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지완/선수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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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아마추어 시절
3. 프로 경력
4. 은퇴
5. 연도별 주요 성적



1. 개요[편집]


나지완의 선수 경력을 정리한 문서.


2. 아마추어 시절[편집]


신일중학교 재학중이던 1999년 소년체전, 잠신중 좌완투수 이용규로부터[1] 사구를 맞아 팔꿈치에 깁스를 해야 하는 큰 부상임에도 불구하고 홈런을 쳤으며, 같은 날 투수로 승리를 따내기도 했다. 관련기사 중학교 시절에 국대에도 뽑히며 여러차례 신일중학교를 우승시켰고 전국 에이스급으로 취급받았다.

참고로 전설의 타이거즈, 스톡킹에 출연해 신일중 시절 투수로 활동하게 된 이야기를 풀었다. 중학교 2학년 시절 전국대회 결승전에서 휘문중학교 야구부[2]와 대결하던 중 9회에 다 이긴 게임을 당시 3루수였던 본인의 송구 실책으로 인해 동점이 된 걸 계기로 통한의 역전패를 당하면서 큰 트라우마에 시달렸고[3], 중3 시절 입스가 와서 공을 제대로 못던지는 지경에 이르렀다고 한다. 그래서 주변의 권유를 받아 투수로 전향을 했는데, 그 시기에 키가 180cm로 크고 근육도 붙으면서 구속 및 제구력이 괜찮게 나와 공식 대회에서 18승을 거두는 등 에이스 대접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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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일고 시절

신일고로 진학해 1학년 시절은 투수로 활동했는데, 중학교 때 공을 많이 던전 여파로 부상이 와 어깨 수술 및 재활을 하는 바람에 두드러진 활약은 별로 없었다. 고2 때 부상 복귀 후 몇 게임 투수로 출전하다 감독의 제안을 받아 외야수로 완전 전업하여[4] 마운드에 서지 않았다.이때 어깨를 다치지 않았다면 유희관이 됐겠지 신일고 3학년 때 4번 타자로 3번을 치던 임훈과 함께 팀을 황금사자기 우승으로 이끌었으나 프로 스카우터들에게 뚜렷한 인상을 심지 못해 지명을 받지 못했다. 고등학교 통산 타자로 16경기에 출장해 6홈런을 기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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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국대 시절[5]

단국대[6]로 진학한 후에도 특별한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으나 점차 성장, 2,3학년에 OPS 10할을 넘겼고, 3학년엔 10홈런, 4학년에는 타율 0.388 11홈런[7] 32타점 출루율 0.519 장타율 0.796 OPS 1.315라는 무시무시한 성적으로 대학 리그를 초토화[8]시키고 2차 1순위 지명을 받아 KIA 타이거즈에 입단했다.

참고로 대학리그 통산 성적은 82경기 254타수 81안타 타율 .319 23홈런 65타점 0도루 79볼넷 35삼진.[9] 장타력뿐만 아니라 선구안도 무시무시했다. 특히 4학년 때는 28볼넷 7삼진이라는 심판급 선구안을 보여줬다.

프로야구에 FA제도 도입 이후 대학 졸업 후 프로에 뛰어들게 되면 고졸에 비해 FA 취득까지 걸리는 시간이 길어지게 되어, 2000년대 이후 재능있는 선수들은 대학진학보다 고등학교를 나와 바로 프로로 가는 것을 선호하게 되어 점점 대학야구에서 좋은 인재가 말라가는 상황이고 2020년 현재는 거의 한국 대학야구는 고등학교 때 지명 못받은 선수들의 패자부활전 같은 개념으로 거의 고사직전에 처해 있는데, 그런 대학야구 출신 강타자가 프로에서도 정상급 선수로 활약한 마지막 사례다. 나지완 이후 대학리그 출신으로 강타자라 부를만한 선수는 5년 후배인 나성범 딱 한 명. 그나마 나성범도 대학야구에서 키워냈다기보다는, 본래 나름 중상위순번에 지명된 선수가 부모의 권유로 대학에 간 것이라 실질적으로 대학야구 팜에서 길러낸 마지막 강타자. 전준우도 있지만, 전준우 역시 고등학교 졸업 후 드래프트에서 지명을 받았지만, 이를 거부하고 대학을 진학한 케이스라..


3. 프로 경력[편집]



3.1. 2008 시즌[편집]


최희섭스프링캠프에서 두통을 호소하며 컨디션 난조를 보이자 KIA 타이거즈에서 신인으로는 최초로 2008년 프로야구 개막전 4번 타자로 합류했지만, 프로의 벽을 넘지 못하고 폭풍 삼진을 당하며 주전 자리 확보에 실패했다.[10] #1 #2 #3 나지완 "부담 가질 시기는 지났다" 하지만 후반기에 복귀, 나름대로 맹타를 휘두르며 0.295 6홈런으로 시즌을 마감했다.

3.2. 2009 시즌[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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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나지완/선수 경력/2009년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자~ 왼쪽~~~! (이순철: 넘어갔어요.) 끝내기!! 기아 타이거즈 우승! 나지완이 해결사였습니다! 12년 만에 기아 타이거즈가 우승을 차지합니다!"

