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재훈(19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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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훈의 수상 경력 / 역대 등번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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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두산 2019V6.png
KBO 리그 한국시리즈
우승코치

2019

파일:KBO 리그 로고(엠블럼/영문, 2013~2021).svg
2005 KBO 리그 세이브왕

파일:KBO 리그 로고(엠블럼/영문, 2013~2021).svg
2010 KBO 리그 홀드왕

두산 베어스 등번호 41번
장원영
(2000~2002)

정재훈
(2003~2014)


채지선
(2015)
롯데 자이언츠 등번호 41번
이웅한
(2012~2014)

정재훈
(2015)


강승현
(2016)
두산 베어스 등번호 41번
채지선
(2015)

정재훈
(2016~2017)


이원재
(2018~2018.9.12.)
두산 베어스 등번호 73번
전상렬
(2014~2017)

정재훈
(2018~2023)


결번
KIA 타이거즈 등번호 73번
정명원
(2021~2023)

정재훈
(2024~)


현역


A대표팀 참가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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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A 타이거즈 No.73
정재훈
鄭載勳 | Chung Jae-Hun

출생
1980년 1월 1일[1] (44세)
전라남도 목포시[2]
국적
[[대한민국|

대한민국
display: none; display: 대한민국"
행정구
]]

학력
역삼초 - 휘문중 - 휘문고 - 성균관대[3]
신체
178cm, 83kg, A형
포지션
투수
투타
우투우타
프로입단
1999년 2차 5라운드 (전체 37번, OB)
소속팀
두산 베어스 (2003~2014)
롯데 자이언츠 (2015)
두산 베어스 (2016~2017)
지도자
두산 베어스 2군 불펜코치 (2018)
두산 베어스 1군 불펜코치 (2019~2020)
두산 베어스 1군 투수코치 (2020~2022)[4]
두산 베어스 2군 투수코치 (2022)[5]
두산 베어스 1군 투수코치 (2023)[6]
두산 베어스 2군 투수코치 (2023)[7]
KIA 타이거즈 1군 투수코치 (2024~)
병역
예술체육요원
(2006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3위)
등장곡
Lady Gaga - Poker Face
이전 등장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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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uns N' Roses - Welcome to the Jungle[1]
Eminem - The Monster (ft. Rihanna)[2]

종교
개신교
1. 개요
3. 지도자 경력
4. 피칭 스타일
5. 별명
6. 여담
7. 연도별 성적
8. 관련 문서



1. 개요[편집]


"지금 너무 행복해요."

"지금 행복한 기분 이대로 할 수 있는 데까지 하고 은퇴하고 싶습니다."[8]

2016년 4월 5일 잠실 NC전,

시즌 홈 개막전에서 1년 만에 두산에 돌아와 잠실 홈경기를 치르고 한 허슬플레이상 인터뷰 中 영상


두산 베어스, 롯데 자이언츠 소속 우완 투수. 현 KIA 타이거즈 1군 투수코치.

현역 시절 2005-2006년 2년 연속 30+세이브를 기록하며 두산 베어스의 든든한 마무리 투수와, 중계 투수로 전천후로 활약하며 2006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에도 승선한 경력이 있다.. 현역시절 KBO 리그 홀드왕, 세이브왕을 각각 경험해본 세 명 뿐인 투수로[9], 10년이 넘는 세월동안 두산 베어스 불펜진의 기둥 역할을 해 주었다. 롯데에서 1년을 보낸 후 다시 두산으로 돌아와 은퇴 전 마지막 시즌 2016년에도 홀드 2위를 기록하며 건재함을 과시했고, 두산 베어스의 불펜진을 지탱함은 물론 선수들의 정신적 지주 역할까지 훌륭히 해낸 선수이다. 자신의 팔을 아끼지 않고 두산에 헌신한 점 때문에 모두의 박수를 받으며 선수 생활을 마무리했다.


2. 선수 경력[편집]




3. 지도자 경력[편집]



3.1. 두산 베어스[편집]


두산 베어스의 코치 제의를 수락함으로써 2018 시즌부터 두산 베어스 코치 정재훈을 볼 수 있게 되었다. 보직은 2군 불펜코치.

