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왕(백제)/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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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출생
1.1. 출신 성분
1.1.1. 법왕 서자설(《삼국사기》)
1.1.2. 위덕왕 서자설(《북사》)
1.1.3. 진사왕 후손설(《오우치씨 족보》)
1.1.4. 방계왕족 귀실씨설(문주왕 후손설)
1.1.5. 동성왕 후손설(《삼국유사》 <기이>편)
1.1.6. 고조선 준왕 후손설(《고려사》)
2. 서동 설화
2.1. 서동 설화 신빙성 논란
4. 토목 공사
5. 금마저(익산) 천도 계획
6. 죽음과 유골 발견



1. 출생[편집]



1.1. 출신 성분[편집]


출신이 불확실하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법왕의 아들로 기록되어 있고, 이것이 정설이지만 이 설에 문제가 있다고 보는 학자들이 있다. 위덕왕의 아들이라는 가설이 있기는 하지만 중국 사서인 《북사》의 오기로 인해 생긴 오해로 판단하고 있다.[1] 대체로 금마저(익산) 출신 귀족 출신[2]일 것이라는 시각이 있지만 이 역시도 확실하지 않다.[3] 여러 가지로 보아 신분은 어쨌든 혜왕 내지 법왕 때까지만 해도 무왕의 처지가 중앙 귀족과는 거리가 멀었을 것만은 분명하다.[4]

용의 아들설이라고 《삼국유사》에 나오는 이야기인데 왕이나 왕족을 은유하는 것으로 보인다.


1.1.1. 법왕 서자설(《삼국사기》)[편집]


《삼국사기》의 기록을 신뢰하는 설이며 현재 학계의 정설이다. 다만 법왕의 아들이 맞다는 가정하에 서동 설화를 유추하자면 적자가 아니고 서자 혹은 얼자이거나 양자일 가능성이 높다. 《삼국사기》에 분명히 무왕이 법왕의 아들이라고 기록되어 있기에 서동 설화와 종합해보면 몰락 왕족의 후예 또는 법왕의 서자나 얼자로 익산시 지방에서 태어나[5] 마(麻)를 캐며 살다 왕의 자리에 오른 것이 된다.[6]

당시 상황을 유추해봤을 때, 큰할아버지인 위덕왕의 슬하에 아좌태자(또는 임성태자)가 있었지만 일본에서 돌아오지 못한 데다 그에게 뒤를 이을 아들이 있었는지는 기록이 없고, 할아버지인 혜왕 역시 아버지 법왕과 무왕 본인 말고는 다른 후손이 없었기 때문에 무왕이 왕위를 이었을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

또한 《삼국유사》에는 무왕이 '용의 아들'이라는 설화가 있는데, 보통 동양에서 또는 이 여성과 관계를 맺어 아이를 낳았다라고 할 때의 용이나 범은 왕 혹은 왕족이 암행나왔다는 것을 은유하는 것으로 보기 때문에 이 설에 따르면 용이란 바로 법왕을 뜻하는 것으로 여길 수 있다.

오주연문장전산고와 해동역사는 《만성통보》를 인용해 백제국왕 부여관(夫餘寬) - 무왕(백제) - 의자왕 - 부여융 - 부여문선 순으로 가계를 서술하였다. 관(寬)을 선(宣)의 오기로 볼 경우 법왕의 이름이 오기되어서 전해졌을 수도 있다.


1.1.2. 위덕왕 서자설(《북사》)[편집]


《삼국사기》의 주장과 달리 《북사》에 근거한 위덕왕 아들설도 존재한다. 또 《삼국유사》에도 법왕의 아들이라는 설 외에 금강과부가 검은 용과 정을 통해서 무왕을 얻었다는 설과 무왕이 밖에서 자랐음을 암시하는 대목이 있다. 무왕(장, tiang)이 위덕왕(창, thiang)의 이름과 유사한 것도 무왕이 위덕왕을 계승하려는 의지를 표현했기 때문으로 추정한다. 이는 중국 남북조시대 북조의 사서인 《북사》에 근거하지만 정작 《북사》에는 혜왕과 법왕의 존재가 빠지고, 위덕왕에서 무왕으로 왕통이 바로 넘어간 것으로 나오는 까닭에 왕통이 잘못 기록된 정황이 명백하다.