2009년 한국시리즈 7차전 9회말 끝내기 홈런 직후 한명재 당시 MBC ESPN 캐스터



3.3. 2010 시즌[편집]


개막전부터, 아니 시범경기부터 폭풍 삼진과 병살타로 폭풍처럼 까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3월 31일, 결정적인 2점 역전 홈런으로 팀의 3연패를 끊었다. 혹자는 함평 거부포라고... 그야말로 작년과 똑같은 패턴이다. 폭풍 삼진과 병살타를 계속 기록하며 팬들의 인내심이 한계에 들어설 즈음 함평 거부포를 터트리며 1군 생명 연장. 그 이후 타율이 바닥을 기면서 또 다시 함평 열풍.

그러더니 5월 6일, 또 다시 2점 함평 거부포. 그냥 이게 나지완의 색인듯.. 했으나 결국 KIA 팬들의 염원(?)대로 5월 20일자로 함평행.생일 선물로 함평 나비축제 입장권을 얻은 셈 5월 30일 함평가서 각성했는지 3타수 2안타 2타점을 기록했다. 하지만 최근 들어 지명타자로 출전하는 주제에 배트에 공을 제대로 갖다 맞추지 못하며 심각한 타격부진을 보이고 있다.

7월 4일 현재 타율 .219에 8홈런 30타점을 기록중. 팀이 15연패에 빠진 동안 최희섭을 대신해서 4번 타자에 기용되고 있지만 고비마다 병살로 팀의 연패를 늘리는데 공헌하고 있는중이다. 자신의 개인 스탯 및 팀 성적이 바닥을 기면서 조범현 감독과 함께 욕을 엄청 먹고 있는중.
8월 24일 4위 롯데전에서 홈런 두 방을 포함, 5타점을 올리며 맹활약하여 팀에 7-5 역전승을 이끈다. 역시나 생명연장엔 나비를 따라 올 자가 없다. 그 와중에 2년 연속 두자릿수 홈런은 달성했다. 뭐 그래도 파워는 살아 있으니 뜯어고친다면야.

디시인사이드에서 가장 욕을 먹는 선수로 일단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나지완은 까야 한다는 게 진리로 내려오고 있다. 그래도 2010 시즌에는 손영민유동훈, 안치홍이라는 걸출한 라이벌들의 등장으로 2009년에 비하면 덜 까이는 중은 무슨. 저들을 모두 밟고 디시 갸갤에서 가장 많은 욕을 쳐먹고 있다. 8월 5일 LG와의 경기에선 이순철 해설에게 노골적으로 까였다. 8월 6일 두산과의 경기에서는 괜히 얼쩡거렸다가 주심에게 경고 먹고 경기 흐름을 끊었다. 김선빈이 3루타를 친 상황에서 이 덜 떨어진 행동으로 찬스를 말아먹었다. 거기다 대타로 나왔는데 2안타 2도루를 한 신종길이 빠져야 했기에 욕이란 욕은 다먹었다. 최희섭처럼 선구안이 좋은 것도 아니고, 김상현처럼 노림수에 강해서 공격적인 타격을 하는 것도 아니고 하니 그야말로 기아 팬들은 속이 타들어갈 지경. 도대체 뭐 때문에 1군에 붙어 있는지 2010년 최고의 미스테리 중 하나다. 일설에는 본명이 나지완이 아니라 조지완이라고도 한다.

여담으로 KIA 타이거즈 갤러리에선 나지완을 깔 때마다 가끔씩 채병용도 같이 까는 경향이 있다. 이유인 즉 왜 이런 놈한테 끝내기 홈런을 맞아서 영웅으로 만들어 줬냐며.

당초 2010 시즌을 마치고 군대에 입대하기로 하였으나 조범현 감독의 부탁으로 인해 군대를 1년 미루고 팀에 남기로 했다.


3.4. 2011 시즌[편집]


나로또에게 별 기대를 하지 않았던 터였지만, 경기가 갈수록 좋은 모습을 보여주었다. 4월 8일 두산전에선 5타수 3안타로 좋은 성적을 보여주었고 4월 9일에는 1회 초에 이종욱의 타구를 다이빙 캐치로 잡아내는 호수비까지 보여주었다. 타격에서도 감을 잡은듯 보인다는 평이었지만 3회 이혜천이 던진 공이 복숭아뼈에 맞아서 1루까지 걸어나가긴 했지만 왠지 상태가 좋아 보이지 않아 신종길과 교체되었다. 이혜천에게 맞은 사구때문에 골절로 4-6주 부상이라는 기사가 나왔으나 이는 오진으로 밝혀졌고, 단순 타박상이라고 한다.

4월 17일 광주에서 한화 이글스와의 3연전 마지막 경기, 안타 치고 1루에 나간 뒤에 후속 주자인 김상현이 연이어 안타를 치자 3루로 달려가던 도중 왼쪽 발목을 접질렸는데 알고보니 접질린게 아니라 골절이었다. 수술까지 생각해야하는 상황이라고. 한참 잘 치고 있었는데 나지완 개인적으로나 KIA의 팀 전력적으로나 큰 손실이다. 그리고 이용규마저 빠지면서, KIA 타선은 원래 모습을 되찾았다.

