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예(태조 왕건)/극중 행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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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극중 행적
2.1. 출생의 비밀 및 출사 이전
2.2. 수하 시절과 본격적인 건국
2.3. 북벌 집착과 타락의 시작
2.5. 강비의 처형과 왕건의 역성혁명
2.6. 최후



1. 개요[편집]


드라마 <태조 왕건> 주인공 궁예의 극중 행적을 다룬 문서.


2. 극중 행적[편집]



2.1. 출생의 비밀 및 출사 이전[편집]


드라마는 궁예가 신라 북부의 요충지 철원성을 함락하고, 철원성에서 부처님의 나라가 건국되었음을 선포하면서 시작한다. 철원을 함락한 뒤 왕륭을 제외한 호족들은 자진하여 궁예에게 귀부했는데, 궁예는 호족들이 바친 여인들을 물리면서 그들에게 자기가 다스리는 지역에서 선정을 베풀라는 일침을 날린다. 그리고 폭설이 내리던 날, 아직 귀부하지 않은 왕륭에 대해 종간과 대화하면서 자신이 송악[1]으로 쫓겨와 유모와 함께 구사일생으로 살아남던 그날을 회상한다.

당시 어린 궁예와 그의 유모는 신라군에게 쫓기며 송악 인근 세달사[2]의 범교 스님에게 가고 있었다. 신라군의 추격에서 벗어나 간신히 송악에 도착했으나 유모는 고된 방랑길 때문에 몸이 약해져 쓰러졌는데, 이때 우연히 그들을 발견한 왕륭이 그들을 거두어 자기 집의 방을 하나를 내어주어 쉬도록 했다. 이때 신라군은 이들을 쫓아 왕륭의 집에 찾아가서는 각간 김위홍의 명을 받았다며 역적을 내놓으라고 하지만, 왕륭은 궁예가 그저 역적 누명을 쓴 것이라고 생각하고 신라군을 쫓아버린다.[3] 왕륭이 송악 지역의 유력한 호족인데다가 송악 지역의 통치자이기까지 했고, 그 역시 김위홍과 잘 알던 사이인 데다가 중앙 정부의 명령이 잘 안 먹힐 시기였던지라 신라군조차 이들을 어찌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 직후 죽음을 직감한 유모는 그제서야 궁예가 가진 출생의 비밀을 알 수 있는 신라 왕실의 증표를 궁예에게 전달하고 범교 스님에게로 가라는 유언을 남긴 채 사망한다. 사실 궁예는 자신의 출생의 비밀을 알기 전까지만 해도 유모를 어머니로 알고 있었다.

공교롭게도 궁예의 유모가 죽은 날에 왕건이 태어났고, 궁예와 왕건의 기구한 인연은 여기서부터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마침 왕건의 출생을 기념하여 왕륭은 동생 왕평달을 시켜 세달사에 제를 올리라고 했고, 왕륭은 죽은 궁예의 유모를 거두어 왕평달로 하여금 궁예를 범교 스님에게 데려가라고 했다. 그리고 아무것도 모르는 궁예가 범교 스님에게 신라 왕실의 증표를 알려주자 범교는 한탄하면서 궁예에게 출생의 비밀을 알려준다.

이 드라마는 궁예의 혈통에 대해 신라 경문왕 서자설을 채택했다. 경문왕은 47대 국왕 헌안왕의 사위였다. 헌안왕은 아들이 없고 딸만 둘이었는데, 왕족이자 뛰어난 화랑이었던 김응렴, 즉 경문왕에게 두 딸을 시집보내 사위로 삼고 왕위를 잇게 했다.[4] 하지만 경문왕은 출중한 화랑이었지만 왕으로서의 통치에는 영 소질이 없었다. 마찬가지로 왕위를 잇기 위해 반강제로 맺어진 선왕의 딸들과 사이에 아들 둘을 두었지만 이성적인 흥미가 없었고, 그렇게 방황하다가 어느 시골 어촌 아낙네에게 반하여 그녀를 후궁으로 삼고 총애했다. 그러다가 그녀가 아들을 낳게 되는데, 이 아들이 바로 궁예이다.[5] 하지만 이미 정실 왕후 소생의 왕자를 둘씩이나 두었고, 선왕의 딸이기도 한 정실 부인들이 신분도 낮고 총애를 독차지하는 궁예의 어머니를 좋아할 리가 없었고 당연히 궁예에 대해서도 좋은 감정을 가질 수가 없었다. 그리고 경문왕의 왕후들은 점을 보는 관리를 협박하여 궁예의 점괘를 흉하게 조작했다. 점괘가 좋지 않자 대소 신료들의 여론은 매우 나빠져 경문왕에게 궁예를 죽이라고 계속해서 극구 청을 올렸고, 경문왕의 동생 김위홍도 궁예를 제거할 것을 권한다. 경문왕은 처음에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다가 결국 마지못해 대소신료들과 아우 김위홍의 뜻에 따르게 되고, 이에 김위홍은 군대를 거느리고 후궁전을 기습하여 궁예를 죽이려 하였으나 궁예의 어머니와 유모는 간신히 도망치는 데에 성공한다. 그러다가 막다른 정자에 다다르자 궁예의 어머니는 정자 아래에 대기하고 있는 유모에게 궁예를 전달했는데, 유모가 받는 과정에서 실수로 궁예의 눈을 찔렀고 이에 유모는 경악해 비명을 지르게 된다.

이후 유모는 가까스로 정신을 수습해 어린 궁예를 안고 계속 도주하다가 그녀를 계속 추격해온 관군에 죽을 위기에 처했을 때 한 화랑의 도움을 받아 죽음의 위기를 넘겼는데, 도움을 준 화랑은 바로 범교로 경문왕이 화랑이던 시절 범교와 경문왕은 친구 사이였고[6], 범교는 뛰어난 화랑이었던 경문왕을 왕으로 옹립하는 데에 있어 중요한 역할을 했기 때문에 간접적으로 궁예의 박복한 운명에 대한 자신의 책임을 통감하고 있었다. 그리고 신라 왕실의 증표를 유모에게 전달한 사람도 바로 범교다. 그렇게 범교는 궁예에게 출생의 비밀을 알려준 뒤 세달사에서 머리를 깎고 불가에 귀의하여 다 잊어버리라고 권하였지만, 머리를 깎던 중에도 궁예의 속마음은 신라 왕실을 향한 복수심으로 타오르고 있었다. 그리고 궁예가 머리를 깎을 때 궁예를 데리고 법당으로 간 뒤 지켜보던 사람이 바로 종간이었는데, 그는 궁예의 비밀을 몰래 엿들었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궁예는 어린 시절에 성격이 괄괄하여 늘 말썽을 피우며 다녔다고 하는데, 이 드라마 속의 어린 궁예는 그런 악동의 이미지와는 거리가 멀다. 오히려 오랫동안 거지꼴로 신라군에 쫓기는 생활을 하다 보니 상당히 위축되어 있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리고 이 드라마에서는 계율에 얽매이지 않고 종잡을 수 없었다는 평가를, 궁예가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렀다로 해석하여 작중 궁예는 10년간 착실하게 불경 공부를 하며 무예와 실용 기술을 익힌 것으로 되어 있다.[7]

약 10년 후, 장성한 궁예는[8] 범교로부터 '선종'이라는 법명을 받고[9] 세달사에서 7년, 외딴 산의 암자에서 3년 간 수행을 했다. 작중 설정상 세달사에서는 스님들에게 단순히 불경 공부만 시킨 것이 아닌 무술, 기초 의학 등, 이 세기말에서 스스로 몸을 지키는 데에 필요한 각종 실용 기술들을 가르쳤고, 이는 극초반부 궁예가 고난을 헤쳐나갈 수 있는 능력이 되었다. 그리고 이 외딴 산의 암자에서 3년 간의 수련을 한 끝에 궁예는 미륵불의 형상을 목격하는 체험을 한다. 궁예는 이를 자신이 미륵의 현신이라는 암시로 받아들이고, 세상으로 나가 세상을 구하기 위해 암자를 하산해 세달사로 내려간다.

궁예가 하산하고 세달사로 내려가던 중 까마귀가 그의 앞에 무언가를 떨어뜨렸는데, 그것은 점을 칠 때 쓰는 상아로 만든 산가지였고 거기에는 왕(王)자가 새겨져 있었다. 궁예와 동행하던 종간 또한 새로운 세상을 만들겠다는 뜻을 품고 있었는데, 관상과 점을 보는 뛰어난 재주를 가졌던 종간은 이를 계기로 궁예를 임금이 될 사람으로 보아 궁예 앞에서 무릎을 꿇고 신하가 될 것임을 선언한다.

암자에서 내려온 궁예와 종간은 세달사를 찾아와 재를 올리는 왕건을 목격한다.[10] 궁예는 유모가 죽던 날 왕건이 태어났던 사실을 기억한다며 비범한 인재로 자라났다며 감탄하고, 범교를 만난 궁예는 자신이 '미륵'이라 선언하며 떠나겠다고 말하고 이로 인해 범교는 그야말로 기가 막혀한다. 범교는 궁예가 미륵불이 되기에는 다 여물지 못했다고 판단하여 "부처도 태우고 네 몸뚱아리도 태우리라"라고 다그치지만, 이미 의지를 굳힌 제자들을 말릴 수는 없다는 걸 진작에 알고 있었으므로 그들의 목적지를 눈치채 신라의 도선 대사에게 가라는 말을 전했으며 그래도 스승이라고 마지막 선처로 신라에 왕륭에게 부탁을 해놓아 궁예와 종간을 신라로 안내하도록 한다. 궁예는 종간과 함께 출생의 과거도 정리할 겸 도선 대사도 보러 갈 겸해서 송악을 거쳐 뱃길로 신라로 가게 되고, 마침 왕륭은 상대등이 된 김위홍에게 진귀한 물품들을 바치기 위해 신라로 가는 길이었으므로 왕륭, 왕건 부자와 재회한다. 왕건은 당시 소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항해 지휘가 흠잡을 데가 없자 종간은 불안함을 직감했고, 향후 궁예와 왕건은 상극이 될 것임을 궁예에게 조언했으나 궁예는 왕건의 재주가 대단함을 감탄하기만 했을 뿐 종간의 조언을 물린다. 사실 이 시점에서 왕건은 유력 호족 가문의 자제이지만 궁예는 이제 막 속세로 하산한, 본인과 종간 둘뿐인 상황이다. 불안함을 느꼈다 한들 뭘 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어떤 면에서는 종간이 왕건에 대해 지나칠만큼 경계하고 견제하는 강박관념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고 봐도 된다.

그렇게 왕륭, 왕건 부자와 신라로 가는 길에 산적 마석대의 습격[11]을 받아 왕륭, 왕건을 호위하고 있던 마사부와 장수장과 왕륭, 왕건 부자의 사병들과 함께 산적들과 싸웠고, 이들 중에서도 궁예와 종간, 특히 궁예는 '신기'라는 말이 맞을 정도로 신들린 무예 솜씨로 산적들을 제압하고 있던 중 김위홍의 부하로 있던 견훤이 군대를 끌고 와 같이 산적을 완전히 진압한다. 이후 견훤에게서 석장을 휘두르는 솜씨가 마치 손오공여의봉을 휘두르는 것 같았다는 극찬을 듣는다.[12] 각설하고 궁예와 견훤, 왕건이 신라에 가는 도중에 서로 만났다는 것은 물론 드라마에서의 각색이지만, 후삼국 시대의 주역들이 신라로 가는 길에서 조우했던 것이다. 이는 물론 창작이지만 극에서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후삼국시대의 주연 삼인이 한자리에 모인 에피소드로 이후 이 셋은 다시 한자리에 하지 못했다.

궁예가 신라에 갔을 때는 자신을 죽이려 했던 숙부 김위홍이 신라 최고의 관직인 상대등으로서 권력을 휘둘렀을 뿐만 아니라, 궁예의 누이이자 자신의 조카인 진성여왕과 불륜행각을 벌이며 나라를 좀먹고 있었다. 궁예는 김위홍을 찾아가 자신의 정체를 밝히고, 어머니의 소재를 물어보면서 동시에 김위홍의 정계 은퇴를 권한다. 그리고 김위홍이 정치에서 은퇴하여 스님이 되지 않으면 불행해진다는 궁예의 예언은 현실이 되어 김위홍은 궁예가 떠난 다음 날 진성여왕과 동침하던 중 복상사로 죽었다.[13]

그 다음 궁예는 도선 대사를 찾아가 자신의 앞날을 묻는다.