참고로 SBS 사극 서동요에서도 이 설을 채택했다.


1.1.3. 진사왕 후손설(《오우치씨 족보》)[편집]


위덕왕 아들설과 법왕 아들설 등이 있어서 오랫동안 이견이 분분했지만 1398년 일본 규슈의 영주 오우치 요시히로가 조선 정종에게 자신의 조상이 부여명농의 셋째 아들 부여의조라는 것을 확인해달라고 오우치 씨의 족보[7]를 보내면서 새로운 존재가 알려지게 된다. 진이왕은 백제 16대 진사왕의 아들인 진손왕의 현손이다. 그러나 해당 족보는 직계가 아닌 왕계상 계승을 나타내고 있어서 정말 그가 무왕의 아버지인지는 논란이 많다.


1.1.4. 방계왕족 귀실씨설(문주왕 후손설)[편집]


노중국 계명대학교 교수가 주장한 설로 위의 《삼국유사》 기사 외에도 무왕의 손자인 부여융의 묘지명에 아버지인 의자왕, 할아버지인 무왕의 이름만 있고, 당시 일반적인 귀족 묘지명과 달리 증조부의 이름이 없는 점을 근거로 무왕의 아버지는 왕이 아니었을 것으로 보고, 귀실씨인 귀실복신이 무왕의 조카로 불리며 정치적으로 중요한 인물이었던 점을 들어 무왕도 방계 왕족 귀실씨의 일원이었으나 왕위를 차지하면서 부여씨로 환원했다는 설이다.#
  • 한편, 《신찬성씨록》에 따르면 귀실집사의 후손은 일본에서 우경(右京) 제번(諸蕃)의 백제 출신인 쿠다라노키미(百濟公)씨가 되었다. 그런데 같은 책의 좌경(左京) 제번(諸蕃)의 백제 출신인 쿠다라노키미(百濟公)씨는 조상이 귀실씨가 아니라 문주왕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만약 두 가문이 단순히 거주지만 다르고 서로 같은 집안이었다면, 귀실씨는 문주왕의 후손이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무왕이 본래 귀실씨였다는 가설과 합치면 무왕은 문주왕의 후손이라고 볼 여지가 있다.


1.1.5. 동성왕 후손설(《삼국유사》 <기이>편)[편집]


《삼국사기》에는 '493년 3월 동성왕(東城王)이 신라에 혼인을 요청하니 신라 왕이찬 비지의 딸을 시집보냈다.' '동성왕(東城王)의 이름은 모대(牟大), 마모(摩牟)이다.' 《일본서기》에는 동성왕의 이름으로 '말다(末多)'라는 이명도 나왔다. 《삼국사기》에는 진평왕의 딸이 둘만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서동요>에 나오는 진평왕 셋째딸 설은 일연만 주장하는 여자다. 즉, <서동요>에서 '마동' 혹은 '서동'은 '모대', '마모', '말다'가 이름인 동성왕이고, <서동요>는 동성왕과 신라 이찬 비지의 딸과의 혼인 설화가 가계 전승 및 우상화 차원에서 윤색된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이 있다.

일본서기》와 《삼국사기》를 대조해 볼 때, 명확하게 출자가 차이나는 사람은 문주왕/부여곤지무령왕이다. 문주왕/부여곤지는 《삼국사기》에서는 개로왕의 아들이라고 해놨지만 《일본서기》에서는 개로왕의 동생으로 등장한다.

무령왕은 《삼국사기》에서는 동성왕의 아들로 나오지만 《일본서기》에서는 개로왕 또는 부여곤지의 아들로 명시되어 있다. 《일본서기》 측 기록을 신뢰하고 본다면 개로왕과 부여곤지의 관계가 형제에서 부자 관계로 변경된 것은 무령왕의 생부를 정확히 특정하지 못해서 양자 모두와 직계로 연결시킨 것이라고 볼 수 있으나 동성왕과 무령왕의 관계가 형제/사촌형제에서 부자 관계로 변경된 것은 명확한 사유를 찾기 힘들다. 심지어 부여곤지는 동생이 아들로 위조된 거지만 무령왕은 형이 아들로 위조된 거다. 이에 이들의 관계가 훗날 즉위하는 동성왕의 후손인 무왕에 의해 무령왕의 직계 후손을 동성왕~무왕 사이에 삽입한 것으로 보기도 한다.


