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조(조선)/즉위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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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출생
2. 대군 시절
4. 야심만만한 왕자
5. 문종 독살설?



1. 출생[편집]


아버지 세종이 충녕대군이었던 시절 차남으로 태어났다.


2. 대군 시절[편집]


태어난 이듬해인 1418년에 세종이 왕위에 즉위하였지만 5세 무렵까지 사저에서 자랐다. 이유는 정확히 전해지지 않으나, 세종의 즉위 이후 잇따른 국상 등으로 적절한 시기를 잡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형인 문종은 일찍이 입궐했고, 바로 밑의 동생인 안평대군부터는 세종의 즉위 이후 출생하여 태어날 때부터 궐에서 자랐기에 그와 형제들의 가장 큰 차이를 사저에서 지낸 기간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어린 시절 부모 곁에서 떨어져 뛰놀며 자란 것이 그의 탁월한 체력과 운동 신경, 자유분방한 성품에 영향을 주었다는 것.

입궐한 후 1428년 대군에 봉작되었고, 진평대군(晉平大君)[1] → 함평대군[2] → 진양대군[3]으로 여러 차례 바뀌었지만 최종적으로 받은 군호는 수양대군[4]. 그래서 현대 한국인들 사이에서도 수양대군이라 흔히 불리지만, 왕자 시절은 진양대군으로 불린 시절이 1433년 이래 12년간으로 제일 길었다. 수양으로 군호가 바뀐 건 한글 반포 1년 전인 1445년(세종 27년). 그리고 왕위에 오를 때까지 10년 동안, 수양대군으로 불리게 된다. 휘나 묘호보다도 왕자 시절의 군호가 더 유명한 임금.


3. 모범생 형예술가 동생 사이에서[편집]


성군에게서 나온 무인 기질의 문인 아들로 평가받지만 세조는 문(文)에도 뛰어났다. 활쏘기를 매우 좋아했음에도 '책을 다 읽기 전에는 활을 잡지 않겠다'라며 책을 읽었다고 한다. 다만 아버지이 워낙 걸출해서 상대적으로 가려질 수밖에 없었다.

세종의 아들들 중 유일하게 무인적인 인물이라고 보는 시각도 있지만, 허약하기만 한 것으로 알려진 문종도 무예에 뛰어났고 세종의 4남인 임영대군과 6남 금성대군도 무인 기질의 인물이었으며, 특히 금성대군은 수양대군과 함께 마상 무예를 시연한 기록이 남아 있을 정도다. 문무겸전의 인물이었던 건 분명하다.

피리를 상당히 잘 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귀신이 궁궐에 나타나 피리를 불었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때 문종과 같이 있던 수양대군이 "이 아우(수양대군 본인)의 피리 실력이 조선에서 제일이라 자부함에도 저리 잘 불지는 못합니다. 이는 필히 귀신이 부르고 있음입니다." 라고 했다고 한다. 단순한 자뻑은 아니었는지, 악기를 연주하자 세종이 크게 칭찬했다는 실록의 내용도 있다.#

다만 수양의 재능을 곧이 곧대로 믿기도 어려운게 사실 수양의 재능을 칭찬하는 기사는 대부분 세조 실록에 나와있는 기록으로 이 기록을 믿는다면 13살짜리 애가 노루를 7마리나 잡는 등[5]수양님 축지법 쓰신다. 상식선에서 믿기 어려운 기록들이 너무 많다. 더불어 그 기록에 실록에서 가장 과정이 많은 총서부분에 그 실록중에서도 가장 왜곡이 많다는 세조실록이라는 것도 문제다. 오히려 세조실록 기록과는 반대로 세종실록에는 도리평에서 낙마했다는 기록이 나오는 등[6] 세조실록에 나오는데로 엄청나게 무예에 뛰어났다고 보기는 사실 힘들다.

