 물려 받기도 했다. 특히 피부가 아주 이뻤다고 한다.

천연두로 인한 곰보, 여드름, 화장품, 돼지고기 같은 육고기, 초콜릿, 튀김 같은 살찌는 음식을 많이 먹고, 향신료 가득한 음식들의 부작용으로 인한 트러블로 피부가 까맣고 지저분했던 유럽의 귀족들에게도 그녀의 흠 적은 피부[12]는 칭찬의 대상이었다. 당시 유럽에서도 피부 미인은 좋은 대접을 받았다.

가슴 사이즈 크기 둘레가 자그마치 109cm 이상이나 되었다고 한다.[13] 단순히 큰 것뿐만이 아니라 귀부인들끼리 경쟁한 '가장 섹시하고 큰 젖가슴 콘테스트'(...)에서 당당하게 1등을 했다.

파일:Marie-Antoinette Gruppe_q80.jpg
실제로, 19세기 경부터 프랑스에 유행했던 아래로 동그라면서도 깊이는 얕은 형태의 <쿠페>(Coupe)라는 샴페인 잔은 그녀의 젖가슴 형태를 본 떠서 만든 샴페인잔이라고 널리 알려져 있다.

종합하자면 '베르사유의 장미'에 표현한 미녀까지는 아니었지만 소식하여 몸매도 늘씬한 편이어서[14], 가슴은 아름답고 매우 큰데 당시 유럽 기준으로 늘씬한 몸매와 백옥에 가까운 피부의 소유자에 패션 센스까지 좋은 당대 아이콘이 되기 충분하다라고 할 수 있다.

어머니다른 가문에서 온 아버지와 결혼한 덕분에[15] 조상들보다는 주걱턱이 덜했지만 흔적은 약간 존재해 아랫 입술이 튀어나온 인상을 주었다. 삐뚤한 치아 때문에 시집 오기 전 치아교정을 하고 컴플렉스를 부채로 가리고 다녔다고 한다.

4.3. 성품[편집]


과장이 덧붙여졌겠지만 그녀의 매력은 외모보다는 왕족 특유의 타고난 우아함과 예술성에 있었다고 한다. 나긋나긋한 몸동작과 기품은 그녀를 만나는 사람들의 호감을 샀고, 목소리는 노래하는 것처럼 아름다웠으며 뛰어난 화술을 가지고 있었다. 패션 센스도 자연스러우면서 뛰어나서 프랑스 궁정 뿐 아니라 전 유럽의 패션을 선도하기도 했다. 이전에는 모든 유럽 여성들이 퐁파두르 부인이 유행시킨 스타일을 따라했으나 마리 앙투아네트가 왕비가 된 이후부터는 그녀가 패션의 선구주자가 된다.

감자가 "악마의 음식"이라는 오명을 얻으며 보편화 되지 못했을 때, 감자 꽃을 모자에 꽂으면서까지 백성들의 감자에 대한 호감을 얻으려 한 적도 있었다. 프랑스 왕비로선 이례적으로 빈민 구제에도 관심을 가졌고 취미 중엔 프랑스식 농사 짓기[16]도 있었다.

감자에 대해 좀 더 이야기하면, 파르망티에라는 사람이 감자를 보급하여 백성을 먹여살리기 위해 왕과 왕비에게 호소했다. 이에 왕과 왕비는 제빵학교를 열어 백성이 값싼 감자빵을 배불리 먹을 수 있게 하기 위해서 그것을 허락했다. 문제는 프랑스 민중이 "감자빵 말고 밀가루빵을 달라!"라고 울부짖는 등, 폭등하는 밀 시세에도 불구하고 밀가루빵만을 원하는 모습을 보인 것이었다.[17] 앙투아네트는 아예 빵집학교를 열어 서민의 식량을 지원하였다.

맏딸인 마리 테레즈 샤를로트 공주가 어린 시절 비싼 크리스마스 선물을 달라고 떼를 썼을 때는, '궁전 밖에는 많은 가난하고 굶주린 사람들이 있으니 따뜻한 잠자리와 음식이 있는 것만으로도 감사할 줄 알아야 한다'고 가르쳤다고 한다.[18] 현대까지도 인구에 회자되는, 나라를 망친 사치스러운 악녀의 이미지에 거리가 있는 성품이었다.

혁명 이전의 마리 앙투아네트는 비정치적이며 자선적인 삶을 견지했고, 이는 현대적인 관점에서 보면 이상적인 입헌군주의 모습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위의 내용만 봐도 알겠지만, 그녀가 왕비가 된 직후에는 엄청나게 스트레스를 받을 만한 환경이었고, 사치와 도박을 하긴 했으나 왕비가 되었으니 다른 귀족들과 사교 생활로 어울리느라 같이 한 것이었다. 궁정에서 할 일이 사치와 도박 아니면 없어서기도 했지만 임신 스트레스를 그렇게 풀다가 엄청나게 날려먹은 것도 사실이라 당대의 파티 걸 이미지에 일조했다. 정작 그 스트레스의 원인 루이 16세는 자기 때문에 욕받이가 되고 있는 아내를 위해 돈줄이 되어주었다. 그것을 전해들은 친정에서는 잔소리 편지를 통해 크게 재교육시켰고 마리가 아이를 낳고 양육에 집중하면서 이런 생활도 그만두었다. 사실 따지자면 왕족으로 태어났으니 과하지 않으면 사치는 허용되었고 그게 당연한 시대다. 당장 다른 왕족/귀족에 비하면 사치한 축에도 못 낀다. 저 때 프랑스 귀족들은 누가누가 더 부유하고 사치를 잘하는지 겨루던 시대였다.

천연적인 면이 좀 있었는데 바렌 사건 당시 목숨에 위협을 느껴 누구보다도 빠르게, 남들과는 다르게 처가집으로 튀어야 했던 상황에서 마차를 눈이 잘 띄는 초록색으로 도색해달라는 요구를 하거나 아직 빤쓰런할까 말까 고민하는 상황에 설레발쳐서 왕실 물품이나 옷들을 미리 빼돌리거나 마차에 아이들을 위한 각종 생필품을 뭉텅이로 챙기는, 눈치가 없는 짓을 하였다.[19]


4.4. 문화[편집]


항상 유행의 최첨단에 섰던 패션 스타였다. 로즈 베르탱이라는 평민 출신 드레스 디자이너와 개인 헤어 스타일리스트를 두었으며, 그녀가 입은 옷 스타일이나 색은 패션잡지에 찍혀 유럽 곳곳으로 퍼졌다. 당대 패션 리더였던 마리 앙투아네트의 스타일은 패션 잡지였던 르 메르쥐르 갈량의 판화에 새로운 스타일의 드레스를 입고 궁을 거니는 마리 앙투아네트의 모습으로 등장하며 유럽 전역에 널리 퍼졌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아침마다 2시간 넘게 직물 샘플과 디자인을 검토하고 옷을 주문했는데, 그 중에서 깃털과 섬세한 레이스를 좋아했다고 한다. 왕비의 옷은 유럽 궁정에 퍼져 새로운 유행이 되었다.

젊었을 때엔 머리를 벌집처럼 높이 틀어올리는 푸프(pouf)와 화려한 드레스를 유행시켰고, 나이가 들면서는 18세기 상류계급 여성의 복장으로 자리잡게 되는 스타일인 수수하고 편안한 모슬린 드레스를 처음 유행시켰다.

마리 앙투아네트가 장녀 마리 테레즈 샤를로트를 낳았을 때, 루이 16세난산으로 고생한 마리 앙투아네트를 위해 별장인 프티 트라아농 궁을 마련하였다. 흔히 떠돈 소문과 달리 이 궁은 궁전 치고는 제법 작은 편이고, 정원을 중심으로 하는 편안하고 수수한 곳이었다. 애초에 요양을 위한 곳이었기에 당연할지도 모른다. 이곳에는 마담 뒤 바리에게 받은 가구들을 비롯해 왕실에서는 적은 지출로 마련한 곳이었는데, 자신의 취향을 담은 가구들이 마련되어 있다. 전체적인 센스가 좋았던 마리 앙투아네트는 정부들이 유행을 이끌었던 루이 14세, 루이 15세 시대와는 달리 왕비 본인이 유행을 이끌었기에 베르사유 궁전을 비롯한 궁정에서 확고한 자기 취향을 고수했다.

음악에 관심이 많아서[20][21] 궁정에 스스로 최신 오페라를 도입했고, 자신이 배우가 되기도 하였다. 또 예술적 안목이 상당해서 베르사유 궁전의 인테리어를 새단장하기도 했고, 그녀가 설계한 쁘띠 트리아농[22]은 섬세하고 우아한 로코코 문화의 극치로 평가된다.

그 식견처럼 재능 있는 화가를 보는 능력도 뛰어나, 당대 높은 인기를 구가하던 동갑내기 여류 화가 엘리자베스 비제-르 브룅을 궁정화가로 발탁해 수많은 초상화를 그리게 한다. 여성의 사회 진출에 대한 벽이 높았던 당시 상황을 고려해 보면 그야말로 파격적인 발탁이었다. 비제-르 브룅은 이후 아카데미 회원 자격도 얻게 되는데, 이를 두고 앙투아네트의 입김이 작용했다는 비판도 있었다. 그러나 후세가 인정하듯 르 브룬은 당대의 일류 화가였다. 만약 그녀가 아카데미 회원 자격을 얻게 앙투아네트가 손을 썼다고 해도, 그것은 비난받을 것이 아니라 오히려 앙투아네트 왕비의 뛰어난 식견을 대변하는 조치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문화적인 측면에 있어서의 평가는 로코코의 여왕. 그러나 마리 앙투아네트 시기 절정에 오른 로코코 문화는, 뒤이은 프랑스 혁명으로 갑작스레 종말을 고했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프랑스 혁명 이후에는 그리스 로마 문화 예술이 재유행하면서 고전미로 돌아가게 되는 신고전주의 복식의 시작을 연 인물이기도 하다. 조제핀 드 보아르네로 대표되는 신고전주의의 엠파이어 스타일(1789~1815) 시대는 고대 그리스풍에서 따온 슈미즈 아 라 렌과 이를 화려하게 더한 엠파이어 드레스로 유명했는데, 마리 앙투아네트의 슈미즈 아 라 렌이 이때까지의 과도기의 역할을 맡았다. 연극이 유행하던 당시 마리 앙투아네트는 궁정에서 축소형 농장을 만들어 시골풍 옷을 즐겨 입고 연극에서 젖 짜는 처녀 역할을 주로 맡았다. 이때 마리 앙투아네트가 입은 옷이 슈미즈 드레스로, 영국에서는 퀸즈 가운이라고도 불렸다. 이 복식이 일반에서도 퍼져서 유행하게 되었고 1780년대에 이 스타일이 절정에 이르게 된다. 대부분 실크, 무슬린, 면직물로 만들어진 게 특징으로 속에 파니에를 입지 않아 자연스러운 실루엣이었으며, 스토마커나 코르셋으로 몸을 조이지 않아 편안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네크라인은 깊고 넓게 파여 여러 층의 러프 칼라를 달았고 소매는 풍성한 허리통을 중간 중간에 한두 번 오므려서 부풀린 것이 특징이다.

하지만 처음에는 썩 반응이 좋지 않았는데, 손에 장미 1송이를 들고 밀짚모자와 흰 모슬린으로 만든 슈미즈 아 라 렌이 처음 등장했을 당시 "이게 무슨 꼴이냐"며 다들 왕비를 욕했다. 그럴 만한 게, 당시까지만 해도 슈미즈는 그냥 속옷 내지는 잠옷이었기 때문에 욕을 먹었던 것이다. 심지어 그 옷의 재료인 모슬린이 외국산이라서 욕을 많이 먹자, 결국 비공개 처리하고 국산 실크 산업을 독려하고자 국산 실크로 만든 드레스에 그림을 같은 구도로 재현한 위에 나오는 사진으로 대체되었다.

5. 평가[편집]


끝나지 않는, 그녀를 둘러싼 진실과 거짓

영화 마리 앙투아네트


프랑스 혁명 당시에는 극도로 이미지가 안 좋았지만, 최근의 연구에 의하면 당대 여론에 퍼져 있던 대부분의 평판은 부정되고 있는 편이다. 왕정 시대의 프랑스 왕국왕비로서는 특별히 부적절한 행동이 없었다는 평가. 하지만 시대가 원한 것은 왕정 시대의 왕비가 아니었다는 것이 그녀에게는 비극이었다.

당시 왕은 새로 부상한 제3계급인 부르주아[23][24]에 기대지 않고는 권력을 행사할 수가 없었다. 왕정은 자신의 사법부와 행정부를 이 새로운 계급에 맡겼다. 대혁명 당시 왕실 행정부와 사법부의 90%가 부르주아 계급이었다. 이미 국가를 다 떠맡은 그들에게 남은 유일한 적대 세력, 즉 형식적인 수장(首長)인 왕을 제거하는 일은 지푸라기 허수아비 인형의 목을 베는 것만큼이나 쉬운 일이었다. 루이 16세가 무능해서, 마리 앙투아네트가 사치를 해서 등의 해석은 한갓 부질없다.
  • 다만 "이미 득세한 부르주아에게 귀족층의 형식적인 수장인 왕을 제거하는 일은 허수아비 목을 베는 것이나 다름없었다"라는 식의 해석은 지나치게 과장된 면이 있으므로 주의할 필요가 있다. 일단 무엇보다, 근세 유럽 절대왕정기에 국왕과 부르주아 계층의 관계는 그리 적대적인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부르주아 계층의 주된 적대 세력은 중세 이래로 세력을 떨쳐온 대귀족들이었고, 국왕과 부르주와 계층의 관계는 그런 대귀족들을 견제하기 위한 동맹관계에 훨씬 가까웠던 것이다. 전통적으로 막강한 권력을 가지고 있던 대귀족들을 무력화하고 자신의 손에 권력을 집중시키기 위해 국왕은 시민계층 지식인 출신의 관료들을 등용했고, 시민계층 출신의 지식인들은 대귀족에 맞설 영향력을 얻기 위해 국왕의 권위를 뒷배로 삼았다. 따라서 루이 16세 시대 왕실 행정부와 사법부의 대부분을 부르주아 계급 출신의 관료들이 장악하고 있었다는 것은 해당 시기 기준으로 보면 (독자적인 세력 기반을 가진 대귀족이 아니라) 국왕의 영향력 아래 있는 시민계급 관료들이 실권을 장악한 절대왕정이 구축되어 있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 점에서 루이 16세는 부르주아 계급이 주축이 된 혁명에 의해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지만 정작 같은 시기 서유럽의 다른 절대군주들은 부르주아 계급을 육성하여 절대군주권을 강화했다는 점을 생각해야 한다.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테트의 최후가 안타깝다고 하는 것은 그들이 아무리 노력해도 극복할 수 없는 사면초가외통수에 빠져 파멸을 맞이했기 때문이 아니라, 만약 그들에게 조금만 더 통찰력이나 결단력이 있었다면 상황을 극복하는데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는 수단이 있었음에도 되려 역으로 그 수단에 당하여 파멸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마리 앙투아네트의 사치 운운은 말할 가치도 없이 하잘것없는 소리지만 루이 16세의 정치적 무능은 확실히 중요한 문제가 맞다. 또한 국왕을 '이미 국가를 장악한 부르주아 계층에게 마지막으로 남은 적대 세력이자 국가의 형식적 수장'취급하는 것은 프랑스 혁명보다 훨씬 이후, 봉건제에서 앙시앵 레짐 이래의 구체제와 국민국가의 대결에서 국민국가의 최종적 승리가 사실상 분명해진 근대 이후에나 어울리는 평가이지, 마리 앙투아네트의 시대에 나올법한 이야기는 아니다.