2018년 6월 30일 잠실 KIA전 경기 전 시구 겸 은퇴식을 가졌다. 마지막으로 잠실 마운드에 서는 순간.[10] 인터뷰 영상

11월 30일 보도자료를 통해 2019년부터 1군 불펜코치를 맡게 되었음이 발표되었다. 2019년 한국시리즈에서 불펜코치로 역할을 했고, 팀은 4:0으로 스윕 우승을 거두었다.

불펜코치는 엔트리에 포함되지 않기 때문에 정재훈 코치에게는 메달이 수여되지 않지만 김태형 감독이 특별히 정재훈 코치를 불러 자신의 메달을 목에 걸어주며 두산팬들에게 감동적인 장면을 선물했다.

2020년 포스트시즌을 앞두고 기존 1군 투수코치였던 김원형SK 와이번스 감독으로 선임되어 공백이 생긴 1군 투수코치를 맡게 됐다. 플레이오프부터 남은 포스트시즌 동안 1군 메인 투수코치를 맡는다고 한다.[11] 반대급부로 기존 1군 불펜코치는 배영수 2군 투수코치가 올라와 맡는다.

2021년 선발진의 대붕괴와 불펜 투수에 대한 혹사 때문인지 시즌 초반까지 메인 투수코치로써는 평가가 좋지는 않았다. 다만 로켓의 팔꿈치 통증이나 미란다의 셀프 혹사는 본인의 잘못은 아닌 데다가 수술 후 돌아온 곽빈의 경우에는 김태형 감독에게 적극적으로 투구수 제한을 건의했다는 점을 보면 코치 본인보다는 김태형 감독 스타일 불펜 혹사 성향이 있는지라 어느 정도는 참작의 여지도 있다.

그런데 2021 포스트시즌을 계기로 정재훈 코치에 대한 평가가 완전히 바뀌었다. 김태형 감독이 포스트시즌 내내 보여준 신들린듯한 투수 기용에는 정재훈 코치의 영향이 상당했을 것이라는 전문가들의 평가가 줄을 이으며 2021 포스트시즌 미라클 두산의 숨은 공신으로 주목받고 있다.

사실 엄밀히 말하면 바뀌었다고 보기 힘든 것이, 2021 시즌 외부에서의 평가는 썩 좋지 못했어도 두산 팬들 사이에서는 이용찬의 이탈과 장원준, 유희관의 노쇠화로 애초에 투수진의 선전을 기대하기 힘든 시즌이었다는 주류 의견이었기 때문이다.

권휘, 최승용 등 영건 투수들이 좋은 모습을 보여주고 있고 그 외에도 젊은 투수들이 다음 시즌을 기대할만한 모습을 보여주면서 투수진 세대교체를 적절히 해 나가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러다가 2022년 6월 1일부로 코칭스태프 개편 과정에서 2군 투수코치로 내려갔다.

2023 시즌부터는 다시 1군 투수코치로 역임한다.

허나 분위기 쇄신 차원에서 6월 11일자 2군 투수코치로 말소되었고, 권명철 투수코치가 1군에서 코치직을 맡게 되었다.


3.2. KIA 타이거즈[편집]


2023년 10월 26일 KIA 타이거즈의 1군 투수코치로 합류한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원래 김태형 감독이 롯데 자이언츠의 신임 감독으로 부임하면서 그를 따라 롯데 코치로 옮긴다는 루머가 있었는데, 예상과는 다르게 롯데가 아닌 KIA의 투수코치로 가게 되었다.

한편 정재훈 코치를 KIA로 영입해오는데 심재학 단장이 가장 큰 역할을 했다고 한다.# 기사에 따르면 심재학 단장이 먼저 연락을 해 KIA에서 함께했으면 좋겠다는 의견을 보였고, 이를 수락하면서 두산을 떠나 KIA로 자리를 옮기게 됐다고 한다. 김종국 감독과는 현역 시절 별 접점이 없어 보이지만 2006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대표팀에서 함께한 바 있다.