도선: 객 손님들이 오는구나. 가서 데려오너라.

경보: 예.

궁예: 소승은 선종이라 하옵니다. 여기 같이 오신 분은 같은 사문의 사형 종간 스님이라 하옵니다.

종간: 종간이라 하옵니다. 결재일이 끝나서 만행 중이옵니다.

도선: 그래. 만행이라.. (궁예를 보며) 넌 외눈박이로구나.. 애꾸야..

궁예: 예. 어쩌다가 한쪽 눈을 잃었사옵니다. 세달사의 범교 스님께서 대사님을 찾아뵈옵고 세상의 이치와 소승들의 앞날을 여쭈라 하셨사옵니다.

도선: (너털웃음을 지으며) 범교 스님께서도 이제 노망기가 드셨나 보구나.

궁예: 대사님, 고견을 들려주시옵소서. 중생들의 신음 소리가 천지를 진동하고 있사옵니다. 일러 주시옵소서. 어느 길로 가오리까?

도선: 도적놈이 이미 도적질에 나섰는데 날보고 뭘 또 이르라는 것이냐?[14]

궁예: 천하를 훔쳐 백성들에게 되돌리고자 하옵니다. 이것을 어찌 도적이라고 하겠사옵니까? 미륵의 세계를 열어 고해의 바다에 연꽃을 피우려 하옵니다. 어느 길로 가면 빨리 이루오리까?

도선: 한쪽 눈으로 세상을 살다 보니 천지가 반쪽으로 보이는 모양이로구나, 쓸데없는 욕심을 버리거라.

궁예: 어찌 욕심이라 하시옵니까. 그렇다면 도탄에 빠진 백성들은 누가 구원할 것이오리까?

도선: 나 아니면 안 된다는 것이 바로 욕심이니라. 말해 주랴? 너의 앞날 말이다.

(비장한 표정의 궁예와 종간)

도선: 뜻은 이루겠으되[15]

복이 박하니[16] 천하를 얻은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17]

종간: 뜻을 이루옵니까?

도선: 그만 물러들 가거라. 말장난[18]

할 때가 아니니라.

종간: 스님께선 도선 비기라는 앞날을 예측하는 비서가 있다고 들었사옵니다. 사실인지요?

도선: 미련한 것들 같으니.[19]

대범한 척 하면서도 속물들이로구나. 그런 것이 있은들 어떠하며 없다면 또 어떨 것이야. 감히 미륵을 운운하더니 재목들이 아닌 게로구나.

궁예: 송구하옵니다. 대사님의 말씀을 들으니 소승의 앞날이 훤이 보이는 듯 하옵니다.

도선: 그만 물러들 가거라. 쉬고 싶구나.

궁예: 또 뵈올 날이 있으오리까?

도선: 아마 그럴 날은 없을 것이니라.

궁예: 좋은 날이 오면 반드시 찾아 뫼시겠사옵니다.

도선: 그럴 일 없을 것이니라. 어서들 가봐.[20]

[21]

궁예: 절 받으시옵소서.



2.2. 수하 시절과 본격적인 건국[편집]


이후 궁예는 안성시 죽주의 칠장사[22]에서 비구니로 있는 모친을 찾아가는데, 주막에서 저녁을 먹고 있던 중 기훤의 부하들이 들어와 약탈을 자행하자 궁예와 종간은 주먹과 목봉만으로 도적들을 두들겨 패서 쫓아내 버린다. 다음 날 궁예 일행이 칠장사로 올라가던 중 부하들의 보고를 받은 신훤과 원회가 궁예한테 시비를 거는데, 종간은 원회와 일기토를 하여 이겼고 궁예 역시 덤벼온 신훤을 제압한다. 궁예의 실력에 놀란 원회는 용서를 구하고 궁예에게 기훤한테 가지 않겠냐고 제안하는데, 어차피 갈 곳도 없던 궁예와 종간은 궁예의 어머니를 뵌 이후 그 일대에서 장군을 자칭하는 산적 수괴인 기훤의 수하로 들어가게 된다. 칠장사에서 궁예는 모친과 만났고, 모친도 궁예가 자신의 아들이라는 걸 바로 알아보았지만, 이미 속세에 미련을 버린 뒤였다.

소승은 도저히 알지 못할 말씀이십니다. 오늘의 일도 다 알지 못하는데 어찌 20년 전의 일을 기억하라 하십니까? 소승은 이미 속가(속세)의 일은 잊은 지 오래랍니다. 인생은 짧고 부처님 만나기는 어렵다 하였습니다. 부질없는 망상에 이끌리지 마시고 수도에 정진하시구려. (방문이 닫기자 궁예 일행이 발걸음을 돌릴 때) 범교 스님께서 전하라 하십디다. "피곤한 나그네에게 길은 멀고, 잠 못 이루는 이에게 밤은 길다. 작은 번뇌의 끈 하나 버리지 못하고서야 어찌 큰 일을 이루려 하느냐?"[23]

하셨소이다. 나무 관세음보살, 나무 석가모니불.

9화에서 궁예의 어머니가 궁예에게 한 말[24]


어머니와의 짧았던 재회 이후 궁예와 종간은 기훤의 수하로 들어가는데, 기훤은 하는 일이라고는 살육과 약탈에 부상병들과 백성들을 걍 내팽개치고 흥청망청 잔치나 벌여대는 전형적인 인간 말종이었다.[25] 아무튼 죽주는 교통의 중심지라 발전의 여지가 있는 곳이었지만, 기훤의 막장 운영으로 인해 의원 하나 없는 심히 낙후된 곳이었고, 승려 생활 당시 의료 기술을 어느 정도 배운 궁예와 종간은 부상병들과 다친 백성들을 돌본다. 별다른 대가 없이 병자들을 돌볼 뿐더러 심지어 부상당해서 식량을 얻지 못하는 병사에게 자신의 식량을 선뜻 내어줄 정도로 궁예는 말 그대로 생미륵에 가까운 모습을 보이고, 덕분에 궁예는 기훤의 부하인 신훤과 원회 및 백성들의 민심을 얻게 된다. 얼마 후 기훤이 전쟁에 참여하지 않는 궁예와 종간에게 불만을 표하자 궁예는 기훤이 어떻게 행동하나 볼 겸 해서 괴산군 약탈에 동행해 본다. 기훤은 괴산을 약탈하고 백성들과 지역 관리들을 살육하며 여성들을 성노예로 끌고 가는 만행을 저지르는데, 이때 궁예는 죽은 관리의 어린 딸아이가 울고 있는 걸 보고선 아이를 끌어안아 달랜다. 기훤은 아이를 내려놓으라고 명령을 내렸고, 아이까지 죽이려는 기훤의 모습에 궁예는 분노하였으나, 아이를 내려놓을 수밖에 없었다.

이후 양길 세력이 자신들의 영역에 있는 괴산을 함락시킨 것에 대해 경고성 서신을 보내자[26], 기훤은 노발대발하며 사자를 죽이려 하다가 수하들의 만류로 대신 사자를 매질하는 선에서 끝내고 그를 돌려보낸다. 거기서 그치지 않고 기훤은 세력 차이도 생각지도 않고 무작정 양길 세력을 정벌하고자 한다. 그러나 병사 수도 많은 데다가 갑주와 병장기도 제대로 갖추고 정규군 못지않은 체계를 갖춘 양길군과 달리, 기훤 쪽은 별다른 전략도 없고 체계 따윈 없으며 군장도 통일하지 못한 오합지졸이자 그저 산적 집단에 지나지 않았다. 원회는 양길과 싸우려고 하는 기훤을 만류하다가 오히려 부하들이 보는 앞에서 술세례를 당하고 두들겨 맞는다. 뭐 어차피 전쟁을 해봤자 얼마 버티지 못하고 금방 다 죽을 게 뻔한 상황이며, 포악하고 무능하고 개차반인 기훤에 대해 그러잖아도 반감을 갖고 있던 신훤과 원회는 결국 그날 밤 쿠데타를 일으켜 기훤을 참살한다. 신훤과 원회는 인망이 두터웠던 궁예를 지도자로 내세웠고[27], 이미 기훤의 잔인무도함이 온 세상에 다 알려져 있는 이상 이 곳에서는 큰 뜻을 펼치기가 어렵다고 판단한 궁예는 스스로 양길에게 항복해 죽주를 바친다.

양길이 정세에 대해 묻자 궁예는 남쪽은 견훤과 신라가 싸우고 있고, 북쪽은 호족들이 있으니 고립된 동쪽인 명주성 지역을 도모해야 한다고 말한다. 내심 궁예를 경계하면서도 자신의 야심을 위해 궁예의 능력을 이용하고 싶었던 양길은 궁예를 본인의 삼녀 미향과 억지로 혼인시키는데, 자기 딸을 주겠다는 것을 끝까지 거절했다간 칼이 튀어나올 기세인지라 승려 신분에 정말로 마지못해 혼인을 승낙한 궁예는 미향을 아내가 아닌 부처님의 제자로 대한다. 궁예가 말한 대로 동쪽을 도모하기 위해 양길은 궁예를 치악산 너머의 석남사로 보내는데, 궁예를 감시하기 위해 평소에 신뢰하던 은부를 부하로 딸려 보낸다. 그러나 이미 양길의 소인배성과 궁예의 인망을 눈여겨보고 있던 은부는 아예 처음부터 궁예 일행을 돕는다. 은부가 지적했듯이 비록 변방이라고는 하지만 그래도 요충지인지라 세력만 불린다면 동쪽으로 충분히 확장할 수 있는 석남사에 완전히 믿지 못하는 궁예를 보내는 건 잘못된 판단이었다.

석남사에 파견된 궁예는 구휼 활동을 벌여 민생을 안정시키고 평등 사상을 전파하며 병사와 백성들과 함께 생활한다. 여기서 궁예는 직접 밭을 갈고 백성들과 같이 식사를 하는 등 직접 솔선수범한다. 덕분에 1년여 만에 석남사 일대는 안정화되었고,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으며, 동시에 동쪽을 정벌하기에 충분한 군세를 모으는 데 성공한다. 거기다가 은부가 궁예에 대해 아주 좋게 보고를 해 주었기에 양길은 이를 믿고선 궁예에게 병사 600명을 지원해주고 동쪽을 정벌할 것을 명한다(16화).

궁예의 군대는 명주성을 제외한 동쪽 지역들을 평정하고, 가는 곳마다 굶주린 백성들에게 식량을 나눠주고 병자들에게 약을 주는지라 수많은 백성들이 궁예군에 몰렸고, 궁예는 수천의 병력을 거느리게 된다. 문제는 구휼 활동을 열심히 하다 보니 명주성에 이를 때쯤엔 서서히 군량미가 바닥나고 있었다는 것. 명주성은 그러잖아도 방어도 견고하고 군사 숫자도 많은 관계로 신중하게 공략하기로 결정하는데, 이 과정에서 양길은 궁예를 북원으로 소환한다. 궁예는 북원에 가던 중 허월과 만나게 되었고, 북원에 당도하자 양길의 경계를 완전히 풀기 위해 계율도 어기고 미향과 초야를 치르는 강수를 둔다. 그리고 은부의 계략 덕분에 양길의 정예 장수들인 환선길, 이흔암, 복지겸을 데리고 갈 수 있게 된다.

이후 궁예는 군대로 복귀하던 중 다시 허월과 만나는데, 동행하면서 궁예의 행동을 유심히 지켜보던 허월은 궁예가 스스로를 미륵이라 사칭하는 거짓 미륵이고, 미륵을 사칭해 나라를 훔치려는 도적짓을 하고 있다고 신랄히 비판하면서 사람들 앞에서 자신이 나라를 훔치려는 도적이라는 것을 시인한 견훤처럼 나라를 훔치려는 도적이라는 것을 시인하라고 궁예를 신랄히 비판했다. 이에 종간은 매우 불쾌해하나 허월이 범상치 않은 인물임을 직감한 궁예는 허월을 쫓아내기는 커녕 허월을 불러 사석에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한다. 당시만 해도 미륵을 단지 세상을 구할 수단으로만 여기고 있던 궁예는 허월의 말에 불쾌해하기는 커녕 오히려 참혹한 말세에 도탄에 빠진 중생들을 구하느라 미륵을 내세우는 것이 그렇게 잘못된 행동이냐며 반문한다. 궁예가 범상치 않은 인물이라고 인정하면서 한편으로 궁예 마음 속에 깊이 숨겨져 있던 욕망과 분노를 지적하던 허월은 독주를 여러 병 비운 끝에 명주성을 궁예에게 주겠다는 기괴한 발언을 한다.

