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집

덤프버전 :

파일:나무위키+넘겨주기.png   관련 문서: 한국사


[ 펼치기 · 접기 ]
정사(正史)
국가 공인 역사서
삼국사기
고려사
실록(實錄)
제왕의 일대기를 다룬 편년체 기록물
고려실록
조선왕조실록
절요(節要)
방대한 정사 기록을 요약한 기록물
고려사절요
삼국사절요
통감(通鑑)
통치에 도움이 되는 기록물
동국통감
강목(綱目)
강목체를 적용한 기록물
동사강목
동국통감제강
본조편년강목
사략(史略)
본조사략
동국사략
일기(日記)
국가 공문서
승정원일기
일성록
동궁일기
각사등록
비변사등록
역사시(歷史詩)
응제시주
제왕운기
기타
삼국유사
개황력
대사편년
대사기
속무정보감
국조통기
발해고
해동고승전
동국병감
단군세가
기자지
동사
단군고기
신라고기
백제고기
해동고기
본국고기
삼한고기

기타 실전(失傳)
고구려
유기
신집
신라
국사
제왕연대력
화랑세기
백제
백제기
백제신찬
백제본기
서기
고려
구삼국사
가락국기
편년통록
왕대종족기
성원록
금경록

위서(僞書)
환단고기
규원사화
단기고사
부도지
화랑세기 박창화 필사본
격암유록
†: 실전(失傳)되어 현재는 존재하지 않음.

번외: 현대 역사서
한국사






[ 펼치기 · 접기 ]
생애 및 활동
생애 | 고구려-수 전쟁
관련 문서
신집 | 강서대묘
연호
건흥



신집(新集)
1. 소개
2. 삼국사기와의 관계


1. 소개[편집]


재위 11년(기원후 600년), 임금이 태학박사(太學博士) 이문진(李文眞)에게 옛 역사를 요약하여 다섯 권의 『신집(新集)』을 만들도록 명령하였다. 건국 초기에 처음으로 문자를 사용했을 때 어떤 사람이 사적을 기록한 1백 권의 책을 쓰고 이것을 『유기(留記)』라 하였는데, 이때에 와서 이를 정리하고 수정하였다.

十一年 春正月 遣使入隋朝貢 詔 太學博士李文眞 約古史爲新集五卷 國初始用文字時 有人記事一百卷 名曰留記 至是刪修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영양왕 11년

고구려역사서. 4세기 후반 소수림왕 때 편찬된 것으로 추정되는 <유기> 100권을 집약하여 600년(영양왕11년) 영양왕의 명으로 태학박사 이문진5권으로 편찬하였다.[1] 유기는 종래 구전되어 오던 신화, 전설 등을 고구려 건국 초기의 사실을 기록한 것으로 생각되는데, 고구려 사회가 발전함에 따라 역사인식이 높아지게 되어 건국 이후의 역사를 다시 정리해야 할 필요성이 생겼기에 신집을 편찬한 듯하다.


2. 삼국사기와의 관계[편집]


학계에서는 삼국사기 13~17권에 해당하는 고구려본기 다섯 권[2]이 신집을 일부 참고한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고구려본기를 보면 동명성왕-미천왕 사이의 기록은 등장하는 인명이나 인물들의 발언이 세세하게 언급되며, 고구려 내부사정도 잘 나온다. 이 파트 기록들의 전개 방식도 단순한 사실의 나열 수준이 아니라 각자 하나의 '이야기'가 되는 것들이 많다. 반면 동시기 백제본기나 신라본기의 경우 분량이 고구려본기의 절반에 불과하다. 하지만 미천왕 이후 고구려본기의 경우 전부 중국 기록이라 왜곡이 심한 편이다.

반면 그 후대인 고국원왕대부터 기록이 급감[3]하기 시작하며, 중국 측 역사서로부터 인용한 기록들 뿐이다. 그나마 있는 기록도 어떤 일이 언제 있었다는 내용의 간략한 사실에 대한 기록이 대부분이다. 또한 광개토대왕릉비에 있는 신라 원병 기록도 존재하지 않는데 그 이유는 중국 기록에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도 광개토대왕대[4]까지는 당대의 사료도 조금 있는 것으로 보이나 삼국사기 자체기록도 상대적으로 풍부한 편이지만, 장수왕대부터는 말 그대로 조공 기록이 다수를 차지한다고 할 정도로 내정기록이 줄어든다. 즉, 전자와 후자는 삼국사기를 편찬하던 고려시대 당시 참고한 옛 기록 원전이 다르다는 것이다.

대표적으로 영양왕 본기의 고구려-수 전쟁의 기록이나 보장왕 본기의 고구려-당 전쟁의 기록을 보면 거의 대부분이 중국사서를 옮겨온 수준이 되버린다. 연개소문은 아예 중국 사서의 피휘를 미처 감안하지 못하고[5] 천개소문으로 강제개명되는 수준(...)이며[6] 전투와 관련된 기록들도 대부분 중국측 규모나 피해는 상세하나 고구려는 정확한 규모가 명시되지 않는다.

학계에서는 그 이유로 신집의 기록이 고구려본기에 반영된 점을 들고 있는데, 이는 신집의 원사료인 유기가 소수림왕대에 형성된 것이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신집이 5권이라는 것과 고구려본기 초반 5권이 동명왕-미천왕 시기의 내용을 실었다는 사실로도 이는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다만 동명성왕광개토대왕 사이의 세손차이[7] 같이 오류가 있는 부분이 존재하기 때문에 완벽하게 반영된 것은 아닌듯 하다.[8]

파일: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__CC.pn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2023-12-06 05:53:54에 나무위키 신집 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

[1] 100권이 5권이 됐다는 것에 의문을 품기 마련인데, 유기는 목간, 즉 간독이고 신집은 종이책이 아니겠느냐라는 설이 있다. 게다가 '유기' 라는 것이 역사책이 아니라 한자 그대로 그냥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남겨진 기록'의 모음을 의미한다면, 이것저것 가지치기를 하는 과정에서 내용은 크게 줄어들었을 것이다.[2] 참고로 고구려본기는 총 10권이며 이중 보장왕 본기가 2권 분량이다.[3] 정확히는 미천왕 원년 10월부터 기록이 급감한다.[4] 물론 삼국사기 편찬 당시 광개토대왕릉비의 존재가 잊힌 상태라 신라를 구원한 사실 등이 빠지긴 했다.[5] 당나라 시대 사서들은 자기들 황제 이연의 이름 연자를 피휘하다보니 천개소문으로 적었는데 당나라도 멸망하고 이 피휘를 지킬 필요가 없어진 고려시대의 삼국사기 편찬자들이 옛날 당나라 사서를 참고하다가 이게 피휘로 바꿔적은것인 줄 모르고 삼국사기에도 그냥 천개소문이라고 쓴 것이다.[6] '연개소문'이라는 실제 이름이 밝혀진 것은 조선 후기에나 이르러서이다.[7] 삼국사기에는 광개토대왕이 동명성왕의 13세손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광개토대왕비에는 17세손으로 기록되어 있다. 물론 17세손을 직계가 아닌 (3대 대주류왕으로부터의) 왕계로 해석하는 견해도 있긴 하지만.[8] 이부분에서는 세손이 혈족을 뜻하는게 아니라 왕계를 뜻하는 것이라고 풀이하는 학자들도 있다. 실제로 대무신왕(3대)으로부터 17대 후의 왕이 광개토왕(19대)이기 때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