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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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대한민국의 전 정치인이다.
1919년 경기도 안성군 양성면 덕봉리에서 태어났다. 집안 형편상 양성공립보통학교 4학년 때 중퇴하고 한문을 공부하였다.
이후 서북신문, 건설신문 사장 및 전국문화사업협회 사무국장 등을 역임하였다. 1948년 대한국민당에 몸담아 중앙상무집행위원을 지냈다. 1950년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무소속으로 경기도 안성군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무소속 이교선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이후 6.25 전쟁 때 종군학도대 후원회장을 역임하였다.
1954년 제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무소속으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여 현역 국회의원인 자유당 이교선 후보에 설욕하고 당선되었다. 같은 해 자유당에 입당하였다. 1956년 대한민국 국회 국방위원회 위원장에 선출되었다. 1958년 제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자유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1960년 제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자유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무소속 김갑수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게다가 1961년 3.15 부정선거에 가담하였다는 이유로 반민주행위자로 분류되어 공민권이 제한되고 피선거권이 상실되었다.
5.16 군사정변 이후인 1963년 치러진 제5대 대통령 선거에서 추풍회 후보로 출마하여 진보적 성향의 공약을 제시하여 혁신계(진보) 표를 얻고자 노력했으나 민주공화당 박정희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같은 해 치러진 제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도 추풍회 후보로 경기도 안성군-용인군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민주공화당 서상린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1967년 추풍회를 통한당으로 개칭하고 제6대 대통령 선거에서 통한당 후보로 출마하여 다시 진보적 성향의 공약을 좀 더 강하게 제시하여 혁신계 결집을 시도했으나 역시 현직 대통령인 민주공화당 박정희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같은 해 치러진 제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통한당 후보로 서울특별시 마포구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신민당 김홍일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이후 정계를 은퇴했고 1972년 마포구 자택에서 숙환으로 별세했다.
참고로 특이한 기록을 가지고 있는데 5, 6대 대통령 선거에서 모두 3위를 기록해 역대 최다(2번) 대선 3위라는 타이틀을 가지고 있다. 5대 대선 후 3위를 기록했을 때 스포츠라면 동메달이라며 조선일보에서 밝히기도 했다.#
2. 선거 이력[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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