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차 (r1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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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대 22명까지 탈 수 있는 영국의 2층 승합마차 옴니버스

1. 개요
2. 역사
2.1. 한국
3. 현재
4. 기타
5. 관련 문서



1. 개요[편집]


馬車 (Carriage / A Horse-Drawn Vehicle)

마차는 이 끄는 수레로 근대 이전까지 여러 문화권에서 널리 통용되던 탈 것이었으다. 현대는 자동차로 바뀌어 일부 특수한 목적을 제외하면 사용되지 않는다.


2. 역사[편집]


대부분의 고대 인류 발명품이 그렇듯, 마차 역시 정확한 기원을 찾기 어렵다. 다만 오리엔트 · 이집트 등의 각지에서 발견되는 부조를 볼 때 고대 전차에서 유래했다고 본다. 그 이외에도 인류 역사상 최초의 유목민으로 추정되는 원시 인도유럽인에 의해 세워진 선사 시대의 기마 유목 문화인 쿠르간 문화 유적에서 마차가 출토되었으므로, 이를 기원으로 보기도 한다. 중국· 왕릉에서 '사마'라고 하는, 4필의 말이 끄는 마차가 차장·사수·마부·말 등과 함께 순장된 것이 발굴된 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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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웨덴 왕실 | 브로엄 마차
기원전 8세기부터 기병이 출현하자 전차는 일선에서 밀려났고, 그 과정에서 승용·화물운반용으로 역할이 바뀌며 바퀴 수도 2개에서 4개로 늘었다. 이렇게 변화한 마차는 근대 전까지 인류에게 중요한 탈것으로 활약했다. 현대인의 버스처럼 승합용도가 먼저 떠오르지만, 우편마차역마차처럼 화물운송으로도 요긴하게 쓰였다.

이렇게 오랜 세월 인류와 함께한 마차는 18세기 중반 산업혁명으로 탄생한 증기기관과 경쟁했다. 증기기관증기기관차와 함께 철도란 새로운 육상 교통수단을 탄생시켰고, 마차는 장거리 운송을 철도에게 대부분 넘겨줬다. 그러나 말단운송이 불가능한 철도의 약점으로 이 시기 중단거리 운송은 여전히 마차였다. 한편 기존 마차에 철도를 도입한 마차철도가 과도기 교통수단으로 등장했다.

하지만 기술이 발전해 더 가볍고 힘센 내연기관이 나오고, 이를 기반으로 보다 더 빠르고 힘센 자동차가 등장하자 마차는 설 자리를 빠르게 잃었다. 동력 자동차영국에서 갓 나왔을 때 마차와 자동차라이벌이었다. 라이벌의 경쟁에 정점을 찍은 것이 바로 세계 최초 교통법인 적기조례다. 물론 이런 시대착오적 악법에 아랑곳없이 현대의 풍경이 보여주듯 마차는 완벽히 쇠퇴하는 자동차의 압승이었다. 그 영향으로 영국자동차 산업은 19세기 말까지 완전히 정체되고 만다.

다만 20세기 초까지 마차는 살아남았다. 당시 도로 사정이 안 좋고, 자동차가 비싸 모든 분야에서 운용할 수 없었다. 그래서 1차 대전 때 군수품 운송을 위해 대량의 기병, , 마차가 동원됐고, 타찬카처럼 마차가 군용 병기로 쓰였다. 2차 대전 때도 자동차를 충분히 공급투입할 국가는 미국 뿐으로 그 외 군대는 이 교통과 운송에 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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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4년다임러 리무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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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 1920년식 롤스로이스 실버 고스트 |롤스로이스 실버 고스트
또한 이와 별개로 자동차의 초기 컨셉은 ' 없는 마차'로 초창기 롤스로이스 등, 1차 대전 전후의 영국산 호화 차량에는 마차의 영향이 많이 남아 있었다. 이는 오늘날의 자동차도 예외가 아니다. 마부수행기사로 변한 것은 물론, 1열과 2열 사이에 있는 벽, 뒷좌석 지붕만 열 수 있는 랜덜렛 소프트탑, 실크해트가 뭉개지는 것을 막기 위한 높은 천장이 롤스로이스, 벤틀리, 마이바흐에서 생산하는 최고급 차량 중 옵션이나 한정판 차량에 적용되는 것 등은 모두 마차의 흔적이다.