여담을 덧붙이자면, 4월 11일 경기를 중계하던 MBC LIFE 중계 방송에서 참 재밌는 상황이 발생했다. 나지완의 별명이 '나비'라는 것을 몰랐던 이순철이 아까부터 왜 화면에(비치는 플래카드에) 저렇게 '나비'가 많이 쓰여 있냐고 물어보니, 한명재는 그걸 모르냐며 나지완이 타석에 들어설 때 KIA 응원석의 오디오를 올려달라고 제작진에게 부탁하면서 거의 놀리듯이 껄껄 웃어댄다. 당시 중계영상. 한명재의 (미친듯한) 웃음소리를 들을 수가 있다.

6월 12일 58일만에 경기에 복귀해서 4타수 4안타의 맹활약을 펼치면서 화려한 복귀 신고식을 가졌다. 하지만 실책성 안타를 내준데다 결국 이때문에 윤석민이 실점하면서 개까였다.

6월 14일 한화 류현진을 상대로 세 번째 타석에서 이범호최희섭을 불러들이는 석점 홈런을 쳐 KIA가 선취점을 얻어내었고 이대로 KIA가 승리하는 줄 알았으나 불펜진의 잇단 방화로 인해 결국 KIA는 3:12로 역전 패.

6월 29일 롯데전에서는 선발 라이언 사도스키를 상대로 쐐기를 박는 쓰리런 홈런을 쳤다. 이 때 상황은 4:0으로 앞서던 상황에서 이대호트레비스를 상대로 추격 솔로 홈런을 치면서 추격의 의지를 살리려던 상황이었기 때문에 이 홈런의 의미가 매우 컸다.

복귀해서 미친 방망이를 휘두루고 있다. 17경기 나와서 시즌 타율이 5할, 홈런마저 빵빵.

7월 29일에는 넥센을 상대로 만루 홈런 투런 홈런 등을 연달아 쳐내고 7타점을 기록하며 승리의 1등 공신이 되었다.

시즌이 거의 끝나가는 9월 20일 현재시점에서 타율 .305에 16홈런 60타점을 기록하고 있다. 55일동안 경기 출전이 불가능했다는 것을 감안하면 작년에 비해 장족의 발전을 했다고 볼 수 있고 미래의 4번 타자라는 기대감도 안게 만들어주었지만, 안타깝게도 포텐이 너무 늦게 터져서 군대를 가야된다. 일단 2012년까지는 뛸 것으로 보이지만...

그리고 결국 시즌을 타율 .302에 18홈런 66타점을 기록하며 시즌을 끝냈다.

SK 와이번스와의 2011년 준 플레이오프에서 14타수 3안타 1볼넷 1타점 타율 .214, 장타율 .214, 출루율 .267를 기록하였고, 팀은 시리즈 전적 1승 뒤 3연패로 탈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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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즌 후 선동열 감독이 배를 어루만지고 있다.

예정대로였으면 시즌 후 군입대를 했을 것이나, 선동열 감독의 취임으로 인해 군대를 또다시 1년 미루고 팀에 남기로 했다.


3.5. 2012 시즌[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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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아 타선에서 두 자릿수 홈런을 친 유일한 타자. 다만 3할은 달성 못 했다. 이 해 KIA 타선은 역대급 막장으로, 3할 타자는 김원섭이 유일했고 두 자릿수 홈런타자는 나지완이 유일했으며 그 나지완마저도 겨우 11홈런에 그쳤다. 하지만 막장이라 하긴 머한게 홈런만 못쳤을뿐 나머지 지표는 중위권이었다. 즉 2019, 2021과는 비교가 안될 정도로 홈런만 못친 준수한 타선이었다.


3.6. 2013 시즌[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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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 2014 시즌[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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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즌과 더불어 2014 인천 아시안 게임에서의 활약이 중요해지는 해.

아시안게임에 부상을 숨기고 참가했다는 건 틀린 주장으로, 부상이 있다는 건 기사로도 많이 나왔었다.[11]

참고 기사1 <이순철 MBC 스포츠+ 해설위원은 "덩치가 크지만, 나지완은 둔한 선수가 아니다. 특히 외야에서 타구를 잡을 때 스텝의 움직임이 상당히 매끄럽다"고 평가하고 있다. 나지완 역시도 "지명타자보다 수비를 할 때 아무래도 타격감을 유지하기가 편하다"고 한다.>

참고 기사2 <나지완의 시즌 초반 부진은 과도한 부담감 탓이다. 나지완은 잘 하고 싶어했다. 팀의 4번이자 아시안게임 대표팀 후보로서 존재감을 확실하게 보여주겠다는 각오가 컸다. 하지만 그러다보니 타석에서 너무 적극적이었다. 삼진을 많이 당했다. 팔꿈치 상태도 좋지 않았다. 결국 정확도는 계속 떨어졌다.>

참고 기사3<비단 나지완뿐 아니다. 강정호는 슬라이딩을 하면서 다친 오른손에 테이핑을 하고 경기에 나서고 있고, 김현수는 아시안게임 브레이크가 시작되기 직전 지독한 감기에 걸려 고생하고 있지만 링거 투혼을 발휘중이다. 허벅지가 좋지 않은 강민호는 “태극마크를 단 순간 아픈 건 아픈 게 아니게 된다. 아파서 몸을 사리는 것도 말이 안 된다”고 했다. ‘금메달’이라는 공통의 목표를 향해 뛰는 대표팀에게 아픔은 사치인 모양이다. >


3.8. 2015 시즌[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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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 2016 시즌[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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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1. 1차 FA[편집]


시즌 종료 후 생애 첫 FA자격을 얻었다.