다음 날 군량미가 다 떨어졌고, 명주성을 점령하지 못하면 끝장인 상황인 관계로 궁예는 공격을 개시하기 전 원회를 사자로 보내는데, 알고 보니 허월은 명주의 대호족 김순식의 아버지였고, 허월은 아들에게 명주성을 궁예에게 주라고 명령한다.[28] 덕분에 궁예는 아무런 피해도 없이 명주성을 가볍게 접수했고, 명주성에서 추가 병력들과 장수들인 배현경, 홍유와 물자만 지원받고 그대로 김순식에게 명주의 통치권을 보장해준 다음 철원으로 이동한다.[29]

이후 궁예는 철원을 함락시키면서 건국을 선포하고 국호를 고려[30]라 한다. 그리고 다른 패서 지역의 고구려계 호족들과 왕륭&왕건 부자가 투항하면서 궁예는 송악까지 덤으로 손에 넣을 수 있었고, 왕건 가문에서는 사비를 들여 왕궁까지 지어준다. 이때 궁예는 법회를 열어 지배층들에게 백성들을 착취하거나 억누르지 말라는 매우 이상적인 사상을 전파한다. 이때 왕건의 부친 왕륭의 강경한 반대와 왕건을 견제한 종간의 계략으로 서로 약혼한 사이였던 왕건과 연화는 결혼하지 못하고 대신 궁예와 연화가 결혼하는데, 궁예는 연화와 왕건이 약혼한 사실을 전혀 몰랐다.[31]

또한 이때부터 짚을 엮어서 만들었던 안대를 가죽 안대로 교체한다.

양길이 공격해오자 궁예는 당시 갓 스물을 넘긴 젊은이 왕건에게 총사령관을 맡기는 파격적인 인사를 감행한다.[32] 종간의 우려와 달리 왕건은 능수능란하게 군사를 지휘하여 양길군을 단큐에 박살내 버렸고, 이 전공으로 왕건은 궁예의 의형제가 된다. 여담이지만, 이 이후 왕건에게 한 행동들을 보면 이맘때의 궁예는 왕건을 진심으로 본인의 후임자로 생각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종간이 왕건이 왕위를 노린다고 이간질해도 상관없다고 하고, 왕건을 자신의 침실에 재우고, 자기 다음으로 황제가 돼 보는 게 어떻냐고 하는 등 말이다.

드라마 초반부의 궁예는 호쾌하고 사사로운 것에 연연하지 않는 시원시원한 남자다운 성격을 가지고 있으며, 헤아림도 깊고 지혜로워 창업군주다운 면모 또한 보였다. 기훤의 휘하에 있을 때는 기훤의 무관심에 방치된 다친 병사들을 치료해 주며 자신들에게 배급된 쌀도 내 주는 배려심을 보여주었고, 석남사에서는 대장군인 양길의 사위이자 장수임에도 자신의 수하들을 이끌고 백성들과 함께 손수 밭을 갈고 일을 하였으며, 명주성을 공략하러 올 때는 군량미를 모조리 풀어 자신을 찾아 몰려들은 백성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철원성 공략에서는 투항을 권유하러 갔던 사자가 성 앞 진영의 장수의 활에 죽은 채 돌아오자 진심으로 안타까워하며 "수많은 희생을 막으려 했던 성스러운 죽음이다. 도솔천에 올라 영생불멸 할 것이다."라며 기도를 해 주었다.

황제가 된 이후에도 백성들은 굶주리고 있는데 송악에 궁궐을 짓는 게 마음에 걸린다고 했고, 과거에 인연이 있기는 하지만 일개 신하가 된 왕륭이 죽자 친히 문상을 가기도 했다.[33] 또 비록 적이 되었다고는 하지만 양길의 부하로 있다가 양길을 배신한 양심의 가책과 양길과의 옛정으로 양길과의 전투를 피하려 했고, 비뇌성 전투에서 양길이 패배하자 자신의 아내 미향과 함께 조용히 살 수 있게 도와주겠다고 권하기도 했었으며, 이후 순행길에서 죽주의 태수가 화려한 식기와 기름진 음식을 내오자 "관리가 청렴해야 백성이 편하다."며 호통을 치며 상을 3찬까지만, 고기를 빼고 다시 차려올 것과 음식들을 구휼소의 병자들에게 줄 것을 지시한다. 특히 그 당시에는 고가의 사치품이었던 유리잔에 술을 담아서 준비해 뒀는데, 궁예는 특별하게 유리잔을 지적해서 "황궁에서조차 이런 비싼 것은 쓰지 않아!"라며 유리잔을 집어든 다음에 깨버렸다. 항복한 호족들이 예물과 미인들을 바치자 정색하며 "백성들은 나의 수족이요, 부모요, 자식이라 하였소. 지금부터라도 백성들에게 은혜를 베푸시오."라고 꾸짖었고, 미인들은 궁에서 일을 하게 하고 예물은 군비에 충당하는 모습도 보여주었다. 여기까지만 보면 궁예는 미향과의 사이에서 얻은 아들을 버리는 비정한 아버지의 모습을 보여준 것 이외에는 백성들과 신하들의 존경과 사랑을 받는 인물이었고, 어질고 현명한 성군이자 살아있는 부처나 다름없었다.


2.3. 북벌 집착과 타락의 시작[편집]


태조 왕건 메인빌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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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중반부
중후반부
후고구려편
후백제편
파일:궁예태조왕건.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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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예
견훤




궁예 황제는 자네로 하여 이제까지 이루어온 그 거룩한 미륵의 모습을 잃게 될 걸세. 이대로 계속한다면 말일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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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화에서 박유가 아지태에게 한 조언 중


생각할수록.. 아지태를 만난 것은 비극이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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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간

흔히 청주를 방문해 달라고 초빙하기 위해 온 아지태와 만나고 난 후부터 타락한 걸로 알려져 있지만, 그 이전에 부석사의 경문왕의 초상화 사건을 시발점으로 해서 궁예는 본격적으로 타락한 상태였다.

순행길 중 궁예는 허월의 추천을 받아 한 신라 왕의 영정이 걸려 있는 을 찾게 되었는데, 그것은 다름아닌 경문왕의 영정이었고 분노한 궁예는 영정에 칼빵을 놓는다. 판타지 요소가 많은 태조 왕건에서도 유독 이 장면은 초현실적이면서도 호러스런 연출을 보여주는데, 칼을 꽂은 자리에서 붉은 피까지 흘러나온다. 궁예에게 있어서 경문왕은 줏대없이 남의 말에 휘둘리기나 하다가 갓난아기이던 아들을 버린 비정한 막장 아버지일 뿐이었다. 이 사건 직후 궁예는 본격적으로 신라에 대한 적개심을 불태우며 "신라를 멸도(滅都, 멸망시켜야 할 도읍)라 부르겠다!"라고 공식적으로 선포했다. 게다가 궁예가 깊게 꽂아 안 빠지는 칼을 왕건이 쉽게 뺀 것도 심상치 않은 뒷소문을 불러왔고, 궁예는 이때부터 흔들림이 없는 강력한 왕권을 추구하기 시작했으며 이후 청주를 방문해 달라고 초빙하기 위해 온 아지태는 궁예를 만나자 그의 마음을 이용하기 시작했다.

당시 궁예는 자신이 소망하던 불국정토를 이미 현실에서 이룩한 상태였는데, '그러면 앞으로는 뭘 하면 좋단 말인가?'라는 고민에 사로잡혀 있었다. 바로 거기에 아지태가 "그러면 이제 대동방국을 만드시면 됩니다."라고 하면서 나타난 것. 이 북벌에 반한 궁예는 순행을 마치고 돌아오자마자 공개적으로 대소 신료들에게 "고려라는 작고 거추장스러운 옷을 벗어버리겠다." 즉 고려를 버리겠다는 발언을 하였으며, 궁예의 이 발언에 종간을 포함한 패서계 호족인 신료들은 크게 놀란다. 아지태를 조정으로 데려온 후 궁예는 아지태에게 고려는 옛 고구려의 망령에 지나지 않고, 고려라는 틀속에 갇혀서는 안 된다며 나라의 이름을 바꾸고 고구려의 부활을 꿈꾸는 패서지역의 고구려계 신료들을 멀리하며 고려가 아닌 새로운 나라로 바꿔야 한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아지태의 아첨을 가려듣지 못한 궁예는 자신이 진짜 미륵이라는 과대망상에 빠져가면서 송악에 도읍을 정하였고, 궁궐도 이미 있음에도 송악은 원래 왕씨 집안의 것이니 다시 돌려줘야 한다는 구실로 철원으로 수도를 옮기겠다며 무리한 궁궐 건설을 지시한다.[34] 더불어 백성과 신료들에게 옴 마니 반메 훔을 외우게 하는 등 초심을 잃고, 본격적으로 제대로 권력에 타락하게 되며 미륵 신앙을 권력 유지용으로 쓴다. 다만 권력욕과 망상에 시야가 흐려진 거지, 아직 정신은 멀쩡했기에 석총이 궁예는 미륵이 아니라며 간접적으로 직언을 날릴 때[35] 석총을 나무라고 경고할 뿐 별다른 해코지는 하지는 않았다.[36] 물론 석총도 궁예가 이제 제발 정신 차리고 초심으로 좀 돌아오기를 바라며 충고를 한 것이었다.

원래 미륵 신앙은 민심을 모으고 국력을 결집시키는 수단에 지나지 않았다. 극초반 허월이 명주를 바치기 직전 궁예의 성품을 시험해 보기 위해 궁예가 미륵을 사칭하고 있고, 미륵을 사칭해 나라를 훔치려는 도적짓을 하고 있다고 하면서 자신이 나라를 훔치려는 도적이라는 것을 사람들 앞에서 시인한 견훤처럼 나라를 훔치려는 도적이라는 것을 사람들 앞에서 시인하라고 말하며 백성들 앞에서 궁예를 꾸짖는 장면이 나오는데, 궁예는 이게 잘못된 행동이냐며 당당한 태도를 보인다. 이후 허월과의 사석에서 궁예는 백성들에게 희망을 주고 민심을 수습하기 위해서 미륵을 이용하는 것이라며 자신의 본심을 털어놓는다. 또한 법회를 열었을 때 궁예는 미륵의 세계를 욕심이 없는 세계, 고통이 없는 세계, 만민이 평등한 세계라고 칭하기도 했다. 궁예는 미륵 신앙을 도구로 이용하기는 했지만, 어디까지나 민심을 안정시키고 백성들에게 희망을 주고자 하는 수단으로 이용했을 뿐이었다.

미륵 신앙이 본격적으로 전제 황권에 악용된 것은 궁예가 아지태의 농간에 놀아나면서 시작되었고, 여기에 놀아나는 궁예에게 종간은 백성을 최우선으로 여겼던 자신들의 초심을 수없이 간언하나 모조리 씹혔다. 게다가 아지태의 허황된 북벌에 마음을 빼앗긴 나머지 궁예는 '높은 이상에는 작은 희생이 생기기 마련'이라는 아집이 생겼고, 나아가 "미륵인 나는 달리려고 하는데 너희 똥막대기들이 쫓아오지를 못해!"라는 말을 하며 답답해한다. 때문에 타락 전의 법회와 타락 후의 법회들을 보면 상당한 차이를 볼 수 있다. 송악에 도읍을 정할 때만 해도 법회를 검소하게 열면서 자신을 직접 미륵이라 표현하지도 않았으며, 여기서 궁예는 위정자들과 호족들에게 무리한 욕심을 부리지 말고 백성들을 착취하지 말라고 타이르는 어투로 설교를 했다. 그러나 타락 후에는 법회를 상당히 사치스럽게 열었으며, 법회의 내용도 궁예 본인의 신격화 내지는 자신에게 모든 것을 바치면 나중에 더 큰 상을 내리겠다는 전형적인 사이비 종교 교주의 모습이었다. 여기에 기존의 불경을 무시하고 본인이 손수 경전을 저술하려고까지 해서 종간도 '불경은 오직 부처님께서만 쓰시는 것인데...'라며 큰 충격을 받았다.

