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거릿 대처/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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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생애
2.1. 총리 재임기
2.2. 실각과 사퇴
2.3. 사망
2.3.1. 사후 시위


1. 개요[편집]


영국 총리 마거릿 대처의 생애를 정리한 문서.

2. 생애[편집]


1925년 식료품 가게를 운영하는 중산층 가정의 딸로 태어났다. 전형적인 미들 잉글랜드 출신이라고 할 수 있다. 원래 성은 로버츠(Roberts). 아버지가 나중에 시장을 했지만, 이건 정계에 대한 진지한 도전보다는 지역 봉사에 가깝다. 원래 영국식 지방자치 시스템에서 각 지방의 자치권은 굉장히 강하지만, 지방자치단체장이나 지방의회 의원을 중앙 정계 진출의 관문으로 여기는 경우는 거의 없다. 그냥 그 지역에서 평판 좋은 유지들에게 그 지역의 일을 맡긴다는 입장에 가깝다. 따라서 시장이나 시의회 의원 같은 지방 정부의 직책을 정계 진출 도전으로 여기지 않는다. 여하튼 시장까지 지낸 것도 그렇고 그 시대에 딸을 대학에 보내준 것 등으로 보아 집안 분위기는 상당히 깨어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1943년옥스퍼드 대학의 서머빌 칼리지에 입학하였다. 전공은 화학. 서머빌 칼리지는 옥스퍼드 대학교 내의 이공계 중심의 여자대학이라 외롭지는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 다만 이공계 여학생답지 않게 정치, 특히 보수당에 큰 관심을 가졌다는 것은 정말 이례적이며, 보수당 청년위원회의 옥스퍼드 대학 지부를 이끌기도 하였다. 이러한 경력을 살려 졸업 후 24세에 처음으로 하원의원 선거에 출마했으나 낙선했다.

이후 부유한 집안의 아들인 데니스 대처와 결혼한 후 정치에만 본격적으로 관심을 쏟을 수 있게 되었고, 1959년 당의 눈에 띄어 결국 보수당 성향이 강한 런던 북부의 핀칠리 지역구에서 당선된다. 이후 승승장구하여 교육 장관을 거쳐 1975년 보수당 당수에 당선되었다. 대처는 2차대전 이후 복지국가와 일정수준의 시장개입을 수용했던, 지난 30여년간의 보수당 주류 정책기조를 비판하며 정부지출 억제, 작은 정부통화주의 정책으로 인플레이션을 잡을것을 주장했는데, 전자는 웨츠(wets) 후자는 드라이즈(dries)라고 지칭되었다.

2.1. 총리 재임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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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년 불만의 겨울 당시 노동자 총파업으로 영국 국민들은 일상에서 크나큰 불편을 겪게 되었고, 이러한 불만은 집권 노동당이 노동조합에 기반을 둔 정당이라 노조의 파업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분노로 이어졌다. 이에 중도층들은 대거 보수당 지지로 선회했고, 덕분에 1979년 영국 총선에서 압승하며 영국 총리로 선출된다.

재임 초기 1970년대 국제통화기금의 지원을 받을 정도로 영국 경제영국병으로 붕괴된 상황에서 영국 총리 자리에 오른 뒤 긴축 재정을 실시, 정부지출 증액을 억제했다. 또한 영국의 산업 구조를 재편하면서 비효율적이라는 비판을 듣던 석탄산업을 구조조정했고, 이에 반발하는 노조를 분쇄했다. 주로 70년대에 파업을 주도한 탄광 노조가 타겟이었는데, 산업혁명 당시 영국 산업 발전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것이 탄광업이었고, 따라서 탄광업이 가진 사회적 중요성 또한 컸었다. 이에 탄광 노조가 그만큼 사회적 영향력을 확보하게 되어 이들은 대처 이전에 총리를 갈아치울 정도의 비정상적인 영향력을 휘두르기도 하였다.[1] 그러나 일개 노조가 총리를 갈아치울 정도의 영향력을 가지는 것에 대한 국민적 반감은 극심했으며, 이와 함께 탄광 노조가 파업을 벌이는 과정에서 조직원들에게 보여준 비민주적이고 강압적인 면모들은 대처 입장에서 노조를 비판할 명분을 제공하기도 했다. 이런 구조조정으로 1980년대 초반에는 실업률이 전후 최고치까지 치솟기도 했었다. # 그러나 복지정책 중 주로 재취업 등을 통한 빈곤 탈출을 위한 지원은 이전보다 다소 강화되었다.[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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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거릿 대처와 엘리자베스 2세[3]
1982년포클랜드 전쟁 직전에는 강력한 산업 구조조정으로 인해 역대 영국 총리 중 최악으로 꼽히기도 하였으며 재선이 불가능해 보였다. 한때 대처 지지율 25%, 보수당 내각 지지율 18%에 이를 정도. 그러나 전쟁을 성공적으로 이끌어[4] 승전 직후 정권 지지도가 56% 정도까지 치솟았다. 이런 여세를 몰아 1983년 실시된 총선거에서 압승을 거두었는데 650석 중 무려 397석을 획득했다. 다만 포클랜드 전쟁 승리가 대처가 장기 집권을 한 결정적인 원인이기도 하지만, 경쟁 상대인 노동당이 노선 갈등 끝에 분열되면서 지지율이 반토막 난 것이 1983년 선거에 포클랜드 전쟁 승리와 함께 영향을 미쳤다. # ##