1.1.6. 고조선 준왕 후손설(《고려사》)[편집]


시대차가 너무 많이 나기 때문에 현대 학계에선 위의 다른 전승에 비해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아마 준왕남래설 전승이 있던 익산 지역 전설과 무왕의 무덤으로 여겨지는 쌍릉이 익산 지역에 위치해서 생겨났을 가능성이 높다.[8]


2. 서동 설화[편집]


서동 설화의 주인공 서동이 무왕으로 알려져 있다. 이에 따르면 무왕(서동)은 본래 백제 부여씨 왕족의 혈통이지만 가문이 몰락한 방계 왕족으로 어릴 적에 가난하게 살며 를 캐고 살다가 신라에서 아내도 구하고 이후 도 구하며 인심도 얻는 과정을 거친 뒤 백제에서 왕위에 오른다.

위와 같이 흔히 무왕과 서동이 동일 인물로 알려져 있지만 최근에는 서동이 무왕이 아니었다는 설도 제기되고 있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고본(古本. 옛 기록)에는 '무강(武康)'이라 하였으나 잘못된 것이다. 백제에는 무강이 없다."라고 했지만 일본의 여러 문헌에 의해 오히려 무강왕이 무왕과 동일 인물이라는 이야기도 있다.[9]

무왕과 관련된 걸로 서동 설화와 <서동요>가 유명하지만 <서동요>에 나오는 서동이 정말 무왕인지는 불분명하다. 덧붙여서 <서동요>의 일반적인 해석에 따르면 그의 아내는 신라 진평왕의 셋째딸 선화공주이나 이 역시 불분명한 상태다. 이에 대한 상세 내용은 서동요 항목 참조.


2.1. 서동 설화 신빙성 논란[편집]


2015년 미륵사 발굴에서 확인된 바에 따르면 미륵사의 창건자가 무왕의 비인 사택왕후(沙宅王后)로 기록되어 있다. 즉, 무왕에게 익산(금마) 지역의 호족이던 사택(사탁)씨 집안 출신의 왕비가 있었다는 것은 확실하다. 하지만 발굴 결과 확인된 미륵사의 구조가 《삼국유사》의 서동 설화 관련 내용에 등장하는 것과 일치한다는 것이 확인됨으로써 백제 무왕이 신라 김씨 왕족인 선화공주를 아내로 맞아들였다는 설의 신빙성 역시 덩달아 높아진 상황이다.

사실 이 문제는 당시의 국왕들에게 결혼이란 정치적 행동의 일부였고, 따라서 신라 공주 김씨와 결혼했다가 사별한 뒤 호족 사택씨의 딸을 비로 맞아들인다거나 동시에 여러 비를 두는 일이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님을 생각하면 간단하게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즉, 미륵사 발굴에서 확인된 사항 때문에 무왕의 비는 신라 공주 김씨가 아니라 익산 호족 사택씨의 딸이었다고 보는 것은 당시의 결혼 개념을 지나치게 현대적으로 해석하는 오류다. 그냥 왕비가 둘이나 그 이상이었을 가능성도 충분히 있다.[10]

무왕의 능은 충청남도 공주시(웅진)도 아니고 충청남도 부여군(사비)도 아닌 전라북도 익산시 팔봉동 신왕리에 있는 쌍릉으로 추정하는 견해가 유력하나 이 역시 서동 설화와 관련된 논란거리다. 고려 시대에 이미 도굴된 바 있는 쌍릉은 1916년에 일본 학자들에 의해 조사되었는데 그에 따르면 사비 시대의 능산리 고분의 묘제와 일치하고 있음이 밝혀졌다.

무왕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전라북도 익산시 팔봉동 신왕리에서 나온 발굴품들을 2016년에 대한민국 학자들이 재조사해보니 출토된 유골이 20대~40대 사이의 여성이고, 부장품 중에 신라제 토기가 있어 매장자가 신라에서 백제로 건너온 왕족급 여성인 선화공주 김씨가 아니냐는 추정이 새로 나왔으며, 추정을 따르면 사택왕후와 선화공주 김씨가 서로 모순이 없게 된다.기사

하지만 이 주장을 하는 이주헌은 신라 고고학의 고분 연대에 관해 화두인 '황남대총 남분'의 피장자를 왕(마립간)이 아닌 갈문왕에 비정하는 등 학계에 파격적인 설을 주로 전파하여 언론의 관심을 끄는 학자이므로 가려서 들을 필요가 있다. 쌍릉 보고서를 읽어보면 알겠지만 치아 분석 결과는 마모흔 분석에 의해 도출된 결과로 그 한계를 치아 분석 보고자 스스로가 정확하게 지적하고 있다.

