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근/구설/선수 기용 관련 논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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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OB 베어스
2.1. 박철순
2.1.1. 당시 OB 베어스의 투수진은 누가 운용했는가
2.1.2. 김영덕의 혹사와 김성근의 혹사
2.2. 윤석환
3. 태평양 돌핀스
3.1. 박정현
3.2. 정명원
3.3. 최창호
3.4. 기타 혹사
4. 삼성 라이온즈
4.1. 김성길
5. 쌍방울 레이더스
5.2. 쌍방울 전반의 투수 혹사
6. LG 트윈스
7. SK 와이번스
7.1. 김광현 벌투성 혹사 논란 및 뇌경색 파문
7.2. 전병두
8. 고양 원더스
9. 한화 이글스
9.1. 유창식 벌투 논란
9.3. 권혁
9.4. 박정진
9.5. 송창식
10. 기록 조작 논란
10.1. 윤석환 승률왕 논란
10.2. 박정현 다승왕 및 신인왕 논란
10.3. 김현욱 다승왕 논란



1. 개요[편집]


김성근 관련 구설수에 대한 내용 중 혹사 등 선수 기용과 관련해서 일어난 사건들을 모은 문서이다.


2. OB 베어스[편집]



2.1. 박철순[편집]


혹사? 맞는 말이다. 하지만 그땐 그게 맞는 야구였다. 일본에서 선수 생활을 할 때 한 시즌에 38승 4패를 한 스기우라라는 투수가 있었다. 그 시절엔 일본 역시 잘 던지는 투수가 보직 상관없이 선발, 중간, 마무리를 모두 책임지던 시기였다. 나는 그곳에서 야구를 배웠고, 그게 올바른 야구라고 생각했기에 한국에 와서도 똑같이 가르칠 수 밖에 없었다. 전혀 혹사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내부 사정을 잘 모르는 분들은 우승하기 위해서 박철순을 희생했다고 말한다. 인정한다. 그리고 박철순이 그리 된 것이 너무 가슴 아프다. 아마 박철순이 지금 야구를 했으면 더 오래 던졌을 거다. 자기 선수가 망가졌는데 아무렇지 않을 사람이 있겠나. 철순이가 모든 보직을 맡으며 우승을 했기 때문에 영웅이 된 게 아니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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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덕, "우승과 맞바꾼 박철순, 지금도 안타깝다" https://www.vingle.net/posts/1939340


기자 : "김영덕 전 감독은 박철순의 혹사를 자기 탓으로 돌렸는데..."

박철순 : (목소리를 높이며) "그게 아니에요. 제가 원년에 22연승 할 당시 감독님은 제게 ‘오버한다’고 여러 번 야단을 쳤어요." "감독님은 저한테 그만 뛰라고 하고, 등판을 하겠다고 하면 ‘미친 지랄 좀 하지 말라’고 자주 말했어요.”

기자 : "당시 언론을 보면, 과다한 등판에 의한 ‘혹사’가 지적됐고 김 전 감독도 이를 인정하지 않았나요."

박철순 : "감독님이 성격상 구차하게 변명하는 걸 싫어해요. 기자들이 물어오면 자신의 책임인 것처럼 얘기하신 거죠. 사실은 거꾸로예요. 감독님이 등판을 만류하면 제가 삐치고 그랬어요."

박철순, “김영덕 감독이 혹사시켜 허리 망가졌다?… 완전 오해” #


“내가 우겨서 등판했어요. 당시 김영덕 감독님, 김성근·이광환 코치님 모두 어떡하든지 내 연승 기록을 이어주려고 하셨고, 팀 승리를 위해 무리하지 않았어요. 한국시리즈 때도 ‘우승 못 해도 좋다. 내년이 있으니까’라고 하셨는데 진심이었어요. 그렇지만 내가 그 꼴을 어떻게 봅니까. 아픈 건 약 먹고 뛰면 되는데 구속이 안 나오는 건 미치겠더라고요. 한국시리즈 때 몇 개 더 던진 것 때문에 허리가 급격히 나빠진 건 아니고 축적된 피로 때문인 거죠. 그리고 그해 스프링 캠프에 안 따라갔어야 했는데, 거기서 한국식으로 무리를 하는 바람에 부상이 악화한 겁니다.”

박철순, 프로야구 원년 24승 ‘불사조’ 박철순 #


프로야구 원년 박철순의 혹사에 대해서는 그 책임이 당시 감독이었던 김영덕 당시 감독인가, 투수 코치를 맡고 있던 김성근 당시 코치인가에 대한 논란이 있다. 여기에 대해 김성근은 딱히 해당 내용을 밝힌 바가 없으며, 김영덕은 자신이 혹사시킨 게 맞으며 안타깝다고 말했다. 그리고 박철순 본인은 오히려 코치진 모두가 자신을 말렸으며, 장명부 사례와 마찬가지로 자신이 욕심내서 자초한 것이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2.1.1. 당시 OB 베어스의 투수진은 누가 운용했는가[편집]


82년 OB의 코칭스태프는 감독인 나 김영덕, 투수코치 김성근이, 타격코치 이광환이, 이렇게 딸랑 3명이었어. 지금 생각하면 웃기지만, 그땐 워낙 선수층이 얇았으니 뭐 당연한거였지. 어쨌든 당시 우린 6개 구단 최고의 코칭스태프였고, 사실 우리가 잘해서 우승을 한거나 마찬가지야. 재일동포인 나와 성근이가 일본식 관리 야구를 통해 선수 애들을 강하게 훈련시키고 막 다그쳐 놓으면 광환이는 선수 애들을 맏형처럼 잘 보듬어주는, 혼자 착한 척하는 역할을 맡았지. 알겠지만 광환이는 나중에 '자율야구'인지 뭔지 하는 미국식 야구를 정착시킨 장본인이잖아. 이런 상반되는 성향이 잘 조화를 이루어 OB를 좋은 팀으로 만든거지.

김영덕, 한화 이글스 칼럼 #


1982-1983 시즌 당시 OB 베어스는 굉장히 독특한, 심하게 말하면 개성 강한 코치진들이 각자 스타일대로 충돌하는 양상이 심하였다. 일본 출신으로 일본식 관리 야구에 익숙한 김영덕과 김성근, 미국식 자율 야구의 선구자격인 이광환이 한 조직에 엮여 있었고, 김영덕과 김성근은 그 스타일은 비슷하였으나 워낙 둘 다 고집이 강해 사이가 썩 좋지 않았다.

이러한 이유로 당시 OB 베어스의 투수 운용 과정에서도 김영덕과 김성근 간의 충돌이 많았던 것은 사실이다. 동시에 김성근의 권한이 단순 코치로 취급하기에는 생각보다 강력했던 것도 사실이다. OB 창단 당시 김영덕은 애초에 투수 코치로 김성근을 원하지 않았지만, 김영덕의 의사와 무관하게 박용곤 두산 회장에 의해 김성근이 투수 코치로 임명되었다. 일본통으로 유명한 박용곤 회장은 김영덕 감독도 좋아했지만 그에 못지 않게 김성근도 무척 좋아했다. 박용곤 회장은 평소에 두산 중역들이 있는 자리에서도 "성근이"라고 친근하게 부르며 매우 아꼈다고 전해진다. 즉 당시 코치진은 김영덕의 자의로 구성된 팀이 아니라 두산 상부층에 의해 구성된 팀이었다.

둘의 대표적인 충돌은 배팅볼 투수 기용 문제 사건이었다. 김성근이 2군에서 특정 선수를 배팅볼 투수로 쓰기 위해 올렸는데, 해당 선수를 김영덕 감독이 바로 내려버린 것. 이를 두고 감정 싸움이 격해지면서 김성근 투수코치가 경기 도중에 가방을 싸서 경기장을 나가버리는 일종의 항명이 벌어졌다. 이 일화는 너무나 유명해서 지금까지도 회자된다.

근데 83년 후기 리그 때 '사건'이 생겼어. 새감독을 영입할 계획이 있던 삼성이 성근이를 살짝 만나 오라고 꼬신거야. 바보같은 성근이는 나한테 이 얘기를 했구. 음, 이후 내가 무슨 수작을 벌였는지는 말 안할께. 아무튼 10월25일 김영덕이 삼성 새 감독으로 부임한다는 공식발표가 났고, 성근이는 자신으로부터 삼성감독이 바뀐다는 사실을 알아차린 내가 사전 공작을 통해 자리를 빼앗았다고 믿고 이를 갈았지. OB 애들도 돈 때문에 내가 자기들을 헌씬짝 버리듯 내팽겨쳤다고 생각했고. 마침 성근이가 OB 감독이 되면서…… OB와 삼성은 만났다 하면 패싸움을 하는 사이가 되버린거야.

- 김영덕, 한화이글스 칼럼 https://huniv.hongik.ac.kr/~kkandori/ku17.htm


하지만 그렇다고 김영덕이 아예 무시당하는 관계는 또 아니었다. 김성근과 김영덕의 사이가 갈라진 결정적인 사건이었던 삼성 감독 선임 과정에서 김성근은 김영덕에게 자신에게 삼성 감독 제의가 들어왔음을 이야기했는데 김영덕이 이를 가로챘다고 주장했으며, 이는 김영덕 본인 또한 시인하였다. 즉 김성근이 김영덕과 충돌이 잦았던 것은 맞지만 감독으로서 존중하고 그런 사안을 의논할 정도의 사이는 되었다는 것.

“요즘 같으면 상상도 못할 일이죠. 그런데 전기리그에서 우승을 하고 나니 구단에서 기대 이상의 성과를 냈다고 포상휴가처럼 저를 일본에 보내줬어요. 어차피 후기리그 우승팀과 한국시리즈를 해야하니, 이 기회에 차라리 내년 시즌을 위해 뭔가를 배워오는 게 낫다고 판단을 했던 것이죠. 그만큼 후기리그는 여유롭게 대처를 했어요. 박철순도 전기리그에서 고생했기 때문에 충전을 위해 쉬게 했던 거죠.”

김영덕, "박철순의 22연승, 그 신화의 처음과 끝" #


오히려 김성근이 정말로 확실히 전권을 쥐었던 시기에는 박철순을 거의 기용하지 않았다. 당시 전기 리그 우승을 확정지은 상태에서 OB 베어스는 김영덕 감독을 시즌 진행 중임에도 약 15일간 일본 해외 연수를 보냈다. 이 기간 동안 팀을 맡았던 게 코치 선임이었던 김성근이었다. 당시 박철순은 전기 리그 충분히 많이 던졌다고 해서 7월 한달을 통으로 쉬었고, 8월 김성근 지휘 기간에도 8월 4일과 12일 구원 투수로 1.2이닝 정도씩을 던진 것이 다였다. 다시 등판 일자가 짧아지는 건 삼성과의 격차가 좁아지면서 후기 리그 우승까지 바라보게 된 9월부터였으며, 이때는 김영덕 감독 복귀 이후였다.

