탁발제(양성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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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서(魏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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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북위의 황족. 상곡공(上谷公) 탁발흘라의 아들.
2. 생애[편집]
탁발제는 젊을 적부터 용맹하기로 이름을 날려 초기에 양성공(襄城公)에 봉해졌다.
황시 원년(396년) 11월, 병주를 전부 장악한 위왕 탁발규는 다음 목표를 후연으로 잡고 정형(井陘)에서 출정해 기주와 유주의 여러 군을 경략해나갔다. 이때 탁발제도 조명을 받고 후연의 신성(新城)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군들을 점령하면서 편하게 위무하니, 점령지의 백성들은 안심하고 즐겁게 생업을 이어갔다. 이 공으로 탁발제는 양성왕(襄城王)으로 진봉되었다.
황시 2년(397년) 10월 10일, 탁발제는 탁발규와 합류하여 후연의 수도 중산(中山)을 공격하다가 중산을 구원하러 달려온 조왕 모용린(慕容麟)과 의대(義臺)에서 교전하였다. 이때 탁발규가 모용린을 격파하고 북위군은 대승을 거두긴 했으나, 탁발제는 전투 중 유시에 맞아 큰 부상을 입고 말았다. 탁발규는 신속히 태의령 음광(陰光)에게 탁발제를 진찰하게 하였지만 이미 늦어 무슨 수를 써도 살릴 방도가 없었다. 결국 탁발제가 사망하자, 탁발규는 음광이 제대로 진료하지 않아서 죽은 것이라 여기고 음광을 처형하였다.
탁발제의 아들 탁발실(拓跋悉)이 후사를 이었으며, 작위는 한 단계 강등되어 양성공(襄城公)에 봉해졌다. 그래도 탁발제 본인에게는 후연 정벌의 공이 있음을 감안하여 양성왕 작위를 그대로 인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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