그 악명 높은 관심법도 이때부터 언급되기 시작한다. 자신은 오래전에 도를 깨달았으니 관심법을 쓸 수 있다고 자만하는 궁예의 모습은 덤.

철원으로 도읍을 옮기기 이전, 금성 상륙 작전이 막 시작되었을 때 궁예는 판단 능력이 흐려졌다는 걸 보이기 시작한다. 이 금성 상륙 작전은 패서 지역 호족들의 전 재산과 많은 국고를 들인 대규모 계획이었고, 100여 척의 전함과 2천여 명의 수군 병력이 동원되었으며, 고려의 명장들과 맹장들이 다수 참전하는 대규모 전투였다. 이렇게 국운을 건 대전투가 벌어지는 상황에서 궁예는 수도에서 보고를 시시각각 받으며 유사시를 대비한다는 생각을 하는 게 아닌, 황제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게 말이 되는 소리냐며 철원으로 가버린다. 그나마 행정 능력이 뛰어난 종간이 송악에 남아있어서 망정이지, 이런 다급한 상황에서 중요성이 상당히 떨어지는 천도 계획만 생각한다는 점에서 궁예의 판단 능력이 얼마나 떨어졌는지를 알 수 있다.

게다가 궁예는 절약과 절제의 미덕을 버리고 극단적인 화려함과 거대한 규모를 추구하기 시작한다. 국가를 건설할 때만 해도 오히려 종간이 군주의 위엄을 나타내기 위해 적절히 사치 좀 부리라고 간언(3화)할 정도로 실용성과 절약의 미덕만 따졌다. 심지어 이 간언이라는 것조차도 '환관도 두고 궁녀도 두시고...' 하는 정도로 전/근대 시대에는 모두가 당연하게 생각하던 것이었다. 그러나 타락하기 시작한 후에는 반대로 종간이 초심으로 돌아가자고 간언할 정도로 법회의 화려함과 규모에 지나치게 집착한다.

아지태를 만나고부터 궁예는 한계와 타락의 조짐을 보였으나, 그래도 이때까지의 궁예는 그저 평범한 암군일 뿐이었다. 그리고 후술할 암살 미수 사건이 벌어지면서 궁예의 행적과 사상은 완전히 달라지게 된다.

61회에서 궁예는 고려는 옛 고구려의 망령같은 기분이 든다며, 아지태가 건의했던 한없이 큰 동방국이란 뜻으로 나라의 국명을 마진으로 바꾼다.

2.4. 관심법(觀心法)마구니(魔球尼)[편집]


미향은 자신의 아버지는 물론 다른 가족들이 궁예의 수하들에 의해 몰살당한 것에 대해 대놓고 궁예에게 "미륵이 피를 묻힐 수 있냐"며 원망했는데, 궁예는 타락한 이후로는 거짓 미륵이자 미륵을 참칭한 마구니라 불려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였다. 이 정신질환은 아지태가 주인을 갈아타려 시도한 결정적인 원인이 되었지만, 사실 궁예의 인간 불신에는 정신질환 이전에도 이미 그 단초가 있었다. 자신이 총애하는 아지태를 사형인 종간이 일부러 죽이려 했음을 눈치챘던 것이다. 궁예가 의심가는 인물을 잡아 일부러 그랬는지를 추궁했으나 그는 극구 부인했고, 종국에는 를 깨물어 자결하고 만다.[37] 심증을 굳힌 궁예였지만 더 이상 추궁을 할 수도 없는 노릇이라 종간을 불러 이 일을 없던 것으로 하겠다고 일방적으로 사건을 종결지었는데, 그 직후에 독화살 사건이 발생한 것이었다.

그동안, 짐은 중생들을 가엾이 여겨 모든 것을 순리로써 대해 왔소이다. 그러나 이젠 그렇지 않을 것이오.

난 내가 지은 경전의 법에 따라 그 이치를 깨닫게 할 것이요 그리고 지금 까지는 쓰지 않았던 관심법을 동원하여 흑과 백을 가리고 정의와 불의를 갈라 내어 진리의 세상을 천하에 드러낼 것이외다.

짐의.. 미륵 관심법으로 말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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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화, 주요 조정 인사를 모아놓고 관심법을 사용할 것을 선언하며.

무리한 천도로 인한 후고구려의 민심 이반과 국론 분열을 알아챈 후백제의 최승우는 양길의 옛 부하들을 이용해 궁예 암살을 시도하고, 그렇게 철원의 공사 현장에서 독화살을 맞고 쓰러진 궁예는 양길, 미향, 경문왕의 환영을 쓰리 콤보급으로 보면서 자신을 저승으로 끌고 가려는 악몽을 꾸며 사경을 헤멘다. 궁예가 사경을 헤매는 일주일 동안 종간은 금강산의 도인을 초청해 궁예를 치유하는 한편, 화살을 쏜 범인들이 최승우가 보낸 후백제의 자객들이라는 걸 눈치채고 그들에게 거짓 진술을 받아냄으로써 궁예가 의식이 없는 절호의 기회를 이용하여 그의 총애를 받는 아지태와 왕건을 동시에 모반 혐의로 죽이고자 철저히 준비를 시도한다. 그러나 운이 나쁘게도 처형 전에 다시 깨어난 궁예는 자신이 실신했었던 일주일 간의 정무 보고를 종간에게 올리게 지시하고, 종간이 아지태와 왕건을 모반 혐의로 옥에 가두었다는 보고를 보자마자 대노한다. 이 대목에서 종간을 불러올린 궁예는 안대까지 벗고 맨눈으로 토해낸 저승 다녀온 소감을 말한다. 이 직후 나오는 궁예의 독백을 살펴보면 '내가 죽고 없으면 이 나라를 이끌어갈 만한 인재가 이렇게 없단 말인가?' 자신이 보기에는 왕건과 아지태 모두 죄가 없으며 이들에게 죄를 뒤집어씌우려는 얕은 술책이 있었을 뿐인데 그토록 믿었던 종간이 겨우 이 정도 계략에 놀아날 정도밖에 안 되는가 하는 것. 물론 종간은 왕건과 아지태에게 덤탱이를 씌우려는 것이므로 궁예의 판단이 맞기는 했다.

이어 "세상은 이제 다른 모습의 미륵을 보게 될 것이오."라며 독기 품은 선언을 한 궁예는 피비린내 진동하는 지옥의 서막을 이튿날 열게 된다. 친국 자리에 모반 사건의 용의자로 끌려온 인물들인 아지태, 왕건을 포함한 왕씨 일가, 진범인 후백제의 첩자들을 세워놓고 궁예는 관심법을 감행했고 3명의 진범들 중 결국 극한의 공포에 질려 사실을 자백한 1명[38]만 살려보내는 것으로 사건을 처리한다. 궁예의 상징인 철퇴 처형씬이 이때 처음으로 등장하는데 법봉 제작은 후의 일이다.[39] 종간이 일주일을 끈 사건을 이런 식으로 단 몇 분 만에 처리한 궁예는 종간을 비웃듯 흘겨보며 한 마디를 던진다.

궁예: 이렇게 간단한 것인데... 내원은 몰랐던 모양이구려.

종간: .......

76화 中

이때를 시발점[40]으로 해서 궁예는 '모두가 거짓말을 하고 있으며 공포만이 옳은 방법이다.'라는 생각을 굳히게 된다. 독화살 때문에 반죽음을 경험한 뒤로 궁예는 '천하의 미륵도 언젠가는 죽으며 할 일은 많은데 시간은 너무나 없다'는 조바심에 사로잡혀 왕건마저 지적할 정도의 강박증에 시달리게 되었다. 그러나 정신 이상으로 인한 실정 때문에 북벌은 고사하고 내정부터 악화되기 시작하며 철원 천도 이후 궁예는 병적으로 북벌에 집착하는 모습을 보인다. 천도 및 지나치게 화려한 법회 때문에 국력을 모조리 소모했고, 지나친 노역으로 백성들이 농업에 제대로 종사하지 못하는데 가뭄까지 든 상황에서 궁예는 미리 북벌을 준비해야 한다며 새로운 군단을 편성하고 세금과 군역과 노역을 배로 올려버린다. 권력의 단맛과 영토를 넓히는 야심으로 인해 관심법으로 외척이나 관심법을 하면서 누구를 죽일까 고민하다 기침한 신하를 마군(魔軍)으로 몰아 철퇴로 쳐 죽이게 하고, 열병식 때 비웃은 아녀자들은 물론이고 마음에 안 들면 모조리 죽였다. 심지어 한 마을의 죄 없는 백성들을 몽땅 불태워 죽인 것도 모자라서 그 마을이 소속된 지역 사람들까지도 무차별적으로 모조리 학살하기까지 한다.[41] 사건의 발단은 궁예와 왕건 일행이 행차하던 도중 어느 민가에 숨어 있던 어느 백성 5명[42]이 궁예에게 돌을 던진 것으로, 궁예는 이 돌들을 맞고 머리에 피를 흘리게 된다. 당연히 극도로 분노한 궁예는 그 마을 주민들을 모두 잡아오라는 명령을 했고[43], 잠시 뒤 궁예 앞에 그들은 모두 끌려왔지만 모두 한결같이 모른다고,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고만 대답할 뿐이었고 범인들은 모두 튀었다고 추정되는 보고만 받았을 뿐이었다. 이때 정상적인 지도자라면 무고한 백성들은 다 풀어주고 대신 총책임자인 고을 지배자에게 죄를 물으며 진범을 수배하라고 명령했겠지만, 궁예는 무고한 마을 사람들을 다 창고에 가두고 불을 질러 태워버리라는 명령과 함께 가축들 역시 도축해서 병사들을 배불리 먹이라는 엽기적이고 사이코패스스런 명령을 내렸다. 이 명령은 왕건과 주변 인물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그대로 실행되었으며, 여기서 그치지 않고 궁예는 군사들을 시켜 그 마을이 소속된 해당 지역도 모두 불살라 버리고 해당 주민들도 모두 죽여버리게 했다.[44]

또 잠시 후에는 수군 훈련장으로 갔는데, 인력이 모자라서 할 수 없이 데려다 쓰는 몹시 부실하고 실수가 상당히 잦은 신라군 포로 출신 병사들을 1명도 남김없이 붙잡은 후에 바다에 빠뜨려서 죽여버리고[45], 압해도 전투에서 왕건에 의해 포로가 된 견훤의 의형제이자 부하 장수인 수달을 산 채로 기름을 부어 불에 태워 죽이며[46] 북벌과 후백제, 신라와의 전쟁에 집착하는 등 진시황제조차도 저리가라 할 수준의 미치광이 폭군으로 타락해버린다. 작중에서 궁예가 진시황을 본받아야 할 군주라고 칭찬한 적이 있었는데, 이때의 궁예는 진시황보다도 훨씬 심한 폭군으로 추락해버린 상태였다.[47] 작중 궁예의 직접적인 살육은 이 정도만 묘사되지만, 궁예가 언급하기를 왕건에게 북벌 계획이 실패했음을 시인하면서 북벌을 중단하자고 간언한 이들을 모조리 때려죽인 적도 있다니 작중에서는 이것 말고도 수많은 참혹하고 끔찍한 살육이 있었음을 유추할 수 있다. 궁예는 정말로 미친 인간인지, 아니면 무슨 목적이 있어서 냉철한 감정으로 이성적 판단에 따라 이런 짓을 하는지 모를 정신나간 행동을 서슴치 않는다.

95회에서 나라의 국명을 마진에서 태봉으로 바꿀것을 결정하고, 96회에서 태봉으로 바꾼다.