기존에는 김성근 당시 OB 코치가 투수 기용의 전권을 휘둘렀다고 서술되어 있었으나, 당시 기사 등 어디를 찾아봐도 그런 내용은 찾을 수가 없다. 해당 서술조차 김성근이 구단 수뇌부와 친했고 김영덕은 일본 스타일이라 구단에 절대복종했었을 것이기에, 그리고 혹사가 벌어졌으니 혹사의 대마왕 김성근이 그랬을 거라는 단정 수준. 하지만 근거가 없는 주장은 주장이 아니라 억측일 뿐이다. 그리고 하술하다시피, 김영덕 또한 혹사에서 결코 자유로운 사람이 아니었다.


2.1.2. 김영덕의 혹사와 김성근의 혹사[편집]


김영덕김성근은 둘다 일본 출신의 야구인이며, 혹사 문제에 있어서는 둘 중 어느 쪽도 자유롭지 않다. 박철순의 혹사가 김성근의 혹사 방식과 비슷하다는 서술이 기존에 있었으나, 사실 둘은 큰 차이를 보이지 않는다. 김성근의 혹사 사례는 익히 알려져 있으나 김영덕은 시대가 더 앞서 있어서 잘 알려져 있지 않을 뿐이다. 그리고 조금 독특한 부분으로, 김영덕의 혹사 대상이 된 선수들은 묘하게도 롱런한 케이스가 많아서 해당 부분이 가려진 것도 크다.

김영덕의 대표적인 혹사 사례는 빙그레 이글스 시절 송진우한용덕이 대표적이다. 송진우는 1991년 36경기 11승 10패 11세이브 184 1/3이닝, 48경기 19승 8패 17세이브 191 1/3이닝을 던졌다. 한용덕은 1991년 31경기 17승 6패 2세이브 201 2/3이닝, 1992년 29경기 9승 11패 3세이브 186 1/3이닝을 던졌다. 비슷한 시기 김성근의 대표적인 혹사 선수인 김성길은 1991년 52경기 16승 12패 18세이브 188이닝을 기록했으며, 200이닝을 넘어간 선수는 없었다. 경기수와 이닝수를 보면 어느 쪽은 김영덕 쪽의 기록이 높고 어느 쪽은 김성근 쪽의 기록이 높다. 혹사가 아니라고 하기에는 둘 다 장난 아니게 굴린 스타일.

초창기 마무리 투수를 굴린 기록도 비슷하다. 김성근 OB의 최대 히트 상품이라면 한국 최초의 마무리 투수였던 윤석환이었다. 그리고 김성근이 그렇게 나오자 1985년 김영덕도 권영호를 마무리 투수로 기용한다. 1984년 윤석환의 기록이 57경기 12승 8패 25세이브 146이닝, 1985년 권영호의 기록이 54경기 6승 6패 26세이브 174 2/3이닝이다. 이닝을 우선으로 보느냐 경기를 우선으로 보느냐의 차이는 있겠지만, 굳이 따지면 김영덕의 혹사가 더욱 심하였다.

오히려 당시 에이스들의 기록을 보면, 김성근 휘하의 계형철은 1984년 29경기 14승 4패 174이닝, 1985년 34경기 11승 11패 2세이브 194이닝, 김영덕 휘하의 김시진은 1984년 39경기 19승 11패 2세이브 215이닝, 1985년 47경기 25승 5패 10세이브 269이닝으로 김영덕의 혹사가 더욱 심하였다. 심지어 김영덕 휘하에서는 김시진뿐 아니라 김일융 또한 1984년 38경기 16승 10패 3세이브 222이닝, 1985년 34경기 25승 6패 226이닝으로, 전체 선수단 중 200이닝을 넘긴 선수가 한명도 없는 김성근과 크게 대비된다.

이런 상황에서 원년 박철순의 혹사가 김성근 탓인지 김영덕 탓인지는 논할 수가 없다. 오히려 약팀일수록 에이스 혹사가 더욱 심해질 수밖에 없다는 걸 고려하면, 80년대 최강팀인 삼성과 90년대 페넌트레이스 한정 최강팀인 빙그레를 이끌었던 김영덕 감독 쪽이 더 혹사하는 스타일이었다고 볼 수도 있는 상황. 단지 박철순의 증언대로라면 김영덕, 김성근 모두 박철순의 한국시리즈 등판에 대해서는 말리는 입장이었다는 것이 그나마 이때의 상황을 알려주는 근거 자료 정도일 것이다.


2.2. 윤석환[편집]


두산 베어스 역사상 최고의 좌완 투수 중 한명으로 꼽히고 있는 윤석환은 김성근 감독의 혹사 첫 작품으로 불리기도 한다. 다시 말해, 살려조의 조상 되시겠다. 성균관대 졸업 후 1984년 1차 지명으로 베어스 유니폼을 입은 윤석환은 1년차 신인인 1984시즌 12승 8패 25세이브(1위) 평균자책점 2.84를 기록하며 구원왕과 신인왕에 올랐다. 윤석환은 명목상 국내 최초의 마무리 투수로 불리기도 하는데, 실제로는 중무리 역할을 하면서 등판할 때 마다 2~3이닝 이상씩 던지는 혹사를 당했다.

그는 1984년 전체 경기수의 절반이 넘는 57경기에 출장하여 그해 투수 최다출장 부문 1위에 올랐고 불펜 투수로는 역대급인 146이닝을 던졌다. 아울러 선발로도 2경기에 등판하여 2승을 거두기도 했다. 등판시 평균 소화이닝은 2 2/3에 달해 엄청난 혹사를 겪었음을 알 수 있다. 시즌 경기수가 100개였던 시절인게 다행이었다. 윤석환은 데뷔시즌인 1984년에 맹활약했지만 그해의 혹사의 여파로 어깨 부상을 겪으며 이듬해인 1985년부터 급격하게 구위가 하락하여 평범한 투수로 전락했다. 그는 1985~1987년 세 시즌 동안 반복되는 부상과 싸우며 오랜 부진을 겪었다.

반복되는 부상에도 불구하고 당시에는 체계적인 재활 시스템은 없었던 시절이었던 만큼, 윤석환의 부활은 쉽지 않았다. 특히 그가 부진하자 김성근 감독은 그를 선발로 돌렸다가 안되니까 다시 불펜으로 돌리는 등 보직변경을 계속했는데 그것이 윤석환에게는 더욱 무리를 주었다는 평이다. 그럼에도 부상과 싸우며 세 시즌을 부진 속에 보낸 윤석환는 김성근 감독 마지막 해인 1988시즌 불펜투수로 다시 보직을 바꾸어 기적처럼 다시 부활했다.[1] 그해 윤석환은 평균자책점 2.08(2위)를 기록하며 커리어 하이를 기록했다. 재계약을 앞두고 성적을 내기 위해 조바심을 내고 있었던 김성근은 윤석환이 부활하는 기미를 보이자 부상에서 완전히 회복되지 못한 그를 마구 혹사시켰다. 그해 윤석환은 40경기에 출장하여 다시 한번 최다출장 1위를 기록했다. 게다가 등판 때 마다 3이닝에 가깝게 던졌다[2]. 윤석환은 그해 13승 3패 14세이브을 기록하여 세이브 부문 2위 뿐만 아니라 다승 5위에도 올랐다. 김성근 야구 '에이스' 총아인가 제물인가

윤석환은 김성근 감독이 물러난 1989년부터는 완전히 몰락한 모습을 보이며 이후 2년간 단 3승만을 거두는 최악의 성적을 거두었다. 그리고 1990시즌 후 조범현과 함께 삼성 라이온즈로 현금 트레이드로 이적당하며 김성근 감독과의 질긴 인연을 이어갔다. 하지만 삼성 이적 후 단 1승만을 추가한 채 이적 1시즌만에 만 30세의 젊은 나이에 은퇴했다.

다만 해당 출전이 혹사인 것은 맞지만, 시대상을 봤을 때 역대급 혹사인지에 대해서는 반론이 있다. 1984년 출전 기록에서는 1위였지만, 소화 이닝으로만 보면 14위에 불과하다. 심지어 40경기 이상 출전한 투수가 윤석환 포함하여 5명이나 되고, 그 중 200이닝 미만 던진 것은 윤석환이 유일하다. 당시 팀이 고작 6개였다는 걸 감안하면 에이스들 기준에서 이렇게 던지는 것은 그렇게 이상하지도 않은 상황. 투수진이 가장 두터웠던 삼성만이 40경기 이상 던진 에이스가 없었지만, 김시진이 39경기 215이닝, 김일융이 38경기 222이닝을 던진 만큼 별 차이도 없는 수준이었다. 결국 김성근이 독특했다기보다는 그냥 시대의 산물. 오히려 당시 OB는 계형철, 최일언, 박상열, 김진욱 등이 로테이션을 돌고 이를 장호연이 중계, 윤석환이 마무리하는 구조로 돌아가며 에이스 중심이 아닌 팀 투수들이 이닝을 나눠맡는, 나름 선진적인 투수 체계를 구축했다고 평가받고 있다.


3. 태평양 돌핀스[편집]



3.1. 박정현[편집]


2년차 중고신인 투수였던 박정현은 1989년에 선발과 불펜을 오가며 19승 10패 2세이브 평균자책점 2.15의 성적을 거두어 신인왕에 올랐다. 또 박정현은 다승과 평균자책점 2위를 기록했다. 그가 정규시즌 동안 선발과 불펜에서 던진 이닝은 무려 242 2/3이닝이었고 17완투를 했다.

박정현뿐 아니라 정명원, 최창호는 김성근 감독의 태평양 시절 트로이카로 불리며 맹활약으로 포장된 혹사를 당했다. 이 셋은 1989년 태평양이 거둔 65승 중 45승을 거두었고 선발, 불펜으로 전천후 활약했다. 이해 박정현은 38경기에 등판해 242 2/3이닝을 던졌고, 3년차 최창호도 28경기에 등판해 223 1/3이닝을 투구했다. 1년차 정명원은 38경기에 등판에 139 1/3이닝을 던졌다. 앞서 언급된 박정현 뿐만 아니라 최창호와 정명원 역시 나중에 부상으로 평탄치 못한 선수생활을 보냈다. 다만 이들은 모두 신인이었기 때문에 혹사의 여파가 비교적 천천히 나타난 편이었다.

그 해, 박정현은 준플레이오프에도 19 2/3이닝을 던져 맹활약하게 된다. 이는 현재까지 단일 시즌 준플레이오프 최다 이닝 기록이다. 박정현은 삼성과의 준플레이오프 1차전(10월8일)에서 선발로 등판하여 14회까지 던져 완투승을 거두었다. 박정현이 1차전에서 던진 투구수는 173개였다. 1차전의 감격적인 승리 후 팀과 인천 관중들이 모두 승리에 들떠있는 사이 박정현은 허리를 두 손을로 부여잡고 고통을 호소하고 있었다.

