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현석/선수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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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나무위키+상위문서.png   상위 문서: 정현석


1. 개요
2. 아마추어 시절
3.1. 2007 시즌
3.2. 2008 시즌
3.3. 2009 시즌
3.4. 2010 시즌
3.6. 2013 시즌
3.7.1. FA 배영수 보상선수 지명
3.8. 2015 시즌
3.9. 2016 시즌
3.10. 2017 시즌


1. 개요[편집]


한화 이글스 소속 외야수 정현석의 선수 경력을 모아 놓은 문서.

2. 아마추어 시절[편집]


대전고 시절에도 투타를 겸업하고 있었으나[1] 투수 쪽에 조금 더 집중하고 있었고, 실제로 2003년 드래프트 당시 롯데 자이언츠에서 2차 4라운드에서(전체 25순위) 개명 전 이름인 정형순으로 지명을 받았다.

그러나 타자나 투수 전부 자신이 있었던 당시의 정현석은 주변에서 타자로 즉전감, 투수로는 키워야 할 유망주 정도로 주변의 평가를 들었고, 투수 쪽으로 자신을 조금 더 시험해 보고 싶다는 판단 하에 롯데 자이언츠 입단 대신 경희대학교 진학을 선택했다. 2003년 드래프트까지 고졸 선수가 지명되면 대학을 진학해 졸업해도 지명권이 유지되던 시절이었기에, 부담감도 적었을 것이다.

그러나 경희대학교에 입학한 후 코칭스태프와의 불화로 인해 대학 시절 4년 간 고작 8⅓이닝만을 투구하는데 그쳤고, 평균자책점도 20.25로 크게 부진했다. 투수로서의 자신을 평가받기 위해 타자 쪽을 제쳐둔 채 투수로 전념했음에도 불구하고[2] 경기에 거의 등판하지 못했고, 부진했던 대학 리그에서의 성적에 투수로는 가망이 없다고 판단한 롯데 자이언츠는 경희대학교 졸업을 앞둔 그에게 대놓고 지명권을 포기하겠다고 연락했다.

이 때 그의 지명권이 완전히 날아갔다는 소식을 들은 고향 팀 한화 이글스에서는 그에게 신고선수로 입단 테스트를 받을 것을 권유했고, 이 무렵 투수 포지션에 미련이 없어진 정현석은 타자 전향을 결심한 후 배트를 잡고 한화 이글스에서 입단 테스트를 받았다. 4년 만에 배트를 잡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한화의 입단 테스트에 합격하게 된다. 이에 정현석 본인은 "오랫동안 안 하다가 갑자기 잡으면 오히려 잘 될 때가 있는데, 그런 때였던 거 같다"라고 회상했다. 고향 팀에 입단한 후 현재의 이름으로 개명한다.

그렇게 외야수로 전향하며 고향 팀 한화 이글스신고선수로 입단하게 된다.


3. 한화 이글스[편집]



파일:external/opds.joins.com/200909181129091101_1.jpg


3.1. 2007 시즌[편집]


입단 첫 해에는 1군에 올라오지 못했다.

3.2. 2008 시즌[편집]


정식 선수로 등록되었으며 시즌 말 1군에 올라왔으나, 류현진의 15승 도전 경기에서 실책을 범해 팬들에게 폭풍 까임을 당했다.

3.3. 2009 시즌[편집]


2군에 있다가 간간히 1군에 올라왔으며, 2군에서의 성적은 3할에 홈런도 10개 이상 치는 호성적을 거뒀다. 꽤 가능성을 보여줬으나 당시 감독이 김인식이라 별 다른 기회를 얻지는 못했고, 한대화 감독이 취임한 2010 시즌에서야 처음으로 기회를 얻게 된다.


3.4. 2010 시즌[편집]


이 시즌 들어서 처음으로 제대로 된 기회를 얻으면서 좌투 스폐셜 리스트로 중용되었고, 데뷔 후 처음으로 100경기 이상 출장하여 1군에서 많은 경기를 소화했다. 당시 한대화 감독은 정현석에게 좌완 투수에 강한 마인드를 가졌다는 평가를 했다.

시즌 초반에는 좌완투수를 상대로 집중적으로 기용되면서 좌투 상대로 4할이 넘는 타율을 자랑했었다. 좌투 상대로 시즌 최종 성적으로 68경기 3홈런 16타점 타율 .296 출루율 .350 장타율 .440 OPS .790의 준수한 성적을 남겼으며, 우완 언더핸드를 상대로도 좋은 성적을 남겼다. 다만 우투수를 상대로는 약점을 크게 보여서, 시즌 초반에는 좌투 상대로 4할이 넘는 동안 우투 상대로는 2할이 안 되는 타율을 기록하며 주전 외야수로 올라서는 데 실패했다.

