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갑수(법조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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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정당 총재
김갑수
金甲洙


파일:정치인 김갑수.jpg

출생
1912년 3월 7일
경기도 안성군
사망
1995년 1월 26일 (향년 82세)
서울특별시 마포구 염리동 자택
국적
[[대한민국|

대한민국
display: none; display: 대한민국"
행정구
]]

학력
전주제일보통학교 (졸업)
경성제일보통고등학교 (졸업)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법학과 (졸업 / 1932년)
최종 당적

[[무소속|
무소속
]]

종교
종교
직업
법조인, 정치인
1. 개요
2. 생애
2.1. 사망
3. 소속 정당
4. 둘러보기



1. 개요[편집]



2. 생애[편집]


1912년 3월 7일 경기도 안성에서 법률가 집안의 자손인 김종근의 2남4녀 가운데 맏아들로 태어나 전주에서 변호사를 개업한 부친을 따라 14세까지 전주에서 살며 전주제일보통학교 5학년 때 전주고등보통학교 입학 시험에 응시했다. 결국 낙방했지만 경성부에 가서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에 합격했다.

경성제일고보를 졸업한 후 1930년 경성제국대학 예과에 입학하여 1932년 수료하고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로 진학해 1935년 법학과를 졸업했다.

대학 졸업 후 25세의 나이로 도쿄도에 가서신순언, 변옥주, 김달호 등 5~6명의 조선인과 함께 고등문관시험 사법과에 합격하고 판사에 임용되어 1945년까지 7년이 넘는 기간 동안 민사/형사 사건의 단독이나 배석 판사로서 재직했으나 일본 제국의 패망과 함께 북한 지역에 소련군에 진주하면서 법원이 해체되어 어쩔 수 없이 월남했다.

월남하여 경성대학 법문학부에서 교수를 하다가 1년을 넘기지 못한 채 미군정청 사법부 조사국장이 되어 입법 자료를 수집하는 등의 일을 했으며 대한민국 정부 수립과 함께 초대 법무부 장관 이인을 보좌하는 법무국장에서 6~7개월 일하다가 내무차관으로 승진하였으나 한국전쟁과 함께 수도가 대구로 옮기면서 새로운 내무부 장관인 조병옥 취임과 함께 차관직에서 물러났다.

전쟁 기간동안 피난 살이를 하면서 9.28 서울 수복때 상경하여 서대문구 교남동에 처음으로 변호사 사무실을 열었지만 1.4후퇴로 다시 부산으로 내려가서 공주지방법원에서 함께 근무하였고 부친과도 변호사 사무실을 함께 개업한 인연이 있는 김병로 대법원장의 권유로 법전 편찬위원회 전문위원직을 맡다가 1953년 6월 대법관에 임명되었다.

1959년 진보당 사건조봉암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조봉암 재판은 1심과는 매우 다른 분위기에서 진행되었으며, 마침내 1959년 2월 27일 대법원에서 확정판결을 내렸는데, 선고공판에는 재판장 김세원은 지방출장을 이유로 나오지 않고 주심 김갑수가 떨리는 음성으로 판결문을 낭독하였다.
판결문에 따라 조봉암은 사형, 여타의 간부들은 무죄를 선고받았다. 그 후 변호인단의 재심청구가 기각되는 등 변호인단과 딸(조효정)이 구명운동을 벌였지만 조봉암은 1959년 7월 31일 교수대에서 사형되었다.

1960년 제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무소속으로 경기도 안성군 선거구에 출마하여 자유당 오재영 후보를 누르고 당선되었다. 1963년부터는 민주공화당에 속하였다. 1967년 제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공화당 후보로 서울특별시 마포구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신민당 김홍일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1981년 신정당을 창당하여 총재가 되었다.

2.1. 사망[편집]


이후 1995년에 향년 82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3. 소속 정당[편집]


소속
기간
비고

[[무소속|
무소속
]]

1945 - 1963
정계 입문

[[민주공화당|
파일:민주공화당_글씨만.png
]]

1963 - 1980
입당

[[무소속|
무소속
]]

1980 - 1981
정당 해산


1981 - 1982
창당

파일:신정사회당 선거벽보 글씨.png

1982 - 1985
합당[1]

[[무소속|
무소속
]]

1985 - 1995
탈당
정계 은퇴
사망


4. 둘러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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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민주사회당과 신설합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