그러나 박정현은 단 이틀 휴식 후에 3차전 5회에 다시 등판했다. 구단 측에 따르면 박정현이 자청해서(?) 구원등판한 것이라 한다. 박정현은 9회 2사까지 역투(투구수 75)했으나 마지막 한 타자를 남겨둔 상황에서 허리를 부여잡으며 마운드에 주저앉아 끝내 일어나지 못하고 구급차에 실려가는 장면은 두고두고 회자된다. 당시에도 언론에서 박정현의 무리한 등판을 보고 “원년(1982년) 박철순의 전철을 밟는 게 아니냐.”는 우려를 표했다.

박정현은 김성근 감독 체제 2년차인 1990년에도 좋지 않은 허리에도 불구하고 많은 투구수인 191 2/3이닝을 던지며 13승 7패 7세이브 평균자책점 2.63의 뛰어난 성적을 거두었다. 김성근 감독이 태평양에서 경질된 이후인 1991년과 1992년에도 여전히 좋은 성적을 거두었으나 허리 통증이 점차 악화되며 조금씩 하락세를 보이다가 결국 1993년 시즌을 앞두고 허리와 팔꿈치 부상의 악화로 쓰러져 재활에 들어갔다. 이듬해인 1994년 복귀했지만 고질적인 허리 부상으로 고통받으며 몰락한 모습을 보여 패전처리 투수로 기용되었다.

1998년 쌍방울로 트레이드되어 김성근 감독과 다시 만난 박정현은 잠시 부활한 모습을 보였으나 결국 2000년 시즌 후 SK에서 방출되면서 31세의 상대적으로 젊은 나이에 선수생활을 마감했다.

1989년 신인왕으로 태평양 돌핀스에서 맹활약했다가 사라진 언더핸드 투수 박정현에 대해서도 설명을 이어갔습니다. 김 감독은 “원래 언더핸드 투수들은 투구 폼 때문에 허리가 무리가 가게 돼 있다. 특히 박정현은 다리까지 크로스로 나오는 폼이어서 무리가 더 갔다”면서 박정현이 선수 시절 몸관리를 제대로 하지 못한 것도 한 요인으로 풀이했습니다.

- 2010년 8월 3일 박선양 기자 네이트 칼럼


김성근 감독은 박정현 혹사 논란에 관해 위와 같이 입장을 밝혔다. 실제로 언더핸드 투수들의 부상 가능성이 높은 것은 맞으며, 박정현은 키가 큰 만큼 더욱 부상 가능성이 높았던 것은 사실이다. 다만 그만큼 더 관리해주었어야 했음에도 관리가 부족했던 것은 사실이고, 1989년의 기록은 누가 봐도 혹사인 것도 사실. 그러나 1990년 김성근 감독 재임기까지의 기록은 괜찮은 편이었고, 오히려 김성근 감독과 다시 만난 쌍방울 시절에는 좋은 기록을 세웠던 것, 거기에 1991-1992 시즌까지 꾸준히 굴렀다는 것을 감안할 때 김성근에게 오롯이 잘못을 물리기에는 어려운 것은 있다. 오히려 박정현 본인은 쌍방울 입단 당시 스승을 다시 만나 행복하다고 표현했으며, 실제로 1998년 부활한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3.2. 정명원[편집]


1989년 1년차 신인으로 데뷔한 정명원은 38경기 출장 중 선발 18경기 출장으로 선발과 구원을 오가는 스윙맨 역할을 맡았다. 당시 38경기 11승 4패 6세이브 평균자책점 2.45의 화려한 성적을 거두었던 정명원은 이듬해인 1990년부터 부상으로 후유증을 겪기 시작했다. 1990시즌 정명원은 부상으로 불과 15경기에 출장하여 2승 4패 2세이브의 초라한 성적을 거두었는데 평균자책점은 무려 7.57로 치솟았다. 1989년 2.95로 수준급이었던 FIP는 다음 해 4.73으로 치솟았고, 타석당 11.91%였던 삼진율도 8.03%로 내려앉았다. 데뷔 시즌 2.8이던 WAR은 -0.2로 폭락했다. 투수는 던지면 던질수록 강해진다?

다만 정명원은 이후 다시 부활, 1991년 132이닝을 던지며, 12승 6패 14세이브라는 다소 황당한 성적을 기록했다. 그러다 1992년에 부상이 재발하며 1993년까지는 부진, 다시 1994년 마무리로 부활하면서 스프링캠프 때 보직을 마무리로 바꾸면서 제2의 전성기를 맞았다. 본격적인 마무리 첫 해, 4승 2패 40세이브 ERA 1.36으로 투수 부문 골든 글러브를 받았다. 이는 종전 선동열의 최다 세이브인 31세이브를 뛰어넘는 것이자, KBO 리그 최초의 40세이브 돌파 기록이다. 최소한 세이브 부문에서는 선동열보다 나은 투수가 있다고 생각하게 한 최초의 선수.

내가 감독 그만두고 다친 선수들 보면 두 가지 이유로 그렇게 됐어요. 하나는 가을, 겨울 동안 충분히 어깨를 보호했어야 해요. 바뀐 코칭스태프가 그런걸 생각했어야 하는데. 태평양 때 박정현이. 동계 연습 때 볼 30, 40개 던지다가 삼성과 연습게임에서 추운데도 7회까지 던지게 했어요. 당연히 다칠 수밖에. 최창호, 정명원이도 마찬가지예요. - 2002년 오마이뉴스 인터뷰


위험하다 싶으면 반드시 폼과 밸런스를 코칭스태프에서 잡아준다. 나도 늘 그 점에 유의했다. LG에 있을 때 이동현 같은 경우는 포크볼을 반듯한 폼으로 잘 던졌다. LG에서 물러난 뒤 보니까 투구폼이 변해 있었다. 정명원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태평양에서 나온 뒤 보니까 2월 그 추운 날에 대구 경산구장에서 정규시즌도 아닌데 7회까지 던지고 있었다. 기술적인 면 외에 술을 지나치게 즐기거나 사생활이 나빠도 혹사와는 관계없이 부상이 찾아올 수 있다. - 2007년 3월 12일 SPORTS2.0 제42호


(혹사 논란에 대하여) 먼저 김 감독은 정명원에 대해 이야기 했습니다. 김 감독은 “입단할 때 정명원은 볼은 빨랐지만 제구가 안됐다. 그래서 전지훈련 때 하루에 500개를 던지며 컨트롤 안정에 힘쓰기도 했다. 그렇게 던졌어도 내가 있는 동안에는 부상이 없었다” 면서 “내가 삼성 감독으로 옮긴 후 태평양과 2월달에 경산 구장에서 연습경기를 가졌다. 그런데 추운 날씨에 정명원이 6이닝 이상을 던지더라. 그래서 전지훈련때 볼을 많이 던졌냐고 물었더니 ‘50개 정도밖에 안던졌다’고 했다. 그 후에 팔꿈치에 문제가 생겼는데 태평양에서는 내가 재임 시절 많이 써먹어서 다쳤다고 하더라“고 해명했습니다. 김 감독은 훈련이 덜 된 상태에다가 추운 날씨 속에 많은 이닝을 던진 것이 문제였다는 분석이었습니다. - 2010년 8월 3일 박선양 기자 네이트 칼럼


즉 정명원의 1989년은 혹사는 맞지만 당시 기준으로 보면 이닝 수 17위로 그 시대다운 혹사 정도로 볼 수 있다. 그리고 1990년과 1992-1993년 초반 부상을 입은 것도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선수 생명을 무너뜨리지는 않은 정도. 김성근 감독 또한 정명원 부상의 원인을 코치들의 잘못, 훈련 부족, 방탕한 사생활 탓으로 돌렸다. 김성근 본인이 태평양에 있는 동안은 아무 문제가 없었기 때문에 본인의 혹사와는 무관한 부상이라는 것이다. 정명원 본인 또한 김성근에 대해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으며, 2017년 김성근 감독과의 인사 후 백허그를 날리며 애제자임을 증명하였다. #


3.3. 최창호[편집]


트로이카 중 최창호의 케이스는 조금 독특한데, 1989년 최종 성적은 223⅓이닝 10승 14패 평균자책점 2.22로 200이닝을 넘게 던지며 명실상부한 혹사를 당한 것은 맞다. 하지만 그 후로도 1990년과 1991년에는 최다 이닝인 233이닝을 던져 15승을 거두는 등, 별 일이 없다면 10승과 ERA 2점대 후반 정도의 성적을 올려주는 투수로 태평양 돌핀스 마운드의 한 축을 담당했다. 실제로 부상이 오기 시작한 것은 1995년 무렵.

“내 야구 인생에서 가장 존경하는 스승님은 바로 김성근 감독님이다. 하지만 LG로 이적하고 나서, 김성근 감독님을 다시 만났을 땐, 사실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무척 힘들었다. 어린 시절에 태평양에서 고되게 훈련했던 생각이 번뜩 떠올랐는데, 그런 우려가 곧 현실화됐기 때문이다. 감독님의 훈련에는 신참, 고참의 구분이 없고, 훈련 강도가 센 편이라 굉장히 힘들 수밖에 없다. 막 태평양에 막 입단했던 어린 시절에 '오대산 훈련'을 비롯한 여러 가지 훈련을 거쳐서 나에겐 더더욱 그렇게 느껴졌었다. 당시에 얼음물에만 27번 정도 들어가고, 20시간동안 행군을 강행한 적도 있었는데, 그 땐 정말 ‘여기서 죽을 수도 있겠구나.’라는 생각이 들기까지 했었다. 하지만 김성근 감독님만큼 참다운 감독님도 드물다. 너무나도 야구에 열정적이셔서, 가끔은 정말로 야구만을 위해 존재하시는 분이 아닐까란 생각마저 드는 분이다. 요즘도 가끔 명절 때, 찾아뵙곤 하는데, 이참에 오랜만에 전화 한번 드려야겠다.”

- 최창호


다만 최창호의 기록은 분명 정명원보다 훨씬 더한 혹사인 것은 맞지만, 의외로 혹사 중에는 잘 버틴 케이스이고 오히려 부상은 그 특유의 투구폼을 원인으로 꼽는 경우가 많다. 본인 또한 훗날 인터뷰에서 자신의 투구 폼을 무턱대고 따라하지 마라고 말할 정도. 결국 1998년 이후 현대를 떠나 LG로 트레이드되었고, 통산 500경기를 찍은 2002 시즌 후 현역 은퇴를 선언하였다. 당시 감독이자 스승인 김성근이 말렸으나, 본인의 강력한 요청으로 결국 은퇴 수순을 밟는다. 위의 인터뷰만 봐도 알 수 있듯이 김성근과의 관계는 굉장히 좋은 편.