그리고 쌍릉은 정식 발굴 조사된 무덤이 아니며, 따라서 그 치아에 대한 고고학적 정황도 담보하지 못하는 상태이다. 일반적으로 자연 과학적 분석 기법은(방사성 탄소 연대 측정, 목륜 연대 측정, 인골의 DNA 측정 등) 고고학적 정황과 부합해야 그 결과가 고고학적 의미를 갖는다. 이는 고고학의 기초 중의 기초이다. 즉, 쌍릉의 치아 분석 결과는 그 측정 방법의 한계와 고고학적 정황의 부재 때문에 크게 취신하지 않아도 된다. 또한 전주 박물관에 가서 보면 알겠지만, 대왕릉 출토 신라 토기는 연질의 '명(그릇)'으로, 이러한 토기로 신라니, 백제니 운운하는 것은 말도 안되며, 실제로 세미나 당시에 토론자 최완규를 비롯하여 많은 학자들의 질타를 받았다.

즉, 현재까지의 고고학적 연구에 의하면, 쌍릉능산리 고분군의 석실분과 같은 구조이면서도, 그 중에서도 현실이 좁아져 관이 1개씩 들어가는 후기 형식의 무덤 2기로 되어 있다. 7세기 말에는 능산리 동하총처럼 사각형이 되는 최후기 형식의 바로 직전 단계에 해당한다. 즉 고분의 고고학적 형식 편년과 무왕의 몰년이 일치하고 있는 점과 능산리에서도 쌍릉과 같은 규모의 무덤은 드물다는 점에서 무왕릉으로 봐도 무방하며, 출토된 목관 장식구들과 장식못들 그리고 목관 자체의 수종이 일본산 '금송'인 점에서 무령왕릉, 능산리 고분군과 일치하는 점도 이를 뒷받침한다.

그러면서도 능산리와 다른 점은 무덤이 산 정상부에 입지하면서도 그 봉분의 규모가 현격히 커졌다는 것이다. 능산리 왕릉군의 봉분이 신라나 고구려와 달리 고대하지 않고, 산록의 남사면에 입지하는 것과는 대조적이다(이러한 입지는 모두 중국 남조의 황제릉의 영향을 받은 입지이다). 이러한 현상은 수나라당나라 황제릉의 영향으로 보인다. 무왕은 대 고구려 견제와 신라에 대한 공격을 인정받기 위해 수나라 및 당나라와 활발한 교류를 전개했으며, 대왕릉 내에서 출토된 옥제 과대장식구도 북조나 수나라에서 유행하던 것이어서 이를 방증한다. 그리고 639년 봉안된 미륵사지 사리장엄구 사리외호와 내호에 찍힌 어자문이나 그 밀집도를 볼 때 수나라 말, 당나라 초의 어자문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것이다. 이처럼 수나라 및 당나라와 무왕의 관계는 문헌사 뿐만 아니라 고고학적으로도 활발한 교류 관계에 있었음이 방증된다.

그러므로 무왕릉의 입지가 산정상부로 변하고, 봉분이 고대해진 것은 수•당의 황제릉, 그 중에서도 635년 사망한 당 고조 이연의 '헌릉'이나 636년 사망한 당 태종 이세민의 황후와 이세민의 합장릉인 '소릉'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볼 수 있다. 그 중에서도 소릉의 영향이 돋보이는데, 당 태종은 황후가 죽으면서 산 자체를 릉으로 삼는 '산릉제'를 처음 창안해낸 황제이기 때문이다. 즉, 익산 쌍릉의 입지 및 봉분 크기의 변화는 당나라 헌릉, 소릉의 영향으로 이렇게 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2018년 7월,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에서 쌍릉 중 대왕릉에서 나온 인골은 사실 60~70대의 건장한 남자 노인 인골이었다는 결과를 발표하고, 이 인골이 사실상 무왕의 유골이라고 주장했다.# 미국에 방사성 탄소연대를 의뢰한 결과, 620~659년 사이에 사망했으며, 키가 161~170cm로 추정돼 풍채가 건장했다는 《삼국사기》의 기록과 부합했다. 하지만 이 남자 노인 유골은 대왕릉이 도굴당한 후에 누군가 투장한 유골이라는 반론도 있었으나, 2018년 이 유골이 무왕의 유골이 맞다고 판명되었다. 자세한 내용은 아래쪽 문단 참고.


