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실 B. 드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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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미국의 영화 감독. <어리석은 자의 낙원>, <폭군 네로>, <평원아>, <대평원>, <정복되지 않는 사람들>, <지상 최대의 쇼>, <십계>, <삼손과 데릴라> 등의 대작 영화들로 유명하다.
골든글로브 시상식에 그에 이름을 딴 '세실 B. 드밀상'이라는 공로상이 있다. 그만큼 할리우드에서 상징하는 바가 큰 감독이다. 또 당연히 세실 B. 드밀 본인이 이 공로상의 첫 번째 수상자였다.[1][2]
미국 영화계에서는 데이비드 와크 그리피스, 토머스 H. 아인스[3] 와 함께 무성 영화 시절 데뷔한 흥행 감독으로 명성이 높다. 또한 스타메이커로도 유명한 감독이었다. 그리피스나 아인스와는 달리[4] 유성 영화로의 전환 역시 성공적이었기 때문에 명성이 대단했던 인물이다. 다만 드밀의 전성기 시절이 한국에서는 일제의 식민지 시절이었기에, 전후에 발표한 <십계>와 <삼손과 데릴라>만 유명하다. 그리고 아래의 수구적이고 비호감적인 행적과 더불어 몇몇 영화적 허술함 때문에, 사후에는 지지가 줄어든 감이 있다.[5] 드밀의 사후 50년이 지난 2010년대에 와서야 조금 재평가된 편이다.
비행기 조종사 자격증을 가지고 있었던 인물이며, 머큐리 에비에이션이라는 미국 최초의 상업 항공사를 설립하기도 했다.
2. 사생활[편집]
집안이 명문가로 유명하다. 아버지는 17세기때의 네덜란드 이민자 출신 사업가였으며, 부계 가문 자체가 정치인 등 다양한 사람들을 배출한 집안이었다. 어머니는 유대계 혈통의 영국인이었다.
본인의 보수주의와 반대로 상당히 사생활이 엉망진창이었던걸로 유명하다. 아내가 있음에도 마음에 드는 여자에게 집적거리는 등 호색한으로 유명한데다가,[6] 항상 사람들이 떠받들어주길 원해서 시종[7] 비스무리한게 있었으며, 수틀리면 가지고 있던 총을 꺼내 마구잡이로 쏴댔다고 한다. 대단한 흥행 감독에 제작자였기에 매장당하지 않았던 것이다. 아래에 소개된 일화에서 존 포드가 드밀에게 대들 수 있었던 이유도, 영화업계에서 압도적인 거장 감독의 지위와 권위를 가졌던 존 포드 정도나 돼야 그나마 그에게 대들만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드밀이 만든 <마담 사탄>은 그런 드밀의 수구성과 난잡한 사생활 간의 분열증적인 모습을 잘 드러낸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 때문에 활동 당시에도 까빠가 많았던 감독이다. 존 휴스턴이 대표적인 드밀 까로 유명하다.
딸 캐서린[8] 은 안소니 퀸과 결혼했다가 이혼했다.
3. 존 포드와의 일화[편집]
미국에서 매카시즘이 불어닥칠 때, 할리우드 또한 그 광풍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당시 미국감독협회는 조셉 L. 맨키위즈가 회장이었는데, 그는 일부로부터 친공산주의자라고 비판을 받았다. 이를 주도한 인물이 세실 B. 드밀이었다.
1950년 10월 22일 베벌리힐스 호텔에서 드밀과 그의 추종자들은 감독협회에서 무려 4시간에 걸친 일장연설을 하며 매카시즘 전파의 선봉에 섰다. 드밀은 협회의 모든 감독들은 정부에 ‘충성맹세’를 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분위기를 압도했다. 이들의 기나긴 연설이 끝나고, 협회엔 침묵이 감돌았다.
이때 존 포드가 단상에 올라 이렇게 말했다.
"My name’s John Ford. I make Westerns. I don’t think there’s anyone in this room who knows more about what the American public wants than Cecil B. DeMille — and he certainly knows how to give it to them…. "
미국인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이 방에서 세실 B. 드밀보다 더 잘 아는 사람은 없다고 생각하오. 그리고 드밀은 그것을 미국인들에게 어떻게 줄 것인지도 분명히 알고 있을 거요.
그리고 다음 순간 포드는 드밀을 바라보며 이렇게 말했다.
"But I don’t like you, C.B. I don’t like what you stand for and I don’t like what you’ve been saying here tonight."