원구단 우선 협상이 폐지된 첫 번째 FA로 컨택형 중장거리 타자인 나지완의 거취가 주목된다. 다만 특유의 수비 실력 때문에 어느 팀을 가도 사실상 지명타자밖에 볼 수 없는데 10개 구단 중에 고정 지타를 필요로 하는 팀은 두산 말고는[12] kt 있잖아. 사실상 없다. 또한 그 때문에 타격 능력에 비해 낮은 금액대가 형성될 것이라는 게 중론. 다만 그 점이 오히려 메리트가 될 것이라는 의견도 있다. 지타 자리를 만들어 줄 수만 있다면 반대로 가성비가 아주 좋은 선수가 될 것이기 때문. FA로이드를 제대로 터트린 탓에 전망이 아주 어둡지는 않다.

11월 15일 "나지완이 KIA에 잔류하는 것을 원한다"는 기사가 올라오면서 사실상 KIA에 잔류할 가능성이 커졌다.

11월 17일, 4년 총 40억(계약금 16억, 연봉 6억)에 KIA 타이거즈와 FA 계약을 맺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전체 FA 선수 중 1호로 계약한 두산 김재호에 이어 두 번째 계약 소식이다.

이처럼 시장의 평가를 받을 새도 없이 예상보다 빠르게 원소속팀과 계약하면서 일찌감치 잔류했고, 거기에 타이거즈 한 팀에서만 뛴 프랜차이즈 스타임에도 불구하고 금액 역시 4년 40억으로 FA 인플레이션 광풍이 몰아치던 시점에 나름 저렴하게 계약했다는 평가가 대다수다. 다만 계약 세부내용을 보면 옵션 없이 순수 보장금액만 40억이고, 거기에 나지완이 사실상 지명타자로만 출장이 가능한 선수인 걸 생각해 보면 구단 측에서 마냥 짜게 굴었다고만 볼 수는 없는 상황이다.

사실 나지완에게 타 구단에서 오퍼가 왔지만[13] 나지완 본인은 KIA에 대한 애착과 잔류하고 싶은 생각이 강해서 거절했다고 한다. 오오!! FA 앞둔 선수들이 대게 팀에 대한 애정을 드러내고, 남고 싶다고 말하면서도 막상 FA때는 홀라당 타 팀으로 이적해버리는 케이스가 많은데[14] 나지완은 이번 FA를 통해 KIA 타이거즈에 대한 애정과 팀부심을 제대로 보여줬다. 당시 풀리던 썰로는 다른 팀에 가서 좋은 대우 받는게 낫지 않냐는 말을 듣고는 얼마를 부르던 남겠다며 사실상 백지 위임을 했다고 한다. 그래서 처음에 34억 정도로 이야기가 나오다가 있는대로 긁어모아서 40억을 만들어줬다고. 여기에 당시 정확한 썰을 기사가 뜨기 전부터 엠팍에 풀고 다니던 한 유저가 인증을 하면서 사실상 확정.

딱 일주일 후 11월 24일 최형우가 4년 100억으로 KIA로 왔다. 최형우가 더 나은 좌익수 수비가 가능한 만큼 붙박이 지명타자가 될 가능성이 보인다. 수비 부담도 덜었고 FA 계약도 체결한 만큼, 보다 안정적인 환경에서 더 좋은 성적을 기대해 볼 수 있게 되었다.


3.10. 2017 시즌[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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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지완이 잠실에서 깨어났습니다!"

2017년 한국시리즈 3차전 9회초 2사 3루 대타 홈런 직후에 정우영 캐스터



3.11. 2018 시즌[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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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2. 2019 시즌[편집]


시즌 초반 타격에서 매우 부진한데 출루율은 4할대였다. 그러다 한화전에서는 OPS를 10할을 넘길 정도로 타격이 좋아지나 했는데 그 이후로 다시 성적이 내려가기 시작해 선발출장으로도 대타로도 매우 부진한 모습을 보이다가 4월 5일에 말소되었다. 2군에서는 그래도 홈런도 치고 장타를 생산하면서 어느 정도 타격감을 끌어올리고 있는 듯.

4월 18일 1군에 올라온 첫날 대타로 대기하다가 9회 3점차에서 통산 200홈런을 솔로포로 쳤다. 팀 타선의 대폭발로 9:4까지 만들었으나 불펜의 대방화와 유사감독의 창조운영으로 팀은 졌다.

