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경궁 함인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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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정부상징.svg 대한민국 사적 제123호 창경궁
창경궁 함인정
昌慶宮 涵仁亭





소재지
서울특별시 종로구 창경궁로 185 (와룡동)
건축시기
1633년 (창건)
1833년 (중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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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인정[1]

1. 개요
2. 역사
3. 구조
4. 여담



1. 개요[편집]


창경궁정자이다. 명정전의 서북쪽, 환경전의 남쪽에 있다.

'함인(涵仁)' 뜻은 '인(仁)에 흠뻑 젖는다(涵)'이다.

2. 역사[편집]


인조 이전 창경궁에는 없었다. 원래 이 자리에는 왕실 연회를 열던 인양전(仁陽殿)이 있었다. 인양전은 임진왜란 때 불탔고 1616년(광해군 8년)에 복구했다. 그러나 이괄의 난이 일어난 1624년(인조 2년)에 다시 화재를 입어 사라졌다. 저 때 통명전을 비롯한 창경궁 주요 건물 대부분이 같이 불탔다.#

1633년(인조 11년)에 인조는 광해군이 지은 인경궁의 전각들을 철거 및 이전하여 창경궁을 재건했다. 이 때 옛 인양전 터에 헐어온 인경궁 전각으로 지은 건물이 바로 함인정이다.

이 때 어떤 건물로 함인정을 지었는지는 설이 분분하다. 《궁궐지》에 적힌 내용은 '함인당을 헐고 옮겨 세우면서 그 호칭을 그대로 존속시켰다가 훗날 함인정으로 고쳤다'이다. 그러나 1633년 창경궁 복구 당시 작성한 《창경궁수리소의궤》에는 '함인정의 5칸은 경수전 후행각 5칸을 옮겨 짓고, 나머지 4칸은 새로 만들었다'고 적혀있다.# 어느 것이 맞다고 단언하기는 힘들다. 하지만, 후대에 작성한 《궁궐지》보다는 아무래도 당대에 적은 《창경궁수리소의궤》의 기록이 좀 더 신빙성이 있어 보인다.

이후 왕들은 함인정은 다양한 용도로 활용했다. 주로 왕실 의례나 잔치, 또는 과거 합격자들을 불러 모으고## 신하들과 만나 경서를 읽는 곳으로 사용했다.# 국상이 생겼을 때는 망곡하고 향을 올리는 곳으로도 이용했다.# 참고로 함인정을 가장 많이 사용한 왕은 영조였다. 《조선왕조실록》 중에서도 《영조실록》에 함인정 기사가 가장 많이 나온다.

1830년(순조 30년) 8월 화재로 불탔고# 1833년(순조 33년)에 복구했다.

일제강점기일제창경궁창경원으로 개조하면서 많은 창경궁의 전각들을 헐었지만, 함인정은 살아남았다. 다만 주변의 행각과 문은 없어지고 건물 한 채만 덩그러니 남았다. 이후 몇 번의 보수 공사를 거쳐 오늘에 이른다.


3. 구조[편집]


  • 1층[2] 목조 건물이다. 3단 짜리 장대석 기단을 놓고 그 위에 건물을 올렸다. 정면 3칸, 측면 3칸, 총 9칸이다.

  • 지붕은 팔작지붕, 처마는 겹처마에 공포는 이익공식이다. 용마루와 내림마루, 추녀마루는 기와로 마감했다. 용마루 위에 용두만 두고 잡상은 올리지 않았다. 단청은 모루단청[3]으로 칠했다.

  • 실내의 바닥은 전부 우물마루로 깔았다. 가운데 한 칸을 크게 하고 나머지 칸들을 툇마루처럼 만들었다. 높이 또한 가운데 칸이 다른 칸보다 높다. 가운데 칸의 천장에는 우물반자를 설치했으나, 나머지 주변 칸은 서까래와 구조들이 훤히 보이는 연등천장으로 만들었다.

  • 가운데 칸의 도리 사방에는 사계절을 노래하는 시, 《사시(四時)》가 현판으로 걸려있다. 중국 동진 ~ 송(육조) 시기의 시인 도연명이 쓴 것으로 알려졌으나 현재 여러 연구자들이 동진 시대 유명한 화가 고개지(顧愷之)의 작품임을 밝혔다. 각 계절이 상징하는 방위에 맞춰서 시는 동쪽, 여름시는 남쪽, 가을 시는 서쪽, 겨울 시는 북쪽에 두었다. #

春水滿四澤(춘수만사택)
봄의 물은 사방 연못 속에 넘치고

夏雲多奇峰(하운다기봉)
여름에는 구름이 기이한 봉우리에 많다

秋月揚明輝(추월양명휘)
가을 달빛 밝게 비치고

冬嶺秀孤松(동령수고송)
겨울 산마루에 외로운 소나무가 빼어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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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궐도〉 함인정
현재는 사방이 트여있다. 하지만 1828년에서 1830년 사이에 제작한 〈동궐도〉를 보면, 남쪽을 제외한 나머지 3면에 창호 문을 달았음을 알 수 있고 기록에 의하면은 가운데 칸 북쪽에 벽을 세운뒤 일월오봉도를 그려넣었다. 1833년에 재건했을 때 바뀐 건지, 아니면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지금처럼 변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 위에 적었듯, 조선시대에는 함인정 주변에 행각과 담, 문이 있었다. 〈동궐도〉를 보면, 함인정 북쪽에는 벽돌과 돌로 만든 담이 있었고, 서쪽 담장에 2칸짜리 홍인문과 1칸짜리 작은 문이 있었다. 동쪽 담에도 1칸짜리 작은 문이 있었다. 그리고 동쪽과 서쪽에는 행각이 있었으며, 동쪽행각에는 순역헌이 서쪽 행각에는 집서문과 풍순헌이 있었다. 남쪽으로는 넓은 마당이 펼쳐져 있었다. 북쪽에는 공묵합이 있었다. 순종 때 만든 〈동궐도형〉의 모습은 〈동궐도〉와 크게 다르진 않으나, 풍순헌이 없는 등 세부적으로는 조금씩 다르며 함인정의 벽체와 주변 행각은 창경궁의 장기 복원계획에 포함되었지만 언제 복원될지는 미지수이다.


4. 여담[편집]


  • 영조사도세자의 사이가 안좋았을 때, 사도세자가 영조의 일방적인 갈굼으로 분노하다 실수로 동궁 건물 중 하나였던 낙선당을 불태운 사건이 있었다. 그 때 영조는 사도세자가 일부러 방화한 줄 알고 함인정으로 신하들을 모이게 한 다음, 사도세자를 불러 그 앞에서 호되게 질책했다. 이에 화를 못참은 사도세자는 저승전 앞 뜰의 우물에 뛰어들었으나 경악한 신하들과 나인들이 가까스로 구해서 겨우 살아났다. 자세한 내용은 창경궁 낙선당 문서의 4.1 항목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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