3.4. 기타 혹사[편집]


태평양 삼인방에 가려 있지만 그 밖에도 몇몇 선수들이 혹사를 당했다.

당시 고졸 신인이었던 박은진은 데뷔 시즌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시즌 초반 팀에서 가장 많은 경기에 등판하며 우려를 낳았다.[3] 다시 말하지만, 이 선수는 선발투수이다. 태평양 삼인방이 워낙 걸출한 성적을 보여주었고, 양상문도 다소 살아나자 다행히 박은진의 혹사는 크게 줄어들었긴 했다.

물론, 양상문 또한 1989시즌 선발로 15회, 불펜으로 20회 등판을 하는 등 혹사를 겪었다. 등판 이닝은 전년도와 비슷하지만 문제는 선발과 불펜을 가리지 않고 마구잡이로 기용되었다는 점이다.


4. 삼성 라이온즈[편집]



4.1. 김성길[편집]


김성근감독이 부임하기 직전 삼성은 강력한 타선에 비해 상대적으로 투수력이 약점으로 꼽혔는데, 삼성이 김성근 감독을 영입한 배경은 투수코치 출신인 김성근 감독이 투수력을 끌어올려 주길 바랐기 때문이었다. 이에 김성근 감독은 약점으로 지적되었던 삼성 투수진에 대한 처방으로 벌때 마운드와 혹사 운용을 도입했다.

이에 몇몇 투수들이 혹사당했는데, 특히 만35세의 노장 투수 김성길을 마구잡이로 혹사시킨 것은 당시에도 큰 비난을 받았다]]. 김성길은 주보직이 마무리투수였지만, 김성근 감독은 그를 선발, 중간, 마무리를 가리지 않고 마구잡이로 기용했다. 혹사 때문에 김성길은 그해 엽기적인 기록들을 다수 남겼는데, 정규시즌에만 무려 189이닝을 던져 16승 12패 18세이브, 평균자책점 3.30을 기록하며 최다출장 1위에 올랐는데 이는 마무리투수로는 기록적인 수치다. 이 기록에는 선발 3경기 완투를 포함되어 있다. 이 과정에서 김성길은 전구단 상대 승리를 거두는 등 강제 전성기를 맞이하였다. 선발과 마무리를 오가는 와중에 5경기 연속 세이브를 쌓아 화제가 되기도 했으며, 9월 7일 롯데와의 더블헤더에서 연속 승리투수가 되어 같은 날 2승을 거두는 진기록을 세웠다.

그해 포스트시즌에서 김성길의 가혹한 혹사는 차마 눈뜨고 볼 수 없을 정도인데, 준플레이오프 1차전에 구원등판해 80구를 던지면서 승리투수가 되었고, 불과 이틀만인 3차전에는 1회 2아웃에서 선발투수 성준을 이어 구원등판하여 연장 13회까지 181구를 던졌다. 플레이오프 2차전에서도 10회말 구원으로 투입되었고, 하루휴식 후인 3차전에서는 다시 선발등판하여 1실점 완투승을 거두어 팀의 유일한 승리를 안겨주었다. 하지만 포스트시즌의 혹사로 김성길은 밥숟가락을 들 수 없는 정도에 이르렀다. 포스트시즌 당시 김성길의 가혹한 혹사로 김성근 감독은 큰 비난을 받았다. 삼성팬들도 사람 죽인다고 김성길 그만 올리라고 아우성을 쳤을 정도. 삼성이 플레이오프에서 조기탈락한 것이 김성길에게는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1991년 엄청난 혹사를 겪은 김성길은 몸이 완전히 망가지고 부상을 얻었다. 이듬해인 1992년 부상으로 고전하면서 방어율 5.14, 1승7패1세이브의 추락한 모습을 보였고 결국 시즌 종류 후 쌍방울로 트레이드됐다. 1993년 쌍방울에서 단 2승(5패)을 거둔 후 은퇴했다. 재일교포 출신인 김성길은 선수생활을 은퇴 후 한국에서 자리잡는데 실패하고 일본으로 돌아갔으나 일본에서도 생활고에 시달리며 택시기사, 주유소 직원 등을 전전하다가 2001년 횡령 혐의로 구속되었다.

다만 김성길의 혹사는 김성근 시기만의 문제는 아니었다. 김성길이 본격적으로 혹사당하기 시작한 시기는 1988년부터로, 김성근 부임도 전인 1989년 이미 233 2/3이닝을 던지는 등 꾸준히 혹사당하고 있었다. 독특한 것은 이 시기 감독이 바로 1994년 태평양의 기적을 만든 정동진이었다는 것. 이 시기까지만 해도 정동진 또한 김성근과 같은 전형적인 올드스쿨 감독이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으로, 이후 정동진은 미국 연수를 통해 선수 재활과 휴식에 대해 개념을 새로이 잡으면서 전혀 다른 스타일로 변화하게 된다.


4.2. 허삼영 [편집]


김성근의 재임 당시 혹사당한 선수로는 허삼영이 있다. 당시 김성근은 유망주 투수였던 그를 상대로 집중적인 훈련을 시켰으며, 김성근의 양아들로 불릴 정도였다. 하지만 당시 김성근으로부터 받은 훈련은 도리어 그에게 독이 되었고, 신인 시절부터 그만 허리 부상에 시달리게 되었다. 그 결과 1군 통산 기록은 겨우 4경기, 2⅓이닝, 평균자책점 15.43으로 팀 내에서 별다른 역할을 하지 못했다. 1995년 2군에서 평균자책점 1위를 기록했지만, 극심한 허리 부상으로 그 해를 끝으로 만 23세라는 젊은 나이에 은퇴했다. 다만 본인은 애초에 디스크가 있었는데 그것을 몰랐고 그 상태에서 몸관리를 충실하게 하지 못했던 탓이라고 말했다. #


5. 쌍방울 레이더스[편집]



5.1. 김현욱[편집]


1997년 김현욱은 70경기에 구원등판하여 무려 157 2/3 이닝을 던졌다. 임창용을 혹사시켜 인간백정, 서백정으로 불린 서정환 감독 시절에 임창용이 던진 이닝수가 138 2/3 이닝(1999년)이었다는 점을 보면 김현욱의 혹사가 어느 정도인지 짐작할 수 있다. 임창용이 1998년말 해태에서 삼성으로 트레이드되면서 해태와 삼성 두 구단에서 스타였기 때문에 큰 주목을 받은 반면, 김현욱은 비인기팀 선수인데다가 1993년 데뷔 후 1996년까지 총 승수가 고작 4승에 불과한 투수였기 때문에 그의 혹사는 크게 주목받지 못한 감이 있다.

김현욱은 무릎의 회전을 많이 이용하는 사이드암 투수였는데, 1997년 혹사를 겪은 후 그해 말 무릎 십자인대 수술을 받고 재활에 들어가 논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하지만 예상보다 훨씬 빨리 복귀해서 1998년 시즌에도 68경기에서 129 1/3 이닝을 던졌다(…) 그러나 이때 무릎수술이 완쾌도 되지 않은 상황에서 조기복귀한 것이 김현욱의 남은 선수생활에 치명적으로 작용했다.

1999년에 친정인 삼성으로 복귀한 김현욱은 한동안 나쁘지 않은 활약을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남은 선수생활 내내 고질적인 무릎과 오른팔꿈치 부상이 그를 괴롭혔는데 매번 등판 때마다 말할 수 없는 고통을 참아가며 던졌다고 한다. 특히 왼쪽 무릎은 1997년 수술 후 완쾌되지 않은 상태에서 무리하게 출전하여 혹사당하면서 더욱 악화되어 여러차례 재수술을 고려했지만 수술 후에도 통증이 가시지 않을 가능성이 아주 높다는 담당의사의 소견 때문에 결국 계속 수술을 미뤄가며 김현욱 본인 스스로가 재활에 상당한 지식을 쌓아 스스로 몸관리를 하면서 버텼다. 2004년 시즌을 앞둔 기사에 따르면 김현욱의 왼쪽 무릎은 야구 선수의 것이라고 믿기 힘들 정도로 손상돼 있어 연골이 거의 남아 있지 않아 과장을 좀 보태면 공을 던질 때마다 뼈끼리 부딪히는 소리가 날 정도로 뻑뻑할 정도였다고 한다.

2004년 김현욱은 무릎부상과 오른팔꿈치 인대 부상이 악화되어 공을 던지지도 못하는 상황에 이르러 FA자격 취득 요건을 3개월 앞두고 시즌아웃되었다. 김현욱은 7월 26일 “사실 FA가 되는 올시즌 정말 잘하고 싶었다. 그런데 몸을 다쳐 계획이 다 어긋났다”며 “이게 내 복인 걸 어떻게 하겠는가. 야구선수가 몸관리 잘못해서 다쳤으니 다 내 책임이다”고 말했다. 결국 김현욱은 팔꿈치 수술을 받았지만 재활에 실패하여 2005년 5월 20일 은퇴선언을 하고 6월 2일 은퇴식을 가졌다. 김현욱은 혹사를 극복하기 위한 자기관리 및 재활에 큰 관심을 가져 은퇴 후 코치가 되고 난 후에 트레이닝에 큰 관심을 가졌고 2010년에는 요미우리에서 트레이닝 연수를 받고 아예 트레이너로 전향했다. 김현욱 관련 기사 모음


5.2. 쌍방울 전반의 투수 혹사[편집]


김성근 감독의 인해전술식, 벌떼작전씩 투수운용을 놓고 혹사 논란이 일었다.

상대팀들은 위기때면 한 이닝에만 두세 명의 투수를 동원하는 쌍방울의 「벌떼작전」에 말려 아예 제풀에 꺾이고 만다. 쌍방울이 팀방어율은 최하위권에 머물면서도 지난해에 이어 2년 연속 상위권에 드는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김성근감독은 페넌트레이스 운영의 귀재라는 찬사를 받는 한편 선수들에게는 부상의 악령을 안겨다주는 「지옥의 사자」라는 악평을 듣기도 한다. 「투수조련사」라는 별명처럼 그는 OB시절 박철순을 최고투수로 키웠고 태평양 시절에는 정명원, 최창호, 박정현의 「삼두마차 시대」를 열었지만 그가 떠난 뒤 남은 투수들은 어김없이 부상에 시달려야만 했다. 올해도 김성근감독은 시즌초부터 투수들을 너무 혹사하는 것이 아니냐는 평가도 듣고 있다. 쌍방울이 올해도 포스트시즌에 진출할지는 피로에 지친 쌍방울 투수들이 무더운 여름을 어떻게 헤쳐나가느냐에 달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 1997년 5월 15일 동아일보 장환수 기자


김성근 감독을 적당히 치켜세우면서도 실상은 그의 지나친 투수 혹사를 비판했다. 투수 혹사 비판에 대해 김성근 감독은 "쌍방울의 허약한 투수진 때문에 어쩔 수 없다"고 항변했다.

