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전(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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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역사
2.1. 고대
2.2. 고려
2.3. 조선
2.3.1. 구조
2.3.2. 몰락
2.4. 근현대




1. 개요[편집]


우리민족의 역사 내에서 중앙정부가 수도나 주요한 도시에 설치한 시장을 통칭하는 단어로서 전근대까지 존재했던 국영 상점을 가리킨다.


2. 역사[편집]



2.1. 고대[편집]


우리 역사 속에서 시장이라고 부를 만한 곳이 언제부터 형성되었는지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다. 하지만 물물교환의 형태의 거래는 구석기시대부터 있었을 것이었으므로 시장이라는 것 자체는 역사에 처음 기록되었던 것보다 훨씬 오래전부터 존재했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고대시대, 시장형성 초기의 원시형태의 시장은 상설화되지 않았었고, 이러한 불규칙적인 시장형성은 세금을 걷거나 인구가 많은 주요 도시들에 물자를 유통하거나 국가가 필요한 물품을 조달하는데 용이하지 못했다.[1] 그래서 국가가 중앙집권 국가가 등장하면 이러한 유통과 조달을 위해서 국가가 인위적으로 시장을 형성하고는 했다.

우리역사에서 국가가 시장을 설치한 최초로 설치한 때는 삼국시대다. 중앙집권을 이룩하는 데 성공한 고구려, 백제, 신라 각 국에 국영 시장이 있었다는 관련 자료들이 존재한다.

  • 고구려: 수도인 평양성(平壤城)을 비롯해 국내성(國內城)과 한성(漢城) 등 이른바 3경 제도(三京制度)를 가지고 있었는데, 이 곳들에 시장이 조성되어 있었다.
  • 백제: 관련 자료가 많이 없어 구체적인 시장의 존재 여부에 관한 자료는 없으나 백제의 외관 10부(外官十部) 중 도시를 관리하는 도시부(都市部)라는 관청의 기능에 시장의 설치 및 폐지 문제, 상품 판매 규정, 가격 조절, 시장 질서 유지, 상인들 간의 분쟁 해결, 부정 거래 단속 등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이 기록을 보아 추측하건데, 백제의 도시에도 상업시설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 신라: 통일 이전부터 수도 경주을 중심으로 여러 상업이 발전하였는데, ≪삼국사기≫ 권2 신라본기 제3 소지왕조에는 “소지왕 12년(490) 처음으로 서울에 저자(市)[2]를 열어 각 지방의 상품을 유통시켰다.”는 기록이 있다. 5세기 말엽에 설치된 경주 시내의 시전은 6세기 초엽에 들어서면서 확대되어, 509년(지증왕 10)에 동시(東市)가 설치되었고, 삼국통일 후 695년(효소왕 4)에는 서시(西市) 및 남시(南市) 등이 설치되었다. 그리고 동시·서시·남시에는 각각 시전(市典)이라는 기관을 두어 시전(市廛)들을 감독·관리하게 했는데, 주로 상인의 감독, 물가 조절, 도량형 감독, 상인들 사이의 분쟁 해결, 정부 수요품 조달 등의 업무를 관장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고대의 시장은 물물교환 혹은 귀금속을 중심으로한 현물거래가 주를 이뤘다. 신라 시기의 상업은 수도 경주를 중심으로 치우치게 발전했고, 대부분 귀족들의 사치재를 구하기 위한 수입 위주의 거래를 했으며 시전 역시 이와 같은 양상을 띄었다.


2.2. 고려[편집]


고려상업을 중시한 나라였고 도시건설 사업에서부터 시장을 형성하는 것을 기본 원칙으로 넣었다. 또한 비록 고려 고유의 화폐는 아니었더라도 고려의 시장에서는 화폐거래가 가능했다. 덕분에 시장은 고려 곳곳에 설치되었으며, 개성의 시전은 크게 증흥되었다.

고려의 시전 설치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919년(태조 2), 태조 왕건 시기에 개성을 수도로 정하고 수도로서 갖추어야 할 여러 시설을 마련할 때, 시전 건물도 함께 지었다는 기록이다. 이 때에 만들어진 시전 건물의 규모나 위치에 대한 기록은 자세하지 않다. 그러나 고려의 경제가 발전하면서 계속 발전하는 기록이 존재한다.

1208년(희종 4)에는 대시(大市)를 개축하였다. 이것은 개성의 광화문(廣化門)에서 십자가(十字街)에 이르는 길의 좌우변에 1,008개의 기둥이 있는 연립 장랑(連立長廊)이었다. 고려 조정에서는 도내(都內) 중심부에 길게 건물을 짓고 그것을 일정한 넓이로 칸을 나눈 다음 상인들에게 빌려주어 장사를 하게 하였다. 그리고 여기에서 개성 시민들의 생활 필수품이나 관청의 수요품을 조달하게 하였다.