4. 피칭 스타일[편집]



파일:Honeycam 2016-10-11 00-30-36.gif

전형적인 기교파 투수로 뛰어난 제구력과 다양한 변화구를 갖고 있는 반면 전성기 시절에도 패스트볼 평균 구속은 140km/h대 초반, 최대 146km/h 정도였으며, 어깨 부상 이후 구위가 떨어지며 2016년부터는 131~138km/h 정도의 패스트볼 구속을 유지하고 있다. 주무기는 낙차 큰 포크볼이며 커브슬라이더도 수준급으로 구사한다. 2014년부터 커터를 장착한 뒤 커터와 포크볼, 커브를 조합해 가며 투구하고 있다.

투구폼이 단정하면서도 역동적이고, 빼어난 제구력과 좋은 변화구들을 가지고 있어서 쉽게 무너지지 않는 타입의 선수. 거기다 포커페이스의 달인이라고 할 수 있을 만큼 마운드에서 표정 변화가 거의 없다. 이 때문에 등장곡이 레이디 가가의 <Poker Face>이다.[12] 2016 시즌 초반 잠시 등장곡이 바뀌었던 적이 있으나 팬들의 요청으로 다시 돌아왔다.

포스트시즌에 유난히 약했다. 풀타임 마무리 첫 해로 세이브왕을 기록했던 2005년엔 한국시리즈에서 김대익에게 2차전 동점홈런을 허용했고 홀드왕을 차지한 2010년엔 준플레이오프, 플레이오프에서 6이닝동안 홈런을 4개나 맞고 무려 11실점을 기록했다. 2013년 플레이오프 3차전 9회말 1사 1-2루에 등판해서 두 타자 연속 안타를 허용했는데 각각 민병헌임재철이 홈 보살을 기록하며 가까스로 구해준 적도 있다.[13] 거기다 2013년 한국시리즈 5차전에서도 8회초 등판하여 정병곤에게 안타를 허용한 후, 박한이에게 2타점 결승타를 얻어 맞으며 역스윕의 단초를 제공했다.

포크볼러임에도 손가락이 크지 않아 공인구의 변화에 성적이 널을 뛰었다는 말이 있다. 사실 포크볼이 손가락을 넓게 벌려야 한다는 것을 생각하면 당연한 이야기이다.

아스정이라는 별명이 붙은 이유는 정재훈 특유의 스타일에서 비롯됐는데, 강력한 패스트볼 대신 리그 정상급의 포크볼과 준수한 슬라이더를 위시한 유인구로 헛스윙을 유도하면서 상대 타자를 살살 달래며 승부하는 타입이었다 보니 주자를 쌓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마무리 시절 투구를 요약하면 아래와 같다.

  • 카운트 초반에 포크볼과 보여주기 식의 하이 패스트볼 피칭.
  • 결정구로 빠른 슬라이더로 빙글빙글 스트라이크 존 테두리만 왔다갔다 던지며 헛스윙을 유도.
  • 그러나 9회이기 때문에 신중하게 타석에 들어선 상대 타자들이 포크볼은 치기를 포기하고 중간중간 들어오는 슬라이더에 움찔움찔하면서도 단타만을 노리고 인내심 있게 기다리며 볼넷을 골라 나감.
  • 이것이 반복되어 노 아웃 만루나 노 아웃 1,2루 상황이 연출.
  • 그럼에도 뚝심 있게 타자와 일관된 승부를 하며 삼진이나 내야 플라이로 세이브를 챙김.

이렇게 경기를 보는 상대 팀 팬뿐만 아니라 같은 팀 팬들까지도 투수와 타자와의 긴 싸움으로 피를 말리게 했다. 그래서 두산 마무리 시절 리그 탑급의 성적을 거두고도 역전 위기를 만들고 해결하는 습성 때문에 팬들에게 욕을 많이 먹었다. 실제로 마무리로 활약했던 2005~2007년의 BB/9을 살펴보면 항상 리그 평균 BB/9보다 높은 수치를 기록했다. 하지만 워낙에 변화구의 완성도도 빼어났고, 제구력과 배짱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이런 승부로 타자를 이기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기에 어찌 보면 그가 왜 리그 정상급 불펜으로 활약할 수 있었는지 여실히 보여주는 장면이기도 하다.

