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마차 (문단 편집) === 한국 === 한국의 경우 [[고조선]]부터 [[고려|고려시대]]까지 수레와 마차가 널리 쓰였다. [[http://blog.naver.com/woasj87/130002154935|고조선 시대의 마차 그림]] [[삼국시대]]에도 도로와 마차, 우차가 운용되었다. [[관산성 전투]]의 배경이었던 충북 [[옥천군]]에서는 [[신라]] [[서라벌]]과 옥천을 잇는 [[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oid=003&aid=0008759502&sid1=001&lfrom=cafe|도로 유적이 2018년 발견되기도 했다.]] 도로 표면에는 수레바퀴 자국과 수레를 끌었던 짐승의 발자국까지 뚜렷하게 남아 있었다. 아무래도 전쟁이 잦았던 시대라 군 부대에 인력과 군량을 빨리 운송할 수 있도록 만든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조선|조선시대]]가 되면서 마차는 점차 쇠퇴하고 대신 소가 끄는 [[달구지]]로 화물을 운송하거나 강과 바다를 통해 화물을 나르게 된다. 이렇게 된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지만 가장 큰 이유가 '''말의 부족'''이었다. 왜냐면 [[고려 말 왜구의 침입|고려 말기에 왜구가 한반도를 초토화하면서]] 말 목장들까지 큰 타격을 입으면서 말이 부족해지기 시작한것이다. 이를 타파하고자 조선은 중국과의 무역과 여진족을 통해 말을 지속적으로 수입하면서 [[http://science.ytn.co.kr/program/program_view.php?s_mcd=1165&s_hcd=&key=201601110924188936|양마장]]을 전국 곳곳에 설치하여 말을 늘리고자 노력했다. 하지만 평야가 적고 산지가 많은데다 가축을 위협하는 [[호랑이]], [[늑대]], [[곰]], [[표범]] 등 맹수가 많은 한반도의 특성상 말을 늘리는데 한계가 있었다. 관마만 하더라도 경국대전 기준으로 5만 마리가 있었는데 이조차도 전국의 역참에 배당하기엔 부족한 숫자였다. 여기에 시대가 지날수록 인구가 늘어나는 것도 큰 이유였다. 말을 역축으로 제대로 부리려면 초원지대럼 풀이 풍부한 곳이 아니면 건초에 곡물도 먹이는게 필수인데, 성인 1명분의 곡물만 먹여도 되는 소와 달리 말은 성인 3명분의 곡물을 먹여야만 제대로 부릴 수 있었다. 특히 왜란과 호란의 양란 이후 인구가 늘어나면서 조선 조정이 말을 키우던 목장을 둔전이나 농장으로 바꿔버리고 [[화전]]까지 성행했던 조선 후기에 가면 말을 더더욱 늘리기가 힘들었다. 이렇게 말 자체가 부족하니 당연히 마차를 많이 쓰기가 어려웠다. 이러다보니 조선시대에는 마차에서 소가 끄는 달구지로 완전히 변화하게 되는데, [[수원화성]] 축성 때만 해도 말이 아닌 소가 끄는 민간 수레가 동원되었고 [[속대전]]에서 소가 끄는 민간 수레의 동원에 대해 기록해놓기도 했다. 특히 산지가 많은 함경도, 강원도 지역에서는 소달구지가 많이 쓰였다.[* 이 수레를 가지고 예전에 역사 관련 커뮤니티에서 많은 논란이 있었는데, 반계수록을 쓴 실학자 [[유형원]]이 "우리나라(조선) 풍속은 수레를 쓸 줄 모른다."고 적은 걸 가지고 조선은 수레를 안 썼다고 여긴 사람들이 많았으나, 이는 결코 사실이 아니다. [[조선왕조실록]]이나 비변사등록 등의 사료들을 보면, 성을 쌓는 공사에 소가 끄는 수레를 8백여 대나 사용할 만큼 많이 동원했다. 그리고 '~할 줄 모른다'는 말은 '정말로 못 한다'는 의미와 '할 수는 있는데 제대로 하는 요령을 모른다'는 비유적 의미 두 가지로 쓰일 수 있다. 즉 유형원의 말은 '조선에서는 사람들이 수레 쓰는 법을 아예 모른다'가 아니라 '조선에도 수레가 있기는 하지만, 중국처럼 통일된 규격과 유통망이 없으니 있어도 잘 활용하는 법을 모르는 것이나 다름없다'로 읽는 것이 옳다. 참고로 중국이 수레 규격을 통일한 것은 진시황 대의 일이다.] 왜냐하면, 이 두 지역의 경우 한양으로 물자를 운반하기 위해 선박을 쓰려면 한참 돌아가야 했기 때문이다. 불교 문화의 영향으로 육식 문화가 엄청나게 쇠퇴하여 [[고려도경]]에서 소 잡을 때 진짜 무식하게 잡는다고 표현했던 고려시대에는 소나 말이나 어차피 못 먹는 거라[* 물론 그렇다고 아예 안먹은것은 아니다.] 두 동물 사이에 가치적인 차이가 크게 없었으나, 조선시대에는 민간인들도 소뼈를 쌓아놓고 먹을 정도로 [[소고기]] 매니아가 되어버리면서[* 돼지와 닭보다 소를 잡아먹는것을 더 좋아했다.] 말 대신 식육적으로 더 가치가 있는 소를 키우는 사람이 많아졌기 때문이다. [[조선]]뿐만 아니라 [[중국]]과 [[일본]]에서도 말의 숫자가 부족했으며 승객용 마차가 발전하지 못한 이유로 [[서스펜션]]의 문제도 있었다. 맨 처음 나온 기술인 [[판 스프링]]의 경우 기본적으로 탄성력을 이용하는 건데, 유럽이 17세기 중반[* 1600년대 중반이다. 해설하자면 병자호란 직후.]에 판 스프링을 처음 도입했는데, 한중일은 그러지가 못했다.[* 이러한 판 스프링은 자동차가 발명된 이후에는 자동차의 현가장치로 사용되었고, 오늘날에는 짐을 많이 싣는 대형 트럭의 주요 현가장치가 되었다.] 최소한 강철이나 그와 비슷한 탄성력이 강한 재료가 필요한데, 중국은 그나마 한국과 일본보다 평지가 많아서[* 어디까지나 그나마다. 중국도 알고보면 평지는 전체 국토에서 많지가 않다.] 고민을 덜 했지만, 한국, 일본은 산지가 많은 지형상 답이 없어서 [[가마]]를 타거나 말을 직접 타는 판국이었다. 일본에서도 천황조차 수레를 타는일이 드물었는데, 그것도 즉위식쯤 되어야 겨우 두 바퀴 달린 수레가 나오는 정도다.[* 2019년 [[나루히토]] 취임 때 선을 보인 적 있는데, 당나라 문화 영향을 받은 헤이안 시대의 수레 디자인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xternal/contents.nahf.or.kr/thumnail05_ex.jpg|width=100%]]}}} || || {{{#000 고구려 고분벽화에서도 마차와 우차를 볼 수 있다. 위 사진은 덕흥리 고분벽화의 행렬도다.}}} ||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