마리 앙투아네트의 발언 중 유명한 "빵이 없으면 케이크를 먹으면 되지"[25]는 그녀가 무개념이었음을 증명하는 발언처럼 여겨졌지만, 정작 그녀는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 원래는 장 자크 루소의 ‘고백록’의 한 구절인데 마치 왕비가 한 것인 양 악의적으로 선전되었다. 이때문에 마리 앙투아네트는 굶주리는 민중의 아픔엔 눈곱만큼도 관심이 없는 비정하고 철없는 왕비가 되어 있었다. 사실 "빵이 없으면 케이크를 먹어라"라는 말은 혁명파들이 지어낸 이야기이며 민중의 분노를 이르키기 위한 한 수단이였다.

프랑스 대혁명 발발 4년 전 일어난 마리 앙투아네트 이름을 내세운 희대의 다이아몬드 목걸이 사기 사건도 그녀에 대한 악의적인 루머를 양산시키는 한 계기가 되었다. 전말은 다음과 같다. 출신이 좀 수상한 라모트 백작부인은 로앙 추기경에게 왕비의 가짜 편지를 전달한다. 장관 자리를 노리고 왕비에게 접근할 기회를 찾고 있던 추기경은, 마리 앙투아네트 왕비가 자신에게 연정을 품고 있다고 착각한다. 실제로 백작부인은 어느 날 밤 베르사유 궁전 정원에서 왕비를 닮은 한 창녀를 대역으로 삼아 추기경과 가짜 왕비의 밀회를 주선하기까지 한다. 추기경은 깜빡 속아 넘어가고, 백작부인은 자선사업에 쓴다고 속여 추기경으로부터 여러 차례 돈을 받아 가로채기도 한다. 그리고 마침내 "다이아몬드 목걸이를 사고 싶다"는 왕비의 가짜 편지를 전달한다. 추기경은 보석상에게 목걸이를 주문하고, 왕비의 친필 사인이라고 믿은 보석상은 추기경에게 목걸이를 보낸다. 만기일까지 돈이 입금되지 않자 보석상은 왕비에게 청구서를 보낸다. 목걸이는 이미 백작부인의 남편이 가로채 영국 런던으로 빼돌려진 뒤였다. 창녀는 왕비의 대역을 자백했고, 가짜 편지를 쓴 라모트 백작부인은 태형(笞刑)에 처해진 후 양쪽 어깨에 ‘도둑(voleuse)’의 첫 글자인 v 낙인이 찍힌 채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재판을 통해 진범이 가려졌고, 마리 앙투아네트는 아무 상관없음이 밝혀졌지만 사람들은 공식 재판을 믿으려 하지 않았다. 오히려 왕비에 대한 나쁜 소문들이 무책임하고 악의적인 신문과 팸플릿들을 통해 걷잡을 수 없이 퍼져 나갔다. 베르사유 궁전에서 매일 밤 파티만 여는 사치와 향락의 왕비가 되어 있었다. 소문은 점점 더 수위가 높아져, 당시 팸플릿에서는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를 피에 굶주린 괴물 부부로 묘사하기도 했다. 특히 왕비는 온갖 방탕한 쾌락에 몸을 내맡긴 색정광이 되어 있었다. 이성 간의 섹스는 물론이고 대공 부인들이나 사촌 자매 등, 주위의 모든 여자들과 동성애를 했다는 것이다. 왕비의 섹스 스캔들은 인류 문명의 금기인 근친상간에까지 이르렀다. 이미 어릴 때 오빠인 오스트리아 황태자 요제프 2세에게 처녀성을 잃었고, 프랑스로 시집 온 후에는 시할아버지 루이 15세의 정부가 되었으며, 시동생인 아르투아 백작의 아들과도 연인 관계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결정적인 패륜(자신의 8살 난 아들과 근친상간을 했다는) 혐의까지 뒤집어썼다.

근친상간 루머는 결국 1793년 10월 12일, 국민 공회에 불려 나온 날까지 그녀의 주요 혐의 중 하나에 이르렀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흰색의 헐렁한 평민복을 입었고, 신발은 해졌으며, 흰 머리칼은 목 근처에서 덤벙덤벙 잘려져 있었다. 38세의 나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늙은 노파의 모습이었다. 하지만 몸매에는 아직 왕비로서의 품위와 우아함이 배어 있었다. 왕비는 미동도 하지 읺고 국고 탕진, 내란 음모, 적과의 내통 등 자신의 혐의 내용을 듣고 있다가 8살짜리 아들과 근친상간을 했다는 마지막 죄목이 낭독되자, 한순간 격한 감정의 동요를 보이며 청중석의 여자들을 향해 몸을 돌리며 “여러분들, 이 말이 믿겨지시나요?”라고 말했다. 이 말에 청중도 술렁였다. 비록 왕비에게 적대적인 평민들이었고, 그만큼 왕비에 대한 동정조차 큰 위험을 내포하는 시대였지만, 많은 여성들이 경악하여 입을 가리고 울음을 터뜨렸다. 순간 왕비의 얼굴이 편안해졌다. 모든 사람들의 돌팔매 속에서 '누군가 내 말을 수긍해주는 사람이 이 세상에 하나라도 있다'는 것을 확인한 순간, 절망적인 사람이 느끼는 편안한 안도감이었다. 나흘 뒤 그녀는 혁명광장[26]에서 군중의 환호 속에 처형되었다.[27]

또 허영심이 가득한 것처럼 묘사되고 있으나, 실지 그녀가 재위 중 사용한 예산은 공식적으로 책정된 왕실예산 중 1/10에 불과했다. 다만 시기가 워낙 시기였던지라.[28] 나폴레옹의 전기를 쓴 프랭크 맥클린은 조제핀 드 보아르네가 황후 시절 사치에 쓴 돈이 마리 앙투아네트가 왕비로 있던 기간의 10배가 넘었다고 꽤 신랄하게 촌평했다.

후대의 연구자인 안토니아 프레이저는 "그녀의 결점들이 명백하긴 하지만, 그 불행과 저울질해볼 때 하찮은 것에 불과했다"라고 평했다. 다만 프레이저가 역사학자가 아닌 전기작가이며, 영화 <앙투아네트>를 두고 "아름답다! 아름답다!"를 연발할 정도로 앙투아네트에 대해 호의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주지해야 할 것이다.

5.1. 정치적 측면[편집]


일단 마리 앙투아네트의 정치성을 논할 때 절대 빼놓을 수 없는 사실로, 그녀가 오스트리아 황족 출신이라는 것을 들 수 있다. 비록 프랑스의 왕비이긴 하지만 마리 앙투아네트가 가진 합스부르크 가문의 피는 언제까지고 그녀의 주위를 맴돌았고, 그 특수한 배경을 제외하고는 그녀를 이해할 수 없다.

당시 합스부르크 가문의 본령 오스트리아 대공국이 있는 신성 로마 제국30년 전쟁으로 황제가 북독일에 대한 영향력을 완전히 상실하면서 그 자리를 브란덴부르크 선제후국-프로이센 왕국이 대체해 강국으로 부상하고 있었기 때문에 오스트리아프랑스는 이를 견제할 필요를 느꼈고, 그 동맹의 증표로 맺어진 것이 1770년 마리아 테레지아 여제의 딸인 마리 앙투아네트와 루이 15세의 손자인 루이 오귀스트(루이 16세)의 혼인이었다. 한 마디로 말하자면 오스트리아-프랑스의 우호관계를 상징하는 마스코트 같은 존재였던 것이다.[29]

하지만 오스트리아와 프랑스 사이의 관계는 그리 좋지 않았다. 새롭게 나타난 공동의 적을 맞아 손잡긴 했으나 막시밀리안 1세루이 11세부터 수 백년 동안 계속되어 온 갈등의 골은 그 정도로 메워질 깊이가 아니었다. 때문에 마리 앙투아네트에 대한 국민들의 여론은 그다지 우호적이지 못했다. 이 여론은 결혼 초에 후사를 보지 못하고 루이 16세와의 관계가 소원하다는 소문이 나돌며 그대로 굳어졌고, 그 후의 마리는 악의적 루머의 희생양이 되게 된다.

결국 평생 "오스트리아 스파이"나 "오스트리아년"[30]이라는 빈정거림을 들었고, "루이 16세를 조종하여 프랑스보다는 친정 오스트리아의 이익을 위해 움직이게 하고 있다"는 음모론까지 돌았다. 그러나 이는 반대에 가까웠는데, 마리 앙투아네트는 계속해서 프랑스 정치에 개입하려고 했던 큰오빠 요제프 2세의 요구를 거절했다.

마리 앙투아네트의 모친인 마리아 테레지아는 남편 프란츠 1세가 황제라곤 하나 사실상 데릴사위이자 허수아비인 바지사장이고, 앙투아네트의 들도 하나같이 남편과 권력을 둘 다 손에 잡고 휘둘렀다. 그러나 정작 프랑스에서 남편을 잡고 휘두른다는 이미지였던 마리 앙투아네트는, 집안에서 거의 유일하게도 "남편에게 순종하라"는 친정어머니의 가르침을 실제로 따르는 편이었다. 혁명 전의 치세에서 루이 16세는 아내의 정치 개입을 철저히 막았고, 마리 앙투아네트 또한 정치에 무관심했다. 애초에 당대 왕비들은 정치 참여가 거의 불가능하긴 했지만, 어머니들이 하나같이 예외 사례들이었기 때문에 마리 앙투아네트가 유별나게 보이긴 한다.

하지만 1789년 7월, 혁명이 발발하고 루이가 권력을 잃으면서 아내에게 의지하기 시작하자, 점차 정계에 영향력을 행사하게 된다. 짧은 기간이었기 때문에 평가를 내리기에 곤란한 감도 없지 않으나 최소한 왕당파의 구심점 역할을 했던 것은 확실하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영웅적이라기보단 다른 사람들과 비슷한 평범한 인물이었지만, 당시 왕당파들에겐 거의 성녀와도 같은 완전무결한 여성으로 여겨졌다.

왕당파였던 미라보 백작과 손을 잡고 신권과의 타협을 모색했으며 친정인 오스트리아와 연계해 군사행동을 유발함으로써 은근히 혁명 정부에 압력을 넣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민간에서 왕실의 이미지를 우호적으로 만들고자 비싸져서 못먹게 된 밀가루 대신 값싼 감자빵을 먹을 수 있도록 제빵학교를 열어 지원하고, 자식들에게 빈민가를 보여주거나 빈민들을 구휼하는 일을 가르치고,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자선사업을 벌였다. 후기의 마리 앙투아네트가 유행시킨 슈미즈 아 라 렌도 전성기 때의 마리 앙투아네트의 드레스와 비교하면 많이 단순해졌는데 이는 사치로 인한 비판을 덜고자 한 조치로 보인다.

20세기의 소설가인 슈테판 츠바이크는 "혁명 전에 순수했던 이미지가 혁명을 겪고서 강건해졌다"고 평가한다. 그러나 "루이 16세는 신체적·정신적 한계가 뚜렷한 바, 차라리 그녀가 혁명 전에 이렇게 성장했다면 더 나았을 것"이라는 견해가 있다. 하지만 강력한 카리스마로 사람들을 규합하고 과감성과 엄정함으로 나라를 개혁시킨 어머니, 언니들과 비교하면 이러한 선행은 도움이 될지언정 근본적인 해결책이 될 수는 없던 것으로 보인다. 물론 평범한 황녀이자 왕비로 성장한 마리 앙투아네트에게 있어 어머니, 언니들이 특수한 거고 이 정도가 발상의 한계인 것은 어쩔 수 없을지도 모르지만.

허나 루이 16세가 왕가의 입지를 크게 악화시키는 일을 저지르는데, 일명 바렌 사건이라고 한다. 1791년 6월 당시 국왕 일가는 파리에 거의 억류되다시피 한 상태였는데, 혁명파와의 의견차를 좁히는데 실패하고 유일한 협력자라고도 할 수 있는 미라보마저 사망하면서 정치적으로 위기에 빠지게 된다.

거기에 루이 16세의 동생인 아르투아 백작이 장인 사르데냐 국왕을 등에 업고 군대를 동원하려 했고, 루이 16세의 숙모 2명이 프랑스 밖으로 탈출했기 때문에, 왕실에 대한 국민의 분노가 격앙되고 있었다. 그러던 중 루이 16세가 중병을 앓아 사경을 헤매게 되자, 국민의회는 섭정으로 루이 16세의 가장 큰 경쟁자이며 동생인 프로방스 백작을 선출했다.

