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이 1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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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왕국 발루아 왕조 제6대 국왕
루이 11세
Louis X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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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호
루이 11세 (Louis XI)
출생
1423년 7월 3일
프랑스 왕국 베리 부르주
사망
1483년 8월 30일 (향년 60세)
프랑스 왕국 플레시스레투르 성
재위
프랑스 왕국의 국왕
1461년 7월 22일 ~ 1483년 8월 30일
배우자
스코틀랜드의 마거릿 (1436년 결혼 / 1445년 사망)
사보이아의 카를로타 (1451년 결혼)
자녀
안, 잔, 샤를 8세
아버지
샤를 7세
어머니
앙주의 마리
형제
라드공드, 카트린, 욜랑드[1], 잔, 마들렌, 샤를
서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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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생애
2.1. 즉위하기 이전
2.2. 공익동맹과의 대결
3. 여담



1. 개요[편집]


프랑스 왕국의 국왕. 발루아 왕조의 제6대 왕이며 샤를 7세의 아들이다. 능력을 보면 명군인 아버지만큼 뛰어나서 귀족들의 반항을 분쇄하고, 프랑스 절대왕정의 기반을 닦은 왕이었다.


2. 생애[편집]



2.1. 즉위하기 이전[편집]


부왕 샤를 7세가 잉글랜드군과 부르고뉴군에 밀려 쫓겨다니던 엄혹한 시절에 태어났다. 어린 시절 아버지와 사이가 좋지 못해 급기야 그가 싫어하는 아버지의 애첩인 아녜스 소렐에게 칼을 들고 죽이려 난동을 부렸을 정도로 사이가 몹시 나빴다. 물론 이 일로 루이는 화가 난 아버지에 의해 궁전에서 쫓겨나 지방으로 좌천되었다. 1440년 17세 때 귀족들의 반란인 프라그리의 난에 가담했으나 실패하여 이후 17년 동안 도피네에 유배되었다. 유배에서 풀려난 이후에도 역시 음모에 가담하여[2] 1456년 부르고뉴국으로 도망가 7촌 아저씨되는[3] 선량공 필리프 3세의 비호를 받았다.[4] 그후 아버지인 샤를 7세와는 평생동안 만나지 않았다고 한다.


2.2. 공익동맹과의 대결[편집]