그러나 능력 측면에서는 동생 안평대군도 재주가 뛰어나서 수양대군과 자웅을 겨룰 정도였고, 형 문종의 경우 아버지에 버금가는 완전체로 측우기를 설계한데다, 화포 전문가에 직접 진법을 만들 정도로 상당한 군사 전문가였다. 세종대왕이 와병 중일 때는 대리청정을 맡아서 국정을 잘 처리했을 뿐 아니라 세종 사후에도 상당한 정치력을 발휘하기도 하였다. 수양대군의 글씨도 컴퓨터로 프린트한 듯 정갈하지만 동생 안평도 워낙 명필로 유명했고 문종의 경우엔 뭇 신하들조차 그 글솜씨를 본뜨고 싶어할 정도로 명필이라 위명이 자자해서 수양은 눈에 띄지 않는다. 여러 면에서 뛰어났지만 칼질 외에는 뭘 하든 형은 한 수 위에서 놀고, 동생들도 거기에 버금갔던 안습한 둘째.

그런데도 결국은 이 사람이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꽤 존재감이 있는 입지를 굳힌 군주가 되었다. 그러나... 마키아벨리나 한비자가 극찬하는 이상적인 군주형에는 크게 미달했던 게 사실.

할아버지 태종 이방원과 같은 반열에 놓는 견해가 있으나, 몇 가지 면만 봐도 이런 견해는 설 자리가 없다. 최측근에게도 가차없었던 태종과는 달리 수양대군은 일방적으로 자신의 최측근 사람을 감싸고 도는 경향이 몹시 강했다. 할아버지의 방식이나 한고조 유방토사구팽에 대해 몹시도 큰 반감을 품었던 게 원인이었다지만, 바로 이런 점이 그가 큰 차원에서 국정을 운영하는 식견은 태종보다 훨씬 떨어졌음을 엿보게 하는 면. 빈틈없이 숙청을 해서 깔끔하게 후환을 제거해버렸던 할아버지와는 달리 세조는 충분히 숙청을 할 수 있었지만 공신들과의 의리를 중요시해서 연산군 시절에 사화가 터지게 하는 단초를 제공하고야 만다. 공신 숙청에 머뭇거릴만한 사정[7]은 있었다지만, 그러한 상황은 다름아닌 그가 만든 것이다. 더군다나 정난공신 중에서도 양정은 말 한 번 잘못해서 세조에게 가차없이 숙청당한 걸 생각하면 세조가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공신 숙청이 가능했다고 볼 수 있다.

너무 형제 운이 강했던(?) 것도 있다. 증조부인 태조의 자식들은 이방과(정종)와 이방원(태종) 외에는 인물감이 없었고 정종도 동생한테 양보하면서 스스로 물러났다. 조부 태종의 자식은 양녕대군이 도저히 왕도 쉴드를 못칠만큼 막장이었을 뿐더러, 충녕대군(세종)이 워낙 넘사벽이라 충녕으로 세자를 바꿔도 반대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능력있는 아들이 세자가 되는(택현론) 두 선례를 보면서 수양대군 스스로도 자신이 노력해 뛰어난 능력만 갖춘다면 한다면 세자가 될 희망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문제는 이 전제 조건부터 달성하지 못했고 하지만 시기가 너무 안맞았다. 태조나 태종은 조선 초 불안했던 정국에 맞물려 명분보다는 실력으로 나설 수 있었고, 뛰어난 리더십으로 왕이 될 자질을 충분히 갖추고 있었다. 하지만 세종 대부터 나라가 안정되고 그동안 후계자 문제 때문에 동생을 죽이고 형을 내치는 사례가 두 번이나 있었기 때문에, 세종은 자신의 대에서는 그런 비극을 끊으려고 노력했다.