그러자 왕태자 루이 샤를의 왕위 계승마저 불가능해질지도 모르는 상황이 되어버렸다. 더구나 미사에 참례하러 떠나는 왕의 마차를 성난 군중들이 둘러싸는 사태가 발생했고, 국왕 호위대조차 혁명 세력 쪽으로 기울고 있었다. 물론, 국왕 부부가 영웅적인 용기를 지녔다면 이 상황을 타개할 수 있을지도 몰랐으나, 그들은 그저 평범한 사람들이었다.

결국 국왕 일가는 파리를 탈출하여 국경으로 향했으나 신속하게 이동하지 못한 탓에, '바렌'이라는 마을에서 붙잡혀 파리로 압송되었다. 최종 목적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지만, 국민들에게는 오스트리아 영내로 들어가거나 국경지역에서 오스트리아군과 조우할 계획으로 여겨졌다. 당시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이자 앙투아네트의 오빠인 레오폴트 2세는 아무런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으나 제네바를 탐내는[31] 사르데냐 왕국 국왕 비토리오 아메데오 3세의 지지를 얻으라든가, 스페인에게 나바라 지방의 이권을 양보하고 지원을 받으라든가 등, 편지를 통해 마리에게 조언을 해주긴 했지만 막상 자기 자신은 아무런 행동을 하지 않았다. 정확히 마리 앙투아네트는 알자스를 통해 스위스로 들어가, 왕실에 우호적인[32] 로렌 지방의 지지를 얻으려 했다.

당시의 프랑스 국민들은 엄청난 패닉에 빠졌다. 왕이 자신들을 버렸다는 것만으로도 충격적인 일에다 루이 16세가 오스트리아에서 군대를 불러들일 경우, 그들의 총구가 어디로 향할지는 불 보듯 뻔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미라보의 사망 이전까지 급진파는 소수에 불과했고 다수의 중도파를 왕당파가 포섭해 나가는 형국이었으나, 미라보 사후 세를 불려나가던 자코뱅 당이 이 사건을 통해 본격적으로 득세하게 되었다. 왕가에 대한 국민의 신뢰는 그야말로 땅에 떨어져 결국 루이 16세의 몰락의 단초가 되었고, 왕 본인도 그것을 알고 있었다.

또한 이 사건이 왕비 주도로 이루어졌다는 소문이 돌면서, 마리 앙투아네트의 입지도 크게 악화되었다. 안 그래도 그녀는 프랑스의 원수인 오스트리아 출신이라는 점 때문에 온 국민의 반감을 사고 있었는데, 남편이 오스트리아로 도주하려고 하자 이것이 마리 앙투아네트의 주도로 알려진 것이다. 프랑스 국민들에게는 그녀에 대한 무비판적인 증오가 있었기 때문이다.[33]

그녀는 1793년 1월 혁명파에 의해 남편이 죽고 나서 유폐되어 있다가, 재판을 받고 10월에 반역, 국고낭비, 국가에 대한 음모죄로 단두대에 올라 처형되었다. 집행자는 18세기의 유명한 망나니샤를앙리 상송으로, 젊은 시절 바리 백작부인과 만난 적도 있으나 나중에 그녀를 처형한다.


5.2. 능력[편집]


고작 14세 때 프랑스로 시집 와서 태자비가 되었기 때문에 모국에서 지적인 교육을 받을 시간이 부족했다. 모친 마리아 테레지아는 16남매를 낳고 정치 격무에 시달리느라 아이들에게 충분히 신경을 써주지 못했고 11녀인 마리 앙투아네트가 한창 유아기일 때에는 7년 전쟁을 치르느라 특히 더 바빴다. 따라서 아이들의 교육은 교육 담당에게 맡겨두기만 하고 일정 기간마다 확인하는 것이 전부였다.

게다가 마리아 테레지아가 마리 앙투아네트를 직접 양육할 시간이 있었다 한들 제대로 했을지 의심스러운 것이 그녀는 자식들을 심하게 편애하는 어머니였고 때문에 사이가 좋은 자식들도 있었지만 거의 일평생 사이가 매우 나빴던 자식들도 적지 않았다.[34] 아버지 프란츠 1세는 그저 자식들의 응석을 받아주기만 하는 예스맨 아버지여서 교육에는 관심이 없었다. 이렇게 집안 단속에 신경 써야할 부모가 무관심하니 서로 총애를 얻으려 싸워대는 언니 오빠들과 경쟁하기에 너무 어린 앙투아네트는 모든 면에서 방치 상태였다.

그러나 마리 앙투아네트의 능력에 대해서는 그녀를 가르친 이들 모두가 탄복을 마지않았다. 에서의 가정교사는 "뛰어난 자질을 가지고 있으나 열의가 부족하다"고 탄식했고, 이후 교육을 맡게 된 빈 대주교는 "모친과 같은 놀라운 지성과 이해력을 가지고 있다"고 평했다. 하지만 집중력도 낮았고 공부에 대한 열의가 별로 없어서 유년기의 교육은 큰 성과가 없었다.

문제는 부모가 이를 전혀 알지 못할 정도로 관심이 없었다는 것. 프랑스에 시집 가기 전에야 막내딸이 일자무식 상태임을 알고 뒷목 잡은 어머니 마리아 테레지아는 앙투아네트가 떠나기 전 수 일간 단둘이 지내면서 많은 것을 가르쳤고[35] 이후에도 측근인 메르시 백작을 통해 마리 앙투아네트의 하루 하루를 전해 듣고, 자주 편지를 보내어 위로하고 교육하려 했다. 참고로 마리 앙투아네트가 마리아 테레지아의 말과 시고모 3명(루이 15세의 딸들 아델레이드, 빅투아르, 소피.)의 말을 듣고 뒤바리 부인을 무시하는 상황에서, 마리아 테레지아가 어쩔 수 없이 딸을 설득했던 일화가 유명하다. 뒤바리 부인 항목을 참고.

루이 16세는 호인에다 자신 때문에 여론에 시달리는 아내 마리의 부탁을 거의 다 들어 주었는데, 이에 우쭐해진 마리가 남편을 '어리석은 사람', '바보' 등으로 부른다는 말을 마리아 테레지아가 전해 듣고는 이를 엄히 꾸짖었던 일도 있다. 즉 '왕비가 존경하지 않는 왕이 과연 백성들에게서 존경을 받을 수 있겠느냐, 너의 행동부터 고쳐라.'의 논조로 딸을 꾸짖은 것이다. 이렇듯 마리아 테레지아는 시집보낸 마리 앙투아네트의 일거수일투족에 대해 신경을 썼기 때문에, 마리 앙투아네트는 어머니를 사랑하고 그리워하면서도 매우 두려워했다. 루이 16세와 관계가 지지부진해 아이가 생기지 않는 데 대해 우리말로 치면 '이번에도 대자연이 찾아왔다'는 식의 사생활 사찰성 보고까지 마리아 테레지아에게 올라갈 정도여서 굉장히 스트레스를 받았다고 한다.

이로부터 4년 뒤에 시할아버지 루이 15세가 승하해, 10대에 즉위하였기 때문에 왕비로서 성숙할 만한 시간을 가지지 못했다.

5.3. 사치?[편집]


왕비가 되고 사치도박, 유흥으로 밤새도록 연극을 보거나 무도회를 즐기는 방탕한 생활도 했다. 도박을 좋아했지만 잘 하지는 못해서 빚을 많이 지기도 했다. 단편적으로 보면 비생산적인 퇴폐문화일 순 있지만, 이는 딱히 그녀가 방탕한 성격이어서가 아니라 당대의 귀족 문화에 어울리기 위해서 필요한 일종의 사교 활동이었다. 현대인들이 원만한 사회생활을 위해서는 남들과 어울려서 비생산적인 오락문화를 즐길 줄 알아야 하고, 설령 자금사정이 위험하더라도 적당히 허세를 부리며 한턱 쏠 줄도 알아야 하듯이, 18세기 유럽 상류층 역시도 사회생활을 위해 적당히 놀 줄 알아야 했다. 도박을 위해 빚을 졌다는 것 역시 현대인들이 보기에는 막장 도박중독자로 보이겠지만, 당대에는 신용카드 결제 비슷한 감각[36]으로 빚을 지는 경우도 있었고 나중에 제 때 갚기만 했다면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도박에서 자주 졌다는 것도 당대의 맥락으로 보면 이해가 가는 부분인데, 당시에는 "귀족이라면 잃을 때 적당히 잃어주면서 놀이 자체를 즐겨야지, 돈을 따려고 너무 정색하고 달려드는 것은 천박하다"는 인식[37]이 있었다.

즉 당대 유럽 귀족들 사이에서 적당한 사치와 유흥은 원만한 사회생활을 위한, 소위 말하는 '인싸'가 되기 위한 필수 선택이었다. 물론 유럽 귀족들 중에서도 마치 수도승처럼 검소하게 사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이런 사람들은 존경을 받거나 소위 '찐따' 취급을 당하거나 양자택일이었다. 이것 역시도 현대와 별로 다를 바 없다. 그리고 국왕 부부 중 남편인 루이 16세는 최상류층에서 어리숙한 바보 취급 당하고 있었기에 더더욱 국왕 부부의 '적당한 사치'가 필요했다. 사실 이 '적당한 사치'의 기준이 애매하기는 하다. 다시 현대의 예를 들어 '사회생활을 위해 적당히 놀 줄 안다'의 기준이 도대체 뭐냐고 묻는다면 누구나 답이 궁색해진다. 그저 본인의 형편과 주변 시선에 맞게 해야 한다는 원론적 말만이 가능할 뿐이고, 정치인, 재벌, 연예인의 '적당한 사치' 기준은 받아들이는 사람이 지지층이냐 반대층이냐에 따라 극과 극을 오간다. 국왕 부부의 '사치' 또한 마찬가지였다.

루이 16세 즉위 후 기록 되어있는 왕실 비공식 재정 지출 목록에 따르면 1789년까지의 왕실 소비 금액은 대략 2억 2천만 리브르였고, 마리 앙투아네트는 그 예산 중 자신이 쓸 수 있는 금액 한도의 10%도 쓰지 않았다.[38] 약 100만 리브르에 가까운 금액인데, 당장 왕의 동생이었던 프로방스 백작만 해도 궁전 개축에 100만 리브르가 훨씬 넘는 돈을 썼을 정도니 이 정도면 '상대적으로 검소했다'는 말이 크게 틀리지는 않는 셈이다. 하지만 100만 리브르라고 해도 당시 금 가격을 바탕으로 환산했을 때 대량 1천 2백억에 달하는 거금이다. 이러니 아무리 '상대적으로 사치를 덜 했다'도 반대층 입장에서는 '아무튼 사치를 하긴 하였다'가 되어버렸다.[39]

또 하나의 문제는 당시 프랑스의 재정상태가 최악이었다는 것이었다. 프랑스의 재정은 태양왕으로 유명한 루이 14세낭트 칙령 폐지 이후 국내 상공업자들의 대부분을 차지하던 위그노들이 외국으로 도피하면서 일차적으로 구멍이 생겼고, 그에 더해 이 줄기차게 벌인 전쟁들, 특히 미국 독립전쟁에서 영국을 견제하기 위해 미국을 지원한 막대한 재정 지출 때문에 최악으로 치달아 있었다. 여기에 더해 조세 징수권은 징세청부업자들에게 진작 다 넘어가 있었고, 일찍이 명예혁명을 겪어 정치적 안정과 사적소유권을 보장하면서 산업화에 박차를 가하여 날로 성장하던 영국과의 격차도 벌어지고 있었다. 그 상황에서 기근까지 들자 프랑스 경제가 최악이 되었다. 그래서 당대 왕실의 재정 상태는 역대 왕실 중 가장 검소한 생활을 했던 이들조차도 용납할 수 없을 정도였고, 프랑스 국민들의 삶은 그냥 시궁창이었다. 그러니 민중들은 왕실 부부가 의외로 검소하더라 따위는 알 바 아니었고, 겉으로 보기에 화려한 왕실, 그 중에서도 당장 눈에 보이는 왕비에게 분노가 집중되었다.

여기에 더해,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의 소박하고 심심한 생활이 오히려 그들의 평판에 악영향을 끼쳤다는 주장도 있다. 선왕인 루이 15세까지만 하더라도 왕에게는 정식 아내인 왕비 말고도 공식 애인인 총희(寵姬)가 있기 마련이었다. 왕비가 공적인 자리에서 왕실의 품위를 지키는 역할이라면, 총희는 사교계에서 왕을 보좌하는 역할이었다. 때문에 왕이 주관하는 연회의 준비는 왕비보다는 총희의 책임이었고, 사교계의 이목도 왕비보다는 총희에게 집중되었다. 총희는 왕실의 일원이 아니라, 귀족 중에 수완이 뛰어나고 용모가 화려한 여성이 꼽히곤 했다. 즉, 일개 귀족이었다. 때문에 베르사유 궁전의 사치와 향략에 대한 직접적인 책임은 왕가와 왕족보다는 일개 귀족인 총희에게 돌려지곤 했다.

그런데 루이 16세는 여색에 별 관심이 없어 총희를 두지 않았는데, 이 때문에 왕이 주관하는 연회와 같은 사교 행사의 준비를 총희가 아닌 왕비가 직접 하게 되는 결과를 불러왔다. 지엄한 왕가의 왕비가 직접 연회를 준비하는 모습이 서민들에게는 그저 '왕가가 사치하는 것'으로 보일 수밖에 없었고, 그 책임이 연회를 준비하는 왕비에게 돌아갈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마리 앙투아네트가 전통적인 왕비처럼 얌전하게 행동하는 걸 원했다고 가정해도 부득이하게 행해야 할 상황인데, 심지어 마리는 외향적인 성품이어서 이런 행사에서 전면에 나서는 것 자체를 즐기는 편이었다. 그래서 더더욱 마리에 대한 비방이 강해진 것.

처음부터 연회를 하지 않으면 왕실이 사치를 부린다는 누명도 쓰지 않고 국가의 재정도 아낄 수 있겠지만, 당시 귀족들에게 베르사유 궁전에서 열리는 사교 행사는 정치의 장이기도 했다. 서민들 입장에서야 '높으신 분들의 향락'으로 보였겠지만, 나라의 유력자들이 모여 비공식적인 회담이 오가는 정치공간이었던 것이기에 그만두기도 불가능했으며, 행사 자체의 정치적인 성격도 분명히 존재했다.