4월 20일 유희관을 상대로 홈런을 쳤다

그러다 계속 선발 출장을 못하고, 대타로만 나오다가 5월 SK 와이번스의 브록 다익손을 상대로 솔로 홈런을 친 것을 마지막으로 다시 2군으로 내려갔다. 득점권 타율이 부족하다는 유사감독의 평가였는데 최형우, 안치홍같은 타자들은 계속 선발로 나와서도 매우 심각한 모습을 보여줬기에 졸지에 트레이드 매물로 나지완이 오른 것 아니냐는 까지 돌아다녔을 정도.

5월 22일 1군으로 복귀했다. 다만 박흥식 감독대행 체제로 전환하면서, 베테랑 선수들의 분발을 촉구하며 경우에 따라서는 강제 리빌딩을 할 수도 있음을 천명했기에, 지금 실력으로는 시즌 전망은 어둡다. 팬들 역시 리빌딩에 들어간다면 정리할 선수 1순위로 꼽을 정도. 사실 공격력만 놓고 보면 지명타자에 박아 두고 꾸준히 기회만 준다면 아무리 부진한다 한들 2018 시즌 기록이 보여주듯 제 몫은 해낼 선수이긴 하나 문제는 지독히 나쁜 수비력 때문에 입지가 크게 위협받고 있다. 나지완 하나 살리자고 지명타자 슬롯을 전적으로 나지완 몫으로 배당하는 것보단 여러 타자들이 돌아가면서 활용하는 것이 팀 입장에선 훨씬 더 이득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나지완의 공격력이 리그 최상위권 수준으로 뛰어난 편도 아니기에 2019 시즌 리빌딩 모드에 들어간 기아 타이거즈의 상황에 따라 위기에 직면한 것이다. 7월 기준으로 출장 횟수가 급격히 줄어든 모습이다.

7월에는 대부분 지명타자로 출장을 했는데 타율이 2할을 넘지 못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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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테랑에게 강력 경고 돈값을 하라
베테랑에게 6월까지 기회 주고 방향 정할 것

결국 7월 14일 KIA 챔피언스 필드 한화 이글스전.. 6번 지명타자로 3타수 무안타.. 7월 18일 KIA 챔피언스 필드 롯데 자이언츠전.. 6번 대타로 나와 2타수 무안타.. 7월 27일 잠실 야구장 KIA 타이거즈전 6번 지명타자로 나와 2회 안타, 4회 플라이, 6회 병살, 8회 삼진으로 4타수 1안타를 기록하였다. 7월 31일 인천 SK행복드림구장 SK 와이번스전 6번 지명타자로 1회 플라이, 3회 삼진, 5회 플라이, 7회 병살타, 9회 삼진.. 5타수 1삼진을 기록하면서 결국엔 8월 1일 말소되었다. 즉 전혀 달라진것도 없었다.

박흥식 대행은 부담감이 아직도 있는것 같다며 부담감을 확실히 내려놓으라고 강조했다. #

9월 확장 엔트리에도 못든걸 보면 아마도 올시즌은 더는 1군에서 보기 힘들것 같다.

시즌 후 마무리 캠프에 최형우와 함께 온 것이 포착되었다.


3.13. 2020 시즌[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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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4. 2021 시즌[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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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4.1. 2차 FA[편집]


4년 계약 마지막이었고, 자격 요건도 충족해 커리어 두 번째 FA를 선언할 수 있게 되었다. 2021 시즌부터 새롭게 도입된 등급제 조건에 따르면 나지완은 B등급[15]에 속한다.

일단 2021 시즌의 성적이 위에 언급된 대로 매우 안 좋았으며 포지션 문제도 있는데다 30대 후반을 바라보는 나이 때문에 만약 FA 선언하고 시장에 나오더라도 관심을 보일 타 팀은 없다는게 중론이다. 그리고 본인이 KIA 타이거즈에 대한 애착이 크기로 유명한데다가 팀에서도 원 클럽 플레이어로서 대접받고 있는 측면도 있어 FA 선언은 포기하고 재계약할 가능성이 높은데, 그래도 대폭의 연봉삭감은 각오해야 할 처지이다.

KBO에서 정한 FA 신청 마지막 날인 11월 24일, 예상대로 FA를 신청할 생각은 애초에 없었으며 재계약하겠다는 의견을 구단측에 전달했다. 기사


3.15. 2022 시즌[편집]


일찌감치 FA를 포기하고 KIA 잔류 및 백의종군을 선언하였다. 특히 KIA 자체적으로 프론트와 지도진을 전면 물갈이하고 큰폭의 선수단 정리까지 하며 2022 시즌은 새판짜기를 선언한 상황이라 경쟁력을 보여주지 못하면 은퇴도 각오해야 한다. 더구나 2021년 12월 23일 나성범이 대형 FA계약을 체결하고 KIA에 합류하면서 주전 외야수 + 체력안배를 위한 지명타자로 기용될게 뻔하기 때문에 그의 입지는 더욱 좁아졌다.

1월 말에 발표된 1군 스프링캠프 명단에 들지 못했으며, 프로데뷔 처음으로 2군 캠프에서 시작한다. #

1월 31일 발표한 연봉 재계약 현황에서 전 시즌보다 62.5% 깎인 1억 5,000만 원에 재계약한 사실이 확인됐다.