3. 전쟁외교[편집]


재위기간 중 신라와 자주 전쟁을 벌였다.[11]

파일:무왕 대의 백제와 신라의 충돌 지점.jpg
무왕 재위 당시 신라와의 전투 지점들. 가장 짙은 색인 남원 운봉은 아막성 전투가 벌어진 지점이다.
600년 법왕의 뒤를 이어 즉위했고, 무왕 3년 관륵(觀勒)을 일본에 파견하여 천문, 지리, 역법(曆法) 등에 대한 서적과 불교를 전달했다.

신라에게 한강을 빼앗기고 관산성 전투 패전 이후, 백제는 오랫동안 신라에 일방적으로 열세에 있었지만, 무왕은 즉위 후 신라에 맹공을 퍼붓기 시작했다. 재위 기간 중 신라의 아막산성(阿莫山城)[12], 가잠성(椵岑城), 늑노현(勒弩縣), 주제성과 신라 북서쪽의 두 성 및 서곡성(西谷城) ·독산성(獨山城) 등을 공격했다.

또한 무왕은 고구려의 남진을 견제하기 위해 수나라에 조공을 바치며 여러번 고구려 공격을 요청했다. 수나라가 멸망하고 당나라가 건국한 뒤에도 중국과 친선 정책을 전개했다.

하지만 당시 왜국과는 의외로 관계가 안 좋았던 걸로 보이는데, 《일본서기스이코 덴노 16년(608) 6월 조에 따르면 수나라에 갔던 왜국의 사절 오노노 이모코(小野臣妹子)가 수양제 양광이 왜왕에게 보내는 국서(返書)를 소지하고 귀국하던 도중에 백제에게 이를 강탈당했다고 한다. 이를 통해 유추해보면 당시 왜국의 대중국 독자 외교에 대해서 이유야 어찌되었든 당시 백제가 굉장히 불쾌하게 생각했던 걸로 보인다.[13] 실제로 《일본서기》에서도 602년 10월에서 615년 사이 약 12년 동안 백제의 외교관계 기록이 보이지 않는데 정확히 무왕의 재위 초기에 해당하는 기간이다. 이를 통해 유추해보면 무왕 초기에 백제와 왜의 관계가 굉장히 안좋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624년 사신을 신흥 통일 왕조 당나라에 보내 당 고조(高祖)로부터 '대방군왕 백제왕(帶方郡王百濟王)'이라는 칭호를 받았다. 627년 군사를 동원하여 신라 침공을 시도했으나, 당태종이 백제와 신라의 화친을 권유했으므로 이를 중지했다.

신라 서쪽 변방에 대한 집요한 공격은 562년 가야 멸망 이후 처음으로 백제의 낙동강 진출로 이어져 신라에 대한 군사적 압박을 한층 가중시켰다.[14] 혜왕 - 법왕으로 이어지는 불안한 정국을 수습하고, 관산성 패전 이후 계속 패배만 했던 것과 달리 신라와 전쟁을 벌여 연전연승함으로서 쇠락해가던 백제가 안정감과 함께 자신감을 찾아갖고, 이에 기존의 소극적인 자세와는 달리 적극적으로 국제 문제에 개입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무왕의 업적으로 인해 백제는 다시 부흥기를 맞게 된다. 그러나 대중외교에서는 중원과 고구려의 사이에서 간보기를 거듭하며 신뢰를 잃었는데 동아시아패자였던 고구려수나라가 충돌했을 때, 무왕은 위덕왕과는 달리 수나라를 돕겠다고 말을 하면서도 정작 군대는 신라로 보낼 뿐이었다. 이런 행보는 당나라가 백제가 아닌 신라와 손을 잡는 계기가 된다.