호이징어의 <중세의 가을>에서도 상세히 다루는 이야기지만, 기본적으로 중세~근세 초기 유럽의 귀족 사회에서 근검절약, 또는 수입에 맞춰 지출을 조절하는 것은 미덕이 아니었다. 수입의 규모에 맞춰 적절한 지출을 조절하는 것은 소시민의 미덕이었고[40], 귀족에게는 그 신분을 입증할 만한 과시적인 소비가 오히려 미덕, 또는 귀족 신분의 증거로 여겨졌다. 만약 '귀족 중의 귀족' 인 왕이 부족한 국가 재정을 염려하여 근검절약하는 모습을 보인다면? 현대인의 관점에서야 "똑똑한 왕이다", "명군이다", "훌륭하다"라는 칭찬을 듣겠지만, 중세 후기~근세 초기(즉 절대왕정기)의 관점에서는 "왕답지 못하고 좀스러운 모습"이라는 비웃음을 사기 쉬운 일이었던 것이다.[41]

현대 민주주의 체제에서도 이는 의전이란 형태로 흔적이 남아 있다. 대통령과 같은 국가 지도자가 의식주를 비롯해 각종 행사에서 그 격에 맞는 대접을 받고, 또 맞이하는 손님에게 그에 맞는 대접을 행하는 것은, 그 국가 지도자가 의전을 행해도 되는 국가 권력을 지녀서만이 아니다. 국가 지도자로서 걸맞는 의전을 행하는 것은 곧 지도자뿐만 아니라 국가 전체의 이미지 문제와도 연결되기 때문이다. 전근대 신분제 국가의 군주라면 이는 더욱 필요했다.

결국 왕에게는 자신의 신분과 권위를 입증해보일 만큼 화려하고 과시적인 소비가 요구되었고, 수입이 부족하고 국가의 재정상태가 나빠서 지출이 어려우면 빚을 내서라도 왕의 신분에 걸맞는 과시적인 소비를 해 보일 필요가 있었던 것. 그러다가는 그 빚을 못 갚아서 왕가와 나라가 망할 수도 있지 않겠느냐 싶을 텐데, 그게 바로 소시민의 사고방식인 것이다. 왕에게는 권력이 있으니 권력으로 해결하면 된다. 장래의 징세권을 팔아서 돈을 미리 땡겨쓰든지, 만만한 귀족에게 적당한 죄를 뒤집어씌워 처벌하고 재산을 몰수하든지[42], 교회와의 갈등을 버틸 자신이 있으면 교회 재산을 몰수해버리든지, 그도저도 아니면 돈 빌려준 은행가가 망하든 말든 '못 갚겠다. 배째' 를 해버리는 방법이 있었다.

문제는 이런 수단을 사용하려면 왕에게 권력을 효과적으로 사용하는 정치적 기량이 필요한데, 루이 16세에게는 그런 기량이 부족했다.[43] 게다가 이미 팔 만한 징세권은 다 팔아버렸을 정도로 재정이 극도로 악화된 상황이기까지 했다. 루이 16세의 5대조 루이 14세와 조부 루이 15세는 프랑스의 절대왕정기를 대표할 만한 과시형 군주였고 이들의 화려한 과시적 소비와 전쟁 등의 과시적 국가행위에 의해 프랑스의 국고는 이미 더 짜낼 것도 없을 정도로 완벽하게 거덜난 상태였던 것이다.

따라서 밸런스가 맞으려면 루이 16세는 (선대 군주들의 과시행위로 물려받은 강력한 권위를 이용해서) 부유한 귀족 따위를 있는 대로 쥐어짜서 다시 국고를 채우는 폭군이 되었어야 할 포지션이었는데 이게 도무지 성격에 안 맞았다는 것이 루이 16세의 불행인 것.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의 소비 자체는 프랑스 국왕 부부치고는 상당히 검소한 편이긴 했지만, 과시형 군주에게 2대나 시달린 당시 프랑스 왕국의 국고의 상태는, 왕실에서 소비를 좀 줄이고 검약하는 정도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었다.

그리고 여기에 한술 더 떠서 루이 16세의 치세는 과시적 소비를 미덕으로 하던 중세적 귀족의 시대가 끝나가고, 계몽주의로 상징되는 새로운 시대가 열리기 시작한 시대였던 것도 문제였다. 이전 시기라면 당연한 것, 또는 왕의 미덕으로 여겨지던 화려한 연회와 과시적 소비가 계몽사상가를 중심으로 한 지식인, 그리고 지식인의 영향을 받은 대중들에게 비판받기 시작했던 것이다.

프랑스의 절대왕정에서 왕은 사치를 통해 자신의 권위를 과시하여 신민들에게 인식시켰다. 예를 들어 프랑스 절대왕정의 전성기를 누린 루이 14세의 일화들을 보면 귀족들 앞에서 자신이 직접 춤을 추는 공연을 해보이거나, 귀족들 뿐 아니라 백성들까지 모두 보는 자리에서 자신이 식사하는 모습[44]과 같은 사생활까지 공개해 보였을 정도였던 것이다. 즉 당시 프랑스의 사회상에서 왕은 자신의 화려함을 가능한 한 공공연히 과시함으로써 자신의 권위를 입증해야 했고, 이를 위해서는 사치를 피할 수 없었던 것이다.[45]

루이 16세의 치세였던 근세 말의 프랑스에서 중세적 귀족의 시대가 끝나가고 새로운 시대(계몽주의의 근대)가 태동하기 시작했음을 지적하는 것은, 일단 '지식인-시민계층이 주축이 되어 일으킨 혁명으로 몰락한' 루이 16세와는 달리 비슷한 시기 유럽의 다른 계몽군주들은 오히려 지식인-시민계층을 적극 양성하여 대귀족과 교회의 세력을 억제하고 왕권을 강화했다는 점에서 프랑스 혁명이 일어난 배경을 설명하는 데 의미가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루이 16세에게는 지식인 계층 출신으로 우수한 경제학자나 재정전문가인 안 로베르 자크 튀르고, 자크 네케르, 에티엔 드 브리엔, 샤를 드 칼론이 있었으나, 이들의 능력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여 재정 상황을 개선하는 데 실패했다. 더 나아가, 루이 16세는 귀족과 교회의 반발을 이기지 못해 과세를 포기할 수 밖에 없었지만, 만약 작정하고 이들을 찍어눌러서라도 세금을 매기려고 했을 경우, 부르주아 계층이 주도권을 갖게 된 군대는 왕의 편에 설 가능성이 아주 높았다고 여겨진다.(실제로 혁명 이후에도, 군대는 귀족들의 편이 아니라 부르주아 혁명 세력의 편을 들었다.)

즉 루이 16세가 새로운 시대의 동향만 잘 파악했다면 그 조류에 올라타서 상황이 혁명에까지 이르기 전에 당시 프랑스의 내부적 문제를 해결하는데 성공할 여지도 있었고, 심지어 일단 혁명이 일어난 이후에도 초기에는 주로 귀족 세력을 적대시했을 뿐 아직 루이 16세를 '우리의 왕'으로 여기던 혁명세력에 올라타 입헌군주제 정도를 받아들이는 대신 왕위는 유지하거나, 더 나아가서는 대귀족과 교회의 세력을 꺾고 나름의 왕권 강화까지 시도할 여지까지도 없는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 모든 기회를 잃고 결국 왕의 처형과 왕정의 붕괴로 이어졌다.

6. 악명[편집]


마리 앙투아네트를 죽게 만든 가장 큰 이유라 일컬어지는 "빵이 없으면 케이크를 먹으면 되지"라는 망언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본인은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 원래 장 자크 루소의 <참회록>에 등장하는 말인데, 오스트리아 출신의 왕비라며 그녀를 비난하던 사람들이 여기서 따와 나쁜 소문을 퍼뜨렸고, 이것이 다시 혁명단에 의해 덧붙여지면서 '말도 안 되는 헛소리만 일삼는 멍청이'로 폄하된 것이다.[46]

사실 그녀를 죽음으로 몰고 가는데 결정적으로[47] 기여한 것으로는 다이아몬드 목걸이 사기 사건이 있다. 라 모트 백작부인이 앙투아네트를 사칭해 거액의 다이아몬드 목걸이를 편취한 이 사건에 앙투아네트가 관여된 것은 아니었지만[48], 대중들은 진범은 앙투아네트고 라 모트 백작부인은 이용당했을 뿐이라고만 믿었다. 라 모트 백작부인이 유죄 선고를 받자 일반 민중들의 여론은 더욱 격앙되었다고 한다. 다만 나중에 혁명 재판에서 확인해본 결과, 무고가 맞았다.

당대 프랑스인들은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성적인 모욕을 마리 앙투아네트에게 다 갖다 붙였다. 동성애, 근친상간, 하루에 수십 명을 상대한다든가 하는 등 주로 18세기 중반부터 널리 퍼지기 시작한 야설에 귀족, 특히 왕과 왕비를 많이 갖다 붙였는데, 당연히 주적인 마리 앙투아네트가 수많은 악성 창작자들의 펜 끝에 능욕당했다. 루이 16세의 경쟁자였던 루이필리프 조제프 도를레앙뿐만 아니라 상속후계자였던 두 동생인 프로방스 백작아르투아 백작도 그러한 소문을 부추겼으며 프랑스 왕실을 증오했던 혁명가들도 그런 식의 야설들을 마구 써내서 출간했다.

당대에는 동성애자라는 소문이 퍼져 있었지만 이는 루머에 불과하며, 연구에 의하면 본인은 동성애자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아무튼 동성애자였다는 비난을 많이 받았던 관계로, 예전에는 동성애자들에게 고귀한 희생자로 추앙받기도 했다. 여담으로 사실 이와 비슷한 말을 정말로 했던 사람은 따로 있는데, 바로 서진의 2대 황제였던 진 혜제 사마충(司馬衷)[49]이다. 흉년으로 백성들이 굶주리고 있다는 말을 듣고는 "곡식이 없다면 어찌하여 고기죽을 먹지 않는 것이냐?(何不食肉糜[50])"라고 했다고 하는데, 이는 엄연히 자치통감에 실려있는 사실이다. 다만 사마충은 백치라 판단력이 흐렸으며, 실제로 지적장애를 앓고 있었다는 추측도 나온다는 점은 감안할 필요가 있다. 어쩌면 중국에서 나온 이 이야기가 대륙을 횡단하면서 마리 앙투아네트의 말인 것처럼 변신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51]

오랫동안 아이를 낳지 못해서 비난을 받기도 했다. 현대인의 기준으로는 별 것 아닌 것처럼 보일 수 있으나, 봉건군주가 후사를 얻지 못하고 있다는 것은 꽤 심각한 문제였다. 전제군주정에서 왕의 후사가 없다는 것은 곧 국가적 혼란을 야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왕과 왕비의 사이가 소원하고 왕비가 무도회장을 누비며 밤을 보낸다는 것은, 호사가들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다.

사실 이건 루이 16세가 부부관계를 기피하였기 때문으로, 그에게 일종의 성기능 장애가 있었다는 소문, 정확히는 자연포경이 아니라는 얘기가 돌기도 했다. 이 문제로 루이 15세가 특별히 의사를 불러 루이를 진찰하게 했고, 나중엔 친정 오빠 요제프 2세가 매제인 루이를 설득하러 프랑스까지 출동했다. 둘만의 대화라 모르지만 요제프의 말빨이 먹혔는지 결혼한 지 한참 뒤이기는 하지만, 다행히 마리는 아이들을 연달아 낳게 된다. 또 신혼 시절에 아이를 가지지 못했던 것이 마리 앙투아네트가 유흥에 빠진 원인이라는 설도 있다. 루이는 사냥이나 대장간에서 힘 쓰고 나면 밤에 충분히 자고, 남편이 잠든 시간에 마리는 파티에서 춤 추고 노느라 진이 빠져 아침이 되면 거의 기절해 잠들었다. 아내가 자는 동안 해 뜨면 루이는 다시 사냥이나 대장간으로 출근, 마리는 밤에 나가 아침에 들어와 둘 다 힘을 다른 데 쓰고 있었던 것이다.

여론은 루이의 성적 능력에 대한 의심과 앙투아네트의 (조작된)퇴폐적인 사교생활에 대한 관심으로 들끓었고, 이때 형성된 여론은 두고두고 족쇄처럼 그녀를 따라다니게 된다. 보다못한 마리아 테레지아가 서신을 통해 왕비로서의 몸가짐을 갖출 것을 타이를 정도로 당시 앙투아네트를 둘러싼 여론은 좋지 않았다. 어느 정도 나이가 들고 아이를 낳고 나서는 철이 들어서 유흥도 그만두었고, 왕비로서의 위치를 자각하여 왕실에 대한 지지를 회복하려고 노력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여론과 달리 마리 앙투아네트의 소비는 그녀 이전 역대 프랑스 왕비들보다 적었으며, 전체 프랑스 재정 상황에 비추어 보면 새 발의 피였다.

6.1. 악명에 대한 분석[편집]


그녀가 이렇게 심한 악명과 루머에 시달렸던 이유에 대해서는 몇 가지 분석이 있다. 일단 결론부터 말하자면 왕실 일원 중 가장 비방하기 좋은 위치인 오스트리아 출신의 외부인인지라 국민들에게 처음부터 인기가 없었고, 부르주아 계급에게는 행실과 딱히 상관없이 원래 적 취급을 받았으며, 몇 가지 성격적 특징이 당시 프랑스 궁정생활과 역효과를 일으켜 자기 편이어야 할 귀족들 사이에서도 고립되었기 때문이다.

첫 번째로 그녀는 프랑스와 사이가 나빴던 오스트리아 사람이었다. 그리고 당시 프랑스인들은 마리 앙투아네트가 오스트리아의 간첩이라고 거의 확신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프랑스 혁명 시기에 베르사유 궁전, 특히 마리 앙투아네트의 방은 모조리 뒤집어 엎어졌고, 그 중에는 당연히 어머니인 마리아 테레지아나 오빠 요제프 2세, 레오폴트 2세, 그리고 자매들 및 친족들과 교환한 편지도 있었다.[52] 정치외교학과와 사학과에서 동맹의 역전이라 불릴 정도로 프랑스와 오스트리아 간의 외교 관계가 급반전+급진전된 18세기 중후반의 국제 정세를 감안하면 아이러니 그 자체였다.