이렇다 보니 빠르지 않은 패스트볼 구속에 비해 탈삼진율은 상당히 높은 편이다. 데뷔 첫 풀타임 시즌이었던 2004년과 선발-계투를 왔다갔다 했던 2007~2009년, 어깨 부상 후유증이 남아있던 2013년과 롯데 시절이었던 2015년을 제외하면 모든 시즌의 이닝당 탈삼진이 1을 넘겼다. 심지어 패스트볼 구속이 130km/h대에 그쳤던 2016년의 탈삼진율도 세이브왕을 차지했던 2005년과 맞먹었을 정도.


5. 별명[편집]


  • 제일 대표적인 별명은 아스트랄한 피칭의 대명사로서 붙여진 '아스정\'. 비교적 늦게 야구를 접한 팬들 중에선 아스정의 뜻을 "아, 스벌 정재훈"으로 아는 사람들도 있다. 줄여서 사람 이름을 성 떼고 부르듯이 스정이라고 불리는 경우가 제일 많다.
    • 같은 팀이었던 최재훈이 그로 인해 "최스정"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 위기 상황에서 등판해 실점을 허용하지 않는 경우에는 메시아 정이라는 별명으로 많이 불렸다. 또한, 정재훈이 마무리로 나오면 게임이 끝난다며 Game Over라는 별명도 있었다.[14]

  • 2007시즌부터 작가라는 별명이 생겼다. 이후 2010년 포스트시즌 때의 포스로 인해 이 별명은 타 팀 팬들에게까지 널리 퍼졌다.

  • 2016시즌 부상을 당한 뒤 선수단이 모두 모자에 정재훈의 등번호인 41을 쓰고 경기를 뛰었는데, 오재원만 정작가라고 쓰고 경기에 나갔다.

  • 2018년 은퇴식을 가지면서 두산 선수단이 '정작가'라고 써진 몽블랑 볼펜을 선물했다. OSEN 이종서 기자에 의하면 현역 시절의 의미와는 다르게 후배 양성을 위해 새로운 집필을 시작해 달라는 의미를 담은 것이라고. 그리고 정재훈 은퇴식 이후에도 모든 선수들이 덕아웃에서 41번이 새겨진 티셔츠를 입기도 했다.

  • 두산 프랜차이즈답게 두산 굿즈라면 뭐든 잘 어울려서 "위팬모델"이라는 별명이 있다. 유니폼 착샷 모음 발바닥후드 속칭 "D마크만 박히면 다 어울린다"고 한다.


6. 여담[편집]


  • 우스꽝스러운 별명으로 저평가당하는 경향이 있지만 KBO리그 역사상 처음으로 세이브왕, 홀드왕을 모두 달성한 선수이다. 통산 555경기 35승 44패 139세이브[15] 84홀드 705.1이닝 ERA 3.14을 기록 중인, 커리어 평생을 필승조로 살아온 KBO 불펜 커리어 상 다섯 손가락 안에 들만한 클래스의 불펜 투수이다. 또한 2005년부터 2016년 현재까지 구원투수의 누적 WAR를 살펴보면 오승환, 정대현, 정우람, 안지만에 이어 5번째에 이름을 올리고 있다.[16] 그 뒤로는 권혁, 손승락, 박희수 등이 있다. 덧붙여 정대현정우람이 기록하고 있는 통산 100세이브-100홀드 기록을 달성 할 수 있을 것으로 보였으나, 2017년 11월 08일에 은퇴하며 결국 달성하지 못했다.