마차가 완전히 자취를 감추게 된 것은 2차 대전이 끝나고 냉전이 시작되면서다. 날로 발전하는 자동차 기술과 대중화와 인프라의 확충으로 이때부터 마차는 모든 것에서 자동차에게 역할을 넘겨주고 사라졌다.


2.1. 한국[편집]


한국의 경우 고조선부터 수레와 마차가 널리 쓰였다. 고조선 때 마차 그림 삼국시대도 도로와 마차, 우차가 쓰였다. 관산성 전투의 배경이던 충북 옥천군신라 서라벌을 잇는 도로 유적이 2018년 발견됐다. 도로 표면에 수레바퀴 자국과 수레를 끌었던 짐승 발자국까지 뚜렷하게 남아있다. 아무래도 전쟁이 잦았던 때라 군 부대와 군량을 쉽고 빨리 운송할 수 있도록 만든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고려시대를 거쳐 조선시대가 되면서 마차는 점차 쇠퇴하고 대신 가 끄는 달구지나 강과 바다로 화물을 나르게 된다. 이렇게 된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지만 가장 큰 이유는 부족이다. 고려 말기에 왜구가 한반도를 초토화하면서 목장들도 큰 타격을 입어 이 부족해진다. 이를 타파하고자 조선여진족 을 계속 수입하면서 양마장을 전국 곳곳에 설치해 을 늘리고자 했다. 하지만 한반도가 평야가 적고 산지가 많아서 맹수인 호랑이, 늑대, 표범 등도 많아 을 늘리는게 어려웠다. 관마만 해도 경국대전 기준 5만 마리가 있었는데 이조차도 전국의 역참에 배당하기 부족한 숫자였다.

여기에 시대가 지날수록 인구 증가도 큰 이유였다. 말을 목축으로 제대로 부리려면 초원지대처럼 풀이 풍부한 곳이 아니면 건초에 곡물도 먹이는게 필수인데, 성인 1명분의 곡물만 먹여도 되는 소와 달리 말은 성인 3명분의 곡물을 먹여야만 제대로 부릴 수 있었다. 양란 이후 인구가 늘면서 목장을 둔전이나 농장으로 바꾸고 화전까지 성행한 조선 후기는 말을 더욱 늘리기가 힘들었다. 말 자체가 부족하니 당연히 마차를 많이 쓰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조선에는 마차에서 가 끄는 달구지로 완전히 변화되는데, 수원화성 축성 때 가 끄는 민간 수레가 동원되고 속대전에서 민간 수레의 동원에 대해 기록해놓기도 했다. 특히 산지가 많은 함경도, 강원도소달구지가 많이 쓰였다.[1] 왜냐하면, 이 두 지역의 경우 한양으로 물자 운반을 위해 선박을 쓰려면 한참 돌아가야 했다. 불교 문화의 영향으로 육식 문화가 쇠퇴해 고려도경에서 잡을 때 진짜 무식하게 잡는다고 표현했던 고려 때에는 이나 어차피 못 먹는 거라 두 동물 사이에 가치적 차이가 없었으나, 조선 때는 민간인들도 소뼈를 쌓아놓고 먹을 정도로 소고기 매니아가 되어버리며 대신 식육적으로 더 가치가 있는 사육하는 사람이 많아졌기 때문이다.

조선뿐 아니라 일본도 승객용 마차가 발전하지 못한 이유로 서스펜션의 문제도 있었다.