4. 토목 공사[편집]


이로 인해 외부적으로 백제가 안정되자, 무왕은 내부적으로 강력한 왕권의 존엄을 과시하려는 목적에서 대규모 토목 공사를 단행했다.

629년에 익산의 사찰 미륵사를 완공했다. 미륵사가 왕흥사라는 기록도 있으나 정확한 사실은 알 수 없다.[15]

630년 사비궁(泗沘宮)을 중수했으나 가뭄으로 중지하였고, 634년 왕궁의 남쪽에 인공 호수와 그 안에 인공섬이 조영되었는데 이것이 바로 궁남지였다. 궁남지가 통일신라안압지 모델이 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634년 궁남지를 건설하면서 왕흥사와 같이 언급되지만, 현재 발굴된 부여 왕흥사는 위덕왕 대에 건축된 것이다. 이 왕흥사가 건립되었다는 언급이 위덕왕, 법왕, 무왕의 3명의 왕 항목에서 언급되고 있으나, 익산 등지에 동명이찰의 왕흥사가 건립된 것이 아니라면 왕흥사의 건립자는 위덕왕이다.


5. 금마저(익산) 천도 계획[편집]


백제의 도성 및 궁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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웅진백제
웅진성
공산성


[a] 어떤 성곽이 위례성인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b] 하북위례성 또한 존재만 전할 뿐 정확한 위치가 알려지지 않았다.





百濟武廣王遷都枳慕蜜地 新營精舍 以貞觀十三年次己亥冬十一月 天大雷雨 遂災帝釋精舍...

백제 무광왕(무왕)이 지모밀지(금마저, 오늘날의 익산)로 천도하여 사찰을 경영했는데 그때가 정관 13년[16]

이었다. 때마침 하늘에서 뇌성벽력을 치는 비가 내려 새로 지은 제석정사가 재해를 입어 (후략)

《관세음응험기》[17]

<백제 기사> -제석사 본탑조-.


익산은 무왕의 별도였다.(今益山武王置別都於址) (익산은) 본래 백제의 금마지(金馬只)인데 무강왕(武康王) 때 성을 쌓고는 별도(別都)를 두어 금마저(金馬渚)라고 불렀다.

《대동지지》, 김정호


재위 후반기에 무왕은 전라도 익산 지역을 중시하여 이곳으로 천도할 계획을 세웠다. 실제로 그는 왕궁 평성을 축조했고, 제석사를 창건하기도 했다.[18] 다만 그 이후 어떻게 됐는지는 모른다.[19] 한 가지 확실한 건 익산 지역이 제2의 수도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20] 익산 왕궁리 유적은 완벽한 도성의 형태를 하고 있으며, 실제로 궁성의 기능을 했던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왜 익산으로 천도하려 했는지에 대해 첫째, 고대 왕조가 지배 세력의 교체 차원에서 천도를 단행하던 전례에 비춰보면 무왕이 기존의 사비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본인의 출생지 또는 세력 근거지인 익산으로 천도를 계획했을 가능성이 있다. 둘째 대신라•가야 공격의 전초 기지로서 익산을 활용했다는 의견이 있다. 익산은 수도 사비가 있었던 부여보다 동남쪽인데 이는 한강 유역보다는 경상도인 신라 내지 영역을 공격하기에 더 유리하다. 또한 익산은 지금도 호남고속도로, 호남선이 거치는 교통의 요지인데다 사비(부여)에 비해 평야도 훨씬 넓어서(익산-김제 평야) 전쟁을 위한 후방 보급선 확보에도 유리하다.

그러나 의자왕 대에 익산 천도를 포기한 듯한 느낌을 주는데 의자왕의 등극 과정에서 사비 세력과 타협했을 것이라는 분석이 있다. 일각에선 무왕의 익산 천도가 백제의 지배층 분열의 뿌리가 되어 백제 패망의 요인이 된 것이 아니냐고 보기도 한다.

재위 말기에 사치스러운 연회와 토목 공사가 빈번한 것도 이와 연관되었다는 주장이 있다. 대규모 행사를 계속 진행함으로서 왕권을 과시하고 지배 계층 인사들을 권위로 찍어 누르려는 의도였다는 것이다.