2번째로 왕비를 그저 애 낳는 기계 정도로만 취급하여 뒷방에 처박아놓고는 공식적으로 정부(情婦)를 임명하여 궁정의 꽃으로 삼았던 루이 14세, 루이 15세와는 달리 루이 16세앙리 4세 이래 전통적으로 호색한이었던 부르봉 왕가의 왕임에도 불구하고 여색을 별로 밝히지 않고 마리 앙투아네트 이외의 여자에게 시선을 기울이지 않았다. 현대 기준으로는 '왕비에 대한 사랑이 지극하였던 국왕' 정도의 취급이었겠지만, 당대의 기준에서 이런 행동은 어이없게도 루이 16세에게 "성적으로 무능하다"는 이미지를 심어주었고[53], 반대로 마리 앙투아네트는 "남편 기를 죽이는 몹쓸 여자" 같은 이미지를 가지게 되었다.[54][55]

3번째로 당시까지 프랑스 여론은 도덕적으로 타락한 왕의 정부를 씹어대는 것이 취미였고, 스트레스 풀이용 범 국민 스포츠였다. 그런데 루이 16세에게는 정부가 없었으므로 이런 이유로는 비난할 수가 없었는데 그러자 프랑스 국민들은 없는 정부 대신 왕비를 씹어댔다.

4번째로 마리 앙투아네트는 이전까지의 프랑스 왕비들과 비교하면 매우 활동적이었고, 궁정의 중심적인 위치에 있었다.[56] 이것은 "전통적인 프랑스 왕비상"에 어긋나는 모습이 되어 궁정의 보수파들에게 눈총을 받는 요인이 되었다. 또한 그녀는 근엄한 고위 귀족들을 고리타분한 인물들이라고 여겨 가까이 하지 않은 대신, 자신의 나이 또래의 인물들과 주로 어울렸기 때문에 베르사유의 고위 귀족들에게도 좋지 못한 평가를 받았다.

5번째로, 마리 앙투아네트와 친밀했던 대표적인 인물들은 랑발 대공비[57][58]와 욜랑드 드 폴리냐크 백작부인이 있었는데, 이 중 랑발 대공비는 정숙한 귀부인이었으나 마리 앙투아네트의 가장 절친한 친구였다는 사실이 독으로 작용하여 베르사유 습격 당시 납치되어 사지가 찢어지는 잔혹한 처분을 당하고 그 머리는 마리 앙투아네트의 방 창문에 던져지는 신세가 되었다. 그 뒤를 이어 왕비의 총애를 받은 폴리냐크 백작부인은 원래 작위밖에 없는 가난한 여성이었으나, 비슷한 나이의 왕비와 곧 친구 사이가 되어 마리 테레즈 샤를로트가정교사로 임명되었다. 고위 귀족이 맡는 것이 관례였던 왕손의 가정교사 자리에 '겨우' 백작부인을 임명하는 파격적인 처분을 내린 것은, 귀족들에게 또 한 번 큰 반감을 사는 요인이 되었다.

6번째로, 위에서 언급한 폴리냐크 백작부인에게 푹 빠져서 처음에는 연간 50만 프랑의 연금을 지급하더니 나중에는 연금액이 100만 프랑까지 올라갔다. 사욕이 없었던 랑발 대공비에 비해서 폴리냐크 백작부인은 매우 약삭빠른 여자여서 연금과 대저택, 각종 선물 따위를 가능한 한 우려내려 들었기 때문. 먼저의 조치로 고위 귀족들에게 반감을 산 데 이어 이러한 처분은 대중들의 평판을 나쁘게 하는 요인이 되었다.[59]

마지막으로 결정타를 먹인 언론 싸움. 당시 프랑스인들은 언론의 힘을 깨달아가고 있었는데, 그 발전 과정에 있어 초기 상태였던지라 언론의 힘은 긍정적인 측면보다는 부정적인 측면의 파괴력에서 더욱 강력했다. 이미 루이 15세 때부터 프랑스의 부르주아지들은 정적을 제거하는 방법으로 정적을 소재로 한 음란물과 비방 서적을 출판해 댔고,[60] 이 와중에 짭짤한 수입도 챙길 수 있었다.

야설들은 기본적으로 인격모욕이 주 목적이기 때문에 수간, 윤간, 혼음, 강간은 기본으로 묘사되는 막장물이었고, 여기서 여주인공으로 당첨된 것이, 주는 것 없이 미운 마리 앙투아네트. 남주인공은 로앙 추기경[61]이나 훗날 부르봉 왕조 마지막 왕이 되는 아르투아 백작(샤를 10세), 그리고 그 외 수많은 남자들이 있었다. 다만 루이 16세는 한때 고자 소문이 돌 정도로 이쪽과 거리가 멀었기 때문에 제외되고, 주로 네토라레 당하는 역할로만 나왔다.[62]

즉 마리 앙투아네트가 당대 프랑스에서 이런저런 악성루머에 시달릴만한 이유가 있었던 것은 맞지만, 그와 별개로 그런 악성 루머들이 꽤나 오랜 세월 동안 사실(史實)로 둔갑했던 것은 장폴 마라자크 르네 에베르 등의 과격파가 자신들의 혁명에 대한 정당성을 주장하기 위하여 과장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와는 별도로 마리 앙투아네트의 이름을 딴 과자가 존재한다. 다시금 강조하지만 이름을 딴 케이크가 있었다는 거지, 그녀가 "빵이 없으면 케이크를 먹으면 되지"라는 말을 한 것은 아니니 오해는 말자. 당시 귀족사회에는 왕족을 비롯해 귀족의 부인이나 정부들까지도 각각 자신의 이름을 딴 케이크(혹은 디저트)를 가지고 있었다. 호화로운 만찬이 끝날 무렵 그것을 손님들에게 제공하는 것이 사교계에서의 위엄이었으며 그녀들의 긍지 높은 자기 표현이었다. 특히나 왕비의 이름이 붙은 과자는 왕비 본인이자 프랑스라는 국가의 위신의 상징이었다. 왕비의 이름을 가진 과자들은 '비스켓 글라스 앙투아네트', '샤를로트 마리 앙투아네트'가 있다.[출처]

7. 최후로 남긴 서신[편집]


아래는 마리 앙투아네트가 처형 전날 밤 시누이마담 엘리자베트(루이 16세의 여동생)에게 쓴 마지막 편지이다. 하지만 이 편지는 마담 엘리자베트에게 전해지지 못했고, 마리 앙투아네트 사후 반세기가 넘어서야 공개되었다.[63][64]

사랑하는 아가씨,

이것이 당신에게 보내는 마지막 편지입니다.

나는 지금 선고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범죄자들에게 가하는 치욕적인 죽음의 선고가 아니라 당신의 오빠를 다시 만나볼 수 있는 선고입니다.

그 분은 결백합니다.

나도 최후의 순간에 그분과 마찬가지로 처신하기를 바라고 있어요.

양심에 거리낄 것이 없는 사람은 모두 그렇겠지만, 나는 극히 평온합니다.

불쌍한 아이들을 남기고 가는 것이 정말이지 마음에 걸리는군요.

당신도 알다시피 나는 아이들만을 위해서 살아왔습니다.

심지가 곧고 마음씨가 좋은 아가씨,

당신을 위해서도 나는 살아왔습니다.

우리와 함께 지내려는 다정한 마음씨로 모든 것을 희생해온 당신을 남겨두고 떠나게 되다니!

재판의 변론을 통해서 나는 내 딸이 당신과 떨어져 있다는 것을 비로소 알았습니다.

아, 불쌍한 어린 것!

그 아이한테는 편지를 쓰지 않으려고 합니다.

쓰더라도 전해주지 않을 테니까요.

이 편지가 당신에게 전해질지조차도 알 수가 없습니다.

그 아이들에게 나의 이 편지에 의한 축복을 전해주세요.

아이들이 자란 뒤에 당신을 만나 당신의 착한 마음씨를 접할 수 있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자기 주장을 지키고 의무를 다하는 것이야말로 삶의 가장 중요한 요소라는 것, 곧은 심지를 가지고 신뢰하고 화합하면 행복해지리라는 것을 가르쳐주세요.

딸은 연상이므로 누나로서 풍부한 경험과 아름다운 마음씨로 동생에게 충고를 해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들은 누나에게 우정에서 우러나오는 염려와 봉사의 태도를 보여주기를 바랍니다.

두 아이가 어떤 처지에 놓이더라도 서로 도우면 행복하게 지낼 수 있음을 깨닫게 되기를 바랍니다.

아이들이 우리를 본보기로 삼았으면 좋겠습니다.

괴로움 가운데에도 우리들의 우정은 얼마나 많은 위로가 되었는지 모릅니다.

행복이란 친구와 함께 그것을 나누어 가질 때 배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가족 말고 어디에서 아름답고 내적인 친구를 구할 수 있겠습니까?

아들의 아버지의 마지막 말[65]

을 절대로 잊지 말았으면 합니다.

훗날을 경계하기 위해서 되풀이하면, 우리들의 죽음에 복수할 생각은 절대로 하지 말기를 바란다는 것입니다.

나의 마음을 크게 아프게 하는 것을 당신에게 이야기하지 않으면 안 되겠군요.

나는 아이가 당신을 괴롭게 했음을 압니다.

그 아이를 용서해주세요.

그 아이는 아직 어리니까요.

그리고 아이들을 강압하는 것은 아주 쉬운 일이니까요.

언젠가 그 아이가 당신의 사랑과 부드러운 마음씨의 가치를 받아들여 서로를 이해하게 되기를 나는 기도합니다

(재판 당시 루이 17세의 증언에 대한 언급).

당신에게 이제 나의 최후의 생각을 털어놓아야겠습니다.

재판이 시작될 때부터 편지를 쓰고 싶었지만 쓸 수도 없었거니와 재판이 너무나도 빨리 진행되는 통에 그럴 만한 시간도 없었습니다.

나는 가톨릭의 사도적인 신앙을 품고 죽습니다.

그것은 내가 성장해 왔고 내가 잘 아는 조상들의 신앙입니다.

이 곳에서는 어떤 종교적인 위안도 기대할 수 없기 때문에 이곳에 내 종교의 사제가 계실지조차도 알 수 없습니다.

그런 분이 내가 있는 이 장소에 오신다는 것은 극히 위험한 일이지요.

나는 살아오면서 내가 범한 죄악에 대해서 하느님께 용서받고 싶습니다.

하느님께서 옛날부터 그래오신 것처럼 나의 마지막 기도를 들어주시고 동정과 사랑으로 나의 영혼을 받아들여주시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66]

알지 못하는 사이에 내가 주었던 모든 괴로움을 용서해주기를 나는 모든 사람, 특히 사랑하는 아가씨, 당신께 기도합니다.

나는 내게 고통을 주었던 나의 모든 적들의 죄악을 모두 용서합니다.

나는 이제 형제, 자매에게 안녕을 고하려고 합니다.

내게는 벗들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들과 영원히 헤어져야 한다는 생각과 그들의 고통에 대한 생각이야말로 내가 지금 죽으면서도 떨쳐버릴 수 없는 가장 큰 괴로움입니다. 내가 최후의 순간까지도 그들을 생각했었다는 것만이라도 그들이 알아주었으면 좋겠습니다.

안녕, 다정한 아가씨.

이 편지를 받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나를 잊지 마세요.

불쌍한 아이들과 당신을 온 마음을 다해서 포옹합니다.

당신과 아이들과 영원히 헤어져야 하는 일은 끔찍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안녕히, 안녕히!

이제는 신앙적인 의무만이 남아 있습니다.

나는 결정을 내릴 수 있는 자유로운 사람이 아니므로 아마 사제 한 사람을 임의로 데려오겠지요.

그러나 나는 그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을 것이고 전혀 낯선 사람처럼 행동할 것입니다.


여기서 편지는 중간에 끊겼는데, 형리가 그녀를 데리러 왔기 때문이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죽기 직전까지 자식들과 엘리자베트가 살아남기 바랐지만, 안타깝게도 아들인 루이 17세는 어린 나이에 폐결핵으로 사망했으며, 딸인 마리 테레즈 샤를로트는 그녀의 소원대로 살아남아 천수를 누렸지만 일평생을 프랑스 혁명이 남긴 고통을 안고 살아가야만 했다. 마담 엘리자베트 또한 이 편지를 받지 못하고 몇 개월 후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졌다.

8. 여담[편집]


  • 도박 중독자였고 자주 돈을 잃기도 했으나, 아이를 출산한 후엔 도박을 그만두었다.

  • 콩시에르쥬리로 이송된 이후에 그녀를 탈출시키기 위해 왕당파 귀족인 레니에 드 자르제 백작이 비밀리에 방문한 적이 있다. 참고로 자르제 백작은 유명한 만화 베르사유의 장미에서 오스칼 프랑소와 드 자르제의 아버지로 나오는 인물이기도 하다. 만화에서는 충성스러운 자르제가 어떻게든 왕비를 탈출시키려고 했으나, 왕비가 "아이들을 남기고 혼자 탈출할 수 없다"며 거절하는 것으로 나온다. 하지만 실제로는 자르제가 너무 겁이 많아서 탈출 계획을 세워놓고 결국은 실행시키지 못하고 국외로 도주해버렸다.

  • 독립 직후의 미국에서는 미국 독립전쟁 중에 프랑스의 루이 16세가 지원을 많이 해준 것 때문에 친불감정으로 인해[67] 마리 앙투아네트에 대한 동정론이 있었다고 한다. 애인으로는 스웨덴의 귀족 한스 악셀 폰 페르센이 있었다. 두 사람 사이에 육체관계가 있었는지는 모호하지만, 적어도 서로간의 플라토닉한 관계가 있었음은 여러가지 증거가 남아 있다고 한다. 그는 마리 앙투아네트의 처형 이후 혼자 남은 그녀의 딸 마리 테레즈 샤를로트를 도와주려 애쓰기도 했다. 공교롭게도 한스 악셀 폰 페르센 역시 마리 앙투아네트처럼 평민에게 살해당했다.