3월 8일에 열린 한화 이글스와의 연습경기에 지명타자로 출전, 2타점(안타1/희생 플라이1) 활약을 선보이며 팀 승리에 공헌했다.

3월 12일에 열린 NC 다이노스와의 시범경기 개막전에서 대타로 출전해 투수 원종현을 상대로 중월 홈런을 때려내며 활약했다.

3월 25일에 열린 키움 히어로즈와의 시범경기에 지명타자로 출전, 4타수 3안타를 기록하며 오랜만에 부활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3월 26일에 열린 한화이글스와의 시범경기에서 대타로 나와 안타를 신고하였다.

시범경기 총성적은 21타석 / 3할 타율 / 1홈런 / 4타점으로 나쁘지 않은 모습을 보여줬다.

개막 엔트리 합류엔 성공했으나, 선발출장은 못하고 벤치 대타 자원으로 쓰이게 되었다. 4월 3일 LG전 8회 1사에서 대타로 나왔으나 상대가 투수를 함덕주에서 정우영으로 교체하면서 다시 고종욱과 교체되며 타석에는 서지 못했다.

4월 6일 결국 스윙 한 번 못 해보고 이의리 자리마련을 위해 1군에서 말소되었다. 감독의 성향상 타격 및 수비가 어느정도 돼야 기용을 할텐데[16] 고종욱 & 김석환 등 다른 좌익수 후보들에 비해 경쟁력이 낮아 현재로선 주전기용 가능성이 낮다. 앞으로는 2군에서 괄목할만한 성적 및 수비를 보여주는 것만이 최선의 길이다.

4월 12일부터 2군 출장에 들어갔다.

5월초 기준 타율 0.071(28타수 2안타) & 홈런과 타점 0이라는 최악의 부진에 빠진 상태다. 1군에서 김호령과 고종욱이 부상으로 이탈하며 자리가 난 상황이지만, 현재 성적과 타격감으로는 2군 주전에서도 밀려날 형국이다.

5월 24일 KT 위즈와의 퓨처스리그 경기에서 올 시즌 첫 홈런을 기록했다. 또한 최근 10경기에서 타율 0.346으로 지난 달보단 나아진 모습을 보이고 있다는 점이 위안.

6월 초 기준 28경기 1할8푼2리(66타수 12안타) 1홈런 7타점 13볼넷 15삼진 OPS .575의 성적을 기록중이다. 최근 10경기 타율도 1할8푼2리(22타수 4안타)로 하락. 그리고 6월 3일부터 2군 엔트리에서도 제외되었는데, 잠시 재충전의 시간을 준 것이라고 한다.

약 열흘 정도 쉬고 6월 중순에 2군 엔트리에 복귀했다. 그리고 6월 17일 경기에서 DH로 선발출장해 정말정말정말 오랜만에 홈런과 5타점으로 괜찮게 활약했고, 19일에는 좌익수로 선발출장해 2타수 2안타 2타점 1사구를 기록했다.

그러나 6월 21일 고양 히어로즈와의 경기에서 3타수 1안타 1타점 1도루를 기록한 이후 5경기 동안 8타수 무안타 1볼넷 1득점이라는 저조한 공격력을 보여주다, 7월 1일 KT전 경기에서 2타수 2안타 1타점 1득점으로 멀티히트를 쳤다.

이후 7월 2일 KT전에 2타수 무안타를 끝으로 전반기를 다소 빨리 마무리 지었다. 전반기 퓨처스리그 성적은 41경기 출장하여 90타수 21안타(2루타 2개, 홈런 2개)를 쳐내며 타율 0.233에 출루율 0.389, 장타율 0.322를 기록했다. 볼삼비는 딱 1:1(23사사구, 23삼진)이긴 하나 장타가 도무지 나오지 않는 타격으로 인해 김종국 감독 또한 "안타깝지만 들어갈 자리가 없다."라는 코멘트로 사실상 특출난 성적을 올리지 않는 다음에는 1군 콜업은 힘들 것이라는 메세지를 남겼다. 차라리 트레이드 해달라고 요청하는 게 낫다고 할 정도. KIA엔 자리 없는 나지완, 트레이드로 도전 나서는 건 어떨까[17]


4. 은퇴[편집]


2022년 9월 1일, 기자회견에서 현역 은퇴를 선언했다. #올스타 브레이크 이후 하반기 일정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지만, 팀 내 경쟁자들에게 완전히 밀려 뚜렷한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고, 이게 큰 영향을 미쳐 8월 말 시행된 확대 엔트리에도 들어가지 못하자[18] 은퇴를 결심한 것으로 보인다. KIA 측에선 원 클럽 플레이어인 그를 위해 향후 은퇴식 자리를 마련하고 지도자 과정 등을 원한다면 적극적으로 도울 예정이라고 언급했다.

아내 양미희의 인스타그램에 올라온 글에 따르면 아들에게 야구선수로서 활동하는 모습을 많이 못 보여줘서 미련이 있었지만 어느날 아들이 자신한테 최고의 야구선수란 말을 하자 아들로부터 인정받았으면 그걸로 된 거라며 미련을 버리고 은퇴를 결심하게 되었다고 한다.