아버지 샤를 7세가 1461년에 죽자 루이 11세는 프랑스로 돌아온 후 왕위에 올라 부왕의 측근 세력을 일소하고, 제후 세력들을 억제하는 정책을 펼쳤다. 그러자 1465년 불만을 품은 귀족들이 집결하여 공익동맹(ligue du Bien Public)을 결성하고, 반란을 일으켰다. 부르고뉴국의 '선량공' 필리프 3세의 아들인 샤롤레 백작 '용담공' 샤를과 루이 11세의 동생인 베리 공작 샤를이 명목상 최고 통수권자로서 공익동맹을 이끌었다. 가스통 4세 드 푸아-베아른(Gaston IV de Foix-Béarn)의 효과적인 지원을 받은 루이 11세는 30,000여명의 병력을 조직했다. 1465년 5월과 6월에 전쟁이 개시될 때, 루이 11세는 부르봉 공작 장 2세의 중심지를 타격했다. 그후 왕은 프랑수아 2세의 브르타뉴 공국군과 부르고뉴 공국군에 맞서 수도 파리로 향했다. 그들의 군대가 만나기 전에, 왕은 샤롤레 백작 샤를('용담공' 샤를)이 이끄는 부르고뉴군과 맞닥드렸다. 전투는 1465년 7월 16일 파리 남쪽에 있는 몽틀레리에서 벌어졌다. 그 전투는 혼란스러웠고, 양측에서 승리를 주장했다. 샤롤레 백작은 전장의 승리자로 남았지만, 루이 11세는 부르고뉴군의 병력수를 경감시켰으며, 야밤에 조심스럽게 전략적인 후퇴 명령을 내려, "승리"한 군대[5]와 함께 파리로 돌아왔다. 프랑스의 군주는 위태로웠던 수도에서 왕의 위신을 강화시켰다. 하지만 전투 이후, 왕의 위세는 약해졌으며, 특히 7월 19일에 부르고뉴군과 브르타뉴군의 합류를 막아낼 수 없었다. 곧 아르마냑 백작 장 5세, 알브레 백작 샤를 2세, 로렌 공작 장 2세도 동맹군에 합류하게 되었다. 7월 18일 파리에 입성한 루이 11세는 방어선을 구축했고, 공익동맹의 봉건 영주들은 파리 공성전을 시작했다. 루이 11세는 8월 10일에 파리를 떠나 노르망디의 루앙으로 향했고 전쟁 준비를 하던 왕족 세력들을 결집시켰다. 8월 28일에 루이 11세는 강력한 지원군을 구축할 수 있었고 이들을 이끌고 파리로 돌아왔다. 그럼에도 공익 동맹군이 퐁투아즈와 루앙을 점령하는 걸 막아내지는 못했고 결국 9월 3일에 강화조약이 체결되었다. 그러나 이후르도 양측은 계속 충돌을 벌였고 루이 11세는 양보하는 척 세 차례에 걸쳐 평화조약을 맺었다. 1465년 10월 5일에 샤를루아 백작 및 샤를 드 프랑스와 콩플랑 조약을 체결했다. 24일 뒤인 10월 29일에는 봉건영주들과 생모르 조약을 체결했고, 12월 23일에는 브르타뉴 공작 프랑수아 2세와 캉 조약을 체결했다. 베리 공작 샤를 드 프랑스는 노르망디 공국을 받았고, 부르고뉴국의 샤롤레 백작 샤를은 그와 그의 후계자를 위해 200,000크라운으로 되찾은 솜[6]과, 불로뉴, 긴, 로에, 페론, 몽디디에르 영지를 얻었다. 또한 로렌 공작 장 2세는 무종, 생트므누, 네프샤토를 획득했고, 브르타뉴 공작 프랑수아 2세는 몽포르, 에탕프를 얻었으며, 그의 모든 영지를 회복했다. 부르봉 공작 장 2세는 동쉐리, 오베르뉴의 봉건권 및 랜스 300개, 그리고 100,000 크라운을 얻었으며, 느무르 공작 자크 다르마냑은 파리 및 일드프랑스의 행정권을 받았다. 한편 아르마냑 백작 장 5세는 루에르그 일대의 여러 성들을 얻었으며, 생폴 백작 루이 드 뤽상부르는 '콘네타블'(프랑스 육군 총사령관)이 되었다.

하지만 루이 11세는 공익동맹에 유리한 이 형세가 오래 가지 않을 거라고 보았으며 반역자들의 일부를 용서하는 한편으론 일부를 벌하기도 했다. 우선 공익동맹을 지원한 앙부아즈 가문을 벌하기 위해 피에르 당부아즈의 쇼몽 성을 파괴시켰다.[7] 1465년, 파리와 바스티유 감독관 샤를 드 믈룅은 드 라 리비에르에게 자리를 물려주었으나 공익동맹의 지도자들과의 연결로 인한 유죄 판결을 받아, 1468년 앙들리에서 처형당했고 그의 재산은 몰수되어 앙투안 드 샤반느에게 주어졌다. 1466년 3월에 샤를 드 프랑스는 브르타뉴 공작과의 분쟁이 일어나 도움을 받지 못한 채, 루이 11세에게 노르망디를 상실하고 브르타뉴로 도망갔다. 이렇게 루이 11세가 착실하게 구 동맹 세력에 응징을 가하던 1468년, 더 이상 이를 두고 볼 수 없던 용담공 샤를은 잉글랜드 왕 에드워드 4세의 지원과 함께 샤를 드 프랑스, 알랑송 공작 장, 브르타뉴 공작 프랑수아 2세와 함께 새로운 동맹을 조직했다. 그러나 루이 11세는 4월 투르에서 삼부회의 강력한 지원을 받았으며, 동맹에서 프랑수아 2세와 샤를 드 프랑스를 떨어트려 놓는 데 성공했다(앙세니 조약). 이때 루이 11세는 느무르 공작이자 라마르슈의 백작인 자크 다르마냑 숙청 역시 진행하게 된다. 자크 다르마냑은 이전에도 수차례 반역 행위를 저질렀다 왕에게 여러 차례 용서를 받은 전과가 있었음에도 1475년, 정신을 못차리고 새로운 반역 행위를 저질렀다가 분노한 루이 11세에게 잡히고 만다. 자크는 잡히고 나서 2년간 바스티유에 수감되어 있다가 1477년 파리 광장에서 참수형에 처해졌다.