전쟁 승리가 좋은 떡밥인 것은 사실이나 만능은 아니다. 윈스턴 처칠제2차 세계 대전 승전 후 노동당의 클레멘트 애틀리에게 선거에서 패했고, 조지 H. W. 부시걸프 전쟁을 이겼지만 빌 클린턴에 패했다. 그러나 대처가 치른 포클랜드 전쟁은 앞에 명시된 두 개의 전쟁과는 본질적으로 달랐다. 포클랜드 전쟁 승리가 대처의 지지도를 상승시킬 수 있었던 이유는 당시 영국이 세계적으로 쇠퇴하고 있다는 인상에서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경제도 경제였지만, 외교에서도 영국은 수에즈 전쟁을 기점으로 새로 부흥한 초강대국들에게 밀리기 시작했다. 대영제국과 제2차 세계 대전 전까지의 세계 패권을 통해서 강대국의 맛을 본 영국 국민들에게 이런 '영국병'은 치욕적이었고 엄청난 심리적 충격을 안겨줬다. 더불어 계속되던 경제 불황은 영국 국민들에게 영국은 다시는 부흥할 수 없을 것이라는 비관주의에 빠지게 만들기에 충분했다.[5]

하지만 마거릿 대처는 이 모든 걸 포클랜드 전쟁을 통해서 해결했다. 일단 수에즈 위기 이후로 영국 정부가 계속해서 눈치를 봐야 했던 미국 정부가 처음엔 반대했으나, 대처는 굴복하지 않고 끝까지 로널드 레이건 행정부를 설득하여 영국 편에 서도록 만들었고[6], 국제법을 철두철미하게 지킴으로서 UN을 통한 정당성도 확보했다.[7] 무엇보다 전쟁에서 승리함으로써 영국의 국력이 건재함을 만천하에 보였고,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세계를 무대로 영국이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음을 입증했다. 이는 계속되던 경제 불황과 외교 실패로 낙담해 있던 영국 국민들에게 대영제국의 향수를 만끽할 수 있게 도와줬으며, 잃어버렸던 활력을 되찾아주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대처 본인도 전쟁 전까지는 당내부와 노동당으로부터 무능하다는 공격을 받았으나[8], 전쟁을 승리로 이끎으로써 이런 비판들을 모두 잠재웠고, 외교와 전쟁의 눈부신 성과를 통하여 영국병을 치료할 적임자는 대처 본인밖에 없음을 유권자들의 뇌리에 박히게 만들었다.[9][10]

이후 대처와 당시 재무장관이었던 나이젤 로슨(Nigel Lawson)의 경제정책이 결실을 맺어, 영국은 로슨 호황기(Lawson Boom)에 접어들었다. 덕분에 대처가 1987년 총선에서도 승리해 3기를 연임하게 되면서 영국 전후 최장 임기 총리라는 타이틀을 얻는데 성공했다.[11]

집권기에는 신자유주의 경제 원리에 입각한 과감한 정책을 펼쳤다. 국영기업들에 대한 민영화노동조합에 대한 강경한 자세, 그리고 대중교통, 공공주택, 산업보조금 관련 지출의 삭감을 통한 전체 정부지출 억제 등 이전의 노동당 정권들과는 다른 노선을 추진했다. 다만 통념과 달리 대처가 교육, 보건의료에 대한 예산을 삭감했다는 얘기는 사실과 다르다. 실제로 대처 임기동안 영국의 교육예산은 13.7% 증가했으며, 이는 전체 정부지출의 증가율인 12.9%보다 높다. 보건의료예산은 31.8% 증가했으며, 이는 대처 임기동안의 GDP 성장률인 23.3%보다도 높다. #