거기에 시기도 시기지만 수양의 능력이 형제들 가운데 각별하게 뛰어난 것도 아니었다. 진짜 능력이 각별하게 뛰어났던 인물은 큰형 문종으로 장자이면서 세종 못지 않은 뛰어난 자질을 가지고 있었고,[8] 수양이 잘한다는 무예 부분도 화포전문가에 직접 진법을 만들정로도 상당한 군사전문가였다. 셋째 안평대군도 정무를 담당하는 과정 속에서 훌륭한 실력을 보였다. 세종의 다른 아들들도 모두 능력이 뛰어났다. 하지만 수양대군은 체격은 뛰어났지만 능력 부분에서는 형과 동생이 비해 상대적으로 밀렸다. 잘했다는 무예 부분도 개인적으로 무술을 잘했다 수준이지 지도자로서 군사를 다루는 능력은 왕자시절에는 두각을 드러낸게 없었고 왕이 된 후에도 세조의 군제개편으로 조선군이 심각하게 약체화된 사실을 생각하면 그냥 군사적으로 무능한 인물이었다. 결국 세종 가장 강력한 정통성을 가진 장자(문종)가 능력마저도 모든 부분에서 가장 뛰어나다보니 애초에 수양대군이 거기에 끼는 것은 절대 불가능했다.

이 때문에 두고두고 조선의 왕권이 신권에게 견제를 당하게 되는 큰 빌미를 제공해준 실책을 범하게 된다. 본인의 의도와는 반대로 후대에 소위 군약신강의 상황을 연출한 것.

4. 야심만만한 왕자[편집]


세종대왕이 통치하던 때에는, 왕자들 가운데 문종 다음으로 공이 많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훈민정음 창제에도 참여했고, 석가모니의 공덕을 <석보상절>을 한글로 지어 아버지에게 바치자, 세종은 감동하여 <월인천강지곡>을 짓게 되었다. 특히 무예에 무척이나 능하여 무예에 비교적 서투른 형에게 우월감을 느꼈는데, 아버지의 전례를 생각해서 자신이 세자가 되기를 은근히 바라고 있었던 듯.

이런 면모를 보여주는 왕자 시절의 대표적 일화를 소개하자면, 겨울날에 사냥을 갈 때 가벼운 여름옷 차림으로 사냥을 했다고 하며 일부러 늙고 병든 말을 골라타서 말이 지쳐서 넘어지려 하면 말 위에서 뛰어-내려 착지하는 묘기를 부왕 앞에서 일부러 보여줬다고 한다. 자기 딴에는 그것이 멋지다고 생각하고 일부러 소맷자락이 긴 옷을 입고 다니고, 양팔을 크게 휘둘러 소매를 펄럭거리며 걸어다녔다고 한다. 부왕 세종대왕은 이를 두고, "너 정도의 힘을 지닌 사람은, 마땅히 이런 옷을 입어야 될 거다." 라고 말했다고 하는데 이걸 두고 '너는 힘이 세니까, 이런 행동에 불편한 옷을 입어 스스로를 경계해야 할 것이다.'라는 뜻으로 해석하는 경우도 있다. 다만 이 기록은 세조실록의 총서에나 나오는 거고 정작 세종실록에는 낙마한 기록이 그대로 나온다.

아무튼 문무겸전의 인상이 강하기 때문인지, 세종의 뒤를 이어 문약한 문종 대신에 문무를 겸비한 세조가 즉위했어야 한다는 주장이 자주 나오는데, 사실 문종도 문약한 사람은 아니었다. 문종이 학문을 중시하고 무예 면에서 세조보다 떨어지는 것은 사실이나 그것은 개인적 무력만 보고 말한 것이지, 군사적 측면에서는 뛰어났다. 병법서인 '동국병감'이 쓰여진 건 문종의 지시였으며, '문종화차'라 불리는 화차의 개량도 문종이 이룩한 것이며 당시 중구난방이던 환도의 규격을 법으로 제정한 것 또한 문종이었다. 또한 진법에도 조예가 깊어서 고려 때의 진법을 계승하여 발전시킨 '오위진법' 또한 문종 때 완성되었다. 그리고 그 자신이 과학 기술과 화약에 박식하여 장영실의 도움을 받아 천문 기기도 제작해 보는 등 성리학에만 관심이 있던 사람은 아니었다.[9]

그리고 왕은 중앙이나 후방에서 백성과 군사들을 통치하고 지휘하는 역할이다. 학식과 정략이나 지혜가 풍부해야 하고 냉철함과 신료들의 의견을 듣고 논리적이고 이성적인 판단을 하는 자리이다. 단순히 무예가 뛰어나 적들을 쓰러뜨리는 무장형 존재가 아니다.