수비에서도 많은 활약을 했는데, 투수 출신답게 어깨가 강해서 한화 외야진에서 그나마 강견을 가지고 있었던 고동진이 공익근무요원으로 복무 중인 상황에서 유일한 강견이었으며, 외야 전향이 늦었음에도 불구하고 뛰어난 타구판단 능력에 준수한 주력까지 보여주면서 전천후로 뛰었다. 당시 한화 외야진은 성적이 부진했던 주전 중견수 강동우, 나날이 퇴보하는 추승우, 시즌 중반 트레이드로 들어온 김경언에 2군에서 궁여지책으로 올렸던 이양기까지 돌려막기 일쑤였던 지라 정현석의 활약은 팀에 큰 보탬이 되었다.

시즌 최종 성적은 1군 114경기 24타점 4홈런 3도루 타율 .262 출루율 .321 장타율 .371 OPS .693에 보살 6개 수비율 .960.

조금 더 향상되면 주전으로 뛸 수 있는 준수한 성적이었으나, 아쉽게도 나이가 상당히 많아 병역 문제가 대단히 걸렸기 때문에 시즌 종료 후 경찰 야구단에 지원해서 합격했다. 외야 자원으로는 쏠쏠한 성적으로 한대화 감독도 정현석만한 외야 자원이 없어서 군대를 미뤄서라도 1년 더 쓰고 싶다고 이야기했을 정도로 유망한 유망주였고, 실제로 보여 준 가능성도 있었기에 많은 사람들이 아쉬워했다.


3.5. 경찰 야구단[편집]


2011 시즌 경찰 야구단에 입단한 첫 해부터 4번 타자를 맡으면서 경찰청의 창단 첫 퓨처스리그 우승에 기여했다. 2년차에는 더욱 발전, 경찰 야구단의 주장으로 뛰면서 퓨처스리그 최강의 타자로 군림했다.

2012 시즌 퓨처스리그에서의 최종 성적은 321타수(1위) 118안타(1위) 타율 .358(1위) 타점 69(4위) 득점 63(1위) 2루타 32개 홈런 10개 38삼진 36볼넷 장타율 .573(1위) 출루율 441(2위).

단순히 2군 성적을 믿을 수 없다고 평가하기에는 월등히 2군을 완전히 정복해 버려서 많은 팬들이 정현석에게 기대를 걸고 있다.

경찰 야구단에서 제대한 후에는 팀에 복귀하여 미야자키 교육리그에 참가했다.


3.6. 2013 시즌[편집]


시즌 초반에는 타율은 2할 6푼대로 '뭔가 모자라기는 한데 한화 외야수로는 준수한 수준의 타율'으로 생각되었으며, 좌투수 스페셜리스트로 활동하던 2010년과 달리 우투수와 언더핸드 투수에게는 각각 3할대, 3할 7푼을 찍어내면서 내고 있었다. 그러나 정작 좌투수 상대로는 2할 1푼 언저리에서 놀고 있었으며 2루타 머신으로 장타를 뻥뻥 때려내던 2군에서의 모습과는 다르게 장타가 정말 안 나오고, 가장 심각한 문제가 득점타율이 극악으로 안좋아 2할 언저리에 있어서, 2010년 고타율에 비해 낮은 득점권 타율로 욕을 먹던 정원석에게 붙은 별명인 정득병 별명을 이어받았다. 화룡점정으로 특유의 공격적인 스윙으로 병살타도 양산해내는데 성공했다. 수비에서도 주전 중견수로 낙점하고 시즌을 시작해보니 타구판단이나 수비범위등에서 중견수로는 제자리를 못잡고 헤매기 시작하면서 우익수 김태완과 함께 외야 수비가 무너지는데 한 몫, 주력에 크게 장점이 있는 선수도 아니라서 타율을 제외하면 장점을 찾기 힘든 선수였다.

이후 김태완이 결국 내야로 다시 돌아간 뒤 수비 포지션을 본래의 포지션인 우익수로 가게 되면서 수비에서 안정감을 찾기 시작했다. (득점권 타율은 그대로였지만) 타격에서도 타율이 상승했으며, 시즌 후반으로 갈수록 장타가 하나둘씩 나오기 시작했다. 주루 플레이에서 태그아웃 상황인데 손을 빼서 태그를 피한 후 베이스를 태그해서 생존하는 모습으로 변하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공수 양면에서 긍정적으로 시즌을 종료했다.

