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흥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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具興南
1914년 5월 20일 ~ 1966년 12월 27일

1. 개요
2. 생애
3. 가족


1. 개요[편집]


대한민국의 전 교육자, 정치인, 기업인이다. 본관은 능성(綾城)[1].

관선 전라남도지사와 국회의원을 지낸 구용상은 그의 5촌 종질(從姪)이다.[2] '정트리오' 중 정명화(鄭明和)는 둘째 며느리이며, 정명훈은 둘째 사위이다.

2. 생애[편집]


1914년 5월 20일 전라남도 화순군 능주면 석고리에서 아버지 구삼모(具三謨, 1875 ~ 1937. 1. 23)와 어머니 경주 최씨(1875 ~ 1930. 11. 12) 사이의 2남 1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평양 숭실중학교일본 와세다대학 영문과를 졸업하였다.

귀국 후 일제강점기 말부터 교육자로 활동하였으며, 상경한 뒤에는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북아현동 등지에 거주했다. 이후 서울공립농업학교 교사, 교통부 총무과장, 서울대학교 예과 강사, 한국통운 사장 등을 역임하였다.

1954년 제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자유당 후보로 전라남도 화순군 선거구에 출마하여 현역 국회의원인 민주국민당 박민기 후보를 꺾고 당선되었다. 1956년 대한민국 국회 부흥위원회(현 국토교통위원회) 위원장에 선출되었다. 1958년 제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자유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1960년 제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헌정동지회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민주당 박민기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1961년 3.15 부정선거 가담을 이유로 반민주행위자공민권제한법에 의해 공민권이 제한되었다.

1963년 제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공화당 후보로 전라남도 화순군-곡성군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민정당 양회수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이후 민주공화당 중앙위원, 상임위원을 역임했다.

그러나 제6대 국회의원 선거 당시 선거운동에 소요되는 자금 때문에 많은 빚을 져 생활고에 시달렸고, 설상가상으로 자신이 경영하던 조양운수(朝陽運輸)의 사업 또한 부진 끝에 1966년 12월 8일 거액의 빚으로 부도를 내고 말았다. 이 때문에 줄곧 조카의 집에 피신해있다가 결국 1966년 12월 27일 서울특별시 성북구 우이동[3]에서 북쪽으로 1km 가량 떨어진 야산 중턱에서 독약을 마시고 목숨을 끊었다.

3. 가족[편집]


  • 슬하에 2남 2녀를 두었다.
    • 차남 구삼열(具三悅, 1942. 11. 8 ~ )[4]고려대학교컬럼비아 대학교 대학원을 졸업하고 미국 AP통신 본사 기자 및 UN특파원, 유럽특파원, 미국의 소리 해설위원을 거쳐 1987년부터 유니세프에서 근무했다. 1993년에는 한국인 최초로 유엔본부에 공보처 섭외국장으로 승진, 발령되었다. '정트리오' 중 정명화(鄭明和)의 남편이기도 하다.
    • 차녀 구순열(具淳悅)은 정트리오 중 정명훈의 아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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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시랑중파(侍郞中派) 30세 교(敎) 재(在) 항렬이나 항렬자를 쓰지 않았다. 1세 구존유(具存裕), 2세 구민첨(具民瞻), 3세 구연(具珚), 4세 구천용(具天容), 5세 구식(具軾), 6세 구록(具祿), 7세 구영량(具英良), 8세 구인미(具仁美), 9세 구득전(具得全), 10세 구효장(具孝長), 11세 구정여(具定如), 12세 구중절(具中節), 13세 구환(具桓), 14세 구영록(具英祿) 15세 구흥의(具興義), 16세 구충(具冲), 17세 구종학(具從學), 18세 구인정(具仁貞), 19세 구사민(具士敏), 20세 구응두(具應斗), 21세 구신업(具信業), 22세 구이기(具爾起), 23세 구천수(具天壽), 24세 구윤장(具潤章), 25세 구양욱(具陽旭), 26세 구정직(具廷稷), 27세 구항록(具恒祿), 28세 구본신(具本愼), 29세 구삼모(具三謨), 30세 구흥남(具興南) 순으로 이어진다.[2] 셋째 큰아버지 구기모(具琪謨, 1870 ~ 1902. 5. 17)의 장남인 사촌 형 구교복(具敎福, 일명 구기복具奇福, 1900 ~ 1983. 1. 30)의 차남이다.[3] 1973년 9월 도봉구성북구에서 분리되어 신설되자 도봉구에 편입되었고, 1995년 3월 강북구가 도봉구에서 분리, 신설되어 강북구에 편입되었다.[4] 이명 구삼렬(具三烈). 족보명은 구건우(具健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