문종이 세종 후반기에서부터 병치레가 잦았고 결국 즉위 3년만에 사망한 것은, 당뇨가 심각하여 몸이 너무 쇠한 아버지 세종을 대신해 대리청정을 맡은데다 양친상을 너무 충실하게 지내는 등 무리했기 때문으로 원래는 병약한 인물이 아니었다. 문종이 심각한 병을 자주 앓았던 데다, 문종마저 일찍 사망을 할 경우 수렴청정을 할 왕실 웃어른(대왕대비, 대비)이 없는 상태인데 손자는 너무 어리므로 세종은 여러 신하들에게 단종을 부탁했다.

게다가, 세종대왕할아버지부터 아버지, 그리고 장유유서의 순서를 거슬러 왕이 된 자신에 이르기까지 왕위 계승의 정통성이 약한 것을 매우 걱정하여, 장자 계승을 통해서 왕위 정통성을 강화하기를 절실하게 원했다. 유교 이념을 바탕으로 건국된 조선에서 적장자 계승 원칙이 초반부터 그것도 왕실에서부터 계속 지켜지지 않는다면 조선이라는 국가의 명분과 건국 철학은 흐지부지되며 싸그리 무너지는 것이다. 세종은 왕의 입장에서 이러한 사회 질서를 우려하여 문종에게 왕위를 승계했을 가능성이 크다.

이렇게 문종은 아버지의 생각을 단지 자기 아들이 왕이 된다는 것 말고도 조선 전반에 걸쳐 중요한 일이라는 것을 이해했지만, 수양대군은 그렇지 못했기 때문에 아무래도 후계자가 되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그리고 문종도 병 치레가 잦았던 것 이외에는 국왕으로서 대단히 유능한 인물이었고, 세종의 치세 마지막은 사실상 문종의 치세에 가까울 정도로 8년간의 대리청정으로 실무 경험도 풍부했다. 의외로 간과하는게 대리청정은 단순히 업무대행 정도가 아니라 세자를 사실상 다음 왕으로 인정하는 행위에 가깝다. 대표적인 경우가 경종이고 사도세자의 경우는 예외에 가깝다. 그리고 세종의 입장에서는 명분뿐만 아니라 능력을 보더라도 굳이 세자를 갈아치울 이유가 없었다. 세종은 문종에게 대리청정을 시키면서 대리청정을 위한 첨사원을 설치하고 남면하고 앉아 조회를 받으며 1품 이하 관리는 모두 신(臣)이라 칭하도록 하였다. 나중에는 아예 군사권까지 형이 전담하는 등 수양대군이 감히 넘볼 수 없는 압도적인 정통성과 아버지의 신뢰를 받았다.

게다가 수양대군은 사극에서와는 다르게 문종이 살아있었던 시절에는 거의 존재감을 철저히 감추고 살았다. 정말 영화, 드라마에서처럼 만만해 보이는 형이었으면 조카인 단종에게 했듯이 형을 압박하여 옥좌에서 내쫓았을 것이다.