  • 투수가 잘 롱런하지 못했던 두산에서 몇 안 되는 프랜차이즈 투수 중 하나. 그러나 원팀맨으로 남는데는 실패했다. 그리고 하필 소속팀이 14년만에 우승한 2015 시즌에 타팀 소속이었기 때문에 아직까지 우승 경험이 없고, 준우승만 4회나 하였다. (2005, 2007, 2008, 2013) 2016년에 두산으로 복귀 후, 비록 우승 멤버는 아니지만 그간의 공로를 생각해 구단에서 2015년 한국시리즈 우승반지를 따로 제작해 지급했다고 한다. 감동의 두산, 돌아온 정재훈에 우승반지 선물

  • 롯데 팬들 중 일부는 정재훈이 태업했다고 주장한다. 롯데 시절 형편없는 모습을 보였지만, 이듬해 두산으로 돌아가자마자 부활하여 엄청난 활약을 펼치자 이런 얘기가 나온 것. 물론 실력으로 자신의 가치를 인정받아야 할 선수가 실제로 태업을 했을 리는 만무하며, 실제 퓨쳐스 등판기록 등을 봤을 때 태업의혹은 단순 음모론 수준일 뿐이다. 2015년 정재훈은 한국나이 기준으로 36세였는데, 이는 왠만한 투수들의 구위가 떨어지는 나이이다. 실제로 정재훈은 롯데로 가기 전부터 어깨 부상 이후 성적이 내리막을 찍고 있는 상황이었다. 롯데로 떠나기 전 해에 두산에서도 이미 상당히 구위가 떨어진 상태였고, 롯데로 이적한 후 더 상태가 나빠진 것. 게다가 두산 불펜의 상징이며 프랜차이즈로 여겨졌던 선수였기에 보상선수가 되어 예기치 않게 팀을 옮기게 되면서 본인 스스로도 큰 정신적 충격을 받았던 모양이다. 게다가 부상이 있었기 때문에 부진했던 것으로 보인다. 정재훈은 2015년 롯데 퓨쳐스 팀에서 2번째로 많은 등판을 한 선수이며, 43이닝을 소화하여 1군 기록과 합친다면 도합 50이닝을 던진 것이니 1년간 쉬다 왔다는 이야기는 어불성설이다. 이후 정재훈은 한 인터뷰에서 롯데 2군에 머무를 때의 소회를 밝혔는데 “그냥 이렇게 전혀 예상치 못한 순간에 선수생활이 끝날 수도 있겠다는 불안감이 제일 컸다. 그래서 2군에서도 많이 던졌다. 이렇게 끝내기 싫다는 최후의 발악 같은 느낌” 이었다고.인터뷰

  • 마구마구 2014에서는 은퇴선수가 아님에도 김창만이라는 가명으로 나왔었다가 현재 본명으로 돌아왔다.

  • 두산의 덕아웃이나 훈련 영상을 찾아보면 니퍼트가 웃으면서 한국말로 걸쭉한 욕설을 내뱉는 걸 가끔 볼 수 있는데, 두산 팬들 사이에서는 필시 정재훈이 가르쳐줬을거라는 추측이 암암리에 퍼져있다.

  • 2009년 어린이날 더비에서 돡린이들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안긴 주범 중 하나이기도 하다. 그 연유가 무엇인고 하니 그날 두산은 LG에게 12:0으로 쳐발렸다. 이날 선발투수가 바로 이분... 7:0 되고나니 응원단장이 케네디 스코어로 이기면 된다고 했지만 그런 건 없었다.

  • 2016년 강습타구에 맞아 수술 받은 것이 정재훈의 프로 입단 후 첫 수술이다. 간혹 2012년 어깨 부상으로 1년을 쉬었을 때 수술을 받은 줄 아는 사람들이 많지만 그 당시엔 재활을 선택했다.

  • 두산의 주력 불펜으로 꾸준히 활약했으나 의외로 팀의 우승을 단 한 번도 경험하지 못했다. 두산 입단 후 4시즌[17]을 한국시리즈까진 갔으나 전부 준우승을 하였고 2015년 두산이 마침내 우승을 하였으나 정작 본인은 롯데로 이적하여 멀리서 지켜볼 수 밖에 없었으며 2016년 다시 두산으로 돌아와 그 한을 푸나 싶었지만 불의의 부상으로 인해 시즌아웃 당하면서 또다시 기회를 놓쳤다. 그리고 2017년도 부상때문에 단 한 경기도 출장하지 못하고 시즌 종료 후 은퇴를 선언하면서 끝내 선수로서는 우승을 경험하지 못했다.