궁예의 몸 상태가 말이 아닌 것도 궁예의 폭정에 한 몫 했는데, 도인의 기치료로 간신히 깨어나기는 했지만, 그 후유증이 크게 남아 있었다. 특히 협심증이 빈발하게 되었고 특히 스트레스로 협심증이 생길 때마다 독주로 병나발을 불어야 간신히 고통이 진정될 정도였다. 이런 상황에서 정상적인 사고를 한다는 것은 기적과도 같은 일이었고, 종간을 비롯한 측근들은 궁예가 독주보다는 탕약을 마시고 안정을 취하기를 권했으나, 궁예는 탕약을 마시면 몸이 나른해진다며 계속 독주로 병나발을 불었고, 결국 증세는 더욱 심해지게 된다. 석총의 환영으로 인한 리얼타임 킬링쇼는 덤. 이 상태가 몇 년이나 지속되자 궁예는 변이형 협심증과 알코올 중독의 악순환을 겪을 뿐더러 정치는 고사하고 신하들을 대하기도 어려운 상태에 이르렀는데, 거의 하루 종일 혼자서 독주를 마시는 게 일상일 지경이었다. 실무를 봐야 할 황제는 폐인처럼 지내고 있고, 그렇다고 왕건이 시중을 맡기 전에는 다른 이가 주도적으로 정치를 할 수 있던 것도 아니었으니 국가가 제대로 돌아갈 리가 없었다. 몇 년간 독주 병나발을 불으며 살아간 궁예는 알코올 중독으로 수전증까지 생겼고, 마침내 죽은 석총이 자신을 비웃는 환영까지 보기 시작한다(97화). 이 사건 이후로는 밤마다 석총의 환영에 칼을 휘두르며 광기를 부릴 정도였는데, 이때 내관들이 궁예를 말리다가 궁예가 휘두르는 칼에 다치거나 죽는 일까지 발생했다. 거기다가 아지태의 배신에 이어 종간과 왕건이 일찍이 연화의 정혼 사실을 숨겼던 일까지 소급되면서 궁예는 인간 불신의 극에 달한다. 이 와중에 군인이 훈련도중 말에서 떨어진 일을 두고 깔깔대며 웃던 부녀자들을 전부 죽이기도 했는데 이 일은 2010년대 이후 재평가되었다.[48]

이후 보다 못한 종간이 궁예의 병을 치료하기 위해 백두산 도인을 모셔와서 100일 기도 약을 지어먹기까지 하는데, 약을 막 완성한 백두산 도인의 독백에 따르면 궁예의 운명은 이미 끝이 보이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걸 거스르려 하니 도인 자신도 끝날 날이 임박했다며 탄식하는 건 덤. 예견대로 궁예는 약이 굉장히 세다는 경고에도 불구하고 걱정 말라고 해놓았으면서 곧바로 약을 먹고는 바로 각혈하면서 이건 독약이라며 약을 내 온 도인을 죽이라는 등 정줄놓 상태에 빠진다. 결국 이 명령은 그대로 실현되어 도인은 궁예의 명령에 당황한 은부에 의해 참수된다.[49] 그래서 종간은 은부에게 궁예가 "제정신이 아닌 상태에서 한 명령인 만큼 도인을 살려둘 것이지, 왜 명을 그대로 시행하냐?"며 은부를 꾸짖었지만, 은부 역시 지금 상황으로 그럴 수밖에 없다고 해명한다.[50] 약을 먹고 3일을 푹 잔 후 다시 일어나니 병이 완전히 낫기는 했지만, 이미 예전의 궁예의 모습과는 180도 다르게 성격이 더 변해버린 상태였다.[51] 그야말로 사이비 종교 교주가 다 되어서 관심법 운운하며 괜한 사람들을 때려죽일 때는 왕권에 대한 엄청난 집착뿐만 아니라 폭군의 면모까지 보인다.

2.5. 강비의 처형과 왕건의 역성혁명[편집]


분명 정신질환은 나았지만, 이미 그의 성격은 정신질환과 무관하게 일찌감치 잔뜩 망가져 있었고, 이런 인물이기 때문에 의심병이 도져 신료들이 다 보는 앞에서도 자기 부인인 황후와 두 아들을 마구니라 부르며 부인은 법봉을 불에 달군 다음 음부에 쑤셔넣어 죽인 이후[52] 두 아들마저 덤으로 때려죽인 후 왕건이 반역을 했다고 말하면서 미륵 관심법을 쓴다면서 추궁할 때는 그야말로 긴장감이 상상을 초월한다.[53] 심지어 궁예의 최측근이자 그 폭정을 최대한 은폐하려 했던 종간마저도 크게 실망하여 황후와 왕자들의 처형 이후로는 은부에게 "우리가 잘못 생각하였네. 이제는 인정하지 않을 수 없네. 폐하께서는 실성하셨네. 병이 나으신 것이 아니야. 더해지셨어. 만인이 보는 앞에서 황후마마를 그렇게 죽이시다니... 어떻게... 어떻게 그렇게... 실성을 하지 않고서는... 어떻게..."라고 한탄하며 말문을 잇지 못할 정도였고, 은부 역시 종간의 말에 공감하며 같이 한탄한다.[54] 이 시점에서 궁예에게 절대적인 충성을 바치는 주/조연 인물은 금대 정도밖에 남지 않았다.

일찍이 궁예가 기훤의 수하에 있을 적에는 그들의 학살과 살육을 못마땅하게 여겼고, 양길의 수하였을 때에는 그 대범하지 못한 의심병과 욕심이 신세를 망친다고 디스했었지만 결국 그야말로 내로남불이 되었다. 타락한 뒤의 궁예는 그들의 단점이 오히려 한층 더 스케일 업된 기훤의 학살과 양길의 의심병이 업그레이드로 조합된 최악의 정신적 키메라가 되어 있었다. 타락한 이후 궁예의 행적에 대해 궁예가 타락하기 이전에 고인이 된 기훤, 양길, 도선대사가 알게 될 경우 기훤과 양길은 궁예가 자신과 더한 학살자가 된 것과 의심병 환자가 된 것을 보고 비웃고 있었을 것이고 범교와 궁예의 유모는 타락한 궁예를 본다면 뒷목 잡고 쓰러질 것이며 도선대사는 이럴 줄 알았다고 한심하게 여겼을 것이다. 또한 궁예가 미향과 자신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을 친부모도 전혀 모르게 한 상태에서 효선이라는 법명을 지닌 승려로 살게 한 것과 타락한 이후에 강비와 자신의 아들들이자 태봉국의 왕자들인 청광과 신광을 죽인 것은 어린 시절의 궁예 본인을 죽이려고 했던 경문왕김위홍 등 신라 왕실과 다를 게 없는 행적이었다. 그리고 궁예가 태어났을 당시 점을 보는 일관이 그 왕자가 재앙의 씨앗이 될 것이라고 예언을 했었는데[55] 결국 그 예언은 사실로 증명하는 꼴이 되어 버렸다.

강비의 처형을 방관한 궁예의 최측근 책사 종간과 본의 아니게 이러한 사태를 유발한[56] 근위대장 은부마저도 궁예가 미쳤다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다고 한탄할 정도로 강비 처형 건은 모든 이들에게 엄청난 충격과 트라우마를 안겨다 주었다. 특히 이전까지는 궁예의 공포 정치에 순응했던 신하들 대다수가 부디 제발 강비의 목숨만은 살려달라고 간언을 하였으며, 심지어는 그 종간과 은부조차 그러면 안 된다고[57] 생각하며 호소할 정도였다.[58] 이렇듯 강비는 인망을 얻고 있던 황후였는데, 이런 인물이 끔찍하고 잔혹하게 살해당했으니 대다수의 사람들이 경악하며 충격을 받는 건 당연지사.

논리적으로 보면 작중 강비의 처신들은 다른 궁예에 의한 무고한 희생자들과는 달리 궁예에게 처형당할 만한 것이 솔직히 사실이었지만[59], 도를 넘게 공개적으로 끔찍하고 잔혹하게 처형한 것이 크나큰 문제였다. 여기서 끝나도 이미 최악인 마당에 궁예는 그것도 모자라 강비와 태자들의 시신들을 그냥 산에 내다 버리라고 지시했다. 당대의 이름 높은 고승들인 형미와 그의 제자들이 이를 수습하고 도성에서 공개적인 대규모 장례식을 거행해 여론이 악화되자 격분한 궁예는 형미를 초파일 대낮에 저잣거리에서 처형해 버리는 역시나 인륜을 단단히 저버린 짓거리를 저지른다. 형미의 처형으로 인해 황후와 태자들에 대한 궁예의 분노는 더더욱 커져 황후와 태자들의 시신을 불태우는 최악의 만행까지 저질러 신료들과 선비들과 승려들과 백성들의 경악과 분노를 불러일으킴으로써 사태는 더욱 커졌다. 종간은 궁예에게 형미를 죽이면 민심이 동요하니 살려주거나 정 죽이겠다면 시일을 뒤로 미루자고 요청했다. 이에 궁예는 미룬다면 미루겠지만 보란 듯이 초파일에 죽이겠다고 답했고, 이는 그대로 시행되었다.

왕건은 이번 사건에서 무사히 빠져나가기는 했지만, 왕건이 죽게 되면 그 다음 타깃은 꼼짝없이 자신들이 될 것이라는 불안감이 신하들과 장수들 사이에서 퍼져나가기 시작한다. 물론 궁예는 왕건은 전혀 죽일 생각이 없었지만, 타인의 시점에서는 미치광이가 자기 가족들을 살해한 것도 모자라 의형제까지 어처구니 없는 이유로 있지도 않은 죄를 뒤집어씌워 죽이려 드는 것처럼 보였던 것. 결국 궁예의 공포 정치에 견디다 못한 홍유, 배현경, 신숭겸, 복지겸 등의 4기장과 염상은 역성 혁명을 준비하는데, 이 과정에서 내군 출신인 염상은 자신의 후임이던 장일을 회유하고 역시 궁예에게 회의감을 가지고 있던[60] 장일은 회유에 넘어가 가담했으며, 내군에 거짓 정보들만 들어가게 만들어 은부가 역성혁명에 제대로 대처를 할 수 없게 만들었다. 그 의심 많은 성격의 소유자 은부도 염상과 장일이 배신할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는지 정보가 제대로 들어오지 않았음에도 쿠테타 직전까지 염상과 장일을 전혀 의심하지 않았다. 그러나 비록 염상과 장일의 배신은 눈치채지 못했지만 며칠 동안 군의 이동 상황들에 대한 정보가 제대로 들어오지 않았고, 또 내원인 종간과 자신의 통제도 받지 않은 상태에서 수도인 철원의 군대가 마음대로 움직이고 지방의 군대들이 도성으로 올라오자 그때서야 "반역이 일어났다."고 한 발 늦게나마 경악하고 이에 대처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군대는 이미 배신한 데다가 염상과 장일까지 배신을 해 말 그대로 한 발 늦은 상황이었다.

종간은 이 이전에 뭔가 일이 벌어질 것이라는 걸 직감하고 있었고, 어떻게든 왕건을 제거하고자 임춘길을 이용해 고경참문(古鏡讖文)을 만들어 냈으나 학자들과 최응이 이를 대놓고 방해하면서 실패로 끝나고 만다. 가짜 유물을 해석하는 학자들과 최응은 문구를 있는 그대로 왕건이 궁예를 끌어내릴 것이라고 풀어 올렸다가는 오히려 벌을 받을 것이라는 판단에 궁예를 찬양하는 것으로 꾸며내기로 합의하고, 종간은 궁예로부터 이러한 내용을 듣고 자신이 의도한 해석이 맞다고 진언하지만, 궁예로부터 돌아온 대답은 "또 왕건 아우 이야기... 이제 제발 그만 좀 하시구려!"라는 핀잔 뿐. 이 직전에 궁예는 관심법을 이용해 왕건을 절대적으로 신뢰한다는 사실을 대놓고 공표한 데다가 궁예는 원래 예언이니 뭐니 하는 건 잘 믿지 않는 성격이었다. 따라서 고경참문을 제대로 해석해봤자 궁예가 왕건을 반역죄로 잡아들이기는 커녕 오히려 학자들을 괘심죄로 때려죽일 게 뻔하니 학자들이 일부러 거짓 해석을 한 것이다.

이후 종간은 최응에게 임금을 속이는 대죄인 기군망상죄(欺君罔上罪)를 범했다고 언질을 하지만, 최응은 최응대로 감히 기군망상죄를 운운하냐고 받아치고 이 고경참문이 평소의 종간이 쓸 법한 계략이 아님을 지적한다. 합리적인 내원이 저런 계획을 쓸 정도면 아주 심각한 상황이라는 것이다. 사실 종간은 강장자의 처형 당시 왕건을 엮어 넣을 것을 간언하는 은부에게 명분이 있어야 한다며 함부로 사건을 이용하는 것을 경계한 적도 있었다. 이렇게 냉철한 인물이 조악한 예언 조작이나 할 정도로 상황이 매우 악화된 것이었다. 이로서 단순히 왕건 하나만 제거한다고 해결될 상황이 전혀 아님을 깨달은 종간은 삶의 희망을 포기하고 모든 것을 정리하기 시작한다.

