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경궁 환경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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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정부상징.svg 대한민국 사적 제123호 창경궁
창경궁 환경전
昌慶宮 歡慶殿





소재지
서울특별시 종로구 창경궁로 185 (와룡동)
건축시기
1484년 (창건)
1616년 (중건)
1634년 (중건)
1833년 (중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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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pal_ckk_pct10_ori.jpg}}}
환경전[1]
1. 개요
2. 역사
2.1. 상, 장례 공간
3. 구조
3.1. 〈동궐도〉의 모습(1634년 ~ 1830년)
3.2. 1833년 ~ 현재
4. 여담




1. 개요[편집]


창경궁의 침전이다. 경춘전의 동쪽, 함인정의 북쪽에 있다.

창경궁대비들과 왕실 가족들의 거주 공간 확보를 목적으로 지었기 때문에, 왕실 구성원들은 다른 궁궐에 있을 때와는 다르게 비교적 틀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건물을 사용했다. 그래서 창경궁 내전 건물은, 전각의 주인을 뚜렷하게 구분하기 어려우며 환경전 역시 마찬가지이다. 다만, 남아있는 기록을 볼 때, 주로 왕세자 등 주로 왕실 내 최고위급 남성들이 많이 머문 곳인 듯 하다.

이름은 창건 당시 의정부 좌찬성(議政府左贊成)이던 서거정(徐居正)이 지었다.# ‘환경(歡慶)’은 《시경》 - 〈소아 · 초자〉 편에서 유래한 말로, ‘기뻐하고(歡) 경하(慶)한다’는 뜻이다.


2. 역사[편집]


1484년(성종 15년) 창경궁 창건 때 처음 지었다. 1544년(중종 39년) 11월에 중종이 여기서 승하했다.#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으로 불탔고 1616년(광해군 8년에 중건되었다. 그러나 이괄의 난 때 다시 소실되어 1634년(인조 12년)에 같은 창경궁내에 있던 문명전을 옮겨 재건했다. 1645년(인조 23년)에는 소현세자가 여기서 사망했다.

영조사도세자를 데리고 환경전에서 경서를 강론하고 정사를 펼쳤으며## 신하들을 접견하기도 했다.# 이후 사도세자의 장남이자 정조의 친형인 의소세손이 여기서 잠시 기거했다.#

1830년(순조 30년) 8월 화재로 불탔고# 1833년(순조 33년)에 복구했다. 일제강점기창경궁창경원이 되면서 많은 창경궁의 전각들이 사라졌지만 환경전은 살아남았다. 다만, 일제가 환경전을 이왕직박물관 전시실로 바꾸면서 외부와 내부를 많이 훼손했다.

1990년대에서 2000년대복원하여 오늘에 이른다.

2.1. 상, 장례 공간[편집]


환경전은 본래 침전이나 왕실의 상, 장례 공간으로도 많이 쓰였다. 1575년(선조 8년) 명종왕비 의성대비(인순왕후)의 상 때 여막을 이곳에 둔 것이 그 시작이다.#, 1674년(숙종 즉위년)에는 현종의 혼전을# 여기에 설치했다.

또한 빈전으로도 많이 사용했다. 무려 9번이었다.

  • 1688년(숙종 14년) 장렬왕후#
  • 1701년(숙종 27년) 인현왕후#
  • 1800년(순조 즉위년) 정조#
  • 1805년(순조 5년) 정순왕후#
  • 1815년(순조 15년) 혜경궁 홍씨[2]#
  • 1821년(순조 21년) 효의왕후#
  • 1822년(순조 22년) 수빈 박씨[3]#
  • 1830년(순조 30년) 효명세자[4]#
  • 1849년(철종 즉위년) 헌종#
  • 1857년(철종 8년) 순원왕후#
  • 1863년(고종 즉위년) 철종#
  • 1878년(고종 15년) 철인왕후#

또한 1683년(숙종 9년)에는 숙종의 어머니 명성왕후가 세상을 떠나자 청나라 사신이 여기서 조문했으며# 1757년(영조 33년)에는 인원왕후승하 후 영조가 환경전 남쪽 월랑에 여막 공묵합(恭默閤)을 두었다. 그리고 1882년(고종 19년) 임오군란 당시 명성황후장호원으로 도피한 틈을 타 흥선대원군 세력이 일방적으로 명성황후의 국상을 선포했을 때에도 빈전으로 썼다.#

이렇게 환경전 영역은 조선 후기의 왕실의 상, 장례를 대표하는 공간이 되었다.