외교적으로는 아르헨티나의 포클랜드 무단 점령에 즉각적으로 대처해 영국의 위상을 지켜냈고, 공산주의 진영에 대한 강경한 자세를 견지했다. 철의 여인(Iron Lady)이라는 명칭도 사실 소련 언론에서 처음 사용한 수사로, 대처와 참모진들이 크게 만족해 본인도 사용하기 시작한 것이다.

1988년에는 '섹션 28(Section 28)'이라는 이름의 동성애 공론화를 범죄로 규정하는 법을 제정하면서 성소수자 혐오 논란을 일으켰다. 결국 해당 법은 스코틀랜드에서 2000년에, 잉글랜드와 웨일스에서는 2003년에 폐지되었다.#

워낙 명확한 명암 때문에 긍정론과 부정론이 양립하는 정치인이다. 즉 긍정적으로 평하자면 "소신 있고 결단력이 강한", 부정적으로 평하면 "독선적이며 노동자들의 고통에 둔감한" 정책의 정치인.

2.2. 실각과 사퇴[편집]


집권 말기에 유럽 통합에 관련된 논쟁으로 당내에서 지도력이 흔들리기 시작했으며, 인두세(Poll tax)[12] 도입에 이르러서는 여론이 등을 돌렸다.

대처는 가구가 사용하고 있는 부동산(임대와 자가 모두) 의 가치에 따라 세율이 올라가는 기존 세금 체계(rate)에 비판적이었고 이를 폐지하는 대신, 경제적으로 가장 효율적인 인두세로 대체하려 했던 것이다.[13][14] 대처는 이미 1970년대부터 rate를 폐지하고자 했으나, rate는 400년이나 유지된 제도라서 대처 내각도 여론을 보고 개편을 미루다가, rate를 폐지하고 인두세를 도입하기로 한 것이다. 인두세는 1989년부터 스코틀랜드, 1990년부터 잉글랜드와 웨일스에 도입되었다.

그러나 인두세는 즉각적인 반발을 불러왔다. 인두세는 대처 내각이 소득이 없는 실업자들에게까지 유권자 등록에 세금을 물리겠다고 나선 것과 다름없었기 때문이다.[15] 인두세는 소득의 유무와 상관없이 무조건 개인에게 일정액의 세금을 물리는 것이며, 이는 가난한 사람에게 치명적인 세제이다. 월급 100만원인 사람과 1,000만원인 사람에게, 10만원의 가치는 다를 수 밖에 없다.[16] 현대적인 과세 정책은 담세력이 높은 부유층에 더 많은 부담을 지우는 누진세제(progressive tax)를 추구하고 있기 때문에, 인두세 도입은 누진세제에 반하여 소득이 낮은 측의 엄청난 반발을 불러일으킬 수밖에 없었다.[17]

인두세 문제는 그녀의 총리직 사퇴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끼친 문제였다고 볼 수 있다. 당시 이에 대한 여론의 반발이 얼마나 컸던지, 폭동에 근접한 수준의 인두세 반대 시위가 벌어졌다. 런던의 반대 시위 도중에는 사람 실물 크기의 대처 인형을 가설 교수대에 매다는 퍼포먼스가 벌어지기도 했다. 그만큼 인두세에 대한 반발 여론이 컸던 것이다.

결국 1990년에 대처에 반발한 영국 보수당 의원들이 당 대표 선거를 실시한다. 이런 상황에서도 과반수 획득에 성공하는 저력을 보이지만, 단 4표 차이[18]로 1차 투표 당선(규정상 65%를 득표)에 실패했다. 이 1차 투표 당시에 대처는 영국을 떠나 있었고, 타 의원을 통해 대리투표를 했다. 대처가 당내 경선에 직접 참가해 얼굴을 비추고 의원들의 군기를 잡았다면 결과가 더 좋게 나왔을지도 모른다. 그만큼 자신의 리더십에 확신이 있었다고 생각했었을 수도 있다.