그 와중에 현실 감각을 완전히 망각해버린 궁예는 빨리 삼국통일을 하자며 농번기에 군사를 일으켜 상주를 점령하고 신라후백제를 공격하자고 한다든지, 이미 수도를 두 차례나 옮겼음에도 수도를 또 평양으로 옮기자고 하는 등 온갖 망상들을 내놓는다. 심지어 모든 백성을 군사로 조련하여 북벌을 하겠다는 헛소리까지 지껄인다. 종간으로부터 이를 전해들은 은부는 까짓거 하자면 못할 건 뭐냐고 하지만, 종간은 백성들이 너무 지쳐서 가라고 해도 가지 않는데 뭘 할 수 있겠냐는 반응을 보인다. 물론 구체적인 계획도 세우기 전에 태봉국이 먼저 망해버리면서 궁예의 계획은 보기 좋게 물거품이 되어버리기는 했으나, 이미 주요 장수들은 하루빨리 궁예를 끌어내릴 생각만을 하고 있었고, 상주는 지형상 공격하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박술희가 오랜 시간 공을 들인 곳이라서 후백제보다 오히려 태봉에 훨씬 우호적인 지역이었다.[61] 게다가 훈련하는 데에 필요한 군량도 갈수록 바닥을 드러낼 지경에 이른 태봉국과 달리 후백제는 여러 번의 대패로 인한 피해도 금방 복구할 수 있을 정도의 강한 국력을 지니고 있었으니 설사 계획이 실행된다고 한들 성공했을 거라는 보장은 전혀 없었다.

한편 왕건 역시 본격적으로 흔들리고 있었다. 물론 왕건 본인도 궁예한테 불만이 많았던 건 매한가지였지만, 그래도 의리와 충성심으로써 여전히 형이자 주군으로 여기고 있어 역성혁명을 거부하고 있었으나, 왕건 역시 자신이 아무리 역성혁명을 거부한다 한들 궁예는 결코 오래 가지 못한다는 사실을 직감하고 있었다. 궁예가 왕건을 따로 불러내 가진 술자리에서 왕건이 변심하지 않았다는 걸 알고 있었는데도 관심법을 쓴 것에 대해 사과하며 웃자 왕건은 눈물을 흘리며 용서해 달라고 말한다. 그 뒤 왕건은 신료들이 궁예를 몰아내고 그 자리에 서 달라고 간청할 때도 계속 거절했으나, 결국 첫째 부인의 설득에 눈물을 머금고 수락한다. 아직 상황을 모르던 궁예는 마지막을 예감하고 찾아온 종간과 얘기를 나누던 중 역성혁명이 벌어졌다는 보고를 받게 되는데, 이에 종간은 궁예에게 작별 인사를 한 뒤 떠난다. 이후 종간은 왕건이 오기 전 효과가 천천히 나타나게 하는 독을 미리 마시고, 한참 뒤에 본인을 체포하기 위해 궁에 들이닥친 왕건을 만나서 몇 마디 이야기를 나누다가 체포되기 직전 그 미리 마신 독의 독기가 퍼져서 왕건 앞에서 쓰러진 채로 최후를 맞는다.

한편 궁예는 은부, 금대 및 황제파 내군 병력과 함께 궁을 탈출하고자 했으나, 장일이 이끄는 왕건파 내군 병력에게 공격받아 피해를 입었고[62], 북쪽으로 도주하다가 매복하고 있던 홍유와 배현경에게 저지되어 지금의 경기도 포천시강원도 철원군 사이에 위치한 야산인 명성산에 포위된다. 결국 모든 희망을 잃은 궁예는 최후를 받아들이기로 결심한다.

2.6. 최후[편집]


궁예 : 이보게 아우...대업을 이루시게. 내가 못다한 북벌을 그대가 이루어야 할 것이야. 대제국을 이루시게. 그 말을 하고 싶어 아우를 보자고 한 것이야.

왕건 : 폐하....

궁예 : 난 일찍이 아우를 죽일 수 있었어. 허나 그렇게 하지 않았어. 왠 줄 아는가? 아우가 형보다 나았기 때문이야. 부디 대업을 이루시게. 내가 못 다 한 모든 것을 아우가 이루어야 할 것이야. 아우가 말이야.

왕건 : 폐하...! 형님 폐하..!!!

태조 왕건 120화


이후의 죽음은 역사서와 다르게 비장하고 카리스마 있게 한 시대를 풍미한 영웅다운 최후로 각색했다. 궁예는 은부에게 자신의 어검이 거기 있다며 마지막을 부탁하고, 술 생각이 난다며 왕건을 불러줄 것을 부탁한다. 그 뒤 계곡에 앉아서 왕건이 찾아오는 것을 기다리며 "결코 짧지 않은 세월이었어. 인생이 이 찰나와 같은 줄 알면서도 왜 그리 욕심을 부렸을꼬? 허허허... 이렇게 덧없이 가는 것을... 이렇게 가는 것을..."이라고 홀로 말하며 착잡해한다. 그리고 잠시 동안 어린 시절부터 신라를 피해 도망한 일, 불가에 입문하고 종간을 만난 일, 도선으로부터 질책을 받은 일, 석총과 아지태, 강 장자, 강비, 두 태자 등을 끔찍하게 처형한 일들을 회상하며 자신의 악행들을 후회하는 모습을 보인다.

그 후 정말로 자신을 찾아온 왕건을 보면서 고맙다는 듯 흐뭇하게 미소를 짓다가 마지막으로 을 나누며[63] 마치 광기에 빠지기 이전과 같이 허심탄회하게 왕건과 이야기를 나눈다.[64] 궁예는 강비 국문과 처형 당시 왕건을 국문했던 것에 대하 다시 언급하며 자신은 작정했다면 왕건을 죽였겠지만 그러지 않은 건 그가 자신보다 나은 인물이라서 그랬다고 다시금 알려준다. 역성혁명을 일으킬 때도 궁예의 목숨을 보장할 것을 약속했던 왕건은 그게 허언이 아닌지 "편히 쉴 곳을 마련했으니 함께 가시옵소서!"고 제안하나, 궁예는 "정말 편해지는 길은 눈을 감는 것 뿐."이라며 담담하게 말한 뒤[65], 자신이 이루지 못한 염원을 이뤄달라는 마지막 당부를 남긴 뒤 미리 부탁받은 은부에게 신호를 보내[66] 그가 휘두른 어검에 맞고 자신의 실책을 후회하는 유언을 남기고 최후를 맞이한다. 이후 은부도 본인이 미리 부탁해둔 대로 금대가 휘두른 칼에 맞아 죽고, 금대 역시 자신의 검으로 배를 찔러 자결한다. 남은 병사들과 내관들은 모조리 왕건의 혁명군에 투항했고, 이로써 왕건의 역성혁명은 성공한다. 그러나 왕건은 그 장면을 눈 앞에서 보고도 기뻐하기는 커녕(혹은 그럴 새가 없거나 느끼지도 못하고) 이제는 영원히 이승으로 돌아올 수 없게 된 궁예의 시신을 부둥켜안고 통곡한다. 그리고 궁예의 과거 모습들을 비춰주며 드라마의 나레이션을 맡은 김종성스펀지에서도 보여준 인상적인 목소리와 해설로 궁예의 일대기는 마무리된다.

이처럼 궁예가 드라마에서 주인공 왕건을 묻어버릴 정도의 캐릭터성과 존재감을 뽐내다보니 최후 역시 시청자들에서 큰 화제가 되었다. 원래라면 궁예가 죽고 왕건이 고려를 세워야 하니까 길어야 중반부 시점에 죽을 캐릭터였지만 배우 김영철이 보여준 특유의 신들린 연기력 및 카리스마와 이로 인한 인기 덕분에 비중있는 캐릭터로 변하면서 궁예의 등장이 1기, 견훤과 왕건이 라이벌로 서로 대립각을 내세우는 내용이 2기 같은 에피소드로 나뉘었다. 덕분에 드라마태조 궁예 혹은 미륵 궁예라는 별명 혹은 비판을 얻었으며, 실제로 방영 당시에 많은 시청자들이 궁예가 죽은 다음부터 드라마가 완전히 끝난 줄 알았다는 사람들이 많았다고 하고 궁예가 죽었던 회인 제120회 시청률의 경우 60.2%[67]라는 기록적인 시청률로 태조 왕건 역대 최고의 시청률을 달성했다. 심지어 공중파 뉴스에도 당당하게 보도될 정도였다.

한편, 극악무도했던 극 중 궁예의 악행들에 비해 최후는 매우 영웅스러워서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폭군을 미화한다고 분노하기도 했다. 승려가 대왕이 되면 절대 안 되는 이유나 실제의 궁예는 어땠는지 몰라도 드라마의 이런 궁예라면 최후도 <삼국사기> 궁예전에 적힌 대로 보리 이삭을 훔쳐 베어 먹다가 백성들에게 맞아 죽었어야 했다는 반응들이 나오기도 했다. 그러나 당시 궁예의 드라마 존재감이 압도적이었다보니 역사대로 비참한 최후로 묘사했다면 오히려 궁예를 왜 초라하게 죽인 것이냐며 큰 항의가 있었을게 분명하며, 태조 왕건이 다큐멘터리가 아니라 각색의 허용도가 큰 드라마라는 점에서 오히려 이러한 각색은 당시로서나 지금으로서나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그렇기에 극중 내레이션도 각색으로 인한 역사 왜곡이라는 문제를 최소화 하기 위하여 왕건이 궁예의 시신을 껴안고 오열하는 장면에서 원래 역사에 언급되는 최후와 드라마 각색과의 차이를 확실히 설명했다.

"아우님. 부디, 성군이 되시게. 성군이...."

작중 궁예의 유언


궁예. 신라 경문왕의 아들로 태어나 황실의 권력 다툼에서 화를 당하고 한쪽 눈을 잃은 채 유리걸식하다가 승려가 되었고 백성들의 인심을 얻어 황제에 오른 사람이다. 그는 처음에, 그가 기반을 이룬 옛 고구려 지방의 호족들을 생각하여 국호를 고려라 하였으나 곧 나라 이름을 대동방국을 뜻하는 '마진', 그리고 '태봉'이라 했다. 후삼국 중 유일하게 자주통일을 외치며 외세와 손잡지 않았고, 끝없이 북벌을 꿈꿨음을 그의 행적을 통해 알 수 있다. 그러나 세월을 거듭하면서 그는 전제주의로 절대권력을 휘둘렀으며, 스스로 미륵을 칭하고, 미륵 관심법이라는 전무후무한 독재수단을 이용하며 자신의 꿈을 이루려 하다가 비참한 최후를 맞게 된 것이다. 고려사 실록에서는 그가 지금의 평강군인 옛 지명 부양현에서 혁명 이튿날, 보리 이삭을 베어 먹다가 백성들에게 맞아죽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그만한 삶을 살아온 그가 어찌 보리 이삭을 베어 먹다가 맞아죽었을까.[68]

역사의 기록을 승자의 입장에서 쓴 것이란 것을 생각하며 드라마로서 다시 상상을 발휘해 엮어본 것이다. 아무튼 한 시대를 풍미했던 실패한 한 영웅의 기록은 이렇게 그 한 장이 마무리되고, 그리고 새로운 역사가 다시 시작된다.

궁예 사후 나레이션


사후에는 견훤이나 경순왕 등의 입을 빌려 한때나마 나라를 잘 다스렸던 임금으로 간혹 언급된다[69].

그리고 태조 왕건이 종영되고 정신적 후속작으로 방영된 제국의 아침 2회[70]에서도 회상으로 나온다.

