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계 아르헨티나인

덤프버전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 펼치기 · 접기 ]
상징
국가
역사
역사 전반 · 포클랜드 전쟁아르헨티나 연합국
정치·치안·사법
정치 전반 · 아르헨티나 대통령 · 행정구역
외교
외교 전반 · 아르헨티나 공화국 여권 · 이베로-아메리카 공동체 · TIAR
경제
경제 전반 · 아르헨티나 페소 · G20 · 아우스트랄
국방
아르헨티나군 · 아르헨티나 해군
교통
미니스트로 피스타리니 국제공항 · 부에노스아이레스 지하철 · 철도 환경
문화
문화 전반 · 탱고 · 가우초 · 요리 · 축구 국가대표팀 · 포도주 · 스페인어 · 야간어
인물
호세 데 산 마르틴 · 마누엘 벨그라노 · 에바 페론 · 후안 페론 ·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 체 게바라 · 마리오 켐페스 · 디에고 마라도나 · 가브리엘 바티스투타 · 리오넬 메시
지리
부에노스아이레스 · 파타고니아 · 팜파스 · 티에라델푸에고
민족
아르헨티나인(스페인계 아르헨티나인 · 이탈리아계 아르헨티나인 · 프랑스계 아르헨티나인 · 독일계 아르헨티나인 · 폴란드계 아르헨티나인 · 아일랜드계 아르헨티나인 · 러시아계 아르헨티나인 · 우크라이나계 아르헨티나인 · 크로아티아계 아르헨티나인 · 그리스계 아르헨티나인 · 헝가리계 아르헨티나인 · 포르투갈계 아르헨티나인 · 슬로베니아계 아르헨티나인 · 오스트리아계 아르헨티나인 · 스위스계 아르헨티나인 · 아랍계 아르헨티나인 · 아르헨티나 유대인 · 일본계 아르헨티나인 · 한국계 아르헨티나인 · 네덜란드계 아르헨티나인 · 덴마크계 아르헨티나인) 아르헨티나계 미국인



파일:러시아계 아르헨티나인.jpg


1. 개요
2. 이민사
3. 관련 문서



1. 개요[편집]


러시아계 아르헨티나인들은 아르헨티나인 중 러시아계 조상을 둔 경우를 의미한다. 오늘날 아르헨티나인 중 약 25~35만 명 정도가 러시아 출신 이민자들의 혈통을 물려받은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러시아에서 아르헨티나로의 이민은 상술한 1881년 키시너우 포그롬부터 러시아 혁명 이후 1921년 사이에 집중되었다. 1990년대 소련 해체 이후 러시아에서 아르헨티나로 이민한 경우는 비교적 소수인데, 20세기 말 무렵 아르헨티나의 상황도 옐친의 러시아 수준으로 시원찮았기 때문이다..


2. 이민사[편집]


아르헨티나로의 러시아인의 이동은 시기와 이민 배경을 바탕으로 5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후술하는 2가지 이민 케이스가 동슬라브 계통의 러시아인 이민이며 이민 비중도 크지 않다. 러시아에서 아르헨티나로 이민한 사람들은 주로 볼가 독일인 계통과 유대인, 폴란드인들이다. 아르헨티나로 이민 온 유대인들은 대개 우크라이나나 벨라루스, 혹은 폴란드 동부 출신이 많았지만 입국 당시 러시아 제국 여권을 들고 왔기 때문에 스페인어로 러시아인을 의미하는 Ruso, Rusa로 불리곤 했다. 유사 사례로 레바논이나 시리아 일대에서 아르헨티나나 브라질로 이민 온 아랍계 기독교인들 역시 오스만 제국 여권을 들고 왔다는 이유로, Turco(튀르키예인)라고 불리곤 했다. 비교하자면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반 오스만 제국 여권을 들고 아르헨티나에 입국한 사람들 중 튀르키예인은 극소수이고 절반 가까이가 레바논시리아 일대의 아랍계 기독교인이었던 것과 같은 맥락에서, 정교회를 믿고 러시아어를 모어로 사용하는 일반적인 러시아인이 아르헨티나로 이주하는 경우는 흔하지는 않았다.