맨 처음 나온 기술인 판 스프링의 경우 기본적으로 탄성력을 이용하는 건데, 유럽이 17세기 중반[2]에 판 스프링을 처음 도입했는데, 한중일은 그러지 못했다.[3] 최소한 강철이나 그와 비슷한 탄성력이 강한 재료가 필요한데, 중국은 평지가 많아서 고민을 덜 했고, 한국, 일본은 산지가 많은 지형상 답이 없어서 가마를 타거나 말을 직접 타는 판국이었다. 일본에서도 천황, 그것도 즉위식쯤 되어야 겨우 두 바퀴 달린 수레가 나오는 정도다.[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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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고분벽화에서도 마차와 우차를 볼 수 있다. 위 사진은 덕흥리 고분벽화의 행렬도다.


3. 현재[편집]


관광용이나 전통 행사 등 특수한 용도가 아니면 사용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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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드 스테이지 코치
영국 왕실1762년 만든 골드 스테이트 코치 황금마차를 아직도 쓴다. 대관식 같은 아주 큰 행사만 쓰는데 워낙 오래전 만든 것이라 승차감이 너무 안 좋아 엘리자베스 2세는 싫어했다. 재위 중 몇번 안 탔고 거의 50년째 전시용으로 쓰다 2022년 플래티넘 주블리에서 재등장했다.

찰스 3세의 대관식골드 스테이트 코치 마차 대신 엘리자베스 2세다이아몬드 주빌리를 기념해 2012년 호주가 만든 '다이아몬드 주빌리 스테이트 코치'[5] 마차를 사용했다. 오래된 '골드 스테이트 코치' 마차는 국왕 부부가 대관식버킹엄궁으로 돌아오는 행진만 사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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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rse and a Bugg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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펜실베이니아아미쉬 커뮤니티를 찾아보면 아직도 현역으로 굴러가는 것들을 자주 볼 수 있다. 교통규제를 따르기 위해 붙인 반사판삼각표지판이 인상적이다.

대한민국도로교통법이 끄는 마차를 도로 운행이 가능하다. 방향 지시등안전벨트만 달면 합법적으로 차량으로 분류되기 때문이다.

2007년~2012년까지 청계천에 진짜 이 끄는 마차가 운행한 적이 있다. 이 때문에 서울 한복판에 '우마차 통행금지'라는 교통 표지판이 붙기도 했다.

경주도 '경주 꽃마차'로 운행했으나, 마부들이 영업시간이 끝난 후 들을 무자비하게 구타 등 학대 사실이 드러났고,[6] 언론 보도 이후 마차 운영 업체에 대해 엄청난 비난이 쏟아졌다. 이 때문에 문제의 마차 운영 업체는 철수했으며 들은 한국마사회에서 보호 및 치료를 받고 있다.

이와 반대로 좋은 사례도 있다. 단양군 유명 관광지 도담삼봉도 마차가 있는데 꽤나 복지가 잘 되어있어, 충청도 사전컨설팅 우수사례로 뽑히고 충북 MBC뉴스에 소개가 될 정도로 평이 굉장히 좋다. 학대논란으로 마차에 관한 이미지가 바닥이였던걸 생각하면 대단한 수준 링크


4. 기타[편집]


영국의 교통이 마차 중심이던 시절에 오른손잡이가 대부분인 마부들은 보통 마차 오른쪽 자리에 앉아서 말을 몰았고, 이로 인해 보행자들은 좌측 통행을 하게 되었다. 이는 마차가 자동차로 대체된 오늘날까지 이어져 영국 및 영국의 영향을 받은 국가들은 자동차 운전석이 차량의 오른쪽에 있고, 좌측 통행을 한다.

19세기 영국에는 핸섬 캡(Hansom Cab) 이라는 특수한 형태의 마차가 있었다. 이 마차는 탑승 인원이 적은 대신 마부가 차체 뒤편에서 말을 몰 수 있는 특이한 구조 덕분에 속도가 빨랐고, 이러한 장점을 이용해 오늘날의 택시처럼 영업을 했다. 택시를 영어로 cab이라고도 부르는 이유가 이 핸섬 캡에서 유래된 것이다.

말이 많을수록 더 무거운 짐을 싣고 더 빠르게 달릴 수 있으니, 엔진의 마력을 보고 자동차의 속도나 적재량을 예측하는 것처럼 마차의 시대에는 한 마차당 할당된 말의 수로 마차의 능력을 가늠했다. 트로이카(삼두마차)처럼 고유명사화된 규격도 있다.

