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양왕/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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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애 및 활동
생애 | 고구려-수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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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호
건흥



1. 개요
2. 기나긴 태자 시절
3.1. 1차 전쟁
3.2. 2차 전쟁 : 살수대첩, 평양성전투
3.3. 3차 전쟁 : 양현감의 난
3.4. 4차 전쟁 : 수나라의 멸망
4. 백제, 신라와의 충돌



1. 개요[편집]


고구려 영양왕의 생애를 다루는 문서.


2. 기나긴 태자 시절[편집]


평원왕의 맏아들로 태어나 565년 1월(평원왕 7년)에 태자에 봉해졌고, 590년 10월 평원왕이 승하하자 즉위했는데 무려 25년을 동궁으로 지냈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풍채가 당당하고 호쾌하였으며 세상을 구제하고 백성을 안정시키는 것을 자신의 임무로 생각했다고 한다. 이런 표현이 대개 강호동처럼 생겼으면 ‘용맹하게 생겼다’, 유재석처럼 생겼으면 ‘영민하다’는 식의 수사에 불과하지만 세상을 구제하고 백성을 안정시킨다는 부분은 수나라와 벌인 전쟁을 상기한다. 고구려를 멸망시키지 못해 안달이 났던 당 태종 이세민도 백성을 사랑한 군주라고 평가한 걸 보면 헛소리만은 아닌 것 같다.


3. 수나라와 전쟁을 벌이다[편집]


589년 수나라가 진나라를 멸망시키면서 중국 대륙을 통일하고, 수나라의 전신인 북주를 부려먹던 돌궐까지 복속시켰다. 동아시아에 수나라의 패권이 구축되어 가는 듯 보였고, 남은 것은 요동의 고구려 뿐이었다. 영양왕의 부친 평원왕은 사신을 보내는 한편 간첩을 파견하기도 하며 여러모로 수나라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삼국사기》에는 수나라가 대륙을 통일하자 평원왕이 쇼크사했다는 식으로 적혀 있다. 결론적으로 수나라는 고구려를 가만 냅둘 생각이 없었고, 국력을 소진해가면서까지 고구려 침공을 강행했다.


3.1. 1차 전쟁[편집]


파일:영양왕 수나라 침공.png

이듬해에 원(영양왕, 고대원)이 친위대와 말갈 기병 10,000여명을 거느리고 요서에 침입하였는데 영주총관(營州總管) 위충(韋沖)이 물리쳤다. 고조(高祖)가 이 소식을 듣고 크게 노하여 한왕(漢王) 량(諒)을 원수(元帥)로 삼고 수군과 육군을 총동원하여 고려를 치게 하는 한편, 조서를 내려 그의 작위(爵位)를 삭탈하였다.

《수서》 <동이열전> -고려-


1차 전쟁은 598년 영양왕이 직접 친위대와 말갈군 병력 10,000명을 이끌고 요서의 영주를 선제 공격하는 것으로 시작되었으며, 수나라 문제는 300,000명의 대군을 일으키는 것으로 응전했다.

이때 군량 수송이 중단되어 6군(六軍)의 먹을 것이 떨어지고, 또 군사가 임유관(臨渝關)을 나와서는 전염병마저 번져 왕의 군대는 기세를 떨치지 못하였다. [隋軍이] 요수(遼水)에 진주하자, 元도 두려워하여 使臣을 보내어 사죄하고 表文을 올리는데, ‘遼東 분토(糞土)의 臣 元 云云’하였다. 高祖는 이에 군사를 거두어 들이고, 과거와 같이 대우하였다.

《수서》 <동이열전> -고려-


1차 전쟁 당시 고구려와 수나라 양국 간에 어떤 전투가 발생했고, 전투 양상이 어떠했는지는 기록의 부재로 자세히는 알 수 없지만 장마태풍 등으로 30만 중 대다수가 전멸하고, 때마침 영양왕도 수 문제에게 사신을 보내 표문에 '요동 분토(糞土)에 있는 신(臣) 고원'[1][2]이라 칭하는 사과문을 바쳐 교전없이 퇴각했다는 수나라 측의 기록이 전해진다.

그러나 실제로는 고구려와의 교전에서 대패한 정황을 암시하는 듯한 기록들도 존재하기 때문에[3] 수나라 측에서 고의적으로 패전 사실을 축소했거나 은폐했다고 보기도 한다.[4]

1차 전쟁에서 승리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600년, 태학 박사 이문진에게 명해 《신집》 5권을 편찬하도록 했는데 국초[5]부터 전해지는 《유기》 100권을 압축한 것이었다. 설화, 전설 등 잡다한 요소들을 제거하고 중요한 역사적 사건만을 선발한 것으로 보기도 한다. 5권이라고 해서 적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글자 크기나 1권의 쪽수 등에 따라 분량에 차이가 난다. 제지 기술이 발달하지 않았던 고대에 목간에 기록하던 것을 종이에 옮길 경우 부피와 분량이 대폭 압축될 수 있기 때문이다.


