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 르누아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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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르누아르의 주요 수상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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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르누아르
Jean Renoir


파일:external/cdn-1.vivalascuola.it/il-cinema-di-jean-renoir_e79df0b72a30e2c879215dac3c160fa8.jpg

출생
1894년 9월 15일
프랑스 파리
사망
1979년 2월 12일 (향년 84세)
미국 캘리포니아 주 베벌리힐스
직업
영화감독, 각본가, 프로듀서, 작가
활동
1924년 ~ 1978년
부모
아버지 피에르오귀스트 르누아르
어머니 알린 샤리고
배우자
카트린 에슬랭 (1920년 ~ 1943년, 이혼)
디도 르누아르 (1944년 결혼)
파트너
마그리트 르누아르 (1932년 ~ 1939년)
자녀
알랭 르누아르 (1921~2008)

1. 개요
2. 상세
3. 생애
4. 기타
5. 대표작 일람



1. 개요[편집]


파일:external/www.book530.com/pierre-auguste-renoir-jean-renoir-.jpg
파일:external/fr.web.img4.acsta.net/18811469.jpg
아버지가 그린 어린 시절
청년 시절

감독은 평생 동안 단 한 편의 영화만 만든다. 그는 그걸 여러 조각으로 나누어 반복할 뿐이다.[1]

A director makes only one movie in his life. Then he breaks it into pieces and makes it again.


프랑스영화 감독. 20세기에 활약한 프랑스 영화를 대표하는 거장 감독이자, 역사상 최고의 감독 중 하나. 프랑스뿐만 아니라 타 영화계에도 지대한 영향을 끼쳤으며, 생전엔 존 포드와 같은 할리우드 거장들도 칭송을 아끼지 않았다.


2. 상세[편집]


프랑스와 미국을 오가며 활동했던 거장 감독.

시적 리얼리즘을 주도한 거장 중 하나이자, 희극비극을 오가는 뛰어난 실력으로 영화인들을 사로잡은 마성의 감독. 물 흐르듯이 유연하게 흐르는 카메라 움직임과, 화가로써 체득한 정교한 미장센 구성으로, 평면적인 영상을 찍어내던 당대 영화계에 혁파를 가했다.

동시대 프랑스에서 활약한 자크 베케르부터 시작하여, 누벨바그 세대인 프랑수아 트뤼포, 장 뤽 고다르, 클로드 샤브롤, 자크 리베트, 에릭 로메르, 아녜스 바르다, 자크 데미, 알랭 레네 등이 모두 장 르누아르에게서 직·간접적인 영향을 받았으며, 심지어 로베르 브레송조차 르누아르에 대한 칭송을 아끼지 않았다.

유럽의 루키노 비스콘티,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 로베르토 로셀리니, 페데리코 펠리니, 비토리오 데 시카 등도 그를 거장으로 대우하고 뒤따랐으며, 또한 영미권의 오슨 웰스, 마틴 스콜세지, 로버트 올트먼, 스티븐 스필버그, 마이크 리조차 르누아르에게서 크게 영향을 받았다고 여러 차례 언급했다. 한국에서도 홍상수, 봉준호 등이 르누아르를 존경한다고 언급하였다.

정성일은 2004년 5월 dvd21에 기고한 '영화 그 자체를 보여주는 장 뤽 고다르' 도입부 에서 르누아르의 위대함을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물론 고다르보다 영화적으로 존 포드가 훨씬 위대하다. 그건 안토니오니베르히만, 펠리니보다 장 르누아르가 훨씬 위대한 것과 같은 의미다. 그건 단지 존 포드와 장 르누아르가 그들보다 시간적으로 더 앞섰기 때문이 아니다. 장 르누아르와 존 포드는 영화에서 두 개의 이름이다(혹시 존 포드의 자리에 앨프리드 히치콕을 놓을 수는 있다. 하지만 다른 이름은 그 누구도 안 된다). 아무도 이들을 넘어설 수는 없다. 이들을 넘어설 때 영화는 전혀 다른 것이 될 것이다. 하지만 아직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내 생각에 아마도 그런 일은 앞으로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다만 브레송오즈, 로셀리니, 그리고 부뉴엘 정도가 그 두 사람(혹은 세 사람)의 이름의 비슷한 자리에 갈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보니 역시 안 되겠다. 그들의 영화는 매 번의 쇼트가 세상에 대한 그 어떤 총체적 사유를 던진다. 혹은 샷을 연결하여 신을 만들 때 그 자체로 항상 완전하다. 그건 더 나은 그 어떤 방법을 생각해 볼 수 없다는 뜻이다. 신과 신이 만들어내는 세상의 시간에 대한 주름은 더할 나위 없이 깊다. 그 안에서 우리는 결국 영화를 생각하는 것이다...."[2]

정성일은 미국 영화의 신화 존 포드와 같은 "영화의 신" 자리에 그를 놓았다. 정성일 평론가 특유의 만연체에 거부감을 갖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르누아르에 대한 다른 영화비평가들의 입장도 수식어구만 다를 뿐 영화사상 가장 위대한 감독 중 하나로 꼽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그 업적과 영향력으로 영화 커뮤니티 등지에선 그냥 영화감독 끝판왕 취급을 받고 있다. #


3. 생애[편집]


1894년 9월 15일, 화가 피에르 오귀스트 르누아르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3] 어렸을 적부터 그림과 문학에 재능을 보였는데, 그래서인지, 어렸을 땐 화가를 꿈꾸었다고 한다.