심지어 단종 즉위 때도 명나라에 사신으로 갔다올 정도로 저자세였다. 영화 관상이나 다른 여러 매체들에 나오는 것처럼 정말 오만방자하게 굴었다면 김종서와 대신들이나 단종이 수양대군을 살려둘 리는 없었다.[11] 다만, 아주 찍소리를 못낸 것은 아니어서 이미 야심을 드러내는 발언을 몇 차례 말했던 바도 있고, 도첩증이 없어서 체포된 승려를 멋대로 풀어주어 문제가 되기도 했지만, 형인 문종이나 단종의 권위에 대놓고 도전하는 미친 짓은 절대로 하지 않았다. 적어도 절대 남한테 자기 속을 보이다가 화를 자초할 만큼 어리석지도 않았고, 그 반대로 수양대군의 성격은 자신 스스로를 숨기고 교활하고 음흉했다고 봐야한다.

앞에 언급한 사건들 역시 문종이 "형으로서 야심 많은 동생의 신세 한탄 한번 들어주지 뭐..." 정도로 관대하게 넘어가준 것이 컸다. 이때 문종이 작정하고 끝장내려 했으면 수양대군은 얄짤없이 숙청당했을 것이다. 학자들 사이에서도 이러한 돌발 행동들은 자신의 세력 과시나 야심 표출보다는 적당히 사고를 쳐서 자신이 문종의 권위에 도전할 마음이 없다는 쇼로 보는 견해가 많다. 대표적인 케이스인 양녕대군의 사례와 막강한 왕권을 구축하고 있었던 문종을 보면 상당히 설득력있다.

그리고 문종이 아프다는 소식을 듣자, 울고불며 단종을 보필하는 김종서와 그외 대신들에게 우국 충정의 절대 충신인양 온갖 위선과 가식을 다 떨었는데 사실 수양대군의 충신 코스프레는 실제로 저렇게 생각했을 가능성도 높다. 문종이 오래 살아 있었더라면, 수양대군은 자신과 형 사이의 관계만 생각했으면 됐다. 말하자면 자기가 계속 나대고 다녀도 형인 문종이 오케이 하고 넘어가면 생명에는 지장이 없었다는 뜻. 이는 바로 아버지 항렬 대였던 세종과 양녕대군간의 관계를 살펴봐도 충분히 알 수 있는 문제다. 하지만 문종이 일찍 사망하면서 상황이 달라져버렸다. 가시적으로 어린 조카와 야심만만한 삼촌이라는 관계로 설정될 수 있었고 여기서 수양대군이 조금만 야심을 보여도 바로 중신들의 견제를 받는 형국으로 발전되는 상황이었다. 다른 왕자들도 마찬가지다. 문종의 아들인 단종이 첫째 아들, 즉 장자이기 때문에 세종이 장자 계승을 바랐던 것과 유교 이념을 바탕으로 생각해본다면, 그리고 그 이전에 단종이 즉위한 상황에서 함부로 야심을 드러내는 것 자체가 왕에 대한 역모인 것이다.


5. 문종 독살설?[편집]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지만, 문종의 종기 또한 수양대군이 키웠다는 말이 있다. 전순의라는 문종의 어의가 종기 치료법과는 정반대의 치료법을 쓰고, 활쏘기 등 혈기가 들끓는 활동을 삼가지 않게 하는 등으로 문종의 죽음을 재촉했다. 그래서 어의가 무능했냐고? 전혀 아니다. 그 유명한 <의방유취>의 공저자이며, 그가 지은 <식료찬요>[12]에서는 지금 보아도 매우 선진적인 온실을 설명해 놓았다.

이렇게 해서 나온 게 문종 독살설이며, 세조가 왕위에 오른 뒤 공신에 올랐다는 것 때문에 그 배후로 지목되고 있다.

조선 시대 임금의 치료를 전담하던 의관들은 왕이 사망하면 질병을 잘못 다스렸다는 죄목으로 탄핵되는 것이 관례였다. 전순의와 함께 ‘의방유취’를 저술한 노중례도 중궁과 수양대군의 질병을 잘못 다스렸다는 이유로 탄핵되어 직위가 강등되는 수모를 겪었고, 효종(1619년 ~ 1659년)이 사망하자 의관 신가규는 사형을 당했다. 그러나 단종 원년에 관례대로 의금부에서 전순의의 죄를 논했음에도 그에 대한 단죄는 그야말로 솜방망이였다.