3. 구조[편집]



3.1. 〈동궐도〉의 모습(1634년 ~ 1830년)[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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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동궐도 환경전.png}}} ||
〈동궐도〉 환경전. 1830년(순조 30년) 화재 이전의 모습이다.
동궐도》를 보면, 1층[5]으로 평면은 ‘一’자 형태이다. 기단은 장대석으로 쌓았고 계단은 정면에 두 개 있다. 정면 7칸, 측면 4칸 총 28칸 규모로 지붕은 팔작지붕에 용두와 취두를 올렸고, 건물의 가장자리 1열의 하단부에는 기둥을 두어 마치 누각처럼 보이게 했다. 정면 가운데 3칸은 대청으로 되어있고, 대청 칸 앞의 툇마루를 바깥으로 통하게 하여 현관 역할을 할 수 있게 했다. 건물 바깥 면의 가장자리엔 쪽마루를 덧대었으며 쪽마루 가장자리와 대청의 가운데 칸엔 난간을 설치했다. 그리고 동면의 가운데 칸엔 나무 사다리를 설치하여 쪽마루로 오르내릴 수 있게 했다.

3.2. 1833년 ~ 현재[편집]


  • 빈전으로 쓰던 시기에 재건했기 때문에, 1833년(순조 33년)에 다시 지을 때 환경전 정면에 복도각 4칸을 설치했다. 복도각은 혼령이 다니는 길을 뜻한다. 현재는 환경전 건물만 외따로 있지만, 원래는 다른 궁궐전각처럼 행각, , 등으로 영역이 나누어져 있었다. 1908년(융희 2년)에 제작된 〈동궐도형〉을 보면 서, 남쪽에 행랑이 있으며 동쪽에는 돌담을 설치했다. 북쪽에는 창고를 두었는데 창고 사이에 돌담과 우물을 두었다. 문은 총 7개가 있는데, 4개는 행랑에, 3개는 담에 달렸다. 이름이 전해지는 문은 2개인데 남행랑에 있는 환경전의 정문 개광문(開廣門)과 서행각에 있는 집의문(集義門)이다. 또한 영조가 이름 붙였던 공묵합의 규모가 넓어졌다. 그리고 문을 제외한 행랑의 칸들의 내부를 주방(廚), 대청(廳), (房)으로 꾸몄다. 이 역시 일제강점기에 모두 사라져 오늘날에 이르며 북쪽 창고와 서,남쪽 행랑은 창경궁의 장기 복원계획에 포함되었지만 언제 복원될지는 미지수이다.

  • 건물 본채는 〈동궐도〉에서 묘사한 것과는 꽤 다르다. 기단은 장대석 2벌로 깔고 정면에는 6단 짜리 계단 2개를 붙여 가운데 칸 앞에만 놓았으며 기단 위에 주춧돌을 놓고 사각형의 기둥을 세워 건물을 올렸다. 지붕은 예전과 같은 팔작지붕이고 처마는 겹처마이다. 공포는 이익공 양식으로 공포와 기둥 사이에는 화반을 두었다. 용마루와 내림마루, 추녀마루는 양성바름을 하고 용두와 취두, 잡상을 올렸다. 단청은 모루단청으로 칠했다.

  • 칸 수는 정면 7칸, 측면 4칸의 총 28칸으로 화재 전과 같다. 건물의 가장자리 칸은 툇간으로 구성했다. 가운데 3칸은 대청이고, 대청 좌, 우에 각각 온돌방 2칸을 놓았다. 대청과 온돌방 사이엔 분합문을 달았다. 대청 2칸의 정면과 뒷면은 툇마루가 밖으로 드러나 있고 을 두어 출입할 수 있게 했다.

  • 대청천장은 소란반자, 온돌방의 천장은 종이반자로 마감했고, 툇간 부분만 서까래가 그대로 드러나는 연등천장으로 했다.

  • 바깥 면의 외형은, 없이 전부 창문으로만 되어있다. 건물 바깥 면의 창호는, 측면 가운데 2칸과 대청 앞면과 뒷면의 출입문 및 현관에서 툇간으로 가는 문만 띠살이고 나머지는 전부 정(井)자 살이다.

  • 아궁이건물 측면이 아닌 정면에 있는 것이 특징이다.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일제강점기 환경전.png}}} ||
일제강점기 환경전 외경[6]
위에 언급했듯 일제강점기에 들어서 꽤 변했다. 외부의 경우, 대청 밖에 툇마루가 드러나 있는 3개의 칸 중, 가운데 칸을 제외하고 바깥에 창문을 설치했다. 내부는 전부 마루가 깔렸고 모든 칸이 한 공간으로 트였다. 현재 마루가 깔려있는 3개의 칸은 원래 모습대로 복원 됐지만, 내부가 통으로 트여있는 것은 아직 복원되지 못한 듯하다.


4. 여담[편집]



[1] 첫 번째 사진 출처 -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두 번째 사진 출처 - 문화재청 궁능유적본부 창경궁관리소.
[2] 빈궁이 설치되었다. 빈전과 용도는 같으나, 왕비가 되지 못하고 죽었으므로 빈전이 아닌 빈궁으로 부른다.[3] 빈궁이 설치되었다. 빈전과 용도는 같으나, 왕비가 아닌 후궁이었으므로 빈전이 아닌 빈궁으로 부른다.[4] 찬실이 설치되었다. 빈전과 용도는 같으나, 왕이 되지 못하고 죽었으므로 빈전이 아닌 찬실로 부른다.[5] 보통 한옥의 경우 단층(單層)이라 표현한다.[6] 사진 출처 - 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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