이유야 어쨌든 1차 투표에서 당선에 실패한 대처에게 1922 위원회(영국 보수당 운영위원회)의 중진들이 몰려와서 더이상 버티면 재미 없을 거라고 협박조로 통고했으며,[19] 이에 따라 그녀는 2차 투표에 출마하지 않기로 결정하고, 대표직과 총리직에서 사퇴한다. 그리고 1991년 5월 정계를 은퇴하였다. 그녀의 사퇴를 촉발한 인두세는 대처 퇴진 후 존 메이저 총리가 폐지했다.


대처의 보수당 당대표직 사퇴를 전하는 1990년 11월 22일 BBC 9시 뉴스.

1992년 남작 작위(케스티븐의 대처 여남작)를 받고 귀족 회의인 상원의원으로 활동을 재개[20]하였다. 대처가 받은 작위는 종신 작위(life peer)로, 세습이 불가능하다.[21]

이후 한동안 막후에서 영향을 발휘하기도 했지만, 고령에 접어들자 치매로 어려움을 겪었다.[22] 본인이 전기 집필을 원하지 않은 관계로 그녀 생전에는 공식적인 전기가 쓰이지 않았다. 대신 수상에서 퇴임한지 약 3년 후인 1993년에 회고록 <다우닝 가에서의 나날들>(Downing Street Years)을 출간한 바 있다.

2.3. 사망[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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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례 행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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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례식에 참석한 엘리자베스 2세 여왕. 2013년 4월 17일 엄수된 장례식에 윈스턴 처칠 이후 처음으로 왕실 자격으로 참석했다.

장례 퍼레이드[23]

2013년 4월 8일 오전, 뇌졸중으로 향년 87세로 타계했다. 그녀의 부고에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는 "여성 정치인의 본보기"라고 평가했으며 데이비드 캐머런 총리는 "위대한 지도자이자 위대한 총리, 위대한 영국인을 잃었다"고 애도했다.

긴축 재정을 밀어붙인 사람답게 자신의 장례식을 국장으로 치러지길 원치 않으며 행사 비용으로 "돈을 낭비하지 말라"고 한 고인의 뜻에 따라 '국장에 준하는 장례 의식(Ceremonial Funeral)'으로 세인트 폴 대성당에서 4월 17일 거행되었다. 이러한 의전은 다이애나 스펜서 전 왕세자비의 장례 때와 같은 것이었으며, 조의의 뜻을 표한 여왕 엘리자베스 2세와 부군 필립 마운트배튼 공을 비롯해 170개국 2,300명의 조문단도 참석했다.

장례 행렬이 영국 국회의사당과 세인트 클레멘트 데인스 성당을 거쳐 세인트 폴 대성당에 이르는 동안 육해공 3군이 관을 호위했고, 포클랜드 전쟁에 참전한 군인 10명이 대처의 관을 운구했으며 역시 포클랜드 전쟁 때 사용했던 대포 2문으로 조포를 쐈다. 장례식이 끝난 후 화장된 유해는, 왕립 첼시 안식원에 묻힌 남편 데니스 대처의 옆에 안장되었다.

2.3.1. 사후 시위[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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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거릿 대처의 장례를 반대하는 시위대
장례식을 얼마 남겨두지 않은 시점에서 보스턴 폭탄테러 사건이 발생해 영국 경찰이 보안 문제로 촉각을 곤두세웠으나 300여 명의 시위대가 대처의 운구 행렬이 지나갈 때 등을 돌리고 피켓을 든 채 시위한 것을 제외하면 큰 충돌 없이 차분하게 마무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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샴페인을 터뜨리는 글래스고 시민들
대처의 부고가 전해지자 스코틀랜드북아일랜드잉글랜드 북부 지방 및 노동자 계급 중심으로는 대처를 "그 암덩어리 년이 드디어 죽었다"며 환호하며 조롱하기 시작했다. 뉴캐슬에서는 대처가 죽었다는 소식에 거리에서 케이크를 자르고 폭죽을 쏘고 공개적으로 샴페인을 터뜨리고 풍악을 울리며 행진을 했으며, 리버풀에서는 마녀가 죽었다!고 환호를 했다.#

대처의 사망을 축하하는 의미에서 SNS 등지에서는 오즈의 마법사 영화판 삽입곡이었던 "Ding-Dong! The Witch Is Dead!"(딩동! 마녀가 죽었다!)라는 노래를 차트에 올리자는 운동이 벌어졌다.[24] 실제로 1주일만에 52,605장을 판매하며 UK 차트 2위까지 올라갔으며[25] 아일랜드 차트에서는 1위를 기록. 영국 내부에서는 "BBC의 주간 음반 차트 프로그램에서 이 곡을 진짜로 틀어야 하는가?"를 주제로 꽤 큰 설왕설래가 있었다. 결국 노래는 하이라이트 한 소절만 틀고, 보도국 기자를 호출해 왜 이 곡이 2위에 올랐는지 설명하는 것으로 대신했다. 당시 BBC 라디오 방송