단종 1년(1453년) 1월 4일 전순의, 조경지, 전인귀 등은 방면되고, 전순의는 내의원에 다시 출사한다. 탄핵된 지 채 7개월도 지나지 않은 때이다. 이에 불복한 신하들은 방면과 내의원 출사가 불가하다는 상소를 올렸으나 거절됐다. 그럼에도 상소가 끊이지 않아 전순의에 내린 처벌은 ‘내의원에 출사하지 말라’는 것이 고작이었다. 특히 전순의는 사형에 해당하는 죄를 지었음으로 가산을 몰수, 처자를 관노로 영속시켜야 한다는 주장도 있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오히려 단종 2년에는 고신과 과전을 돌려주기까지 했다. 전순의는 완전히 면죄부를 받은 셈이다.[13]

이후 전순의의 출세는 더욱 놀랍다. 세조 1년 계유정난과 더불어 개국공신이라 하여 원종공신 1등에 녹훈(상호군(上護君)으로 제수)되고 세조 2년에는 첨지중추원사로 임명된다. 세조 3년에는 성삼문 등 사육신이 처벌되면서 적몰된 가산(家産)을 받았으며 세조 7년에 행첨지중추원사가 되었다. 세조 10년에는 종 2품 자헌대부에 이르렀다.#

반면, 여기에 반론이 존재한다. 문종의 죽음은 독살과는 관계없고, 본인의 스트레스 + 건강 악화에 따른 결과라는 것. 역사학자 신병주 교수는 KBS 역사저널 그날 계유정난 편에서 문종 독살설을 정면으로 부인했다. 문종의 어머니인 소헌왕후 심씨가 1446년에 사망하여 삼년상을 치른 뒤, 이어 1450년에 세종이 훙하여 다시 삼년상[14]을 치른 탓에 기력이 쇠하였을 것이라고.

상주로서 장례를 치러본 사람은 알 것이다. 아무리 건강한 사람도 상주가 되어 삼일장을 치르고 난 뒤에는 온 기력이 다 쇠한다. 의료 기술이 발달하고 건강에 대한 정보와 관심이 많은 현대 사회에서 사흘만 장례를 겪어도 이런데 이걸 3년 내내 겪고 1년 후에 또 3년을 겪는다면 항우장사라도 버텨내기 쉽지 않을 것이다.

문종 역시 풍채가 좋고 무인 기질이 다분한 인물이었으나 총 6년이나 상주 노릇을 이어서 한다는 건 누구라도 몸에 무리가 갈만한 상황이었다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보면 이 양자(전순의 등의 잘못된 처방 + 6년상의 강행군)가 모두 결합한 결과일 수 있다.


6. 조카쫓아내고 즉위하다[편집]


(세종대왕이 재위하던) 왕자 시절부터 야심을 드러냈다. 만약에, 문종이 오래 살았거나 하다못해 수렴청정할 어른이라도 있었다면 정변은 꿈도 못 꾸었을 것이고 태종 때의 이화처럼 어디까지나 종친의 수장으로 정치 생명을 유지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문종의 죽음 후에는 그의 일반적인 정치 생명은 끝났다고 봐야 한다. 세조는 한명회홍윤성, 권람 등을 심복으로 삼은 후 하나의 세력을 형성했다. 그리고 못지 않게 야심찬 동생 안평대군도 하나의 세력을 형성했다. 물론 김종서황보인 등의 고명대신들도 하나의 세력이다.