고려의 상인들은 시전 건물을 임대해서 쓰는 대신 정부에 일정한 액수의 세금을 냈다. ≪고려도경 高麗圖經≫에 의하면, 시전 건물의 높은 부분에 ‘영통(永通)’·‘광덕(廣德)’·‘통상(通商)’ 등의 상호(商號)를 적은 간판이 있었다고 하는데, 현대의 시장과 별 차이가 없어 보인다.

고려시대 시전의 보호, 감독 기관으로는 경시서(京市署)가 있어 물가 조절과 시정 감독을 담당하였다. 특히 상행위의 감독 뿐만 아니라 상품의 종류에 대해서도 통제를 가해, 관에서 허락한 물품 이외에는 임의로 자유매매를 할 수 없도록 하였다.

이렇게 현대의 시각에서 비춰봐도 크게 증흥했다고 볼 수 있던 고려의 시장은 원나라의 쇠락과 함께 국제 무역 체계가 붕괴하면서 함께 사라졌다.


2.3. 조선[편집]


고려가 멸망하고 조선이 건국될 쯤 부터는 전국에서 시장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고려는 수출중심의 경제를 가지고 있었는데, 원나라가 멸망하면서 국제 유통망이 망가지기 시작했을 뿐더러, 명나라는 해금정책을 시행하고 조공무역을 강화하고 사무역을 파토내는 등 시장경제를 파괴하는데 앞장섰기 때문이다. 그리고 조선을 건국한 성리학자들 역시 천하지대농본이라는 농본주의적인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상업을 천시하고 탄압했다. 사농공상이라는 신분질서가 퍼진 것도 조선의 성리학자들 때문이었다.

하지만 조선의 성리학자들도 유통망을 필요로 했기 때문에 시전을 설치한다. 조선이 한성으로 천도하기 위해 한성을 조성할 때[3], 개성의 시전을 본따서 시전을 만들었다.

조선 조정에서도 고려와 같이 특정 장소를 상인들에게 빌려주고 그 대가로 세금을 받았다. 《경국대전》에는 시전 상인들이 건물 1칸마다 봄·가을에 각각 저화(楮貨) 20장씩을 납부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그리고 바로 이와 같은 세금이 나중에는 상행위에 대한 과세를 넘어 국역 부담으로 변화하면서 국영 상점인 한양의 시전은 육의전(六矣廛)으로 발전하게 된다.[4] 이 육의전은 노론과 결탁하면서 국가에 특권을 요구했는데, 그것이 금난전권이다.


2.3.1. 구조[편집]


1399년에 종로(鐘路)를 중심으로 혜정교로부터 창덕궁 입구에 이르는 길 양편에 행랑시전(行廊市廛) 80여 칸을 지을 계획을 처음으로 공표했는데, 1차 왕자의 난과 한성천도에 대한 거부감으로 실행되지 못했다. 그러다가 한양을 천도하는 것이 확실시 되면서 한성에 시전을 설치하는 것도 진행되었다. 1410년(태종 10) 2월 먼저 시전의 지역적 경계를 정해, 대시는 장통방(長通坊 : 현재 중구 남대문로 1가), 미곡과 잡물은 동부 연화동(蓮花洞) 입구·남부 훈도동(현재 충무로 2가에서 을지로 2가 일대)·서부 혜정교·북부 안국방(현재 종로구 화동)·중부 광통교(현재 중구 다동에서 을지로 1가 일대), 소와 말 등은 장통방 하천 변에서 각각 매매하도록 하였다.

조선에서는 감독 기관으로서는 경시감(京市監)을 설치해 시내 상업 교역에 관한 물가 조절, 상세(商稅) 징수 등을 주관하게 하고, 별도로 청제감(淸齊監)을 설치해 시가의 청결을 감독하게 하였다. 이와 같은 계획에 따라 1412년 2월부터는 시전의 건축 공사가 시작되었다. 이 공사는 전후 네 차례에 걸쳐 이루어졌다.

  • 제1차는 그 해 2월부터 4월까지로 혜정교부터 창덕궁 입구에 이르는 양편 길에 800여 칸의 행랑이 완성되었다.
  • 제2차 공사는 5월에 진행되었으며 대궐문에서 정선방(貞善坊 : 현재 종로구 권농동 일대) 동구에까지 420여 칸의 행랑이 건조되었다.
  • 제3차는 7월부터 다음 해인 1413년 5월까지로, 종루(鐘樓)로부터 서북쪽으로 경복궁까지와, 창덕궁으로부터 종묘 앞 누문까지, 그리고 숭례문 부근 등에 총 1,360여 칸이 완성되었다. 1414년 7월의 제4차 공사에서는 종루에서부터 남대문까지와 종묘에서부터 동대문까지의 길 양쪽에 시전 건물이 조성되었다.