[1] 지금의 개성으로, 왕륭과 왕건 부자의 근거지이다.[2] 세달사의 위치가 현재는 강원도 영월군 영월읍 흥월리에 위치했다는 설이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지만, 경기도 개풍군 일대에 있었다는 이설도 있다. 이 드라마에서는 궁예와 왕건의 인연을 강조하기 위해서 개풍군 설을 채택한 것으로 보인다.[3] 실제로도 누명을 쓴 거나 마찬가지였으니 왕륭의 추측은 틀리지 않았다. 아예 스스로의 입으로 요즘 같은 시대에 너나 할 것 없이 사소한 트집거리로 역적몰이를 당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고 할 정도다.[4] 사실 경문왕은 신라 43대 왕인 희강왕의 손자로 원래 왕위 계승 순위에서 상위권에 있던 인물이었다. 하지만 선왕인 헌안왕의 사위가 됨으로서 자신의 정통성을 더 강화한 것이다.[5] 이 드라마에서는 삼국유사에 실려있는 당나귀 귀 설화를 경문왕의 줏대 없는 성격을 반영한 설화라고 해석하는 등 경문왕을 유약하고 줏대 없는 암군으로 묘사하며 그다지 좋은 평을 내리고 있지 않다. 정작 학계에서는 경문왕에 대해 통일 신라 후기 임금들 중 그나마 나은 편으로 평가하고 있다. 여러 반란들을 진압하였으며 친위 세력 육성을 위한 노력을 은유하는 듯한 기록들도 남아있는 등 경문왕이 녹록치 않은 임금이었음을 알 수 있는 부분이 은근 많다.[6] 실제 역사에서는 범교가 화랑의 우두머리일 때 경문왕은 그를 모시던 낭도, 즉 선후배 관계였다. 또 작중에서 범교는 도선 대사보다 나이가 많은 것으로 추정되는데, 실제 역사에서 경문왕은 도선보다 20살 아래이기 때문에 범교와 경문왕이 친구라면 오류가 발생한다. 사실 그 이전에 고작 10년 전 정도를 회상하는 장면에서 수염도 없는 화랑 범교가 그새 내일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노승이 되어있는 것부터 말이 안 된다. 그저 궁예에게 출생의 비밀을 알려주기 위한 가공의 장치 정도로만 보면 된다. 이때 위홍의 군대를 상대하면서 대단한 무술 실력을 보여주는데 작중 초반에 보여주는 궁예의 비범한 무예 실력은 이 사람에게서 물려 받은것으로 추측됨.[7] 삼국사기에 실린 승려 시절 궁예의 대표적인 일화로 육식을 거리끼지 않았고, 자기를 괴롭히는 선배 승려들이 밥을 쏟아버리자 물을 떠와 방에 쏟아버리고 밥에 물 말아먹는다고 일갈하여 다시는 자기를 괴롭히지 못하게 만들었다고 한다.[8] 세달사에 들어갈 때 궁예는 많아야 10살 내외인 어린 소년이었으므로 10여 년 후라고 해봐야 20대 초중반의 젊은이었다. 그러나 드라마 촬영 당시 40대 후반인 배우가 연기하다 보니 나잇대에 비해 노안이 되고 말았다. 게다가 야인시대랑 달리 이때는 궁예의 아역 비중은 적었고, 4화에서 바로 김영철이 연기한 젊은 시절로 전환된 터라 더 그렇다. 영혼의 파트너 종간을 연기한 김갑수도 첫 등장에서는 10대 초중반이었고, 4화 시점에서는 20대였으나 이쪽도 당시 배우가 40대라서 노안 속성이 붙었다. 그 외에도 여러 배우들이 젊은 시절부터 장년기까지 그대로 가는 경우가 있었으니 어떤 면에서는 사극의 딜레마나 고질적 문제이기도 하다.[9] 실제 기록상 궁예의 법명은 자칭 선종이었다고 한다. 드라마에서는 범교 스님이 궁예의 스승으로 등장하기에 실제 역사와는 달라지게 된 것.[10] 이때 왕건이 탱화에 그려진 부처를 바라보고 탱화 속 부처 또한 왕건을 내려다보는 듯이 장면이 연출된다. 왕건이 장차 궁예를 대신할 새로운 미륵이 될 것을 암시하는 복선이다.[11] 신라로 항해할 때 궁예는 재물에 비해 호위 병력이 적다고 왕륭에게 지적했다. 왕륭 측에서는 설마 수도 근방에서 뭔 일이 벌어지겠는가 싶었겠지만 당시 신라는 수도 근방에 도적단이 돌아다닐 정도로 망조에 들었다.[12] 견훤의 이 대사는 당시 시청자들에게 비판을 받았다. 손오공은 명나라 때의 소설 서유기에 등장하는 가상 캐릭터인데, 이때 중국은 명나라 건국때보다 4백년 전이었고, 한반도 출신 견훤이 어떻게 손오공을 알고 있냐는 것이다. 하지만 서유기는 삼국지연의수호전처럼 기존에 돌고 있던 민간설화를 묶어서 소설의 형식으로 써 낸 것이기 때문에, 서유기가 쓰이기 이전부터 손오공 이야기는 민간설화로 존재했다. 어거지로 당시 중국인들로부터 손오공의 민간 설화가 한반도에서 퍼졌다고 한다면 완전히 어긋나는 것은 아니다. 물론 삼국지연의 일화를 자주 차용하던 이환경 작가가 그것까지 생각하고 쓴 대본은 아니었겠지만.[13] 궁예 본인이 세달사에서 의술을 익히기도 했고, 기훤 휘하 시절에도 병자들의 병세를 정확히 진단하고 처방하기도 했으니 김위홍의 안색을 보자 그의 몸상태가 위태로움을 눈치채고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그에게 인정을 베푸는 의도로 충고를 해준 모양이나 김위홍은 듣지 않았고 그 결과는 본인의 허망한 최후였다.[14] 일찍이 다른 고승이고 궁예를 키웠던 범교가 궁예에게 말했던 부분이 있다. "일찍이 미륵을 앞세워 수많은 자들이 일어섰으나 그들은 결국 도적으로써 망했다 고로 미륵의 마음을 잘못 읽으면 도적이 되느니라"라고. 즉 그 순서를 다시금 밟는 궁예를 도선도 만류하는 것이나 궁예의 눈과 귀가 자신의 야망에 막혀 자신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는 모습을 보고 단념하게 된다. 훗날 궁예의 최후를 예견하는 복선이다.[15] 한 나라의 군주가 됨[16] 스스로 조급하여 심병을 얻어 쇠해짐[17] 결국 왕건에게 다 빼앗길 것이므로[18] 비록 천하를 얻는다고 하더라도 아무런 소용없는 그 뜻에 종간이 집착을 하니 말장난이라고 한 것이다.[19] 어차피 그런 책이 있다 한들 모든 이치는 순리대로 흘러가는 것인데, 그것을 알지 못하고 단지 책 하나에만 집착하는 모습을 보며 일찍이 그들은 올바른 재목이 아님을 말한 것이다.[20] 궁예와 종간과 헤어진 도선은 옥룡사에 있다가 송악으로 가 왕건에게 가르침을 주는 대신 제자이던 경보를 당나라로 유학시켰으며, 다시 옥룡사로 돌아와 남은 삶을 정리한 뒤 세상을 떠났다. 이 당시 옥룡사가 있던 백계산은 지금의 전라남도 광양시에 있는데, 후삼국 시대에는 후백제의 영토였다. 실제로 도선이 옥룡사에서 입적했다는 말을 들은 견훤도 백제땅에 그분이 계실 줄은 몰랐다며 안타까워했으니 궁예라고 도선이 옥룡사에 있는 걸 알 턱이 없었고, 만약 도선이 좀 더 오래 살고 궁예가 도선이 어디있는지 알았더라도 궁예의 나라와는 위치적으로 매우 떨어져 있어서 궁예와 종간이 도선을 다시 만나려면 아직 세력 기반도 다지지 못한 궁예가 이미 기반을 다져놓은 견훤과 싸워야하는 위험을 감수해야함을 감안하면 도선의 예언도 예언이지만 현실적으로도 다시 볼 일이 없을 거라는 말은 사실이 됐다.[21] 사실 궁예가 자기 세력을 갖춰가는 모습을 옥룡사로 떠나기 전 잠시 본 적은 있지만 멀리서 조용히 지켜봤기에 제대로 된 재회도 아니다.[22] 궁예 문서의 맨 첫부분에 있는 궁예 그림을 그린 벽화가 있는 바로 그 이다.[23] 법구경에 나오는 글귀다.[24] 이는 어머니이자 같은 불제자로서 하는 말로, 아들이자 불제자 후배에게 과거의 불우함에 대한 복수심과 보상심리에 집착해 자신의 인생을 망치지 말라는 충고이자 궁예의 앞날을 예견하는 복선이다.[25] 이는 궁예가 백성을 위해 선정을 베푸는 것이 진심으로 백성을 위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는 사건이라 할 수 있다. 이 시점에서 궁예는 주막 주인 같은 힘없는 백성을 도와주는 모습을 보이지만 결국에는 그들을 괴롭히는 산적들과 같은 패거리가 된 것이기 때문이다. 주막집 주인 입장에서는 기절초풍할 일로, 자신들을 구해준 은인들이 산적들과 같은 패거리에 들어갔으니 앞으로 기훤의 부하들이 "너희를 도와준 용사는 우리에게 항복하여 우리와 한패가 되었다!"라는 말과 함께 약탈을 계속 저질러도 아무 얘기도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26] 이때 양길은 서신에서 기훤을 가리켜 '어린 족하'라고 불렀는데, 족하는 자신의 아랫사람을 부르는 호칭으로, 다분히 양길이 기훤을 자신보다 아래로 내려다보며 깔보고 있음을 드러냈다.[27] 궁예와 종간은 무언가 일이 벌어질 것을 예측했으나 이날 밤 곧장 기훤이 암살되리라는 생각까지는 못 했기에 당혹스러워한다.[28] 여담으로, 허월 역시 범교, 종간 등 몇몇 사람들만 알고 있던 궁예의 출생의 비밀을 알고 있었다. 정보 수집을 통해 궁예의 깊고 은밀한 비밀들까지 모두 알아낼 정도면 궁예에 대해 장기간에 걸친 깊은 사전 조사를 한 모양이다.[29] 여기까지가 1화 이전의 내용들이다. 물론 이중에 복지겸과 환선길, 이흔암, 은부가 양길 휘하, 배현경, 홍유가 김순식 휘하였다는 전개는 드라마의 창작이다.[30] 후고구려는 왕건의 고려와 옛 고구려와 구분짓기 위한 구분이지 처음 나라를 세웠을 때의 정식 국호는 엄연히 고려였기에 역사적 고증에 제대로 부합한다.[31] 이 또한 드라마의 창작이며, 송악에서 민담으로 내려오는 한 구절에서 영감을 받았음을 나레이션에서 밝힌다. 다만 극중 관상을 보고 그 사람의 길흉화복을 볼 수 있는 종간은 연화를 보고 단번에 왕후의 상임을 알았고, 약혼자가 왕건임을 깨닫자 서둘러 궁예에게 보내어 둘을 잇지 못하게 하며 왕건과 종간의 악연은 본격적으로 시작됐다.[32] 왕건이 합류한 직후부터 궁예는 거의 전장에 직접 나가지 않고 왕건이 대부분의 전쟁 총사령관을 맡고, 이것이 현존하는 역사 사료를 그대로 따른 묘사이긴 하지만, 고려시대 역사가들이 실제론 궁예가 지휘한 전쟁들까지 왕건이 지휘했다는 거짓말로 덮어서 왕건의 전공을 부풀려 준 것 아니냐는 의혹도 있다. 하지만 궁예가 왕건의 능력과 활약을 곁에서 지켜보며 점점 전폭적인 신뢰를 하여 군권 위임 비율을 높이다 그의 경력이 채워질 만큼 채워지자 아예 군권 전체를 위임했을 가능성은 크다.[33] 군주가 신하의 조문을 손수 가는 것은 사직을 구한 공신급이 아닌 한 예법에 어긋나는 일이다. 물론 왕륭은 궁예가 반역 누명을 쓰고 신라 관군에게 쫓기고 있을 때 궁예를 숨겨주고 송악을 수도로 삼을 때 가산을 다 털어 궁궐과 전각, 성들을 지어주었으니 공신 예우를 해 줘도 이상하지는 않았다.[34] 그러나 역설적으로 이 덕에 훗날 궁예가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 뒤, 송악을 진짜 고려의 수도로 결정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 주게 된다.[35] 석총 曰 이 몸은 눈도 멀고 귀가 멀어 들은 것도 본 것도 없사옵니다. 그러니 어찌 대답을 할 수 있겠습니까?[36] 이때 궁예가 하는 말 "앞으로는 내가 지은 경전을 장 공부하도록 하시오."[37] 혀는 척수를 거치지 않고 직접 로 향하는 예민한 신경 전달 체제를 갖추고 있다. 누구든 식사하다가 혀를 깨물어 몇 초간 고통에 아득했던 경험이 있을 것이다. 