제1차 세계대전에 비행사로 종군하게 되었는데, 기계설계나 정비를 배우며 자연스레 카메라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영화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다. [4]

1924년 영화 〈물의 딸〉을 통해 감독으로 데뷔한 이후, 혁신적인 작품들을 내놓으며 활발하게 활동하였다. 특히 1939년 게임의 규칙은 전세계 모든 영화를 통틀어 평론가들에게 20세기 최고의 영화 Top 10에 항상 꼽힐 만큼 혁신적인 촬영 기법과 연출 기법을 동시에 사용한 걸작으로 꼽힌다.

허나 이때 당시엔 크게 주목받지 못해 고생을 했는데, 특히 자금난에 시달린 적이 많아, 종종 부족한 제작비를 충당하기 위해 아버지 그림을 많이 팔았다고 한다.

제2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1941년, 프랑스에서 미국으로 떠나 [5], 향후 얼마간 할리우드에서 다수의 영어 작품들을 내놓게 되었다. 이 시절은 그렇게 유명하진 않지만 남부 고딕에 관심을 기울여 늪지의 물 같은 수작들을 내놓기도 한다.

이후 앙드레 바쟁을 위시한 영화 평론가들로부터 재평가 받아 '프랑스 영화의 선구자'라는 상찬을 받으며, 다시 유럽 영화계로 복귀하게 되었다. 1960년대엔 자크 리베트가 방송국에서 인터뷰 다큐멘터리를 만들었는데, 이 역시 상당히 중요한 자료로 남아있다.

영화를 만들면서도 타 분야에서도 많은 활동을 하였는데, 특히 아버지에 대한 저술과 증언을 많이 남겨서[6], 향후 프랑스 미술계에 큰 보탬을 주었다.

1979년 2월 12일, 캘리포니아에서 심장마비로 별세했다.


4. 기타[편집]


르누아르 생전 영화계는 조감독 제도를 운영하여 후대 영화인을 교육시키는 '장인-도제' 교육법이 유행했는데,[7] 르누아르에게서 조감독을 한 사람들의 면면이 화려하다. 루키노 비스콘티, 로베르토 로셀리니, 자크 베케르, 자크 리베트, 샤트야지트 레이[8] 등. 특히 이들 중 이탈리아 출신들은 향후 네오 리얼리즘의 기수가 된다.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도 젊은 시절 르누아르의 조감독 생활을 하였다.

첫 부인과 얻은 아들인 알랭 르누아르는 중세 영문학 학자로 명성을 날렸다.

향후 영화계를 내다볼 줄도 알았는지, 〈미지와의 조우〉를 보고 "스티븐 스필버그는 시인"이라고 평했다고 한다. #
파일:2024학년도 6월 모의평가 영어 26번.jpg
2024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 6월 모의평가 영어 영역 26번 문항에 내용 일치 문제로 나왔다. 정답은 4번.


5. 대표작 일람[편집]


총 작품수는 40편이며,[9] 이곳엔 대표작들만 나열한다.

  • 무성영화 시기 (초년)

  • 유성영화 시기 (장년)
    • 1931년, 〈아기의 설사약〉[10]
    • 1931년, 〈암캐〉
    • 1932년, 〈교차로의 밤〉
    • 1932년, 〈익사에서 구조된 부뒤〉
    • 1934년, 보바리 부인
    • 1935년, 〈토니〉
    • 1936년, 〈지하세계〉
    • 1936년, 〈시골에서의 하루〉
    • 1936년, 〈랑쥬 씨의 범죄〉
    • 1937년, 위대한 환상
    • 1938년, 〈야수인간〉
    • 1938년, 〈라 마르세예즈〉
    • 1939년, 게임의 규칙[11]

  • 할리우드 시기 (중년)[12]

  • 유럽영화 시기 (말년)
    • 1954년, 〈프렌치 캉캉〉
    • 1956년, 〈엘레나와 남자들〉
    • 1959년, 〈코르들리에 박사의 유언〉
    • 1959년, 〈풀밭 위의 오찬〉
    • 1962년, 〈탈주한 하사〉[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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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 발언은 후대에 작가주의를 대표하는 문장이 된다.[2] 우연인지, 존 포드가 살아생전 딱 한 감독만 칭찬했는데, 그가 바로 장 르누아르다.[3] 꽤 늦둥이라서 피에르는 아들이 감독으로 활동하는걸 보지 못했다.[4] 본인은 미국 영화를 좋아한데다 아버지 모델이기도 했던 첫번째 부인 카트린 에슬랭Catherine Hessling (1890~1979)을 스타로 만들어주고 싶어서 영화감독이 되었다는 발언을 했다. 진담인지는 불명. 카트린은 실제로 장 르누아르 초기작 주역이기도 했다.[5] 아예 시민권을 획득해서 이 시기부터 프랑스에 거주하지 않았다. (다만 국적은 복수국적을 유지한 것으로 보인다.) 프랑스엔 영화 촬영 및 인터뷰 목적으로 방문했다고.[6] 때문에 화가 르누아르를 연구하려면 감독 르누아르가 남긴 자료를 무조건 거치게 돼있다.[7] 당시엔 영화 학교가 따로 없었으니, 이 방법이 최선이었다.[8] 인도에서 활동한 아시아 최고의 고전 영화 거장[9] 단편, TV시리즈 포함. 출처: 위키백과[10] 첫 유성영화[11] 2차대전 직전, 프랑스에서의 마지막 영화[12] 이때 작품은 모두 영어로 제작되었다.[13] 은퇴작. 이후엔 TV시리즈만 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