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철안

덤프버전 :





파일:external/rokps.or.kr/482.jpg

파일:/image/021/2014/11/18/2014111801033012053001_b_99_20141118141212.jpg
왼쪽부터 김철안, 박순천, 박현숙

金喆安
1912년 4월 4일 ~ 1992년 1월 14일 (향년 79세)

1. 개요
2. 생애
3. 선거이력


1. 개요[편집]


대한민국의 전 정치인이다. 본관은 김해(金海)[1].

2. 생애[편집]


1912년 4월 4일 경상북도 대구군(현 대구광역시)의 빈농가에서 아버지 김영순의 두 딸 중 장녀로 태어났다.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를 따라 경상북도 영덕군으로 이주하여 영덕보통학교를 졸업하였다. 18세 되던 1930년 김천군으로 이주해 금릉학원 부설 금릉유치원 보모로 취직해 2년간 근무했다. 1931년 일본 메이지대학정치경제과 교외생으로 입학한 다음 강의록을 독학해 1939년 수료했다. 1934년에는 최의원(崔義元)과 결혼했다.

8.15 광복우익에 몸담아서 대한독립촉성애국부인회 김천군지부에서 활동하였다.

1948년 제헌 국회의원 선거에서 대한부인회 후보로 경상북도 김천군 갑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무소속 권태희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1950년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대한부인회 후보로 경상북도 금릉군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무소속 여영복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이후 자유당에 입당해 원내 부인부장으로 활동했다. 1954년 제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자유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여 현역 국회의원인 무소속 여영복 후보를 누르고 당선되었다. 이후 자유당 중앙위원으로 활동하였다. 1956년 대한민국 국회 보건사회위원회(현 보건복지위원회) 위원장에 선출되었다. 1958년 제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도 자유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1960년 제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도 자유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무소속 우돈규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1961년 3.15 부정선거에 가담하였다는 이유로 반민주행위자로 지정되어 공민권이 제한되고 피선거권이 상실되었다.

1963년 제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자유당 후보로 경상북도 김천시-금릉군 지역구에 출마하였으나 민주공화당 백남억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1978년 제1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민주공화당에 경상북도 김천시-금릉군-상주군 선거구로 공천을 신청하였다가 백남억에 밀려 탈락하였다.

1992년 1월 4일 오후 2시 40분에 서울특별시 종로구 연건동 서울대학교병원에서 노환으로 사망했다.

3. 선거이력[편집]


당 내부 선거가 아닌 대한민국 선출직 공직자 선거 결과만 기록한다.

연도
선거종류
선거구
소속정당
득표수(득표율)
선여부
비고
1948
제헌 국회의원 선거
경북 김천군 갑[2]

대한부인회

4,943표 (13.76%)
낙선 (3위)

1950
제2대 국회의원 선거
경북 금릉군[3]
8,031표 (15.56%)
낙선 (2위)

1954
제3대 국회의원 선거


20,078표 (39.45%)
당선 (1위)
초선
1958
제4대 국회의원 선거
경북 금릉군[4]
21,312표 (38.99%)
재선
1960
제5대 국회의원 선거
1,885표 (3.65%)
낙선 (12위)

1963
제6대 국회의원 선거
경북 김천시-금릉군[5]

[[자유당|
]]

3,405표 (4.93%)
낙선 (3위)


파일: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__CC.pn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2023-11-17 00:28:56에 나무위키 김철안 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

[1] 디지털김천문화대전[2] 제24선거구[3] 제26선거구[4] 제30선거구[5] 제6지역구

관련 문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