이렇게 3각 구도를 이뤄서 대치하던 상황에서, 엽기적이게도 안평대군김종서황보인 등의 세력과 연합하는 사건이 벌어진다. 수양대군의 입장에서는 1대 1대 1의 구도가 이제는 1대 2의 구도가 되어버렸다. 사실 고명대신들이 실권을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좀 더 안평대군과 김종서, 황보인 세력이 더 강했다. 주류파와 대항할 종친 세력이 둘로 분열되어 있었다고 보는 것이 더 적당할지도 모른다. 이 과정에서 안평대군 측에 가까웠던 소장파 세력들이 수양대군 세력에 암중 협력하는 모습도 보이지만, 실질적 저력으로 보면 세력의 균형이 완전히 무너진 것이다. 그런 상황을 극적을 타개할 필요성이 느껴졌고, 급기야는 1453년 10월 10일에 계유정난을 일으켜서 김종서, 황보인 등을 척살하고[15] 동생 안평대군을 역적으로 몰아서 죽인 후에 정권을 잡았으며, 2년 뒤인 1455년 윤6월에 단종에게 선위받는 형식을 취해 조선 제7대 국왕으로 즉위했다.

일각에서는 "세력에서 뒤쳐져서 어쩔 수가 없었다."라고 너무 궁지에 몰려서 어쩔 수 없이 거사를 일으킨 것이라고 포장하지만 근거없는 얘기다. 할아버지 태종이 피바람을 일으키면서까지 금지한 사병을 기르고, 한명회 등을 심복으로 삼아 일을 추진한 것을 생각해보면 궁지에 몰렸다고 보기는 힘들다.

그 이후, 사육신의 단종 복위 운동과 5번째 동생 금성대군이 꾀한 단종 복위 운동이 있었으나, 결국 이마저도 실패로 돌아갔고 마침내 단종도 죽음을 맞게 되어서 그의 권위는 더욱 공고해졌다. 아무리 능력있는 왕이었다고 하더라도, 피로 얼룩진 군주라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조선사에서 친족을 가장 많이 죽였던 왕이다. 기본적으로 이복 형제들과 조카는 물론 동복 형제들까지도 죽였다. 폭군 연산군과도 비교가 안 된다. 광해군이 이복 동생 영창대군을 죽이고 계모 인목대비를 폐했다고 인조반정이 발생한 것을 생각해보면 비교가 안된다.

재미있는 사실은, 원래 사육신 중 한 사람인 성삼문과 꽤 친했다는 사실이다. 계유정난이 일어났을 때, 성삼문은 정난공신으로 3등 공신이 되었다. 여기에 더해서 수충정난공신으로 사간원 좌사간 대부에 임명된다. 이 때는 1등공신 12명, 2등공신 11명, 3등공신 20명이다. 이렇게 43명이다. 또 세조가 즉위하는 좌익공신에도 3등 공신에 이름이 올랐다. 떨거지들이 포함된 경우에는 머리수를 튀기기도 하지만,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될 정도로 가지치기를 한 경우에는 1등 7명, 2등 12명, 3등 25명 해서 44명밖에 안된다. 어느 정도냐면 정인지가 2등공신이고, 정창손과 이징석 등이 3등공신이다.