  • 첫 번째 대량 이민(독일인 이민) : 1874년 러시아 제국은 자국 내 볼가 독일인들에게 면제되었던 병역을 부과하였다. 볼가 독일인들은 원래 프로이센 동부 영토에 거주하던 재침례파들로, 프로이센에서 병역을 이행하지 않은 남성이 토지를 구입하는 것을 막는 법을 제정하는 바람에 빈곤 문제에 시달리다가 18세기 말 예카테리나 대제가 "군대 안 가도 되니까 우리나라의 비옥한 풀밭들 좀 개간해주렴"이라고 초청한 케이스였다. 수십년에 걸쳐 기껏 볼가 강을 옥토로 바꾸어놓으니까 말을 바꾸고 병역을 이행하라고 요구하는데, 문제는 이 병역 요구가 우리나라의 여증처럼 1~2년 감옥 가서 끝나는 그런 것이 아니라 보병 기준 25년짜리 그러니까 가족하고 생이별을 시키는 형태의 요구였다. 굳이 재침례파가 아니더라도 가톨릭을 믿는 독일인 농부들도 여기에 반감을 품었고, 초청 당시 약속과는 다른 병역 부과를 당연히 받아들일 수 없었던 독일계 러시아인 상당수는 미국과 캐나다, 브라질 그리고 아르헨티나로 이민을 결정하였다.

  • 두 번째 대량 이민(유대인 이민) :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반 러시아 제국 영내 그중에서도 특히 오늘날 우크라이나와 몰도바, 폴란드와 벨라루스 일대는 근대 기준 유대인 인구가 가장 밀집해있던 지역으로서, 이런저런 이유로 포그롬이라 불리는 형태의 반유대주의 폭동이 빈발하였다. 특히 1881년 키시너우에서 일어난 포그롬을 계기로 러시아 제국 각지의 유대인들이 아메리카 대륙 각지로 이주하기 시작했는데, 이들 중에는 아르헨티나로 이민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1889년에는 러시아 제국 출신 유대인 824명이 아르헨티나로 이주하여 가우초로 일하기 시작한 것을 계기로, 1906년부터 1912년까지 매년 1만여 명이 넘는 동유럽 유대인(아슈케나짐)들이 아르헨티나로 이주하였다.

  • 세 번째 대량 이민(폴란드인 이민) : 18세기 말 폴란드 분할의 결과 러시아 제국 서부에는 상당수의 폴란드계 러시아인 인구를 포함하고 있었는데, 러시아와 아르헨티나 사이에 이주노동자 관련 조약이 비준되면서 이를 이용하여 러시아 내 폴란드인 인구 상당수가 아르헨티나로 이민하였다. 가톨릭을 믿는 폴란드인들 입장에서는 임금 수준도 높으면서 가톨릭 국가인 아르헨티나가 매력적인 이민 목적지 중에 하나였던 것이다. 1905년 이후 1차대전 시대까지 아르헨티나로 오는 이민자 국적 비중 중 세 번째로 높은 것이 러시아 제국이었는데 이는 러시아 제국에서 아르헨티나로 이주해오는 폴란드인 인구가 어마무시하게 많았기 때문이었다.

  • 네 번째 이민(반공 이민) : 1917년 러시아 혁명 전후하여 러시아 백군 난민들이 유럽과 아시아 각지를 떠돌게 되는데 이들 중 일부는 1920년대~1930년대에는 아르헨티나로 이주하기도 했다. 물론 아르헨티나에 영구 정착한 사람보다는 아르헨티나에서 체류하다가 미국으로 재이민한 경우도 많았다고 전해진다.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의 사례에서 보듯 러시아인 귀족들은 어렸을 때부터 영어/프랑스어를 배우는 경우가 많았고, 러시아인 반공 난민들 입장에서는 러시아에서 생소했던 스페인어를 사용하던 아르헨티나보다는 미국이나 캐나다가 훨씬 더 매력적인 이민 목적지였다.

  • 다섯 번째 이민 : 소련 해체 이후로 러시아인들의 해외 이주 및 교류가 자유로워지면서 러시아인이 아르헨티나에 정착한 케이스이다.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러시아 부유층 사이에서 아르헨티나 원정 출산 붐이 일고 있다.#

3. 관련 문서[편집]


  • 아르헨티나인
  • 러시아계 미국인
  • 러시아계 브라질인
  • 벨라루스계 아르헨티나인[참고]
  • 우크라이나계 아르헨티나인[참고]
  • 러시아-아르헨티나 관계


파일: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__CC.pn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2023-11-25 09:29:37에 나무위키 러시아계 아르헨티나인 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

[참고] A B 러시아 제국에서 이주해온 경우보다 폴란드 제2공화국에서 이주해온 경우가 훨씬 많았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