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경궁 요화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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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1656년(효종 7년) 당시 공주들의 거처로 창경궁에 만든 별당이다. 위치는 창경궁 영춘헌의 동북쪽, 창경궁 통화전의 서북쪽이었으며 창경궁 북쪽 후원과 가까웠다.
순조 재위 연간까지 이용한 기록이 있지만, 현재는 사라지고 공터로만 남아 있다.
2. 이름[편집]
‘요화(瑤華)’ 뜻은 ‘아름다운 옥(瑤)같이 꽃이 피다(華)’이다. 북송 4대 황제 인종의 황후였던 폐후 곽씨의 궁전 이름이기도 했다.
3. 역사[편집]
효종은 요화당과 함께 취요헌(翠耀軒), 난향각(蘭香閣), 계월합(桂月閤)을 지어 숙안공주와 익평위 홍득기 부부, 숙명공주와 청평위 심익현 부부, 숙휘공주와 인평위 정제현 부부, 숙정공주와 동평위 정재륜 부부에게 주었다. 그러나 부왕 효종의 사후에는 공주들의 거처로 사용하지 않은 듯 하다.[1]
숙종 대에는 숙종이 잠시 요화당으로 거처를 옮겨 머물렀고[2] , 조정 대신들을 만나 이곳에서 경연하기도 했다.[3]
연잉군 시절 영조와 인연이 있는 곳이기도 했다. 1703년(숙종 29년) 숙종은 왕자 연잉군의 관례를 요화당에서 치르려고 했다. 하지만 왕세자의 관례도 동궁에서 치르는데, 왕자의 관례를 '대내(大內)의 별당(別堂)'에서 치르면 안된다는 비판을 받아 이곳에서 치르지 못했다.[4]
훗날 왕으로 즉위한 영조는 요화당에서 정사를 돌보고 경연을 했다.[5] 1730년(영조 6년)에는 창경궁 내전 전체를 수리하면서 함께 고쳤다.[6][7]
1786년(정조 10년)에 문효세자가 사망하자 요화당을 빈궁(殯宮)[8] 으로 사용했다.[9] 문효세자 뿐만 아니라 혜경궁 홍씨와 효의왕후, 효명세자가 죽었을 때도 옆에 있던 통화전을 빈전 및 빈궁으로 활용하면서 요화당을 국상의 의례 장소로 사용했다.
헌종 때 지은 《궁궐지》에는 화재로 없어졌다고 나와있다. 하지만 순종 대에 제작한 《동궐도형》에 모습이 보이므로, 헌종 시기 이후에 재건한 듯하다. 하지만 현재는 찾아볼 수 없다.[10]
4. 구조[편집]
※ 지금은 남아있지 않지만, 옛 기록과 그림들로 모습을 추측할 수 있다. 아래 적은 건물의 특징은 1828년 ~ 1830년에 그린 《동궐도》, 1907년 ~ 1908년에 그린 《동궐도형》을 참고하여 적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