  • 오스트리아의 소설가이자 전기작가인 슈테판 츠바이크(1881~1942)가 1932년에 《마리 앙투아네트 - 어느 평범한 여자의 초상》이라는 평전을 발표했다. 이 책은 철저한 연구를 통해 기존의 전기들에 실려 있던 위조된 편지나 후대에 센세이션을 노려 만들어진 조잡한 에피소드 등을 배제하고, 정치적 희생물로서의 마리 앙투아네트라는 인간을 묘사하는데 성공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작품이다. 이 평전 이후에 1934년 마담 뒤바리를 시작으로, 1938년에 할리우드에서 마리 앙투아네트 영화를 만들었으며, 이케다 리요코도 이 평전을 보고 만화 베르사유의 장미를 만들었다.



  • 마리아 테레지아의 성인이 된 이후 살아남은 자녀들 중에서, 유일하게 40살을 못 채우고 사망했다. 마리아 테레지아의 자녀들 중에서 마리 앙투아네트보다 어린 나이에 죽은 자녀들은, 진짜로 어린 나이에 죽어서 어른이 되어보지 못한 사람들뿐이다.


  • 2020년에 마리 앙투아네트의 구두가 경매에서 43,750유로(약 5,760만원)에 낙찰됐다. 이 구두는 마리 앙투아네트의 시녀의 친구가 보관하게 된 이후 대대손손 가보로 전해져 내려오다가 경매에 나온 것이다.


  • 프랑스의 초콜릿 회사인 드보브에갈레의 기원이 마리 앙투아네트가 약을 먹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자신이 복용하던 약의 불쾌한 맛에 대해 불평했는데 약사였던 쉴피스 드보브가 약에 코코아와 설탕 등을 조합하여 동전 형태 초콜릿을 만들어 바치자 기뻐하며 초콜릿의 이름을 피스톨이라 짓고 드보브는 1800년에 초콜릿 가게를 열어 드보브에갈레를 창업한다.

9. 대중문화[편집]



9.1. 소설[편집]


  • 아르센 뤼팽 시리즈 중 1909년에 나온 기암성에서 한 번 등장. 감옥에 갇혀서야 기암성의 비밀을 알았지만 이미 손쓸 방법이 없어서 후회했다는 내용.
  • 엔도 슈사쿠는 앙투아네트와 가상의 인물 마그리드 아르노[68]의 대립과 프랑스 혁명을 다룬 소설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를 썼다. 국내에서는 90년대 왜색 논란으로 인해 민예사에서 '앙드레 까스뗄로'라는 정체불명의 작가가 쓴 <소설 프랑스 대혁명>이라는 이름으로 출간되었다. 그런데 이게 아무리 봐도 해적판으로 출간한 듯 보인다.[69]
  • 오스트리아의 작가인 슈테판 츠바이크마리 앙투아네트 - 어느 평범한 여자의 초상(베르사유의 장미)에서는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해당 작품은 후술할 이케다 리요코의 동명의 만화애니메이션의 원작이기도 하다.
  • 대체역사소설 <얘 사전에 불가능은 없다!>에서도 등장. 여기서는 금고형이 선고되어 단두대에서 사형을 면하게 되었으며, 주인공이 마리 루이즈 샤를로트 공주와 결혼하면서 그의 장모가 되었다. 주인공이 그녀를 직접 본 소감은 '선량한 사람이지만 속에 뭘 감추고 있는지 모르는 능구렁이 같은 사람'이었다. 실제로 총재정부의 무능함이 드러나자 은근슬쩍 부르봉 왕조의 복귀를 위한 밑작업을 진행중이었으며, 결국 이를 눈치챈 주인공에 의해 생도맹그로 가게 된다. 물론 주인공도 같이 가는 거고, 총재정부의 감시가 약한 곳에서 세력을 키울 수 있게 되어, 생도맹그로 가게 된 것을 나쁘게 생각하지는 않고 있다.
  • 대체역사소설 <프랑스 왕가의 천재가 되었다>에서는 히로인으로 등장한다. 여기서는 루이 16세가 아닌 원역사에서는 존재하지 않았던 인물이자[70] 주인공이 빙의한 인물인 루이 크리스티앙 왕자의 아내가 되었다. 원역사와 달리 자신이 원하던 진정으로 행복한 삶을 살아가고 있다.
  • 대체역사소설 <임꺽정은 살아있다>에선 마리아 테레지아가 영국 왕실에 시집을 갔기 때문에 '메리 안토니아(Mary Antonia)'라는 이름으로 태어나서 영국 여왕으로 즉위한다. 루이와 결혼한 건 원 역사와 똑같지만, 로베스피에르가 프랑스의 독재자가 되고 나서 영국으로 망명 온 신세이기에 루이는 실제 역사보다 더 추락한 신세. 그나마 다루기 쉬운 남자라는 이유로 결혼했다고.
  • 니시야마 아키노스케의 라노벨 '파워 앙투아네트'에서는 근육 덕후[71]인간 흉기로 나온다. 처형을 앞두고 덤덤히 자신의 죽음을 받아들이려고 했지만, 시민들의 말 한마디[72]에 빡이 돌더니, 단두대 앞에 서자, 자신의 팔에 묶인 로프를 힘으로 끊어버린다. 그리고는, 내려오는 단두대 칼날을 손으로 잡아내더니[73], 순식간에 키 180의 근육질 체형으로 벌크업해버린다.[74] 그리고는 궁정격투술로 주변의 장병들을 상대로 무쌍을 찍어버린다.

9.2. 영화[편집]


  • 1934년 <마담 뒤바리>에서는 아니타 루이즈가 맡았다.
  • 1938년 할리우드 영화 <마리 앙투아네트>에서는 노마 시어러가 맡았다.
  • 1956년 에서는 미셸 모르간이 맡았다.
  • 1957년 에서는 머리 윌슨이 마리 앙투아네트를 맡았다.
  • 1979년 <베르사이유의 장미> 영화판에서는 크리스티네 뵘이 맡았다.
  • 1989년 프랑스 혁명 200주년 기념 영화 <프랑스 대혁명, 원제 La Révolution française>에서는 제인 시모어가 마리 앙투아네트 역을 맡아 호연을 펼쳤다.
  • 1990년 에서는 우테 렘퍼가 맡았다.
  • 2001년 <어페어 오브 더 넥클리스>에서는 조엘리 리차드슨이 맡았다.
  • 2006년 <마리 앙투아네트>는 소피아 코폴라가 감독하고, 커스틴 던스트가 마리 앙투아네트 역할을 맡았다.
  • 2006년 영화 에서는 카린 바나스가 맡았다.
  • 2012년 프랑스, 벨기에 합작 영화 <페어웰, 마이퀸>에서는 마리 앙투아네트와 폴리냐크가 동성애 관계로 그려진다. 담당 배우는 다이앤 크루거. 레아 세두는 책을 읽어주는 시녀 시도니로 나왔다.
  • 2018년 영화 <원 네이션>에서는 마엘랴 쟝티[75]가 맡았고, 현대의 재평가 반영 및 왕에게 분노하는 프랑스 국민을 주인공으로 한 덕분에 모든 어그로가 루이 16세로 끌려서 이 영화에서는 참수당하는 장면조차 나오지 않는다. 무도회를 즐기는 씬도 없다.

9.3. 드라마[편집]


파일:marie antoinette(canal+).jpg

2022년 프랑스-영국 합작으로 제작된 드라마로 영화 더 페이버릿의 각본을 맡은 데보라 데이비스가 대본집필을 담당하고 주인공 마리 앙투아네트는 독일 여배우 에밀리아 슐레가 맡았다[76]. 이전에 카날 플뤼에서 제작한 드라마 베르사유의 후속작[77]이라 봐도 무방할 정도로, 배경은 프랑스지만 극 중 인물들이 쓰는 언어는 영어로 제작되었다. 이전작처럼 해외 수출을 염두에 두고 제작한 듯. 게다가 이전작처럼 똑같이 실제 베르사유 궁전[78]에서 촬영 진행했다.

9.4. 뮤지컬[편집]



9.5. 만화[편집]


  • 만화 이노센트에서는 주인공이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 부부의 목을 날린 사람이기 때문에 출연이 불가피하니 등장했다. 주로 주인공 샤를 앙리 상송의 여동생인 마리 조셉 상송과 마리 앙투아네트의 대비 연출로 등장한다. 여성이기를 거부하고 상송 가의 운명을 짊어지기를 기꺼이 원하는 마리와, 지극히 여성스럽게 자라는 마리 앙투아네트가 서로 대비되어 등장한다.
  • 악역 영애로 전생했을 텐데 마리 앙투아네트였습니다는 여주가 마리 앙투아네트로 환생하게 되는데, 문제는 주인공이 역사지식이 없는데다가 처음에는 이세계 전생물이나 악역 영애물의 세계에 빠진줄 알고 착각했지만, 나중에 프랑스로 시집가게 되면서 어머니의 이름이 '마리아 테레지아'라는 것과 간단한 프랑스어 문장인 "나의 이름은 마리 앙투아네트입니다(Je m'appelle Marie-Antoinette)"을 통해 자신이 마리 앙투아네트로 환생했다는 충격적인 사실을 깨달았다.[79]
  • 만화 심도쿄에서는 얼굴 위쪽을 가면으로 가리고 있는 여성으로 나온다. 하반신에는 촉수가 숨겨저 있으며, 그 촉수로 죄인들을 잡아먹는다. 미소년들은 바로 죽이지 않고 납치해서 '페르센'이라고 부르지만 조금이라도 이상한 낌새가 보이면 하반신의 촉수로 잡아먹는다.

9.6. 애니메이션[편집]


  • 애니메이션 걸즈 앤 판처 최종장에서는 그녀를 모티브로 한 '마리'라는 캐릭터가 등장한다. 자세한 건 BC자유 학원 참조.
  • 애니메이션 오다 시나몬 노부나가의 전생후 이름은 마리 릴리 앙투아네트 라는 닥스훈트로 등장한다.
  • 클래시컬로이드에서 그녀를 모티브로 한 '미하라 마리'라는 캐릭터가 2기 8화에서 등장하는데 이 아이가 등장한 에피소드는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가 마리 앙투아네트에게 프로포즈를 했다는 일화에서 따온 에피소드이다. 모츠는 마리에게 훗날 다시 만날 것을 약속하며 패드 군은 "미하라 마리는 마리 앙투아네트가 아니기에 행복한 삶을 살 것"이라고 말해준다.

9.7. 게임[편집]


  • 게임 대항해시대5에서는 항해사들 중 한 명으로 나온다. SR급 마리, UR급 마리 모두 교역 관련 능력을 가진 항해사이며, 일본에서는 UR급 마리 앙투아네트와의 계약 퀘스트가 있지만 한국에서는 뽑기로만 고용이 가능하다. 원래 세계의 마리는 어린 외모에 밝고 명랑한 성격으로 보이지만, 평형 세계의 UR 마리 앙투아네트는 좀 더 나이든 외모에 좀 더 냉철하고 이지적인 성격으로 보인다.
  • 게임 제5인격에서는 플레이 가능한 감시자로 등장한다.
  • Fate/Grand Order에서 라이더로 참전했다. 마리 앙투아네트(Fate 시리즈) 항목 참조.
  • 오토메 게임 장미에 숨겨진 베리테에서는 조연으로 등장. 주인공 리제가 오스트리아에서부터 섬긴 주인으로, 프랑스로 시집갈 때 만약의 사태에 대비한 보험으로 따라간다. 국경에 도착했을 때 앙투아네트가 고열로 쓰러진 것을 시작으로, 신비한 약을 마시고 마리 앙투아네트 행세를 한다. 나름 리제를 아끼기는 하는데, 자존심이 강한지라 불가피한 상황이라고는 해도 한낱 시녀인 리제가 자신의 대역을 맡았다는 사실 자체를 달갑지 않게 여긴다. 답답한 생활을 싫어하고 자유를 원하고 있으며, 초중반부는 다소 철없게 묘사된다. 리제가 마리 앙투아네트와 엇갈리면서도 끝까지 그녀를 포기하지 못하기 때문에 비중이 상당히 크며, 일각에서는 "진히어로는 앙투아네트"라는 우스갯소리까지 있다. 안타깝게도 루트가 없기 때문에 어떤 루트로 가던지 죽는다. 주인공은 리제이고 그녀의 남편인 루이 16세 역시 공략캐이기 때문에, 루이 16세와는 서로 정말 1도 감정이 없다. 역사상으로 실존하는 자식들도 생략됐다.
  • SRPG 성녀전기에서 주요 인물로 등장. 성녀의 힘을 지니고 있어 처형을 피하게 되었고, 이후 혁명파와 협상을 통해 프랑스를 입헌군주제로 바꾸는데 동의하게 된다. 그녀가 추진한 성녀 발굴 정책으로 인해 주인공인 폴린 보나파르트가 실제 역사와 달리 사관학교에 들어가 장교가 된다. 그러나 작중 흑막의 농간으로 인해 아슬아슬하던 정국이 불안해진다. 결국엔 바렌 사건의 진실이 폭로되어 루이 16세단두대에서 목숨을 잃고, 자식들도 실종된다. 이후 복수심에 흑막과 손을 잡고 쿠데타를 일으키고 푸른 다이아몬드의 힘으로 폴린 일행을 혼란스럽게 하나, 폴린이 새로운 능력에 각성하면서 힘이 무효화된다. 결국 폴린과 결투를 벌이고, 푸른 다이아몬드의 힘을 너무 쓴 부작용으로 사망. 자신은 몰랐지만 딸인 마리 테레즈는 폴린 일행에 의탁해 정체를 숨기고 생존했고, 아들인 루이 17세는 정체를 숨기고 샤를이란 이름으로 살고 있다는 암시가 나온다. 마리의 유품은 폴린을 통해 루이 17세에게 전달된다.
  • 영웅전희 GOLD에서 EU(유럽대륙)의 영웅 중 하나로 나온다. 오만방자하고 유아독존인 성격에 막강한 재물운 덕에 돈쓰기에 별 신경쓰지 않는 등 프랑스 대혁명 때의 편견과 악의적인 선전에 맞춘 듯한 모습이 나오지만, 예법에 가장 충실한 모습을 보면 또 예의바른 실제 모습도 조금 반영된 듯하다. 게임이 지역제압 시뮬레이션이라 전투 유닛으로 운용 가능하지만 1선급 강캐는 아니라 대개는 이벤트만 보고 창고요원이 된다.
  • 타임 프린세스에서는 마리 앙투아네트의 일생을 기반 삼은 스토리 '마리 왕비'의 주인공이자 메인 주인공이 빙의하는 책 속의 등장인물 중 하나로 나온다. 여기에서는 주인공이 선택지를 통해 마리 앙투아네트의 비극적인 최후를 막아 역사를 바꾸어주려고 한다. 다만 이 작품의 빙의 전 마리 앙투아네트는 허영심 많은 악녀로 나온다.