3.2. 2차 전쟁 : 살수대첩, 평양성전투[편집]


수나라 2대 황제 양제 양광은 돌궐 계민가한의 막부에 행차했을 때 돌궐에 온 고구려 사신과 마주쳤다. 이에 수 양제는 고구려 사신에게 왕을 입조시키라고 명령했으나 입조는 당연히 없었고, 이를 사실상 선전포고로 간주한 수 양제는 고구려를 침공해왔다. 그런데 수서 기록에 따르면 그 수만 무려 113만 3,800명이었다고 한다. 물론 당시 역사서 특유의 과장도 있겠지만 일단 정사 기준으론 전투병으로 그 정도 숫자로, 수송병과 군속 등 기타 병사들은 그 라고 적혀있다. 이 숫자에 대해선 지금까지도 학자마다 왈가왈부가 이어지고 있는데 자세한건 고구려-수 전쟁 항목 참조.

허나 실체가 어쨌든간에 진짜 양쪽이 서로 총력전에 들어간건 맞다. 우선 수 양제는 요동을 점령하려고 했지만 실패하자 수군 100,000명과 육군 300,000명을 별동대로 보내는 작전을 펼쳤다. 육군은 우중문을 총사령관으로 하고 바로 평양성으로 진격하도록 명령했다. 그리고 수군은 내호아를 총사령관으로 하고, 산둥 지역에서 바로 평양성으로 상륙하도록 했다. 수 양제는 두 별동대가 평양성에 모여 합동 작전을 펼치도록 명했지만 수군 장수 내호아는 이를 거역하고 먼저 평양성을 침공하다가 약 50,000여 명의 군사를 잃고 말았다. 육군 쪽의 별동대 역시 살수대첩에서 약 30만여 명의 군사를 송두리째 잃고 말았다.


3.3. 3차 전쟁 : 양현감의 난[편집]


2차 전쟁에서 그 많은 병력 잃은지 얼마 되었다고 포기를 모르는 수나라가 4개월만에 또다시 40만 대군을 일으켜 쳐들어왔지만, 결국 요동성 하나에 매달려 지지부진하다 본국에서 양현감이 반란을 일으키자 퇴각했다. 이때 퇴각하는 수군을 고구려군이 추격해 성과를 내기도 했다.


3.4. 4차 전쟁 : 수나라의 멸망[편집]


수나라의 4차 침공 당시에는 이미 수나라도 전쟁통에 국운이 기울어가기 시작해 내부 사정이 말이 아니었다. 양현감의 난은 진압되었지만 이 외에도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나고 있었던 것. 허나 고구려도 청야전술의 후유증과 수나라의 너 죽고 나 죽자 식 진흙탕 물량전에 따른 피로가 누적됨이 드러났는데, 여수전쟁 최초로 고구려 성인 비사성이 한동안 함락되기도 했다.

이런 와중에 영양왕은 《수서》에 따르면 양현감의 난 당시 고구려로 투항한 곡사정을 수 양제에게 돌려보내며 명목상 귀부하는 형태로 화친을 요청한다. 그리고 수 양제 또한 수나라 내부 사정이 개판이었기 때문에 일각의 반대를 뿌리치고 이 조건을 받아들이며 614년 회군하게 되며, 그렇게 길었던 여수전쟁은 끝을 맞이하게 된다.

이후엔 알다시피 얼마 안가 수양제는 개판된 수나라 내부 사정에 의해 618년 4월 11일에 피살당하고 다음해인 619년 수나라 역시 멸망했다. 그리고 묘하게도 수양제가 피살되고 618년 6월 18일에 건국되었던 당나라가 건국되고 얼마 안 있어 618년 9월에 영양왕도 승하했다. 보면 수양제 피살 약 5개월 후 당나라가 건국된지 약 3개월 후에 사망했다. 그리고 고구려 왕조 역대 왕 중 죽을 때까지 온전하게 왕위를 보존한 마지막 왕이었다.