성삼문이 단종의 입지를 보호할 수 있다고 생각해서 수양대군을 지지했다는 말도 있지만, 같은 사육신 중 한 명인 유성원이 공신 책봉문을 쓰라는 어명이 떨어지자 숨어있다가 들키는 바람에 억지로 써야했다는 야사(남효온의 소설 육신전에 수록된 내용) 등을 보아 당시 집현전 학사들을 비롯한 '소장파'들을 공범으로 만들기 위한 술책 중 하나였을 가능성이 크다.실제로 즉위 후에 또 한 번 공신을 책봉했는데 3등공신이 2천명 이상이다. 거기다가 박팽년도 매우 높이 평가해서 그를 회유하려고 많이 노력했다지만... 그 결과는 모두들 아는대로...
[1] 경남 진주(晉州)에서 따왔다[2] 전남 함평에서 따왔다고는 하나, 개봉 4일만에 함평현과 혼동될 것이라는 이유로 진양으로 고쳤다. 그럼 뭐하러 따와.[3] 역시 경남 진주에서 따왔다.[4] 황해도 해주의 옛 지명이 수양부(首陽府)이다. 실제로 해주의 진산(鎭山)도 여기서 이름을 딴 '수양산'(높이 899m). 이전 판에서는 형의 왕좌를 넘보지 말고 종친들의 우두머리가 되라는 뜻에서 '머리 수' 자를 붙였다는 설이 있다는 설명이 있었지만, 명백히 잘못된 설명이며 일종의 야사나 끼워맞추기 말에 불과하다. 조선을 비롯한 동양권에서는 왕자들의 명칭을 봉건제에 근거하여 분봉하는 형식으로 지역명으로 짓는 것이 일반적인 관례였다. 예외는 청대나 조선의 경우 법제가 완비되지 않은 태조, 태종 대에 미칭으로 지었으며, 법제가 완성되는 세종 이후부터는 예외없이 지역명으로 왕자들의 명칭을 지었다.[5] http://sillok.history.go.kr/id/kga_000002[6] http://sillok.history.go.kr/id/kda_12403015_001[7] 후계자들이 죄다 어렸기 때문에 제2의 단종을 경계할 수밖에 없었던 것도 있었다. 외척을 경계한 태종에게는 "형제와 자식들"이라는 대안이 있었는데, 세조는 사실 그 모든 대안을 박살내고 진행했기 때문에 정난의 공신들과 동맹을 맺을 수밖에 없었다. 한명회한확을 외척으로 불러들인 것도 그런 이유다.[8] 세종이 재위 후반기에 자주 병상에 누웠을 때 문종 스스로가 대리청정을 하기도 했다. 경험까지 충분한 마당에 세자를 바꿀 명분이 전혀 없어졌다.[9] 조선 초기는 국정 운영을 성리학을 중심으로 운영하였으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행정 체계나 정치에 한정되었으며, '잡학'이나 '격물학'이라 불리는 과학 분야에도 상당한 발전을 이룩했다. 과학과 기타 학문이 천시되고 성리학의 교조화가 이루어지던 시기는 임진왜란 이후의 17세기부터다. 흔히 '씹선비' 로 대표되는 선비 이미지가 바로 17세기 이후의 선비의 모습이다.[10] 명나라 황족. 조카인 선덕제를 쫓아내고 명나라의 황제로 즉위하기 위해 쿠데타을 일으켰다가 실패하고 자신뿐만 아니라 자기 아들들도 모조리 처형되었다.[11] 이렇게 되면 성종부터 순종까지의 군주들은 역사에 군주로 기록되기는커녕 애초에 이 세상에 존재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수양대군 1명만 죽이는 선에서 끝나지 않고 아예 수양대군의 자식들까지 죽여서 대를 끊어놓는, 그야말로 조선판 주고후[10]로 전락하는 상황이 일어날 수도 있었을 것이다.[12] 식이요법으로 여러가지 질병을 다스리는 방법을 알려준다. 개나 호랑이에게 물렸을 때의 식이요법도 있다.[13] 하지만 임금이 사망할 경우 어의들이 받는 처벌은 '임금이 죽는 것을 막지 못했다'는 상징적인 의미의 관례적 조치였다. 당장 어의는 전국에서 가장 뛰어난 의술을 가진 사람이 선발되는데, 왕이 죽었다고 내쳐지는 것은 여러모로 손해였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조선 왕조 역대 왕들이 사망했을 때, 어의들은 관례적인 처벌만 받고 다시 업무에 복귀했다. 다만 정조 등 석연치 않게 사망한 군주들을 담당한 어의들 역시 이러한 관례에 따라 가벼운 처벌을 받은 것을 두고 의심을 가지는 것 뿐이다.[14] 영화감독 이해영은 이 사실에 대해 '군대를 연이어 두 번 다녀온 셈'이라고 표현했다.[15] 그 후폭풍으로, 이징옥의 발악적인 반란도 겪었다. 이 사건이 이징옥의 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