최종성적으로는 2013 시즌 1군 121경기 .287 102안타 27타점 15 2루타 4홈런 37볼넷 64삼진 14병살 4실책 .365 .368 .733.

시즌을 마친뒤 정리해 보면 팀이 한시즌 최다 병살 기록을 경신하는데 큰 공헌을 한 14병살과 장타력이 조금 아쉽지만, 2013 시즌 정현석이 한화에서 보여 준 모습이 경찰청 복무 후 보여 줘야 할 모습으로의 지표가 되지 않았나 싶다.


3.7. 2014 시즌[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정현석/선수 경력/2014년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3.7.1. FA 배영수 보상선수 지명[편집]


2014 시즌 후 FA로 이적한 배영수의 보상선수로 지명되어 2014년 12월 15일 삼성 라이온즈로 이적했다. 기사에 의하면 2014 시즌 삼성 상대 6경기서 4할3푼8리(16타수 7안타)로 정확한 타격을 보여주며 류중일 감독을 비롯한 삼성 코칭스태프에 강한 인상을 남겼다고 한다. 배영섭김헌곤의 연이은 입대로 삼성 외야진에 우타 외야수가 없고, 대타 자원 우동균의 성장이 지지부진하며 144경기로 경기수가 늘어난 상황에서 30대 후반에 접어든 주전 우익수 박한이의 체력 안배가 필요하다는 고려하면 합리적인 픽으로 평가받았다.

그런데 보상선수 지명 이틀 만에 정현석이 위암 투병 중인 사실이 밝혀져 충격을 안겨 주었다. 다행히 초기에 발견하여 수술을 받고 회복에 들어갔지만 삼성 측에서는 이러한 사유로 재지명이 가능한지 KBO에 문의하였고, 이에 KBO는 고민에 빠졌다. 기사에 따르면 한화는 보상선수 발표일(15일) 오후 5시에 삼성 운영팀장이 정현석 지명 사실을 알려와서 정현석이 내과 수술을 했다는 사실과 재활 기간을 전했다. 그런 후 삼성이 오후 5시 45분쯤에 양수양도 계약서를 보내와서, 삼성이 모든 것을 수용하고 지명을 선택한 것으로 받아들였다고. 삼성 측은 시간이 촉박해서 정현석을 지명한 후 재지명 가능 여부를 문의하려고 했다고 하나, 권혁에 대한 보상선수 지명 때는 보호선수 20인 명단에 들어있었던 정현석이 불과 며칠만에 빠졌음을 간과한 점, 전화 한 통이면 정현석의 몸 상태를 알아볼 수 있었는데 그러지 않았던 점 등 안이했다는 비난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

이로 인해 논란이 되자, 삼성은 배영수에 대한 보상선수 지명을 없던 것으로 하고 배영수의 연봉 300%를 받기로 하였다. 다만 이미 보상선수를 지명하였으므로 절차상으로는 배영수의 연봉 100%에 해당하는 5.5억 원에 현금트레이드를 통해 정현석을 한화로 돌려 보내기로 결론내렸다.[3] 때문에 정현석은 4년 전 임훈의 사례와 비슷하게[4] 본의아니게 불과 이틀 사이에 팀을 두번이나 옮기게 되었다. 김성근 감독은 어떻게든 살려 내서 함께 가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처음에는 정현석이 보상선수로 선택되어 '득병이가 한화를 떠나게 되었다'며 좋아했던 칰갤러들은 그가 암 투병 중임이 알려지자 모금 활동을 벌여 주문제작 피규어, 응원 댓글북, 꽃다발 등을 정현석에게 전달하였다.

암은 재발과 전이 때문에 무조건 안정을 취해야 하는 데다가 수시로 검사받고 치료받아야 한다. 항암제 부작용 중 하나가 근력저하이고 이는 30줄에 접어든 정현석에겐 치명적으로 작용할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고 못 뛴다고 단언하기는 어려운 이유도 있는데, 암 수술 이후에도 잘 뛰고 있는 선수들도 있기 때문. 대표적으로 림프종을 이겨내고 메이저리그 정상급 투수로 성장한 존 레스터와 kt 이적 후 폭발한 장시환, 배구계에도 최태웅[5]한수지가 있다.


3.8. 2015 시즌[편집]





그리고 8월 5일 드디어 1군에 합류했다. 이날 문학 SK 와이번스전에서 7회 대타로 출장해 2타수 2안타를 쳤고, 9회엔 적시타로 타점까지 기록했다! 여기에 펜스 앞에서 점핑 캐치까지 선보이며, 팀은 5연패에 빠졌지만 팬들에게 큰 위안을 제공하였다. 이 날 상대 팀 SK 와이번스도 전광판을 통해 그의 복귀를 축하하는 메시지를 띄우는 훈훈한 장면을 연출했다.