9.8. 영향을 받은 캐릭터[편집]


  • 토이 스토리 1편에서 목이 잘린 여자 인형 둘[80]과 티타임을 한 버즈가 그녀를 마리 앙투아네트와 여동생이라 부른다.
  • 데빌맨에서 아키라와 료가 만나는 과거 인물중 하나. 외로움으로 인해 생긴 마음의 틈을 노리고 데몬이 그녀를 조종하고 있었다는 설정.
  • 클래시컬로이드에서 모차르트의 과거 회상에서 짤막하게 등장하며 원본과 별개로 이 인물을 모티브로 한 현대인으로 마리라는 여자아이가 나온다.
  • 에빌리오스 시리즈의 등장인물 릴리안느 루시펜 도트리슈모티브가 된 인물이다. 그래서인지 릴리안느의 풀 네임에 도트리슈가 들어 있다. 여담으로 소설판 삽화를 그린 이치카는 마리 앙투아네트 인형의 드레스를 생각하며 릴리안느의 드레스를 디자인했다고 한다. 또한 오만의 악마의 이름 마리 아네트의 모티브이기도 하다.
  • 라 세느의 별의 주인공인 시몬느의 배다른 언니로 나온다. 오해로 인해 시몬느를 죽일 뻔했지만 결국 살려준다. 이후 시몬느가 처형 직전에 자신의 자식들을 구해 빼돌려 망명하자 그것을 다행스럽게 생각하며 사망한다.
  • 티어문 제국 이야기 ~단두대에서 시작하는 황녀님의 전생 역전 스토리~의 주인공인 미아 루나 티어문은 혁명의 본보기로서 단두대에서 처형당했다는 것과 빵이 없으면 케이크를 먹으면 되지라는 말을 한 것으로 보아 마리 앙투아네트를 모델로 한 것으로 보인다.