다만 실제 기록을 보면 의외로 선수들의 출전 경기 수가 그렇게까지 많은 편은 아니다. 당시 투수 출장경기 30위까지를 봤을 때 1996년 기준 5명, 1997년 기준 4명인데, 당시 가장 출장경기 수가 많은 팀은 현대로 각 6명씩이었다. 타 팀과 비교하면 김재박이 이끌던 현대가 가장 많고 백인천의 삼성(1996년 2명, 1997년 1명)이 기형적으로 적은 편, 나머지 팀들은 시즌당 3-5명으로 큰 차이는 없는 편이었다.

그러나 위에도 '벌떼작전'이라고 언급된 것처럼 김성근 특유의 마구잡이식 운용으로 선수들의 데미지는 수치 이상으로 큰 편이었다. 기사들에도 나와 있듯이 90년대 중반 당시 투수들의 보직이 현대화되는 와중에 김성근 감독만은 여전히 마구잡이식 벌떼 야구를 하면서 대부분의 투수들은 선발, 중간, 마무리 가리지 않고 굴려졌고 이때문에 선수들의 혹사는 수치상 드러나는 경기 출장수보다 훨씬 컸다.


6. LG 트윈스[편집]



6.1. 신윤호 [편집]


2001시즌 내내 신윤호마구잡이로 등판시키며 혹사시키는 것에 대해 논란과 비판이 많았다. 관련 기사 (1) 관련 기사(2) LG팬들 뿐만 아니라 타팀 팬들도 신윤호의 혹사를 크게 걱정했을 정도. 한 언론 기사는 "김성근 감독이 눈앞의 1승에 너무 목말라하고 있는 것 같아 아쉽다. 마무리 투수는 그 중요성만큼이나 소중한 관리가 반드시 뒤따라야 한다.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다."고 일침하기도 했다. 물론 신윤호 선수의 혹사를 강한 정신력 등으로 미화하는 언론도 있었다. 혹사 논란에 대해 김성근 감독은 "적어도 하루 이상의 휴식이 있기 때문에 결코 많이 던지는 게 아니다. 세이브 투수는 이런 식의 운용이 불가피하다"라고 변론했다. 2001시즌 신윤호는 선발로 첫 등판하여 승리를 따낸 후 바로 불펜으로 전환하여 시즌 동안 144 ⅓ 이닝을 던졌는데 이런 혹사의 결과로 신윤호는 32SP로 세이브 1위[4]와 15승(14구원승) 6패로 손민한과 함께 공동 다승 1위, 승률 1위(0.714)를 기록하며 3관왕에 오르는 기염을 통했다. 신윤호의 통산커리어인 28승, 28세이브 중 절반 이상이 2001년 단일시즌 동안에 기록된 것이다.

하지만 신윤호는 혹사의 여파로 다음 해인 2002년부터 급격한 내리막길을 걸었다. 2002년 스프링캠프 때부터 부상으로 조짐이 안 좋더니 시즌 초부터 투구 밸런스가 망가진 모습을 보여 2군으로 쫒겨가는 수모를 겪은 후 선발 전환을 시도했지만 결국 4승 3패 1세이브, 평균자책점 6.45의 초라한 성적으로 시즌을 마무리했다. 관련 기사 2003년 이후 신윤호는 2008년에 은퇴할 때까지 6시즌 동안 단 7승만을 기록한채 결국 팔꿈치 부상으로 소리소문없이 선수생활을 마감했다. 신윤호 혹사와 이어진 부진으로 말이 많자 김성근 전 감독은 2002년 LG 감독에서 경질된 직후 신윤호가 망가진 것은 야구 월드컵에 나간 탓이라고 변명했다.


6.2. 이동현[편집]


2001년 신윤호가 혹사당한데 이어 2002년에는 시즌초부터 신윤호가 퍼지자 이동현이 혹사의 아이콘으로 떠올랐다. 2002년 이동현은 무려 78경기에 출장해 124 ⅔ 이닝을 소화하여 그해 최다출장 기록을 세웠다. 또 이동현은 포스트시즌에서도 10경기에 등판하여 3승을 거두는 등의 활약혹사을 했다. 당시 이동현은 진통제를 맞아가며 던졌다고 한다.

2002년의 무리한 등판 때문인지 이광환 감독이 새로 부임한 2003년에는 다소 부진한 성적을 거두었는데 선발로 전환하여 4승 10패 평균자책점 4.05의 성적을 거두었다. 그러다가 2004년 여름 팔꿈치 부상으로 2군에 내려간 후 장장 5년에 걸친 재활을 시작했다. 2004년 11월 첫 수술을 받은 이후에도 2005년 10월, 2007년 11월에 다시 수술을 받았다. 기나긴 재활을 거치면서 이동현은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면서 은퇴까지 결심했지만 박명환의 진심어린 충고에 마음을 다잡고 다시 재활에 매진한 끝에 5년만인 2009년 5월 20일에 다시 1군 무대에 복귀했다.

하지만 김성근 감독은 이동현의 부진과 부상의 원인을 이동현 본인의 탓으로 돌렸다.

위험하다 싶으면 반드시 폼과 밸런스를 코칭스태프에서 잡아준다. 나도 늘 그 점에 유의했다. LG에 있을 때 이동현 같은 경우는 포크볼을 반듯한 폼으로 잘 던졌다. LG에서 물러난 뒤 보니까 투구폼이 변해 있었다. 정명원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태평양에서 나온 뒤 보니까 2월 그 추운 날에 대구 경산구장에서 정규시즌도 아닌데 7회까지 던지고 있었다. 기술적인 면 외에 술을 지나치게 즐기거나 사생활이 나빠도 혹사와는 관계없이 부상이 찾아올 수 있다. - 2007년 3월 12일 SPORTS2.0 제42호


김 감독은 “이동현은 원래 투구 폼이 작아서 팔꿈치에 무리가 가는 폼이었다. 그래서 당시 일본인 투수 코치와 상의 끝에 팔을 쭉 펴서 던지도록 교정했다. 그런데 내가 LG를 떠난 후 다시 예전 폼으로 돌아갔다. 남들은 포크볼을 던져서 부상이 왔다고 하지만 내가 보기에는 투구 폼 문제”였다고 분석했습니다근데 이동현은 와인드업때부터 팔 쫙 펴고 던진다. - 2010년 8월 3일 박선양 기자 네이트 칼럼


LG 이동현도 내가 있을 때에는 포크볼을 던져도 아프지 않았다. 내가 던질 때 포크볼 때문에 아픈 선수는 없다. 내가 나간 뒤 잘못된 폼으로 던지다 팔꿈치가 나갔다. - 2016년 8월 26일 김성근 50분 일장연설, 강훈련과 부상의 이유


그러나 정작 이동현은 은퇴 기자회견에서 김성근 감독에 대해 진심어린 고마움을 표했고, 그 당시로 돌아간다면 조금 더 몸 관리에 신경쓰고 싶다고 말했다. 필드 위에서 함께 해온 선수와 감독간의 관계를 위키로 판단하는 실수를 범하지 말자. - http://www.sporbiz.co.kr/news/articleView.html?idxno=378695

참고로 이동현에 가려졌지만 장문석도 59경기 100이닝을 던지며 혹사당했다.


6.3. 이상훈[편집]


2002시즌 당시 이동현 혹사 논란에 가려진 투수가 바로 LG 마운드의 레전드 '야생마' 이상훈이다.

이상훈은 2002시즌 도중 한국프로야구에 복귀했기 때문에 5월 18일에야 첫 등판을 한다. 시즌의 1/5 가량이 소화된 시점에서 등판을 시작한 이상훈이 정규 시즌에 소화한 이닝은 85.2이닝이다. 풀시즌을 치렀다면 110이닝을 기록할 페이스였다.

이상훈은 포스트시즌에선 준플레이오프 2경기, 플레이오프 4경기, 한국시리즈 4경기에 등판했다. 프로야구 사상 가장 극적인 장면 중 하나로 꼽히는 한국시리즈 6차전 9회말. 이승엽에게 통한의 동점 3점포를 허용한 이상훈의 모습에선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2002년 포스트시즌 10경기 등판 18.2이닝 투구/ 2002시즌 전체 104.1이닝) 야신의 그림자, 혹사 논란 연대기

훗날인 2007년 2월 ARENA 인터뷰에서 김현태 에디터가 "당신을 욕하는 사람들은 선수 혹사를 주요 레퍼토리로 얘기한다. 실제로 LG 감독 시절, 한국 시리즈 6차전 때 지칠 대로 지친 이상훈을 내세운 건 이해가 안 된다."라고 말하자 김성근 감독은 "당신이라면 어떻게 하겠는가? 한국 시리즈는 내일이 없는 승부다. 당시 LG에서 이상훈 말고 누굴 믿겠는가? 그 상황에서 에이스를 믿지 않는다면 그건 그 선수에 대한 실례다."라고 해명했다.


7. SK 와이번스[편집]



7.1. 김광현 벌투성 혹사 논란 및 뇌경색 파문[편집]


2011년 6월 23일 무등 KIA전에서 부진한 에이스 김광현에게 147개의 공을 던지게 해서 벌투성 혹사논란이 있었다. 이는 김광현이 2경기 연속으로 무너진 것에 대한 벌투로 풀이되었다. 이날 김광현은 5회를 마친 상황에서 이미 김상현에게 연타석 쓰리런으로 6실점하여 투구수는 91개에 달했다. 이 시점에서 선발투수를 교체가 예상되었지만 6회에도 김광현이 다시 등판하여 관중과 시청자들을 놀라게 했다. 김광현은 6회 선두타자 김주형에게 다시 장외홈런을 허용했다. 김광현은 7회에도 등판하여 다시 한 점을 내주었고 투구수는 125구에 달했으나 8회에도 등판하여 총 147구를 던진 후 완투패했다. 9회초에 경기가 끝났기 망정이지

파문이 확산되자 김성근 감독은 밸런스를 찾기 위한 훈련차원이라고 해명했다. 시즌 내내 김광현이 좀처럼 밸런스를 찾지 못하고 자신의 힘으로 타자를 압도하는 투구를 하지 못하자, 힘을 빼고 타자를 잡는 방법을 익히기 위해 아예 한 경기를 버린 것이라 한다(...) 끝까지 최선을 다하지 않는 것은 팬들에 대한 모독이라면서 봉중근과 LG를 비판하시지 않으셨나요?

2010년 커리어하이를 기록했던 김광현은 2011년 알 수 없는 부진에 빠져 있는 상황이었다. 올림픽 금메달과 제2회 WBC 준우승의 영광의 주역이었던 김광현의 부진은 SK를 넘어 전야구팬들의 걱정거리였다. 김광현이 그동안 누적된 혹사로 부진을 겪는 게 아니냐는 우려가 나왔다. 김광현의 부진이 혹사의 여파 때문이라는 주장과 이를 반박하는 김성근 개인팬들 간의 키배가 참호전처럼 지루하게 계속되는 양상을 보이기도 했다.

