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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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前 OB 베어스, 삼성 라이온즈 소속의 야구선수, 야구코치, SBS Sports 해설위원
2. 선수 경력[편집]
1984년 OB 베어스의 1차 지명을 받아 입단하여 그 해 57경기 146이닝 12승 8패 25세이브 평균자책점 2.84의 성적으로 구원왕이 되었다. 이 때문에 윤석환을 KBO 리그 첫 마무리 투수로 보기도 하나, 대개 1985년부터 마무리로 전업한 삼성의 권영호를 첫 마무리 투수로 인정한다.
1984년 신인왕 투표에서 만장일치로 상을 수상했는데, 이는 1996년의 박재홍과 함께 둘뿐인 기록이다. 그러나 당시엔 점수제였고[4] 박재홍이 신인왕을 수상할 때는 득표제였다. 당시에는 한국시리즈 마지막 경기일에 그해의 개인타이틀 시상식을 열었는데, 7차전에서 롯데의 극적인 우승으로 신인왕이었음에도 시상식에서 아무런 주목을 못 받았다. 기자들이 모두 시즌 MVP이자 한국시리즈 나홀로 4승의 주역 최동원, 7차전 당일의 역전 홈런으로 한국시리즈 MVP를 수상한 유두열에게 주목하면서, 윤석환에게는 아무도 인터뷰를 청하지 않았을 정도(...).
데뷔 시즌인 1984년에 57경기[5] 에 등판, 146이닝이나 던질 정도로 워낙 혹사당했기에 이후로는 신인 때만큼 성적을 올리지 못했다[6] . 1986년 선발로 전향했으나 7승을 올리는 데 그쳐 이듬해인 1988년 다시 마무리 투수로서 13승(모두 구원승)[7] , 14세이브를 올려 구원왕이 되었다.
그러나 이후 2년간 부진해[8] 1990년 시즌 후 조범현과 함께 삼성 라이온즈에 현금 트레이드됐다. 1991년 결국 재기에 실패하고 은퇴했다.
3. 지도자 경력[편집]
1992년부터 1998년까지 OB 베어스의 불펜코치를 맡아 팀의 평균자책점이 좋아지고 1995년 팀의 한국시리즈 우승에 기여했다.
2000년에 SK 와이번스의 투수코치를 맡았으나, 2000년에는 8개팀 중 팀 평균자책점 최하위를 기록했고 2001년에는 팀 평균자책점 1위를 기록했으나 타선 부진으로 팀이 하위권에 머물러 2001 시즌 후 코치직에서 물러났다. 2004년 다시 두산의 투수코치로 복귀해 팀의 3차례 준우승에 기여했지만, 두산 팬들에게는 쓸 만한 신인 자원을 제대로 육성하지 못했다고 까였다. 팀이 어수선했던 2011 시즌 후 코치직에서 물러났다.
4. 해설자 경력[편집]
2012년에는 SBS ESPN의 해설위원으로 활동하여 해설가로서 좋은 평을 받았다.
5. 지도자 복귀[편집]
2015년에 전임 감독의 비리 문제로 감독직이 공석이 된 모교 선린인터넷고교의 감독을 맡아 감독 커리어를 시작했다. 그리고 2015년 이영하와 김대현 원투펀치를 앞세워 황금사자기 우승을 이끌었다. 이후 2017 시즌 후 감독직에서 물러났고, 이후 선린인터넷고등학교 야구부는 2018 시즌 암흑기를 겪었다.
이후 2019년 9월 25일 윤석환의 야구TV라는 채널명으로 유튜브를 시작했다. 그러나, 2020년 2월 7일 이후로 업로드가 없다.
6. 평가[편집]
1990년대 OB 시절에는 양상문 감독과 동급이라 할 정도로 칭송받았던 투수코치였지만[10] , 2000년도 두산 때의 평가가 이상군 급으로 악평을 받는 이유는 투수들을 심하게 갈군다는 이유가 가장 컸다. 이건 당시 두산 김경문 감독과 일맥상통했는데, 감독이고 투수코치고 선수 감정 생각 안 하고 그냥 너 공 빠르니 피하지 말고 걍 던져.식으로 윽박을 지른 다음 볼넷이 나오면 엄청나게 투수를 갈군다고 악평이 자자했다.