더그아웃 나타난 나지완의 마지막 모습, 씩씩하게 웃으며 손 흔들었지만...
타이거즈 출신 해설위원이 기억하는 나지완은 어떤 모습? "실력, 리더십, 성실성 모두 갖춘 원클럽맨"
“한 타석이라도 꼭…” 타이거즈 221홈런 거포의 이상과 현실, 이별은 고통스럽다
"룸메였는데… 마음 아프고 착찹하다" 15년 동료 떠나보내는 사령탑의 회한
옛 추억 떠올린 안치홍 "아쉬운 지완이 형 은퇴…그동안 많이 고생했어."

은퇴식은 10월 7일 광주 kt전에서 치러질 예정이다. 이날 입장권은 2009년 한국시리즈 끝내기 홈런 세리머니 장면을 바탕으로 제작되며, 선수단 모두가 29번 나지완이 새겨진 유니폼을 달고 뛰며, 가족들과 함께하는 시구/시타/시포 행사, 그리고 경기 후 고별사와 마지막 타석 퍼포먼스, 응원가인 나는 나비 원곡자 YB의 특별 영상도 상영된다고 한다.# KIA 타이거즈측 영상[19]

네이버 스포츠에서도 헌정 영상을 남겼다. GOOD BYE, 'KIA의 영웅' 나지완 크보연구소, "끝내주는 타이거즈 홈런 타자" 나지완 매드무비

또한 10월 6일 LG전까지 순위가 확정된다면 실제로 경기를 뛸 예정이며, 현재 몸을 만드는 중이라고 알려졌다. 하지만 10월 6일까지 매직넘버를 없애지 못하며 선발 라인업에는 빠져 있었다. 김종국 감독은 상황에 따라 대타로 출전을 시킨다고 하였다.

10월 7일 경기에서 팀이 크게 리드를 잡은 덕분에 8회말 선두타자 황대인의 타석에서 대타로 출장할 수 있었고, 투수 전유수[20]를 상대로 3루수 파울플라이를 치는 것으로 현역 마지막 타석을 마무리했다. 이어 9회초에는 좌익수로 잠시 그라운드에 섰다. 팀도 3홈런을 앞세워 1대 11로 대승을 거두면서 자력으로 포스트시즌 진출을 확정지음에 따라 은퇴 경기를 해피 엔딩으로 마무리할 수 있게 되었다. '2022시즌 1경기 0타석' 눈물과 좌절의 나비, 마지막 비행은 '해피엔딩', KIA, 나지완 은퇴식 날 4년 만에 가을 야구 복귀…kt 11-1 대파, '타이거즈 홈런왕'의 유쾌한 퇴장 "데뷔전 첫 타석, 진갑용 코치님이…"


그리고 경기 종료 후 은퇴식을 끝으로, KIA의 나비는 15년간의 비행을 마치고 날개를 접었다.

10월 8일 kt전 1회초부터 3회말까지 정우영 캐스터, 이순철 해설위원과 같이 해설을 진행했다. 약속이 있었는데 시간을 잠깐 비워서 참여했다고. 이순철 해설위원은 이제 예능 프로에서 섭외가 많이 올 것이라고 칭찬했다.

11월에는 전설의 타이거즈에 출연해 근황을 알렸는데, 가족과 보내는 시간을 대폭으로 늘리며 편하게 재충전하는 중이라고 한다. 방송계 쪽에서 섭외연락도 많아 받았는데 그 중 몇개는 이래저래 조정을 하고 있다는 말을 한 걸 보면 조만간 방송출연도 할 모양인 듯. 그리고 은퇴에 관한 이야기도 자세히 풀었는데, 작년 주장으로서 좋은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며 성적도 수직 하락해 올 시즌을 2군에서 시작하게 되자 전반기까지 본인이 생각하는 목표치 성적을 내지 못하면 은퇴하겠다고 마음을 먹었다고 한다.[21] 후배들 앞에서 티 안내기 위해 항상 웃으며 임했지만 속으론 많이 힘들었는데, 이제는 아름답게 물러나서 더는 미련이 없는 듯.



5. 연도별 주요 성적[편집]


  • 푸른 글씨는 KBO 최다, 붉은 글씨는 1위 입상 성적. 진한 글씨는 리그 5위 내 입상 성적.
역대 기록
연도
소속팀
경기수
타수
타율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타점
득점
도루
4사구
장타율
출루율
2008
KIA
73
200
.295
59
12
1
6
30
25
1
34
.455
.391
2009
128
384
.263
101
12
0
23
73
58
4
66
.474
.368
2010
KIA
109
316
.215
68
11
0
15
53
42
3
63
.392
.343
2011
85
291
.302
88
9
0
18
66
41
0
39
.519
.384
2012
124
398
.274
109
17
1
11
56
40
7
69
.405
.377
2013
125
435
.287
125
18
0
21
96
(3위)
57
7
80
(4위)
.474
.394
2014
118
398
.312
124
22
0
19
79
64
3
66
.510
.404
2015
116
304
.253
77
16
0
7
31
34
3
62
.375
.378
2016
118
380
.308
117
21
2
25
90
84
6
102
(2위)
.571
.451
(3위)
2017
KIA
137
459
.301
138
20
3
27
94
85
1
85
.534
.405
2018
114
317
.271
86
18
0
26
78
50
0
57
.574
.377
2019
56
129
.186
24
5
0
6
17
12
0
22
.364
.301
2020
137
468
.291
136
19
1
17
92
73
0
82
.444
.392
2021
KIA
31
81
.160
13
1
0
0
7
3
0
20
.173
.324
2022
2
1
.000
0
0
0
0
0
0
0
0
.000
.000
KBO 통산
(15시즌)
1473
4561
.277
1265
201
8
221
862
668
35
847
.470
.387


