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이코 덴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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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일본의 제33대 천황. 휘는 누카타베(額田部).
제26대 케이타이 덴노로부터 이어지는 일본 황실 최초의 여왕(女王)이자 후세에 여제(女帝)로 추존되는 인물이며, 논란의 여지가 없는 동아시아 최초의 여성 군주이다.[1][2]
2. 행적[편집]
이복오빠 비다츠 덴노(30대)와 혼인해서 2남 3녀를 낳았으며, 비다츠 덴노의 첫 번째 아내가 죽은 뒤 576년에 황후가 되어, '오오키사키'(王后, 왕후)라고 불리었다. 32세가 된 585년에 스이코 덴노는 남편 비다츠 덴노와 사별했다.
요메이 덴노의 사후, 황위 계승 분쟁 즉 데이비(정미)의 난이 발발하여 스슌 덴노가 즉위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스이코 덴노의 외삼촌인 소가노 우마코가 그를 암살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그러자 모두가 소가씨를 두려워하여 누구도 황위에 오르려고 하지 않았다. 그래서 소가씨는 즉위에 적당한 남성이 없으면 황후가 정치에 나설 수 있다는 것을 이용해 누카타베 태후를 즉위시키기로 했다.[3] 그렇게 소가씨는 아스카의 도유라궁에서 누카타베 태후를 대왕(오오키미)으로 즉위시켰다.
《일본서기》의 기록본에 의하면, 스이코 덴노는 즉위하고 다음해에 요메이 덴노의 장남인 쇼토쿠 태자를 섭정으로 내세워 정치를 모두 다 맡겼다고 한다. 하지만 실제 정치의 주도권은 소가노 우마코가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스이코 덴노의 시대가 소가 가문의 전성기였다고 평가되고 있다. 대체로 쇼토쿠 태자와 스이코 덴노의 외삼촌인 소가노 우마코의 협력 정치라고 보는 것이 통설이다.
603년에 처음으로 관위 12계 제도가 시행되었고, 604년에는 관인들의 복무규정 성격이 강한 헌법 17조를 반포했다. 또한 607년 중국의 통일제국인 수나라와 통교하여 5세기 말 이래 단절되어 있었던 중국과의 외교관계를 재개했다.
하지만 《일본서기》 스이코 덴노 16년(608) 6월 조에 따르면 수나라에 갔던 왜국의 사절인 오노노 이모코가 수양제가 왜왕(倭王)에게 보내는 국서(返書)를 소지하고 귀국하던 도중에 백제에게 이를 강탈당했다고 되어 있다. [4]소야신매자가 당나라에서 보낸 국서를 백제인에게 탈취당함 그러나 이것은 소야신매자가 국서를 일부러 분실했다고
노중국 교수의 설명에 따르면 593년부터 603년까지 왜(야마토)와 백제는 긴밀한 관계였다. 하지만 603년 이후 614년까지의 11년 동안 두 나라의 외교관계에 대한 기록은 일체 없다. 양국의 교류가 뜸해진 이유로는 당시 쇼토쿠 태자의 관위 12계와 헌법 17조 시행 및 조례(朝禮) 개정 등의 일련의 개혁 정책, 607년 수나라에 전해진 왜왕의 국서에 ‘日出處天子’라고 했듯 왜가 독자성을 강조한 점 등을 지적한다. 왜가 선진문물을 직접 받아들이기 위해 대수 외교를 적극적으로 시도하고, 수나라도 왜에 사신을 파견하자 백제가 양국의 관계를 파악하기 위해서 벌인 사건으로 보인다.
이유야 어쨌든 백제의 외교문서 강탈 사건은 영락없는 외교적 횡포였기 때문에 614년까지 양국의 외교는 단절되었다가 재개된다.
이후 620년에는 《천황기》(천황의 기록), 《국기》(국가의 기록) 등의 국사 편찬이 이루어졌다.
앞에서 설명한 '백제의 국서 강탈 사건'과는 별개로 백제의 선진 문물들은 계속 받아들였는데 《부상략기》(扶桑略記)[5] 라는 일본 고대 왕조사(王朝史)에
는 대목이 나오기 때문이다."스이코 여왕과 만조백관들이 '백제옷'을 입었으며 구경하는 사람들이 기뻐했다"
불교가 본격적으로 융성해지기 시작해서 호류지, 아스카 지, 이카루가지 등의 사찰 건축이 이루어지는 등 아스카 문화가 꽃을 피운 시기였다.