8월 6일 LG와의 홈경기에서 첫 타석 안타를 친 뒤 정근우의 밀어내기 볼넷으로 홈인, 건강한 모습으로 복귀한 정현석을 축하하는 홈 팬들의 박수갈채를 받았다. 5회에도 2루타로 출루한 뒤 장운호의 적시타로 홈인하며 5타수 2안타 2득점으로 활약, 팀의 4:1 승리에 큰 공을 세웠다.

8월 7일 LG전에서는 1회 1사 1, 3루에서 적시타를 쳐 김경언의 강림을 돕고, 8회에는 좌전안타로 출루한 뒤 봉중근폭투 때 2루에서 홈까지 뛰어 세이프되는 등 공수주에서 변함없이 맹활약했으나 김회성의 끝내기 뇌주루로 인해 팀이 패하며 묻혔다.

8월 11일 KT전에서는 3회 2사 1, 2루에서 삼진아웃당했으나, 8회 2사 1루에서 좌측 펜스 상단을 맞추는 1타점 적시타를 쳐 팀을 들었다놨다 했다.

8월 12일 KT전에서 6타수 4안타 1타점 3득점을 기록하며 팀의 시즌 첫 4연승을 이끌었다.

이로서 복귀 이후 한 경기를 제외하고 멀티히트를 기록중이며, 이용규의 부상과 5연패로 최악이던 팀 분위기를 뒤집는데 에스밀 로저스와 함께 큰 공헌을 했다.

8월 22일 KIA전에서도 2:0에서 3:0으로 점수차를 벌리는 결정적인 타점을 기록하며, 로저스의 3승에 기여하였다.

8월 28일 마산 NC전에서 생애 첫 만루홈런을 쳐내며 이 날의 영웅으로 등극했다. 4:4에서 8:4로 점수를 역전하는 만루홈런임과 동시에, 개인 첫 만루홈런이며, KBO리그 700번째 만루홈런이었다. 기사 병마마저 이겨내고 만루홈런으로 팀을 구하는 그 모습이 수많은 한화 팬들의 마음을 울렸다고 한다.


3.9. 2016 시즌[편집]


4월달에 잠시 1군에 얼굴을 비춘 후 시즌 후반까지 가도록 소식이 없어 팬들이 직접 확인해본 결과 부상으로 퓨처스 출장도 거의 하지 못했다고 한다. 정황상 올 시즌은 얼굴보기 어려울 듯.

결국 4월달 이후 1군에 올라오는 일은 없었으며 8타석 8타수 무안타(2삼진 2병살)만을 기록하고 시즌 종료.


3.10. 2017 시즌[편집]


2군에서만 머물며 별다른 소식이 없다가 5월 13일 박준혁을 대신하여 1군으로 콜업되었으며, 같은 날 LG전에서 2루수 정근우의 대타 김경언이 삼진으로 물러난 뒤 우익수 대수비로 투입되며 시즌 처음으로 1군 경기에 출장하였다.

5월 21일 벤치 클리어링 당시 윤성환권정웅에게 선제공격을 날렸다가 재크 페트릭한테 저지당하고[6] 동반 퇴장당했다. 훗날 심수창스톡킹에 술회하기를 정현석은 벤치 클리어링 당시 눈 앞에 파란색만 보이면 다 때렸다고 했다.

결국 5경기 출장정지라는 중징계를 받았다.

이번 시즌은 채 10경기도 출장 못 할 만큼 기회를 정말 많이 받지 못하며 아쉽게 시즌을 마쳤다.

시즌이 끝난 뒤 은퇴하며 선수 생활을 마무리했다.
[1] 2002년 무등기 전국고교야구대회 결승전에서 배명고와 연장 12회까지 가는 접전끝에 패했다.[2] 아마야구라서 간간이 타석에 서기는 했다.[3] 현금트레이드로 정현석을 돌려 받는 것은 한화 측에서 먼저 제안했다고 한다.[4] 임경완롯데 자이언츠에서 SK 와이번스로 FA 이적하면서 보상선수로 지명되어 롯데로 이적, 그러나 그 후 정대현이 SK에서 롯데로 FA 이적하면서 SK가 리턴 픽.[5] 관련 영상[6] 페트릭은 정현석이 권정웅을 때리는 것을 보고 눌러서 저지했다. 페트릭은 이 행위 때문에 벌금 200만원 처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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