그렇게 부진을 겪으며 우려의 시선을 받고 있던 김광현에게 김성근 감독이 오히려 벌투성 혹사를 시키자 이를 비난하는 의견이 쏟아진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세간에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4월 LG전에서 김광현이 3이닝 6실점으로 부진하자 김성근 감독은 불과 이틀 뒤 김광현에게 200개 넘게 던지는 특투를 시키기도 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이 사건도 수면 아래로 가라앉는가 싶었으나, 7월 19일 '김광현 2010년 한국시리즈 이후 뇌경색으로 입원했다'는 서울신문의 충격적인 폭로 기사가 나오면서 다시 뜨거운 감자가 되었다. 뇌경색 후유증으로 부진을 겪고 있는 김광현을 관리해 주지는 못할 망정 성적이 안나온다고 벌투를 시킨 김성근 감독에게 비난이 쏟아졌다.

그러나 이와중에 김성근 개인팬들은 이 폭로 기사를 쓴 기자에게 "의사라면 면허정지를 먹을 수도 있다. 비밀누설의 금지에 해당하는 의료법 위반행위다."라고 위협을 가했다(...)

SK 구단 관계자는 김광현의 뇌경색이 사실이라고 시인하면서도 2011년 시즌 부진과는 연관성이 없다고 강조했다.

한편 김성근 감독은 김광현 뇌경색 폭로 기사가 나자 프런트의 잘못된 언로보도라며 역정을 냈다. 김 감독은 뇌경색 사실을 숨긴 것에 대해서 “완치될 수도 있는데, 괜히 밖에 이 사실이 나갔다가 선수생활이 망가지면 누가 책임을 질 수 있나”라고 말했다. 벌투성 혹사로 선수생활이 망가지면 누가 책임을 지나요?

김성근 감독은 김광현에 대해 '다시 보고 싶지 않다. 보면 마운드에 올리고 싶어지니까' 식의 감성팔이식 인터뷰를 하면서 '김광현은 이제 재활에 치중하게 할 것' 이라고 말했다(...)

SK 감독에서 경질된 이후 김성근 전 감독은 강연 등에서 김광현이 망가진 것은 이만수가 땡겨썼기 때문이라고 비판했다.


7.2. 전병두[편집]


SK 투수 전병두가 2011년 시즌 종료 후인 11월 17일에 결국 왼쪽어깨 회전근 재건 수술을 받았다. 당시 회복까지 2년여가 걸릴 것으로 예상되었던 전병두는 2016 시즌까지 만 6년째 재활을 반복하다가 결국 은퇴하였다. 은퇴경기에서 전성기때의 구속을 회복하지 못한 모습을 보여 많은 SK팬들의 가슴을 울렸다.

전병두는 이미 2009년에 133 1/3이닝을 던저 혹사 논란이 일었다. 주로 불펜요원을 활동했지만 선발 등판도 하는 등 마구잡이로 등판했다. 시즌 중 맹활약에도 불구하고 포스트시즌 엔트리에서 제외되어 궁금증을 자아냈다. 2009년의 혹사로 당장 다음해에 퍼질 것이라는 전망이 많았다. 실제로도 2010년 한때 부진한 모습을 보이기도 했지만 혹사논란을 비웃듯이 여전히 2010년, 2011년에도 활약했다. 정규시즌 이외에도 포스트시즌에 혹사당한 것도 있고, 특히 선발 불펜을 가리지 않고 마구잡이식으로 등판한 것 때문에 무리가 갔다는 의견이 있다.

"전병두는 이미 KIA에서 건너올 때 왼 어깨 인대 세 곳이 끊어지고 한 줄기만 남아 있었다"는 노리타의 대표적인 거짓말이다. 해당 발언은 2011년 8월 SK구단의 용단으로 김성근이 경질되고 나서 감독대행 이만수가 2011년 9월 언론에 최초 공개한 사실이다. 링크 KIA에서 인대 세 곳이 이미 끊어졌었다는 주장은 어떤 근거도 없는 허위사실이며 오히려 선수의 부상을 은폐하고 혹사를 일삼은 전임감독에 대한 SK구단측의 언급이었다. 물론 전병두는 두산 시절부터 집중적인 관리가 필요한 선수였다. 하지만 김성근 감독은 전병두를 트레이드 받은 직후부터 자신의 낡은 철학으로 선수의 몸을 버렸으며3일 간격 150개씩 반복, 1500개 불펜피칭 그의 몸 상태를 알고 있었는데도 투수왕국 SK지만 "전병두를 대체할 선수가 마땅치 않다"는 말을 하며 그를 마구잡이로 굴렸다. 2009년 가장 좋은 시즌 성적을 보였지만, 혹사로 인한 부상악화로 정작 중요한 한국시리즈는 엔트리조차 들지 못했다. 2009년 비시즌 기간 수술소견을 받았음에도 김성근은 재활로 가능하다며 그를 재활코스에 보냈고, 이듬에 중순 부상에서 갓 복귀하려는 선수에게 많게는 하루 1000개를 소화한 과도한 연습 피칭을 또다시 시킴으로써 그의 어깨를 상하게 했다. 2010년 5월 26일에야 복귀한 그는, 2011년 중반 결국 돌이킬 수 없는 부상을 입어 그 해 말 수술대에 올랐고, 지금까지 재활에만 매달리고 있다.
그리고 어처구니가 없는게 어깨 힘줄 4개중에 한곳만 파열되어도 극심한 고통때문에 치료를 받아야 하며 보통 힘줄의 50% 이상이 손상되면 수술요법이 필요하다. 부분 파열만으로도 밤에 잠을 못 이룰 정도의 통증인데, 완전 파열로 4개중에 인대 3개가 아예 끊어지면 야구가 아니라 정상 생활이 불가능 하며, 수술을 미룰 경우 끊어진 힘줄이 말려 올라가며 증세가 더 심각해지며 결국에 치료를 받지 않으면 장애인이 된다. 노리타들 말 대로라면 4개중에 3개가 끊어진 투수가 140이상 강속구를 던지는거 자체가 의학계에 보고될 수준의 기적이고, 이런 살인적인 혹사를 감당한것으로 김성근은 사상최악의 혹사감독이 된다.

2014년 6월에 일본 미나미 공제병원에서 재수술을 받았은 사실이 뒤늦게 알려졌다. 2015년 9월 박정진이 검진차 시즌 중 몰래[5] 도일했다가 뒤늦게 언론에 공개된 그 병원이다.


8. 고양 원더스[편집]



8.1. 데럴 마데이 혹사[편집]


고양 원더스의 전 외국인 선수였던 데럴 마데이의 혹사에 관한 논란이다. 사실 고양의 외국인 혹사 문제는 그 전에도 꾸준히 제기되었으나, 2015년 9월 19일에 나온 기사로 프로야구팬들에게 본격적으로 주목을 받게 되었다.
하지만 실제 마데이의 투구 일지를 보면 현대야구에서는 좀처럼 상상하기 어려운 내용이 많았다. 그리고 올스타브레이크쯤, “마데이의 몸이 망가졌다”라는 소문이 파다하게 돌기 시작했다. 원더스는 정식 퓨처스리그 멤버가 아니라 경기 일정이 띄엄띄엄했다. 중간 중간 휴식일이 많았다. 그렇다 해도 마데이의 등판 간격은 모든 퓨처스리그 관계자들의 혀를 내두르게 했다. 마데이는 4월 8일 화성과의 경기에서 5이닝 101개를 던진 뒤 3일을 쉬고 12일 경찰청(5이닝 111개)전에 나섰으며 그 다음 이틀을 쉬고 15일 삼성 2군전에 다시 나서 6이닝 동안 93개의 공을 던졌다. 당시 경찰청 소속이었던 한 선수는 “나중에 소식을 듣고 다들 어리둥절했다. 미쳤다고 생각했다. 시즌 내내 꽤 많이 만났다”고 떠올렸다.
15일 경기 후 다시 3일을 쉬고 상무전에 나가 115개의 공을 던지며 노히터 경기를 완성했다. 이런 마데이의 강행군은 시즌 내내 계속됐다. 마데이는 첫 경기를 제외한 24경기 중 5일 휴식 후 던진 경기가 8번밖에 없었다. 대부분 일정상 강제 휴식이었다. 반면 3일 이하 휴식 후 다시 선발로 나선 경기는 10번이었다. 절정은 6월이었다. 6월 10일 한화 2군과의 경기부터 6월 26일 롯데 2군과의 경기까지는 3일 휴식 턴으로 5경기를 모두 선발로 소화했다. 이 5경기에서의 투구수는 무려 543개였다.
마데이는 1군에서의 부름을 기다리고 있었다. 더 많은 것을 보여줄 필요가 있었다. 그러나 대가는 혹독했다. 마데이는 이런 혹사 우려 속에 1군 리그의 그 누구도 관심을 갖지 않았다. 그리고 한국을 떠난 지금도 새 소속팀을 찾지 못하고 있다. 부상 때문이다. 한 에이전트는 “어깨에 문제가 생겼다고 들었다. 계속 재활을 했고 올해는 그 와중에 소속팀을 찾지 못했다”라면서 “지금은 대학과 고등학교에서 피칭 인스트럭터를 하며 재기를 준비하고 있다고 들었다”고 전했다.
이 에이전트는 “KBO 리그의 몇몇 감독들은 외국인 선수를 소모품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강하다. 어차피 내년에 다시 뽑으면 그만이니, 앞으로 선수 미래가 어찌되든 일단 데리고 있을 때 최대한 쓰려고 한다. 이 과정에서 잘 드러나지 않은 벤치와 외국인 선수와의 마찰도 잦다. 그 때마다 난감해지는 건 옵션으로 외국인을 달래야 할 구단”이라고 일침을 놓는다. 실제 올 시즌 4일 휴식 후 선발 등판 일지만 봐도 외국인 투수들이 압도적이다. 연속 4일 휴식 후 선발도 적지 않다.

낙오자들에게 새로운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 구단의 목적이었다던 고양 원더스에서 벌어진 일이라는 점에서, 그리고 피해자의 선수생명이 끝날 위기에 있다는 점에서 야구팬들을 충격과 공포로 몰아넣었다. 물론 외국인 투수들은 승리를 위해 돈을 받고 온 사람들이라 동일 선상에 놓고 볼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런 외국인 투수들조차 김성근 감독에게 야구를 배우러 왔다고 홍보한 자들은 누구였는가? 그런데 그런 투수들이 실제론 야구를 배우는 게 아니라 현대 야구서 가능할까 싶은[6] 로테이션을 강요당하고 결국 선수 생명이 위협당한 것은 어떠한 논리로도 옹호하기 힘들 것이다.