1475년 루이 11세는 잉글랜드 요크 왕조의 초대 왕인 에드워드 4세피키니 조약을 체결하여 백년전쟁을 완전히 종결시켰다. 1477년 반란을 주도하던 부르고뉴국의 '용담공' 샤를 1세[8]부르고뉴 전쟁스위스 용병과의 낭시 전투에서 패배하며 참혹하게 전사하자[9] 본격적으로 제후들을 향한 공세를 펼쳤고, 1480년 마침내 왕국 내 봉건세력을 완전히 무너뜨렸다.[10] 1483년에는 부르봉 공작 장 2세를 프랑스의 콘네타블로 임명했다. 공익동맹을 분쇄시킨 루이 11세는 훗날 우편제도의 창설, 민병제도의 확충, 그리고 상공업 육성 등의 정책을 통해 중앙집권적인 요소를 확립시켜 훗날 번영하게 될 프랑스 절대왕권의 기반을 닦았다.


3. 여담[편집]


참고로 백년전쟁 때 로슈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던 도중 잔 다르크를 만났던 적이 있었다. 훗날 프랑스를 구원한 잔 다르크에게 프랑스 왕족들 중 유일하게 고마움을 표했으며, 자신의 딸에게 '잔'이라는 이름을 붙여 줄 정도였다.

여담으로 모자를 쓰는 것을 좋아했는지 초상화를 보면 계속 모자를 쓰고 있다.

루이 11세가 사람들을 현혹시키는 예언자를 잡아와서 사형에 처하게 했는데, 그 때 예언자에게 자신의 앞일을 알 수 있느냐고 묻자 예언자는 자기가 죽는 날밖에 모른다고 했다. 루이 11세가 그날이 언제냐고 묻자 예언자는 왕이 죽기 3일 전이라고 답하였다. 그 말인즉슨 예언자를 처형시키면 그 후 3일 뒤에 왕이 죽는다는 뜻이므로, 루이 11세는 예언자를 풀어주었다는 일화가 있다.# 여담이지만 링크를 보면 1946년부터 왕위에 있었다고 잘못 나왔다. 그 때 프랑스는 이미 공화국이 된지 오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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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사보이아 공작 아메데오 9세와 결혼.[2] 권모술수와 모략, 음모 꾸미기에 능해 별명이 세계의 거미였다고 한다.[3] 루이 본인은 장 2세의 장남 샤를 5세의 증손자였고, 선량공 필리프 3세는 장 2세의 막내아들 호담공 필리프 2세의 손자였다.[4] 당시 프랑스와 부르고뉴는 썩 멀지 않은 친척 관계임에도 불구하고, 계속된 음모와 암살 사건으로 사이가 몹시 나빴으며 서로 적대시하는 사이였다.[5] 왕당파인 멘 백작 샤를 4세는 제3 왕실 군대를 데리고 전장에서 퇴각했다.[6] 루이 11세는 이 지역들을 샤를의 아버지인 '선량공' 필리프 3세로부터 400,000크라운에 되찾았다.[7] 4년 뒤에 왕은 그들을 용서했고, 쇼몽 성을 재건하는 비용을 지원해주었다.[8] 자신을 비호했던 부르고뉴의 선량공 필리프 3세의 아들. 즉 서로 8촌이다.[9] 1477년 1월 5일, 스위스 군대와 대결하다가 스위스 보병이 내리친 할버드에 머리가 투구째로 쪼개지며 전사했다.[10] 물론 이것만으로 봉건세력이 완전히 무너진 건 아니었고 루이 11세 사후인 1485년 브르타뉴 공작을 중심으로 다시 한 번 반란을 일으켜 프랑스는 1488년까지 내전 상태에 놓이게 되는데 이는 광기 전쟁이라 불리며 이 전쟁까지 끝나고 나서야 비로소 봉건세력이 완전히 무너질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