전세계적으로 대처의 죽음에 있어서 잘 죽었다고 반응한 지역들이 적지 않았는데 그게 스코틀랜드, 북아일랜드를 비롯한 잉글랜드 이외의 평소 잉글랜드와 감정이 좋지 않던 영국의 지방과 아르헨티나, 우루과이, 파라과이, 페루, 볼리비아남미 국가들이다. 아일랜드는 대처 정권기에 피의 일요일 등 북아일랜드 분쟁이 극도로 치달아 영국과 아일랜드 곳곳에서 IRA의 테러가 벌어지던 상태였고, 스코틀랜드는 대처가 추진한 석탄산업 구조조정에 따른 실업 피해가 상당히 큰 지역이었고, 아르헨티나는 포클랜드 전쟁 패전국이니 당연한 것. 글래스고를 비롯한 스코틀랜드 지역에서는 대처의 장례식 날에 일부러 대놓고 마녀가 죽었다며 잔치까지 벌였다.[26] 일부 가게에서는 이렇게 좋은날 홍찻값은 무료입니다 등의 광고를 붙였다는 소문까지 있다.

그리고 사실 영국 내에서도 잉글랜드가 남북 갈등이 워낙 심하다 보니, 다른 지역뿐만 아니라 대처의 노조 탄압, 금융 산업 육성 정책 등에서 큰 피해를 봤던 잉글랜드 북부의 유수의 공업지대 출신 노동자 출신 사람들도 풍악 행렬에 앞장서서 동참했다. 특히 리버풀 사람들은 항만 노동자 파업 강경 진압 건 및 힐스버러 참사 당시 대처가 경찰을 싸고 돌았던 점[27] 때문에 대처를 싫어한다. 평소에도 대처는 축구를 사회의 악으로 표현하는 등 축구에 대한 부정적인 입장을 자주 드러냈고 이 때문에 영국 내의 축구빠들도 대처의 죽음을 좋아했다.