6. 죽음과 유골 발견[편집]


무왕은 641년 음력 3월에 사망했다. 사후 당태종이 '광록대부'를 추증하였고 이에 조문을 하였으며 상복을 입고 곡을 했다.

이후 청룡이 되어 백제를 수호했다는 설화가 있다. 또한 당나라소정방이 백제를 정벌하러 가던 중에 백마강의 청룡이 일으킨 바람에 막혀 건너지 못하게 되자 소정방이 직접 백마의 머리를 미끼로 삼아 청룡을 낚아올렸고, 결국 청룡을 죽인 후 건넜다는 설화가 남아있는데 이곳이 부여 백마강 기슭에 위치한 조룡대(釣龍臺)다.

익산에 있는 쌍릉이 무왕과 무왕 비의 능일거라는 설이 있는데 연구 결과 무왕릉으로 거의 확정되었다. 기사 발굴된 유골이 60-70대 나이에 키가 161-170.1cm의 건장한 남성이라는 것이 가장 큰 근거이다.


KBS 전주 특별기획 - 왕의 귀환
결국 2018년 7월 새로운 연구 결과에 따르면 대왕릉에서 출토된 유골은 젊은 여성이 아니라 60대 이상의 남성이며, 이 유골이 바로 무왕의 유골이라는 발표가 나왔다. 기사에 따르면 2018년 7월 17일 오후 가톨릭대 병원에 고고학, 역사학, 법의학, 유전학, 생화학, 암석학, 임산공학, 물리학 분야의 전문가들이 모여 만장일치로 무왕의 유골이 맞다고 판정을 내렸다. 발굴조사를 주도한 원광대 교수의 제의로 무왕의 뼈앞에 학자들이 모두 고개를 숙여서 예를 표했다고 한다.

유골을 연구한 결과 젊은 시절 낙마로 추정되는 척추 부상을 입었고, 평생 그 후유증에 시달렸을 것으로 추정되었다.[21]