"하지만 나는 당신이 싫소, C.B. 당신의 성향도, 당신이 오늘 밤에 여기서 한 얘기도 싫소."
당시 레드 컴플렉스에 찌들 대로 찌들어 있었던 미국 사회의 분위기 속에서 매카시즘이라는 일방적인 애국주의에 많은 감독들이 주눅이 들어 있을 때, 정치적으론 보수였지만, 상식을 벗어난 사상인 매카시즘을 극도로 혐오했던 포드의 용기는 팽팽한 긴장의 얼음판을 깨 버렸다. 그의 발언 이후 분위기가 역전된 것은 물론이다.#
4. 작품[편집]
- <왕중왕> (1927): 무성 영화
- <십계> (1923): 무성 영화
- <다이너마이트> (1929)
- <클레오파트라> (1934)
- <대평원> (1939)
- <정복되지 않는 사람들> (1947)
- <삼손과 데릴라> (1949)
- <지상 최대의 쇼> (1952)
- <십계> (1956): 자신의 1923년작을 리메이크했다. 마지막 연출작이기도 하다.
5. 여담[편집]
- 자신의 대표작 중 하나인 <지상 최대의 쇼>가 먼 훗날 영화 <파벨만스>에서 주인공이 인생에서 처음 접한 영화, 영화계에 입문하게 된 계기가 된 영화로 오프닝에 등장한다. <파벨만스>는 거장 스티븐 스필버그의 자전적인 영화인만큼 당연히 실제로 스필버그가 생애 처음 본 영화 역시 <지상 최대의 쇼>라고 한다.#
- 젊은 날 토머스 에디슨과 반목이 심했다. 에디슨은 자신의 돈을 떼 먹히거나 자신의 지적재산권이 침해당하는 걸 극도로 싫어했던 사람이다. 토머스 에디슨 항목에 잘 나와있다. 그런 에디슨이 세운 영화 특허권 회사 'The Edison Trust'는 세실 B. 드밀이 찍은 영화에 쓰인 영화 기술들에 대한 로열티를 요구하며 그에게 압박을 가했고, 이 과정에서 세실 B. 드밀은 두 차례나 총격을 입기도 했다.## 세실 B. 드밀은 이후 항시 총을 휴대하고 다녔으며, 길들인 늑대를 경비견으로 집에 두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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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사실 골든글로브 시상식은 1944년부터 시작된 전통있는 시상식이지만, 2022년까지 흑인 회원은 단 한 명도 없거나, 엄연히 미국 영화 <미나리(영화)>를 외국어영화상 후보에 떡하니 올려놓는 등 논란이 많은 시상식이다.[2] 달리 말하면 이런 골든글로브상을 수상했다는 의미는 그만큼 예술적으로 인정받았단 의미이기도 하다(...).[3] <시민 케인>의 실존 인물인 윌리엄 랜돌프 허스트의 요트에서 의문사한 그 사람 맞다. 다만 이 사건은 세실 B. 드밀과는 무관한 사건이다.[4] 그리피스는 영화사의 높은 분들을 적으로 만든 상태에서 전환에 실패해 유성 영화 시절엔 처참하게 몰락했고, 아인스는 찰리 채플린과 매리언 데이비스, 윌리엄 랜돌프 허스트가 연관된 다소 수상쩍은 의문사로 (공식적인 사인은 심장마비이나, 다른 증인들이 시체가 피투성이로 실려 나왔다는 증언을 하면서 논란이 일었다. 자세한 설명은 찰리 채플린#정치/사회적 논쟁거리 항목 참조.) 전환도 못하고 비명횡사해버렸다. 루머를 간단히 정리하자면 윌리엄 랜돌프 허스트가 자신의 요트에서 찰리 채플린이 자신의 내연녀 매리언 데이비스와 불륜을 저지르는 걸 우연히 목격하고 총을 쐈는데 빗나가 애꿎은 토머스 H. 아인스가 맞았다고 한다.(...)[5] 특히 영화 비평에 격변을 일으킨 누벨바그 멤버들은 드밀에게 그다지 호의적이지 않았다.[6] 영어로 성상납을 뜻하는 '캐스팅 카우치' 짓을 문자 그대로 했던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7] 전속 바이올리니스트에 의자 준비해주는 사람까지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8] 친딸이 아니라 입양한 자녀이다.#[9] 당시에는 서부극이 낡은 장르 취급을 받았으니, 그리 자랑스러운 자기 소개는 아니었다. 즉 분위기를 뒤집기 위해, 일부러 삐딱하게 자기 소개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