이 기사에서는 마데이가 주인공이지만 단지 마데이만 혹사당한 게 아니다. 말 그대로 외국인 투수들을 쥐어짰다. 원더스가 14년 소화한 80경기 중 외국인 투수가 단 한명도 등판하지 않은 경기는 단 6경기에 불과하고, 외국인투수들의 등판 간격은 말 그대로 살인적이다. 마데이 에이전트의 탄식 결국 원더스에 대해 책을 쓰기도 했고, 김성근 감독에 대해 열심히 쉴드를 치던 김은식 작가조차 이후 마데이 문제로 여론이 악화되자 발을 뺐으니 이 사건이 얼마나 심각한지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9. 한화 이글스[편집]



9.1. 유창식 벌투 논란[편집]


3월 21일 삼성 라이온즈와의 KBO 시범경기에서 유창식에게 벌투성으로 117개를 투구하게 하여 논란이 되었다. 이날 한화 이글스 갤러리에서는 김 감독의 벌투를 비난하는 측과 이에 대한 반박의 치열한 키배논쟁이 발생했다. 언론에서도 유창식의 벌투를 계기로 김성근 감독의 벌투 논란 역사를 되짚어보는 기사가 나오기도 했다.


9.2. 혹사[편집]


선수 혹사와 관련된 사항은 살려조혹사 문서 참조

파일:u0VjcCz.jpg
이글이의 저 표정이 한화 이글스 선수들이 숨기고 있는 진짜 표정일수도...

5월 16일 기준으로 시즌 초반부터 지금까지 끊이지 않는 논란.[7]시즌 초기라지만 마무리이면서도 규정 이닝을 넘긴 적이 있던 윤규진이나, 410 대첩에서 '혼의 51구'를 던져야 했던 권혁[8], 중간계투로 뛰다 겨우 하루 쉬고 다시 오랜만에 멍멍이 모드로 선발 등판해야 했던 안영명 등... 게다가 박정진이 혹사 논란에 있는 와중에 5월 16일 김성근 감독이 "박정진, 이제 비로소 프로 됐다"라고 발언하여 혹사 미화 발언 논란이 일고 있다. 5월 16일 현재 박정진은 한화가 치룬 총 38경기 중 거의 2/3에 해당하는 23경기에 출전하여 28 2/3 이닝을 던졌다.

김성근 감독은 자신이 절대로 선수를 혹사시키지 않는다고 항변하며 이에 대한 근거로 데이터를 제시하기도 하는데, # # 기실은 송창식처럼 볼이 좋을때 마구 땡겨쓰다가 퍼진다 싶으면 선수보호한다고 미화해가며 다시 구위가 올라올때까지 자주 올리지 않는 패턴을 반복하는 것이다. 이 때문에 수치상으로는 혹사가 아닌 것처럼 나타나게 된다. 여러 선수들을 이런 방식으로 돌려가면서 기용하면 팀 전체 방어율은 2~3년 정도는 좋아질 수 밖에 없다. 또 김 감독은 "박정진과 권 혁은 이제 본인이 '나가겠다'고, '괜찮다'고 말한다. 자신의 한계를 올리고 있다. 그게 중요한 것 아닌가"라고 설명했다.

5월 17일에도 한화 신드롬, 김성근 감독이 '한계'에 던지는 메시지라는 기사가 혹사미화 논란을 이어가고 있다. 이 기사에서 김성근 감독은 권혁, 박정진 등의 연투, 혹사 논란에 대해, '한계'를 극복하는 선수들의 '프로다운 자세'라고 반박했다. 또 그는 "박정진은 지난해만 해도 연투가 되지 않았다. 권혁도 마찬가지다. 사람의 의식이 바뀌면 얼마나 다른지 알 수 있다"고 했다. 하지만 김성근 감독의 발언에 대해 정신력으로 모든 걸 다 극복할 수 있다고 하는 쌍팔년도식 야구관이라는 비판이 제기되고 있다.

윤규진이 시즌 초반 연투후에 2군에 간 이후 혹사 논란에 주로 언급되는 것은 권혁과 박정진이지만, 정대훈이나 김기현 같은 상대적으로 주목을 덜받는 불펜 선수들도, 김성근 감독이 4월말 인터뷰에서 자기는 그런걸 하지 않는다고 주장함으로서 일종의 혹사 가이드라인으로 제시한 3연투는 물론이고, 5월 19일, 20일, 21일, 22일 4연투를, 그것도 22일 kt전에는 7점차로 앞서고 있는 상황에서 연달아 등판을 시켰을정도로 혹사를 당하고 있는 상황이다. 김기현은 8월 26일, 27일, 28일, 29일, 30일 연속 믿기지 않는 5연투를 하기까지 이른다. 비로 취소된 25일 경기를 제외하고 한주 내내 연속으로 던진 김기현의 경기당 투구수는 비록 적지만, 불펜투수들의 피로는 어깨를 풀기 위한 연습피칭에서부터 쌓이기 마련이고 휴식일이 없이 계속 던지면 쌓이기만 한다는 점에서 이는 분명한 혹사다.

시즌 초기에는 일간스포츠 이상서 기자가 한화 투수진은 혹사당하지 않았다라는 글을 올리는 등 혹사 논란에 대한 반박이 존재하기도 했으나, 애초에 크게 의미가 없는 스탯을 사칙연산까지 실수해가면서 사용했다는 것이 알려지면서[9] 한화 불펜 투수들이 압도적으로 굴려지고 있다는 것은 한화팬들도 인정하는 상황이 되었다. 다만 한화팬들의 이야기를 보면, '팀 사정상 대체할 선수가 없으니까 운 좋아서 다른 선수가 발굴되기 전까지는 그냥 이대로 간다'라는 것. 박정진이나 권혁의 휴식->윤규진의 무리->부상에서 돌아온지 얼마 안되는 윤규진까지 망가짐의 수순이다.[10]


9.3. 권혁[편집]


권혁 혹사 일지. 기사요약 : 권혁은 역대급 혹사 중이다.
권혁과 메이저리그 최다 이닝 불펜 투수 비교. 기사요약 : 올해 메이저리그에서 가장 혹사당하고 있는 불펜 투수보다 권혁이 훨씬 많이 혹사 당하고 있다.
10패 투수 권혁 기사요약:명색이 승리조란 선수를 승패무관한 상황까지 연투시키더니, KBO 역사상 처음으로 순수 불펜투수가 패전왕을 차지하게 생겼다.

시즌 초부터 투수 권혁의 혹사 논란이 일고 있다. 권혁은 불펜투수임에도 불구하고 유일하게 규정이닝을 채우고 있다. 불펜 투수가 규정 이닝에 들어선 것은 1999년 임창용 이후 처음이다. 이에 대해 김성근 감독은 3연투를 시킨적이 없다면서 혹사는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만든 말이라고 웃어넘겼다. 하지만, 이 인터뷰가 있었던 시점에 이미 권혁은 4월 1일 두산전 0.1이닝, 4월 2일 두산전 2.0이닝, 4월 3일 NC전 0.1이닝을 던지면서 3연투를 한적이 있었고, 안영명 또한 4월 7일 LG전 0.1이닝, 4월 8일 0.1이닝, 4월 9일 2.1이닝로서 3연투를 한적이 있는 상황이었다. 추가로, 이 기사가 나온지 한주도 지나지않아 권혁은 4월 30일 KIA전 2.0이닝, 5월 1일 롯데전 1.2이닝, 5월 2일 롯데전 0.2이닝으로 3연투를 하게 된다.

이러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김성근 감독의 혹사를 지적하는 기사는 아직 별로 없다. 지지팬들의 반발과 저항을 우려하기 때문이라는 풀이가 있다. 반면 오히려 이런 등판을 권혁의 투혼이라는 말로서 찬사를 보내는 기사들이 넘쳐나고 있다. 3연투 투혼 박정진-권혁, 한화의 3연승을 이끌다 이창호의 야구, 야구인 : 권혁이라 쓰고, 투혼이라 읽는다 권혁 "힘드냐는 질문은 그만! 나는 행복합니다" 불꽃남자.. "우리는 권혁이라 쓰고 투혼이라 읽는다

권혁은 시즌 내내 이기는 경기, 지는 경기 가리지 않고 감독의 의중에 따라 기준없이 줄곧 등판하고 있으며, 이는 5월 21일 SK와의 경기에서 6점차 앞선 상황에서 등판하여 2이닝을 던짐으로서 다시 또 논란이 되었다. 그리고 7월 2일 KIA와의 경기에서 7점차 앞선 상황에서 등판하여 또 다시 논란이 되는 중이다. 그리고 7월29일 두산전에서는 팀이 10대2로 8점이나 앞서는 상황에서도 등판해 더욱더 논란이 되었다. 거기다 한술을 아주 크게 더 떠 9월 26일 넥센전에서 13점 앞서는 와중에 등판했다. 이쯤가면 답이 없다.

거기에 7월달 월간 성적이 피안타율이 3할이상에 방어율도 6이 넘어버렸다.

심지어 8월 30일에는 결국 불펜투수가 100이닝을 돌파하고 70경기를 등판했다. 9월 5일 기준으로 한화 이글스는 122게임을 플레이 했으니, 한화 이글스 경기를 무작위로 찍었을 때 권혁이 등판했을 확률이 대략 57%라는 것. 참고로 선발투수가 4일 로테이션을 단 한 번도 거르지 않고 매번 등판했을 때 36경기를 등판할 수 있다.


9.4. 박정진[편집]


7월 2일 현재, 불펜투수 이닝 소화 1위는 권혁이지만, 최다경기출장은 박정진이다. 해당 기간의 권혁, 박정진, 아래에 있는 송창식, 그리고 비교대상인 동기간 불펜투수 이닝 3위[11] 조상우를 비교해보면, 박정진의 이름은 이 리스트에서 절대로 제외될 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경기수
이닝
상대타자
투구수
권혁
44
65 1/3
290
1199
박정진
48
63 2/3
258
1020
송창식
32
55 2/3
241
1006
조상우
38
52 2/3
212
845

현 상황을 이어가면 박정진은 92.2경기에 등판해서 KBO역사상 최초로 90경기 이상 출장기록을 세우게 된다. 참고로 역대 투수 최다 경기는 2004년 류택현과 2008년 정우람이 기록한 85경기이다. 참고로 류택현은 좌완 원포인트 릴리프로 철저하게 좌타자만을 상대했기에 출장수에비해 적은 이닝인 50이닝만을 던졌다.

9월 25일 현재 어깨부상이 심각한편인지 1군 로스터엔 등록되어있지만 경기출전이 거의없는상태. 참고 # 한화 이글스 팀에서도 박정진의 상태에 대해서 언급하지 않고있다. 의혹은 계속깊어지는중.