[1] 《북사》에는 혜왕과 법왕의 존재에 대한 서술없이 위덕왕에서 무왕으로 왕위가 이어진 걸로 쓰여져서 무왕이 위덕왕의 아들인 것처럼 기록된 것으로 판단된다. 이는 혜왕과 법왕의 재위기간이 짧았기에 《북사》의 편찬자들이 이들의 존재를 모른채 무왕이 위덕왕의 아들인 것으로 여기고 서술한 것으로 추정된다.[2] 왕족이 아니고 귀족이라 의문을 가질 수 있지만 왕위 계승권과 거리가 먼 방계 왕족들은 분가하여 독립된 가문을 세우는 경우가 세계사를 막론하고 종종 있었다. 물론 왕족이 아닌 귀족으로 신분이 격하되지만 엄연한 왕가의 일원이기 때문에 왕실로부터 견제도 많이 당하고, 왕의 직계 혈통이 단절되면 해당 가문의 적자가 왕위에 오르는 경우도 있었다. 대표적인 사례로 프랑스 왕국부르봉 왕조카페 왕조의 분가였는데, 카페 왕조의 직계가 단절되면서 부르봉 가문이 보위에 오를 수 있었다. 프랑스 대혁명 과정에서 국민공회에 의해 처형당한 루이 16세 처형 판결문의 주문은 "시민 루이 카페를 단두대 형에 처한다."였다. 즉 부르봉 가문 역시 성씨 자체는 '카페'였다.[3] 일부 학자들은 무왕을 위덕왕의 아들이 아닌 왕위 계승과는 거리가 먼 방계 왕족이라는 주장도 제기한다.[4] 밑의 서술된 서동설화도 이러한 배경 때문에 생겨났을 가능성이 크다.[5] 서동 어머니의 집터와 인근에 있었다는 마룡지가 지금도 남아있다.[6] 사실 비현실적이라고 볼 순 없는 것이 당장 조선철종만 하더라도 왕위에 오르기 전에는 형과 함께 강화도에서 농사를 지었었다. 몰락 왕족이라 하더라도 전대의 국왕이 대를 이어줄 왕족이 없다면 양자로 입적되어서 왕위에 오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철종도 항렬상 5촌 당숙뻘인 순조의 양자로 입적되어 임금으로 즉위했다. 고로 헌종의 아버지 효명세자(문조)와는 6촌 형제쯤 되고, 헌종에게는 7촌 재당숙쯤 된다.[7] 오우치씨의 후손은 오우치(大內)씨와 오우치씨 종손 가문의 방계인 토요타(豊田)씨가 현재 존재한다.[8] 진수가 편찬한 삼국지에 의하면 준왕의 왕통은 이미 끊겼고 제사는 지내주고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9] 마한의 왕으로 알려진 무강왕과 시호가 같은 것으로 보아 마한의 무강왕으로 보는 경우도 있다. 참고로 마한의 무강왕은 고조선의 왕 준왕이라는 설도 존재. 그리고 선대의 무령왕일 수도 있다. '녕(寧)'과 '강(康)'의 뜻이 같기 때문이다.[10] 그러나 만약 이게 사실이라면 백제는 관산성 전투성왕이 참수되고, 뒤이어 신라와 그야말로 원수와 같은 관계였는데 일개 지방 호족인 사람이 신라 땅에 넘어가 공주를 아내로 맞이하고 다시 백제로 돌아왔다는 이야기가 된다.[11] 때문에 신채호는 《조선상고사》에서 이를 백제와 신라 간의 왕위 계승 전쟁으로 해석하기도 했다. 선화공주가 신라내의 권력다툼에서 패해서 백제로 온 것이라 가정하면 선화공주가 신라에 적개심을 가지고 있었다고 충분히 설명가능하다. 당장에 기록상으로 신라의 왕자 출신이면서도 쫓겨난 탓에 신라에 엄청난 적대감을 가진 인물이 역사상 실제로 존재한다.[12] 모산성(母山城), 아영성(阿英城)이라고도 불린다.[13] 노중국 교수도 당시 백제의 국서 강탈 사건을 왜국의 독자적인 대중국 외교정책에 대한 백제측의 불만으로 일어난 사건이었다고 평가했다. 노중국 교수의 설명에 따르면 593년부터 603년까지 왜와 백제는 긴밀한 관계를 추구했으나. 603년 이후 614년 사이에(실제로 《일본서기》에서도 602년 10월에서 615년 사이에 약 12년 동안 백제의 외교관계 기록이 보이지 않는다.) 변화가 나타난다는 점, 당시 성덕(쇼토쿠)태자의 관위와 헌법(憲法) 시행과 조례(朝禮) 개정 등의 일련의 개혁 정책, 607년 수나라에 전해진 왜왕의 국서에 ‘日出處天子’라고 했듯이 왜국이 독자성을 강조한 점 등을 지적하면서, 국서 탈취 사건은 왜가 선진문물을 직접 받아들이기 위해 대수 접근을 적극적으로 시도하고, 이에 수나라도 사신을 파견하는 등 호응하는 상황에서 이를 탐탁치 않게 생각한 백제가 양국의 관계를 파악하기 위한 의도에서 일어난 사건이었다고 평가했다.[14] 이는 의자왕의 대야성 공격으로 이어지게 되며, 결국 신라가 당과 더 긴밀해지는 단초를 제공했다.[15] 위덕왕 대에 세워진 것으로 밝혀진 부여 왕흥사와 동명이찰이 익산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면 무왕 대에 지어진 왕흥사는 미륵사를 언급한 표현일 가능성이 높다. 백제 국왕의 원찰을 왕흥사라고 표현했을 수도 있다.[16] 639년, 무왕 40년.[17] 해당 서적은 익산 왕궁리 석탑에서 출토된 세 가지 유물을 정확히 맞추었다. "정관 13년 기해 11월, 제석정사의 화재로 법당과 탑 등이 모두 타 버렸으나, 탑의 심초에 들어있던 금판경과 사리함 등만은 타지 않았고, 그것을 다시 절에 봉안했다."[18] 다만 제석사는 창건 후 100년도 채 지나지 않아 벼락을 맞고 완전히 불타버렸다.[19] 익산의 왕성은 유적상 분명히 존재했다. 하지만 《삼국사기》에는 기록이 없다.[20] 전 수도인 웅진성 - 현 수도 사비성 - 별도 금마저 이 세 도시가 후기 백제의 수도 역할을 수행했을 것이다.[21] 같은 왕이자 베네딕트 컴버배치의 조상으로 유명한 잉글랜드 왕국의 왕 리처드 3세의 경우도 심한 척추측만증에 시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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