그리고 이 시기의 강경 진압 때문에 영국 국민이 느끼는 경찰의 이미지도 한국 군부독재 시절 무자비한 진압경찰들의 이미지 수준으로 크게 나빠져서 영국 경찰은 시민에게 친근한 경찰의 이미지를 회복하느라 많은 노력을 했는데, 대처로 인해 생겨난 경찰의 권위주의, 경찰에 대한 악감정이 어디 쉽게 사라지는 것도 아니고, 후임 총리들도 대처로 인해 몰락한 하류층들을 적절히 수습하지 못해 몰락 계층의 분노가 쌓여가다가 결국 이는 2011년 영국 폭동이라는 초유의 유혈사태로 폭발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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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당시 노조와 맞서 싸우다 물러난 총리가 대처와 같은 보수당의 에드워드 히스.[2] 소위 말하는 일하는 복지의 원조도 대처다. 이는 영국토니 블레어, 한국김대중 정부, 노무현 정부, 이명박 정부 등 역대 정부도 따왔다.[3]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은 신자유주의 경제정책의 부작용으로 인해 영국의 노동자들이 힘들어했던 것 때문에 대처를 마음에 들어하지 않아 아침마다 "오늘은 또 그녀가 얼마나 내 백성들을 괴롭게 하였는가?"라고 물으며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는 일설이 있다. 엘리자베스 2세아들 또한 포클랜드 전쟁에 참전했었다. 참고로 대처가 6개월 연상.[4] 포클랜드 전쟁은 대처 자신이 초래한 측면도 있었다. 대처는 긴축 재정을 한다고 국방비를 엄청나게 줄였고, 냉전과는 지리적 거리가 먼 포클랜드의 군 기지는 거의 경비병 수준으로 채워졌는데, 아르헨티나의 갈티에리 정권은 이걸 노리고 무력 점거를 시도한 것이었다.[5] As has been rightly observed, the full force of such an impact was due to the “psychological need” for « a success of some kind », that would put a stop to an entire series of post-WWII events experienced by Britons as failures and humiliations[6] And she soon got President Reagan to rally round. American air-to-air missiles followed.[7] Margaret Thatcher was able to remain within the boundaries designated by the United Nations Charter, which sanctioned the right to self-determination as well as that of self-defence. This position gained solid support from Resolution 502 of the UN Security Council, approved on 3 April.[8] It is a well-known fact that until the spring of 1982, Margaret Thatcher’s leadership was precarious[9] The possibility of fully profiting from the military victory also resided in Margaret Thatcher’s ability to exploit the patriotic re-awakening that the Falklands War had fostered.[10] At the same time, she linked this point with the necessity of a political leadership – her own – that could achieve a definitive rupture with the establishment held responsible for the decline.[11] 최장 임기는 20년 넘게(1721~1742) 총리를 한 로버트 월폴 경이다. 물론 이 때는 의원내각제나 민주주의가 확립되지 않아, 총리가 의회의 신임을 잃어도 왕의 신임으로 자리 유지가 가능했던 시절이었다.[12] 정식 명칭은 Community Charge. poll tax라는 말은 반대자들이 이 세금을 와트 타일러의 난의 계기가 된 인두세에 빗댄 것에서 비롯되었다.[13] 경제학에서는 세금이 개인의 소비 선택에 왜곡을 가져와 비효율을 초래한다고 보며, 이를 학문적으로 사중손실이라고 한다. 따라서 사중손실이 없는 과세를 가장 바람직하다고 본다. 그러한 세금을 중립세(lump-sum tax)라고 부르는데 인두세가 대표적인 예시다.[14] 하지만 인두세의 사중손실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며, 대표적인 사중손실은 사람 수에 따라 과세되기 때문에 장기적으로 출산율이 줄어든다는 점이다.[15] 영국은 투표하거나 출마하려면 관청에 가서 유권자 등록을 해야 한다. 안 하면 투표나 출마가 불가능하다.[16] 대처의 인두세도 가난한 사람에게는 면제되었지만, 이에 해당하는 사람은 극히 적었다.[17] 현재 한국의 주민세도 인두세 논란이 있지만, 한국은 대략 가구당 수 만 원 수준인 반면, 당시 대처 정부가 도입한 인두세는 수 십만 원 수준이었다.[18] 아무도 예상 못했던 마이클 헤즐타인이 다크호스로 떠올라서 표가 깎였다.[19] 흔히 이런 식으로 압박을 가하려 중진들이 몰려오는 걸 '회색 수트의 사나이들(Men in Grey Suits)'이라고 부른다.[20] 영국 상원은 대처 시대에 오면 사실상 대법원 기능(그나마도 토니 블레어 시대에 오면 대법원이 분리된다)과 몇몇 자잘한 기능을 제외하면 빛 좋은 개살구 수준이었다. 영국에서 총리 사임 후 작위를 받았다는 건 어떤 의미에선 수고했다는 경의의 표시이기도 하지만 다르게 보면 점잖게 은퇴하라는 뜻이기도 하다.[21] 대신 마가렛 대처의 남편 데니스 대처가 세습 가능한 준남작 작위를 받았다. 2003년 데니스 대처가 죽은 이후에는 아들인 마크 대처가 세습하여 현재 2대 준남작으로 있다.[22] 대처의 딸 캐럴은 2008년 회고록에서 “치매에 남편에 대한 그리움까지 겹쳐 어머니는 아버지가 돌아가셨었다는 사실을 종종 잊으셨다.”라고 적었다. 대처의 생애를 다룬 영화 <철의 여인>(2012)에서 노년의 대처가 이미 사망한 남편의 환영을 보는 장면들이 나오는 것도 이를 반영한 것이다.[23] 참고로 군악대에 의해 연주된 곡은 멘델스존의 장례 행진곡과 쇼팽의 장송 행진곡.[24] 이 노래는 도로시가 회오리바람에 휘말려 오즈의 나라에 처음 도착했을 때 타고 온 집으로 마녀를 깔아뭉개 죽였고, 마녀의 압제에서 해방된 동쪽 나라의 먼치킨들이 기뻐하며 부르는 노래다. 심지어 작중에는 검시관까지 나와 확실하게 죽었다며 사망진단서까지 발행해 주는 장면까지 있다.[25] 당시 1위는 Duke Dumont의 Need U 100%가 차지했다.[26] KBS의 국제 시사 프로에서 실제로 방송된 내용이다.[27] 이 사건은 영국 경찰의 과실임이 판명되었다. 자세한 건 문서 참고.