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그 카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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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카페 왕조 초대 국왕
위그 카페
Hugues Capet

파일:Les Roi Hugues Capet.jpg
출생
941년
서프랑크 왕국 파리
사망
996년 10월 24일 (향년 55세)
프랑스 왕국 파리
재위기간
프랑크인의 왕
987년 7월 3일 ~ 996년 10월 24일
서명
파일:위그 카페 서명.sv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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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문
카페 가문
아버지
파리 백작 대 위그
어머니
헤드비히(게) 폰 작센
형제자매
베아트리스, 엠마, 외드, 앙리
배우자
아키텐의 아델라이드
자녀
헤드비히, 지젤, 로베르 2세
종교
가톨릭


1. 개요
2. 상세
3. 후일



1. 개요[편집]


서프랑크 카페 왕조창건자로, 관습적으로는 이 시기를 기준으로 서프랑크가 아닌 프랑스라 부른다.[1]


2. 상세[편집]


서프랑크 왕국 카롤루스 왕조의 마지막 루이 5세가 후계자 없이 사망하자 프랑크의 dux[2]이자 파리의 comes[3]이었던 위그 카페가 서프랑크 왕국의 왕으로 추대되었다. 사실 루이 5세의 숙부이자 하 로타링기아 공작이었던 샤를과 루이 5세의 이복아우인 아르눌프 드 랭스가 있었으나, 아달베롱과 제르베르 등 성직자귀족들은 강력한 귀족이자 군사력을 가진 카페 가문의 위그 카페를 서프랑크의 왕으로 추대했다. 이때부터를 카페 왕조라고 하며, 프랑크 왕국의 분리가 완성되어 프랑스 왕국의 시작으로 보고 있다.[4]

사실 위그 카페 본인은 모계 쪽으로 카롤루스 왕조 혈족이었다. 그의 친할아버지는 서프랑크 왕국의 왕이었던 로베르 1세였는데 그는 네우스트리아(느스트리)와 앙주백작 '강철공'(르 포르) 로베르 4세의 아들로서 원래 왕족이 아니었으나 그의 아내이자 위그 카페의 할머니샤를마뉴의 현손 베르망두아 백작 에르베르(헤르베르트) 1세의 베아트리체(스)였다. 로베르 1세는 원래 파리 백작이었는데 샤를 3세폐위하고[5] 국왕으로 즉위한 후 923년 샤를 3세를 상대로 한 수아송 전투에서 전사했다. 로베르 1세의 아들 대 위그(위그 르 그랑)는 파리 백작을 세습했으며, 그와 독일하인리히 1세의 왕녀인 작센의 헤드비게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난 사람이 바로 위그 카페였다.[6] 그러나 위그 카페 시절에 프랑스 왕은 권위가 아주 약했다. 일단 영토가 사실상 파리를 비롯한 일드프랑스오를레앙 부근에 국한되었다. 위그 카페 자신도 북부의 노르망디, 동부의 부르고뉴, 남부의 아키텐, 동북부 플랑드르제후들에게 시달림을 당했다.

심지어 왕조의 세습성도 불확실한 것이었는데 위그 카페가 즉위할 당시 대주교 아달베론(Adalbéron)은

왕위는 세습이 아니라 기품과 지혜가 있는 자가 올라야 한다.

하고 주교와 제후들이 모인 회의에서 발언하면서 위그 카페의 왕위 선출을 주도했기 때문이었다. 즉, 당초 아달베론과 서프랑크의 귀족들은 프랑스 왕의 지위를 비슷한 시기 독일 신성 로마 제국황제와 마찬가지로 세습제가 아니라 선거왕에 가까운 위치로 만들려고 했던 듯하다.

실제로 왕권이 약하다 보니, 라마르슈 백작 보송 1세[7]와 말다툼을 벌이다 제대로 뒷목 잡을 뻔 한 일화도 있었다. 참다 못한 위그 카페가

누가 네놈을 백작으로 만들어 줬더냐!

라고 호통을 쳤더니, 라마르슈 백작 왈,

그렇다면 누가 당신을 왕위에 앉혔소?

라고 답했다. 이 일화는 영화 <300: 제국의 부활>에서 아르테미시아가 크세르크세스와의 말다툼 중에 사용하는 대사로 등장하지만, 당시 상황이 전혀 달랐다. (이쪽은 왕권이 바닥을 치는데, 저쪽은 왕이 아니라 왕중왕.)

하지만 물론 위그 카페는 자자손손 왕위를 이어갈 욕심이 있어서 꼼수를 준비했다. 자신의 아들 로베르(로베르 2세)를 바르셀로나를 침입한 무어인(이슬람 교도) 토벌을 명분으로 '공동왕'으로 올려서 자신이 죽어도 선출이 새롭게 이루어지지 않고, 아들이 자연스럽게 공동왕으로서 왕권을 행사할 수 있게 한 것이었다. 위그 카페는 996년 10월 파리에서 죽었고, 이미 공동왕이었던 아들 '현명왕'[8] 로베르 2세가 왕위를 물려받았다.


3. 후일[편집]


공동왕 제도는 꽤 오랫동안 지속되었다. 로베르 2세 이후에는 동아시아식으로 치면 사망 직전의 왕이 양위를 하여 상왕이 되는 형식으로 진행되었다. 그동안 혈통 단절이 일어났다면 다시 선출제로 돌아갈 수도 있었겠지만 여러 왕조가 짧게 교차한 동프랑크 왕국-신성 로마 제국과는 달리 왕조가 단절되지 않고, 안정적으로 이어지면서 자손인 '사자왕' 루이 8세 시대(1223 ~ 1226)대에 오면 카페 왕조의 세습은 당연시되고, 공동왕 제도도 없어졌다.[9] 단명한 데다가 후임자가 '성왕' 루이 9세라서 명목상의 보험인 공동왕 제도도 필요없었다.