9.9. 베르사유의 장미[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마리 앙투아네트(베르사이유의 장미)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1] 루이 14세의 동생 오를레앙 공작 필리프 1세의 딸이다.[2] 요제프 1세의 딸로 요제프 1세의 동생 카를 6세의 딸이 바로 마리아 테레지아. 마리아 요제파가 작센 선제후 겸 폴란드 국왕인 아우구스트 3세와 결혼하여 낳은 딸이 루이 16세의 어머니 작센의 마리아 요제파이다.[3] 이는 아이를 바꿔치기 하는 것을 막기 위한 조치이기도 했다. 물론 왕족의 출산인 만큼 완전히 '아무나'는 아니고 왕실의 계서제에 따라 입회 권한이 정해져 있었다. 옷을 입을 때도 이러한 계서제에 따라 하녀는 왕비에게 옷을 바로 줄 수 없었고 의전을 맡은 백작부인에게 건넨 뒤 왕비에게 가야 했다. 도중에 그 백작부인보다 더 높은 사람이 들어오면 다시 또 옷을 건네는 식이다. 이렇게 옷이 건네지는 동안 속옷 차림으로 있어야 했기 때문에 앙투아네트는 이를 무척 괴로워했다.[4] 참고로 성씨를 보면 알 수 있듯이, 스페인 왕위계승전쟁 당시 클로드 루이 엑토르 드 빌라르와 방돔의 선배 장군인 루이 드 부플레르 장군(1644-1711)과 같은 가문이다. 여담이지만 이 장군은 빌라르와 방돔에 가려진 능력자로 릴 공성전에서 패했지만 동맹군의 피해를 최대화해서 오죽하면 동맹군 앞에서 항복 조건을 직접 말했고 말플라케 전투에서는 65세의 고령에도 자기보다 어린 빌라르에게 지휘권을 넘기고 빌라르의 부상 이후 기병대를 지휘했다.[5] 원래는 남편의 죽음을 슬퍼하며 검은 상복만을 입고 있었는데, 혁명 정부가 "대중을 흥분시킨다"며 금지했기에 다른 옷을 입었다. 실제로는 가벼운 흰 드레스와 가장 좋은 구두를 신었기에 허름한 옷차림은 아니었다. 그게 왕족의 최후에 어울리는 화려한 옷이나 마지막이 아니었다는 점에서 천대받았다는 사실은 틀림없다.[6] 그러니까 단두대의 칼날과, 그것이 내려오는 모습이 보이도록 했다.[7] 휴거를 다룬 모 영화에서 이 장면이 재현된다.[8] 다만 후대 나치 독일 시절 나치는 실제로 이렇게 사형을 집행했다. 팔바일이라는 독일식으로 소형화된 단두대는 사형수를 수술대 내지 들것처럼 생긴 틀에 벨트로 묶은 후 틀 째로 뉘어서 목을 잘랐다. 나치의 잔인성이 드러나는 부분 중 하나. 단두대 항목 참조.[9] 프랑스의 사치스러운 궁정에 비해 오스트리아 궁정의 검소하고 소박한 분위기 속에서 성장했기 때문으로 보인다.[10] 결혼 전까지는 분명 그랬지만 출산 후 초상화들에서는 21세기 기준으로 꽤나 살집이 있는 편이다.[11] 물론 당시 2개의 후작가로부터 어마어마한 유산을 상속받아 프랑스에서 한 손에 꼽히는 부자가 됐던 라파예트 후작의 뒤모티에 가문의 연수입이 23만 리브르였다는 걸 생각하면, 적은 돈은 아니긴 하다. 현 가치로 환산하면 프티 트리아농의 리모델링 비용이 대략 285억이다. 참고로 트리아농은 트리아농 조약으로 합스부르크 가문이 보유했던 헝가리 왕국이 멸망한 곳이다.[12] 완전히 결점 없는 피부는 아니었고, 뺨에 아주 희미한 곰보 자국이 있었다고. 하지만 당시 이 정도의 흠은 흠이라고 할 수 없었다.[13] 최소 G컵에서 H컵~ M컵에 달하니 매우 크다.[14] 다만 출산 후엔 어느 정도 살이 붙었다. 그래도 당시 귀부인들에 비하면 날씬해 보이는 편이었다.[15] 마리아 테레지아와 프란츠 슈테판은 8촌이지만, 8촌부터는 남으로 보았다는 점에서 근친결혼이라고 할 수는 없다.[16] 진짜 하는 건 아니고 흉내만 냈다.[17] 왜냐하면 당시의 감자는 오늘날의 것과 달리 맛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냥 토란 같은 식물 뿌리를 먹는 기분이라, 프로이센 왕국프리드리히 대왕조차 자기 식사에 감자를 올리는 모범을 몸소 보이고 나서야 백성들이 먹기 시작했다고 한다.[18] 공주는 어린 마음에 꽤 서운했던지 단단히 토라져서 어머니를 원망한 적도 있다고 하지만, 어쨌든 어머니를 존경하고 사랑했다고 한다.[19] 초록 마차는 기각되었고 물품을 빼돌리는 건 들키지 않았으며 장기간 망명길에서 생필품을 챙기는 건 그럴 수도 있는 일이기에 놀랍게도 각종 철없는 행동이 그리 문제되지는 않았다.[20] 직접 작곡하지는 않았으나, 마리 앙투아네트가 작곡한 것으로 추정되는 소품이 하나 있긴 하다. 음악은 오스트리아 대공국에 있던 시절 크리스토프 빌리발트 글루크에게 배웠다. 그 덕택에 글루크는 프랑스에서 활동할 때 마리 앙투아네트에게 후원을 받았다.[21] 어린 시절 오스트리아 궁정에서 연주여행을 다니던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를 직접 만난 적이 있다. 7살의 모차르트가 어른이 되면 동년배인 마리와 결혼하겠다고 다짐했단다. 어린애가 한 얘기라서 왕실 사람들은 모두 웃어 넘겼다고 한다. 이 에피소드는 클래시컬로이드에서도 나온다.[22] 시할아버지 루이 15세가 지은 사냥용 주택을 개조하고, 정원과 연못, 나무, 돌 등 주변 사물까지도 하나하나 배치하였다. 가장 인위적으로 자연스러운 예술품이라는 별명이 있다.[23] 오늘날 부르주아라는 말은 부(富)와 사치의 이미지가 덧붙여진 상류층을 뜻하지만, 그 어원은 중세 작은 도시(bourg)에 거주하며 상업수공업에 종사하던 평민, 즉 사제귀족 다음의 제3신분이었다. 중세까지 이들 계급이 역사에 등장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다만 10세기경 유럽에 자유도시가 생겨나면서 ‘부르주아’라는 말이 이런저런 기록에 얼핏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을 뿐이다. 역사적으로 유럽은 도시와 농촌의 대결이라는 긴장 관계 속에서 발전했는데, 결국 도시가 최종적 승리를 거두었다. 그것은 도시가 가진 부와 행정능력, 도덕성, 특정한 삶의 방식, 혁신적 사고와 행동 덕분이었다. 결국 국가를 구성하는 모든 기능이 도시의 손에서 생겨나고 도시의 손을 거쳐 갔다. 자연스럽게 도시의 주민인 부르주아 계급은 차근차근 부와 지식과 교양을 쌓아가며 계급의 사다리를 오르는 상승 계급이 되었다. 돈과 교양과 여가를 갖고 있던 부르주아 계급은 18세기에 이르러 모든 문학과 학문, 사상을 장악했다. 계몽주의 사상가인 볼테르, 몽테스키외, 장 자크 루소, 드니 디드로 등이 모두 부르주아 계급이다. 한 번도 역사의 주인공인 적이 없었으므로 그들의 사상이 반(反)역사적이 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24] 다른 말로 설명하자면, 부르주아 계층이란 현대적인 표현으로 "시민(市民)계층"이다. '기도하는 자'와 '싸우는 자', '일하는 자'의 세 계급으로 구성된 중세 유럽의 사회상은 기본적으로 농촌을 기반으로 한 것이었다. 기본적으로 기사, 군인이었던 이들이 제 2계급인 귀족으로 영지를 다스리는 실질권력을 행사하고, 지식과 문화권력을 가진 사제들이 제 1계급을 담당하였으며 주로 농민과 같이 실질적인 생산을 담당하는 이들이 제 3계급인 평민으로 이들의 지배 아래 있는 구조였던 것이다. 그런데 막대한 부와 인구, 생산성이 집중된 도시라는 특수한 공간이 나타나 발전하면서 전통적인 1~2계급이 아닌 평민이지만 도시에 집중된 역량을 기반으로 부와 지식을 갖춘 새로운 계층이 나타나 발전하게 되었고, 이들이 바로 성안에 사는 사람, 즉 부르주아라 불리게 된 것. 그리고 중세 이래 전통적으로 유럽의 권력을 가지고 있던 귀족층은 이들 부르주아를 "그래봤자 너희는 평민, 우리의 신하일 뿐이다"라는 관점에서 보았지만 반대로 신흥 부르주아들은 "이제 우리도 너희에게 뒤지지 않는 역량을 갖추었는데, 너희에게 고개숙일 이유가 없다"고 기존의 질서에 불만을 가지고 저항하기 시작했던 것. 이것이 근세 수백년간 유럽을 긴장시킨 기나긴 대립의 단초였고, 결국 여기서 도시와 부르주아가 최종적인 승리를 거둠으로써 '부르주아'는 부와 권력을 가진 상류층의 대명사가 되고, 시민(市民/citizen)은 단순히 도시 거주자가 아닌 정치적 주권을 가진 정치체의 구성원이라는 의미까지 가지게 된 것이다.[25] 프랑스어 원문은 브리오슈[26] 현대 프랑스 파리의 콩코르드 광장[27] 출처 미셸 모런 마담 투소.[28] 비난 여론뿐만이 아니라 당시 프랑스의 경제상황은 상당히 좋지 않았다. 그 이유는 7년 전쟁으로 인한 경제적 피해를 복구하기도 전에 미국이 독립 전쟁을 일으키면서 프랑스가 뭐든 가리지 않고 지원해줬기 때문. 자세한 것은 미국 독립 전쟁 참조. 게다가 프랑스는 이미 루이 14세 때부터 9년 전쟁,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과 같은 계속된 전쟁 인한 재정난에 시달리고 있었다.[29] 마리 앙투아네트의 형제 자매들은 어머니 마리아 테레지아에 의해 대부분이 부르봉 가문정략결혼했다. 그러나 형제 자매들의 결혼 대상은 스페인이나 이탈리아 반도파르마 공국, 나폴리-시칠리아 왕국 등 부르봉 방계이고 부르봉 가문의 본국인 프랑스 왕국으로 시집(장가)간 건 마리 앙투아네트가 유일했다. 게다가 루이 오귀스트(루이 16세)는 프랑스의 왕위 계승자였으니, 가히 마스코트라 할 만하다.[30] L'Autrichienne(로트리시엔)이라는 멸칭으로 불렸는데, 사실 이 단어 자체는 그냥 평범하게 '오스트리아 여자'라는 뜻이다. 하지만 'chienne'이란 단어가 '개(여성형)' 뜻이어서 사람들이 그 부분을 강조해 부르곤 했다고. 대충 '오스트리아 개년' 정도의 뉘앙스가 된다.[31] 제네바는 사보이아 백국 시절 사보이아 가문의 영토였기 때문에 사보이아 가문은 카를로 에마누엘레 1세가 제네바에서 대판 깨진 이후에도 대대로 이곳을 노렸다.[32] 마리 앙투아네트는 결혼 전 로렌 공국의 공작이었던 프란츠 1세의 딸이기도 했다.[33] 일단 루이 16세의 주도로 이루어진 일이지 마리 앙투아네트가 주도한 일이 아니며, 때문에 루이 16세가 반역죄로 처형된 반면 왕비는 무죄판결을 받았긴 했다.[34] 이는 결국 마리아 테레지아 사후 남매간의 관계가 뒤틀리는 결과를 낳는다.[35] 마리아 테레지아는 이전까지 막내딸에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았던 점과 정략결혼으로 딸들을 희생시킨 것에 큰 죄책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막내딸의 미래에 대해서는 다른 딸들보다 불안해하다 결국 마리 앙투아네트를 떠나보내는 날에는 바닥에 쓰러지며 통곡했다.[36] 카드 결제도 빚을 지고 물건을 샀다가 나중에 갚는 외상거래 행위의 일종이지만, 카드값이 밀리거나 하지만 않으면 특별히 문제있는 행위로 보이지는 않는 것과 같은 이치다. 요즘도 그렇지만 당시에도 큰 현금을 가지고 다니는 것은 귀찮은 일이었기 때문에 사회적 지위와 신용이 있는 인물이라면 외상빚을 일단 달아뒀다가 나중에 정산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었다.[37] 도박으로 돈을 따 가며 생활을 유지하는 건 몰락귀족이나 방탕한 파락호, 즉 돈은 없지만 직접 일하기에는 사회적 지위가 다소 높은 사람들이나 하는 짓이었다. 심지어 귀족 출신의 군인들도 봉급만으로는 먹고살 수가 없어서 이런 도박사 노릇으로 생계를 유지하기도 했다. (뒤마의 삼총사나 포레스터의 혼블로워에서 이런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래서 귀족들이 "돈 있는 우리가 도박놀이 하면서 아득바득 돈 따가면 쟤들은 뭐 먹고 살라는 거냐?"는 의미에서 더더욱 돈에 연연하지 않고 도박을 즐기기도 했다.[38] 오히려 소박한 이미지인 남편 루이 16세가 돈을 훨씬 많이 썼다. 루이 16세의 열쇠와 시계 만들기 취미는 당시 기술을 감안한다면 스위스에서 명품 부품 조달해서 고급 기계식 시계 만든다고 하는 것과 비슷한 수준이었다. 단지 개인적인 취미활동이어서 티가 안 났을 뿐이다.[39] 사실 중요한 건 마리 앙투아네트가 대체 얼마를 썼냐는가가 아니라 과연 그녀가 프랑스 혁명을 유발할 정도로 돈을 많이 썼는가인데, 대체로 현대 역사가의 관점에서는 사실 그 정도는 아니라고 본다는 게 핵심이다.[40] 이 소시민의 미덕이 도시 시민계층의 미덕으로 이어지고 또 부르주아지의 미덕으로 이어져 근대~현대 사회의 미덕으로 자리잡은 것이다.[41] 루이 14세마리아 테레지아 등 절대군주들이 베르사유 궁전이나 쇤브룬 같은 어마어마한 건축물을 과시하듯이 지은 것도 군주의 권위를 세우는 상징물 건설 → 왕권 강화 → 세금 더 뽑아내기 → 건축 무한반복… 이런 식이었다.[42] 성전 기사단이 이런 이유로 필리프 4세에게 털렸다.[43] 말하자면 남의 재산을 몰수하기엔 너무 착했고, 배째라고 버틸 만큼 뻔뻔하지도 못했으며, 뒤탈없이 뜯어낼 정도로 요령이 좋지도 못했다.[44] 현대 한국의 정치인들이 기자를 대동하고 시장에서 음식을 사먹는 장면을 보여주는 것과 같은 행동이다. 이런 장면을 연출할 때 정치인 본인이 잘 먹지 못하면 정치적으로 구설수에 오르게 된다.[45] 물론 유럽 사회의 왕실 분위기가 다 이와 같았던 것은 아니다. 루이 14세의 동생 오를레앙 공 필리프의 아내로 팔츠 비텔스바흐 가문 출신인 엘리자베트 샤를로테 같은 경우엔 루이 14세와 오를레앙 공을 비롯한 프랑스 왕실 인사들의 지나친 식탐과 과시적 사치를 에둘러 비판하며 "내 생각에 왕이라면 모름지기 자우어크라우트소시지, 맥주 수프와 같은 영양가 있지만 검소한 식단으로 사람들의 모범이 되어야 할 것 같은데 말이지…" 라는 편지를 쓰기도 했다. 즉, 프랑스에 비하면 비교적 소국이었던 신성 로마 제국 팔츠 선제후국의 정서와 서유럽 최대의 대국이던 프랑스의 정서는 달랐다.[46] 국내의 모 학습만화에선 "만화 베르사이유의 장미에 나오는 착한 앙투아네트는 구라임"이라고 역으로 구라를 쳐버렸다. 이 대사는 루이 14세의 왕비였던 스페인마리아 테레사가 했다는 설이 있다. 그것도 세상 물정을 몰라서 한 말이라기보다는, 굶주린 백성들을 동정해서 '이 없다고? 그럼 어디서 케이크라도 구할 수 없을까?'라는 식으로 대책을 논의하는 말투였다고 한다. 마리아 테레사는 가문의 고질적 근친혼 후유증 탓에 그리 영리한 사람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성품은 선량한 왕비였다는 의견이 사학계에서는 대세이다. 또는 루이 14세의 서출 딸이 한 말이라고 주장하는 쪽도 있다. 어찌되었든 간에, 일단 앙투아네트는 이 말을 한 적이 없으며 정작 이 말을 했다는 원조로 추정되는 여러 일화들도 "바보야, 빵이 없으면 케이크를 먹으면 되잖아?" 라는 투라기 보다는 "빵이 없다고? 그럼 케이크(를 포함한 모든 부류)라도 먹게 할 수 없을까?" 라는 투에 가깝다.[47] 물론 진짜로 죽음으로 몰고 간 건 그녀의 잘못인 바렌 사건이 있다.[48] 정작 앙투아네트는 "다이아몬드가 갖고 싶으면 사주겠다"는 루이 16세의 말에 "지금 우리 왕국은 다이아몬드보다 군함 1척이 더 필요하다"고 개념 넘치는 답변을 했다.[49] 증조할아버지가 사마의이다. 대체 중달의 피는 어디로? [50] '하불식육미'라고 읽는다. 직역하면 '왜 고기죽을 먹지 않는가'[51] 아예 불가능한 얘기는 아니다. 이미 프랑스 혁명 전에 진혜제의 일화가 기록된 자치통감강목이 프랑스어로 번역 출간되었기 때문이다. 일단 당시 프랑스인들이 진혜제의 일화를 접하는 것이 완전히 불가능하지는 않은 상태였다.[52] 다만 친정이 오스트리아라는 점을 고려하면, 친정 가족과 편지를 교환했다는 이유로 스파이라고 보기에는 현대 학자들도 어이없다는 반응이다. 당시 마리 앙투아네트처럼 외국에서 시집 간 왕비들도 친정 가족들과 편지를 교환하고 지냈다. 이국의 땅에 와서 가족이 그리운 것은 남녀 불문하고 당연지사이고 거기다 사적인 내용을 담은 거지, 정치적인 내용이라던가 프랑스에게 위협이 되는 내용은 아무것도 없었다고 한다. "프랑스가 이렇게 되어가니까 조금 불안하다"는 내용 정도는 있었겠지만 이를 가지고 정치적 스파이라고 여기기는 어렵다.[53] 심지어 이미지만 그런 게 아니라서, 결혼 초반에는 진짜로 그랬다.[54] 사실 비슷한 시기 조선도 남자가 이 없으면 애처가 이미지가 아닌 공처가 이미지가 붙어버렸기 때문에, 양반 부인들은 적당한 여자를 첩으로 골라주어야 했다. 자기 손으로 남편에게 첩질을 시켜주는 꼴인데 기분이 좋았을 리는 없지만, 일단 좁게는 남편과 자신의 체면과 명예가 걸린 문제고, 넓게 보면 자신의 친정까지도 가정교육의 부실함을 빌미로 삼아 얼마든지 공격당할 가능성도 있었기 때문이다.[55] 같은 시대 청나라에서도 남자들은 정실인 적복진을 맞이하기 전에 첩인 측복진부터 들여야 했다.[56] 사실 이건 어찌보면 당연한 게, 바로 직전의 왕비였던 마리 레슈친스카폴란드-리투아니아 공주 출신인데 폴란드-리투아니아는 선거군주정이었던지라 일반 귀족가문 출신에다가 친정아버지 스타니스와프 1세는 폐위당한 상황이어서 부르봉 왕가의 종가인 프랑스 왕비로는 다소 처지는 가문 출신이었고, 그 전 왕비였던 마리 테레즈스페인 합스부르크 가문의 누적된 근친결혼의 영향으로 인해 지능에 다소 문제가 있었다.[57] 루이필리프 1세의 외삼촌이었던 루이 알렉상드르(20세에 죽음)의 아내. 즉 외숙모다. 참고로 랑발 공작가는 이 사람과 당주인 루이 드 부르봉이 죽어 1793년 남계가 단절되고, 나머지 재산은 1821년 루이필리프에게 간다. 이후 루이필리프의 아들인 샤를 도를레앙이 랑발 공-팡티에브르 공작 작위를 받지만 8살의 나이로 죽는다.[58] 그런데 이 사람은 사보이아 가문의 방계인데 부르봉 가문 서자 출신인 랑발 공에게 시집왔다. 아이러니하게도 루이필리프의 어머니는 이 사람과 반대로 부르봉 적자 가문인 오를레앙 왕가에 시집갔는데(이 가문이 상당히 유산이 많아 오를레앙 쪽에서 이를 노렸다.) 남편인 루이필리프 2세에게 좋은 대접은 받지 못했다. 뭐, 이 사람의 성욕도 한 몫 했고. 오죽하면 루이 15세까지 이 결혼에 대해 "저놈은 방탕한 놈이야. 그 결혼 다시 고려해 봐."라고 루이필리프 1세의 외조부에게(랑발 대공비의 시아버지)에게 충고했다고 한다.[59] 폴리냐크 백작부인은 프랑스 혁명 당시 마리 앙투아네트의 도움으로 국외로 피신하였으나, 마리 앙투아네트가 사형당한 후 곧 암으로 사망했다.[60] 심지어 이때 볼테르잔 다르크를 대상으로 한 적도 있다. 당연히 금서가 되기도 했지만, 실제로는 대중들이 몰래 구입해 읽어서 베스트셀러였다고 한다.[61] 근데 마리 앙투아네트는 이 사람을 좋게 보지 않았다. 라모트 백작부인 항목의 1.2 참고.[62] 사실 당대의 음란물 산업에서 절대군주와 그 가족들은 거의 예외 없는 희생양이 되었다. 푸가초프 반란을 잔인하게 진압한 예카테리나 2세가 가루가 되도록 까이는 이유도 비슷한 것이었으며, 유명한 예카테리나는 말과 함께 검열삭제하다가 줄이 끊어져 깔려죽었다는 서술 역시, 마리 앙투아네트 근친상간 설과 같은 맥락에서 나왔다.[출처] 요모타 이누히코. 라블레의 아이들: 천재들의 식탁. 씨네21(주). 2009. p145-154[63] 실제 편지 사진이 남아있는데 앙투아네트가 쓰면서 눈물을 흘렸는지 편지에 눈물 자국이 남아있다.[64] 일부는 이 편지가 거짓이라며 앙투아네트는 독일어만 쓸 수 있고 프랑스어라곤 결혼시 배운 몇 마디가 전부라고 주장하지만, 14세에 시집와서 23년을 프랑스 왕비로 살았는데 프랑스어를 못 쓴다는 게 더 말이 안 되는 주장이다. 오히려 앙투아네트는 독일에 있을 때도 독일어보다 프랑스어가 익숙했고, 프랑스에 시집오자마자 그나마 쓰던 독일어도 전부 까먹었다. 왜냐하면 합스부르크 가문은 외국어부터 먼저 가르치고 모국어에 해당하는 독일어를 제일 마지막에 가르쳤기 때문이다.[65] '짐은 그대들을 용서한다. 이후로 아무도 피를 흘리지 않았으면 한다.' 또는 '짐의 피가 프랑스 국민의 행복을 강화할 수 있기를 희망한다.' 였다고도 한다.[66] 당시 혁명 정부에 충성을 서약하지 않은 사제는 활동이 금지되었기 때문에, 마리 앙투아네트는 혁명 정부에 충성하는 신부를 인정하지 않았다.[67] 물론 꼭 그렇지 않은게 부르봉 왕가에 대한 동정심이 강했으며, 마리 앙투아네트와 그 가족의 망명을 요청해서 그들이 살 집까지 마련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프랑스 대혁명 기간중 친불정권이 들어선 건 나폴레옹 집권 이후이다.[68] 이니셜이 M.A.로 동일하다.[69] 비슷한 경우로 만화 베르사유의 장미는 마리 스테반드바이트라는 정체불명의 여류 작가의 이름으로 출판되었고, 유리가면도 넬 베르디라는 국적 불명의 작가가 쓴 소설로 마개조당했다.[70] 루이 15세의 아들이자 왕태자였던 루이 페르디낭의 사생아라는 설정이다.[71] 처형 직전까지 덤벨로 근육단련을 하며, 식사로 프로틴을 섭취한다.[72] 네년의 자식들도 갈기갈기 찢어서 길거리에 전시해주마.[73] 본인 말로는 벤치프레스의 바벨보다 못하다고 했으며 이후 이 단두대 칼날 은 로즈 베르탱의 손을 거쳐 마리 전용 무기가 된다.[74] 체형 변화는 샤를 앙리 상송이 혈을 찔러준 덕분에 가능했다. 다만, 이는 일시적인 현상이며, 시간이 지나면 원래 체형으로 돌아온다.[75] Maëlia Gentil.[76] 실존인물 자체가 오스트리아 출신이었던만큼, 바로 옆나라이지만 사실상 같은 문화권 출신 여배우를 캐스팅함으로써 이런 고증반영을 한 듯 하다.[77] 아예 공식 홍보 SNS계정을 재활용하기까지 했다.[78] 원래 우리 입장에서 봤을 땐 실제 문화재인 곳에서 드라마나 영화 촬영을 하는게 이상해보일 수는 있지만 원래 베르사유 궁전은 관광객이 모이지 않는 매주 화요일날 촬영 허가를 굉장히 잘 내주는 곳으로 유명하다.[79] 그전까지 주인공의 이름은 원래 모국인 오스트리아독일어 이름인 마리아 안토니아로 불렸다.[80] 1편의 빌런격인 시드 필립스가 한 짓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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