2007년도 부터 2009년도 까지는 쓸만한 중간계투진들을 만들었고 KILL 라인이라고 불리는 고창성, 이재우, 이용찬, 그리고 나머지 언급 불가한 선수, 그 이외에 선발로 올스타에 뽑힌 홍상삼[11] , 조현근, 금민철, 정재훈 등 여러투수들도 발굴했다. 그래도 투수코치를 꽤나 오래했음에도 1군 현장과 2군 현장을 꼼꼼히 체크하면서 유망주 발굴에 힘썼다는 점, 이건 김진욱 두산 전 감독 역시 윤석환과의 행동이 비슷했다.
그런데 2010년도부터 그런지 계투에서 올라온 이름을 말할 수 없는 자가 맛탱이가 가지 않나, 2년차 징크스인데 선발+계투에서도 개털린 홍상삼도 맛가지 않나, 이재우도 망가지고 이용찬/고창성도 조금씩 털리지 않나 희한하게 작년보다 방어율이 폭등하더니[12][13] 윤석환 투코가 2군으로 내려가고
하지만 결국 조계현은 윤석환보다 더 못해서 재계약에 실패했고 KILL 라인 역시 실패했다. 그래도 짧은 3년간 두산이 리그의 투톱이었던 삼성, SK를 상대로 투수력에서 견줄만한 팀으로 만들었다. 후임 정명원 코치도 첫 해 유능하다고 두갤에서 반응이 좋다가 이듬해 2013년 508 대첩 이후로는 호된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짧은 2년 동안 윤석환처럼 얻은 수확과 잃은 수확이 비슷비슷해야 할까나?
7. 연도별 성적[편집]
- 붉은 글씨는 리그 1위 기록. 진한 표시는 리그 5위 내 기록.
8. 관련 문서[편집]
[1] 체육교육과 (1980학번)[2] ~5월 30일[3] 5월 31일~[4] 메이저리그 명전 투표와 비슷한 방식이었다.[5] 1984년에 투수들 중 등판 경기 수 1위였다.[6] 1984년과 1985년에 선발로 2승을 거뒀다[7] 비록 모두 구원승이지만 이 기록이 주목할 만한 이유는, 두산은 이 이후로 2013년 유희관이 나오기 전까지 근 25년 동안이나 한 시즌 10승을 기록한 토종 좌완 투수가 단 한 명도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러니 두산은 일본에서 돌아온 혜르노빌에게 11억 원이나 주며 계약할 정도로 다급했다. 이혜천은 2001년에 선발과 구원을 오가며 마구잡이로 기용되면서도 9승이나 했었던 선수다.[8] 1989년에는 땜질 선발로 2승을 거두기도 했지만 3패 1세이브에 그쳤고 1990년에는 한 차례의 선발등판이 없었으며(14경기 모두 구원) 1승 2세이브[9] 실제 자신의 후임 투수코치인 정명원 코치에 대해서 언급하는 것을 극도로 꺼렸다. 엠팍에서는 차범근과 신문선을 섞어 놓은 목소리라는 듯.[10] 양상문 감독 역시 2007년을 기점으로 이상군 급으로 능력이 나쁘다는 말이 생겨나게 되었다.[11] 소포모어 징크스가 와서 털린 뒤 계투로 전환됐다.그리고 홍상삼이 각성한것은 두산시절 김진욱(1960)감독, 정명원코치의 공이 더크다고 볼수있다.[12] 그러나 이는 윤석환의 탓이라기엔 김경문의 혹사 때문으로 보여진다. 당시만 해도 '벌떼 야구'로 대표되는 계투를 혹사하는 경기 운영이 주류였는데, 김경문은 김성근과 더불어 이 부문 투탑이었다. 저 당시 혹사에 둔감하여 별 말은 없었으나 2010년대 들어 혹사 문제가 부각된 이후, KILL 라인의 운용을 보면 지금 기준 투수 혹사에 부합한다고 보여진다.[13] 설령 당시 윤석환이 아무 말 안 했다는 식으로 책임을 묻는다 해도, 상하 권위주의가 매우 높은 KBO 리그에서 감독에게 직언 같은 거라도 했다간...[14] 어찌보면 유망주를 못키우고 어린 투수들이 털리는 이유 중 이게 제일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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