한국에선 그다지 엄격하지 않지만, 서양에서 중요한 예절중 하나인 자동차의 상석 구분같은 승차예절은 대부분 귀족들이 마차를 이용할때 만들어졌던 예절 규범들이 시대에 맞게 변형되어 지금까지 내려오는 것들이다. 이 승차, 하차 매너 개념은 현대판 마차인 의전용 대형차, 쇼퍼드리븐 자동차를 탈 때나 해외생활 하면서 남의 차를 타게 될때 그대로 적용되므로 특히 연장자와 같은 차를 타게 되거나, 아니면 친구가 아닌 타인의 차를 자주 타거나 높으신 분 의전용 차를 타는 일이 있을 경우 알아두는게 중요하다.

기술적으로 간단해 보이지만 내구성 좋고 승차감 좋은 마차를 만들기 위해서는 꽤 높은 기술력이 요구된다.

상하 요동에 의한 바퀴축 파손 등을 피하기 위해서는 완충장치가 필요한데, 현대에도 차량에 흔히 쓰이는 판 스프링은 마차로부터 물려받은 기술이다. 질 좋은 탄성 강재를 만들기 이전에는 탄력 좋은 목재로 비슷한 구조를 만들었다.

또한 마차의 너비는 철도의 너비(2두 마차 기준)으로 이어졌으며,[7] 현대의 로켓 등은 이 철도로 운반되는 것을 전제로 제작된다.

즉, 마차 규격 → 철도 규격 → 로켓 규격 이라는 역사적 흐름의 시작.

대한민국에서 유일하게 합법적으로 운영하는 마차사업이 있다. 도담삼봉에서 운영하고 있으며, 2019년도 충청도 감사원 컨설팅 우수사업으로 MBC 뉴스에 출연하기도 하였다. 실제로 가보면 복지가 매우 잘되어있고 젊은사람 2명이 운영하다보니 크게 신경 쓰는 듯하다.뉴스링크


5. 관련 문서[편집]




[1]수레를 가지고 예전에 역사 관련 커뮤니티에서 많은 논란이 있었는데, 반계수록을 쓴 실학자 유형원이 "우리나라(조선) 풍속은 수레를 쓸 줄 모른다."고 적은 걸 가지고 조선수레를 안 썼다고 여긴 사람들이 많았으나, 이는 사실이 아니다. 조선왕조실록이나 비변사등록 등의 사료를 보면, 축성 공사에 달구지를 8백여 대나 동원했다. 그리고 '~할 줄 모른다'는 말은 '정말로 못 한다'는 의미와 '할 수는 있는데 제대로 하는 요령을 모른다'는 비유적 의미 2가지로 쓰일 수 있다. 즉 유형원의 말은 '조선은 사람들이 수레 쓰는 법을 아예 모른다'가 아닌 '조선에도 수레가 있지만, 중국처럼 통일된 규격과 유통망이 없으니 있어도 활용법을 모르는 것과 다름없다'로 읽는 것이 옳다. 참고로 중국수레 규격의 통일은 진시황 때다.[2] 1600년대 중반이다. 해설하자면 병자호란 직후.[3] 이러한 판 스프링은 자동차가 발명된 이후에는 자동차의 현가장치로 사용되었고, 오늘날에는 짐을 많이 싣는 대형 트럭의 주요 현가장치가 되었다.[4] 2019년 나루히토 취임 때 선을 보인 적 있는데, 당나라 문화 영향을 받은 헤이안 시대의 수레 디자인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5] 내부에 에어컨도 있다[6] 학대행위가 가해진 공터가 길가에 위치해 있었다. 즉 사람들이 버젓이 돌아다니는 대로변인데도 아랑곳하지 않고 대놓고 학대를 가했다. 게다가 들이 구타를 견디다 못해 쓰러져도 계속 매질을 했다.[7] 이렇게 탄생한 철도가 바로 표준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