2.3.2. 몰락[편집]


상평통보가 등장하고 우리 민족에 화폐경제가 자리잡으면서 국영 시장인 시전은 몰락하기 시작한다. 상평통보가 보급되기 시작하자, 사람들은 돈을 벌기 위해서 상업에 뛰어들기 시작했고, 지금의 재래시장에 해당하는 민간시장인 난전(亂廛)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뿐만 아니라 공납이 폐지되고 대동법이 도입되자. 중앙정부에서도 시장을 통해 물건을 매입하기 시작하였고, 때마침 조선에서도 증흥하기 시작했던 상업자본들이 대상(大商)을 차려서 정부랑 직접 거래했기 때문에 육의전은 그 쓸모를 상실하기 시작했다.

정조 시기인 1791년 시전 상인만이 장사할 수 있는 특권인 금난전권을 폐지한 신해통공(辛亥通共)은 한성 시전의 중심인 육의전의 몰락과 같았다. 더이상 국가는 난전을 통제하지 않았고, 난전이 재래시장으로 발전하는 동안 주요 도시에 설치했던 시전들은 시대의 변화를 적응하지 못하고 몰락하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전은 국가에서 진행하는 거래에서 중심 역할을 하였기 때문에 명맥을 유지했다.


2.4. 근현대[편집]


계속해서 몰락의 길을 걷던 시전의 숨통을 끊기 시작한 것은 개화였다. 일본제국청나라도 조선에 우위를 점할 때마다 조선조정에 조선의 시장을 개방할 것을 요구했다. 청나라는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으로 최초로 조선의 내륙무역권을 가져갔고, 계속 조선의 항구를 개항시키던 일본도 조일통상장정으로 내륙무역권을 얻었다. 이를 통해 우수한 외국 상품을 가지고 들어오는 일본과 청나라의 상인들을 시전이 견딜 재간이 없었다. 조선의 상업자본도 외세의 상업자본으로 부터 저항하기 위하여 결집했으나 중앙정부의 비호만 믿고 살아가던 시전 상인들은 조선의 상업자본과도 협력하지 않고 정치력을 행세하여 그들의 목숨을 연명한다.

개화 이전 노론과 결탁했던 시전을 개화파들이 좋게 보지 않았는데, 조선의 정치세력이 개화의 여부가 아닌 개화방식으로 싸우는 온전한 개화기가 되자 결국 국가에서조차 시전을 유지할 필요가 없음을 느끼게 되었다. 1894년 갑오개혁 때, 조선은 공식적으로 조선의 모든 시전을 폐지했다.

조선의 시전이 폐지된 이후, 조선의 상업자본도 1904년에 일본제국에 의해 화폐정리사업이라는 철퇴를 맞고 몰락했다. 조선 고유의 민족자본이란 것은 사실상 존재하지 않게 되었으며, 경제주권을 잃은 대한제국은 결국 힘없이 무너지게 되었다. 일제강점기 동안 조선의 유통망은 일본자본에 의해서 구성되고 운영되었으며, 조선의 난전이 있던 곳과 시전이 있던 곳에는 상권이 형성되었으며, 난전이 있던 일부 구역은 재래시장으로 발전했다.

우리민족이 해방된 이후에도 시전은 다시 설치되지 않았다. 북한공산주의 배급경제를 선택했기 때문에 시장을 없앴으며, 남한에서는 자유주의자본주의을 선택했기 때문에 국영 시장을 만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만 고난의 행군 이후 북한에 현대판 난전이라고 할 수 있는 장마당이 생겼으며, 북한이 시장을 통제하기 위해서 현대판 시전인 국영 시장을 건립하고 있기 때문에, 아이러니하게도 전근대까지 존재했던 우리 민족 국가 특유의 국영시장을 공산주의 국가(?)인 북한에서 부활한 격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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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특히 우리민족 내에서 우리나라 고유의 화폐가 안정적으로 정착한 것은 조선시대 상평통보가 생긴 이후다. 화폐가 없으면 현물거래가 주가 되고, 현물거래가 주가 되면 거래가 용이하지 않다.[2] 저자는 상설적인 시장을 가리킨다.[3] 한성은 계획도시였다.[4] 이 육의전은 이두 식으로 '육주비전'이라고도 읽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