그 정도로 민감한 혀를 죽자는 일념에 치아로 절단하겠다는 마음으로 깨물면 쇼크사도 가능하고 즉시 처치하지 않으면 실혈사도 가능하다. 하지만 그게 "가능하다"는 정도이지, 인간의 의지로 쇼크사나 실혈사로 죽을만큼 혀를 깨무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기에 전해지는 "혀 깨물고 죽었다"는건 매우 과장된 이야기이다.[38] 이들 중 한 명은 거짓말을 해서 죽었고, 다른 한 명은 아무것도 말하지 않으려 하는 바람에 죽었다.[39] 여기서 바른대로 사건의 전모를 다 말한 뒤에 유일하게 살아나가는 첩자 역할을 맡은 배우인 이병욱은 이후 마의태자 역할로 다시 출연한다.[40] 이때부터 궁예의 안대가 갈색의 가죽 안대에서 황금 안대로 바뀐다. 즉, 안대는 궁예의 타락을 상징하는 도구다.[41] 87회에서 나오는 내용이다.[42] 이들은 궁예가 돌을 맞은 것을 보고 바로 줄행랑을 쳐 잠적한 것으로 보인다.[43] 이 과정에서 아지태는 이 고을 지배자에게 책임을 물어야 된다고 말했다.[44] 이런 명령을 내리는 이유도 참 가관인데, 백성들이 (궁예) 본인을 버렸는데 어떻게 본인만 백성들을 용서할 수 있느냐면서 이미 틀린 싹이니 없애는 게 낫다는 것이다.[45] 참고로 극중에서는 아무런 일 없이 그냥 넘어간 부분이지만, 수단령으로서 수군 훈련을 맡고 있던 왕식렴이 "상륙 훈련이 아직 조금 덜 되었습니다."라고 진언했음에도 불구하고 "훈련이라는 게 그리 쉽지 않다는 것은 나도 알아. 이제 뭍으로 상륙하는 것을 보고 싶은데 말이야."라고 대답했다. 하지만 잠시 후 신라군이라는 말을 듣고 관심법을 하더니, 안 그래도 신라의 신자만 들어도 몹시 치를 떠는 궁예이니만큼 분기탱천해서 다 없애버리라고 명했다. 왕식렴이 이에 100여명이 넘는다고 말렸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어이 시행되었고, 이와 함께 신라군들은 전부 물 속으로 수장되었다.[46] 화형은 처형당하는 사람에게 극도의 공포와 고통을 선사하며 천천히 죽이는 매우 비인간적인 형벌이다. 때문에 왕건과 아지태 등도 궁예가 화형을 집행하는 것을 말리려고 했으며 소식을 들은 견훤도 그런 비인간적인 방식으로 수달을 처형한 궁예의 처사에 충격을 받는다.[47] 그나마 진시황은 약간이나마 참작을 해 본다면 분서갱유 사건을 제외하고 궁예와 달리 백성들이나 아녀자들까지 마구 죽이지는 않았다.[48] 페미니스트들이 군캉스 드립치며 군대 비하하는 것과 비슷해보이기 때문으로 보인다.[49] 참수되기 전에 도인은 "이미 처형될 것을 알고 있으니 너무 신경쓰지 말라."며 당황하면서 은부를 말리는 종간을 진정시키려고 했다.[50] 이 우스광스럽 모순전인 오보 사건 계기로 대미륵이라고 자칭하던 궁예도 결국은 한낱 나약한 인간에 불과했다는 사실을 일깨워 주는 장면 중 하나이다. 그러나 정신력 문제 외에도 당시 궁예의 사정을 감안할 필요는 있는데, 궁예는 이미 후백제에서 보낸 암살자에 의해 사경을 헤맨 전적이 있어서 암살을 매우 경계하고 있는 상태였고 당시 언급만 봐도 불도 외의 모든 것을 믿지 않았으며 따라서 도인이나 도가 어쩌고 하는 것 또한 전혀 믿지 않았다. 그저 충심이라면 둘째가라면 서러운 종간이 부탁하니 마지못해 들어주었던 것. 그런데 이런 배경에 예상치 못한 엄청난 고통이 합쳐지니 순간적으로 정신줄을 놓을 만하기도 했던 셈이다.[51] 극중 병이 심해졌을 때와 도사가 지어준 약을 먹고 눈에 있는 다크서클이 생겼다가 지워져 있는데, 이것은 정신 상태가 영 좋지 않게 되어 있다가 정상으로 돌아왔을 때를 표현하는 것이 아주 잘 묘사되어 있다고 보면 된다.[52] 이 장면은 야인시대에서 개코에게 자살하라고 명령하는 장면과 매우 비슷하다.[53] 이 부분에서 흥미로운 것이, 아지태를 만나기 전까지만 해도 궁예는 '죽을 때 제국까지 지고 가는 건 아니다', '내가 잘 살고 가면 그만이지 뒷날은 왜 생각하는가', '내 아들이 잘나 봐야 종간이나 왕건만 하겠는가'라는 생각으로 자신의 후손이 대를 이어 나라를 다스려야 한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 시점에서는 자신의 혈통이 뒤를 잇기를 강렬히 바라는 모습을 보이는데, 정작 궁예가 생미륵일 때 이런 생각을 했던 건 종간과 은부 등이었다.[54] 심지어 최승우를 통해 이 사실을 전해들은 견훤도 태봉국이 무너져가는 걸 기꺼워하면서도 그 잔인함에는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그래서 그 자리에 있던 박씨부인과 고비에게 집안이 평안해야 나라가 평안하다고 당부를 한다. 하지만 정작 견훤 본인도 결국은 후반부 가정관리를 제대로 못해서 쫓겨난다는 점을 생각하면 참 섬뜩한 복선인 셈이다.[55] 물론 이는 원래 점괘를 안 문의왕후(영화부인)의 압력과 협박으로 인해 어쩔 수 없이 경문왕에게 원래 점괘와 다르게 조작해서 말한 것이지만, 다른 방향으로 현실이 된 셈이다.[56] 그도 그럴 것이 은부와 종간의 원래 계획은 죄인이 된 강비는 폐비로 처리한 후 유배형 정도를 생각하고 있었다. 물론 강비 일가의 죄질이 너무 나빠서 극형은 결코 피할 수는 없었지만, 궁예가 강비를 이렇게 비참하게 죽이리라고는 그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다.[57] 물론 그녀가 처형되는 게 불쌍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그녀의 처형으로 인한 민심의 악화가 가속화될 것이 자명하기에 그런 것이다.[58] 물론 이에 궁예는 자각은 커녕 또 그렇게 말하면 같이 죽이겠다고 경고했는데, 이는 야인시대 74회와 분위기가 비슷하다.[59] 아버지 강 장자가 처형되고 어머니 백씨도 자결한 이후로는 사람이 완전히 달라졌다고 해도 좋을 수준으로 궁예에게 폭언을 퍼부었다. 왕이 말 그대로 허수아비이거나 생불인 경우가 아니라면 폐비를 시켜도 할 말이 없다 싶을 정도.[60] 염상이 이때까지 궁예가 저지른 폭정을 말해주자 공감할 정도였다.[61] 물론 박술희가 공을 들인 근본적인 이유는 대주도금을 연모하고 있었기 때문이지만, 아자개와도 죽이 잘 맞는 모습을 보였으며, 아자개는 상주 전선에 박술희가 왔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태봉이 우리를 치려는 뜻이 없다'라고 이해할 지경이었다. 아지태를 만나기 이전의 궁예도 이를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견훤의 아버지가 있는 지역이라는 사실 하나만으로 공격하자고 했다.[62] 내군 병력의 많은 수가 왕건파에 가담한 뒤였고, 무엇보다 황궁을 향해 진격해 오는 대규모의 중앙군과 지방군들 때문에 무조건 싸움을 피하고 급히 달아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궁예의 엄청난 폭정에도 불구하고 김영철의 신들린 연기 덕분에 여전히 엄청난 인기를 얻어서 궁예의 신임을 얻어 내군 장군이 된 장일이 이때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배신하고 궁예를 공격하자 많은 궁예의 열성팬들은 태조 왕건의 시청자 게시판에서 장일에게 신랄한 욕을 퍼부었고, 그가 궁예의 죽음 몇 회 후 이흔암의 반란 사건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독화살을 맞고 죽자 매우 통쾌하게 여기기도 했다. 이에 비해 장일과 똑같이 궁예를 배신했던 최응의 경우 왕건의 역성혁명 당시 궁예의 도주로를 미리 예상해 그를 기다리고 있었고, 그가 도착하자 자신을 극진히 대접했던 것에 대해 마지막 예를 갖춘다는 느낌으로 정중히 고개를 숙여 배웅해 궁예의 열성팬들에게 욕을 먹지 않고 찬사를 받았다.[63] 이 장면에서 궁예가 술을 권하는 것을 배현경이 술잔에 독이 들어 있을 수 있다며 만류한다. 이에 궁예의 신하들은 발끈하고 궁예 자신도 잠시 배현경을 노려본다. 궁예에 대한 신망이 완전히 나락으로 가버린 것을 단적으로 보여준 장면. 물론 왕건은 일말의 주저없이 술을 들이켰고 그 모습을 본 궁예는 아직도 자신을 깍듯이 대하는 왕건에게 감격했는지 진심으로 고맙다고 말한다. 여담으로 대본에는 궁예가 배현경에게 "경은 나를 겨우 그 정도로 보았단 말인가" 라며 꾸짖는 대사도 있으나, 본 방영본에서는 생략되었다.[64] 이 장면은 궁예를 연기한 김영철의 제안으로 만들었다고 한다.[65] 만약 궁예가 왕건의 제의를 따르더라도 4기장을 비롯한 이들이 계속 궁예를 살려두면 안 된다고 참소할 것이고, 태봉 곳곳에는 아직 궁예의 충성파들이 각자 세력을 가지고 있다. 대표적으로 명주의 성주 김순식은 명주 군왕이라 불릴만큼 자체적으로 군사 1만 단위를 일으킬만큼 세력이 커서 왕건도 그가 전쟁을 걸려고 하자 긴장했을 정도고, 그를 제외해도 작중과 실제 역사에서도 궁예 사후에 여전히 충성파들의 반기를 진압하느라 고생했다. 이런 판국에 만약 궁예가 살아있었다면 더욱 반기가 거세고 위협적일 테니 왕건도 결국 마음을 바꾸면서 궁예는 더욱 비참한 꼴을 당할 가능성이 컸다. 그렇기에 본작의 궁예는 당장은 목숨을 부지할지 몰라도 차후에는 오히려 지금 죽은 것보다 더한 최후를 맞이할 수 있으니 차라리 믿음직한 아우인 왕건의 앞길을 막지 않고 자결할 수 있을 때 자결하자고 결심했을지도 모른다.[66] 궁예: "은부장군은 지금 무얼 하는가? 이제 갈 때가 되지 않았는가?"[67] 닐슨미디어코리아 기준.[68] 실제로 철원과 평강 등 강원 북부 일대에서 전해지는 궁예에 대한 여러 민간 설화들을 보면 궁예에 대한 여러 엇갈리는 시각을 엿볼 수 있다. 리목역, 검불랑역 문서 참조.[69] 견훤의 경우 조물성에서 왕건과 직접 만났을 때 궁예 이야기를 하면서, 말년에 정신이 나가버려서 안 좋은 결말을 맞았지만 한 때는 영걸이었다고 평했다. 또 금강이 한 쪽 눈을 잃은 뒤 그를 총애하면서 궁예도 한 쪽 눈이 없었지만 나라를 잘만 다스렸다(=역시 한 쪽 눈이 없는 금강도 명군이 될 수 있다)고 내뱉기도 했다. 경순왕은 왕건을 서라벌로 초청해 만난 자리에서 궁예라는 사람이 신라 왕실 출신이라던데 하고 말을 꺼냈고, 왕건은 그건 맞고 한때 영웅이었지만 비극적인 결말을 맞았다고 답한다.[70] 죽기 직전 왕건의 회상에서 나왔는데, 두 작품 다 이환경이 작업했고 방영 순서도 그대로 이어지기에 가능했던 팬서비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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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__CC.pn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2023-11-14 15:12:24에 나무위키 궁예(태조 왕건)/극중 행적 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