621년 (스이코 29년조 기사), 신라에서 나마(奈末) 이미바이(伊彌買)를 왜에 파견해 교섭관계를 가졌다. 같은 맥락에서 신라에서도 같은 해 (진평왕 43년 기사) 왜전(倭典)을 영객전(領客典)으로 고쳤다는 기록이 나온다.[6] 6세기 후반 소가(蘇我)씨가 집권한 이후로는 신라와 왜국 사이의 교류가 단절되다시피했는데, 621년에 이르게 되면 양국간 외교 라인이 회복된 것으로 짐작된다.[7]
스이코 덴노는 628년 3월, 75세의 나이로 붕어했다. 먼저 죽은 아들 다케다 황자의 무덤에 합장되었다가 훗날 가와치의 시나가노야마다능으로 옮겨졌다.
3. 가계[편집]
- 아버지: 긴메이 덴노
- 어머니: 기타시히메(堅塩媛) - 소가노 이나메(蘇我稲目)의 딸.
- 남편: 이복 오빠 비다츠 덴노(敏達天皇)
- 1황녀: 토미치카이타코(菟道貝蛸)
- 1황자: 타케타(竹田)
- 2황녀: 오하리다(小墾田)
- 2황자: 오와리(尾張)
- 3황녀: 타메(田眼)
[1] 스이코 덴노 이전의 동아시아 여성 군주로는 야마타이국의 히미코와 토요, 북위의 원고낭, 동여국의 소비말갈이 있지만 다 논란의 여지가 있다. 야마타이국 여왕인 히미코와 토요는 외국 기록인 《삼국지》와 《삼국사기》에만 등장하며 일본 국내 기록과 공식적 왕계에는 없는 사람이기 때문에 훗날의 일본 황실과 혈통적으로 어떤 관계에 있었는지 알 수 없고, 원시적 부족국가의 씨족장에 가깝다고 추정된다. 북위의 원고낭은 여제로 인정할 것인지에 대한 논란이 있다. 동여국이 위치했던 티베트는 중국과는 다른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2] 스이코 덴노의 재위 기간은 신라 선덕여왕의 아버지인 진평왕과 겹친다. 그래서인지 왜국에서 여왕이 즉위했다는 소식을 들은 진평왕이 안 그래도 적장자가 없는 상황에서 딸을 후계자로 삼는 데 참고했다는 설도 있다.(《쟁점 한국사》 <전근대> 편 p.64) 물론 이 당시 진평왕은 어차피 낮은 진골 신분인 사위 김용춘이나 딸 덕만 둘 중에서 후계자를 선택해야 하는 상황에 몰려있었기 때문에 왜국을 마냥 따라했다기보다는 참고했을 가능성이 있다 정도다.[3] 이는 누카타베 태후의 어머니인 소가노 기타시히메가 소가노 우마코의 이복 여동생이었기 때문이다.(즉, 누카타베 태후의 입장에서 소가노 우마코는 외삼촌이 된다)[4] 원문에는 강탈이 아니라 '약취'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를 두고 일본에선 이런 백제 측의 외교적 결례와 횡포에 당한 것을 부끄럽게 여겼는지, 백제가 가져간 게 아니라 훔쳤다고 우겼다. 그러나 사마천의 《사기》 <진시황본기>를 보면 '약취'라는 용례는 '힘과 권위로 빼앗다'라는 뜻으로 사용되고 있다. 또한 원문에서 일본의 신료가 오노노 이모코를 꾸짖으면서 ‘죽음을 무릅쓰고 국서를 지켰어야 했다’, ‘백제인이 ’찾아내서‘ 빼앗았다라고 기록 되어있는걸 봐선 도둑질 당했다는 일본의 해석은 장단취의이다.[5] 11세기 무렵에 편찬되었다고 보지만, 14세기에 편찬되었다는 설도 있다.[6] 《삼국사기》 권 제38, <잡지> 제7 -직관지- 상(上) '영객부'[7] 주보돈, 2018, 《김춘추와 그의 사람들》, p.251-p.2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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