[1] 85년생 동갑내기 친구로, 익히 알려진대로 훗날 KIA 타이거즈에서 한솥밥을 먹게 된다.[2] 여담으로 이 당시 휘문중 선수 중에 우규민, 나주환, 서동욱이 있었다고 한다.[3] 이 때 경기가 다 끝나지 않았는데도 경기장 밖으로 도망갔다. 성산대교 건너던 중 휘문중한테 잡힐 뻔한 적이 있어서 그 뒤 빨리 돌아오라는 부모님의 연락을 받고 혼이 날 걸 각오하고 경기장에 돌아왔는데 오히려 다독여줬다고 한다. 스톡킹에서 말한 내용이다.[4] 외야수 포지션 변경 연습을 겸해 출전한 팀 내 청백전에서 홈런을 2방 때리고 괜찮은 수비를 보여주며 제대로 눈도장을 찍었다고.[5] 왼쪽은 이상훈[6] 동국대, 단국대, 성균관대 세 곳에서 오퍼가 왔는데 동기들도 같이 받아주겠다고 해서 단국대를 선택했다고 한다.[7] 2000년부터 대학야구가 나무 배트를 쓰고 있는 점을 감안하면 엄청난 수치다. 당장 같은 팀의 어느 화물이 고교 때 알루미늄 배트 쓸 동안에는 본즈놀이를 하다가 프로에 와서 폭망했다.(고교야구가 나무 배트로 바뀐 것은 2004년 봉황대기부터여서 김주형은 고교 내내 나무 배트와는 무관했는데 3학년 때 홈런이 하나도 없었다.) 나지완 이후 대학야구에서 한 시즌 두 자리 수 홈런을 친 타자는 2018년(김시윤, 인하대 4학년)이 돼서야 나왔는데 정작 당사자인 김시윤은 프로 지명도 받지 못했고 육성선수 입단도 하지 못했다.[8] 1년 후배인 이종환과 단국대 중심타선을 구성했으며, 이종환을 KIA 타이거즈에 추천해 신고선수로 입단 시키는데 도움을 줬다.[9] 고교까지 합치면 98경기에서 29홈런. 장타력은 그야말로 최고수준이었던 셈.[10] 이 프로 첫 타석에서 상대한 포수가 바로 대선배 진갑용이었는데, 프로의 쓴 맛을 제대로 보여주고 싶으셨는지 트래쉬 토크를 엄청 날렸다고 회고했다.[11] 스톡킹에서 다시 한번 해명하길, 인터뷰가 와전되어 잘못 전달하는 바람에 욕이란 욕은 다 얻어먹었다고.[12] 아니, 오히려 두산 팬들은 저 링크에 걸려진 그 분 덕에 수비 포지션이 없는 고정 지타라면 아주 치를 떤다! 실제로 두산은 그 분이 2군으로 꺼지고 난 뒤인 2016시즌 지명타자 롤을 다양하게 쓸 수 있게 되면서 굉장한 효율을 냈다.[13] KIA에서 제시한 금액보다 10억 가까이 더 받을 수 있었다고 한다.[14] 대표적으로 이 팀에 뼈를 묻고 싶다 선언하고 뒤통수 쳐 볼드모트가 된 동갑내기 친구인 이 분.[15] 타 팀으로 이적시 보상 선수 1명(25인 보호) + 연봉 100% 보상 or 전년도 선수 연봉의 200% 보상이 조건이다.[16] 실제로 박찬호는 현역시절 비슷한 성향의 김종국을 만나면서부터 날아다닌다. 20대 초반에는 멘도사였는데 20대 후반부터 타격에서 밥값은 한게 김종국이다.[17] 물론 해당 기사에 대한 KIA 팬들의 반응은 매우 좋지 않다. 애초에 1차 FA 때 더 좋은 오퍼가 있었음에도 셀프 디스카운팅을 하면서까지 KIA에 남고 싶어했던 선수가 나지완이다.[18] 이날 KIA의 확대 엔트리에는 김석환, 김선우, 송후섭, 이우성이 등록되었다.[19] 이범호의 은퇴식과 같은 형식으로 치러진다고 보면 된다.[20] 뒤늦게 알려졌지만, 전유수 또한 이 시즌을 끝으로 은퇴를 선언하면서 이날 등판이 현역 마지막 등판이었다.[21] 야구에 관해 그 어떠한 간섭도 안하던 아내가 펑펑 울면서 그만 은퇴 생각을 하는 게 어떻겠냐는 말을 한 것도 영향이 있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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