  • 생일이 1980년 1월 1일임에도 빠른 년생으로 입학하지 않고 그냥 1980년생~빠른 1981년생과 같이 학교를 다녔다.[18] 실제로 생일이 1년 넘게 차이나는 빠른 81 김성배, 김승회와 입단 동기이자 친구다.


7. 연도별 성적[편집]


연도별 기록
연도
소속팀
경기수
이닝




ERA
피안타
4사구
탈삼진
WHIP
2003
두산
5
3⅓
0
1
0
0
10.80
2
4
3
1.80
2004
43
77⅓
3
1
0
3
3.14
74
38
66
1.38
2005
51
56
1
6
30
(1위)
0
2.09
38
27
66
1.07
2006
53
54
2
3
38
(2위)
0
1.33
33
32
65
1.13
2007
52
59
5
3
25
(5위)
0
2.44
54
37
54
1.46
2008
42
53
3
3
18
(5위)
0
3.23
44
20
39
1.13
2009
32
93⅓
5
5
0
4
4.44
99
36
80
1.37
2010
63
78
8
4
2
23
(1위)
1.73
52
32
89
1.03
2011
45
62⅔
2
6
8
9
2.87
47
25
65
1.10
2012
4
4
0
1
0
0
4.50
3
1
1
1.00
2013
55
52⅓
4
1
14
7
3.44
46
20
38
1.20
2014
54
53⅔
1
5
2
15
5.37
50
25
56
1.29
연도
소속팀
경기수
이닝




ERA
피안타
4사구
탈삼진
WHIP
2015
롯데
10
6⅓
0
0
0
0
7.11
16
6
5
3.47
연도
소속팀
경기수
이닝




ERA
피안타
4사구
탈삼진
WHIP
2016
두산
46
52⅓
1
5
2
23
(2위)
3.27
43
23
56
1.15
2017
1군 기록 없음
KBO 리그
통산(15시즌)

555
705⅓
35
44
139
84
3.14
601
353
677
1.24

8. 관련 문서[편집]


[1] 동갑인 1980년생과 학교를 다녔고, 신인지명도 1999년에 받았다.[2] 목포에서 태어났지만 자란 곳은 서울이다.[3] 1999학번[4] 2020년 11월 6일~2022년 5월 31일[5] 6월 1일[6] ~6월 11일[7] 6월 12일~[8] 그러나 불행히도 LG전 박용택의 타구를 직접 맞으면서 2016 시즌을 마감짓고 치료와 재활에만 전념했으나 나이도 있고 기량 문제로 결국 회복하지 못해 2017년 11월 8일 은퇴를 선언했다.[9] 다른 두 명은 조웅천정우람.[10] 시타자 정성훈과는 80년생 동갑내기로 친한 사이라고 한다. 그래서 타석에 선듯.[11] 본인에 의하면 소식이 발표된 11월 6일날 가족들과 놀이동산에 갔다가 줄을 서는 도중에 기사를 보고 보직 이동 소식을 알았다고 한다.[12] 그러나 표정에는 변화가 없지만 위기 상황에서는 목부터 귀까지 시뻘겋게 변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같은 팀이었던 김선우도 포커페이스인 것은 마찬가지였지만 이쪽은 위기 상황에 턱이 나온다.[13] 팬들은 이 당시를 두고 "국내 최초 보살 유도형 투수"라며 드립을 쳐댔다.[14] 이는 본인 은퇴식 겸 시구때 전광판에 그대로 상영되었다.[15] KBO 통산 역대 9위, 이 밑으로 선동열, 조용준, 봉중근, 정대현 등이 있다.[16] 스탯티즈 기준[17] 2005, 2007, 2008, 2013년[18] 정재훈이 같은 빠른 80인 이재우에게 재우 형이라고 한 것을 보면 유급한 것이 아니라 입학유예를 거쳐 80년생과 같이 학교를 다닌 것이 맞아보인다. 참고로 생일은 정재훈이 1월생이라 2월생인 이재우보다 1달 넘게 더 빠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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