자손이 매우 번성했기 때문에 많은 유럽 왕가들이 그의 직계 후손이며, 모계 혈통까지 포함하면 유럽의 모든 군주들이 위그 카페의 후손이다. 당장 프랑스만 봐도 발루아 왕조, 부르봉 왕조는 모두 그의 자손이자 카페 왕조의 부계 측 방계 왕조였다. 프랑스 대혁명 당시 부르봉 왕조루이 16세재판을 받을 때 그의 공식 이름은 '루이 카페'(Louis Capet)였다. 부르봉 가문은 성왕 루이 9세의 막내 아들인 클레르몽 백작 로베르가 부르봉 지역의 상속녀이자 부르고뉴 공작 위그 4세의 손녀였던 베아트리스와 결혼하면서 개창되었는데 베아트리스의 할아버지인 부르고뉴 공작 위그 4세 역시 카페 왕조의 방계 가문인 카페-부르고뉴 가문(Capetian House of Burgundy) 소속이었기 때문에 부르봉 가문의 시조인 부르봉 공작 루이 1세는 부계로도, 모계로도 모두 카페 왕조의 후예였고, 따라서 동양식으로 따지면 부르봉 가문의 모든 구성원들의 성씨는 '카페'였다. 단, 유럽의 군주들은 성씨 대신 자신이 다스리는 영지의 이름을 성씨로 사용했기 때문에 '드 부르봉'(de Bourbon)을 성씨로 사용했을 따름이다.

게다가 방계 후손들까지 합치면 허다한 임금들과 왕족을 배출했다. 프랑스 카페/발루아/부르봉 왕조의 임금 36명, 나바라의 카페/부르봉 왕조 임금 16명, 나폴리 국왕[10] 11명, 스페인 국왕 11명, 포르투갈 국왕[11] 29명, 보르고냐 왕조의 마지막 국왕, 페르난두 1세의 사생아가 개창한 아비스 왕조, 아비스 왕조의 창시자인 주앙 1세의 장남[12]의 후손이 개창한 브라간사 왕조, 시칠리아 국왕(카페-앙주 왕조) 4명, 폴란드 국왕 4명, 헝가리 국왕[13] 4명, 양시칠리아 국왕[14] 4명, 라틴 제국 황제 3명, 알바니아 국왕 2명, 에트루리아 국왕 2명, 브라질 황제(브라간사 왕조) 2명을 배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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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물론 이는 로마냐, 비잔티움이냐처럼 관습적인 구분에 따른 것일 뿐, 21세기 프랑스이든 중세 서프랑크이든 라틴어론 동일한 Francia이다.[2] 라틴어 dux는 1차적으로는 담백하게 '지도자', 2차적으로는 관료적 뉘앙스에서 '장군' 내지 '사령관'의 의미이기에 '프랑크의 지도자'나 '프랑크의 대장군'으로 번역할 수 있다. 다만 dux를 통상 '공작'으로 번역하기에 관습을 존중하여 '프랑크의 공작'으로도 번역할 수 있다. 이 경우 봉신적 뉘앙스가 너무 강하다는 문제가 있지만, 어차피 유럽 작위를 공후백자남으로 번역하는 것부터가, 후대에 억지로 도식화한 주나라 작위를 또다시 억지로 유럽에 끼워맞춘 것이니만큼, 애초에 정확성은 어느 정도 희생한 번역이다.[3] 라틴어로 '동행자' 또는 '동료'를 뜻하는 단어. 따라서 '파리의 동료'로 번역할 수 있지만, comes의 관습적 번역인 '백작'으로도 옮길 수 있다.[4] 그러나 공식적으로 '프랑스 왕국'이라는 나라가 출범한 것은 아니었다. 프랑스는 프랑크의 현대 프랑스어 발음일 뿐이며, 카페 왕조 전후를 막론하고 라틴어 국호는 Francia이다. 옥타비아누스의 로마와 콘스탄티누스 11세의 로마가 같은 나라이듯이. 애초에 이 시기에 프랑크 왕국이라는 이름 건 나라는 서프랑크 말고 없었다.[5] 샤를 3세 단순왕을 폐위한 것은 로베르 1세가 아니었다. 느스트리의 귀족들이 단행했고, 로베르 1세는 방관만 했다.프랑스의 유비[6] 즉 위그 카페는 하인리히 1세의 아들인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오토 1세의 외조카였다.[7] 탈레랑페리고르 가문의 시조. 샤를모리스 드 탈레랑페리고르는 그의 먼 후손이었다.[8] 또는 경건왕[9] 물론 아버지인 '존엄왕' 필리프 2세가 닦아놓은 기반 탓이었다.[10] 카페-앙주 왕조와 발루아 왕조(샤를 8세, 루이 12세)[11] 카페-부르고뉴 왕조(Capetian House of Burgundy)의 포르투갈계 분가인 보르고냐 왕조이다.[12] 장남은 장남이되 사생아였다.[13] 카페-앙주 왕조.[14] 보르보네 왕조. 부르봉 왕가의 방계인 보르본 왕조(스페인계)의 방계로 부르봉-파르마 공가와 같이 이탈리아계 부르봉 왕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