4. 백제, 신라와의 충돌[편집]


598년에 백제 위덕왕은 고구려를 견제하기 위해 수나라에 사신을 파견해 고구려가 예의없고 오만하다며 비방하고, 수가 고구려를 친다면 백제가 길 안내 및 군량 보급 등에 협력하겠다고 제의했다. 허나 수나라는 당시에 그럴 여력이 없다고 판단하여 위덕왕의 제의를 무시했다. 그리고 이 사실을 알아챈 영양왕은 화가 머리 끝까지 나서 백제를 공격했다. 이 고구려-백제 간의 598년 전투는 기록이 소략하고, 전면전이라기보단 고구려의 보복성 제스처인데다 고구려와 백제 사이에는 신라의 한강 하류 영토가 존재하기 때문에 수군을 이용해 소규모로 벌어졌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전쟁 결과는 기록의 불명으로 알 수 없지만 정황상 백제가 방어해낸 것으로 보인다. 백제는 무왕 때도 국지모(國智牟)를 중국에 사신으로 보내서 수가 고구려를 공격하면 백제가 도울 것이라고 수양제를 부추겼는데, 백제의 부추김이 고구려 침략의 유일한 원인까지는 당연히 아니지만 결국 실제로 수가 고구려를 대규모로 공격해오자 정작 무왕은 수나라를 돕지 않으며 제대로 뒤통수를 친다. 애초부터 백제는 두 나라 간의 싸움에 직접 끼어들 생각은 일절 없었고 서로 싸워서 고구려가 약해지면 그것대로 좋다는 식의 이이제이가 목적이었던 것이다. 진짜 고구려가 멸망이라도 하면 다음 차례는 자기들일 수도 있으니.

603년에는 장군 고승을 보내 신라의 북한산성공격했다는 등의 기록이 있다.

이 공격은 신라 진평왕이 10,000명의 병력을 이끌고 친정해서 실패했지만 608년 다시 신라 북쪽 변경을 습격해 우명산성을 함락했다.

607년에는 백제의 송산성을 공격하였으나 함락시키지 못했고, 간신히 석두성을 공격하여 성을 함락시키고 포로 3천 명을 사로잡아 끌고갔다

또한 아버지 평원왕 때부터 이어져오던 강한 압박의 영향으로 영양왕 초중기 당시 고구려의 영토는 거의 한강에 근접했다는 기록을 엿볼 수 있다. 광개토대왕으로부터 문자명왕에 이르는 전성기만큼은 아니지만 그 시기를 제외하면 연개소문 이전까지 고구려가 가장 많이 남진한 시기라고 보아도 과언이 아니다. 연개소문 시대에는 한강 이북 거의 전부와 강원도 중부까지 차지하고 이렇게 생긴 통로를 통해 심지어 충청도경상도까지 진출하고 있었다는 주장도 있다. 다만 영양왕 재위 기간 중에도 신라와 수나라는 사신을 멀쩡히 계속 주고받고 있었고, 수도가 동해안에 있는 신라가 고구려와 백제의 방해를 피해서 중국에 사신을 보내려면 경주부터 한강 하류 서해안까지 영역이 연결돼 있어야 하기 때문에, 영양왕대에 수복한 지역이 그리 크지 않았거나 아니면 금방 신라가 탈환했을 가능성이 높다.

또 후방의 신라 견제를 위해 영양왕은 아버지 평원왕 때부터 본격적으로 시작한 대왜 교류를 이어받아 일본 기록에 따르면 왜국과 제법 활발하게 사신을 주고 받은 것으로 보인다. 승려 담징(曇徵)과 법정(法定) 등을 보내 종이와 먹을 전파하고, 나라현에 있는 호류지(法隆寺)의 벽화를 그리게 하는 등 문물 교류에도 힘썼다. 왜국에서는 이때부터 중국 남북조의 불교 문화가 융합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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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영양왕의 이름.[2] 분토는 똥밭을 의미하는데 진짜 똥밭일 리는 없고 깡촌을 의미하는 거다. 즉 영양왕 자신을 낮춘 것... 이긴 한데 다른 의미로 해석하면 깡촌이나 다스리는 왕에게 패배했다는 간접 디스이기도 한 셈(...)[3] 두건덕수문제 때 100만 대군을 일으켰으나 고구려에 패배했다 했으며, 독고황후수양제 역시 전쟁을 복기하며 당시 고경의 지략이 모자라서 고구려에 패배했다고 발언했다. 고구려-당 전쟁 때도 마찬가지로 당나라의 피해를 축소한 정황들이 많기 때문에 여러모로 의심을 사는 부분이다.[4] 신채호는 그의 저서 《조선상고사》에 현재는 남아있지 않는 《서곽잡록(西郭雜錄)》과 《대동운해(大東韻海)》 등의 기록을 인용하여 오늘날 진주 강씨의 시조로 전승되는 강이식이 임유관 전투 등에서 승전을 이뤄내어 전쟁을 이끈 주역이라는 설을 내놓기도 했다.[5] 소수림왕 대에 편찬했을 것으로 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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