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프 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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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카페 왕조 제4대 국왕
필리프 1세
Philippe I

출생
1052년 5월 23일
프랑스 왕국 상파뉴
사망
1108년 7월 29일 (향년 56세)
프랑스 왕국 믈룅
재위기간
프랑크인의 왕
1060년 8월 4일 ~ 1108년 7월 2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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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문
카페 가문
아버지
앙리 1세
어머니
키예프의 안나
배우자
홀랜드의 베르타 (1072년 결혼/1092년 이혼)
몽포르의 베르트라다 (1092년 결혼)
자녀
콩스탕스, 루이 6세, 앙리, 샤를, 외드,
필리프, 플뢰리, 세실[1]
종교
기독교(가톨릭)
별칭
호색왕(l'Amoureux/the Amorous)


1. 개요
2. 생애
3. 가족 관계
3.1. 홀랜드의 베르타
4. 그 외



1. 개요[편집]


프랑스 왕국 카페 왕조의 제4대 왕.

앙리 1세와 키예프의 대공녀 안나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1]


2. 생애[편집]


파일:Sceau_du_roi_Philippe_Ier.jpg
필리프 1세의 인장.

그의 이름인 '필리프'(Philippe)는 모후인 안나가 지어준 이름으로, 그리스식 이름인 '필리포스'가 어원이었다. 이는 게르만식 이름이 주류이던 당시 서유럽의 전통을 벗어난 것이었다. 다르게 보면 키예프의 안나가 동로마 문화권인 키예프 출신이라 동로마어, 즉 그리스어가 익숙해서 지어준 것으로도 볼 수 있다. 12제자 중 하나인 사도 필립보가 있는 만큼 명분도 있었다.[2]

9세의 어린 나이로 즉위했으며, 그의 모후 안나와 플랑드르 백작 보두앵 5세의 섭정을 받았다. 1072년 홀랜드의 베르타와 결혼했으나, 앙주 백작 풀크 4세의 아내였던 몽포르 가문의 베르트라드와 사랑에 빠져 베르타와 이혼하고 베르트라드와 1092년에 결혼했다. 하지만 교황은 이 결혼에 반대하여 그에게 파문을 내렸다. 하지만 프랑스 내 봉건영주들과 주교들이 필리프 1세를 지지해서 지속적으로 베르트라드를 주변에 둘 수 있었다. 이런 짓 때문에 별칭은 '호색왕'(l'Amoureux, the Amorous)이었다. 1108년 믈룅에서 사망했다.


3. 가족 관계[편집]



3.1. 홀랜드의 베르타[편집]


파일:Arms_of_the_Kingdom_of_France_(Ancien).svg
프랑스 왕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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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프 1세와 첫 왕비인 홀랜드의 베르타는 1072년에 각각 21세, 16세의 나이로 결혼했다. 1078년 장녀 콩스탕스가 출생한 이래로 1081년 12월 1일에 장남 루이 6세, 차남 앙리(1083-1089), 3남 샤를(1085-1091), 사남 외드(1087-1094)가 태어났다. 필리프 1세는 장남의 것으로 미리 예정한 이름이 있었으나 한 성직자로부터 이름을 '루이'로 지으면 장차 위대한 왕이 될 것이란 예언을 듣고 루이로 지었다. 당대의 목격자들은 필리프 1세가 루이를 '신이 주신 아기'라고 기뻐했다며 술회한다.

하지만 1092년에 필리프 1세는 베르타와 이혼했다. 이혼 사유에 관해 당대의 《연대기》 작가들의 의견은 제각각이다. 그중 맘즈베리의 윌리엄은 이렇게 전한다. 남편이 아내의 뚱뚱한 몸매를 질색했다고. 필리프 1세는 베르타에게 과부산을 주어 그곳의 성으로 쫓아내고, 자식들인 콩스탕스, 루이, 외드는 오직 필리프 1세만의 것이 되었다.


4. 그 외[편집]


젊은 시절엔 미남자였지만 말년에는 무절제한 생활 탓에 뚱뚱해졌다고 한다.

양성애자 의혹이 있다. 전 동성애인이 오를레앙 주교로 서임되는 데 입김을 넣었다는 설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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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 때문에 필리프 1세는 노르드루스족 수장 류리크의 후손인 류리크 왕조의 명군이었던 '현명공' 야로슬라프 1세의 외손자였다.[2] 안나는 키예프 루스의 공주로 당시 키예프 루스는 정교회 문화를 동로마 제국으로부터 직접 전수받아 몽골의 침략 이전까지도 높은 문화 수준을 누렸다. 그에 반해 프랑스는 서로마 붕괴 이후 문화적으로 아직 낙후되어 있던 상태였다. 어느 정도 였나 하면 앙리 1세에게 시집 온 안나가 그녀의 아버지, 야로슬라프 1세에게 보낸 편지엔 '여긴 너무 야만적이에요. 집은 어두침침하고 성당은 끔찍하고, 문화는 미개하답니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이후 키예프 루스가 몽골에게 침략받는 반면, 프랑스는 문화강국으로 성장하는 걸 보면 아이러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