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자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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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북위의 황족. 평문제 탁발울률의 후손. 애릉성백 원장의 아들.
2. 생애[편집]
아버지가 사망한 후 애릉백 작위를 습작하였고, 효장제 재위 초에 청주(靑州)자사로 임관하였다.[1] 당시 청주의 북해군(北海郡)에서 형목(邢杲)이 한왕(漢王)을 자칭하고 난을 일으켜 주의 민심이 흉흉하였는데, 원자화가 부임하여 지역 호족들을 불러모으고 그들에게 자치권을 주니 마침내 지역이 안정되었다.
원자화는 성격이 매우 급해, 그가 조급해 할 때 주변 사람들이 아무 말도 하지 않으면 곧바로 구타하였다. 원자화의 친구인 장사 정자담(鄭子湛)마저 원자화에게 이런 모욕을 당하고 바로 그의 곁을 떠났을 정도였다. 원자화는 친구가 떠나는 것을 보고 뉘우쳤으나 그 손버릇을 끝내 고치지 못 했다. 비록 이런 성격적 결함이 있는 그였지만, 감옥에 갇힌 수형자를 심문할 때는 관용을 베풀고 인자하게 용서해주어 제주의 백성들이 비석을 세워 그의 공덕을 칭송하기도 하였다.
건의 원년(528년) 4월, 대장군 이주영이 하음의 변을 일으켜 황후와 수많은 문무백관을 살해하고 낙양을 공격할 당시, 제주(濟州) 사람 조낙주(趙洛周)가 제주자사, 단양왕 소종(蕭賛)을 쫓아내고, 상소를 올려 제남(濟南)태수 방사달(房士達)로 하여금 제주자사를 대신케 해달라 건의하였다. 이때 원자화는 이미 조정으로부터 제주자사에 임명받고 조낙주의 아들 조원현(趙元顯) 함께 제주에 머물고 있었는데, 조원현은 아버지의 상소 내용을 알아채고 도중에 상소문을 낚아채 방사달을 원자화로 고쳤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어머니 방씨(房氏)가 사망하자, 원자화는 상을 치르기 위해 사직하고 낙양으로 돌아갔다.
효정제 재위 초에 원자화는 남연주(南兗州)자사에 임명되었다. 그는 남연주에서 동생 원자사(元子思)를 보내 서위와 내통한 사실이 발각되어 우위장군 곽경(郭瓊)에 의해 체포당했다. 원자사가 곽경의 노복에게 말했다.
이에 원자화가 동생에게"어찌하여 속히 나를 죽이지 않고 오랫동안 나라를 다스린 선비를 잡아갈 수 있단 말인가!"
라 하고는 머리로 침대를 두드리며 울음을 그칠 줄 몰랐다. 그 말을 듣고 한동안 수염만 만지작거리던 원자사가 마침내 형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네가 꼼꼼하지 않아 지금 내가 이리 된 것이다."
이후 원자화는 곽경에 의해 수도 업(鄴)으로 끌려갔다."그대는 인품이 너무 나쁘오."
천평 4년(537년) 9월, 원자화와 원자사는 각자 업성의 다른 문 아래에서 사약을 마시고 자결하라는 명을 받고 사사당했다.
3. 기타[편집]
- 원자화는 이름난 효자로, 한번은 원자화의 어머니 방씨가 친척집에 놀러가서 밥을 먹고 집에 돌아와서 심하게 구토를 하니, 집안 사람들이 모두 독이 든 음식을 먹었다 떠들어대 방씨가 몹시 근심하고 두려워하였다. 이에 원자화가 그 토사물을 모두 먹어치워 어머니를 안심시켰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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