9.5. 송창식[편집]


5월 6일 kt전에서 5경기 연속 등판한 송창식을 두고 혹사 논란이 제기되고 있다. 송창식 역시 많은 이닝을 소화 중에 있다. 물론 언론에서도 '전천후 만능투수' 송창식의 투혼을 조명하고 있다. 5연투 마지막날을 기점으로 송창식은 페이스가 급격하게 흔들리는 모습을 보이고 있으며 사흘만에 방어율이 2점대에서 4점대로 치솟았다. 다행히(?) 덕분에 혹사 우려가 제기되었던 송창식의 등판 간격도 정상화되고 있다... 그런줄 알았는데... 또 5월 16일 경기에서 선발이였던 배영수가 무너지자 박성호가 단 0.1이닝만을 던지고 송창식이 3번째 투수로 등판하여 4이닝 81구를 던졌다. 혹시 선발투수 전환? 물론 언론에서는 송창식의 역투에 찬사를 보냈다. '81구' 송창식, 3실점으로 가려지지 않는 역투 역투라 쓰고 혹사라 읽는다. 송창식은 올 4월 25일에도 5이닝 95구를 던진 바 있다.


10. 기록 조작 논란[편집]



10.1. 윤석환 승률왕 논란[편집]


1984년 혜성처럼 등장해 신인왕 및 구원왕을 휩쓸었던 OB 투수 윤석환은 혹사의 여파로 이듬해인 1985년 4승 1패의 부진한 성적에 머물러 있었다. 시즌 막판에 김성근 감독은 윤석환을 승률왕으로 밀어주기 위해 해태전에서 4-0으로 앞서고 있던 3회에 잘 던지던 선발투수 황태환을 내리고 윤석환을 투입했다. 이날 경기에서 승리한 윤석환은 5승 1패를 기록하고 시즌을 마무리하였다.

그 시점까지만 해도 승률 1위 시상대상은 승수 기준 없이 규정투구 이닝을 채운 투수들을 대상으로 하고 있었다. 때문에 (현실적으로는 가능한 일이 아니지만) 최악의 경우 규정이닝만 채우면 1승무패인 투수도 승률 1위 수상자가 될 수 있었다. 김성근 감독은 이날 해태전에서 3회에 윤석환을 투입하여 경기가 끝날때까지 6 2/3이닝을 던지게 했고, 윤석환은 규정투구이닝인 110이닝을 가까스로 넘긴 110.1이닝을 기록하고 시즌을 마무리했다.

시즌이 끝나고 윤석환은 삼성 김시진(25승 5패)과 공동 승률왕에 올랐다. 그해 승률왕 공동수상 시상식에서 김시진에게는 박수 갈채가, 윤석환 호명 때는 야유가 쏟아졌다. 김성근 감독의 윤석환 승률왕 밀어주기 논란으로 인해 KBO는 이듬해인 1986년부터는 승률 순위는 10승 이상을 거둔 투수 가운데 뽑기로 규정을 바꾸었다. 관련 기사

윤석환은 나중에 또 한 차례의 승률 1위 타이틀을 따기 위해 곤욕을 치러야 했다. 1985년 혹사의 여파로 부상을 겪으며 부진한 3년을 보낸 윤석환은 1988년 부활에 성공하여 8월 31일 현재 13승 3패, 승률 .813으로 당당한 수상대상이 됐다. 김성근 감독은 윤석환이 개인타이틀을 따도록 더 이상 승부와 관련된 게임에 내보내지 않고 타이틀 굳히기에 들어가 있었다. 그런데 어느날 김성근 감독은 게임을 마친 후 기자들과 식사를 하다가 윤석환이 당시 규정투구 108이닝에서 3.2이닝이 부족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하는 수 없이 김성근 감독은 9월 4일 이미 4-1로 뒤져 패배의 부담이 없던 롯데전에 3회말에 장호연에 이어 윤석환을 투입시켰다. 이날 경기에서 윤석환은 정구선에게 만루홈런을 얻어맞는 수모를 겪고도 교체되지 않고 3.2이닝(6실점 5자책)을 던져 규정투구이 닝을 간신히 채워 시상기준을 맞추었다.[12]

출처 : 이종남 저, "사람 좋으면 꼴찌(한국프로야구 10년 비화)" (스포츠서울, 1992)


10.2. 박정현 다승왕 및 신인왕 논란[편집]


1989년 9월 30일 광주구장에서 열린 해태와 태평양의 더블헤더 2차전에서 태평양 김성근 감독은 9-1로 크게 앞서고 있던 5회 2사 후 선발 최창호를 내리고 박정현을 마운드에 올렸다. 이날의 투수교체는 신인왕과 다승왕을 동시에 노리는 박정현을 밀어주기 위한 것. 유력한 신인왕 후보이자 다승왕 2위였던 박정현은 최창호의 뒤를 이어 등판한 후 7안타 4실점으로 난타 당했지만, 결국 최창호의 1승을 자신의 1승으로 만들고 19승째를 올려 20승을 거둔 해태 선동열을 바짝 추격하게 되었다. 이 때문에 광주 관중들이 덕아웃 위에서 태평양 김성근 감독에게 크게 야유하기도 했다.

김성근 감독의 밀어주기 지원을 받은 박정현은 비록 다승왕을 차지하는데는 실패했지만, 역대 신인 최다승 투수(19승)라는 타이틀 달성에 성공했고 신인왕에도 올랐다. 그러나 박정현의 역대 신인 최다승 기록은 84년의 홍문종, 이만수 타격왕 사례과 더불어 가장 대표적인 타이틀 조작 사례 중 하나로 언급되면서 지금까지도 비난받고 있다. [프로야구] 승부조작-타이틀관리 의혹…현대 뒤끝 어떨까?

당시 언론은 한동안 잠잠했던 인위적 기록 만들기 논란이 다시 발생했다면서, 가치있는 개인기록은 정당한 승부의 결과에 따른 것이며 야구경기 룰의 헛점을 악용하는 인위적 기록관리는 시정돼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10.3. 김현욱 다승왕 논란[편집]


1997년 김현욱이 20승으로 다승왕을 차지했는데 이 과정에서 김성근 감독의 김현욱 다승왕 만들어주기에 대한 비난이 쏟아졌다.

당시 김성근 감독은 중간계투요원인 김현욱을 다승왕으로 만들기 위해 잘 던지고있는 선발투수를 일부러 끌어내리고 김현욱을 등판시켜 야구인들로부터 비난을 받았다. 1997년 8월 29일 LG전에서 5-0으로 앞선 상황에서 잘 던지던 선발 오상민을 5회 강판시키고 김현욱을 등판시켜 승리를 챙겨준 것이 그 예. 오상민은 1이닝만 더 소화하면 승리투수가 될 수 있었지만 김성근 감독의 횡포(?)에 의해 눈물을 머금고 마운드를 내려와야 했다.[13]

김성근 감독은 비난 여론에도 불구하고 "다승과 방어율, 승률 타이틀은 결국 김현욱의 몫이 될 것"이라고 공언하며 '타이틀 만들어 주기'도 마다하지 않겠다는 자세를 보였다. 김성근 감독은 시즌 막판인 9월에만 김현욱을 17번이나 등판시켜 6승을 챙겨주면서 기록 만들어주기 논란을 가열시켰다. 이 과정에서 김현욱은 9월 3일부터 5일까지 3일 연속 승리, 9월 3일부터 7일까지 5일 동안에 4승이라는 진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시즌 마지막 한 달 동안 김성근 감독의 밀어주기로 7승을 추가한 김현욱은 시즌내내 단한번도 선발등판하지 않고 오로지 구원승만으로 20승을 거둬 다승왕에 올랐다. 구원승만으로 다승왕에 오른 것은 메이저리그에서도 유례가 없는 일이었다. 김현욱은 승리를 거둔 20경기에서 총 67 2/3 이닝을 소화하여 경기당 평균 3 1/3 이닝을 던지고 승리를 챙겼는데, 이는 최소 5이닝을 완투한 후에야 승리 요건을 갖출 수 있는 선발투수들과 형평성 논란을 낳았다. 김성근 감독의 기록 만들어주기에 대해 기자들이 투표 거부로 응대하여 결국 김현욱이승엽에게 시즌 MVP를 내주었을 뿐만 아니라 투수 골든글러브도 이대진에게 내 주었다.

다만 후에 김현욱 본인이 스톡킹에서 회고하기를, 5회가 끝나기 이전에 이기고 있는 경기에 등판해 승리를 챙긴건 많아야 3게임이고, 대부분은 비기고 있거나 지고 있을 때 타자들이 역전해줘서 챙긴 승리라고 한다.

[1] 슬라이더를 새로 배운 것이 크게 작용했다.[2] 윤석환은 1988년 40경기에 출장하여 108이닝을 소화하여 경기당 평균 2.7이닝을 던졌다.[3] 김성근 퇴임 2년 후인 1992년에는 선발도 모자라서 마무리까지 뛰며, 14세이브를 기록하는 등 50경기 가까이 뛰었다.[4] 구원승을 제외하면 18세이브(4위)[5] 감독 내지는 감독의 전권하에 있는 프런트가 언론에 공개하지 않았다.[6] 1승 1패에 천국과 지옥이 갈리는 프로 1군에서도 이런 짓은 하지 않는다.[7] 사실 이전부터 혹사 논란은 있었는데 실제로 박철순,윤석환,박정현,김성길,신윤호,전병두등 매번 새로운 감독이 되었을때부터 혹사 논란이 끊이질않았다.[8] 당시 포수 자원을 모조리 대타 작전으로 소모한 터라 신인인 주현상이 땜빵 포수를 서야 했던지라 브레이킹볼을 쓰는 투수를 쓰기 힘들었지만, 애초에 상황을 그렇게 끌고 간 것부터가 문제였다.[9] 해당 스탯인 closer fatigue 자체는 2008년 빌 제임스의 책에 실렸기 때문에 한국 야구팬덤에서도 활용시도가 있었으나 결국 빌 제임스도 포기한 스탯이기 때문에 사장되었다. 투구수를 기준으로하는 등의 변형은 잠깐씩 언급되기는 한다.[10] 그런데 이와 비슷한 맥락에서 송창식이 굴려지다가, 송창식이 선발 알바를 하는 등으로 망가지자 권혁과 박정진의 부담이 더욱 커진바 있다.[11] 조상우보다 이닝을 더 많이 기록한 송창식이 순위에서 제외된 것은 송창식은 4번 선발로도 등판했기 때문이다.[12] 이와 비슷한 사례로는 1997년김현욱이 있다. 김현욱은 승률왕은 아니지만 다승왕으로 만들기 위해 5이닝 이전에 선발을 강판시키고 그를 등판시켰다.[13] 다만 오상민과 김성근의 관계는 나쁜 편이 아니다. ‘박명환의 야구 썰전’에 출연한 오상민은 김성근 감독과의 관계에서 “아버지라 부른다. 자주 찾아뵙지는 못하지만 가장 존경하고 고마운 지도자”라고 소개하기도 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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